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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치수사업 유적소개
우리나라 가장 오랜 3대 저수지는 의림지와 벽골제 그리고 수산제입니다. 여기에 의림지와 수산제의 기록을 비롯하여 위도의 간척사업에 관한 사항을 싣습니다.
(1)충청북도 제천시 의림지
의림지 사진(좌-제천시 홈페이지 내 사진 자료, 우-동묵(안) 2002. 3. 제공)
<의림지 사진>(2002. 6. 11. 태서(익). 자료 조사. 제공)
▣ 태서(익) 자료 조사 및 제공 내용
- 의림지(義林池)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축조(築造)된 저수지로서 본래 임지(林池)라고 했다고 한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11년(992)에 군현(郡縣)의 명칭을 개정(改正)할 때 제천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泉)이라 별칭하였으니 그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義)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1279년(충렬왕 5)에 김방경(金方慶)이,세종조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1919년에는 지방인사 이종진(李鐘震)의 발기로 대개축이 거듭되어 현재도 훌륭한 용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 영환씨(문) 자료 조사. 제공 내용 저수지란 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물의 과다 또는 과소를 조절하는 인공적 수리시설의 한 종류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막연하게 제언(堤堰)이라 불렀으나 수리 시설의 기능이 분화되면서 최근에는 보(洑)·방조제(防潮堤) 등과 구분하여 저수지라 불리게 되었다.
저수지는 지표수 유량을 조절하여 수력발전, 상수도, 공업용수로도 사용할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개발할 수 있는 다목적성을 띠어 수자원의 종합적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수리 시설은 벼농사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어 왔다. 그에 따라 벽골제를 시작으로 국가적 규모의 큰 저수지가 여러곳에 축조되었다. 그중에서 문헌상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충청북도 제천읍의 의림지(義林池)이다.
의림지는 고을을 다스리던 박순(朴淳)이 축조하고 그의 아호 의림을 따서 의림지라 이름한 것이나 일설에는 540년 악사 우륵이 유지(柳池)라 불리던 소규모 저수지를 개축한 것이 의림지의 시원이라는 설도 있다. 의림지의 규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방의 길이 530척으로 400결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 하였고, 현재도 물의 깊이가 12㎡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194년(명종 24) 개축할 때에 발견된 축조 당시의 기초공사를 보면, 제방 내부의 기초가 흙을 옹기 굽듯이 3층으로 다져 쌓아 누수를 막고, 배수구의 수문은 수톤의 거석을 쌓아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거석에는 '朴義林'이라는 음각글자가 있었다 한다.
1279년(충렬왕 5)에 김방경(金方慶)이,세종조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1919년에는 지방인사 이종진(李鐘震)의 발기로 대개축이 거듭되어 현재도 훌륭한 용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천시 홈페이지 내 기록내용>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11호인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습니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자를 붙여 "의림지" 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왕 (540∼575)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871m)에서 흘러 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못의 시초라고도 하며, 그후 700년이 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위를 3층으로 석축을 해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관이 넘을 정도의 큰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박의림"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호반둘레 약 2㎞, 호수면 158,677㎡, 저수량 6,611,891㎥,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몽리면적은 289.4 정보이며, 보수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합니다.
현재는 수리시설 보다는 유원지로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경승지로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백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어로 각광받고 있는 명물이며, 순채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만큼 유명했지만 1914년 의림지 보수이후 멸종되어 제천시 농업기술센타에서 복원코자 연구·시험재배하여 2001. 5월에 이식하였습니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于勒)"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 연암, 용바위)와 마시던 물인 "우륵정"이 남아 있습니다.
(2)수산제(守山堤) (2007. 7. 12. 항용(제) 제공) <수산제의 유적 모습>
가) <新增東國第 26卷 密陽都護府>에서
수산현에 있다.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김방경(金方慶)이 이 뚝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한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 마름, 귀리가 보이는 끝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문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나) <야후 코리아, 야후 백과사전>에서
경상남도 밀양(密陽)에 있었던 관개용 저수지. 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에 이르렀다. 벽골제·의림지와 함께 3대저수지로 꼽힌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으로 현재의 하남읍(下南邑) 수산리(守山里)·귀명리(貴明里) 지역과 초동면(初同面)의 검암리(儉巖里)·금포리(金甫里)에 걸치고 있다. 이 저수지는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수산제 주위 양동리·귀명리·동촌마을의 산등성이에서는 고인돌[支石墓(지석묘)]·돌덧널무덤[石廓古墳(석곽고분)]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조개더미[貝塚(패총)]가 발견되고 있으며, 돌칼[石劍(석검)]과 4∼7세기 무렵의 유물인 붉은토기[赤色軟質土器(적색연질토기)] 등 신라토기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
다) <해양수산부 홈페이지>에서
위치 :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 문의 : 055-359-5637
삼한시대 농경문화의 유적으로 벼농사를 위하여 축조된 저수지이며 세조 13년에 경상도 제찰사 조석문이 부근 9개 고을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수축하고 국둔전을 만들었다.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제와 더불어 삼한시대의 대표적 저수지이다.
라) <엠파스 백과사전>에서
경상남도 밀양에 있었던 관개용 저수지. 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가 되며 벽골제·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저수지로 불린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으로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귀명리 지역과 초동면의 검암리·금포리에 걸치고 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고 하였는데 ‘미동’은 우리말로 물동·물둑(제방)을 뜻한다.
〔축조시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벼농사를 위주로 한 이러한 지명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저수지는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고적조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에 김방경(金方慶)이 제방을 쌓고 관개를 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변 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방의 길이가 728보이고 당시에 이미 제방이 무너졌지만 고쳐 쌓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에는 저수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밀주지 密州誌≫·≪밀주구지 密州舊誌≫·≪교남지 嶠南誌≫ 등에서도 “못의 가운데 죽도(竹島)라는 작은 섬과 오산(鰲山)이 있고 못 안에 갖가지 풀이며 연꽃과 세모마름 등이 자생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이 지역사람들이 ‘대섬’과 ‘자라목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남아 있다.
1463년에 제방을 모으고 국둔전(國屯田)으로 만들었다가 200결(結)이나 되는 경작지의 반은 평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나머지 반은 지금은 없어진 봉선사(奉先寺: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뒷산 중턱에 ‘절티골’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던 큰 절)에 주었다가 성종 때 다시 환속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 황폐하여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인 1928년까지 주위에서 쉽게 이용될 수 있었던 황토흙으로 된 제방이 수산리 471-4번지에서 양동리 465-2번지에 걸쳐 약 1,040m 정도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저수지는 논으로 변하였다.
이곳의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지역민들은 ‘안강’이라고 부르고 있음)물이 국둔전으로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양수와 배수를 위하여 수산리 524-1번지 부근 자연암반 밑으로 수문을 내었는데, 그 수문의 흔적이 흙 속에 묻힌 채 지금도 남아 있다.
국둔전지 안의 저지대에는 주위의 산으로부터 모여든 물이 고여 자연적으로 저수지가 되었고 이 물을 이용하여 제방 안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논밭에 농사를 하였으며 저수지에서는 물고기도 잡고 연근(蓮根) 등을 채취할 수 있었다.
수산제 주위 양동리·귀명리·동촌마을의 산등성이에서는 지석묘(支石墓)나 석곽고분(石廓古墳)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조개무덤〔貝塚〕이 발견되고 있으며 돌칼〔石劒〕과 4∼7세기경의 유물인 적색연질토기 등 신라시대 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주목되는 곳이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世宗實錄地理志, 東國文獻備考, 密州誌(이익성 소장본), 密州舊誌(유창목 소장본), 嶠南誌(鄭源鎬, 1940), 韓國水田의 起源(李丙燾, 一潮閣, 1956), 朝鮮全圖(朝鮮總督府, 1924)
(3)위도(葦島):
근거 : 新增東國與地勝覽 第52卷. 定州牧. 山川
주의 동족 50리에 있다. 고려 고종 때에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여러 성을 공격 해오니, 위도에 들어가 은신하는데 그 곳이 10여리나 되었다.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한데 바다의 조수가 밀려 경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이에 방경은 둑을 쌓고 파종하여 백성들이 처음은 고생하였으나 가을철 곡식이 익자 사람들이 믿고 활발하였다. 섬에 또 우물과 샘이 없어 항상 육지에 가서 물을 긷는데 가끔 잡혀 포로가 되자, 방경은 빗물은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도 없어졌다.
고종 14년에 섬에 누렁 뱀이 있는데 크기가 주혈(株穴)만한데, 가산( 山)체 초동(樵童)이 있어 지나면 부르는 소리가 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없어 가보면 뱀이었다. 그런데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섬 사람들이 멀지 않아 난을 일으킬 것이니, 돌아가 감창(監倉)에게 알려 절대로 근신하게 하라."하였다. 감창사는 이상하였지먄 비밀로 하였는데 주(州)의 사람들이 몽고에 투항하였다..
(4)전북 정읍시 고부면의 눌제(訥堤)
가) <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에서 (2002. 11. 27. 주회(안) 제공)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 (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 <전 략>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에는 개답이 국가적으로 장려됐고 벼농사가 널리 퍼졌다. 가뭄에 대비한 저수지의 개축과 증축등 수리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여러차례에 걸친 전란, 특히 몽고의 침략에 따른 여파로 경지가 피폐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국가적 노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고려 고종22년 (1235년) 몽고군에 밀려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구축한 해안 제방에 대한 기록이 <동국문헌비고>에 전해지는 등 제방축조의 토목기술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방조제를 쌓고 논을 개간하는 최초의 간척사업도 고려시대의 기록에 남아 있다.
간척사업은 고려시대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라는 이에 의해 ♠강화도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고려사절요> 그는 강화도 뿐 아니라 ♠정주, ♠밀양 등 전국 곳곳에서 간척사업과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다녀 제방축조 토목기술 전문가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전북 고부의 ♠눌제도 그가 개축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지>에 전해온다. ---世傳高麗時金方慶因舊修築---
<중 략> 이앙법이 실시된 데에는 제언(堤堰, 방죽)과 같은 수리시설의 확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 태종15년(1415년)에 벽골제를 수축했으며 성종7년(1476년)에는 전국 각지에 제언을 만들었다.
<중 략> <눌제> <동국여지지> 고부군 산천조에는 ---눌제호는 군의 8리 서쪽에 위치하며 율호(律湖)라고도 한다. 둑의 길이가 1,200보에 이르며 주변이 40리에 이른다. 김제 벽골제 다음으로 큰 호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읍시 고부면 관청리에서 줄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가 고부 눌제의 옛 둑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해발고도 25m의 구릉을 가로질러서 오늘날의 고부천 상류를 막은 것이다. 눌제 역시 벽골제와 비슷한 시기인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축조연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광대 사학과의 나종우 교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고부의 역사적 변천>이라는 논문에서 눌제는 애초 저수지의 제방이 아니라 방조제로서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즉 눌제가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대략 3세기 후반까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눌제는 고려시대 ★김방경이 개축했으며 조선초에는 民田으로 용도가 변경됐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부군 고적조(古跡條)에 있다. 세종 즉위 당시만 해도 눌제는 1만여결의 농경지를 몽리구역 내에 두고 있었다. <세종실록, ---古阜訥堤下可耕萬餘結---)
세종대에는 또 눌제의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는데 11,580명의 인력이 동원돼 1월 상순부터 2월 상순까지 근 1개월간의 공사를 통해 제방 3,480척을 정비했다. <세종실록> 그러나 세종2년 8월 눌제는 홍수로 인해 상당부분 훼손되었고 이런 이유로 제언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는 의욕도 점차 줄어 마침내 경지로 전환된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실록>에는 당시 전라관찰사가 고부군 일대에 큰 비가 내려 눌제가 훼손되고 제방아래 밭 600여결이 침수됐다는 보고가 기록돼 있다.
<후 략>
나) 야후 코리아, <오마이 뉴스>에서 (2007. 7. 12. 항용(제) 제공)
정확한 축조 시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따르면 눌제는 삼한시대, 마한(馬韓)에 축조되어 김제의 벽골제,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제방을 막는 삼호(三湖)로 불렀으며 호남지방이란 지명을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눌제(訥堤)가 있던 곳에는 현재까지도 과거의 그 흔적을 짐작케 하는 고부천(古阜川)이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은 인근의 영원면과 부안의 백산면을 지나 동진강으로 흐른다.
이곳에 호남의 지명을 낳은 눌제유지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에는 "고부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이곳 눌제의 규모는 제장(堤長)이 일천이백보(1보는 약 1.5m)이고 주위는 40리나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눌제가 1420년 세종 원년에 홍수로 유실되어 농지 600결(현재의 30만평)이 침수하는 등 농경지 침수 문제가 거듭되자 이듬해 당시 감찰사가 근본적인 제방 폐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세종은 "8500명만 인원을 투입하면 될텐데 폐제는 당치않다"고 주장, 전 현감인 곽휴를 시켜 다시 눌제 제방을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에도 빈번한 침수피해가 발생해 이곳 주민들의 원성이 잦아 중종 초기에 폐제, 논으로 변했다. 현재 이곳은 광활한 평야지로 변해 정읍의 특산품인 단풍미인 쌀을 생산하고 있다.
(5)간척사업의 역사
고려 및 조선시대의 간척 우리나라의 논농사 기원은 BC 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간척사업은 고려 고종 22년(서기 1235년)에 몽고병이 침입하였을 때 병란을 피하여 강화도로 임시도읍을 옮긴 후 해사방어를 목적으로 연안제방(沿岸堤防)을 구축한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식량생산을 위한 농지조성목적의 간척사업은 고려고종 35년(서기 1248년)에 몽고병란시 부족한 식량을 조달할 목적으로 당시 병마판관이었던 김방경(金方慶)으로 하여금 안북부(지금의 평안남도 安州, 청천강 하구)의 갈대섬(葦島)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한 후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는 군량미 확보와 식량생산을 목적으로 강화, 김포 등에 간척사업을 시행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선조 정종 때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는 간척사업을 위한 제방 및 배수갑문 축조방법에 대한 기술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6)충렬공의 치수사업 <밀양의 오산과 자라목> (2006. 12. 30. 태영(군) 제공)
오산(鼇山)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에 진을 치고 둑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군량(軍糧)을 갖춘 곳이다.
자라목 : 초동면 두암리 모래들 마을에서 초동면 금포마을 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모래들 마을 뒷산에서 동쪽으로 볼록하게 나와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서 마치 자라목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밀주지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산라왕이 이궁에 와서 수산제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이 곳에서 머물던 곳이었다고 하고, 고려시대에 김방경이 려.원 합군과 함께 일본으로 원정하기 위해 이 곳에서 진을 치고 군수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밀주징신록에는 오산조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는 낚시터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됨.
위 치: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동산리 오산 교통정보: 밀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남행 버스로 30여분, 오산에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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