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 현지 답사 내용 (2003. 4. 17. 안사연 답사. 사이버 연구회 내 자료 중 일부 인용) ▣16:02∼16:02 구진마을(검모포) 답사
내소사 관람 직전 우리 일행은 태서(익) 종친께서 변산네트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신 것을 떠올리며 부안군에 전화로 검모포 위치를 긴급 문의하였습니다. 검모포는 현재의 곰소읍 인근의 구진마을이라는 군청 공무원의 말대로 길을 물어가며 구진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곰소에서 구진마을로 가실 경우에는 곰소 끝부분쯤에 해당하며, 격포 쪽에서 가실 경우에는 '곰소모텔식 한증막' 간판을 지나 차로 3분 정도 가시면 오른쪽에 <구진마을>이라고 적힌 작은 이정표를 보실 수 있습니다. 표석이 작아 지나치기 쉬운데 마을 앞으로 도로공사 중이며, 시멘트로 지은 정자가 있습니다. 마을 안쪽에는 바닷가를 따라 민가가 늘어서 있는데 주민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바다를 메워 넓은 벌판이 생겼습니다. 바닷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습니다. 아무래도 날씨가 나빠지려나 봅니다. 귀가하기까지 비가 내리시지 않기를 빌어 봅니다.
우리 일행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다음 검모포 단서도 찾을 겸 충렬공 할아버지 체취를 느낄 겸 이곳 노인들을 찾아나섰습니다.그러나 대부분 인기척이 없고, 빈집도 꽤 많은 듯했습니다. 여러 집을 살펴보다가 어린아이가 있는 집으로 들어서니 할머니들이 모여 심심풀이 화투를 치고 계셨습니다. 칠순이 넘은 듯한 할머니께서는 검모포는 생전 처음 듣는다는 말씀과 함께 옛날에 큰 배를 지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답합니다.
다시 다른 집으로 들어가니 노부부가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얼른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여서 태어나 일흔일곱 먹었소만 검모포도, 큰 배를 지었다는 말도 처음 듣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집 뒤로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소사에서 천년을 묵었다는 나무를 방금 보고 나왔는데, 이 나무도 그 정도는 돼 보였습니다. 고목을 올려다보며 그 옛날 충렬공 할아버지를 떠올려 봅니다.
(2) <검모포 관련 자료 소개> (2003. 4. 27. 태영(군) 소개)
충렬공 일본 원정 전선 축조지 검모포 탐방(전남 부안군 곰소읍 구진마을>
<검모포 전경과 축조 예상지>>
진서라는 땅 이름은 진영(鎭營)이 있는 곳의 서쪽이란 뜻이다.지금의 진서면 곰소항의 동쪽 구진마을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서해를 지키는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검모진영이 있었다.곰소의 앞바다를 검모포라 하였으며 서해바다의 군사적 요충지로 1274년 고려 충선왕 1년에 여몽동정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그 수송선과 영이 있었던 마을을 구진이라 하고 새로 옮겨진 곳의 마을 이름을 진서리, 또는 신진리라 하였으니 진서라는 땅 전함 900척을 건조했던 곳도 장흥의 천관산과 이곳 변산의 검모진영이었다. 그 후 1812년에 무슨 사유에서 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검모진영이 지금의 진서마을 구 초등학교 자리로 옮겨 졌으며, 이로 인하여 종전의 검모포진 이름은 1812년 이후에 역사.문화의 변천과정에서 생성된 땅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진서면은 조선시대에는 좌산방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일제가 군면을 통합 개편하면서 우산방과 병합하여 산내면이라 하였으며, 줄포항이 토사의 유입으로 점차 폐항 되어감에 칠산의 황금어장에서 잡히는엄청남 해산물의 집하 어항이 절실하게 되어 1938년에 곰소를 중심으로 인공어항을 개설하니 염전까지 생겨나면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산물의 유통과 인구의 급증으로 진서지방의 발달이 활발하여 지면서 1983년 2월15일자로 산내면에서 분리 독립하여 진서리, 석포리, 운호리 등 세 법정리를 중심으로 23개의 행정리로 진서면이 생겨난 것이다. 진서면에 남아 있는 옛 우리말 마을 이름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살펴본다. 거무진말: 거무진 마을. 구진마을 .검모포진영이 있는 마을이란 뜻. 곰소의 동쪽해변 마을이다. 마을의 서편 산등성이에옛 진영의 관아건물이 들어섰던 자리가 남아있다.
--<부안의 옛이름>사이트 소개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