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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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숙공 소개 및 연보

2. 주요 사진자료

3. 기타 주요 자료 소개

1) 친필서찰

2) 영원산성

3) 충효열 삼정문

4) 신도비명

5) 충혼비 소개

6) 교지 소개

7) 영원산성 광고물

8) 충렬사 복원

4. 문숙공 시문관련 소개

5. 각종문헌 자료

6. 주요 역사 탐방

1) 영원산성

2) 호국사

 

본문

p11.png 1. 문숙공(휘 悌甲) 소개 및 연보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문신. 의사(義士). 字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제학공(휘 익달) 후손으로 영상공 휘 석(錫)의 아들. 이황 (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6) 정언 (正言),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 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을 만나 왜장(倭將)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주민들을 이끌고 원주의 요새인 영원산성(令鳥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전주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68세).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그 후 다시 1670년(현종11). 2. 7일에 원충갑, 김제갑, 원호의 원주 사우에 충렬이란 편액이 사액되었으며, 1711년(숙종37년)에  문숙(文肅)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재추증 되었다. 원주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는데 1866년(고종3)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 사액인 <충렬사>현판은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에 보관하고 있다.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의 제각에 제향(祭享) 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묘소는 1988. 10. 5. 괴산읍 능촌리로 이안하였다.

 

<문숙공 연보> (의제공 비문 및 조선왕조 실록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0. 16. 항용(제) 제공)

 1. 1525(중종20). 5. 17. 丑時 1세 : 충북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에서 부친 金錫과 모친 행주기씨 사이에서 4자로 출생(신도비에는 한성(漢城) 남쪽 성곽 밖 반석방(盤石坊)에서 출생했다고 기록됨)

 2. 1531(중종 26) 7세 : 앞산의 황소를 보고 “黃牛繫靑山, 靑山一點黃”(황소가 청산에 매어 있는데, 청산에 한 점이 누르구나)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함.

 3. 1535(중종 30) 11세 이후 : 외숙부 기대복(奇大復)과 고모부 黙齋 이문건(李文健)에게서 수학함

 4. 1542(중종37) 17세 : 西坡 윤개(尹漑)의 녀와 혼인. 이후 장인으로부터 수학.

 2. 1544(인종1). 19세 이후  : 형 龜巖 충갑(忠甲)을 따라 안동의 도산서원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

 3. 1553년(명종8) 29세 :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

 4. 1555년(명종10). 12. 21.  31세 : 정자(正字)

 5. 1558년(명종13). 7. 27, 34세 : 병조좌랑

 6. 1562년(명종17). 38세 : 옥천군수

 7. 1565년(명종20). 41세 : 군기시첨정사재감부정 사도시장락원정(軍器寺僉正 司宰監副正 司導寺 掌樂院正)

 8. 1566년(명종21). 42세 : 선위왜사(宣慰倭使)로 부산에 갔다온 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제수

 9. 1567년(명종22). 43세 : 남양부사(南陽府使)

10. 1569년(선조2). 45세 : 종부사정 사헌부지평(宗簿司正 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전적직강사성군기사사 정사간원정언사온서령승문원판교(成均館典籍直講司成軍器寺寺 正司諫院正言司醞署令承文院判校)

11. 1573년(선조6). 3. 11. 49세 : 정언 (正言)

12. 1578년(선조11). 54세 : 가을에 당상(堂上)에 진급(進級)하여 첨추(僉樞)가 되어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옴. 황제가 특히 명하여 보시고 비단 4필 말 1필 상홀(象笏) 1척을 하사(下賜)하시었다.

13. 1579년(선조12). 55세 : 연경에서 돌아옴. 임금이 관온(官醞)과 호피담요를 특사하시고 동부승지를 제수. 곧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보냈다가 다시 진주목사로 바꾸었다. 겨울에 병조참지 예조참의(兵曹參知禮曹參議)

14. 1581년(선조14). 4. 4. 57세 : 봄 우부승지. 대사간, 여름에 충청감사

 1582년 : 봄에 우부승지. 여름에 황해도 관찰사.

15. 1583년(선조16). 8. 6. 59세 : 좌승지, 사직. 집에 돌아옴.

16. 1587년(선조20). 4. 1. 63세 : 창성부사

17. 1588년(선조21). 11. 16. 64세 : 창성부사 체직

18. 1589년(선조22). 65세 :  광주목사

19. 1590년(선조23). 66세 : 황해도 관찰사

20. 1591년(선조24). 67세 : 대사간(大司諫)을 제수 받았다가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전보. 사직 요청, 원주목사.

21. 1592년(선조25). 8. 25. 68세 : 원주목사 전사.

22. 1592년(선조25). 10. 21. 68세 : 원주목사 죽음 비변사 보고. 이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증직.

23. 1670년(현종11). 2. 7. : 원충갑, 김제갑, 원호의 사우에 충열이란 편액 사액.

24. 1711년(숙종37년) :  문숙(文肅)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재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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