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5) 봉안 위패 소개
(1)比安公 諱 仁甲 神主(비안공 휘 인갑 신주)--13世
先祖考 贈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 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官 行朝散大夫 比安縣監 安東鎭管 兵馬節制 都尉府君 神主 |
先祖女比 贈貞敬夫人 南陽洪氏 神主 |
*비안공. 휘 인갑(仁甲) : 1534년(중종29)--1594년(선조27).
자는 선초(善初). 충북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 출생. 어려서 부친(領相公 諱 錫)의 작고로 나이 18세에 비로소 학문 시작. 1568(선조1. 35세)에 진사(進士) 급제. 1578(선조11)년에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從六品),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을 거쳐 1586년(선조19)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영산현감(永山縣監), 1590년(선조23. 57세)에 비안현감(比安縣監)이 되었다.
1592년(선조25.59세) 임진왜란 발발 후 괴산 향가(鄕家)로 돌아왔다가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으며 수(壽) 61세로 몰(歿)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선영하에 있다. 후에 자(子) 시양(時讓:忠翼公. 호-荷潭)의 귀(貴)로 이조판서 지의금부사(吏曹判書 知義禁府事)에 추증(公 歿後 33년뒤인 1627년) 되었으며, 9년 뒤(1636년. 인조 14)에 자(子) 시양(時讓)이 청백리에 녹선되자 다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從一品)에 추증되었다.
<교남지와 그 내부에 실린 비안현 역대 현감 인명록>
<의성군지(1987. 10. 의성군 간)와 내부의 비안공 기록 내용>
<묘비 건립 후의 묘역 사진> (2005. 4. 24. 항용(제) 제공)
<신 묘비문>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仁甲이고 字는 善初이시다. 安東金은 우리나라에서 이름 난 姓氏로 中始祖는 上洛郡開國公이신 諡號 忠烈 諱 方慶이신데 新羅 敬順王의 後孫으로 高麗朝에 큰 功勳을 세워 安東을 食邑으로 받으셨는데 子孫들은 이로써 貫鄕을 삼게 되었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 諱 縝, 寶文閣直提學 諱 益達, 左司諫 諱 顧, 司憲府監察 諱 孟廉을 지나 典農寺主簿 諱 哲鈞은 讓寧大君의 사위로 公의 高祖시고, 贈左承旨이신 諱 壽亨은 公의 曾祖이시다. 祖 諱 彦黙은 贈吏曹叅判이시고, 父 諱 錫은 成均進士로서 학문 기개를 崇尙하여 장래가 촉망됐으나 己卯士禍(一五一九年)로 槐山에 은둔하였는데 子 悌甲의 推恩으로 議政府領議政에 追贈되셨으며, 母 贈貞敬夫人 幸州奇氏는 持平 贈 都承旨 逈의 女로 큰 婦德을 갖추셨다.
公은 一五三四年(中宗二九) 二月 十七日 忠北 槐山郡 文光面 田法里에서 領相公의 五子 중 季子로 出生하셨다. 生後 두 달 만의 父親喪으로 失學하다가 18세에 비로소 勉學하니 곧 주위 벗들로부터 크게 追崇받으셨다. 三十五歲(一五六八)에 進士에 오르고, 四十五歲(一五七八)에는 吏判 李後白의 추천으로 長水道 察訪이 되셨다가 濟用監 直長에 오르셨고, 五十三歲(一五八六)에 軍資監 主簿를 거쳐 永山縣監이 되셨다. 永山은 빈약한 곳이나 公께서 正道로써 다스리니 吏屬과 百姓들은 公을 사모하였다.
五十七歲(一五九0)에는 比安縣監이 되셨는데 二年 뒤 壬亂으로 사직한 후 白衣從軍하시다가 槐山 先塋 아래에서 病으로 一五九四年(宣祖二七) 五月 九日 六十一歲로 別世하셨다.
贈貞敬夫人 南陽洪氏는 一五四一年 一月 十八日에 出生하셨는데 漢城 庶尹 贈左承旨 以坤의 女로 兵曹判書 吉旼의 七代孫이시다. 治家에 극진한 婦道로써 하셨다. 壬亂을 만나 木川으로 피난 가셨다가 서울의 자녀들과 嶺南의 公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病을 얻어 그 해 十二月 十四日 五十二歲로 別世하셨다. 子 時說 等이 奉喪하여 왔다가 이듬 해 겨울에 公과 함께 槐山 開香山 領相公 묘소 아래에 合葬하였다. 公께서는 歿後 三十三年 만에 子 時讓의 推恩으로 吏曹判書에 追贈되셨다.
子로는 六男 三女를 두셨는데 一男 時認은 일찍 卒하였는데 進士 李彦의 女에게 장가들었고, 二男 時警은 일찍 卒했으며, 三男 佐郞 時訓은 府使 閔韺의 女에게 장가들었고, 四女는 縣監 趙應純에게 보냈으며, 五男 時說은 武科하여 監正인 孫祿慶의 女에게 장가들었다. 六女는 武科하여 郡守인 李守宗에게 보냈고, 七男 時詗은 宗室 完成君 秀英의 女에게 장가들었으며, 八女는 叅奉 金重祉에게 갔다.
九男 時讓은 文科하여 지금 慶尙道 觀察使인데 郡守 李大遂의 女에게 장가들었다.
嗚呼라 至極한 情은 가득하지만 文才가 없기로 다만 世系와 子孫만을 적고 文辭는 비우도다.
檀紀 三九六0年(一六二七.仁祖五). 九月
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時讓 謹撰
後記
아아! 贊成公의 墓碑를 세운지 三百七十八年이 지난 오늘에 이르니 風雨雪霜으로 인해 碑文은 심히 마멸되었도다. 또한 公께서 吏曹判書에 追贈된 後 九年만에 子이신 忠翼公 諱 時讓께서 淸白吏에 錄選됨에 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에 再追贈된 官職名도 바르게 새기지 못하고 개탄으로만 지내왔도다. 이제야 후손들의 微力을 모아 숙원사업인 贊成公의 墓碑와 石物을 다시 세우게 되었는데 墓碑原文을 國譯하고, 公의 追贈職과 그 외 여러 史實들을 添記하였다. 이로써 晩時之歎이나 不孝의 痛恨을 덜게 됐음에 感泣할 따름이며, 벅찬 감격을 누르고 그 전말을 기록하여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들이 永久히 傳授되고 本 墓域이 子孫萬代 保存되며, 後孫들은 크게 繁盛하고 뚜렷한 民族精神과 崇祖睦族意識을 갖춘 民族의 棟樑으로 長成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八年(二00五年). 四月. 二十四日.
贊成公 十四代孫 泰燮 後記 謹記
贊成公 十五代孫 恒鏞 墓碑原文 謹譯
贊成公 十四代傍孫 泰國 謹書
安東金氏 提學公派 比安公 門中會 會長 贊成公 十三代孫 斗應, 宗孫 容達 外 後孫 一同 謹立
<구 묘비 소개>
<구 묘비 탁본 > (후면은 마모가 심하여 탁본 불가)
*탁본 일시 : 1986년 경. 탁본자:항용(제)
*전면 글씨
朝散大夫 行比安縣監贈資憲大夫吏曹判書 兼知義禁府事金公之墓
贈貞夫人 南陽洪氏之墓
<비안의 유적-비안향교> (2005. 3. 4. 정중(도) 제공)
*위치 : 경북 의성군 비안면 교촌리
의성군 사촌마을(도평의공파 집성촌) 서남쪽 32km 정도 떨어진 곳, 원래의 비안현이 있던 곳에서 마을 외곽으로 이동함.
(2)陽德公 諱 時說 神主(양덕공 휘 시열 신주)--14世
先祖考 贈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通訓大夫 陽德縣監 成川鎭管 兵馬節制都尉 府君神主 |
先祖女比 贈 貞夫人 求禮孫氏 神主 |
* 양덕공. 휘 시열(時說) : 1569년(선조2)--1645년(인조23)
字는 여습(汝習). 충북 괴산 출생. 비안공 휘 인갑의 二子.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 거주.
1620년(광해12. 52세) 무과급제. 1623 년(인조1. 55세) 선공감역(繕工監役). 1631(인조9. 63세) 양덕현감. 77세로 몰함. 子 素(監司公) 의 귀(貴)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 수진산 자좌(子坐)이다. 평남 양덕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함.
유물 : 교지 1매 (무과 급제)
<과거 급제 교지>
<敎 旨>
1.시기 : 1620년(광해 12) 양덕공 52세때
2.수교자 : 陽德公 (諱 時說)
3.내용 : 武科 及第
4.원문 및 풀이 :<敎旨 前僉正 金時說 武科 丙科 第二千二百九十一人 及第出身者. 萬曆十八年>
(교지, 전 첨정인 김시열은 무과 중 병과 제2291인 급제 출신자임. 만력18년(1620년. 광해12))
5.소장 : 양덕공 종가
6.크기 : 66.7 × 78 (단위-Cm)
<양덕공 묘소>
<묘비 건립 후의 사진> (2005. 4. 24. 항용(제) 제공)
<묘비문>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時說이고 字는 汝習이시다. 鼻祖는 新羅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며, 中始祖는 高麗의 上洛郡開國公이신 忠烈公 諱 方慶으로 公의 十二代祖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와서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이어 司憲府監察 諱 孟廉, 典農寺主簿 諱 哲鈞, 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贈 吏曹參判 諱 彦默은 曾祖요, 成均進士로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은 祖이시다. 領相公은 道學으로 士流에 이름 높았는데 己卯士禍 때 成均館儒生들과 從兄 正言公 諱 釴과 더불어 靜菴 趙光祖를 力救하는 上疏에 참여하였다가 禍를 피하여 槐山으로 은둔하시어 세칭 五甲의 名賢을 키우셨고, 子 文肅公 諱 悌甲의 推恩으로 領議政에 追贈되셨다. 父이신 贈 左贊成 諱 仁甲은 司馬試에 入格한 後 長水道 察訪에 올랐다가 濟用監 直長을 거쳐 永山과 比安縣監으로 나아갔다가 壬辰倭亂을 만난 후 白衣從軍하시다가 槐山 先塋에 돌아와 歿하셨으며, 左贊成에 追贈되셨다. 母는 贈貞敬夫人 南陽洪氏로 贈左承旨 以坤의 따님으로 生 六男하니 第四男이 公이신데 一五六九年(宣祖二) 十二月 十三日에 出生하셨다.
公은 一六二0年(光海十二) 武科에 及第하고 一六二三년(仁祖一)에 繕工監役을 거쳐 一六三一年(仁祖九)에는 陽德縣監에 除授되셨다. 이 때 公은 淸白하고 溫厚한 性品으로 愛民하며 善政에 힘썼는데 이를 기리는 縣民들의 頌德碑가 이곳에 세워졌다. 任期 後에는 槐山에 돌아와 自然과 벗하며 悠悠自適하시다가 一六四五年(仁祖二三) 十一月 十七日에 七十七歲로 歿하시니 槐山邑 水津里 水津山 子坐에 永眠하셨다. 그 후 子 素의 顯達로 嘉善大夫 兵曹參判에 追贈되셨다.
配이신 贈貞夫人 求禮孫氏는 司宰監正 祿慶의 따님으로 一五七六年(宣祖九) 一月 三十日 忠北 槐山郡 沙梨面 荷島에서 出生하셨는데 婦德을 크게 갖추시고 治家하니 주위의 칭송이 높으셨다. 一六四五年(仁祖二三) 十一月 十一日에 七十歲로 公보다 六日 먼저 歿하시고 公과 合葬되셨다.
公은 三男五女를 두셨으니 長男 諱 素는 文科에 오른 후 黃海,忠淸道 觀察使에 이르렀고 後에 子 龜萬의 顯貴로 吏曹叅判에 追贈되었는데 光州金氏 安世의 따님에게 장가드셨다. 二男 諱 繁은 武科하여 벼슬이 安州判官인데 慶州李氏인 瑜의 따님에게 장가드셨으며, 三男 諱 縈은 通德郞인데 曲阜孔氏에게 장가드셨다. 사위로는 權璟 尹廷敏 安弘宇 朴震弼 尹濟民이 있다.
아아! 公을 追慕하는 情은 至極하지만 文才가 없고 또한 墓碑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公께서 일찍이 원하시던 바가 아니었기에 다만 간략한 世系와 子孫만을 적고 文辭는 비우도다
檀紀 四三三八年(二00五年) 四月 二十四日 參判公十四代孫 恒鏞 謹撰
追記
嗚呼라, 公께서 歿하신 지 三百六十年이 지나도록 墓前은 不幸하게 墓碑도 없이 지내왔도다. 더욱이 제작하다 中斷한 文官石마저 방치되어 왔으니 宗孫으로서 안타까운 마음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쓰린 가슴을 달래며 微力을 다하여 간절히 갈망해 왔던 公의 墓碑와 文官石을 세우게 되니 晩時之歎이나 不孝의 痛恨을 덜게 됐음에 感泣할 따름이다. 벅찬 감격을 누르고 그 전말을 기록하여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들이 永久히 傳授되고 本 墓域이 子孫萬代 保存되며, 後孫들은 크게 繁盛함과 동시에 뚜렷한 民族精神과 崇祖睦族意識을 갖춘 民族의 棟樑으로 長成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八年(西紀 二00五年). 四月. 二十四日.
參判公 十三代傍孫 泰國 謹書.
參判公 十三代宗孫 泰燮 追記 謹記, 墓碑 謹立
<양덕공 묘소 계단 설립기> (2005. 7. 26. 항용(제) 제공)
2005년 7월 24일
맑음. 몹시 더움. 아침 새벽 4시에 맞춰놓은 자명종이 요란하다. 아내는 어제 저녁 늦도록 괴산 갈 준비를 하던데 벌써 일어나 준비에 바쁘다.
어제 성회대부님 사무실에서 오후에 마신 커피로 밤새 잠을 설쳤다. 오는 10월에 개통할 청계천 복구사업 행사의 하나인 청계천 벽화 전시 건에 대비해 안사연에서 은밀하게 진행해 왔던 모종의 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임시로 성회, 발용, 태영 종친님들과의 갑작스런 만남이었다.
괴산에 갈 때마다 짐이 많다. 아이들은 남겨 두고 우리 내외만 출발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중부, 영동을 거쳐 내륙고속도로 접어드니 창밖 공기가 훨씬 신선하다. 1시간 40분만에 괴산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집 뒤 수진산 아래로 갔다. 어제 상석대부님이 부려 놓은 계단용 돌들을 보기 위해서다. 오늘 하향의 주된 목적은 나의 14대 선조님이신 양덕공(휘 時說) 묘소의 입구 계단 설치이다.
묘소 아래로 가니 쿵쿵하는 작업소리가 났다. 이미 상석대부님이 산에 올라와서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전에 약속한 대로 어제 저녁 죽전에서 돌을 싣고 와 이곳에 부려 놓고 괴산집에서 잠을 잔 다음 새벽에 먼저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 부지런함과 굳은 숭조의식에 감탄을 받았다.
엄청난 더위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흐르는 대서(大暑)일이다. 2일 전 한라산 백록담을 자녀 예진과 용진과 함께 다녀올 때도 엄청난 땀을 흘렸는데 오늘도 땀을 좋게 흘려야 할까보다.
<양덕공 묘소 입구 계단 작업>
청주의 형(한용)에게도 기별하여 셋이서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돌일은 힘이 많이 들었다. 땅을 파기도 고되었다. 단단한 찰흙에 돌이 많은 토질이기에 곡괭이로 파도 별 진전이 없다. 아버님도 가세하여 작업 코치를 하신다. 첫 돌계단이 제일 힘들었다. 하나씩 놓아 갈 때마다 요령이 생겨 힘도 덜 들고 작업 속도도 났다. 너무도 덥기에 오전에 모든 일을 마쳐야 하는 손놀림은 잠시도 쉴 시간이 없다.
10시, 숫골(괴산군 소수면 수리2구)의 일가 어른이신 만응(제학공파, 참봉공 휘 우갑 13대손)대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리에 있는 우리집 가정묘원 터를 좀 넓히기 위한 중개를 부탁해 놓았는데 그 땅 주인(태희, 참봉공파)이 오늘 서울에서 내려오니 만나서 상의하자는 것이다. 즉시 괴산읍 군수관사 안에 있는 <전국 시조 연구회 괴산지부>로 가서 아버님을 모시고 수리로 갔다.
만응대부님을 중간에 태우고 작년 안사연 여름캠프 답사지였던 <제학공파 참봉공문중 참판공 휘 기(紀) 종손가 납골당>의 바로 맞은편 산으로 갔다.
<중략>
태홍종친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가정묘원문제로 만나고자 했던 태희님과는 기대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집으로 12시가 넘게 돌아오니 양덕공 묘역 계단 공사는 이미 다 끝나 있었다.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하였다.
<말끔하게 정리된 입구 계단>
백숙을 점심으로 먹고 오후에는 괴산읍 능촌리로 갔다. 상석대부님의 10대조이신 안주공(휘 번) 묘소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그곳으로 떠나는 우리들에게 아버님은 비료를 챙겨 주신다.
묘소에 도착하니 지난 4월에 사초한 잔디들이 잘 자라 있었다. 보기가 참 좋았다. 넉넉한 공간에 잘 가꿔진 묘역은 웅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 저기 잡초란 놈들이 미운 머리를 들고 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뽑아야 했다. 벌써 어떤 놈은 잘 뽑히지 않을 만큼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볕은 이미 많이 빠져 있는 머리카락을 아주 몽땅 뽑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머리 위에서 매섭게 쪼아대고 있었다.
2시간 남짓 풀을 뽑고 비료를 뿌리고 나니 또 땀이 비로 내린다. 그러나 기분은 이렇게 상쾌하고 뿌듯할 수가 없다. 상석대부님은 흐뭇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른다. 능촌리를 돌아 나오며 이내 차는 괴산의 명소인 쌍곡계곡으로 향한다. 작년 안사연 여름캠프 숙박지를 지나며 1년 전의 장관과 금년의 캠프 행사를 생각한다. 벌써 피서인파가 대단하다. 해마다 우리 가족들이 괴산에 오면 항상 찾는 상류 휴게소 아래 계곡을 찾아 간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세수를 한 다음 차가운 캔맥주로 더위를 식힌다. 그리고 곧 다가올 여름캠프를 점검하고 또 계획을 세운다.
<쌍곡계곡과 피서 인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능촌리의 종친인 규문아저씨를 전화로 찾아 초청을 했다. 돌아오는 길은 귀경하는 차량으로 주도로는 이미 정체다. 멀리 장연, 목도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저녁은 삼겹살로 준비했다. 집에 도착하니 규문아저씨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잔디밭 위에 진녹색의 비치파라솔을 치고 구워 먹는 삽결살 맛은 나도 잊고 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식사시간은 마음대로 늘어났다. 대부분이 문중 역사 이야기다. 이곳 괴산에 있는 종친 중 구전되고 있는 보물급 문중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알고 있고 이를 즐겨 말해 주는 이는 역시 규문아저씨가 제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제학공파 괴산 입향조이신 영상공(휘 석)의 이야기로 옮아가자 규문아저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잠시 서울 퇴계로의 윤주한의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선응)께서 자신을 서울로 데리러 와서는 이곳이 바로 영상공께서 괴산으로 낙향하시기 전에 사셨던 곳이라고 몇몇 일가분들(규철, 상형)들과 함께 말씀 나누던 것을 들었다는 말과, 영상공께서 괴산에 낙향하여 처음 사시던 곳은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인데 현재 김태욱종친(제학공파 참봉공종중)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두 가지의 놀라운 말에 우리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내일 일찍 현장을 탐방키로 했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설치된 태양열 전등 불빛이 반딧불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괴산의 밤은 이렇게 시원하게 깊어만 갔다. <하략>
<세덕사 전경>
<2006. 5. 5. 입구 계단 보수공사 후의 모습>
<안사연 여름캠프 후기, 양덕공 묘소 위의 안렴사공파 사직공문중 묘소 참배기> (2004. 8. 5. 안사연 여름캠프 자료. 항용(제) 제공)
<전략>
◆2005. 8. 5. 18:20 양덕공 묘소 - 18:25 사직공 묘소 着
양덕공 묘소에 참배한 다음 그 위쪽으로 조금 떨어진 사직공 묘소로 올라갔습니다. 사직공 묘역에는 사직공(휘 공걸)을 비롯해 부사공(휘 계안), 부사공(휘 원길) 및 통훈대부 김공의 묘소가 있습니다.
△안렴사공 → 5子 소윤공(휘 약) → 子 지주사공(휘 우주) → 1子 판교공(휘 환) → 子 참의공(휘 종손) → 2子 현감공(휘 지) → 1子 사직공(휘 공걸) → 1子 부사공(휘 계안) → 1子 부사공(휘 원길)
맨 위가 부사공(휘 원길) 묘소로 그 아래에 조부인 사직공(공걸) 묘소가 있으니 역장으로 모신 겁니다. 사직공 묘소(합봉)로 올라가 큰절을 올립니다.
▲ 사직공 묘소
헌관 : 용주
집례 : 용준
집사 : 용환
사직공 묘소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1쌍입니다. 상석은 근래에 새로 만들었습니다. 묘표에는 충무위사직 안동김공 휘공걸지묘, 배 숙부인 순흥안씨 해좌라 적혀 있습니다. 주위에 보라색 도라지꽃이 한창입니다.
뒤쪽 부사공(휘 계안) 묘표에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안동김공 휘계안지묘, 배 숙부인 의성김씨 묘부 해좌라 적혀 있습니다. 봉분은 쌍분입니다.
▲ 부사공 묘소
헌관 : 주회
집례 : 용준
집사 : 용환
안렴사공 후손이신 용주, 용준, 용환 3형제분이 부사공 묘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3형제분이 함께 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 형제애가 정말 부럽기만 합니다.
부사공 묘소(휘 원길) 묘소로 내려와 참배를 올립니다. 묘표에는 통훈대부 행영해도호부 김공지묘, 숙인 의령남씨지묘라 적혀 있습니다. 쌍분으로 문인석 1쌍이 지키고 있습니다.
▲ 부사공 묘소
헌관 : 항용
집례 : 용준
집사 : 주회
그런데 곤혹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 아래쪽에 묘소가 있는데 묘표에는 통훈대부 김양○이라 적혀 있습니다. 맨 끝자가 명확하지 않아 守자 같기도 하고, 宇자 같기도 합니다. 또 어찌 보면 中자인 듯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3글자 모두 아니기도 합니다.
문인석 1쌍만 서 있을 뿐 별다른 표석이 없어 어느 분이신지 도저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항용 종친 말씀으로는 인근 종친들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 묘역 형편으로 보아 웃대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아 각자 재배를 올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 일행의 숙제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곳을 잘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조금씩 산그늘이 짙어지는 걸 보니 조금 지치기도 합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하루 일정입니다. 느린 걸음으로 정담을 나누며 세덕사로 향합니다.
세덕사에 도착하니 영환 종친을 비롯해 옥회 종친 및 현지 종친 몇 분께서 귀가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일가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3)忠翼公 諱 時讓 神主(충익공 휘 시양 신주)--14世
先祖考 崇祿大夫 中樞府事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世子 左副賓客 四道軆察使 贈 諡 忠翼公府君 |
先祖女比 貞敬夫人 慶州李氏 神主 |
*충익공. 휘 시양(時讓) : 1581(선조 14)---1643(인조 21).
출생지는 충북 괴산이다. 초명(初名)은 시언(時言)이며 字는 자중(子中)이고 아호는 하담(荷潭)이다.
1581년(선조 14)에 출생하여 성장하면서 그 재능이 영특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장래에 대한 기대가 지대하였다.
1605년 (선조 38, 25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1607년(선조 40, 27세)에 당상관이 되었고 1609년(광해 1년, 29세)에 의랑지제교(義郞知制校)로 승진하였다.
1610년(광해 2, 30세)에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연경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 4, 32세)에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어 지방 향시를 관장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냈다 하여 의금부에 잡혀갔다. 이 때 금부에서는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백사 이항복의 도움으로 감형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618년(광해 10, 38세)에 영해로 귀양지가 옮겨졌다. 이 귀양기간에 공은 옛날의 전적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곳은 육진(북방의 국방 경비대)으로 학문으로 업을 삼는 이가 없었는데 공이 도착하자 많은 이가 배우러 와서 학문을 성취하였고, 그 이름이 조정에 등재 된 자가 이때부터 이어졌다. 후에 이곳 사람들은 공(公)이 몰(歿)하자 공(公)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아 공(公)을 현인(賢人)에 끼어 제사 지냈는데, 이는 조주(潮州·주: 지금 중국의 廣東省潮安縣) 사람들이 한문공(韓文公)을 사당에 모셨던 것과 같은 도리였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43세)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귀양에서 풀려 예조·병조의 정랑이 되었다가 유장들이 추천하여 홍문관으로 올라갔다. 그 후 수찬관(修撰官)이 되었고 의주부윤을 배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가을에는 교리(校理)로서 암행어사가 되어 북방을 안찰(按察)하다가 순무사(巡撫使)까지 겸하였다.
1624년(仁祖 2, 44세)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리 이귀(李貴)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부찰사 이시발(李時發)과 더불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로써 공은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올랐으며 난이 평정된 후 교리로 돌아왔으며 그 공으로 말 1필을 하사 받았다. 겨울에 전좌정랑(銓佐正郞)에 춘방사서(春坊司書)를 겸하였다.
1625년(인조 3, 45세)에 이조정랑, 응교(應敎)로 승진되어 시강원(侍講院)의 문학을 겸하였다.
1626년(인조 4. 46세)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기용되었다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 때 중시조이신 충렬공의 묘역을 정비하고 상석을 세웠다.
1628년(인조6, 48세) 12월에 동부승지로 입궐하였다.
1629년(인조 7. 49세)에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1631년(인조 9. 51세)에 병조판서, 6월에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가 됨.
1632년(인조 10. 52세) 지경연 판의금부사를 겸함. 가을, 청나라의 과도한 요청을 거부하는 인조의 교서(敎書)를 갖고 청나라로 가는 사신을 정지 시켜놓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극진히 올림. 이로 인해 임금의 노여움을 사 영월로 귀양갔다가 곧 공의 말이 옳음을 알고 다시 풀려남.
1633년(인조 11. 53세) 1월에 체찰사에서 병조로 돌아 왔으며, 형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2월에 4도 도원수가 되었다.
1634년(인조 12. 54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한성판윤(漢城判尹),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옮겼다가 또 호조판서 겸 동지(同知) 춘추(春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으며, 9월에 병조판서 겸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10일만에 눈에 백태가 끼어 사직하고 충주의 사제(私第)로 돌아왔다.
1635년(인조 13. 55세) 강화도 유수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함.
1636년(인조 14. 56세)에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637년(인조 15. 57세) 봄, 병자호란 후 임금이 환도하여 공을 세 번이나 불렀으나 병으로 인해 상소로써 사양하였다. 다시 간곡한 임금의 부름에 상경하니 임금은 공의 병 치료를 위해 약을 내리기도 하였다.
1638년(인조 16. 58세) 5월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명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수개월을 객사에서 머물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임금의 간곡한 청으로 다시 상경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선조실록을 개수하게 되었는데 여러 조정중신들이 공(公)을 원하므로 임금은 공(公)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춘추관사를 겸하여 주었다. 그러나 공은 여러번 상소로써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부름에 응하여 상경하다가 여주에서 병이 중하여 상소하고 임금의 하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충주의 집으로 돌아왔다.
1643년(인조 21. 63세) 5월 4일 충주의 사제(私第-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서 별세하였다. 임금이 관곽(棺槨)과 조묘군(造墓軍)을 내려주었고, 8월 18일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방아재) 자좌오향(子坐午向) 선영하에 안장하였다. 회령의 사당에 위패(李潤雨와 함께)를 모셨다. 숙종 7년 8월에 김상헌, 조석윤, 정온을 제사지내는 서원 안에 공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 숙종 16년. 5. 13. 우의정 김덕원(金德遠)이 심희수(沈喜壽)와 함께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공은 자손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도록 유언하여 청하지 않고 있었음).
숙종 17년 7. 21.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저 서 : <忠翼公荷潭先生遺稿>八卷 - 부계기문(부溪紀聞), 자해필담(紫海筆談),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소차(疏箚), 각종 한문체의 글, 각종의 시(詩), 임자일기(壬子日記), 유사(遺事),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1670년(현종 11) 경에 공의 아들인 판서공(휘 徽)이 공의 글들을 편집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친필 遺稿인 <荷潭雜記>가 중앙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 물 : 관띠 1점(1631년 인조 9. 병조판서 배명시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
신도비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그림 : <高士彈琴圖>가 일본에 있다고 함. 출전 <한국서화가인명사전> (2000. 한문영. 범우사. 2002. 10. 26. 주회(안) 제공)
*국립 중앙도서관 소장 도서 목록
1))<荷潭金時讓文集>. 金時讓 저. 金益洙 譯. 金恒鏞 編輯. 발행자불명. 2001. 810.819-2-40. 문학실.
2)<荷潭破寂錄>. 金時讓 著. 刊寫者未詳. 刊寫年未詳. (74장). 24×16Cm. 분류기호-승계古3609-3. 개인문고실.고서
3)<荷潭破寂錄. 上, 下>. 金時讓 撰. 自筆. 2권 2책. 刊寫者未詳]. 仁祖年間(1623 - 1649). 古0238-2. 고전운영실. 고서. 22.3×15,5cm
4)<부溪記聞>. 金時襄 著. 2권1책. <大東稗林>[마이크로형태자료]. 합철. 청구기호-M古75-012-8. 자료있는 곳-고전연구실. 25
5)<부溪記聞>. 金時襄 著. 표제-<昭代粹言>[마이크로 형태자료] / 鄭道應(朝鮮) 編 . 합철. 1998. 형태사항. 제11卷, 부溪記聞 / 金時讓 著. - 第12卷, 荷潭破寂錄 / 金時讓 著. 분류기호-M古1-1998-305. 자료 있는곳- 고전운영실
6)<紫海筆談>. 金時襄 著. 1책(21장). 25×21.5cm. 표제-<秋江冷話 / 南孝溫 著. 紫海筆談 / 金時讓 著> ; 南晩星 譯 . 발행사항-서울 : 三星美術文化財團, 1981. 총서사항-三星文化文庫 ; 153. 형태사항- 248p. ; 18cm. 총서사항-三星文化文庫 ; 153. 분류기호-041-178-153=2. 자료있는곳-서고자료 신청대
*규장각 소장 도서목록
1)<荷潭破寂錄>. 金時襄 著. 2권 1책.(105장). 30.4×21.2Cm.
2)<부溪聞記>/ 金時讓(朝鮮) 著. 출판사항-[刊地未詳] . [刊者未詳]. [刊年未詳] 형태사항-2卷1冊, 25×21.5 cm..M/F번호-M/F80-103-281-A. 마스터번호-24392 청구기호-古 0320-40-
3)紫海筆談 / 金時讓(朝鮮) 著 1冊(21張) , ; 25×21.5 cm 紫海는 寧海의 別稱. 분류기호-古 0320-39.
4)荷潭破寂錄 / 金時讓(朝鮮) 著. 30.4×21.2 cm. 청구기호-奎 15447. 출판사항-[刊地未詳]. [刊者未詳]. [刊年未詳, 後寫]. 형태사항-2卷1冊(105張), 사부분류-隨筆類. M/F83-16-322-1
5)부溪記聞 / 金時讓(朝鮮) 記. 荷潭破寂錄 / 金時讓(朝鮮) 記. 통합철명 - <昭代粹言 / 鄭道應(朝鮮) 編>. 출판사항-[刊地未詳]. [刊者未詳]. [刊年未詳].:형태사항-12卷12冊, ; 30.3×19.1 cm..내용주기-內容目次: 卷1-4: 海東野言 / 許봉(朝鮮) 編. - 卷5: 癸未記事 / 禹性傳(朝鮮) 記. - 卷6: 時政錄 / 禹性傳(朝鮮) 記. - 卷7-8: 東閣雜記 / 李廷馨(朝鮮) 記. - 卷9: 丙子錄 / 南급(朝鮮) 記. - 卷10: 亂離日記 / 南급(朝鮮) 記. - 卷11: 부溪記聞 / 金時讓(朝鮮) 記. - 卷12: 荷潭破寂錄 / 金時讓(朝鮮) 記. 청구기호-奎 12444--1-12.
<묘비 건립 전의 모습>
<1980년, 새로 옮기고 난 뒤 경계난간석 설치 이전의 모습>
<관대>(1631년(인조9), 병조판서 재직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 길이-113Cm, 보석알o형-6개, 작은ㅁ형-4개, 큰ㅁ형-5개)
<충익공 하담선생 유고>
<하담잡기>
<만년 거주지>
(충북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앞 남한강 전경)
<번역본--하담 김시양 문집>
(2001. 11.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간행. 추진회장-김두응. 번역-김익수. 편집 및 발간 추진-김항용 )
<하담공 낙관> <부계문기>(출전:야후)
(<槿域印藪>. 국회도서관 간. 1968. 313P. 2002. 7. 19. 항용 발견 자료 제공)
<부계기문>(출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5. 20. 태서(익) 제공)
<대동야승 내 자해필담 표지>(출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5. 20. 태서(익) 제공)
<하담파적록>(출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5. 20. 태서(익) 제공)
<하담파적록 내부>(출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5. 20. 태서(익) 제공)
2. 친필 서찰 소개
<친필서찰 1>
<친필 서찰1> (<근묵>(성균관대 刊)내의 서찰)
출전 : <국가 문화유산 종합 정보 서비스> (1625년.인조 3년 書.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2001. 8. 항용(제) 발견 제공)
유물명칭 : 김시양시. 국적/시대 : 한국(韓國) / 조선(朝鮮). 재질:지(紙). 크기 :가로 - 37 cm / 세로 - 28.5 cm. 작자/필자 : 김시양.) 종류 : 서간류(書簡類) .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장기관 : 학교(學校) / 성균관대(성균관대). 유물번호 : 성균관대(성균관대) 1169
<친필서찰 1 해독 원문 및 해석문>(해독 및 번역 : 김익수(제))
奉送 朴大觀學士赴咸平鬪進格 爭臣瀝血輸封事 聖主憂民輟從班豈料 明時言有罪惟知古者諫無官路 經車峴家何在城枕滄溟髮易斑 聞道靑冥傳藥物 異恩猶自望平安 天啓乙丑孟秋荷潭樂忘子稿
삼가 박대관 학사가 함평(咸平)에 부임하여 진로에 오르심에 보내며
( *운(韻)은 班,官,斑,安으로 平聲의 '珊''寒'韻)
피 흘리며 싸우는 신하들 봉장(封狀)의 일로 승부를 가르려 하니
성주(聖主)께선 백성을 걱정하시며 관원들에게 그치게 하네.
밝은 시절에 말한 게 죄가 됨을 어이 헤아렸으며
오직 옛날 같이 간언할 관원이 없음을 알겠네.
차현(車峴)을 지나는 길에 집은 어디에 있는고
성(城)은 넓은 바다 배게 삼아 머리는 쉬이 세어 버리리.
하늘(임금)이 약물을 전하라는 말 들릴 터이나
남 다른 은혜보다 오히려 스스로 평안하기를 바라오.
천계 을축 (인조3년. 1625) 7월 하담 낙망자(樂忘子) 씀.
*주1-1625년은 하담공이 전좌정랑(銓佐正郞-이조 정랑)에 춘방사서(春坊司書)를 겸하고 있다가, 응교(應敎)로 승진되어 문학(文學) 을 겸하고 있던 시절로 이 글은 이조정랑때의 서찰로 추정되며 수신자 유생 박대관이 상소를 하였다가 함평으로 갈 때 준 시임
*주2-청명(靑冥) : 높은 하늘. 여기서는 임금을 뜻함.
* <국가 문화유산 종합 정보 서비스(근묵)> 해독문
奉送朴大觀學士 赴咸平 用進退格 爭臣瀝血輸封事 聖主憂民輟從班 豈料明時言有罪 惟知古者諫浦官 路經車峴家何在 城枕滄溟髮易斑 聞道靑冥傳藥物 異恩猶自望平安 天啓乙丑孟秋 荷潭 藥忘子稿
<친필서찰 2>
<친필 서찰2>(1627.인조5년 書.국사편찬위원회 소장. 2002. 4. 항용(제) 발견 제공
<친필서찰 2 해독 원문 및 해석문>(해독 및 번역 : 김익수(제))
前奉一書未知得達否. 三嶺把守 乃是都檢察傳令意. 是朝廷指揮一意奉行面 重爲體府所責惶恐犯罪. 至於夫馬整然 差員差令亦承體府傳令 及從事文移屬之. 而似蒼黃失措被責 卽爲停罷耳. 絡遠地絶不得信體. 體府意旨事事失宜動, 被讓責亦極問竭. 凡干分朝處盈幸. 詳覽告便得周旋如何之非. 兄相愛之至老, 安聽如是 謹拜上狀.
丁卯 二月十一日 時讓
전에 보낸 한 통의 편지는 도착했는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삼령(三嶺,경상도)을 파수하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검찰하여 전령하라는 뜻이옵니다. 조정에서 지휘한 모든 뜻을 봉행하고 있습니다만 거듭 체찰부의 책임에 있어서 죄를 범하진 않았는지 황공하기만 합니다.
부역마(夫役馬)에 이르기까지 질서 정연히 하였으며, 관원을 임명하고 령을 내리는 것 역시 체찰부의 전령을 받아 종사하였으며 문서를 이송하여 속하게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에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혹시 바쁜 김에 일이 잘못 조치되어 책임을 지게 되면 즉시 정직(停職)되거나 파면될 뿐입니다. 먼 곳이라 연락이 끊겨 체찰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체찰부에서 왕지(王旨)를 받드는 일에 있어 일마다 잘못되면 마땅히 소동이 날 것이고, 시양(時讓)에게 책임을 지우면 또한 엄한 문책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조정의 조처에 간여하여 분별해주시면 큰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만…….
아뢰는 편을 자세히 살피시어 어떠한 것이 잘못되었는지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과 늙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걱정스러운 말씀을 들려 드리게 되었습니까.
삼가 절하여 글월을 올리나이다.
정묘(丁卯. 인조5년. 1627. 공 47세) 2월 11일 시양(時讓)
*주1-1627년은 공이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한 지 2년 째 되는 때임..
*주2-<朝鮮史料集眞>(복각판. 임배근.1996. 1차 조선총독부 刊(소화 10) 일본 동경 간)에도 위와 같은 서찰사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음 --新安世寶諸賢手簡二所收 光州府--
*주3-수신자는 미상.
3. 국립 중앙도서관 소장 도서 목록
1))<荷潭金時讓文集>. 金時讓 저. 金益洙 譯. 金恒鏞 編輯. 발행자불명. 2001. 810.819-2-40. 문학실.
2)<荷潭破寂錄>. 金時襄 著. 刊寫者未詳. 刊寫年未詳. (74장). 24×16Cm. 분류기호-승계古3609-3. 개인문고실.고서
3)<荷潭破寂錄. 上, 下>. 金時讓 撰. 自筆. 2권 2책. 刊寫者未詳]. 仁祖年間(1623 - 1649). 古0238-2. 고전운영실. 고서. 22.3×15,5cm
4)<부溪記聞>. 金時襄 著. 2권1책. <大東稗林>[마이크로형태자료]. 합철. 청구기호-M古75-012-8. 자료있는 곳-고전연구실. 25
5)<부溪記聞>. 金時襄 著. 표제-<昭代粹言>[마이크로 형태자료] / 鄭道應(朝鮮) 編 . 합철. 1998. 형태사항. 제11卷, 부溪記聞 / 金時讓 著. - 第12卷, 荷潭破寂錄 / 金時讓 著. 분류기호-M古1-1998-305. 자료 있는곳- 고전운영실
6)<紫海筆談>. 金時襄 著. 1책(21장). 25×21.5cm. 표제-<秋江冷話 / 南孝溫 著. 紫海筆談 / 金時讓 著> ; 南晩星 譯 . 발행사항-서울 : 三星美術文化財團, 1981. 총서사항-三星文化文庫 ; 153. 형태사항- 248p. ; 18cm. 총서사항-三星文化文庫 ; 153. 분류기호-041-178-153=2. 자료있는곳-서고자료 신청대
4. 규장각 소장 도서목록
1)<荷潭破寂錄>. 金時襄 著. 2권 1책.(105장). 30.4×21.2Cm.
2)<부溪聞記>/ 金時讓(朝鮮) 著. 출판사항-[刊地未詳] . [刊者未詳]. [刊年未詳] 형태사항-2卷1冊, 25×21.5 cm..M/F번호-M/F80-103-281-A. 마스터번호-24392 청구기호-古 0320-40-
3)紫海筆談 / 金時讓(朝鮮) 著 1冊(21張) , ; 25×21.5 cm 紫海는 寧海의 別稱. 분류기호-古 0320-39.
4)荷潭破寂錄 / 金時讓(朝鮮) 著. 30.4×21.2 cm. 청구기호-奎 15447. 출판사항-[刊地未詳]. [刊者未詳]. [刊年未詳, 後寫]. 형태사항-2卷1冊(105張), 사부분류-隨筆類. M/F83-16-322-1
5)부溪記聞 / 金時讓(朝鮮) 記. 荷潭破寂錄 / 金時讓(朝鮮) 記. 통합철명 - <昭代粹言 / 鄭道應(朝鮮) 編>. 출판사항-[刊地未詳]. [刊者未詳]. [刊年未詳].:형태사항-12卷12冊, ; 30.3×19.1 cm..내용주기-內容目次: 卷1-4: 海東野言 / 許봉(朝鮮) 編. - 卷5: 癸未記事 / 禹性傳(朝鮮) 記. - 卷6: 時政錄 / 禹性傳(朝鮮) 記. - 卷7-8: 東閣雜記 / 李廷馨(朝鮮) 記. - 卷9: 丙子錄 / 南급(朝鮮) 記. - 卷10: 亂離日記 / 南급(朝鮮) 記. - 卷11: 부溪記聞 / 金時讓(朝鮮) 記. - 卷12: 荷潭破寂錄 / 金時讓(朝鮮) 記. 청구기호-奎 12444--1-12.
5. 충익공 신도비 원문 소개 (2005. 2. 7. 주회(안) 제공)
출전 : 龍洲先生遺稿 卷之二十
神道碑
判中樞府事荷潭金公神道碑銘 幷序
今咸鏡道觀察使金徽氏以?節辭朝。路過不?絅龍潭上。手先大夫行治歷官事跡狀授不?曰。先人之墓木拱矣。尙闕麗牲石顯刻。願執事少寬不肖之罪。而毋死吾先君子。以惠不華者銘。不?禮而辭曰。不?神精銷亡。髮已黃矣。此豈治筆硏時節歟。顧吾竝世而立於朝。得見昭公?私。爲國任怨。至死不衰者。唯先相公一人已。寧恤佛頭不潔之?。而閉平生與輿人誦者。以孤觀察公顯親之誠。按狀。公諱時讓。字子中。初名時言。中年有宜避嫌名。更以今名。號荷潭。其先新羅王者之后也。有諱方慶。仕于麗。出入將相。?功峻節。震曜夷夏。封上洛公。其后子孫。十望八九皆本於上洛云。入我朝。曰左司諫顧。司諫生監察孟廉。監察生典農哲?。典農生司儀秀亨。司儀生贈參判??。贈公生進士錫。以奇復齋外從。?離己卯禍。遯世而終。是生公皇考諱仁甲。比安縣監。贈左贊成。壬辰死節原城悌甲之弟也。配南陽洪氏。庶尹以坤之女。公生於萬曆辛巳。幼而頭角?然。氣宇卽見。贊成公?頂曰。大吾門其在汝乎。稍長。博聞?志。十二四歲。?遭內外艱。時兵荒之交。公以孤童執欒欒如成人。聞者稱之。制除。始委己於學。伊吾不輟。文辭一朝驟長。掉?場屋。人莫與京。乙巳。登廷試科。選入槐院。梧里,一松,白沙三相一見公。許以國器。論者謂史筆舍公無適。?當路。薦不及焉。丁未。拜堂后。戊申。宣廟升遐。凡喪殷事。皆屬記事。人皆劫劫。公獨有餘。己酉。陞儀郞,知製敎。庚戌。以賀至書狀如京。用惠文繩一行。象胥斂手。不寒而栗。明年還。晉聞見錄。論虜勢若寢張。我國脩聘。遼路不可恃。海行不可忘。此公嵬眼之見先十年後也。明年。爲全羅都事掌試。群宵摘試題謂譏刺君上。請拿鞫。鄭尙書世規。公石交也。輅廣陵路。握公手涕泣。公色自如。鄭嗟歎久之。及對吏。禁府奏極律。光海猶?與者三日。公牢睡如常。尹孝先以參試官俱繫。蹴公起曰。此何時而可安寢。公笑曰。死生命也。賴白沙相平反。減死竄北。鍾城途中有詩曰。心跡本非欺白日。吉凶元不問蒼天。戊午。移配寧海。北聳也。乘?輿南北數千里。躍前?後十有餘年。少無隕穫。隨遇而安。窮耽典籍。爲深博無涯?。千古理亂是非得失。如視諸掌。異日受用處。皆稽古力也。六鎭爲天荒蓋久。承公口?指?。成材者多。至有名登薦剡相銜。公薨。慕用公不已。俎豆公賢人間。此與潮人廟食韓文公同一道也。是時。大農?於土木。作贖金法。令下。諸遷人從令恐後。獨公與任叔英茂叔。惡苟免甚於死者。識者多之。癸亥。仁祖靖宗?。起徒中遷禮兵正郞。儒將薦。又盛玉堂。由脩撰超授義尹。崔相鳴吉?不赴。先是。公知明璉有異志。而明璉方爲巡邊使駐龍灣。崔相實慮公爲虎餌也。秋。以校理衣繡衣按北兼巡撫。猾吏茅靡。戍卒?醒。甲子。逆适擧兵反。體府完平相?公從事。與副察李時發爲前茅行。時事急不暇一卒?之。會元帥張晩于平山與計事。賊已?血猪灘。徑迫京城。仁廟幸公山。防禦使鄭忠信首?鞍峴破賊策。諸將疑之。公力贊其策。卒樹大勳。元帥上功。第公二等。上內李曙言。削文士三人。公其一也。其後拜獻納。還校理。進講最多槪於上心者。有味乎其言之也。冬。薦拜銓佐正郞。兼春坊司書。乙丑。陞應敎兼文學。丙寅。用仁獻王后山陵都監勞加緋。俄拜慶尙道觀察使。六十州民之情僞。俗之淳?。運於股掌間。案無留牘。善山有姦民。因??欲害多士。公發其誣置之法。南中人士頌說不置。丁卯。朝廷與奴成。令罷諸道兵。俄有飛報。云賊禽我八將。諸道不可罷兵。總戎李曙同元帥啓也。公方與號召使鄭愚伏先生會咸昌。公曰。此報?言也。置而不布。愚伏惑焉。後聞之。李報果虛也。己巳正月。由龍喉拜平安觀察使兼體察副使。資嘉善。到平才數日。邊吏奔告金兵數千來渡江。公曰。此必金人迹漢人者。不可以此上聞致?洶。其後金人略宣鐵。不得一人而還。當是時。關西左接毛文龍。右待金人。其變幻出沒無常。公先事候情。動中其?。毛將不得逞其巧。金人亦有遷延者數矣。夏四月。毛將將兵會袁軍門崇煥于寧遠。朝廷命公往餞島中。公密言于接伴使洪寶曰。毛帥此行必不返。居數月。宣川報某日軍門數誅毛將云。公始政於南。終政於西。其所竭忠盡智。劈?遠計。若執左契者。優於嶺南。公之憂虜。蓋自辛亥朝天日也。庚午。?島卒興治賊殺摠兵陳繼盛。公拜疏曰。興治介於我國疆域。擅斫天朝大將。義不可不討。請討之。上命李曙,鄭忠信爲將。督艦步以討之。忠信陛辭。以兵少憂。上曰。監司金某足智多算。我無西顧之憂。時朝臣多以興治之反非與於我。鞭雖長。於馬腹何。唯昇平相是公策。公人言曰。自奴猾夏。我國尙不發一行人奔問官守。由?島梗也。今若名興治之爲賊而討之。不但抉我癰。中朝聞之。必以桓,文之擧許我。而忠義之聲。隱隱天下耳矣。於是上大動聽。必欲用公言。元勳之?而苟冀無事者多。興治亦聞而甘心公。公去西門而伐叛之師遂縮。辛未春。公以特進登對。上問興治事。公極陳窮賊非投奴則無地矣。有大臣亦出而較利害。公卞不少?。無何。興治果反投奴。沈世魁,張燾等合謀誅之。俄有兵部咨至曰。興治叛據?島。向非貴國當事之臣忠勇圖蔓。齊魯之境。幾不乾淨。大加褒揚。上下此咨。?示諸宰。人皆?汗。夏四月。兵書李弘胄免。上特命擢公代之。辭不報。六月。虜穿塞綴宣,郭。廟議推公爲元帥。忠信爲副。將啓行。都城?沸。公晏然。忠信未至安。虜已去矣。冬。金相?遞都體察使。上曰。金某忠信智武。不當是任否。備局合辭啓曰。如上敎。上卽命超崇政。授四道體察使。公受知於仁廟可謂無兩。顧諸臣未有如李克之擧魏成。文終之薦曺相國者。使棟樑大材止於??之用。惜哉。壬申。兼知經筵,判義禁府事。秋。奴遣大將滿胡。祭仁穆王后喪。無何。又遣所都里要歲幣。皆稱詔?。誇?凶巧。?而不洩。輦上君子不以爲憂。或曰虛喝。或曰奴不解文字。其語雖信。不足畏也。公乃獻言曰。奴之敗盟。已露無餘。備禦之策。雖晩不可不講。今計在選三南出身武學入關西。與其土兵民調鍊。庶乎得力。當時朝議皆以公爲怯。公笑曰。非我怯。誰當怯者。持是議不變。終始苦口爭之。被當事者鈐制。無柰何。公又拜疏曰。歲幣。漢唐所不免。今不許奴之始請五千純。後不寧悔是哉。朝廷遣申得淵要減幣。至瀋見斥。癸酉。又遣金大乾以示絶和意。會公出巡于西。謂副帥鄭忠信曰。無備召戎可乎。大乾所持國書。橫挑?胡必矣。吾惡可愛身。不恤國計之大謬。遂留大乾。上疏劇陳其不可。上盛怒。下備局議擅留使臣罪。備局請拿鞫。公就吏爰書訖。配寧越。及大乾至金被驅。朝廷始悔罪公放歸田。其後又有大臣言棄忠智士非國計。甲戌。敍復知樞。又遷京尹。又遷戶書。兼同知春秋,世子左副賓客。九月。拜大戎。蓋再秉西銓也。武弁之才而困於無資地者。無不彈冠相慶曰。公道復行矣。公視事才一旬。以?疾辭遞。乙亥。拜江都留守。又以病辭。丙子。被淸白選。階崇祿。夏決退。臨發上箚略曰。臣蒙被恩私。?出諸臣。今當退歸。若無一言。愛君忠赤。將寓何地。?獻?說。其目五。曰禁關節。曰正貪汚。曰杜防納。曰罷私賤良妻。曰革奢侈。皆中時弊。末言譏察。譏察之必亡人國。夫人知之不敢言者。畏主之者勳貴也。公切刻言之。上覽之。嘉奬以藥石之言。下其箚備局。備局回啓以?獵數語。上責其失本指。然竟格不行。時西事急。有識皆憂。獨朝廷醉而不醒。公抵書時宰曰。不出今冬。必有奴警。有備無患。兵不先辦。不可以應猝。昔賢言也。豈諸公計不出此哉。其冬。奴大擧入寇。會稽之恥。江漢難?也。丁丑春。上還都。卽宣召。公病。力三上章辭。上批曰。頃在山城。思卿數數。今卿雖病。與予義休戚是同。其速上來。公惶恐。?疾乘舟入京。上遣內醫看病。藥物交道。公上箚略曰。敗軍失律者。卽軍中誅之。古今常法。張紳,金慶徵等有何可鞫之情耶。李叔蕃定社元勳。獻廟以驕恣削其勳籍。紳陷沒宗社之罪。孰與驕恣。殿下不正邦刑。使之自盡。是何足解神人之憤。聞紳之自盡也。直入其家而死。國法刑人於市。與衆棄之者安在。金吾郞失職之罪不可赦。臺諫尙?無言是何意。大亂之後。在朝之臣。當洗濯私意。一心奉公。庶幾回天意挽國勢。今不有一國公是非。唯以濟私爲急務。終置國家何地。上答曰。箚辭甚當。予亦有失。於是金慶徵,姜晉昕等。臺諫更請按律。五月。拜判中樞。辭以病。留邸數月乃歸。脩撰李?建白。金某力量才識何處得。雖有眼病。聰明不衰。宜召致京中。諮諏國政。上允之。遂召公。公再辭以病。批曰。予知卿忠誠。言論過人遠甚。欲置卿都下。冀補不逮。公又箚堅懇。上終不許。不得已入京。備局奏曰。金某眼病雖重。精神猶夫昔。請差堂上。在家待事。公固辭還鄕。辛巳。朝廷改脩宣廟實錄。大提學李植與摠裁洪相瑞鳳奏曰。金某熟?典故。當今一人。史筆證定。必待此人。請與同事。上允之。授公判中樞兼春秋館事。降旨召公。連上書辭不獲。赴召至驪州病甚。封疏不待批而還。癸未五月四日。卒于忠州私第之正寢。得年六十三。訃聞。上震悼輟朝。賜祭?賻加等。卜得其年八月十八日己卯。葬于槐山砧嶺坐子向午原。從先兆也。葬事官?焉。不?嘗讀麗史。史稱金方慶忠直信厚。器宇弘大。多識故典。斷事無差。公非苗裔耶。何酷似也。公之內行之脩。潔廉之操。無分寸之私。雖平日不相能者。亦無間言。至其爲國?冊。料敵懸斷處。則宜世之淺之爲丈夫者聞公言。適適然驚也。乙亥夏。奴差不用我。遽用其馬抵京。公曰。奴必自牧我東郊。察我國東形勢。林慶業之見脅也。公曰。吾知慶業爲人非知死不避者。終必亡矣。其後卒皆如公言。自古忠智之士。遇所賢之主。言無不聽。計無不行。故亂可治危可安。臣主俱榮。垂名後世。公之忠智。奚減古人。公之際遇仁祖亦足千古矣。有大事。上必問公。公有言。上必稱其忠誠才智而增秩以奬之。然終於此而已。榮用其一二猶未也。趙營平金城方略。漢庭公卿皆不許。獨魏相任必用。遂成平羌功。當公之時。無乃相無相耶。公於書。過眼終身不忘。記性天得也。淹貫諸史。旁通傳記。學士大夫人或?精而能之者有之。至於歷代制作。憲章文物。吏事財貨囊?細?。了了阿堵中。古有如公者否。在己巳。金人送參數千斤。要換靑布。我以米布廢居以應之。間五年。金人又責其未準數者。外內有司之臣。蓬目糊心。茫然莫記。上使之問公。公口誦列邑分受多寡及道臣與備局啓日月。列書無疑。後得其薄?校。無毫髮差。上乃歎曰。希世聰明。其?童子時。偶於人家壁記田結瞥眼者。亦終身不忘。公可謂異人哉。仁廟末當置相也。注意在公。而公病已無可爲者。公以文章視小技。不事雕琢爲工。其所疏章大論。操紙立就。氣健詞暢。人自不及云。內子慶州李氏。益齋先生齊賢之後。贈承旨郡守大遂之女。十七歸公。柔嘉淑明。與公同年生。後公十年而終。壽七十三。?于公墓。凡擧二男三女。長郡守?。次卽觀察公。女長。司諫李道長。次郡守金弘錫。次承旨閔點。側室子曰變。曰巒。郡守娶直長尹誠得女。無子。以觀察第一子秋萬爲後。生員。觀察娶正言許實女。生二男一女。長后郡守者。次夭。女徐敬祖。李道長有四男四女。元禎。文科府使。元祿文科。元禮早死。元祉。女某,參奉張。金弘錫有四男五女。濟,澳。餘幼。女某。閔點有四男三女。安道,宗道。文科待敎。弘道,周道進士。女幼。銘曰。
先喆有言曰。目徹爲明。耳徹爲聰。心徹爲智。智徹爲德。執是四者。繩古今稱人才者。信乎具全之十難一得。?哉荷潭金公。四徹具於其性。便便巨腹貯萬卷兮。歷代理亂事跡孰逃乎?眼之炳。遠之夷翟情僞。近之同朝所爭。事後當成敗效於指屈兮。其心與知合爲一德而爲衡?柄。讀公二三疏箚兮。可見忠之盛心之公無?質大昊。皇覽爾之誠忠非不足兮。胡使燭之武用之不蚤。?遠哉上洛爲麗朝蓍龜兮。公今以其緖追其?而趾其美。縱爵位大年之少遜?祖兮。夫孰不曰此祖此孫邈千載而一軌。
6. 신도비 (2003. 5. 12. 항용(제) 제공)
1)신도비 해설
<충익공 하담 김시양 신도비> (忠翼公 荷潭 金時讓 神道碑) (2005. 5. 9. 항용(제) 제공)
이 비는 조선조 인조때의 名臣인 하담 김시양(荷潭 金時讓)의 신도비이다. 이 비는 1670년(현종11년) 8월에 충익공의 次子인 김휘(金徽. 현종조 이조판서 역임)가 주선하여 세운 것으로 당대의 명문장가인 조경(趙絅. 漢陽人. 翼元公 金士衡의 후손인 金瓚의 사위. 현종조 이조판서 역임. 청백리 녹선)이 비문을 짓고 당시의 최고 서예가인 이정영(李正英. 全州人. 이조판서 역임)이 쓴 것이다.
이 비는 원래 현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있는 취묵당 가기 직전의 옛 길가에 세워져 있던 것인데 도로의 폐쇄로 인해 1975년경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형적인 조선조 신도비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이 비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양질의 화강암과 웅장한 규모, 名文과 名書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약 3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풍화 마멸된 곳이 전혀 없는 것으로 더욱 유명한 비이다
2) <번역문>
지금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인 김휘(金徽)씨가 기절(기節: 감사의 지휘 깃발)로 조정(朝廷)에 인사하러 지나가는 길에 불초(不肖)한 본인 경(絅)을 용담(龍潭)가로 찾아와, 전임 돌아가신 대부(大夫)의 벼슬한 내력과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을 저에게 주며 말하기를, "돌아가신 분의 묘에 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나 지금까지 아름다운 제사돌을 뚜렷이 새기지 못하였사오니, 원컨대 집사(執事: 13,4세 더 되는 이에 대한 존칭)께서는 불초(不肖)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관대히 여겨 주소서. 저의 돌아가신 군자를 은혜로써 빛내주지 않으시면 저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저는 예로써 사양하기를, "저는 정신이 삭아지고 머리털이 누렇게 되었습니다. 어찌 필연(筆硯: 붓과 벼루)을 다스릴 시절이라 하오리까? 돌아보건대, 공(公)은 나와 세대를 같이 하면서,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을 밝히고 사(私)를 억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나라를 위한 책임을 맡음에 있어서는 억울하게 죽음에 이르더라도 약해지지 않으신 분은 오직 먼저 가신 상공(相公) 한 분 뿐이셨습니다. 불두불결(佛頭不潔)의 꾸짖음을 근심하여 관찰사(觀察使)공(公)이 어버이를 현창(顯彰)하려는 성의와 평생토록 뭇 사람에게 읽히게 하려는 뜻을 막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행장(行狀)을 살피건대 공(公)의 휘(諱)는 시양(時讓)이요, 자(字)는 자중(子中)이다. 처음의 이름은 시언(時言)인데, 중년(中年)의 혐의(試題사건으로 鐘城과 寧海에 유배된 일)를 피해야 했기에 이름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호(號)는 하담(荷潭)이다. 그 선조는 신라왕의 후예이다. 휘(諱) 방경(方慶)이 있는데,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장수와 재상으로 드나들었고, 큰 공과 높은 절의(絶義)는 이하(夷夏: 우리 나라와 중국)에 떨쳐 빛났으며,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다. 그 후 그 자손 중, 10의8·9를 찾아보면 상락(上洛: 安東)에 본을 두고 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말한다면, 좌사간(左司諫) 고(顧)는 감찰(監察) 맹렴(孟廉)을 두고, 감찰이 전농(典農) 철균(哲鈞)을 두고, 전농(典農)이 사의(司儀) 수형(壽亨)을 두고, 사의가 증참판(贈參判) 언묵(彦默)을 두고, 참판이 진사(進士) 석(錫)을 두었는데, 이 분은 외종 기복재(奇服齋)의 기이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은거(隱居)하다가 세상을 마치셨으니, 이 분이 공의 황고(皇考: 先考의 尊稱)를 낳았다. 황고(皇考)의 휘(諱)는 인갑(仁甲)인데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증좌찬성(贈左贊成)이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원주에서 절사(節死)한 제갑(悌甲)의 아우이다.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서윤(庶尹) 이곤(以坤)의 따님이다.
공(公)은 만력(萬曆) 신사(萬曆 辛巳: 1581년)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두각이 특이하고 기품이 우러러 보였다. 찬성공(贊成公:아버지)이 공(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하는 말이 "우리 문중을 크게 빛냄은 너에게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널리 듣고 뜻을 굳게 하여 갔다. 12~14세에 거듭 부모상을 당하였는데 전쟁과 흉년이 갈마들 때이므로 공이 외로운 아이로서 맡아 하느라 파리하여도, 마치 장성한 사람과 같이 하므로 듣는 자가 모두 칭찬하였다. 복을 벗으면서 비로소 학문에 몰두하며 책읽기를 쉬지 않았다. 드디어 문사(文辭)가 하루아침에 뛰어올라 장옥(場屋: 시험 보는 장소)에서 휘두르니 서울에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에 과거시험에 올라 뽑히게 되어 괴원(槐院: 承文院)으로 들어갔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삼정승(三政丞)이 공을 한 번 보고는 "나라의 큰 그릇이 될 자"라고 인정하였고, 논자(論者)들은 사필(史筆)로는 공(公)을 빼고는 적임자가 없다고 하였지만, 당국에 거슬리어 천거(薦擧)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에 당상관이 된 후 무오년(戊午年: 1608)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돌아가시자 모든 장사를 지내는 일과 성대한 일을 모두 기록하도록 위촉(委囑)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쉬지 않고 하건만 공은 홀로 여유가 있었다. 을유년(乙酉年: 1609)에 의랑지제(儀郞知制)의 교지(敎旨)를 받고 승진하였으며, 경술년(庚戌年: 1610)에 하지(賀至)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서울에서와 같이 용혜문승(用惠文繩: 일을 처리함에 마치 먹줄을 치듯 잘 처리함)하여 같이 간 통역관이 손을 소매에 넣고 춥지도 않은데 덜덜 떨었다. 그 다음해(1611. 광해3년)에 돌아와 알현(謁見)하며 듣고 본 것을 기록하여 논하면서 "오랑캐의 형세가 번질 것 같이 보이니, 우리나라가 사신을 보내려면 요동(遼東)길은 믿을 수 없으니 바닷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공(公)이 높은 눈으로 십 년 뒤의 일을 먼저 본 것이었다. 그 다음해(1612. 광해4년)에는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어 시험을 관장(管掌)하게 되었는데, 여러 소인들이 시제(試題)를 들어 임금인 상감을 몰래 풍자하였다고 잡아 가두기를 청하였다. 정판서(鄭判書) 세규(世規)는 공(公)과 굳게 사귀었는데, 수레가 광릉(廣陵)길을 지나는데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지만, 공(公)의 안색은 태연(泰然)하였고 정(鄭)은 오래도록 한탄을 하였다. 대질을 마치자 금부(禁府)에서는 극율(極律)에 처하기를 아뢰었다. 광해군은 유예(猶豫)하기를 삼일(三日)이나 하였다. 그런데 공은 옥에서 잠자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윤효선(尹孝先)이 같은 참시관(參試官)으로서 체포되어 왔었는데, 공을 발로 차 일으키며 하는 말이 "이게 어느 때인데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가?" 하니 공은 웃으며", "삶과 죽음은 천명(天命)이라."라고 말하였다. 백사(白沙) 상공(相公: 李恒福)의 변명을 빌려 사형에서 감형(減刑)되어 북방 종성(鍾城)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공은 시로써 말하기를 "마음과 행동이 본래 태양을 속이지 아니 하였으니 길하고 흉한 것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묻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18. 광해10년)에 영해(寧海 : 경북 영덕)의 북쪽 언덕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니 편여(편輿: 대나무로 엮은 가마. 죄인이 타는 가마라는 뜻)를 타고 남북 수 천리를 비틀거린 것이 십 여 년이지만 조금도 곤란(困難)하고 어려워하지 않고 어떤 경우든 곤궁함에 안주하였다. 전적(典籍)을 탐독하여 그 깊고 넓기가 끝이 없어, 천고(千古)의 이난(理亂), 시비(是非), 득실(得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 같았는데, 이는 훗날 곳곳에 쓰였는데 모두 옛날을 상고한 힘이었다. 육진(六鎭)이 변방의 끝이 된 지가 무릇 오래 되었는데, 공의 구강(口講: 입으로의 강의)과 지도를 받아 재목이 된 자로 유명한 이가 많았으며, 추천에 오른 자가 서로 벼슬을 하였다. 공(公)이 죽자 공(公)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아 공(公)을 현인(賢人)에 끼어 제사 지냈는데, 이는 조주(潮州: 지금 중국의 廣東省潮安縣) 사람들이 한문공(韓文公)을 사당(祠堂)에 모셨던 것과 같은 도리였다.
이 때 토목사업으로 농사를 크게 그르치게 되자 조정에서는 속금법령(贖金法令)을 만들어 여러 귀양간 자들에게 이를 내렸는데, 후환이 모두 두려워 영(令)에 따랐으나, 다만 공(公)과 무숙 임숙영(茂叔 任叔英)만은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죽음보다 싫어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킨 무리 중에 끼어서 예조·병조의 정랑(正郞)으로 옮기더니, 유장(儒將)이 추천하여 玉堂(홍문관)으로 올라가고, 수찬(修撰)을 거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품계를 뛰어 수여되었으나, 최정승 명길(崔政丞 鳴吉)의 이끌음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공(公)이 한명련(韓明璉)이란 사람이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때 명련(明璉)은 순변사(巡邊使)로 용만(龍灣)에 주둔하고 있었고, 최정승(崔政丞)이 실은 공(公)이 호랑이의 밥이 될까 걱정한 것이었다. 가을에 교리(校理)로서 암행어사가 되어 북방을 안찰(按察)하게 되었는데 순무사(巡撫使)까지 겸하였다. 활이(猾吏: 정치를 간악하게 하는 관원)는 쓰러지고 수졸(戍卒: 국경을 수비하는 관원)은 깨어나게 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에 반역자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도체찰사 완평부원군(都體察使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에 반역을 했는데, 이때 사람들은 서로 피하였지만 공은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따라 섬기며 부체찰사(副體察使) 이시발(李時發)과 더불어 앞에서 척후(斥候)를 하였다. 당시 일이 급하여 한 군사도 도와 줄 여유가 없게 되었는데, 원수(元帥) 장만(張晩)을 평산(平山)에서 만나 일을 도모했으나 적은 벌써 저탄(猪灘)을 짓밟고 곧 서울을 압박하였고, 인조(仁祖)는 공주(公州)산성으로 행차하였다. 방어사(防禦使) 정충신(鄭忠信)이 먼저 안현(鞍峴)에서 적을 부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여러 장수가 의심하였지만, 공이 힘껏 그 계책에 찬성하여 갑자기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원수(元帥)는 상공(上功)이요, 다음이 공(公)이 이등(二等)이었지만, 상감이 이서(李曙)의 말을 받아들여 문사(文士) 세 사람을 삭훈(削勳)하였는데 공이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 후 헌납(獻納)이 되었고 다시 교리(校理)로서 진강(進講)하여 임금의 마음에 많은 절의를 쌓게 하여 그 언급한 것들은 묘미가 있었다. 겨울에 추천이 되어 전좌정랑(銓佐正郞)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겸하고 을축년(乙丑年, 1625. 인조3년)에 응교(應敎)로 승진되어 문학(文學)을 겸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626)에 인헌왕후(仁獻王后: 仁祖의 母后인 具氏)의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기용되었는데 그 공로로 비자(緋紫: 벼슬이 대감의 지위)를 더하였다. 얼마 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赴任)하였다. 60여 고을의 민정(民情)을 살펴 그릇된 풍속을 순박하고 두텁게 하는데 손수 행하였고, 안건(案件)에 적체(積滯)되는 문서가 없었다. 선산(善山)에 한 간악(奸惡)한 백성이 사소한 원한 때문에 많은 선비를 해치려 하므로 공이 그 무고를 발각하고 법으로 이를 다스렸더니 남도의 인사들이 칭송하는 말이 그치지 않았다. 정묘년(丁卯年: 1627)에 조정과 청(淸)이 조약하여 여러 도에 군병을 없애게 되었는데, 갑자기 급보에 이르기를, "적이 우리의 팔장(八將)을 잡아갔으니 여러 도의 군병을 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총융사(總戎使) 이서(李曙)가 원수(元帥)와 함께 한 장계(狀啓)였다. 공이 마침 호조사(號召使) 정우복(鄭愚伏: 鄭經世. 1563-1633. 학자. 字는 景任. 호는 愚伏) 선생과 함창(咸昌)에서 만날 때인데, 공은 "이 보고는 거짓말이라."하고는 덮어두고 발표하지 않았다. 우복(愚伏)이 이를 미심쩍어 했는데 그 후에 들으니 과연 이(李)의 보고는 거짓이었다. 을사년(乙巳年: 1629) 정월에 용후(龍喉)에서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平安道 觀察使 兼 體察副使)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평양(平壤)에 도착한 지 며칠만에 변방 아전의 급보가 있었는데, "금병(金兵) 수 천 명이 강을 건너온다."는 것이었다. 공(公)은 "이것은 반드시 금인(金人)이 한인(漢人)을 쫓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큰소리로 떠들썩하게 위에서 듣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 후 금인(金人)이 선천(宣川), 철산(鐵山) 지방을 돌다가 우리 백성을 한 사람도 데려 가지 않고 돌아갔다. 이 때를 당하여 관서(關西)에서는 왼쪽에서는 모문룡(毛文龍)을 접촉하고, 오른쪽에서는 금인(金人)을 대접하면서 그 변화의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였다. 공(公)은 그 정세(情勢)를 자세히 살피고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그것을 알아 맞췄다. 모장(毛將)도 그 기교를 부리지 못하고, 금인(金人)도 역시 시일을 질질 끄는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름 4월에 모장(毛將)이 장차 군문(軍門) 원숭환(袁崇煥: 당시 明의 遼東經略)을 영원(寧遠: 지금의 중국 遼寧省 興城市)에서 군사회담을 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공(公에)게 명하여 섬 안(: 가島를 지칭)에 가서 전별하라고 하였다. 공(公)이 접반사(接伴使) 홍착(洪)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모장(毛將)이 이번에 가면 반드시 못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그 후 몇 개월 뒤에 선천(宣川)지방의 보고에, "몇 일 날 군문(軍門: 遼東經略 袁崇煥)이 죄를 선언하며 모장(毛將)을 베었다."고 하였다. 공(公)은 정치(政治)하기를 남(南)에서 시작하여 서(西)에서 마칠 때까지 그 충성(忠誠)을 다하고 지략(智略)을 쌓아 멀리 보는 계책을 도모(圖謀)하였고, 증거를 붙잡는 것과 같은 것은 영남(嶺南)에서 뛰어났다. 공(公)이 오랑캐를 근심한 것이 아마 계해년(癸亥年: 1611) 조천(朝天: 중국 황제를 뵈는 것)하던 날부터였던 것 같다. 경오년(庚午年: 1630)에 가도(가島)의 졸(卒) 흥치(興治) 적(賊)이 총병(摠兵) 진계성(陳繼盛)을 죽였다. 공이 상소(上疏)하기를, "흥치(興治)는 우리나라 영토에 끼어들어 조천(朝天: 명나라) 대장(大將)을 제멋대로 살해한 자이므로 의리로써 이를 치지 않을 수 없으니 토벌을 청합니다."고 하자, 상감께서는 이서(李曙)와 정충신(鄭忠信)을 장수로 삼아 함대(艦隊)를 통솔하고, 보병으로는 충신(忠信)으로 하여금 치도록 하였는데, 이들이 출정인사를 드릴 때 군사가 적음을 걱정하니 임금은 말하기를 "감사(監司) 김모(金某)는 지략이 충분하여 많은 계산을 했을 것이므로 나는 서쪽은 근심하지 않노라."고 하였다. 이때 조정의 신하 대개가 흥치(興治)의 반란을 우리와 관계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채찍이 비록 길다 해도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함을(역량이 미치지 못 함을) 어찌 하리요. 오직 승평(昇平)한 모습이 되려면 공(公)의 계책일 뿐이었거늘 공이 또 말하되 "노(奴: 金人)가 중국을 어지럽히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한번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가도(가島)를 관(官)이 지키는 지 자주 물었습니다. 지금 만약 흥치(興治)를 도적이라 이름하여 치는 것은 다만 나의 허물을 긁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조천(朝天: 명나라)에서 들으면 반드시 환공(桓公), 문공(文公)의 거사라고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며, 충의의 소리가 천하에 은은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상감께서 크게 감동하여 듣고 반드시 공(公)의 말을 쓰고자 하였으나, 원훈(元勳)으로 걸출한 자도 겨우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자가 많았다. 흥치(興治) 역시 듣고 공에게 체념하였지만, 공이 서문(西門: 평안도의 뜻. 이때 김시양(金時讓)은 평안감사(平安監司) 겸 체찰부사(兼 體察副使)였다. 를 떠났으나 반군(叛軍)을 치려는 군사는 드디어 위축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 봄에 특명으로 상감을 대하였는데, 흥치(興治)의 일을 공에게 물으므로 공은 극진히 적의 궁한 것을 다 아뢰며, "금인(金人)에게 투항(投降)하지 않으면 갈 땅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어떤 대신이 나와서 이해(利害)를 비교하며 말하였지만 공이 즉시 조금도 굴함이 없자 어찌 할 수 없었다. 흥치(興治)가 과연 노(奴)에게 투항(投降)했으나 심세괴(沈世魁)·장도(張燾) 등이 모의하여 그를 베어 죽였다. 갑자기 명(明)의 병부(兵部)로부터 공문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흥치(興治)가 가도(가島)를 거점으로 반했는데 여태까지 귀국(貴國)의 일을 맡은 신하가 충성과 용기를 꾀하지 못했다면 제·노(齊·魯: 齊는 큰 나라이고 魯는 작은 나라로 明과 朝鮮을 뜻함)의 국경(國境)이 조금도 마르고 깨끗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하며 크게 표창하자, 임금이 이 공문(公文)을 내려 여러 재상에게 두루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땀을 흘리었다. 여름 4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홍주(李弘胄)가 면직(免職)하니 상감께서 특명으로 공을 발탁하여 대리하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6월에 오랑캐가 요새를 뚫고 선천, 곽산 지방을 군사로 얽자 조정 의논으로 공을 천거하여 원수(元師)를 삼고, 정충신(鄭忠信)으로 부장을 삼아 출발하니 도성이 물 끓듯 하되 공은 태평하였다. 충신(忠信)이 안주(安州)에 미처 도착하기 전에 오랑캐는 이미 가 버렸다. 겨울에 김정승 유( )가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교체하게 되니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김모(金某)의 충신지무(忠信智武)가 이 직책을 못 맡겠는가?"라고 하니, 비변사(備局)가 합사(合辭)한 장계(狀啓)에 말하기를, "상감께서 이르신 것과 같사옵니다."하자, 임금은 곧 명하여 공(公)을 숭정(崇政)으로 올리고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를 수여하였다. 공(公)이 인조(仁廟)의 알아줌을 받은 것은 서방(西方 : 황해도, 평안도)의 근심을 없게 한 것이다. 여러 신하 중에는 "이극(李克: 전국시대 魏의 大臣. 子夏의 제자. 일찍이 翟璜의 추천으로 中山相이 되었다.)이 온 위(魏)에 문장을 이뤘으나 대신에 추천되기에 그쳤던 것과 같이 동량(棟樑)이 될 큰 재목을 외얼( : 관직의 하위직)로 씀에 그치는 것은 아깝도다."라고 하기도 했다. 임신년(壬申年:1632)에 지경연 판의금부사(知經筵 判義禁府事)를 겸하였다. 가을에 오랑캐가 대장(大將) 만호(滿胡)를 보내어 인목왕후(仁穆王后: 宣祖의 繼妃 金氏)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또 소도리(所都里)를 보내어 세폐(歲幣)를 요구하면서, 모두 조칙(詔勅)이라 칭하며 큰소리로 속이고 아주 흉악하게 하였지만, 공(公)은 비밀을 누설(漏泄)하지 않고 가마에 앉은 군자처럼 근심으로 여기지 않으며 '거짓 공갈'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혹은 '오랑캐는 원래 문자(文字)를 모르니 그들의 말이 비록 개처럼 짖는다 해도 두려울 것이 못된다'고 말하였다. 공은 이에 대한 말씀을 올리기를 "오랑캐가 동맹(同盟)을 깨는 것은 이미 드러나 그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방어지책(備禦之策)은 비록 늦었으나 세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계책을 세우는데 삼남출신(三南 出身) 중 무예(武藝)를 배운 사람을 뽑아 관서(關西)에 들어가 그 곳 토민(土民)들과 더불어 훈련하면 장차 오랑캐를 막는데 힘이 될 것입니다."고 하자 당시 조정의 의논(議論)이 모두 "공이 겁을 낸다."고 하므로 공(公)이 웃으며 하는 말이, "내가 겁을 낸다면 누가 겁을 감당하겠는가?"하였다. 이 의견을 변치 않고 시종 입이 쓰도록 다투었으나 당사자들에게 저지를 당하여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공(公)이 또 상소(上訴)하는 말에 "오랑캐에게 바치는 세폐(歲幣)는 중국 본토에서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랑캐가 처음으로 오천(五千)순(純)을 요청하는데, 허락하지 않으면 뒤에 오히려 이를 후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신득연(申得淵)을 보내 세폐(歲幣)를 감하여 달라고 심양(瀋陽)까지 갔으나 배척(排斥)을 당하였고, 또 김대건(金大乾)을 보내어 화의(和意)를 끊으려 하였는데 공(公)을 만났다. 서방으로 순행(巡行) 돌다가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에게 하는 말이 "준비가 없이 전쟁을 열어도 되겠는가? 대건(大乾)이 갖고 가는 국서(國書)는 강한 오랑캐를 억지로 도발(挑發)하게 할 것이 틀림없다. 내가 어찌 몸을 아껴 국가의 대계(大計)에 큰 잘못이 있음을 근심하지 않으랴?"고 하였다. 드디어 대건(大乾)을 머무르게 하고 상소를 극진히 올려 그 불가함을 아뢰었다. 상감께서 크게 노여워하며 "사신을 마음대로 붙잡아 둔 것을 비변사(備局)에서 논의하라."고 하였다. 비변사(備局)는 공을 잡아다 국문(鞠問)하기를 청하였고, 체포한 관리가 이에 서류를 마치자 공(公)은 영월(寧越)로 귀양(歸養)을 갔다. 대건(大乾)은 금(金)에 이르렀으나 쫓겨나게 되었고, 조정은 비로소 공에게 죄 준 것을 후회하여 풀려나서 고향[田里]으로 돌아왔다. 그 후 어느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충성과 지혜를 가진 선비를 버리는 것은 국가의 헤아림이 아니다."고 하여 갑술년(甲戌年: 1634)에 지중추(知中樞)로 복직(復職)되었다가 경윤(京尹)으로 옮기고, 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 세자좌부빈객(戶曹判書 兼同知春秋 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 9월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는데 무릇 두 번 병조를 잡은 것이다. 무인으로서 재주는 있지만 제공될 지위가 없는 자들도 벼슬을 하게 되었다고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공도(公道)가 다시 시행되는구나."라고 하였다. 공(公)이 일을 본 지 10일만에 눈병으로 사직(辭職)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635)에 강화유수(江都留守)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또 병으로 사직(辭職)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에 청백리(淸白吏)에 뽑혀 숭록(崇祿)에 올랐으나 여름에 물러날 것을 결심하고 출발하면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사사로이 은혜를 입음이 여러 신하보다 특별하여 지금 물러나 돌아가는데 한 마디 말이 없다면 애국충적(愛國忠赤)을 어디다 말하리까? 이 눈 병 신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 말씀은 다섯 가지 조목이온데, 첫째 관절(關節: 몰래 청탁하는 것.)을 금함이요, 둘째 탐오(貪汚)를 다스릴 것이요, 셋째 방납(防納)을 막을 것이요, 넷째 사천양처(私賤良妻)를 폐지할 것이요, 다섯째 사치(奢侈)를 개혁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것이 모두 당시의 폐단(弊端)에 맞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찰(機察: 정보사찰)을 말하였는데, "기찰(譏察)은 반드시 사람과 나라를 망친다."고 했는데 이는 무릇 사람들이 알면서도 감히 말을 못한 것은 관장하는 사람들인 훈귀(勳貴)들이 두려워서였다. 공은 절실하게 새기게 언급하였는데, 상감이 보시고 약석(藥石)같은 말이라 높이 장려하고 그 상소를 비국(備局)에 내렸다. 그러나 비국(備局)에서 몇 마디로 줄여서 회계(回啓)하자 상감은 그 잘못된 근본을 책망하였으나 결국은 바로 잡아 실행되지 못했다. 그때 서쪽의 일(오랑캐 침략)이 급해졌음을 알고 있어 모두 근심하였지만 홀로 조정은 취(醉)하여 깨지 못하였다. 공이 당시의 재상들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금년 겨울이 넘지 않아 반드시 오랑캐의 경보가 있을 것입니다.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군사에 대한 준비가 먼저 없으면 갑자기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은 옛 현인(賢人)의 말입니다. 어찌 제공(諸公)이 헤아리어 이것을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해 겨울에 과연 공의 말과 같이 오랑캐가 군사를 몰고 들어왔다. 회계(會稽)의 부끄러움은 한강의 물로도 씻기 어려웠다. 정축년(丁丑年: 1637) 봄에 상감이 환도(還都)하여 바로 공(公)을 불렀으나 병으로 인해 힘껏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상감께서 비답(批答)하기를 "요전에 내가 남한산성에 있을 때 자주 경(卿)을 생각했었다. 지금 경이 비록 병중에 있다고 하나 나와 더불어 의롭게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고자하니 당연히 빨리 올라오라."고 하자, 공은 황공(惶恐)하여 아픈 것을 무릅쓰고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상감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물로 간병하며 말을 나누었다. 공(公)이 상소문에서 대략 말하기를 "패군(敗軍)하여 군율(軍律)을 잘못한 자를 즉시 군중에서 베는 것은 고금(古今)의 불변의 법칙입니다. 장신(張紳)·김경징(金慶徵) 등은 얼마나 추궁할 사정이 있었습니까? 이숙번(李叔蕃)은 정사원훈(定社元勳)인데도 태종(太宗)은 그의 교만 방자함 때문에 그 훈적(勳籍)을 삭탈(削奪)하였는데, 장신(張紳)이 종사(宗社)를 함몰케 한 죄를 교만 방자함과 비교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나라의 형(刑)을 바로 잡지 않아 자살하게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어찌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겠습니까? 장신이 자살한 것을 듣건대, 바로 자기 집으로 들어가 죽었다고 하는데, 국법에 형(刑)을 받은 사람은 저자와 군중에 버려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금오랑(金吾郞)의 직무를 잘못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데, 대간(臺諫: 司憲府와 司諫院)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큰 전란이 있은 후에 조정의 신하는 사심(私心)을 깨끗이 씻어내고 일심으로 봉공(奉公)하게 하여 어지간히 하늘의 뜻이 돌아오도록 하여 국세(國勢)를 만회(挽回)하려는데, 지금 한 나라의 시비(是非)를 공정하게 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움만 건지는 것을 급무(急務)로 하니 나라가 끝내 어느 지경에 이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감이 답하여 이르기를 "상소의 말이 심히 마땅하도다. 나도 또한 여기에 잘못이 있노라. 김경징(金慶徵)· 강진흔(姜晋昕) 등은 대간(臺諫)의 안율(按律)을 다시 청하라."고 하였다. 오월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명하니 병으로 사양하고 수개월을 객사(客舍)에서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수찬(修撰) 이조(李稠)가 건의하여 아뢰기를, "김모(金某: 時讓)와 같은 역량(力量)과 재식(材識)을 어느 곳에서 얻겠습니까? 비록 안질이 있다고 해도 총명이 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불러 올려 서울에 두고 국정에 자문하소서."라고 하였다. 상감이 윤허(允許)하여 드디어 공을 부르니 병으로 두 번이나 사양하였다.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내가 경의 충성을 아노라. 언론(言論)이 남보다 뛰어나 심원(甚遠)하니 경(卿)을 도하에 두고 보좌해주기 바라니 발걸음을 삼가지 말라."고 하였다. 공(公)이 또 간곡(懇曲)하게 청하여도 상감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부득이 입경(入京)하였다. 비국(備局)이 아뢰되, "김모(金某)는 눈병은 비록 중하나 정신은 옛날과 같으니 청컨대 당상(堂上)에 임명하고 집에 있으면서 모시게 하소서."하였다. 공(公)은 굳이 마다하고 환향(還鄕)하였다. 신사년(辛巳年:1641) 조정이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하게 되었는데 대제학(大提學) 이식(李植)과 총재(摠裁)인 재상(宰相)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김모(金某)는 전고(典故)를 잘 아는지라, 이제 한 사람의 사필(史筆)로 증거를 정함에는 반드시 이 사람에게 기대하오니 함께 일하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상감이 윤허(允許)하고 공(公)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주었다. 교지(敎旨)를 내려 공(公)을 불렀으나 계속 글을 올려 사양하다가 부르심에 가기로 마음을 굳혀 여주(驪州)까지 왔는데 병이 심해져 상소하고 비답(批答)을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계미년(癸未年: 1643) 5월 4일에 충주의 사제(私第)에서 돌아가니 나이가 63이었다. 부고(訃告)를 상감에게 아뢰니 크게 슬퍼하며 조회도 걷고 부의(賻儀)와 가자(加資)를 내렸다. 그 해 8월 18일 기묘일(己卯日)을 택하여 괴산(槐山) 침령(砧嶺: 현 능촌리. 일명 방아재)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선영(先塋)을 따라 장사지냈다. 장사(葬事)는 관비(官費)로 하였다. 제가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읽는데 김방경(金方慶)을 칭송하기를 "충성이 곧고 믿음이 두터우며, 인품의 그릇이 크며, 고전(古典)을 많이 알아 일을 결단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였다. 공(公)이 바로 이 자손(子孫)이 아닌가? 얼마나 흡사한가? 공은 내행(內行)을 닦고 청렴(淸廉)함을 지키고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비록 평소에 서로 지내지 않던 자도 또한 간격이 없었다. 나라를 위하는 계획(計劃)과 책략(策略)에 이르러서는 적을 짐작하여 위험스러움을 단호히 처리한 즉, 마땅히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들어보지 못하여, 장부(丈夫)라고 하는 자들도 공의 말을 들으면 마침 놀라움을 느끼곤 했다. 을해년(乙亥年: 1625) 여름에 오랑캐 사신(使臣)이 우리 역마(驛馬)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네 말을 사용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반드시 우리 동쪽에 들어와 말을 먹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동쪽의 지형을 살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경업(林慶業)이 오랑캐의 협박을 받을 때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임경업(林慶業)의 사람됨을 아는데, 죽을 줄 알면서 피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끝내는 기어이 도망하여 그 후에 죽었는데 모두 공의 말과 같았다. 예로부터 충성(忠誠)과 지혜(智慧)를 가진 선비가 어진 임금을 만나면, 하는 말을 듣지 않음이 없고 계책이 행하지 않음이 없는 고로, 난리가 나도 다스릴 수 있고 위태로워도 편안하게 할 수 있었으니, 신하와 임금 모두가 영화(榮華)롭게 후세에 이름을 전했는데, 공의 충지(忠智)가 어찌 옛사람들보다 못하랴? 공이 인조(仁祖)와의 만남의 기회는 역시 영원한 것이었다. 큰 일이 있으면 상감은 반드시 공에게 묻고, 공의 말이 있으면 상감은 반드시 그 충성(忠誠)과 재지(才智)를 칭송(稱頌)하였으며, 증질(增秩)하여 표창(表彰)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끝났을 뿐이고, 대책에 그 한 두개를 썼을 뿐, 여전히 미처 다 쓰지 못하였다. 조영평 금성(趙營平 金城)의 방략(方略)은 한(漢)나라 조정의 공경(公卿)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는데, 홀로 위상(魏相: ?-BC59 서한의 어사대부. 宣帝에게 직접 흉노를 치게 상소하였음)이 이를 써서 강(羌: 오랑캐의 일족)을 평정하는 공(功)을 세웠다. 공이 있을 당시에는 어찌하여 이렇게 도와주는 정승이 없었던가? 공(公)은 책에 눈이 지나가면 그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니, 기억력은 타고난 자질었다. 제사(諸史)를 침착하게 보는 동안에 전기(傳記)는 절로 통하였으니, 학사(學士)·대부(大夫) 중에 사람이 혹 단정하고 능한 자가 있지마는, 공은 역대에 제작한 헌장(憲章)·문물(文物)·이사(吏事)·재화(財貨)·역사문서 등등 세세하고 미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완료하여 이 가운데 옛것에 공과 같은 이가 또 있었던가? 기사년(己巳年: 1629)에 금나라 사람들이 인삼(人蔘) 수 천근을 보내어 푸른 베(靑布)와 바꾸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쌀과 베를 팔고 사서 이에 응하였는데, 5년 만에 금(金)나라 사람들이 또 그 수효대로 되지 못한 것을 투정하였다. 안팎의 일을 맡은 신하들은 눈이 어둡고 마음이 막혀 기억하지 못하였다. 상감이 이를 공(公)에게 묻게 하니, 공(公)이 여러 고을에서 나눠 받은 것의 많고 적음과, 각 도(道) 감사(監司)와 비변사에서 아뢴 날짜까지를 입으로 외우고 글로 썼다. 그 후에 그 장부를 구하여 맞추어 보니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었는데, 상감이 곧 탄복(歎服)하여 이르기를, "세상에 드문 총명(聰明)이다."고 하였다. 그 외에 어린아이 때 우연히 어떤 집 벽에 전답(田畓) 결수(結數)를 기록한 것을 보았는데, 잠깐 눈을 지나쳤지만 또한 일생토록 잊지 않았으니 공(公)은 이인(異人)이라 할 만하다.
인조(仁祖) 말년(末年)에 정승을 임명하려 하였는데, 공(公)을 주목하였으나 공(公)이 병으로 인하여 할 수가 없었다. 공이 문장을 하는 데는 작은 가닥만 보고 조탁(雕琢: 쪼고 다듬음)하지 않고도 만들어 냈으며, 대론(大論)으로 소(疏)를 지음에 있어서도 종이를 잡고 서서 써내려 가는데 사람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부인(夫人)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익재선생(益齋先生) 제현(齊賢)의 후손이요, 증 승지(贈 承旨) 군수(郡守)인 대수(大遂)의 따님이다. 17세에 공에게 출가하였는데 천성(天性)이 순하고 착하며 정숙하고 밝았다. 공(公)과 같은 해에 출생하였는데 공(公)보다 10년 후에 돌아가니 나이는 73이었고 공(公)의 묘에 합장(合葬)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군수(郡守) 곡(縠)이요, 차남(次男)은 바로 관찰공(觀察公)이요, 큰사위는 사간(司諫) 이도장(李道長)이요, 둘째사위는 군수 (郡守) 김홍석(金弘錫)이요, 셋째사위는 승지(承旨) 민점(閔點)이다. 측실(側室) 아들 둘이 있어 섭(燮)이라 하고, 만(巒)이라고 한다. 군수(郡守)는 직장(直長) 윤성득(尹誠得)의 딸을 처(妻)로 맞이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관찰공(觀察公) 맏아들인 추만(秋萬)으로 후사(後嗣)하였는데, 생원(生員)으로 부사(府使) 홍착(洪) 따님을 처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두니 봉지(鳳至)·인지(麟至)이다. 관찰공(觀察公)은 정언(正言) 허실(許實)의 따님을 처(妻)로 맞이하여 2남1녀를 두니 장남(長男)은 군수의 뒤를 이었고 차남(次男)은 어려서 잃었으며 사위는 서경조(徐敬祖)이다. 이도장(李道長)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원정(元禎)은 문과에 합격한 부사(府使)이고 원록(元祿)은 문과(文科)에 합격하였고 원례(元禮)는 어려서 죽고 원지(元祉)가 있으며, 사위는 참봉(參奉) 장영(張金永)·유학(幼學) 최두망(權斗望)·곽전(郭鐫)·박명징(朴明徵)이다. 김홍석(金弘錫)은 4남 5녀를 두었는데 제(濟)·오(澳) 외에는 어리고, 사위는 진사(進士) 박수검(朴守儉)·생원(生員) 안초(安초)·유학(幼學) 오한주(吳翰周)이며, 2녀는 일찍 잃었다. 민점(閔點)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안도(安道)·종도(宗道)는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임명을 기다리고 있고, 홍도(弘道)·주도(周道)는 진사(進士)이며 딸은 어리다.
명(銘)에 이르노니,
선철(先哲)의 말에
"눈이 통달한 것을 명(明)이라 하고,
귀가 통달한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이 통달한 것을 지(智)라 하고,
지(智)가 통달한 것을 덕(德)이라 하였는데,
이 네 가지를 가진 자를 고금(古今)에 인재(人才)라 칭한다."함을 믿으리로다. 그 전체 중에 열의 하나도 얻기가 어렵도다.
하담(荷潭) 김공(金公)이여!
사철(四徹)이 그 성품(性品) 속에 모두 구비되어 있도다.
불룩한 큰배에 새겨진 만 권의 책이여!
역대(歷代)의 난(亂)을 다스린 사적(事迹)
두 눈에 환한데 누가 빠져나가리.
오랑캐의 수레에 대한 사정은 그릇되게 멀리 두고
같은 조정에서 다투는 일은 가까이 하였다가
뒤에 성패(成敗)를 당하고서야 손가락을 꼽아 보게 드러남이여!
그 마음과 지식이 합하여 하나의 덕이 되고 저울이 되니
칼자루를 잡은 자는 공(公)의 두 세 개의 상소문을 읽어보시라.
충성으로 가득함과 마음의 공정함으로
바탕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볼 수 있으리니
태양 같은 황제도 그의 참된 충성이 모자라다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무용(武用)을 빛나게 일찍이 하지 못했던가?
아아! 멀게는 상락(上洛: 諱 方慶)은 고려조(麗朝)에 시구(蓍龜)였고
공은 지금 그 후손으로 그 뒤를 따라 그 아름다움을 이었으니
비록 작위(爵位)는 크다 해도 나이로는 그대의 할아버지에게 손색이 없구나!
대저 누가 할아버지의 자손(子孫)이라 아니 하리요?
멀리 천년을 이어온 하나의 자취로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後) 경술(庚戌. 1670. 현종11년) 팔월(八月) 일(日) 세움.
* 충익공 신도비 찬자 조경(趙絅)과 우리 가문의 관계에 관한 자료 (2003. 10. 11. 발용(군) 제공)
1)출전 : 미수기언(眉수記言. 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1595∼1682)의 문집)
2) 내용 : 용주(龍洲) 신도비(神道碑)
공의 휘는 경(絅)이요. 자는 일장(日章), 성은 조(趙)씨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중략----
그 해 4월(현종10, 1669)에 선영의 북쪽 10리에 있는 녹문산(鹿門山) 북쪽 기슭에 남향으로 장사하였다.
정경부인 김씨는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국초(國初)에 좌정승을 지낸 사형(士衡)의 9세손이며 이조 판서 찬(瓚)의 딸이다. 온순하며 삼가고 근칙해서 말소리가 문밖에 나가지 않았고, 시부모를 섬기매 가정에서 이간시키는 말이 없는 지가 50년이 지났다. 뽐내거나 사치하지 않았고, 공이 현달하여 구경(九卿)의 지위를 넘었어도 여알(女謁)을 행하지 않았고 뇌물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공이 칭찬하기를
“내조(內助)의 법도는 옛사람에 비해 손색이 없다.”하였다. 부인은 만력12년(선조17, 1584)에 태어나서 효종 원년(1650)에 졸(卒)하니, 향년이 67세였다. 처음에 선영의 곁에 장례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공과 합장하였다.
----후략----
3) 조경(趙絅)
1586(선조 19)∼1669(현종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며, 어머니는 증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에 파천하고 조정에서 화전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고, 이듬해 집의로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그뒤 응교·집의 등을 역임하고,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형조참의·대사간·대제학, 이조·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그뒤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에 등용,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1년 판중추부사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주집》 23권 12책과 《동사록 東#사34錄》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7. 충익공 묘비문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時讓이시고 字는 子中이시다. 鼻祖는 新羅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며, 中始祖는 高麗朝의 最高 官職인 僉議令에 오르시고 上洛郡開國公이 되신 忠烈公 諱 方慶으로 公의 十二代祖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와서 諱 顧는 左司諫에 오르셨고, 司憲府 監察 諱 孟廉, 典農寺主簿 諱 哲鈞, 贈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曾祖는 贈 吏曹參判 諱 彦默이시며, 祖는 成均進士로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이시다. 父는 永山과 比安縣監을 지내시고 贈 左贊成이신 諱 仁甲이시며, 母는 贈 貞敬夫人 南陽洪氏로 贈 左承旨이신 以坤의 따님으로 生 六男하니 第六男이 公이신데 一五八一年(宣祖十四) 正月 十日에 忠北 槐山郡 文光面에서 出生하셨다.
公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夙成하시고 言行이 반듯하시며 마치 長成한 사람 같아 주위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부친 贊成公께서는 公의 成長모습을 보시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사람이 너로구나”하고 豫言하셨다. 어려서부터 英特敏達하고 聰明하였으나 公의 나이 十三歲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해에 父親 贊成公께서 운명하시자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 十六歲가 되어 服을 벗으면서 비로소 勉學에 精進하였는데 몇 해만에 文辭가 크게 發展하여 藝苑에서 함께 工夫하던 文士들 중 公과 경쟁할 자가 없게 되었다. 公이 一六0五年(宣祖三十八. 二十五歲) 庭試文科에 丙科로 合格하여 承文院에 들어가니 三政丞인 梧里 李元翼, 一松 沈喜壽, 白沙 李恒福 등이 公의 威風 堂堂한 風體를 보고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고 극찬하였다. 一六0七年(宣祖 四十. 二十七歲)에 承政院 注書가 되었으며 그 후 禮曹와 兵曹佐郞을 거쳐 冬至使의 書狀官으로 중국을 다녀오셨다. 一六一二年(光海四. 三十二歲)에 全羅都事가 되어 鄕試를 주관할 때 왕의 失政을 비유한 試題를 출제했다는 모함에 들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白沙 李恒福 政丞의 변호로 함경도 鍾城으로 流配되었다가 六年 뒤에 경북 寧海로 量移되셨다. 公은 仁祖反正으로 十二年만에 流配에서 풀려나셨는데 이 기간에 中國歷史書, 經典, 各種 典籍 등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셨고 우리나라의 중요한 歷史的 史料가 되고 있는 부溪記聞, 紫海筆談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셨다. 公은 책을 한번 보면 그 구절을 평생 잊지 않는 天賦的인 記憶力을 지니셨는데 지나간 國家史와 政治史의 事例들을 깊고 자세하게 洞察하시어 나라의 安危와 장래를 豫見하시거나 여러 國家 重大事를 決定하는데 크게 기여하셨다. 一六二三年(仁祖一. 四十三歲)에 流配에서 放免된 公은 禮曹, 兵曹의 正郞을 거쳐 修撰官과 校理가 되신 후 암행어사로 관북지방을 按擦하다가 巡撫使까지 겸하셨다. 一六二六年(仁祖四. 四十六歲)에는 慶尙道觀察使가 되시어 임금으로부터 豹皮와 弓箭을 하사 받기도 했으며, 이때 안동에 있는 公의 中始祖이신 忠烈公(諱 方慶)의 묘역을 정비하고 床石을 마련하였으며 公의 오랜 先祖이신 新羅의 味鄒王, 文武王, 敬順王을 모신 慶州의 崇惠展을 重建하는 등 爲先事業에도 큰 공헌을 하셨다. 一六二九年(仁祖七. 四十九歲)에 嘉善大夫로 特進하시어 平安道觀察使 兼 體察副使가 되시고 十月에 兵曹叅判이 되셨다. 一六三一年(仁祖九. 五十一歲) 四月에 兵曹判書에 오르시고 六月에 淸나라 군사가 江을 건너와 곽산에 가득하므로 八道都元帥가 되시어 軍을 總察하셨고 十一月에 崇政大夫 從一品에 승진되어 四道體察使가 되셨다. 一六三四年(仁祖十二. 五十四歲) 正月에 同知中樞府事, 漢城判尹, 四月에 戶曹判書 兼 同知 春秋館事, 八月에 世子左副賓客이 되셨다. 一六三六年(仁祖十四. 五十六歲) 四月에 임금에게 다섯 가지 큰 폐단인 關節, 貪汚, 防納, 奢侈, 私賤의 폐지를 上疏하는 등 不合理한 制度의 시정을 위해 혼신의 努力을 기울이셨다. 그해 六月에 淸白吏에 錄選되셨으며 崇祿大夫 從一品에 加資되셨다. 一六三七年(仁祖十五. 五十七歲)에 丙子胡亂 후 임금이 환도하여 公을 세 번이나 불렀으나, 病으로 인해 上疏로써 사양하자 임금은 公의 病治療를 위해 內醫를 보내고 약을 하사하였다. 一六三八年(仁祖十六. 五十八歲) 五月에 다시 判中樞府事를 除授받았으나 病으로 사양하였으며 그 후 宣祖實錄을 改修할 때 公에게 春秋館事를 겸하여 주며 임금이 거듭 부르자 上京도중 驪州에 머물다가 병으로 상소하고 忠州 私第로 돌아오셨다. 이때 공은 당시의 중요한 國家事와 그 裏面事들을 예리하고 嚴正한 필치로 기술하여 오늘날 史書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荷潭破寂錄을 집필하셨다. 그 후 공은 一六四三年(仁祖二十一) 五月 四日에 六十三歲로 忠州 荷潭里 私第에서 別世하셨다. 임금께서 哀悼하며 棺槨과 造墓軍을 내려 주셨고 괴산읍 능촌리 先塋下에 安置되셨다. 그 후 一六九一年(肅宗十七)에 忠翼의 諡號를 받으셨으며 咸鏡道 會寧의 鄕祠에 祭享되셨다.
公은 평생토록 여러 高位官職을 두루 歷任하시고 文武兼全의 偉人으로서 깨끗한 吏道를 確立하는데 師表가 되셨다. 公의 性品은 嚴格하고 올곧았으며 度量과 才幹은 넓고 多才 多能하셨으며 行實은 淸白하고 매사 성실하셨다. 公事를 論議함에 있어서는 公正性을 잃지 않고 폭 넓은 雅量과 밝은 觀點으로 論하시어 西人과 老論人士들도 拒否感을 갖지 않았다. 職位가 卿相에 올랐어도 서울 근방에 한 칸의 집이 없어 항상 세를 사셨다. 妻子들이 고생스럽게 살았지만 公은 이에 安分知足하셨고 반드시 義로운 것이 아니면 取하지 않으셨다.
配이신 貞敬夫人 慶州李氏는 益齋先生 齊賢의 後孫이요 贈 承旨로 郡守인 大遂의 따님이시다. 十七歲에 公에게 出嫁하셨는데 天性이 순하고 착하며 靜淑하셨다. 公과 같은 해에 출생하셨는데 公보다 十年 後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七十三歲셨고 公의 墓에 合葬되셨다. 二男 三女를 두셨는데 長男 郡守 縠은 直長 尹誠得의 따님에게 장가 드셨으나 아들이 없어 次男 吏曹判書 徽의 맏아들인 秋萬으로 後嗣하였고, 秋萬은 生員으로 府使인 洪의 따님을 맞이하시어 두 아들을 두시니 府使를 지내신 鳳至와 麟至이다. 次男 吏曹判書 徽는 正言 許實의 따님에게 장가드시어 二男 一女를 두셨는데 長男은 伯父의 뒤를 이으셨고 次男은 어려서 잃었으며 사위는 徐敬祖이다. 公의 큰사위는 司諫 李道長이요, 둘째 사위는 郡守 金弘錫이요, 셋째 사위는 吏曹判書, 刑曹判書를 거쳐 左贊成에 오른 閔點이다. 側室의 아들 둘이 있는데 燮과 巒이다.
公께서 歿하신지 三百六十三年이 지난 후에 比安公 先祖님의 墓碑 建立이 계기가 되어 公을 追慕하는 後孫들의 뜻이 모여 이 墓碑를 세우게 되니 晩時之歎이나 感泣할 따름이다. 이곳을 찾는 後孫들은 公의 忠孝精神과 큰 德行을 배우고 본받아 더욱 높고 크게 繁盛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蹟들이 永遠히 傳授되며, 本 墓域 또한 子孫萬代 永久히 保存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九年(二00六) 四月 十六日. 忠翼公 十二代孫 斗應 謹撰. 文應 碑前面 謹書.
忠翼公 十一代孫 相天, 十二代孫 斗應 駿應 達應 順應 聖應, 十三代孫 泰燮 奎榮 益洙 奎東 奎成, 十四代孫 泰鎭 恒鏞 大鏞, 外 後孫 一同 謹竪
8. <하담 金時讓(제)이 북경의 사신(서장관)으로 갈 때 교산 허균이 전송하며 보낸 글>(2003. 5. 30. 항용(제) 제공)
1) 출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허균 저) 제5권. 문부 2. 文部二 - 서 序
2) 인터넷 인용사이트 :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http://kh2.koreanhistory.or.kr/servlet/SearchMain)
북경(北京)에 가는 김자중(金子中)을 전송한 서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김에 공경히 제후의 법도를 지키니, 그 조근(朝覲)ㆍ빙향(聘享)ㆍ진청(陳請)ㆍ위사(慰謝)의 즈음에 또 성의와 예절을 다하고 공경과 삼감을 극진히 한 것이 대개 2백여 년이지만 곧 하루같이 하였다.
그 봉명하는 신하도 반드시 유신(儒臣) 중에서 재식이 출중하고 문에 해박하고 예에 통달하고 또 장고(掌故)를 잘 아는 자를 뽑아서 임명해야만 임금의 뜻을 인도하여 드날리고 사신의 직을 잘 닦아서 정하게 가린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조종 이래로 유독 이 선발만은 가장 중히 여겼으니, 그 취지를 대개 징험할 수 있겠다.
사신의 아래에 서장관을 두고 겸하여 헌전(憲篆)을 관장하게 하여 일행의 불법을 규탄하게 하였으므로 나라의 제도를 따르지 아니할 경우에는 비록 상사(上使)라도 또한 탄핵을 허여하여 피하지 않았으니, 그 선발이 사신을 선발함에 비하여 경중이 없으며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꺼리는 것은 사신보다 한 등을 더한다고 한다.
나는 들으니 선릉(宣陵) 때에 정승 윤사분(尹士昐)이 있었는데 정희후(貞熹后)의 아우였다. 등극을 하례하고 돌아오는데 사사로이 재화를 가지고 온 것이 매우 많았다. 서장관(書狀官) 권공 경우(權公景祐)가 강상(江上)에 이르러 그 장물(贓物)을 적발하니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이 불러서 청실(請室 궁중에서 대죄(待罪)하는 법으로 죄를 청하고 기다리던 곳)에 내려 장차 율(律)로써 죄주려 하자 사분(士昐)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경우(景祐)는, 이미 종실이나 가까운 대신이라 하여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강정왕도 끝내 후(后)의 동생이라는 친(親)이라 하여 두둔해주지 않았고, 후(后) 역시 관유(寬宥)를 빌 곳도 없었으니 선왕의 법을 지킴이 견고하다 하겠으며, 경우가 권척을 두려워 않음도 숭상할 만하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다 이와 같다면 국가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음을 염려할 것인가?
근세의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기에 조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의논이 너무나도 좁아 터럭만한 과실도 가리기 어려워서 불행히 법에 얽혀 든 자도 있는가 하면 또한 빠져 나가는 자도 많았으니, 아, 어떻게 상하가 법을 바르게 지키고 아부하지 않기를 선릉(宣陵) 시절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벗 김군 자중(子中)은 천하의 선비다. 두루 듣고 많이 기억해서 문조(文藻)가 풍부하므로 약관(弱冠)에 과거에 올라 화려한 벼슬을 다 지냈다. 그는 몸 단속을 법도로써 하여 반드시 예전 어진이로써 스승을 삼았고, 공사(公事)를 받들고 법을 집행함은 한결같이 정직에서부터 나오고 강자에게 흔들리는 바 되지 않았다. 위풍이 늠름하여 야비하고 포악한 자들이 마음을 고치게 되었으니 진실로 좌우에 두어서 잘못을 보필하고 사특을 규탄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간신(諫臣)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대관(臺官)이 되리라 여겼었다. 그런데도 서둘러 끌어내어 하지사(賀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을 삼았었으니, 중론(衆論)이 자못 불만스럽다 여겼으나, 자중(子中)은 좋게 여겨 만리에 장쾌한 노닒을 하게 되었으니 소원에 들어맞았음을 매우 기뻐한다 했다.
나는 여기에서 자중의 깊은 도량이 한 번 쓰이고 버림받는 사이에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아서 보통 사람보다 큼을 알게 되었다. 전형(銓衡)의 추택(推擇)과 주상의 발탁해 씀이 어찌 그 봄이 없었겠는가? 대개 위아래가 법을 유지하고 바름을 지켜, 사정에 끌리지 않는 것이 선릉(宣陵) 시절과 같고자 함이다. 자중은 포부가 본디 무거우니 또 즐겨 손순(巽順)히 참으며 말없이 구차히 넘겨서 조정의 선발한 바람을 저버리겠는가? 그 지경이라면 권공이 또한 사람들이 너무 적적하다고 비웃을 것이니, 자중은 힘쓸진저. 지금 이 행차에 있어 상사는 후덕하고 달식하여 족히 유아(儒雅)로서 진무(鎭撫)할 만하며 부사 역시 재능으로 자부하는 처지니, 자중의 풍력과 강개로써 협심하여 서로 도와 사신의 직책의 성공을 꾀한다면 오 나라 계찰(季札)이 주 나라에 간 것과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빙문(聘問)한 것과 시대는 다르나 일만은 똑같이 들어맞을 수 있을 것이니, 위대하지 아니한가?
자중은 힘쓸지어다. 그 행차에 있어 자중이 한 말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로, 이를 써주며 경계하는 바이다
9. 판의금 부사(判義禁府事) 김시양(金時讓)의 졸기(卒記) (2003. 10. 11. 윤만(문) 제공)
≪출전 : 인조실록 44권 인조21년 5월13일(을사)≫
--전 판의금 부사 김시양(金時讓)이 충주(忠州)에서 죽으니 상이 관곽(棺槨)과 조묘군(造墓軍)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시양의 초명은 시언(時言)인데 젊었을 때 재주와 국량이 있었다. 광해조 때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어 시원(試院)을 주관하면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는 글로 논제(論題)를 냈었는데, 그를 좋아하지 않은 자가 죄를 얽어 북변(北邊)으로 귀양갔었다. 반정 이후에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여러 차례 지방을 맡아 다스렸는데 상당히 치적이 있었으며 청렴하고 간소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상이 매우 깊이 돌보고 사랑하여 몇 해 사이에 병조 판서와 체찰사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나중에 청맹과니로 충추에 물러나 살다가 이때에 죽은 것이다.
☞ '조선조문인졸기'(신현규 저)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아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되어 있음. '하담 김시양 문집'을 살펴보니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判中樞府事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로 되어 있는 바 이는 조선왕조실록 사용 원전에 따른 차이로 생각됩니다.
10. 김시양의 꿈 (2003. 10. 25, 발용(군) 제공)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이 정사(丁巳, 1617) 해에 부계(涪溪)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을 꾸니, 참찬(參贊)인 유간이 그의 아들 유여각(柳汝恪)을 보내 시(詩)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꿈을 깨고 생각하니, 그 시의 다음 구절이 떠올랐다.
“시대를 논의하면 어두운 칠흙 같고, 돌아갈 기한에 돛단배 얻지 못해(時論正如三漆黑 歸期難得帆風)” 이런 것이었으나,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5년 후, 유간은 울산 부사였는데 중국 사신의 특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는 북쪽 청나라 세력이 명나라를 압박해 쳐들어가고 있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명나라로 가는 사신들은 황해 바다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유간이 무사히 중국에 들어갔다가 귀로에, 육로가 막혀 바다로 배를 타고 오다가 폭풍을 만나 익사하고 말았다.
유간이 중국으로 출발할 무렵 김시양은 동료 이창기(李昌期) 등과 자신의 꿈 얘기를 하고 유간을 걱정했는데, 기어이 꿈의 징험이 나타나게 되어 모두 탄식했다.
<한국문헌설화. 건국대출판부>
11. 김시양의 일화 소개-사돈이라도 법대로 처리한 김시양 (2003. 10. 25. 발용(군) 제공)
판서 김시양이 왕명을 받들어 영남지방을 순시하고 있었다.
어느 한 고을에서 계책을 잘못 세워 시기를 놓쳤으므로 그 곳 향청의 좌수를 잡아다가 형틀에 올려놓고 볼기를 드러내 곤장을 치려고 하였다.
홀연 밖에서 어떤 자가 들어와 자신의 몸을 좌수의 볼기 위에 덮는 것이었다. 그는 판서의 사위인 이도장이었고, 결박된 사람은 곧 이도장의 숙부였다.
김시양이 사위를 꾸짖었다.“내가 사위 하나 때문에 국법을 폐하겠는냐?”
김시양은 나졸에게 사위를 끌고 가라고 명한 뒤, 그 숙부에게 곤장을 쳤다.
이도장은 곧 판서를 지낸 이원정의 아버지로, 한림과 이조의 낭관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기문총화에서 옮김>
기문총화 [ 記聞叢話 ]
조선시대 명사(名士)들의 일화 ·시화(詩話) ·항담(巷談) ·소화(笑話) 등을 모은 수필집.
소장 :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 2책. 편자 ·간행연대 미상.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상권에는 〈이토정신이지술(李土亭神異之術)〉 등의 제목을 붙인 56종의 설화, 하권에는 《지봉유설(芝峯類說)》 《기재잡기(寄齋雜記)》 《죽창한화(竹窓閑話)》 《국당배화(菊堂俳話)》 《수문쇄록(聞鎖錄)》 《회은잡지(晦隱雜識)》 《용재총화(齋叢話)》 《수촌만록(水村漫錄)》 《필원잡기(筆苑雜記)》 《파인지소록(巴人識小錄)》 《어우야담(於于野談)》 《백운소설(白雲小說)》 등 30여 종의 책에서 약 250여 종의 각종 설화를 뽑아 실었다. 허구와 사실을 혼동한 결점이 있다.
12. 꿈에 얻은 시의 예언이 적중한 김시양 (2003, 10 25, 발용(군) 제공)
판서 김시양은 광해군 때에 종성으로 귀양을 갔는데, 어떤 이가 시를 지어 주었다.
그 가운데 한 연을 기억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不到觀魚海 관어대가 있는 바다에 가지 않고,
何由見太平 어떻게 태평성대를 볼 것인가.
그 당시에는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 영해로 귀양지를 옮겨서 관어당 아래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계해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문총화에서 옮김>
(4)陜川公 諱 縠 神主(합천공 휘 곡 신주)--15世
先祖考 通政大夫陜川郡守 兼 晉州鎭管 兵馬同僉知節制 都衛府君 神主 |
先祖女比 淑夫人 波平尹氏 |
* 합천공. 휘 곡( 縠) : 1599(선조32)--1661(현종2)
字는 돈적(敦謫), 음보로 올라 합천(陜川)군수를 지냄. 壽 63세이며 묘는 개향산(開香山-괴산읍 능촌리) 자좌(子坐)이다.
<묘비문>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縠이시고 字는 敦詩이시다. 鼻祖는 新羅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며 中始祖는 高麗朝의 最高 官職인 僉議令에 오르시고 上洛郡開國公이 되신 忠烈公 諱 方慶으로 公의 十三代祖이시다. 그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와서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이어 司憲府 監察 諱 孟廉, 典農寺 主簿 諱 哲鈞, 贈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贈 吏曹參判 諱 彦默은 公의 高祖요, 曾祖는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이시고 祖는 贈左贊成이신 諱 仁甲이시다. 父는 文科及第 後 慶尙道 平安道 觀察使, 八道都元帥, 四道體察使, 兵曹 戶曹 判書를 거쳐 崇祿大夫 判中樞府事에 오르시고 淸白吏에 錄選되신 후 忠翼의 諡號를 받으신 諱 時讓이시며, 母는 贈 貞敬夫人 慶州李氏이시니 贈 承旨인 大遂의 따님이시다.
公은 二男三女 중 長男으로 一五九九年(宣祖三二)에 出生하시니 官은 通訓大夫로 行恩山郡守를 거쳐 陜川郡守 兼 晉州鎭管 兵馬同僉知節制都衛를 歷任하시었다. 公께서는 牧民官으로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善政을 베푸시어 在職했던 고을 백성들로부터 많은 稱頌을 받으셨으며 天稟이 篤孝하시어 恭敬과 法度로써 孝誠을 다하셨고 兄第間의 友愛도 敦厚하셨다. 公은 一六六一年(顯宗二) 十二月 十一日에 歿하시니 享年은 六十三歲이시며 忠北 槐山郡 槐山邑 陵村里에 安葬되셨다. 配는 淑夫人 坡平尹氏이시니 掌隸院司評 誠德의 따님으로 治家함에 婦道를 갖추어 극진히 하셨는데 돌아가신 후 公과 合葬되셨다. 公은 無後嗣하여 아우 四休第公 徽의 長男 秋萬으로 後嗣하였다. 側室의 아들로 弘萬이 있다.
公이 歿하신지 三百四十五年이 지난 후에 比安公 先祖님의 墓碑建立이 계기가 되어 奉先孝思하려는 後孫들의 뜻이 모여 公의 墓碑를 建立하게 되니 晩時之歎이나 感泣할 따름이다. 이제 후손들은 公을 顯揚하고 遺志를 받들며 公의 崇高한 精神을 綿綿히 이어 받아 더욱 크게 繁昌하길 간절히 기원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九年(二00六) 四月 十六日 陜川公 十一代孫 斗應 謹撰. 文應 碑前面 謹書
陜川公 十代孫 相天, 十一代孫 斗應 駿應 達應 順應 聖應, 十二代孫 泰燮 奎榮 益洙 奎東 奎成, 十三代孫 泰鎭 恒鏞 大鏞, 外 後孫 一同 謹竪
<하담 김시양의 시세계 연구> 석사학위 논문 발표 소개 (2006. 8. 25. 항용(제) 소개)
2006년 7월 말에는 단국대학교 한문학과에서 <하담 김시양의 시세계 연구>란 주제의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연구자인 김순희(金順姬)선생께서 지난 2001년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에서 발간한 <하담 김시양 문집>(김익수 역. 김항용 편집. 미래문화사 간)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지난 2년간 문집 내의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연구 분석한 것이다. 2006년 8월 13일에는 안사연 정기산행에서 소학술발표회와 논문발표 축하행사도 가진 바 있는데, 이날 김선생은 현재까지의 한문학 연구가 대체로 몇몇 대가들 중심으로 진행돼 왔음을 지적하고 명인이 아닌 작가들의 연구도 병행돼야만 올바른 한국 한문학사의 정립이 가능하다는 문학사관 아래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박사학위 논문을 통하여 하담의 시문 부분만이 아닌 산문까지 포함한 전 작품들을 연구 분석하여 하담의 문학적 정신적 특성과 가치점을 밝히고, 조선 중기 하담의 정치적 역사적 위상도 함께 조명해 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5)監司公 諱 素 神主(감사공 휘 소 신주) --15世
先祖考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 經筵 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 成均館事 世子 左副賓客 五衛都摠府副摠管 通政大夫 守忠淸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府君 神主 |
先祖女比 贈 貞夫人 光州金氏 神主 |
* 감사공(監司公) 휘 소(素) : 1602(선조35)--1666(현종7).
字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양덕공(諱 時說)의 장자.
1630년(인조8.29세) 진사급제. 무사참봉(巫仕參奉-종9품), 의금부 금오랑(金吾郞), 호조좌랑(戶曹左郞-정6품)이 되었다.
1635년(인조13,34세) 알성문과 급제. 이듬해 정랑(정5품)이 됨. 그 해(1636년,35세) 후금(청나라)의 전란이 예상되매 공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자로서 선발되어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637(인조15.36세)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자 공은 세자와 대군을 청나라까지 모시고 가기도 하였다.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종2품),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남도병사(부친 노환으로 사양)를 거쳐 1644년(인조22)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성절사(聖節使-중국에 새해 인사로 가던 사신)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에게 들려 공금을 아껴 남은 돈으로 세자의 귀국을 위한 말 준비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한다.
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 부친 노환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 잠깐 있다가 부친 노환으로 사양),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정3품),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1648년(인조 26,47세)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종2품)가 되었다. 그 후 영흥부사(永興府使), 승지(承旨), 형조참의,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장단부사(長湍府使), 판결사(判決使), 양주목사(陽州牧使)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 7)에 몰. 수(壽) 65세.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頂 계좌(癸坐)이다.
유물 : 白牌(진사급제)1매, 紅牌(문과급제)1매, 諭旨(충청도 관찰사, 충청수사) 2매.
<주요 연보>
1. 1세 (1602년. 선조35) : 4. 22.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부-시열. 모-구례손씨)
2. 29세(1630년. 인조8) : 진사급제
3. 30세(1631년. 인조9) : 장릉참봉(章陵參奉-종9품)
4. 33세(1634년. 인조12) : 금오랑(金吾郞-의정부 관리 )
5. 34세(1635년. 인조13) : 호조좌랑(戶曹左郞-정6품). 9월. 알성문과 급제
6. 35세(1636년. 인조14) : 정랑(正郞-정5품). 여름에 해주판관(海州判官) (병자호란)
7. 36세(1637년. 인조15) :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심양까지 모셔다 드림.
8. 37세(1638년. 인조16) :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9. 38세(1639년. 인조17) : 강릉부사(江陵府使)
10. 40세(1641년. 인조19) :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 추천. 겨울에 통정대부로 종성부사(鍾城府使)
11. 42세(1643년. 인조21) : 함경남도병사(咸鏡南道兵使-종2품. 부친 노병으로 사양)
12. 43세(1644년. 인조22) :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감
13. 44세(1645년. 인조23) : 봄에 귀국. 귀국길에 소현세자에게 들러 공금을 아낀 돈을 말 준비 비용으로 드림. 경주부윤(慶州府尹-부친 노병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잠깐 있다가 부친 병으로 사양), 부승지(副承旨-사양).
14. 45세(1646년. 인조24) : 진주목사(晋州牧使).
15. 47세(1648년. 인조26) : 7월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
16. 48세(1649년. 인조27) : 벼슬 파직. 괴산 거주
17. 49세(1650년. 효종1) : 영흥부사(永興府使)
18. 53세(1654년. 효종5) : 승지(承旨)
19. 54세(1655년. 효종6) : 형조참의(刑曹參議), 승지(承旨), 충청수사(忠淸水使)
20. 55세(1656년. 효종7) : 승지(承旨)
21. 56세(1657년. 효종8) : 여름에 호조참의(戶曹參議). 겨울에 승지(承旨)
22. 57세(1658년. 효종9) : 황해감사(黃海監司-사양), 여름에 광주목사(光州牧使)
23. 60세(1661년. 현종2) : 원주목사(原州牧使)
24. 61세(1662년. 현종3) : 원주목사에서 돌아옴
25. 63세(1664년. 현종5) : 장단부사(長湍府使-사양), 장예원 판결사(判決使)
26. 64세(1665년. 현종6) : 양주목사(陽州牧使-병으로 사양)
27. 65세(1666년. 현종7) : 6. 11. 몰. 9. 13. 괴산에서 장례식
*吏曹參判 追贈
<주요 자료 소개>
1. 주요 사진 자료 소개
1)묘소 (2003. 9. 11. 항용(제) 촬영 제공)
<묘소>(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보광산 >
<묘소 동편의 문관석과 망주석>
<상석> (癸坐丁向이란 글이 보인다)
<동자석(좌) 전면과 두부 모습>
<상석 뒷면-朝鮮 觀察使 安東金素 貞夫人 光州金氏之墓 床石-이란 글이 보임)>
<묘소 원경-우측:감사공(휘 소), 좌측:승지공(휘 구만)>
<묘소에서 바라 본 전면>
<아래쪽에서 묘소를 향해 바라 본 모습>
<묘소 앞에 가득 피어 있는 야생화 꽃숲>
<1972년 경의 묘소 모습> (2002. 10. 항용(제) 제공)
(당시 묘소 아래에는 무허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관청의 명으로 곧 폐쇄됨)
2)진사(進士) 급제 교지
<白 牌>
1.시기 : 1630년(인조8, 감사공 30세)
2.수교자 : 監司公(諱 素)
3.내용 : 진사시험 합격서(白牌),
4.원문 및 풀이 :<幼學 金素 進士 二等 第十二人 入格者. 崇禎二年 二月 二十四日>
(유학인 김소는 진사시험에 이등 제12인에 입격한 자임. 숭정(중국연호) 3년(1630년 인조8) 2월 24일)
5.소장 : 양덕공 종가
6.크기 : 38.5 × 85(단위-Cm)
3)문과 급제 교지
<紅 牌>
1.시기: 1635년(인조13. 감사공 34세)
2.수교자 : 監司公(諱 素)
3.내용 : 文科 科擧 及第 合格書
4.원문 및 풀이 :<敎旨, 通善郞 行戶曺佐郞 金素 文科 兵科 第一人 及第 出身者. 崇禎 8年 九月 十四日>
(교지. 통선랑 행호조 좌랑인 김소는 문과 병과 제1인 (51인 중 11위) 급제 출신자임. 숭정8년(1635년. 인조13). 9월 14일
5.소장 : 양덕공 종가
6.크기 : 71.8 × 92 (단위-Cm)
4)충청도 관찰사, 충청 수사 유서
<諭 書>
1.시기 : 1648년(仁祖 26), 감사공 46세
2.수교자 : 監司公(諱 素)
3.내용 : 홍청도(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순찰사에 金 素를 命하는 임명서
(홍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인 김소에게 고하노라. 경은 한 지역을 위임받아 무릇 병사를 일으킴에 가벼이 하지 말며,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백성을 편안케하고 적을 제압하라.
일상적인 일은 구장(일반 업무 지침서)대로 하라. 생각건대, 혹시 내가 그대와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밀부(임금과 신하와의 신표)가 없이는 시행치 말라. 또한 의외의 간사한 모략으로 불가불 이를 예방하지 않을 수 없어, 만약 비상의 명령을 내리는 경우에는 그 밀부를 합해 보고 의심이 없다고 판단된 후에야 마땅히 그 명령을 따르라. 그러므로 제 21호의 부절을 주노니 경은 이를 받으라.
순치 5년(중국 청나라 연호. 1648년 인조26년. 공 46세). 8. 29일.
4.소장 : 양덕공 종가
5.크기 : 140.5 × 57.5 (단위-Cm)
<유서-충청 수사>
<諭 書>
1.시기 : 1655년(효종6) 감사공 53세.
2.수교자 : 監司公(諱 素)
3.내용 : 忠淸道 水軍 節度使에 임명하는 임명서 (내용은 전항의 관찰사 유서와 유사)
4.소장 : 양덕공 종가
5.크기 : 150 × 57.3 (단위-Cm)
5)공주 공산성의 충청도 관찰사 불망비 (2005. 6. 17. 항용(제) 촬영 제공)
<관찰사 不忘碑>-1649년(인조 27년) 경에 충남 공주군 공주 공산성에 세웠던 것인데 훼손 분실됨. 이에 1992년 안동김씨 공주문중회에서 주관하여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문중 역대 선조 4위 관찰사 불망비를 세움. 우로부터-金悌甲, 金億齡, 金時獻, 金素
<공산성 입구 비석군>
<공산성>
2. <친필 자료>
1)친필서찰 1
<친필 서찰>
(1)소장처 : <근묵>(성균관대 박물관 간. 1981. 636p)
(2)발견일 : 2002. 10. 16.
(3)발견자 : 김항용
(4)작성일시 : 작성연대 : 미상(1660년경으로 추정)
(5)원문 해독 및 해석문 : 익수(제) 번역, 제공. 항용(제) 정리 편집
阻餘承問 從而審起居 慰仰 大旱之餘 暴雨驟注 前頭民事無復可言者 雨後風亂 閉호(집호)方睡 意外 情札適到此際 慰轄倍常 可當相對路傍 雖劇恩及久矣 中不顧事勢 卽往赴任宜也 細量筋力 萬艱支堪如何 頃者奴子往原營回來 見方書卽 初六日發向春川 巡歷而西 來三月入金剛爲計 今雖作書 無處可傳 餘對客不備 伏惟下照 拜謝上狀
甲二旬七 庚末 素
격조하던 나머지 위문을 받았소.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기거를 살펴주고 있으니 위안이 되길 바라오.
크게 가문 뒤에 폭우가 퍼부어 지난번 백성들의 농사는 더 말 할 나위가 없소. 비가 내린 다음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창문을 닫고 곧 잠이 들었는데, 뜻밖에 반가운 편지가 이런 때에 마침 도착하여 더욱 크게 위로가 되니, 길가에서 서로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였소.
비록 큰 은혜가 오래 미치기는 하겠지만, 그런 가운데 형편을 돌아보지 말고 곧장 가서 부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근력을 잘 헤아려서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이 어떠하오.
지난번 가노(家奴)인 <奴子>가 원주 영(營)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방(方. 주-또는 万)의 편지를 본 즉 초 6일에 춘천 쪽으로 떠나 순력하고 서쪽으로 가서, 오는 3월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갈 계획이라 했더군요. 이제 비록 편지를 쓴다 해도 전할 길이 없소.
손님을 마주하고 있는 나머지 갖추지 못하오. 삼가 살펴보시오. 고마움에 절하며 글월 올리오. 갑월 27일 서쪽 끝에서 소(素)가
*주1-수신자 : 미상 *주2-작성연대 : 미상(1660년경으로 추정)
2)친필 서찰 2
<친필 서찰> (2002. 12. 16. 항용(제. 13대손) 경매 물건. 당일 매입 소장. 제공)
(1)소장처 : 항용(제) 매입 소장
(2)발견 및 매입일 : 2002. 10. 16.
(3)매입자 : 김항용(상기 김소의 13대 손)
(4)매입처 : <아트서울>
* <아트서울> 경매 공고 내용
번 호 :ks-101 성 명:양졸와 김소(養拙窩 金素 1602-1666) 품 명:김소 간찰(簡札) 년도:1648 (戊子). 크 기:34x26.5cm 가 격:390,000원 홈페이지:http://www.artseoul.net
(5)작성일시 : 1648년(공이 충청도 관찰사 때) 11. 21일
(6)원문 해독 및 해석문 : 익수(제) 번역, 제공. 항용(제) 정리 편집
卽爽夜來 兄調攝中起居如何 頃日之進非不會以日暮爲限
其時暫看厭外會與兄 從頌者拘於弟之久坐 不無落莫焉
不得已强情起來 兄可想他人之有下耶 山茱萸有無不可不知
設或有儲想此農時 使喚不一助 近來不易散影色
人幸示望白如何 拙句不可謂言志 只陳所懷耳
伏惟 兄照謹拜 上狀
戊子至月念一
弟 素頓
밤새 좀 상쾌해졌습니다. 형은 몸조리 중에 어찌 지내십니까.
지난번 찾아뵈었는데 날이 저물어도 기한이 되었기에 만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잠깐 보면서 형과 함께 바깥 모임을 실컷 보았지요. 칭송하는 자를 쫓아 제(弟)가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음을 꺼리는 것에 낙담함이 컸을 것입니다. 부득이 억지 심정으로 일어났습니다. 형은 아마 다른 사람들이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산수유(술)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런 농사철을 생각하면 불러 본들 하나도 도움이 안됐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산 그림자 빛도 쉽게 흩어지지 않아, 사람들은 다행히 보름달이 얼마나 하얀지 보게 되었습니다. 졸구(拙句)라서 뜻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다만 마음속에 품은 바를 표현했을 뿐입니다.
삼가 형께서 살펴보소서. 삼가 절하며 글월 올리나이다.
무자(戊子. 1648. 공이 충청도 관찰사 때) 동짓달 21일
제(弟) 소(素) 돈수
3) 친필서찰 3
가. 발견일 : 2005. 8. 29.
나. 발견자 : 김항용
다. 최초 매입일 : 1990년경
라. 최초 매입자 : 충북 충주 고서점
마. 2차 매입자 : 1991년 경 대구 고서점
바. 원 소장자 : 미상(필자의 사촌 형인 穀, 時晦의 子. 時亮의 子 들로 추정 중)
사. 현소장처 : 미상 (1차 대구 고서점에서 2005. 6. 모인사에게 매각. 현재 조사중)
아. 작성일시 : 1648년(戊子. 47세. 충청도관찰사 시절) 추정
자. 해독자 : 김익수 (2005. 9. 25)
차. 번역, 편집자 : 김익수, 김항용 (2005. 12. 31)
카. 크 기:34x26.5cm
<해독>
積阻餘 欲面之心 一刻如年
而新到之初 事多未遑 加以各相還營在
今待候 方苦未暇私事 奈何奈何.
卽承 兄札慰伏倍 常無以爲喩 第聞 兄服患至重云
今見字畵 可想不至太甚地頭 故人흔(小+삼수변 없는沂)幸 如何如何.
兄則出入官門 非便 且有所患 過數日後 弟當投태(책받침+台)
以做半日佳期也.
餘萬不一.
伏惟,
兄照 謹拜上謝狀
戊子閏月初五 弟 素
오래 소식 막힌 나머지 뵙고 싶은 마음은 일각이 한해와 같습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처음이라 일이 많아 겨를이 없었고, 더구나 각각 서로 관영(官營)으로 돌아와 이제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 바야흐로 괴롭게도 사사로운 일을 볼 틈이 없으니 어찌 하오리까.
이제 형의 편지를 받으니 위로됨이 갑절이나 되어 항상 비유할 바가 없습니다. 다만 형의 복통이 아주 중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편지글을 보니 아주 막다르지는 않다고 생각되는데 옛 벗들이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겨도 되겠습니까.
형이 관문(官門)에 출입함은 편하지 못하고 더구나 병중에 계시니 며칠 지난 후에 제가 들려 반날쯤 좋은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나머지 모든 것을 일일이 갖추지 못합니다.
삼가 형이 살펴보소서. 삼가 감사의 글을 올립니다.
1648년 (戊子) 윤월 (3월) 초5일
弟 素 돈수
주: 未遑... 겨를이 없음 待候... 웃어른의 명령을 기다림 地頭... 이지경.
餘萬不一... 나머지를 모두 하나하나 적지 못함 第... 다만
兄照... 형께서 편지를 보시라는 뜻
上謝狀... 편지나 물건을 받았을 때에 감사의 글을 올린다는 뜻. 그렇지 않을 때는 上狀
4)친필서찰 4
가. 발견일 : 2005. 8. 29.
나. 발견자 : 김항용
다. 최초 매입일 : 1990년경
라. 최초 매입자 : 충북 충주 고서점
마. 2차 매입자 : 1991년 경 대구 고서점
바. 원 소장자 : 미상 (필자의 사촌 형인 穀, 時晦의 子. 時亮의 子들로 추정 중)
사. 현소장처 : 미상 (1차 대구의 고서점에서 2005. 6. 모인사에게 매각. 현재 조사중)
아. 작성일시 : 1648년(戊子. 47세. 충청도관찰사 시절) 추정
자. 해독자 : 김익수 (2005. 9. 25)
차. 번역, 편집자 : 김익수, 김항용 (2005. 12. 31) (
카 : 크 기:34 x 26.5cm
<해독 원문>
敬 敬次昨日韻
憐君一病太支離
扶護神明必眷慈
大光需時終展布
小休今日豈差池
徒敎謝子金陵臥
爭憶山公玉立儀
鍼藥自精三折後
佇看王國得良醫
目見
兄所患深重 辭出於情 未及他語
殊非和
兄廻謝歷訪之意也
<번역>
임금 그리며 한번 병드니 너무나 여위어
신명이 보호하여 반드시 은총을 베푸시리.
큰 위덕 필요할 때 마침내 펴야하거늘
오늘도 잠시 쉬고 있으니 어찌 어긋나는가.
다만 사안(謝安)이 자식 가르치듯 금릉(金陵)에 누웠으니
다투며 기억하리. 산도(山濤)같은 굳은 지조
침과 약을 스스로 정성 드려 삼절(三折)후에는
나라의 양의(良醫)의 명성 얻었음을 기다려 보리라.
형의 병이 매우 심중한 것을 눈으로 보았기에 언사를 정으로 나타냈지만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형의 감사의 회답에 아주 화답이 못되지만 지나다가 방문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주:支離..여의고 파리함
謝子... 晋의 謝安(320-385)지칭. 행실이 고결하고 집에 있을 때에 자제들을 가르치는데 예의의 모범이 되었다는 고사를 인용함.
金陵... 李白의 金陵子詩에 “謝公正要東山伎 攜手林泉處處行”이란 문구를 인용함.
山公... 晋의 山濤(205-283)의 다른 호칭. 竹林七賢의 一
玉立... 지조가 굳음
三折... 三折肱爲良醫를 이름. 세 번 팔목을 부러뜨려야 훌륭한 의원이 됨. 경험을 쌓아야 노련한 의원이 된다는 뜻
5)친필서찰 5
가. 발견일 : 2005. 8. 29.
나. 발견자 : 김항용
다. 최초 매입일 : 1990년경
라. 최초 매입자 : 충북 충주 고서점
마. 2차 매입자 : 1991년 경 대구 고서점
바. 원 소장자 : 미상 (필자의 사촌 형인 穀, 時晦의 子. 時亮의 子들로 추정 중)
사. 현소장처 : 미상 (1차 대구의 고서점에서 2005. 6. 모인사에게 매각. 현재 조사중)
아. 작성일시 : 1648년(戊子. 47세. 충청도관찰사 시절) 7월 29일
자. 해독자 : 김익수 (2005. 9. 25)
차. 번역, 편집자 : 김익수, 김항용 (2005. 12. 31)
카. 크 기:34x26.5cm
<해독원문>
在晉之日 拘於官冗 不得隙之就敍衷 常慨歎不似之.
命適到遠出之際 未能更得握手 仍作活別 人間事不可預料者 如此耶.
兄抱病食貧 弟爲土主 春後到仕者 無容斗隙 愛莫助之 常切愧歎.
최(손수+崔)絡秋捧 以雪此恥事 故如許 奈何奈何.
前糶米三石 以戶籍米 計減捧納事 戶籍色金厚云貪色
欲令道處分付後 成文書以去. 幸勿以爲憂如何.
落幅十度送之 用於遮障爲望 所得不數 而吏曺書使成此
無物可洽 以此塞責 略不稱情 可歎.
只祈勤勤善然. 伏惟
兄照 謹拜上謝狀.
주: 官冗 : 관업무의 복잡함. 深深 : 매우 깊이 斗隙 : 조그만 틈 如許 : 이와 같음
塞責 : 책임을 간신히 때움 勤勤 : 부지런히, 끊임없이
以初二日 將爲發사(木+差) 而此後消息 杳然
臨紙창(心+長)然 不能定情 稱念尙銘地.
戊子七月念九 弟 素頓
<번역문>
진주(晋州)에 있을 때에 공무의 잡다한 일에 얽매여 속마음 이야기할 틈도 갖지 못함을 항상 개탄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명이 마침 도달하여 먼 곳으로 나가게 된 즈음에도 다시 손을 잡아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바로 살아서 이별하게 되니 인간사란 예측할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입니까.
형은 병들고 생활이 가난하나 저는 땅마지기라도 있는데, 봄이 지난 후 벼슬에 나아가 조그만 틈도 없어 사랑으로 도와드리지 못함을 항상 아주 부끄럽게 탄식해 왔습니다. 가을걷이 때는 연락을 해서 이 부끄러운 일을 풀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전에 환자로 빌린 쌀 3섬은 호적미(戶籍米)로써 감해서 바치도록 할 셈인데 호적색리(戶籍色吏)는 김후(金厚)라고 하는데 창고담당 색리입니다. 처분에 부치도록 말한 후 문서 작성한 것을 없애도록 할 터이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떨어진 천 10폭 정도를 보내니 막는데 쓰시기 바랍니다. 구한 게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조서리(吏曹書吏)가 이것을 만들었는데 물건이 흡족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으로 대강대강 넘기니 대략 정을 표한다고 할 수가 없어 한탄스럽습니다. 다만 정성스레 잘 지내시길 바랄 뿐입니다.
삼가 형이 살펴보소서. 삼가 인사의 글월을 올립니다.
초2일 곧 배를 타고 떠나려하는데, 이후 소식이 까마득할 것이기에 편지를 쓰려니 서글픈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말하려니 아직도 처지를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1648년(무자) 7월 29일 제(弟) 소(素) 돈수
*편집자 주 : 편지를 받은 사람인 兄은 필자의 사촌 형인 金 穀(하담 김시양의 子)로 추측 되며, 김곡은 진주에서 가까운 곳인 합천군수(陜川郡守) 겸진주진관 병마동첨지어도위(兼 晉州鎭管 兵馬同僉知御制都衛)를 역임한 바 있었음.
6)친필서찰 6 (2005. 8. 28. 항용 제공)
가. 발견일 : 2005. 8. 29.
나. 발견자 : 김항용
다. 최초 매입일 : 1990년경
라. 최초 매입자 : 충북 충주 고서점
마. 2차 매입자 : 1991년 경 대구 고서점
바. 원 소장자 : 미상 (필자의 사촌 형인 穀, 時晦의 子. 時亮의 子들로 추정 중)
사. 현소장처 : 김항용(상기 김소의 13대손). 2005. 11. 19. 30만원 매입 소장.
아. 작성일시 : 1648년(戊子. 47세. 충청도관찰사 시절) 추정
자. 해독자 : 김익수 (2005. 9. 25)
차. 번역, 편집자 : 김익수, 김항용 (2005. 12. 31)
카.크 기:31x26.5cm
<해독 원문>
知
兄往山寺 已有日 非不言旅卽就敍冗 故疊出尙負下誠 方切慨歎.
卽承
情問感愧 兼極食貧乏粮 弟所痛嘗紅牌無效 知之已久.
第有倉儲而不洽 則責有所歸 徒撮虛光者 自古誠然 奈何. 呵呵.
以白米五斗 乾魚三束 仰供 半月之資 亦可謂相愛之友 坐於雄府之效耶.
本寺多役一一依敎 非徒弟有斗護之色 兄亦不無生光事也 可笑.
初五 早朝唯최(손수+崔)就活爲計 苦企之.
伏惟
兄照 謹謝上狀
<번역문>
알건대, 형이 산사(山寺)에 간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나들이 가서
한가하게 글을 지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일부러 시첩을 내었는데 아직 주신 성의를 어기고 있어 바야흐로 아주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정을 물어주시는 편지를 받아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겸하여 아주 가난하게 사느라 식량이 모자랍니다. 제가 괴로운 것은 일찍부터 홍패(紅牌)가 아무 효능이 없음을 안지가 이미 오랩니다. 다만 창고에는 있는데 주지 못하면 책임이 돌아감직도 한데 다만 헛된 영광만 싸안고 있는 것이니 옛날부터 참으로 그렇다니 어찌합니까. 하하 하하.
백미5말, 건어3묶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반 달치 물자지만 역시 사랑하는 친구가 큰 고을에 앉아있는 보람이라 해야겠지요. 본 절간에도 요역(徭役)이 많은데 일일이 이르신 대로 따르오니 다만 제가 거들어주는 기색도 되고 형 역시 생색내는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우습군요.
초5일 아침새벽에 오직 살아갈 궁리로 재촉하니 괴로운 마음입니다. 삼가 형이 살펴보소서.
삼가 감사의 글월을 올립니다.
7)친필서찰 7 (2005. 8. 28. 항용(제) 제공)
가. 발견일 : 2005. 8. 29.
나. 발견자 : 김항용
다. 최초 매입일 : 1990년경
라. 최초 매입자 : 충북 충주 고서점
마. 2차 매입자 : 1991년 경 대구 고서점
바. 원 소장자 : 미상 (필자의 사촌 형인 縠, 時晦의 子. 時亮의 子들로 추정 중)
사. 현소장처 : 김항용(상기 김소의 13대손). 2005. 11. 19. 30만원 매입 소장.
아. 작성일시 : 1648년(戊子. 47세. 충청도관찰사 시절) 추정
자. 해독자 : 김익수 (2005. 9. 25)
차. 번역, 편집자 : 김익수, 김항용 (2005. 12. 31)
카. 크 기:30.5x26.5cm
<해독 원문>
數日內未委 兄個況如何 一味懸之 前來丸藥 萬分催劑 材料多種
作末不易. 今始劑上 想兄重病之中待之甚 無還切未安.
下索三材 所儲不敷 傾儲送呈. 蒼朮五味子各五兩
赤茯령(艸+令)四兩五전(戈+戈) 與丸藥 同封一사(竹+司)送上 考納如何. 餘萬不一
伏惟 兄照 謹候上狀.
戊子閏月念四 弟 素頓
주: 一味...오로지
萬分... 극히 소량, 대단히 적음
며칠 사이 형의 근황이 어떠하신지 모르겠군요. 오로지 염려할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온 환약으로 소량의 약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재료가 여러 종류가 되어 분말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 지금에야 비로소 약을 지어 올립니다.
생각건대, 형이 중병을 앓는 중이라 매우 기다렸을 텐데 돌려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설사를 멎게 하는 세 가지 약재는 저축한 게 넉넉지 못해 저축하고 있는 것 모두를 싹 쓸어 보내드립니다. 창출과 오미자는 각 5냥, 적복령은 4냥 5전, 그리고 환약을 함께 봉하여 한 소쿠리 보내 올리오니 살펴보시고 받으십시오. 나머지 모든 것은 일일이 적지 못합니다.
삼가 형이 살펴보소서. 삼가 안부 글월 올립니다.
1648년(무자. 인조26) 윤달(3월) 24일
弟 素 돈수
3. <묘비문>
忠淸道觀察使 養拙窩 金 素 1602~1666의 墓碣은 肅宗 5년(1679)에 沙梨面 沙潭里 普光山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워졌다고 전하는데 현재 비석은 없다. 碑文은 아들인 金龜萬이 짓고 글씨는 재종질인 金鳳至가 썼다.
*출전 : 상락가승
1) 원 문
贈吏曹參判 安東金公之墓
我金宗派實新羅敬順王之後. 始祖上洛君 諱方慶, 有功麗朝食采安東, 子孫因爲鄕貫. 歷文英公 諱恂 左承旨, 諱永暾 上洛伯, 諱縝 寶文閣提學, 諱益達 左司諫, 諱顧 監察, 諱 孟廉 主簿, 諱 哲均 司議, 贈左通禮, 諱 壽亨 贈吏曺參判, 諱彦默 成均進士, 贈領議政, 諱錫 監司, 贈左贊成, 諱 仁甲 贈兵曺參判, 諱 時說, 娶贈貞夫人 求禮孫氏, 朝散大夫 守司宰監正 祿慶之女.
以萬曆壬寅四月二十二日, 生我先君, 諱素, 字知白. 年未志學通經史, 嘗受學於季父判府事公時讓, 每以經濟期之. 庚午中司馬, 辛未初授章陵參奉, 甲戌拜金吾郞, 乙亥移戶曺佐郞, 九月登謁聖文科, 丙子陞正郞. 夏特以八條抄一時才, 參是選, 時西虞急廟議, 以江都爲國家之保障, 以海州爲江都之輔車, 擇文武全才, 以先君超授之. 判府公曰 "夷險一節臣子之分, 汝其勉毋負國家之寄, 不墮吾門之風." 盖萬曆壬辰之亂, 先君之從祖贈領議政悌甲, 以原州死節 原, 堂叔 贈上洛君時敏, 以晋州死節矗石, 故以是戒焉. 是冬虜果東侵城, 有備不敢犯, 首陽城中數萬里生靈賴而全. 丁丑春 儲嗣質于瀋, 先君出迎于虜陣, 孝宗見而嘉之曰 "不圖今日得覩漢官威儀." 六月遞歸, 海州之民, 愈久不忘, 必曰 "我候, 微我候, 吾其魚矣." 戊寅拜軍資監正, 己卯移江陵府使, 辛己彼將薦. 冬陞通政, 拜鍾城府使, 癸未移拜咸鏡南道兵使, 以親老辭特許之. 甲申拜戶曺參議, 冬以節使赴燕. 孝 宗質于燕, 淸許歸, 夫馬未備, 先君盡出行中費餘以助之. 乙酉春還朝, 拜慶州府尹, 辭以親年, 遞拜形曺參議, 俄入銀臺, 以親病辭職下鄕, 再拜承宣, 始赴恩召, 以親病辭歸. 仲冬疊遭內外艱, 愼終追遠, 備盡誠禮. 推先君, 贈二品爵. 戊子服결(門+癸),出牧晋州. 居七月, 陞拜忠淸道觀察使, 己丑罷歸農舍. 庚寅拜永興府使, 三年瓜遞, 甲午得入銀臺, 乙未又拜刑曺參議, 旋移承宣, 以規正憲官, 失 時輩, 而遞. 時朝家憂海浪賊, 以先君拜忠淸水使. 海上有移鎭之, 擧條陳形勢, 遂從其策, 移設都芚後賴其便. 丙申 以軍器修整, 歸功幕僚, 時之接察謂之, 爽實而請罷, 人皆駭焉. 卽蒙敍, 入銀臺.
丁酉北使之名, 以沓來, 上下憂俱大臣 相之引見, 特命左承旨入侍, 仍令史官勿爲入侍. 左承旨卽先君也. 啓陳, 史官之不可不入侍. 孝宗卽從之, 因敎曰 "今日引見說話, 雖家人父子間, 勿爲傳播, 而此後, 引見左承旨, 每爲入侍, 母替他員." 受知於君父, 倚任取重, 如此. 夏遞拜戶曹參議, 冬移承旨. 戊戌拜黃海監司, 辭不赴, 夏拜光州牧使, 南中有駭俗焉. 人死不葬, 或過數十年. 先君刻日而使之葬荒原間, 千古枯骨, 遂爲掩土之鬼. 庚午秋滿而歸. 辛丑又知原州, 壬寅歸. 甲辰拜長湍府使, 辭不赴, 尋拜判決事, 卽掌公私賤詞訟衙門也, 以公以正, 愈久愈嚴. 李咸陵해(水+解)送其甥, 以賀之曰 "近聞領公之言, 亦及於老聾之耳, 其非一二人私語也. 審矣, 老夫之膝, 不覺自屈於斯." 乙巳拜楊州牧使, 尋以病棄, 歸京邸, 沈綿, 歲除, 處置後事而棄世. 是丙午六月十一日 壽六十五. 一時鄕相會哭悼惜, 各出米布以助喪訃, 聞賜祭賻庇喪, 皆如式, 九月十三日, 葬于槐山郡西晉光山癸坐之原, 卽平日自卜也.
先君奉先以敬, 祭祀以禮, 未嘗輪回於弟妹, 定爲一家之楷範, 四時節祀朔望奠酌終始如一, 居哀之時, 病嘗危重, 雖至親之間, 不能以從權之意萌於心. 三年喪畢, 卽分財産而至以奉祀田土, 分給周恤, 孤甥二人, 收養家內, 敎誨衣食一如己出表, 叔無嗣, 欲托身後勸取同姓, 以 奉其祀. 記性過人隨遇無애(石+疑), 科場他人所製一覽輒誦, 古今人物事蹟, 終身猶記, 至如久遠事, 爲田家雨賜年月日時, 萬不錯一. 嘗好觀德之藝, 至入神妙之城, 誰世之名弓者, 莫敢較長. 孝廟嘗試文武朝臣於後苑, 顧謂侍臣曰 "金某之射有法. 其惟妙弓乎." 賜以馬, 後赴湖營, 特賜內莊別强弓, 以褒之. 遇亂, 則忘身臨民, 則撫字. 故其守 陽, 以死誓衆, 同城士夫, 相爲語, 伏節死義者, 必金海州乎. 江陵永興, 皆有조(出+米+羽+(새)추) 적(入+米+羽+(새)추), 逋欠萬餘斛. 自官備火其券, 民以蘇邑無庇光. 永江皆竪去思碑, 而永則吏民各勤石. 先君嘗曰 "吾於斯世進退一任乎天, 升沈曾不介懷, 立朝三十餘年, 口不出進取之言, 足不到當路者門, 用之則行, 當官盡職, 舍之則藏樂天安分, 是平生行壯耳." 先비(女+比)貞夫人 金氏光州望族也. 新羅王子興光, 先知國亡, 卜居光州, 世爲平章. 故名其洞曰平章, 其後子孫以爲姓鄕. 十九世, 有諱謙光, 文科左參贊, 光山君, 生參奉克恥, 參奉生僉正寧胤, 是高曾祖也. 大父 諱益請 文科 監察, 考諱 安世 司馬, 娶全義李氏 僉樞 麒瑞之女. 以萬曆庚子八月六日生我先, 事先君四十四年, 奉祭祀接賓客, 待宗族 恤婢妾, 禮備恩厚, 人皆感服. 先君別世之後, 朝夕祀事, 親執不怠一如 祖考비(女+比)之三年喪也. 戊申夏구(책받침+木없는構)려(책받침+萬) 屬광(絲+廣), 時五月初十日 壽六十九. 九月初十日, 葬于先君之左.
有一男一女, 男龜萬, 中司馬登文科, 今爲左承旨. 女適尹遇甲, 中司馬, 官通判. 龜萬娶宜寧人 縣監 贈左承旨 南斗華之女, 生四男四女. 曰南挺 進士 娶兵曹在郞 李象震女, 生一男 命三, 曰南採 娶吏曹參判 李堂揆女, 生三男二女, 曰南擇 娶戶曹判書 朴信圭女, 曰南拭 娶正言 尹爾厚女, 生二男一女, 內外曾玄孫 竝十餘人. 先君嘗謂人曰 "活千人, 子孫必興, 非古語歟? 首陽之守城, 江陵之賑飢也, 所活不止累萬人, 萬世其興乎." 噫 子孫之不至衰替, 枝葉之寔繁且盛, 非爾後昆之多才多福, 實由先君之積德餘慶乎? 정(人+靑)手文人, 溢美墓道先君之所戒也. 玆不避拙略記, 世係事實而闕其辭.
子承政院左承旨龜萬
再從姪 密陽府使 鳳至書
肅廟五年己未 三月 日 立
2) 번역문 (감사공 13대손 항용 번역)
贈吏曹參判行忠淸監司養拙窩安東金公墓碣
우리 김종파(我 金宗派)는 실(實)로 신라(新羅) 경순왕(慶順王)의 후손(後孫)으로 시조(始祖)인 상락군(上洛君) 휘(諱) 방경(方慶)이 고려조(高麗朝)에 공(功)이 있어 식읍(食邑)을 안동(安東)으로 정(定)하여 줌에 자손(子孫)이 이로 인하여 향관(鄕貫)을 삼았다. 문영공(文英公) 휘(諱) 순(恂),좌승지(左承旨) 휘(諱) 영돈(永暾),상락백(上洛伯) 휘(諱) 진(縝),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휘(諱) 익달(益達),좌사간(左司諫) 휘(諱) 고(顧),감찰(監祭) 휘(諱) 맹렴(孟廉),주부(主簿) 휘(諱) 철균(哲鈞),사의(司議) 증좌승지(贈左承旨) 휘(諱) 수형(壽亨)(수형),증이조참판(贈吏曹 判) 휘(諱) 언묵(彦默),성균관진사(成均進士) 증영의정(贈領議政) 휘(諱) 석(錫)을 지나 증좌찬성(贈左贊成) 휘(諱) 인갑(仁甲)은 선왕고(先王考:祖父)요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휘(諱) 시열(時說)은 선고(先考)요 증정부인(贈貞夫人) 구례손씨(求禮孫氏)는 선비(先비)인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수사재감정(守司宰監正) 록경(祿慶)의 딸이라.
만력임인(萬曆壬寅 1602년 선조35년) 4월 22일에 우리 선군(先君)이 탄생하니 휘(諱)는 소(素)요 자(字)는 지백(知白)이라. 나이 미성년(未成年)에 학문에 뜻을 두어 경사(經史)를 통하고, 일찌기 삼촌 판부사공(判府事公) 시양(時讓)에게로부터 수학(受學)하였으며 매양 제세안민(濟世安民) 경세제민(經世濟民)으로써 장래를 기약(期約)하였다.
경오년(1630 인조8년)엔 진사(進士)에 오르고, 신미년(1631 인조9년) 초(初)에 장릉참봉(章陵 奉)을 받았고 갑술년 1634 인조12년(1634)에 금오랑(金吾郞)을 배명(拜命)하고, 을해년 1635 인조13년(1635)에 호조좌랑(戶曹左郞)으로 옮기고, 9월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올랐으며, 병자년(1636 인조14년)에 정랑(正郞)으로 올라갔다.
그 해 여름에 특별히 8조(八條)로써 한때 재주 있는 이를 뽑았는에 이 선택에 참여되었다. 때인즉 서우(西虞: 淸兵의 침범)가 급하여 조정 의논이 강도(江都: 강화도)로써 국가의 보장(保障: 요새지)을 삼고, 해주(海州)로써 강도(江都)의 보거(輔車:전진기지)를 하자고 하매 문무(文武)를 겸비한 자를 가리게 되었다. 이에 선군(先君)을 발탁하여 그 책임을 주었다. 판부공(判府公(時讓))이 말하기를 "평탄하고 험함에 대한 일절(一節)은 신자(臣子)의 분수니 너는 힘써 국가가 기탁(寄託)하는 것을 배반함이 없이함으로써 우리 문(門)의 가풍(家風).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한 것은 대개 만력 임진년(1592 선조20년) 난(亂)에 선군의 종조(從祖) 증영의정(贈領議政) 제갑(悌甲)이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영원산성( 原山城)에서 절사(節死)하고 당숙(堂叔) 증상락군(贈上洛君) 시민(時敏)은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촉석(矗石)에서 사절(死節)한 고로 이것으로써 경계한 것이다.
이해 겨울에 오랑캐(淸軍)가 과연 동으로부터 성을 침범하였으나 예비(豫備)가 있어 감히 범하지 못하니 수양성(首陽城)의 수만 생령(生靈)이 온전히 힘입게 되었다. 정축년(1637 인조15년)에 왕세자(王世子)가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었는데 선군(先君)이 노진영(虜陣營)까지 나아가 맞이하니 효종(孝宗)이 보고 기뻐하며 하는 말이 "오늘 한관(漢官)의 위엄을 다시 보겠도다."하였다.
6월에 직(職)이 바뀌어 돌아오니 해주(海州)의 백성(百姓)들이 오래도록 잊지 못해 하며 말하기를 "우리 사군(使君)이여! 사군(使君)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벌써 물고기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무인년(1638 인조16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기묘년(1639 인조17)에는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신사년(1641 인조19년)에는 재장(大將) 천거(薦擧)를 보았다.
겨울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되었고, 계미년(1643 인조21년)에는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노환(老患)으로 인해 사양하여 특별(特別)히 허(許)함을 받았다.
갑신년(1644 인조22년)에는 호조참의(戶曹 議)가 되었고, 겨울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가게 됐다. 이때 효종(孝宗)이 연경에 볼모로 와 있다가 마침 청(淸)나라로부터 귀국(歸國)을 허락 받았으나 인마(人馬)를 준비하지 못하자 선군(先君)이 자기의 출행중(出行中) 여비에서 남은 비용을 모두 다 드려 이의 여비에 충당하도록 했다.
을유년(1645 인조23년) 봄에 귀국(歸國)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을 받았으나 부친(父親)이 연로하여 사양하였고, 형조참의(刑曹 議)로 되었다가 곧 다시 은대(銀臺: 承政院)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부친의 환(患)으로 또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두번째로 승선(承宣: 承政院의 承旨)이 되어 비로소 은소(恩召: 은혜로운 임금의 부르심)에 따라 부임하였는데 역시 부친의 환(患)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동짓달에 내·외분의 상(喪)을 만나 신종추원(愼終追遠)에 있어 정성으로 예(禮)를 다 갖추었다. 선군(先君)이 귀하게 되어 왕고(王考)에게 증2품(贈二品)의 벼슬을 내리었다.
무자(戊子)에 복제(服制)를 마치고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다. 7개월만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배명(拜命)하였다가 기축년(1647 인조27년)에는 그 직(職)을 내놓고 고향(故鄕)집으로 돌아왔다. 경인년(1650 효종1년)에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됐다가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직(職)이 바뀌어 갑오년(1654 효종5년)엔 다시 은대(銀臺: 承政院)로 들어갔고, 을미년(1655 효종6년)에는 형조참의(刑曹 議)가 되었다가 뒤이어 승선(承宣: 承旨)으로 옮겼는데 규정(規定)으로써 헌관(憲官)을 바로 잡으려 하자 시배(時輩) 권력자들에게 거슬리는 바가 되어 바뀌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해랑적(海浪賊)들로 근심하고 있었는데 선군(先君)을 충청수사(忠淸水使)에 임명하였다. 해상(海上)에 진영(鎭營)을 옮김에 있어 여러 조목을 들어 낱낱이 그 형세(刑勢)를 진술하니 드디어 그 계책에 따라 도둔(都屯)을 옮겨 설치한 후(後) 그 편함에 힘입게 되었다.
병 신년(1656 효종7년)엔 군기(軍器)를 수정(修整)함에 그 공(功)을 막료(幕僚)료)에게로 돌리자 이때에 접찰(接察:巡察使)이 이르되 "상실(爽實: 사실이 서로 틀림)이라."하여 파직(罷職)을 청하니 사람들이 모두 다 놀라워했다. 그러나 바로 풀리게 되어 은대(銀臺: 承政院)로 들어갔다.
정유년(1657 효종8년)에 북사(北使)의 명(名)으로 조사하러 온다고 하여 상하가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대신(大臣) 대접으로 서로가 가까이 하고 임금은 특별히 명(命)하길 "좌승지(左承旨)는 입시(入侍)하고 사관(史官)은 입시(入侍)하지 말라."고 하였다. 좌승지(左承旨)는 바로 선군(先君)이라. 진술(陣述)을 하는데는 사관(史官)이 불가불(不可不) 입시(入侍)하여야 한다. 효종(孝宗)이 이에 따라 교시하는 말이 "금일 보고한 말은 비록 집안의 부자간(父子間)이라도 전파하지 말고, 이후로 서로 볼 때에도 좌승지(左承旨)는 매양 입시(入侍)하며 다른 관원과 바꾸지 말라."고 하였다. 군부(君父)로부터 받은 소임에 의지하는 중(重)함이 이와 같도다.
여름에는 호조참의(戶曹 議)가 되고 겨울에는 승지(承旨)로 옮겼다. 무술년(1658 효종9년)에는 황해감사(黃海監司)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여름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배명(拜命)받았는데, 남중(南中)에는 놀랄만한 풍속(風俗)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어도 장사 지내지 않거나 혹은 수 십 년을 그대로 지내는 것이었다. 이에 선군(先君)이 날을 정(定)하여 거친 언덕 사이에 장사하니 천고(千古)의 고골(枯骨)들이 드디어 흙에 가리우는 귀신이 되었도다.
경오년(1660 현종1년)에는 만기(滿期)가 되어 돌아왔다. 신축년(1661 현종2년)에 원주목사(原州牧使)로 갔다가 임인년(1662 현종3년)에 돌아왔다. 갑진년(1664 현종5년)에는 장단부사(長湍府使)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가지 않았으며, 판결사(判決使)가 되어 관(官)에 제출된 사적(私賤) 사송(詞訟)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그 공정함은 오래 갈수록 더욱 엄정하였다. 이에 함릉(咸陵)의 원인 이해(李 )가 그 생질을 보내 치하(致賀)하는 말이 "근래에 들으니 영공(領公(監司公素))에 대한 말이 또한 늙은 귀머거리의 귀에까지 들려오는 것이 한 두 사람의 사사(私私)말이 아니로다. 과연 그렇도다. 노부(老夫)의 무릎이 저절로 여기에 굽혀짐을 깨닫지 못하겠도다."고 하였다.
을사년(1665 현종6년)에 양주목사(楊洲牧使)로 갔다가 병(病)으로 그 직(職)을 사(辭)하고 돌아와 서울 집에서 침면(沈綿)하다가 섣달 그믐에 후사(後事)를 처치(處置)하고 별세(別世)하니 병오년(1666 현종7년) 7월 11일이고 수(壽)는 65세라. 일시(一時)에 경상(卿相)이 모여 슬피 울고 아까워하였다. 각각 쌀과 베를 내어 장사에 부조(扶助)하였으며 부고(訃告)가 임금에게도 들리어 제사지내주고 부의(賻儀)로 호상(護喪)하게 하였으며 모든 것을 식(式)에 의거하였다.
9월13일에 괴산군(槐山郡) 서(西)쪽 보광산(普光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하니 여기는 평소에 스스로 점(卜)했던 곳이라. 선군(先君)은 공경으로 선조를 받들고, 예(禮)로써 제사를 지내고, 일찌기 제매(弟妹)의 집으로는 돌아가면서 지내지 않고, 꼭 정한 데서 시행하는 것을 일가(一家)의 해범(楷範)으로 했다. 사시(四時)의 범사(範祀)·삭망(朔望) 전작(奠酌)을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하고 슬피 살 때는 병(病)의 위중(危重)을 맛보고, 비록 지친(至親)사이라도 권세를 따르려는 뜻은 마음에서 싹 틔우지 않았다.
3년상(三年喪)을 마치고 바로 재산을 나눔에 봉사전토(奉祀田土)하고 두루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외로운 생질(孤甥) 이인(二人)을 집안에서 수양(收養)하였는데 가르침과 의식(衣食)을 내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외삼촌이 무사(無嗣)하여 신후(身後)를 부탁함에 동성(同姓)을 권(勸)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성품(性品)이 과인(過人)하여 어떠한 경우를 만나 그에 따르더라도 거리낌이 없었고, 과장(科場)에서는 타인(他人)이 지은 것을 한번 보면 바로 외웠으며, 고금의 인물·사적을 종신(終身)토록 기억하였고 오래된 일중에 농사집의 비 내린 연월일 까지도 기송(記誦)하는데 만(萬)의 일(一)도 착오가 없었다.
일찌기 무예(武藝)를 좋아하였는데 신묘지역(神妙之域 : 神의 오묘한 경지)에까지 들어가 비록 세상의 명궁자(名弓者)라도 감히 그 장점(長點)을 비교할 수가 없었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일찌기 후원(後苑)에서 문무조신(文武朝臣)을 시험하는데 시신(侍臣)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김모(金某)의 활쏘기는 법칙이 있도다. 생각해 보니 묘한 활이로다."하였다. 말(馬)을 주고 후(後)에 호영(湖營)에 부임해서는 특히 내장별강궁(內莊別强弓)을 하사(下賜)하여 표창하였다. 난(亂)을 만난 즉 몸을 잊어 버렸고, 백성(百姓)을 대함에는 어루만지어 사랑하였다. 그런 고로 수양성(首陽城)을 지키고 죽음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니 동성(同城)의 사부(士夫)들은 서로 말하기를 "충절(忠節)에 엎드리고 의(義)에 죽는 자는 반드시 김해주(金海州)로다."라고 했다.
강릉(江陵)·영흥(永興)에는 모두 조적( : 쌀을 팔고 사들임)이 있었는데 도망가고 없어진 곡식이 만여(萬餘) 곡(斛 : 十斗)이나 되었다. 이에 관청으로부터 갖추어 넣게 하고 그 채권을 소각하니 백성들은 소생(蘇生)이 되었고 읍(邑:고을)에는 빛을 덮음이 없게 되었다. 영흥(永興) 강릉(江陵)에서는 모두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는데 영흥(永興)에서는 이민(吏民)을 각각 돌에 새기기도 하였다.
선군(先君)이 일찌기 말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늘에 일임하였고, 벼슬이 올라가고 침체되는 것에 대해서는 일찌기 마음속에 품지 않았었다. 입조(立朝)한 지 30여 년 동안 입으로는 나아가고 얻는 것에 대한 말을 내지 않았고, 발은 당로자(當路者 : 政權을 잡고 있는 자)의 문(門)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기용되면 행함에 있어 해당 관직의 직분을 다하였고, 파직되면 즉 낙천안분(樂天安分)을 즐겼다. 이것이 내 평생의 행장(行狀)이라."고 하였다.
선비(先비)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인데 광주(光州)의 명망높은 집안이라. 신라(新羅) 왕자(王子) 흥광(興光)은 먼저 나라가 망함을 알고 광주(光州)에 복거(卜居)하여 대대(代代)로 평장(平章:高麗의 관직)이 되었다. 그런 고로 그 동(洞)을 평장(平章)이라 하였는데 그 후 자손(子孫)이 성향(姓鄕)으로 삼았다. 19세는 휘(諱) 겸광(謙光)이니 문과(文科) 좌참찬(左 贊) 광주군(光山君)이며 생(生)하니 참봉(參奉) 극치(克恥)이며, 참봉(參奉)이 첨정(僉正) 영윤(寧胤)을 생(生)하니 이는 고증조(高曾祖)이라. 대부(大父)의 휘(諱) 익청(益請)은 문과(文科) 감찰(監察)이요, 고(考)의 휘(諱)는 안세(安世)이니 사마(司馬)라.
취처(娶妻)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첨추(僉樞) 기서(麒瑞)의 딸이라. 만력 경자(1600 선조33년) 8월 6일에 우리 선비(先비)가 생(生)하였고 선군(先君)을 섬기기는 44년이었는데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이며, 종족(宗族)을 대우(待遇)하는 것이며, 비첩(婢妾)을 사랑하는 것 등등에 예(禮)를 갖추고 은혜를 후(厚)히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선군(先君)이 별세(別世)한 후(後)에는 조석(朝夕)의 사사(祀事)를 친(親)히 집행하였는데 게으르지 않음이 조고비(祖考비) 3년상(三年喪)과 한결 같았다. 무신년(1668 현종9년) 여름에 병을 만나 속광(屬 絲+廣) :別世)하니 때는 5월10일이요 수(壽)는 69세라. 9월 10일에 선군(先君)의 묘(墓) 왼쪽에 합장하였다.
1남2녀를 두었으니 남(男)인 구만(龜萬)은 대·소과에 올라 좌승지(左承旨)요, 딸은 윤우갑(尹遇甲)에게로 갔는데 사마(司馬)에 올라 관(官)은 통판(通判)이라. 구만(龜萬)은 의령인(宜寧人) 현감(縣監) 증 좌승지 남과화(贈 左承旨 南斗華)의 딸을 취처(娶妻)하여 4남 4녀를 낳았다. 1남 남정(男挺)은 진사(進士)인데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상진(李象震)의 딸을 취처(娶妻)하여 1남을 낳으니 명삼(命三(必光))이고, 2남 남채(南採)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이당규(李堂揆)의 딸을 취처하여 3남 2녀를 낳고, 3남 남택(南擇)은 호조판서(戶曹判書) 박신(朴信)의 딸을 취처(娶妻)하고, 4남 남식(南拭)은 정언(正言) 윤이후(尹爾厚)의 딸을 취처(娶妻)하여 생2남 1녀라. 내·외의 증현손(曾玄孫)이 모두 10여명이라.
선군(先君)이 일찌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천인(千人)을 살리면 자손(子孫)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옛말이 아니 그러한가? 수양(首陽:州)에서 성(城)을 지키고 강릉(江陵)에서 흉년에 굶주리는 자들을 구하여 살린 것으로 말하면 루만명(累萬名)에 그칠 것이 아니며 만대(萬代)로 그렇게 일어날 것이로다."고 하였다. 슬프도다. 자손이 쇠체(衰替쇠체: 쇠약하여 폐하지)하지 아니하며 지엽(技葉-技孫)이 번창하고 성(盛)하여 가까운 후손(後孫)들이 모두 다재다복(多才多福)한 것은 실로 선군(先君)의 적덕여경(積德餘慶)이 아니겠는가? 문인(文人)의 손을 빌려 묘도(墓道)를 일미(溢美: 넘치도록 아름답게)한다는 것은 선군(先君)이 경계한 바이다. 이에 보잘 것 없는 것도 피하지 않고 후계(世係)의 사실(事實)을 대략(大略) 기록하며 글을 마치노라.
承政院左承旨 龜萬 謹撰
再從姪 密陽府使 鳳至書
肅廟五年 己未(1679년) 三月 日立
4. 감사공 어록(語錄) 소개 (2003. 8. 21. 항용 제공)
吾於斯世進退一任乎天 내가 이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남은 하늘의 뜻에 일임하였고
升沉曾不介懷 벼슬의 높고 낮음은 일찍이 마음에 품지 않았다
立朝三十餘年 조정에 선 지 삼십 여 년 간
口不出進取之言 입은 출세하여 나아가고 얻는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고
足不到權貴之門 발은 권세 있고 귀한 자의 집에는 가지 않았으며
用之行當官盡職 기용되면 행함에 있어 해당관직의 직분을 다했고
舍之則藏樂天安分 벼슬을 놓으면 낙천안분을 마음에 감추었다
是平生行狀 이것이 내 평생의 행장이다
출전 : <上洛家乘>(상락가승. 1895. 金龜浩 著. 감사공 묘갈명에서)
5. <감사공 교서(敎書) 소개> (2005. 6. 28. 항용(제) 제공)
1. 제작일시 : 1648(인조 26. 47세). 7.
2. 수령자 : 金素
3. 출전 : <상락가승> (1895년. 고종 32년 간. 金龜浩 著. 金恒鏞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 11(김익수 감수)
5. 원문
敎書
敎守洪淸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金素 書
<이하 생략>
6. 역문
홍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인 김소에게 내리는 임금의 교서
왕께서 이르시길 오직 국가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충청도다. 그러므로 중신(重臣:관찰사)에게 권한을 맡길 적에는 반드시 내 뜻을 四嶽(정승들)에게 물어보는데, 내가 먼저 정한 뜻과 중의(衆意)가 서로 같도다.
돌아보건대 저 백제의 옛 강토는 실은 우리 삼한의 중요한 관문이다. 길은 호남과 영남의 兩道로 통하고 郡邑은 오십삼구역이요, 땅은 경기도와 연하여 동서로 칠팔백리이다. 세상이 어지러울 땐 중국의 양자강과 회수처럼 진영을 보호하고, 때가 평온할 때는 형초(荊楚:지금의 중국 호남성과 호북성 일대. 楚의 영토)의 門과 뜰과 같이 겉과 속이 되는 물과 산인 錦江과 鷄龍山의 험함과 굳건함이 마치 궂은 비 내릴 때 미리 준비함과 같도다. 軍營의 단단히 무장한 군사와 말들은 날래고 강하여 스스로 부역을 한다.
그동안 가뭄과 홍수가 온 후에 이어서 기근이 거듭해 왔으며 더욱이 큰 사건이 있은 후가 되니 불안함을 스스로 안정하게 하고 진정시켜 어루만져 줄 방책에 있어 지금 소홀함이 있다. 어루만져 편안히 다스려줄 임무를 맡을 자는 그대 말고 그 누가 있겠는가? 오직 그대라면 훌륭한 재주를 갖고 있어 큰일을 맡길 만한 데, 이것은 저 숙부[하담공-김시양]와 너무나 흡사하여 옛날 晋나라의 사안(謝安:주1)과 사현(謝玄:주1)의 관계와 같도다. 반열(班列) 중에 아주 뛰어난데 글 솜씨도 뛰어나고 무예도 뛰어나도다. 그 마음가짐이 옥과 같이 희고 모든 일을 시행함에는 칼놀림처럼 여유가 있도다.
처음에는 호조(戶曹)의 낭관(郎官)이었는데 나중에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해전(海甸:바다에 인접한 고장. 해주)의 큰 고을 관리(해주판관)로 발탁됨을 입었는데 과연 한 지역이 태평하게 되었고, 강원도(강릉부사)에 발령받아서는 치적이 제일이었다. 갑자기 북쪽 요새(종성부사)에 발령되어서는 명예로운 칭찬이 무쌍하였으며, 이미 요새에서는 마음과 힘을 다하였고 내전(승지)에서는 왕명의 출납을 맡았었다.
생각건대 전후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始終의 공을 쌓은 능력은 참으로 볼 만하였도다. 연경(燕京)의 사천리길(성절사)에서는 조벽(趙壁:趙氏壁)과 같은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돌아왔으며, 진양(晋陽-진주목사)의 수만호(戶)는 윤탁(尹鐸, 주2)과 같은 어진 그대에게 모두 따랐으니, 지금 충청도를 관리할 자리가 비었는데 누가 감히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오직 영남에서 높은 직위에 오른 그대가 합당하다는 의론이다. 이에 그대에게 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직을 수여하노라.
경은 마땅히 가서 곧바로 봉서(奉書)를 하여 그 직이 정지되지 않게 하라. 휘장을 걸고 관모를 벗어 공명한 치적에 어떻게 발자국을 남길까 하고 힘쓸 것이요, 천하를 맑고 깨끗이 하려는 뜻이 고을에 가득 넘치게 떨치라.
정사(政事)에 임할 때는 관대함과 엄격함을 아울러 하고,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함에 있어서는 사사로움이 없게 할 지어다.
하은주(夏殷周) 삼대처럼 인륜을 가르쳐 밝게 하고 풍속과 교화를 잘 펴도록 하라. 조그만 고을에도 忠과 信을 더욱 크게 일으키라. 자신을 잘 다스려 관원들의 근본이 되게 하며, 진실로 성실히 업무에 힘쓰고, 범죄자를 가둘 때는 법령대로 시행하여 허점에 빠짐이 없도록 신중히 하라. 모름지기 가난하고 불쌍한 무리들이 기회를 보며 인수(印綬-주3)를 풀려 하거든 빨리 백성들의 어려움을 풀어 주어 수령의 은혜가 가득 내리도록 하라. 하물며 금년의 바람과 우박의 재앙은 옛날에도 듣지 못한 것이로다. 비록 가을의 풍년을 만났다 해도 가을 조세를 행할 가망이 없으니 이런 생각으로 새로이 교화를 해야 한다.
그런 때에 좋지 못한 습관을 개혁하기 위해 소요죄에 대해 사형을 품달하는 것은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내가 통훈대부의 관직을 주어 경이 스스로 이를 결정하도록 맡기노라.
아아! 사태가 매우 험악하니 책임과 기대가 아주 무겁다. 소유문(蘇孺文 : 주4)의 법에 따르고자 함이 어찌 사사로운 은혜에 대해 조금이라도 굽힌 것이 되며, 이덕유(李德裕: 주5)가 선택한 노래는 여러 악습을 어찌 크게 변하게 하였겠는가?
오래도록 외방에서의 노고로 현관(賢官)을 갈망한다는 감탄의 소식을 모르지 않는다. 장차 앞에 많은 일이 놓여 있더라도 다스리고 이바지함에 본보기로 삼고자 하여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모름지기 이 모든 사실을 잘 알도록 하라.
*주 풀이
주1. 사안(謝安)과 사현(謝玄) : 중국의 사안은 사현의 숙부로 前 秦의 苻堅이 공격해 왔을 때 사안은 사현을 보내 肥水에서 대파하여 晋의 太保가 됨. 모두 문인이며 특히 사현의 손자가 유명한 시인 謝靈逢이다. 여기서는 김시양과 김소가 숙질간임에 비유한 말이다.
주2. 윤탁(尹鐸) : 중국 춘추때 晋사람. 趙簡子가 晋陽을 다스리게 하면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라고 요청하자 호구수를 줄여서 백성에게 득이 되게 하였다. 여기서는 김소가 진양(진주)의 목사로 재직하였던 것을 비유함이다.
주3. 인수(印綬) : 관인(官印)의 꼭지에 다는 끈
주4. 소유문(蘇孺文) : 미상. <오유란전(烏有蘭傳)>에, 세조 임금 때에 한양 땅에 두 재상이 있었으니, 한 재상의 성은 김씨요, 또 한 재상의 성은 이씨라 했다. ... "오늘은 소유문(蘇孺文)이 되어 친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내일은 겸주자사(兼州刺史)가 되어 일을 살핌은 마치 나를 두고 이름일세." ...라는 구절이 있다.
주5. 이덕유(李德裕) : 당의 楚皇 사람. 자는 文饒. 젊어서 학문에 힘썼고 큰 절의가 뛰어났다. 敬宗 浙西觀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황제가 소인들과 친하여 遊樂을 좋아하므로 붉은 병풍에 쓴 여섯 잠언 <丹屛六箴>을 올렸다. 여기서는 김소가 관찰사가 된 것을 비유함.
6. <감사공 치제문 (致祭文) 소개> (2005. 6. 28. 항용(제) 제공)
1. 작성일시 : 1666(현종 7). 9.
2. 수령자 : 김소
3. 출전 : <상락가승> (1895년(고종 32) 간. 金龜浩 저. 김항용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김익수)
5. 원문
致祭文
國王遣禮曹佐郞兪夏益 諭祭于卒前監司金素之靈--
(하략>
6. 역문
국왕은 예조좌랑인 兪夏益을 보내어 죽은 전 감사 김소의 영혼에 고하여 제사하노라.
삼가 영령은 순박하고 충성스러우며 그 바탕은 크고 건장한 인재였다. 참되어 딴 마음이 없으며 자기의 위치를 지켜 순리를 어기지 않았다. 귀한 자리를 차지해도 다만 순실하기에 힘썼으며, 말단의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겉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 임용된 것이 지금까지 3대의 조정에 이르렀는데, 오직 평화로울 때나 험난할 때나 현명하게 노력하였고 충청도의 각 현들을 안찰하며 선정을 펴고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어찌 왕화(王化)를 추구함에 그윽함을 띨 수 있었겠는가?
북쪽과 남쪽을 지켜내고, 뛰어나고 절개 높은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적들의 투구를 벗김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평온하게 하였다. 승정원에서 왕의 출납을 맡거나 장례원에서 공정한 판결을 함에 있어 신실하고 명료하게 하여 그 직책에 잘못함이 없었고, 내외직을 지내오면서 매양 드러나게 공을 세웠다. 내가 경의 충직함을 믿어 격려하였고 경은 도성과 가까운 지역에서 충성을 다하고 기강을 드날렸다.
오직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하면 경을 빌려 거듭 가도록 하였다. 경륜이 이러하니 백성은 큰 은혜를 입었으며 옛날의 걱정이 지금은 기쁨이 되었다.
장차 임금이 경을 불러도 천하에 슬픔만이 남겠도다. 하물며 병이 더욱 깊어져 멀리 내다 볼 계책이 급한데 조정의 반열을 돌아보아도 누가 운명의 날에 나라를 충성스럽게 담당할 자가 그대와 같겠는가? 막히어 병들어 시들어 빠지게 될 것이다.
아! 과인은 사리에 밝지 못하고 통절하기에 이 마음 펼침을 위임하며 옛 규정과 의식에 따라 제를 지내고 문상하니 이 내 마음을 알아주소서.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지제교 睦來善 지어 올림
주1. 소결(疏決) : 공정하게 처리하여 판결함.
주2. 변위(邊圍) : 변경
주3. 후사(喉司) : 승정원
주4. 비궁(匪躬) : 충성을 다함.
5. <심양일기> 내의 감사공 기록내용 (2003. 12. 26. 주회(안) 제공)
심양일기 (著 소현세자, 譯 이석호, 1980중판, 대양서적)
丁丑년---1637년(인조15)
2월 23일 밤에 큰 눈
세자 초구에서 묵으시다. 신계현령 이보가 돌아가다. 병사 이석달, 신천군수 이숭원, 송화현감 강여재가 돌아가다. 세자가 피란민이 산골짜기에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다가 양미를 나누어 주다. 구왕의 표하병(標下兵·手下兵) 노시(盧施·羅碩) 등 두 사람이 오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술과 고기로써 대접하게 하다. 겸보덕 이명웅이 장수산성으로부터 오다. 황해감사의 종사관 정시망(鄭時望)과 해주목사 ★김소(金素)가 와서 쌀과 반찬 및 노자 약간을 바치다.
乙卯년---1639년(인조17)
12월 16일 맑음
세자 심양 관소에 머무시다. 선전관 ★김번(金繁)과 금군 신대길(辛大吉)이 들어와 동관에 머물다.
庚辰년---1640년(인조18)
11월 10일 맑음
세자 심양 관소에 머무시다. 선전관 ★김번(金繁)이 고기와 술을 가지고 떠나다. 금군 박실룡(朴實龍)이 푸르고 큰 대(竹)를 가지고 들어오다.
6. <감사공 묘소 아래에 있는 봉학사지 오층석탑 및 보광사 소개> (2003. 9. 10. 항용(제) 촬영 제공)
<현 보광사 뒷편에 있는 봉학사지 오층석탑>
<안내판 해설 내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9호.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이 탑은 보광사 뒷편의 옛 절터에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매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가 없어진 채 탑 몸돌 부분이 올라가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초층을 제외하고 2층부터는 탑 몸돌과 지붕 돌이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체감비율이 약해서 경쾌한 맛이 없다. 1966년 2층 지붕돌의 사리공에서 청동사리함과 청동불상이 발견되었는데 불상에서 <봉학산 봉학사>라는 시주문이 발견되었다.
(2003. 9. 11. 촬영 당시 4층 몸돌에 땅벌집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었음)
1. 발견시기:1967. 6. 2. 장소 :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 속 3. 발견자 : 禹英奎(사리면 거주자) 4. 크기:22.7cm(가로), 12cm(세로) 5. 현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등록번호-국립박물관 신1819번). 6.사진 입수경위 : 1987. 9. 30. 후배(안병찬. 당시 국립박물관 근무)로부터. 7.기록 내용 : "--支那六月 二十二日---大施主 孝宗妻子奇德" : 효종은 중국 송나라때의 왕으로 이 탑의 건립연대는 1163년(고려 의종 17)--1189(고려 명종 19) 사이로 본다.
1. 발견시기:1967. 6. 2. 장소 :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舍利孔. 지름 11cm) 속에서 3구의 소상과 묵서기지본(墨書記紙本)이 들어 있는 청동제 방형감(靑銅製 方形龕)이 발견됨. 3. 발견자 : 禹英奎(사리면 거주자. 박물관에 신고) 4. 크기:4.1cm(길이), 2.2cm(높이), 1.5cm(두께) 5. 현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등록번호-국립박물관 신1819번). 6.사진 입수경위 : 1987. 9. 30. 후배(안병찬. 당시 국립박물관 근무)로부터. 7.제작연대 : 1163년(고려 의종 17)--1189(고려 명종 19) 사이로 본다.
<보광사>(1941년 건립. 태고종. 1988. 개축한 모습. 주지-익원공파 金泰國. 2000년 부임. 043)833-4538)
<대웅전>(1983년 항용 촬영. 붉은 기와의 모습)
<보광사에 모셔져 있는 석조여래 좌상>(본래 봉학사에 있던 불상. 2001. 1. 1. 항용 촬영)
*기록 내용
<괴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槐山鳳鶴寺址 石造如來坐像)>
충청북도 사리면 사담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이 불상은 불두(佛頭)와 왼 팔목 등을 보수하였으나 보수부분을 제외하면 잘 보존되어 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으로 높이 95Cm이며, 신체에 비하여 큰 얼굴을 약간 숙이고 있다. 굴곡이 거의 없는 네모진 상체에 띠주름 같은 삼도(三道) 표현, 평면적이고 네모진 형태, 둔감한 옷주름선 등에서 형식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세부 수법을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산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35년부터 보광사 대웅전에 봉안하여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1. 조사, 발견 일시 : 1987. 7. 27.
2. 조사자 : 김항용(제).
3. 장소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2구 105번지 (현 정원사 절 일대)
4. 고증 자료 : <괴산군지>(1990. 9. 30. 괴산군지 편찬 위원회. 1055P)--"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
5. 현지 고증인 : 孫錫福(사담 2구 103번지 거주. 당시 90세)
<마을 입구의 마을비 및 불망비>
<마을비>
1. 건립일시 : 1993. 11.
2. 내용 : 마을 이름을 하도(荷島)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의 형상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연꽃 하(荷)자와 섬(島)자를 인용하여 이름을 정하였다. 마을 앞은 옛날 한양(漢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국사당(國士堂)이 있었고 큰 시장이 열리던 매우 번창한 곳이었다.
옛부터 학문을 숭상하여 마을에서 담을 세우고 배움에 힘써온 바 조선 현종조에 비인(庇仁)현감 손우(孫愚)공 흥해군수 손지(孫志)공 제주목사 손유(孫愈)공 충청도 관찰사 김소(金素)공 등을 배출하였다.
갈잎을 뜯어다 종이 대용으로 글씨를 쓰며 글을 익혔다고 하니 그 당시의 향학열을 가히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후에도 향학의 뜻으 ㄴ이어져 일제치하에서도 우종국(禹鍾國)공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써왔다. 지금 우리 마을 출신 인사들이 경향각지 각 분야 요소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것도 이렇듯 끊이지 아니한 향학열로 후진을 양성한 것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와같은 선인들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더욱 복된 마을을 만들어 가자는 다짐으로 이 비를 세운다.
1993년 11월 일. 하도마을 주민 일동
<감사공 생가 유물인 주춧돌>(현재 사담 2구의 손목삼, 손근영씨 집 사이의 담장 주춧돌로 쓰이고 있는데 현재 약 9개 정도가 남아 있다. 한 개 당 30Cm(가로), 30Cm(세로), 65Cm(높이)의 크기이다)
<일부는 절(정원사-태고종,주지승 고진수)이고 일부는 상기 밭 자리. 사리면 사담리 2구 105번지 일대). 가로(80m), 세로(30m)>
(6)安州公 諱 繁 神主(안주공 휘 번 신주)--15世
先祖考 通訓大夫 行安州判官 府君神主 |
先祖女比 淑人 慶州李氏 神主 |
* 안주공. 휘 번(繁) : 1604(선조 37)--1671(현종 12)
양덕공(陽德公, 諱 時說)의 二子. 무과(武科)급제.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다. 병자호란(丙子胡亂)시 장사(壯士)로 추천되었고,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았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심양(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곳)으로 모시고 가서 8년간 모셨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귀양을 갔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묘역 사진> (2005. 4. 22. 묘비 건립 후 사진(2005. 4. 항용(제) 제공)
▲행사 후 묘역 전경
<구 묘소>(2003. 10. 3. 相錫(제), 恒鏞(제) 촬영 제공)
<묘비문>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繁이요 字는 知盛이시다. 鼻祖는 新羅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며, 中始祖는 高麗 上洛郡開國公이신 忠烈公 諱 方慶으로 公의 十三代祖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들어와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司憲府監察 諱 孟廉, 典農寺主簿 諱 哲鈞, 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贈 吏曹叅判 諱 彦默은 高祖요, 成均進士로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은 曾祖이시다. 領相公은 道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己卯士禍 때 禍를 피하여 槐山으로 은둔하시어 세칭 五甲의 名賢을 키우셨고, 子 文肅公 諱 悌甲의 推恩으로 領議政에 追贈되셨다. 祖이신 贈 左贊成 諱 仁甲은 司馬試에 入格한 後 比安縣監을 역임하시고 子 時讓의 推恩으로 左贊成에 追贈되셨다. 父이신 諱 時說은 武科하여 繕工監役을 거쳐 陽德縣監을 지내시고 子인 諱 素의 推恩으로 兵曹參判에 追贈되셨다.
母는 贈貞夫人 求禮孫氏로 司宰監正 祿慶의 따님으로 生 三男 五女하니 第二男이 公이신데 一六0四年(宣祖三七) 十二月 十三日에 出生하셨다.
公은 武科에 及第하고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기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장사(壯士)로 추천되시어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으셨다. 병자호란 후엔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청나라 심양으로 모시고 가서 8년간의 볼모기간 온 힘을 다하여 충심으로 모셨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으셨으나 부임하지 않자 제천으로 귀양을 가셨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어 애석하고 안타까운 이별의 마음을 전했다. 방환 후에 제천에서 노년을 보내시다가 一六七一년(顯宗12) 別世하셨는데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配이신 淑人 慶州李氏는 무과하신 王兪의 따님으로 判決事 獻忱의 曾孫이신데 婦德을 크게 갖추고 治家하시니 주위의 칭송이 높으셨다.
公은 六男二女를 두셨으니 長男 諱 學萬은 寶城郡守인데 從叔인 휘 彦弘의 玄孫에게 養子가셨고, 二男 義萬은 武科하여 京畿道防禦使이시며, 그 다음으로 重萬, 直萬, 後萬, 就萬이 있으며, 李彭壽, 梁弘績은 사위이다.
아아! 公을 追慕하는 情은 至極하지만 文才가 없고 또한 墓碑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公께서 일찍이 원하시던 바가 아니셨기에 다만 간략한 世系와 子孫만을 적고 文辭는 비우도다.
檀紀 四三三八年(二00五年) 四月 日 判官公 十三代傍孫 恒鏞 謹撰
追記
嗚呼라, 公께서 歿하신 지 三百六十年이 지나도록 墓前은 不幸하게 墓碑도 없이 지내왔으니 안타까운 마음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쓰린 가슴을 달래며 微力을 다하여 간절히 갈망해 왔던 公의 墓碑와 묘역을 정비하닌 晩時之歎이나 不孝의 痛恨을 덜게 됐음에 感泣할 따름이다. 벅찬 감격을 누르고 그 顚末을 기록하여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들이 永久히 傳授되고 本 墓域이 子孫萬代 保存되며, 後孫들은 크게 繁盛함과 동시에 뚜렷한 民族意識과 崇祖睦族精神을 갖춘 民族의 棟樑으로 長成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八年(西紀 二00五年). 四月. 日.
判官公 十代宗孫 相錫 謹記
判官公 十二代傍孫 泰國 謹書.
(7)判書公 諱 徽 神主(판서공 휘 휘 신주)--15世
先祖考 正憲大夫 吏曹判書 兼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同知 成均館事 府君神主 |
先祖女比 貞夫人 陽川許氏 神主 |
*판서공. 휘 휘(徽) : 1607(선조 40)---1677(숙종 3)
조선의 문신. 화가. 字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사휴제(四休第),만은(晩隱), 시양(時讓)의 아들. 1642년(인조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교(奉敎)가 되었고, 1646년(인조 24년) 민회빈(愍懷嬪) 강씨가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자 정언(正言)으로 재직하면서 사사(賜死)의 배후를 규명하라고 상소를 했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효종즉위) 부수찬(副修撰)에 기용, 이조 좌랑과 정랑(吏曹正郞), 교리(校理), 응교(應敎), 헌납(獻納), 사간(司諫),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연간에는 충청도 관찰사, 도승지 (都承旨),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1665년(현종6)에는 경상도 관찰사에 이어 강화유수, 황해도 관찰사, 평안도, 함경도, 충청도 관찰사를 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삭직(削職) 당했다가 1668년(현종 9)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1675년(숙종1)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예조판서, 개경유수(開京留守)를 역임하였다. 수(壽) 71세. 하담공(時讓)의 二子.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에 있다. 그림을 잘 그렸다.
<묘소 사진> (2006. 4.
<묘소> (2004. 7. 항용(제) 제공)
<묘비문>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徽이시고 字는 敦美이시다. 安東金은 일찍이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이름 난 姓氏로 鼻祖는 新羅의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다. 中始祖는 高麗의 上洛郡開國公이신 諡號 忠烈公 諱 方慶이신데 高麗朝의 出將入相으로서 最高 官職인 僉議令에 오르셨고 二次에 걸친 日本遠征과 여러 功勳으로 致仕 후 安東을 食邑으로 받으셨으며 자손들은 이로 인하여 貫鄕을 삼게 되었는데 公은 忠烈公의 十三代孫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들어와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이어 司憲府 監察 諱 孟廉, 典農寺 主簿 諱 哲鈞, 贈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贈 吏曹參判 諱 彦默은 公의 高祖요, 成均進士로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은 公의 曾祖이시다. 領相公은 道學으로 士流에 이름 높았는데 己卯士禍 때 進士로서 成均館 儒生들과 함께 從兄 正言公 諱 釴과 더불어 靜菴 趙光祖를 力救하는 上疏에 참여하셨다가 禍를 피하여 槐山으로 은둔하시어 세칭 五甲의 名賢을 키우셨고 子 文肅公 諱 悌甲의 壬亂 殉國 推恩으로 領議政에 追贈되셨다. 祖이신 贈 左贊成 諱 仁甲은 司馬試에 入格한 後 長水察訪과 濟用監 直長을 거쳐 永山과 比安縣監을 지내셨으며 壬辰倭亂을 만나 白衣從軍하시다가 槐山 先塋에 돌아와 歿하셨는데 子 時讓의 貴로 左贊成에 追贈되셨다. 父는 文科及第 후 慶尙道 平安道 觀察使, 八道都元帥, 四道體察使, 兵曹 戶曹 判書를 거쳐 崇祿大夫 判中樞府事에 오르시고 淸白吏에 錄選되신 후 忠翼의 諡號를 받으신 諱 時讓이시며, 母는 貞敬夫人 慶州李氏로 益齋先生 齊賢의 後孫이요 贈 承旨로 郡守인 大遂의 따님이시다.
公은 一六0七年(宣祖四十) 六月 十八日 忠翼公의 二子 중 次男으로 出生하셨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주위의 칭송이 높았는데 一六三三年(仁祖十一. 二十七歲)에 生員과 進士 兩試에 합격한 뒤 一六四二年(仁祖二十)에 文科에 及第하여 곧 禮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셨고, 一六四五年(仁祖二十三)에 正言이 되셨으며, 弘文館에 뽑혀 들어가 副修撰과 吏曹佐郞 등을 拜命받으셨다. 一六五二年(孝宗三)에는 오랜 가뭄으로 임금이 <喜雨>라는 제목으로 관원들에게 七言 律詩를 짓게 하였는데 公은 여기서 壯元하여 豹皮와 胡椒를 賞으로 받으셨다. 그 후 吏曹正郞을 거쳐 通政大夫에 올라 義州府尹, 承旨, 五曹의 參判을 거쳐 忠淸,咸鏡,慶尙,黃海의 觀察使를 역임하셨고, 江華와 開城의 留守, 大司憲, 大司諫 등을 제수 받았으며 右參贊, 吏曹와 禮曹의 判書를 역임한 뒤 耆老所에 들어가셨다. 이 때 號를 四休라 하셨는데 致仕한 후에는 또 號를 晩隱이라 하고 悠悠自適하시다가 一六七七年(肅宗三) 八月 九日에 七十八歲로 小安國洞에서 歿하셨다. 이 때 子 秋萬이 公의 형님인 陜川公 諱 곡에게 出系하였다가 先卒하게 되자 禮曹에서는 秋萬의 第二子인 麟至로 하여금 大功服으로 三年間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충북 괴산읍 능촌리에 安葬되셨다.
그 후 또 麟至의 後嗣가 없자 禮曹判書인 閔鎭厚가 임금에게 건의하여 公의 第一孫인 鳳至의 第三子 德祚로 하여금 祭祀를 관장하게 하였다.
配이신 貞夫人 陽川許氏는 一六一一年(光海三)에 出生하셨는데 父는 正言인 許實이며, 祖는 吏曹判書인 岳麓 許筬이고, 曾祖는 監司인 草堂 許曄이다. 夫人께서는 治家함에 있어 婦道를 갖추고 극진히 하셨는데 公 歿後 十년 뒤인 一六八七年(肅宗十三)에 돌아가시어 公과 合封되셨다.
一男 一女를 두셨는데 子 秋萬은 長兄 곡에게 出系하여 司馬試에 오르신 후 通訓大夫 義禁府都事를 역임했으며 豊山人 南原府使 洪의 따님을 맞아 二男을 낳았고 女는 扶餘人 牧使 徐敬祖에게 갔으며 庶子로 肅萬, 畢萬, 載萬이 있다.
아아! 四休第公께서 歿하신지 三百十九年이 지나도록 墓碑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였는데 一九九二年 比安公門中會가 구성된 이후 본격적인 爲先事業과 比安公先祖님의 墓碑建立이 계기가 되어 公을 追慕하는 後孫들의 精誠이 모여 이제야 墓碑를 세우게 되었도다. 이에 晩時之歎이나 感泣할 따름이며 벅찬 감격을 누르고 公의 行狀과 그동안의 顚末을 기록하여 公의 높은 精神과 功業이 길이길이 遺傳되며 본 墓域 또한 子子孫孫 永久 保存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九年(二00六). 四月 十六日. 四休第公 十三代傍孫 恒鏞 謹撰. 十一代孫 文應 碑前面 謹書
四休第公 十代孫 相天, 十一代孫 斗應 駿應 達應 順應 聖應, 十二代孫 泰燮 奎榮 益洙 奎東 奎成, 十三代孫 泰鎭 恒鏞 大鏞, 外 後孫 一同 謹竪
<주요 자료 소개>
1. 친필 서찰1
<친필1> (<簡牘>2002. 2. 26. 발견. 규장각 소장. 항용(제) 제공)
<判書公 諱 徽 親筆 書札(1)>
1)발견일 : 2002. 1. 26 2)발견자 : 金恒鏞 (제) 3)소장처 : 규장각(서울대) 4)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 5)編輯, 潤文人 : 金恒鏞
6) 한문 원문
天崩之慟品切痛炎 卽承情帖. 至沃何極. 弟親床危重數月在憂泣中. 幸而小蘇頃纔入城而旋卽鎖意. 日間又爲發冗尙未趨 候於大 監前兼與兄. 敍阻遠以別恨 先絶之問忽辱益切感恨. 餘容一遲伏惟. 行人然得附上狀. 己丑七月秋節 弟徽拜
7) 번역문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에 품위가 떨어지고 아픔이 컸지만 정다운 소식 받았습니다. 귀하신 몸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제(弟)는 어버이(어머님)의 병상이 몹시 위중하여 몇 달을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행히 조금 회복되었기에 요즈음 겨우 성에 들어왔으나 곧 돌아가야 한다니 답답한 마음입니다. 일간 또 출발해야 하는 데도 미처 아직 못 뵙고 있습니다.
대감님과 형께 문안드립니다. 격조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이별의 한을 풀어야 하는데 먼저 문안이 끊겨 홀연히 욕이 되고 더욱 한이 됩니다. 크게 늦어진 것을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길가는 사람에게 부쳐 올립니다.
기축(1649. 공 43세) 7월. 가을절기에. 제(弟) 휘(徽) 올림
*주1-하늘이 무너지는 아픔(天崩之慟-천붕지통) : 인조의 죽음(1649. 5.)에 대한 비통함.
*주2-형 : 수신자이나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미상임.
*주3-1649년 7월은 효종이 즉위한 지 2개월 후. 공은 43세로 부수찬(副修撰)에 기용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하 던 때임.
2) 친필 서찰 2
<친필 서찰2>
<判書公 諱 徽 親筆 書札(2)>
1)발견일 : 2002. 1. 26. 2)발견자 : 金恒鏞 3)소장처 : 규장각(서울대) 4)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 5)편집․윤문인 : 金恒鏞
6)한문 원문
意表伏承 情書親患 居況卽相慰佇十分 弟若若之餘百病來侯万者從臨中愁心 示事推盡倒治下 本面無荷南 卽荷同而緊到 幼死 有男四人 皆屬良役有文信文卷然後千得拾尋荷男之母名後假書監各仰 餘萬不登 伏惟 兄上謹拜 上謝狀
丁酉七月二十二日 弟 싸인
7) 번역문
삼가 고마우신 편지를 받아 감사의 뜻을 표하나이다.
어버이께서 병중에 계신데, 이에 하물며 오래도록 기거하며 머물러 서로 위로해 주심에야.
제(弟)는 여러 가지 일들이 길게 늦어진 나머지 문안 오는 많은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가운데 걱정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보여주신 일은 힘써 다해 보았습니다만 도리어 아래와 같이 다스렸습니다. 본 면(面)에는 하남(荷男)이란 자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곧 하남의 무리들을 서둘러 도착시켰는데, 어린것은 죽고 남자들 네 명이 있었는데 모두 양역(良役)에 속하여 문신(文信) 문권(文卷)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천득(千得)이란 하남(荷男)어미의 이름을 찾아 낸 뒤 가서(假書)를 살펴보았는데 각각 믿을 만하여 나머지는 모두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형님께 근배하며 감사의 글월을 올리나이다.
정유(丁酉. 효종8년. 1657) 7월 22일 제(弟) 싸인
*주1-이 서찰은 1657년(효종 8. 공 51세) 공이 1653년 민정(閔鼎)과 함께 올린 상소사건의 소용돌이에 있다가 의주부윤으로 가 있을 때 작성한 것으로 보임.
*주2-내용은 하남이란 자의 조사 요청에 대한 답신으로 보이나 수신자는 미상임.
3. 친필 시문
<친필 시>
<判書公 諱 徽 親筆 詩-偶讀宋潛溪靜寶詩次韻>
1)발견일 : 2002. 1. 26. 2)발견자 : 金恒鏞 3)소장처 : 규장각(서울대) 4)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 5)편집,윤문인 : 金恒鏞
6)한문 원문 및 번역문
偶讀宋潛溪靜寶詩次韻--示雋及閔生庭棋二前(우연히 잠계(潛溪) 송정보(宋靜寶) 시의 운에 따라-- 준과 민정기 두 분께 보입니다.)
林扉面山開 숲 속 사립문은 산을 마주하여 열려있고
揷籬村溪隔 울타리 둘러 처진 마을은 계곡 사이에 있는데
一室靜圍書 방안에서 고요히 책을 읽다가
千巖閑杖屐 바위산에 한가히 막대 짚고 나서네.
雨餘署氣淸 비 온 뒤 더웠던 기운은 시원해지고
溪邊人事寂 시내 가엔 인적이 적막한데
時時挾冊來 때때로 책을 끼고 이곳에 나오니
汝背留行跡 그대들 머물렀던 행적만 있구려.
幽庭草積翠 그윽한 정원엔 풀빛이 파릇파릇하고
曲渚沙鋪明 굽이진 모래톱엔 맑은 모래 펼쳐져 있는데
風驅酷暑去 바람은 무더위 몰아가 시원하고
鳥呼殘夢驚 지저귀는 새 소리는 남은 꿈을 깨우네.
靜居流何修 고요한 삶 얼마나 많이 흘렀는가
年光倏遞更 세월은 잠깐 사이에 바뀌어 간다는데
小壯勉究業 젊은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庶以慰世情 모두가 이 세상을 정겹게 위로하네.
庚戌 夏(1670년. 현종 11. 공 64세. 여름. 공께서 병조참판 시절)
4. 친필 서찰 3, 4
<운곡보첩>(판서공의 서찰이 실려있는 서책 표지)
<판서공 친필>
1) 발견 일시 : 2003. 7. 2) 발견자 : 김주회(안). 3) 발견장소 : 국립중앙도서관 고전문헌실
4) 촬영 및 제공 : 항용(제) 5) 해독 및 번역 : 익수(보명 태익. 제학공파. 제주도 문화재 위원)
6) 해독 및 번역
가)서찰 3 (상기 사진 좌)
(1)작성 일시 : 미상. 본문 내용의 상복으로 보아 부친(휘 시양) 몰년인 1643년(인조 21. 작자 37세 ) 또는 모친(경주이씨) 몰년인 1653(효종 4년. 작자 47세)으로 추정.
(2)해독 원문
再昨 蒙枉殮感 伏惟夜來起居 病未委謝罪 歎令之疏草 幸投不見 謹完上 不具式.
服人 徽
(3)역문
그저께 염(殮)을 할 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가 밤에 오셔서 계시다가 병으로 쓰러지지는 않으셨는지 사죄를 드립니다. 영감의 상소문 초안(疏草)에 감탄하였습니다. 행여 (원고를) 보내도 보지 못했는데 삼가 완결되면 올리겠습니다. 예절을 갖추지 못합니다.
상복을 입은 휘(徽)
나)서찰 4 (상기 사진 우)
(1)작성 일시 : 미상,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작자가 이조판서 시절인 1675년(숙종 1. 작자 68세) 경으로 추정.
(2)해독 원문
嶺伯則首擬 而不得湖 則可望 而爲之 其得其失 莫非數也. 所謂天難감(食+감)者是也. 今而後 庶至失侶無倚之懷 而亦不得驕 至委則悼亡之心 一倍難堪也. 熢燧狀二度奉呈耳. 前伯書寫之役 宿憂令之辭 朝知去不遠 而守鎖不能就拜 尤切
忠不備式. 卽之欠各式
(3)역문
영도백(嶺道伯-경상도 관찰사)이면 먼저 논의를 해야 하고 호도안무사(湖道按撫使)이면 망(望:왕에게 추천하는 三望)에 더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하는 것은 헤아려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위 하늘이 굶주리게 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옳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이후로 거의 짝을 잃게되어 마음속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또한 교만할 수도 없고 쓰러지게라도 되면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은 갑절이나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봉수장(熢燧狀: 봉수책임자의 임명장)은 두 번을 드렸습니다. 전의 도백의 편지에 걱정을 했는데 아침에 떠나도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므로 나아가 인사를 하지 못하여 더욱 간절하고 섭섭합니다. 정성으로 예의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곧장 쓰다보니 각각 격식에 모자랍니다.
5. 친필 서찰 5
1) 발견 일시 : 2003. 9. 18
2) 발견자 : 金恒鏞(제).(金榮煥(문), 金勃鏞(군) 1차 발견 )
3)발견장소 : 아트서울 서화 전문 매장
4)해독 및 번역 : 金益洙(보명-泰益. 제학공파. 제주도 문화재 위원)
5)윤문 및 편집 : 金恒鏞
6)작성 일시 : 1653(효종 4. 필자 47세) 2. 11
7)매입소장자 : 金斗應 2003. 10. 1. 55만원 매입 소장
8)수신자 : 미상(필자의 근친 어른(時亮-紳의 父, 또는 근친)께 올린 것으로 추정)
9)<서울 아트서울 전문 매장 소개 내용>
번호: kh-101. 성 명:사휴정 김휘(四休亭 金徽 1607-1677). 품 명:간찰(簡札). 년 도 : 癸巳 二月十一日 (1653년).
크 기: 62x23cm. 가 격: 550,000 원
10)해독 원문
奉謝
歲改以後 音墨尙阻 居常 耿 始承問 書 而稍慰積 之懷 經後且有日 依舊是落落 卽惟殷春 隸履珍率 庸徵稅 戒末一是病 已極自 而承接紳音 則如經滄桑 世界此何厄會年 運是矣 惟承輔德 侄兒無警耳 示事 豈可忘諸懷 而然無好 道理 奈何 第俟之語 不認以例談也 何餘 然
不備 謝式 癸巳二月十一日 戒末 徽 頓
11)번역문
감사히 받았습니다. 해가 바뀐 이후 편지를 아직까지 못하여 항상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문안편지 받고 쌓였던 생각에 다소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나고 난 후 또 며칠이 되니 예전대로 고독해졌습니다. 곧 풍성한 봄철인데 관청의 일 잘 보시고 징세하는 일에 바쁘시겠습니다.
계말(戒末)은 한번 병들고 나니 고단함이 이미 극에 달해 스스로 두렵습니다. 그리고 신(紳)의 소식을 접하고 보니 상전이 벽해가 된 듯 세상에 年運이 이처럼 무슨 액(厄)을 만났단 말입니까? 삼가 도와주신 덕을 입었으니 조카가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부탁하신 일은 어찌 그 생각을 잊었겠습니까. 그러나 좋은 도리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다만 기다리시라는 말을 일러두는 말로 인정하지 마십시요. 언제까지나 그렇게 남겨 두겠습니까.
갖추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癸巳년(1653. 효종 4. 필자 47세. 司諫 시절로 추정) 2월 11일
계말(戒末) 휘 돈수
*주 : 김 신(金 紳) 1592(만력 임진. 선조 25년)--1665(현종 6년)
자는 子肅 1616년 생원. 壽 74세. 묘는 괴산 문광면 전법 後麓이다. 祖는 세칭 5甲의 셋째인 友甲(참봉공)이며, 父는 장자인 판관공 휘 시량(時亮)으로 公은 판관공의 제 5자이다.
6. 사휴제공의 작으로 추정되는 문인화 소개 (2003. 10. 17. 은회(익), 항용(제) 제공)
유형문화재 제33호. 관련 사이트 ://www.daegustory.com/dae-mun/mun-u/033.jpg
소재지:경북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51
용계(龍溪) 서변(1605∼1656) 선생이 49세 때에 어전 희우시회에 나가 1등상을 받았다는 기록과 그 광경을 그린 한 폭의 그림으로 가로 63cm,세로 57.4cm의 크기이다.
이 그림의 내용은 1653년(孝宗 4)에 가뭄이 오래 계속됨에 따라 효종이 친히 기우제를 지내고, 이로 인하여 단비가 내려 13명의 홍문관 옥서신을 불러 희우시를 짓게 하여 하사품을 내리는 장면이다. 그 때 서변은 장원하여 말안장 1부, 호피 1령 , 호초 5근을 받았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린사람은 당시 이름난 화공이 아니면 홍문관 관리들 중에서 문인 화가로 잘알려진 김휘가 아닌가 추측된다.
채색화로서 인물과 문방구 등을 섬세한 기교로 묘사하고 화풍은 격이 높아 조선 중기의 인물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사휴제공 휘 김휘 선조님에 관해서 1652년(효종 3) 3월 17일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가뭄끝에 비가 왔다. 임금이 희우(喜雨)라는 제목으로 입직중인 관원에게 오언, 칠언 율시를 짓게 하였다. 운자는 '豊, 民'이었다. 김 휘는 수찬으로서 수석을 차지하여 표피(豹皮)와 호초(胡椒:후추)를 상으로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7. 사휴제공 낙관 소개 (2005. 10. 19. 발용(군) 제공)
1)발견일시 : 2005. 10. 17.
2)발견 장소 : 서울시 강서구 고서점
3)출전 : <반용헌진장인보>(盤龍軒珍藏印譜) 1987년 홍일문화사간. 월전 장우성선생 저.
(8)承旨公 諱 龜萬 神主(승지공 휘 구만 신주) -16世
先祖考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府君 神主 |
先祖女比 淑夫人 宜寧南氏 神主 |
*승지공. 휘 구만(龜萬) : 1632년(인조 10)--1699년(숙종 25).
자(字)는 元瑞(원서),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 출생.
1666(현종7년 35세)에 진사(進士) 급제, 1677년(숙종3, 46세) 강서현령(江西縣令), 1678년(숙종4, 47세) 문과 급제 후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거쳐 1689년(숙종15, 58세)에 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京畿右防御使 長湍府使), 1693년(숙종19, 62세)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694년(숙종20, 63세) 좌승지(左承旨)에 올랐고 1699년(숙종25) 68세로 몰(歿)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산1번지 보광산 정상 선영하(先塋下) 건좌(乾坐)에 있다.
유물로는 문과 교지 1매, 장단부사 유지 1매, 친필 서찰 1매가 있다.
<주요 자료 소개>
1. 주요 사진 소개
1) 묘소
<묘소>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보광산 정상)
<상석>
<동자석>
<묘역 우측의 문관석과 촛대석>
<문관석>
<촛대석>
2) 교지 (문과 급제)
<紅 牌> 1.시기 : 1678년(숙종4). 승지공 47세 2.수교자 : 承旨公(諱 龜萬) 3.내용 : 文科 科擧試驗 合格 紅牌 4.원문 및 풀이: 敎旨,通訓大夫 前行江西縣令 平壤鎭管兵馬節制都 尉 金龜萬 文科 丙科 第十一人 及第出身者 康熙十七年 閏五月 十一日(통훈대부 전행강서현령 평양진관 병마절제도위였던 김구만은 문과 병과 제11인(총22위)에 급제 출신자임. 강희17년(1678. 숙종4) 윤5월 11일) 3.소장 : 양덕공 종가 4. 크기 : 77x100cm |
3) 유지-경기 장단부사
<諭 旨> 1.시기 : 1689년(숙종15). 승지공 58세 2.수교자 : 承旨公(諱 龜萬) 3.내용 : 京畿右防禦使 長端府使(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에 임명하는 유지(임명장) 4.소장 : 양덕공 종가 5.크기 : 138.5x53.8cm |
4)친필 서찰 1
<친필 서찰>(<槿墨>. 성균관대학교. 1981. 636P. 2002. 7. 19. 항용(제) 발견 제공)
가) 발견일 : 2002. 7. 19
나) 발견자 : 金恒鏞
다) 소장처 : <槿墨>(성균관대박물관. 1981. 636P.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라) 원문 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제)
마) 윤문 편집 : 金恒鏞
바) 한문 해독 원문
頃承下札 未遇順便 不卽修謝 今罪恨 卽仍 季方兄憑審至寒 靜況萬安 欣慰欣慰. 弟 四朔馬上不死幸矣. 他不足000000多 十餘邑行色太忙 又不得奉敍勢奈也何. 玆留一書以謝前失 又候起居
餘伏惟兄照耳 謹謝狀上 戊至二十四日 服弟 龜萬 拜
사) 번역문
지난번 내려보내 주신 편지는 받았습니다만, 그곳으로 가는 인편을 만나지 못해 즉시 감사의 말씀을 올리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니 죄스럽고 한스럽습니다.
즉시 이어 계방(季方)형이 찾아줄 것을 믿고 있다가 겨울에 이르렀습니다. 고요하고 하물며 모든 것이 편안하다 하니 크게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제(弟)는 넉 달 동안을 말 위에서 죽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달리 000000을 말할 것이 못되며 000이 많았으며, 10여 읍(邑)의 행색은 너무나 바빠 또한 형편을 서술할 수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에 한 통의 편지를 남겨 전의 잘못을 사과 드리며 아울러 안부를 올립니다.
나머지는 삼가 형께서 살펴주소서. 삼가 사과말씀 드리는 글월을 올립니다.
무(신)년(1668년) 동지 24일 복(服)을 입은 동생 구만(龜萬) 배
주1-戊0年(무0년)은 戊申年(1668년. 현종 9)으로 봄. 복을 입고 있다 하였는데 부친(감사공 휘 素)께서는 1666년(丙午年)에 몰하였므로 戊는 2년 뒤인 무신년(戊申年-1668년)으로 추정됨. 당시 공은 37세로 진사에 급제(1666년)하고 나서 강서현령에 제수되기 전 상태임.
주2-季方兄(계방형)은 남의 사내 동생을 존대하여 부르는 호칭인데 여기서는 수신자의 동생을 일컫고 있는 것 같으나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음.
주3- 000 은 원문이 훼손된 부분임
주4-수신자는 공의 형쯤 되는 사람으로 보이나 정확한 수신자는 알 수 없음.
친필 서찰 2
가) 발견일 : 2002. 12. 23.
나) 원 소장처 : 아트서울
다)입수 과정 : 아트서울 경매 출품 내용 발견(발용(군) 정보 제공)-- 2002. 12. 24. 항용 매입(420,000원)
라) 판매 공고 내용
번 호 |
kkm-101 |
성 명 |
원서구만(元瑞 金龜萬 1632- 1699) |
품 명 |
간찰(簡札) |
년 도 |
1673 (癸元→癸丑? ) |
크 기 |
36.5x32cm |
가 격 |
420,000원 <판매예약 |
마) 원문 해독 및 번역인 : 김익수(제. 제주문화재 위원) .
바) 윤문 및 편집 : 김항용
(1)원문
下察 謹謝賀狀 癸元禮上 龜萬 頓 新元祝賀 固當先奏於法奉之下 而聞遲里험兒之故 有意未果 此承先白至威且愧 生之今番所遭 非但其言相辱也 亦非焉 其人之可畏也 深報不足數之人 而問其職卽惡使也 所謂惡使者物言於隣邑門 吾不對面云 而畢竟迂路作行宿於絡原則其行果顧言矣 上官旣不欲對面則相下官何者敢我無所失而自安也 亦何敢謂無可畏而不動也 若使此身帶意職 而使彼兒輩千百作群而효효(시끄러울 효) 固不當動一毫矣 令則旣是外官且是下官 其之外更無他策 而聞金吾郞四散云此時守土之官不可容易離職 次是可復也 餘萬 00000 孫 晉士 下史
(2)역문
살펴주소서. 축하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계년(癸年) 새해 아침에 예를 올립니다. 구만(龜萬) 돈수
새해 초하루를 축하함은 예법으로 아래에서 받들어 먼저 아뢰어야 마땅했습니다만, 마을의 불량배 때문에 늦어졌고, 뜻은 있어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받고 보니 먼저 지극히 두렵고 또한 부끄러움을 아뢰나이다.
소생이 이번에 봉변을 당한 것은 다만 그 말에 욕을 당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잘못에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보복하려고 하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직책을 물어보면 악사(惡使)들입니다. 소위 악사(惡使)라는 자들은 이웃 마을의 문간에서 물의를 일으켜 놓고도 내가 대면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끝내는 굽은 길에서 하던 짓들은 원칙에 묶여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결국 언행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상관(上官)이 이미 대면하고 싶지 않다면, 서로 하관(下官)된 자가 어찌 감히 내가 잘못함이 없는 바에야 스스로 편안하겠으며, 또한 어찌 감히 두려워함이 없이 꿈적도 못하겠습니까. 만약 이 몸으로 하여금 관직에 뜻을 두게 하고, 저들 무리로 하여금 수백의 무리가 떼를 지어 시끄럽게 하더라도, 정말로 털끝만큼도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나중에 외관(外官)이라도 좋고 또는 하관(下官)이라도 좋은데, 밖에 이른다 해도 다시 다른 대책은 없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금오랑(金吾郞. 주: 금부도사)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런 때에 국토를 지키는 관원이 쉽게 직책을 떠날 수는 없으니 차차 옳게 회복되겠지요. 나머지 모든...(이하 원문 파손 5자) 손(孫) 진사(晉士) 하사(下史)
*주--계원(癸元) : '계(癸)'가 들어 가는 해의 정월을 의미함. 따라서 작성 연대는 연대는 계축(1673. 진사급제 후. 42세), 1683(계해. 正言, 掌令시절. 52세), 1693(계유. 부호군 시절. 63세) 등으로 추정됨
<致祭文 소개>
1. 제작일시 : 1699(숙종25)
2. 수령자 : 김구만
3. 출전 : <상락가승> (1895년(고종 32) 간. 金龜浩 著. 김항용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자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김익수 감수)
5. 원문
致祭文
(원문 생략)
6.역문
국왕은 신하 예조좌랑 朴師東을 보내 죽은 전 부사 김구만의 영혼에 고하여 제사하노라.
영령은 명신의 자손이요 대대로 벼슬을 지낸 옛 문벌이라. 天品은 고지식함에 가깝고 입은 아부하지 않았다. 소질이 많으며 文名이 뛰어났다. 행함에 있어서는 재주를 겸하여 여유가 있었고, 이름은 진사시에 올라 칭송이 士流에 드높았다. 처음에는 관직에서 재능을 펴지 못했으나 애써 수고를 다하여 나중에는 공적이 있었다. 늦게서야 문과에 올라 승진하는 길이 마침내 열렸다. 대석(臺席: 승지)에 세 번 오를 정도로 그 풍채가 가히 볼 만 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관이 되었는데 지역 풍속이 안정되었다.
낮은 벼슬도 사양치 않았는데 역승(驛丞)이든지 절도사의 영(營)에 있든지 재주가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큰 고을을 맡아 서울을 튼튼히 하였고, 여러 조(曹)에 역임하였는데 주로 요직에 있어 궁궐에 출입하면서 상소문의 옳은 것은 올리고 나쁜 것은 막는 적당한 활동을 하였다. 내가 연경에 가 있을 때 그대는 내 곁에서 실로 나를 보살피고, 화답하며 서로 즐겼던 것이 어수일당(漁水一堂:임금과 신하의 친절한 사이)이었다. 경연석에서는 성심으로 진언하여 사치로 문란해진 것을 개혁하고, 나라를 위하여 먼 장래까지 생각하여 나라를 튼튼히 보호하는데 힘썼다.
비복들에게는 더욱 더 어질게 대하여 돌보아줌이 매우 돈독하였고 전원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기회를 보아 농사도 짓곤 하였다. 명예가 훼손됨이 없었고 관직에 나아가거나 물러감에 있어서는 항상 신실하였고 험한 길에 조심하듯 하고 장마가 걷힌 듯하였다. 남녘땅의 현령으로 명을 받았다가 동강(東崗: 강원도, 경북의 동쪽지방)에 수령으로 천거되어서는 편안하고 한가하게 자적하다가 만년에 은혜를 입어 관동의 절도사(또는 절제사)로 겨우 돌아왔는데 2년만에 갑자기 별세하니 인재로 쓰임이 다하지 못하고 영원히 구천으로 떠나고 말았다. 충성스럽고 순박한 성품과 뛰어나게 특출한 모습은 이제 끝이로다. 만나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내 마음 아리고 슬프도다. 이미 이품(二품)의 반열에 올랐으나 부임하지도 못했도다. 나라에서 논의하여 슬픈 일을 담당하는 일에 있어 특별한 은전으로써 함께 도와 약소하나마 예관을 보내 제를 올리고 문상하니 흠향할 지어다.
通訓大夫 司僕寺正 知製 洪重夏 지어 올림.
(9)副護軍 諱 南挺 神主(부호군 휘 남정 신주)--17世
先祖考 嘉善大夫 折衝將軍 行龍讓衛副護軍 兼世子翊衛使 洗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貞夫人 廣州李氏 神主 |
*부호군. 휘 남정(南挺) : 1652년(효종3)--1731년(영조7).
자(字)는 백겸(伯兼).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 1691년(숙종17, 40세)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731년(영조7, 80세)에 용양위부호군(龍讓衛副護軍)을 수직(壽職)으로 받았다.
그 해 80세로 몰(歿)하였음. 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아래지경 건좌(乾坐)이다. 묘는 2006. 10. 23.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로 이안함
유물 : 白牌(진사급제) 1매
*배위 : 정부인 광주이씨(1655-1689) : 乙未生. 己巳 12월 8일 졸. 향년 35세. 부는 정랑(正郞) 상진(象震). 祖는 감사(監司) 여황(如璜). 증조(曾祖)는 영상(領相) 한음(漢陰) 덕형(德馨). 외조(外祖)는 참봉(參奉) 함평(咸平) 이자(李滋).
유물 : 白牌(진사급제) 1매
<구묘-2006. 10. 22. 이안 이전 모습. 충북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뒷산>
<부호군 묘소 및 묘비>
<이안 후의 모습>(2006. 10. 23)
<2007. 9. 24. 이안후의 모습(충북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
<문당묘원 조성 후의 모습>(2006. 10. 23. 충북괴산군 청안면 문당리>(상좌-남정, 상우-남채, 하-정광)
<2007. 4. 1. 식목 후의 모습>
<진사 급제 교지(白 牌)>
<白 牌>
1.시기 : 1691년(숙종17, 부호군 40세)
2.수교자 : 副護軍(諱 南挺)
3.내용 : 진사시험 합격 교지(白牌)
4.원문 및 풀이 : 敎旨. 幼學 金南挺 進士 二等 第十二人
入格者.
康熙 二十年 二月 二十八日(교지. 유학인 김남정은 진
사시험 2등 가운데 제12인(100명 중 약 17등) 입격자임.
강희30년(1691년, 숙종 17년)
5.소장 : 양덕공 종가
6.크기 : 42 × 99(단위-cm)
(10)通德郞公 諱 南採神主(통덕랑공 휘남채신주)-17世
先祖考 通德郞 府君 神主 |
先祖女比 恭人 全州李氏 神主 |
* 통덕랑공. 휘 남채(南採) : 1662년(현종3)-- ?
字는 중정(仲靖)이며 묘는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일명 西枾谷)이다. 2006. 10. 23.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로 이안함
*배위 : 全州李氏(1662-?) : 壬寅生. 忌 일-5월 7일 .父는 이조참판 퇴촌당(退村堂) 규(揆). 祖는 영상(領相) 분사(分沙) 성구(聖求). 曾祖는 판서(判書) 지봉(芝峰) 수광(睟光).
<통덕랑공 묘소>(이안 이전 모습- 충북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
<이장 후의 모습>(2006. 10. 23. 충북괴산군 청안면 문당리)
<2007. 9. 24. 모습> (항용(제) 촬영 제공)
(11)通德郞公 諱 必光神主(통덕랑공 휘필광신주)-18世
先祖考 通德郞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恭人 驪興李氏 神主 |
*통덕랑공. 휘 필광(必光) : 1674년(현종15)--1704년(숙종30)
字는 현경(顯卿).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향년 31세로 몰함. 묘는 사리면 새터 간좌(艮坐)이다.
* 배위 : 驪興李氏(1675-1753) : 乙未生. 癸酉 12월 29일졸. 父는 진사 용(瀧). 曾祖는 감정(監正) 지굉(志宏). 소릉(少陵) 상의(尙毅)의 玄孫. 묘는 새터 乾坐.
<묘소 및 표석>
(12) 學生公 諱 鼎光神主(학생공 휘 정광신주)-18世
先祖考 學生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孺人 羅州丁氏 神主 |
*학생공. 휘 정광(鼎光) : 1686년(숙종12)-- ?
字는 성보(盛甫). 父 남채(南採)의 장자(長子), 묘는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西枾谷) 선영하(先塋下)이다.
2006. 10. 23. 충북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로 이안함
*배위 : 孺人 羅州丁氏(1684-?) : 甲子生. 忌 五月六日. 父 道泰. 祖 參護 時潤. 曾祖 校理 彦璧. 忠靖公 應斗 后. 墓 普光山洞. 1996년 방축리 移安 했다가 2006. 10. 23. 충북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로 이안함
<이장 후의 모습> (2006. 10. 23)
<2007. 9. 24 모습>
(13)學生公 諱 東虎神主(학생공 휘 동호신주)--19世
先祖考 學生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孺人 坡平尹氏 神主 |
*학생공. 휘 동호(東虎):1694년(숙종20)---?(1734년 추정)
字는 산보(山甫). 몰년은 알 수 없으나 유물(호적단자)로 보아 40세 이상 생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묘는 괴산군 사리면 삼봉산하 오좌(午坐).
유물 : 호적단자 1매
*배위 : 坡平尹氏(1694-1751) 甲戌生. 辛未 1월 10일 졸. 父는 우경(遇慶). 祖는 별제(別提) 이임(以臨). 曾祖는 진사(進士) 세고(世고)이다.
<戶籍單子>
1.시기 : 1732년(영조 8, 公 39세)
2.작성자 : 幼學 金東孟(후에 孟은 虎로 바꿈)
3.거주지: 槐山郡 內西面 國祀堂里
4.기록내용
1)父부터 曾祖까지와 家率 기록.
*父:學生 必光. *祖:折衝將軍 行龍驤衛 副護軍 南挺
*曾祖:通政大夫丞(政院左丞旨) 兼 經筵參贊官春秋館 修撰官 龜萬-( )는 훼손부분
*母:驪興李氏(58세) *妻:坡平尹氏(39세)
*率子:鍊昌(18세)-婦 李氏(21세), 鏡昌(13세), 錠昌(5세), 鎭昌(2세) *孫(2세)
2)奴婢
*家內 奴婢: 奴(7), 婢(4)--11명 *他居 奴婢: 奴(60), 婢(49)--109명 계120명 .
4.소장: 양덕공 종가
5.크기 : 48.5 × 90.5 (단위-Cm)
※호적단자: 3년에 한 번 家長이 2매를 작성하여 관청의 결재를 얻은 후 1매는 가정에 보관하여 증명서로 활용하던 것.
(14)學生公 諱 東吉神主(학생공 휘 동길신주)--19世
先祖考 學生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孺人 全州李氏 神主 |
*학생공. 휘 동길(東吉) : 1714년(숙종40)--1775년(영조51)
수(壽) 62세. 부 정광(鼎光)의 三子. 묘는 괴산군 보광산 정내(頂內) 동편 언덕 해좌(亥坐).
*배위 : 全州李氏 : 忌日은 5월 14일이며 父는 국화(國華)이다.
(15)學生公 諱 火肅 神主(학생공 휘 숙 신주)--20世
先祖考 學生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孺人 延安李氏 神主 |
* 학생공. 휘 숙(火肅 ) : 1715년(숙종41)--1785년(정조9)
字는 회백(晦伯).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호적단자의 '국사당리(國祠堂里)'는 감사공께서 거주하던 현 荷島임). 71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의 간좌(艮坐)이다.
유물 : 호적단자 2매.
*배위 : 延安李氏(1715-1803) : 乙未生. 癸亥 6월 19일 졸. 89세. 父는 원성(遠聲). 祖는 판관(判官) 제하(濟夏). 증조는 판관 성뢰(聖賚). 회헌(晦軒) 최경(崔景)의 현손(玄孫)이다.
<戶籍單子>
1.시기 : 1770(영조46). 公 56세
2.작성자 : 金 熽
3.거주지 : 內山 內二上. 墨井里
4.관할청 : 淸州牧
5.기록내용 : (부식, 훼손으로 불명)
奴婢 : 奴(약21), 婢(약56)
6.크기 : 32.5 × 82.5 (단위-Cm)
<戶籍單子>
1.시기 : 1778(정조2), 公 64세
2.작성자 : 幼學 金 火肅
3.거주지 : 槐山郡 內西面 國祀堂里 第6統 4
4.내용: 1)父:學生 東虎
2)祖:學生 必光
3)曾祖:折衝將(軍) 行龍?衛副護軍 南挺
4)奴婢:奴(38), 婢(65) . 他居奴婢(노-10, 비-16).
逃亡奴婢(노-17, 비-14)
5.크기 : 56.5 × 94 (단위-Cm)
(16)學生公 諱 會健 神主(학생공 휘 회건 신주)-21世
先祖考 學生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孺人 光山金氏 神主 |
*학생공. 휘 회건(會健) : 1735년(영조11)--1810년(순조10)
字는 여강(汝强).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76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 임좌(壬坐)임.
유물 : 호적단자 1매 .
*배위
1)광산김씨(1740-1770) : 庚申生(1740). 庚寅(1770) 11월 10일 졸. 31세. 父는 희수(希壽). 墓는 괴산군 청안면 東楸洞 壬坐이다.
2)고성이씨(1753-1835) : 계유생(1753) 을미(1835) 2월 25일 졸. 父는 첨추(僉樞) 성로(聖老)이다. 壽 83세.
<호적단자>
<戶籍單子>
1.시기 : 1799(정조34), 公 64세
2.작성자 : 幼學 金會健
3.거주지 : 內山內一 孤山里
4.관할청 : 淸州牧
5.기록내용 : 1)父:學生 熽 2)祖:學生 東虎 3)曾祖:必光
4)率子:由升(24세), 由成(18세), 由光(12세)
5)奴婢(타거노비는 많으나 부식되어 불명).
婢: 福丹(12세), 福禮(10세)
6.크기 : 28 × 88.5 (단위-Cm)
(17)學生公 諱 由和 神主(학생공 휘 유화신주)-22世
先祖考 學生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孺人 德山尹氏 神主 |
先祖女比 孺人 尙州朴氏 神主 |
* 학생공. 휘 유화(由和) : 1775년(영조51)--1835년(헌종1)
字는 응서(應瑞).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笑梅里) 출생. 호적단자 3매, 제문(祭文)과 통문(通文 : 감사공 승지공 산소 사초에 관한 통문)1매, 公의 8대조(양덕공-시열)까지의 약력을 기록한 가첩 등이 유물로 전함. 61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 축좌(丑坐)임.
*배위
1)덕산윤씨(1776-1857) : 丙辰(1796-丙申(1776)의 오기로 보임). 2월 12일 졸. 부 흥교, 조는 정(晸), 증조는 은상(殷相)이며 묘는 청주 휴암(鵂岩) 축좌(丑坐)이다. 壽 82세.
2)상주박씨(1769-1825) : 을축(1805-己丑의 오기로 보임. 1769) 5월 21일생. 을유(1825) 10월 20일 졸. 부는 상흠(常欽), 조는 함(涵). 묘는 쌍봉이다.향년 57세
<호적 단자>
<戶籍單子>
1.시기 : 1823년(순조33), 48세
2.작성자 : 幼學 金由和
3.거주지 : 忠北 槐山郡 內西面 笑梅洞 第十七統 第五號
4.관할청 : 槐山郡
5.내용
1)父:學生(會健) 2)祖:學生(熽) 3)曾祖:學生 (東虎)
4)奴婢:癸分, 卜丹(도망), 卜丹의 女
6.크기 : 41 × 73 (단위-Cm)
<戶籍單子>
1.시기 : 1826년(순조36), 公51세
2.작성자 : 幼學 金由和
3.거주지 : 忠北 槐山郡 內西面 笑梅洞 第十五統 第二號
4.관할청:(불명)
5.내용
1)父:學生 會健. 2)祖:學生 熽. 3)曾祖:學生 東虎
4)奴婢:癸分, 卜丹(도망)
6.크기 : 22.5 × 61 (단위-Cm)
<戶籍單子>
1.시기 : 1835년(헌종1), 公 60세
2.작성자:幼學 金由稷(‘由稷’은 ‘由和’의 初名)
3.거주지:忠北 槐山郡 內西面 笑梅洞 第十四統 第二號
4.내용
1)父:學生 會健. 2)祖:學生 熽. 3)曾祖:學生 東虎 4)外祖: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 이성노(고성인), 5)시모:이씨 82세. 6)妻:故
7)率子:鎭國(35세) 婦-漢陽趙氏(41세)
鎭宅(26세) 婦-坡平尹氏(19세).
鎭周(16세)
8)奴婢: 癸分, 도망婢-卜丹, 卜丹의 女 順德
5.크기 : 35 × 68.5 (단위-Cm)
<통문>
<통문 소개>
1. 원본 소장처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 양덕공 종손가
2. 발견일시 : 1985. 8.
3. 발견자 : 김항용
4. 번역 정리일 : 1차-1989. 12. 2차-2005. 6. 22.(김익수 감수)
5. 원본 및 사진 크기 : 가로(50Cm ) × 세로(80Cm)
6. 원문 작성일 : 1827(순조 27. 필자 53세). 3월 15일
7. 작성자 : 金由和
8. 역문
右文을 돌립니다.
조상 선대를 추모하는 것은 天賦의 양심이며, 분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人道의 常事라 함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요, 또한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저의 종가에 이르러서는 홀로 그렇지 못하니 어찌 개탄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저의 監司公[휘 素] 承旨公[휘 龜萬] 양대 산소의 위토(位土)가 창설 초기에는 있었으나 풍요로움과 검소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살다가 그 후 종가는 세세로 가난하고 또한 그 삶에 항상스럽지 못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할 수 없는 지경을 만나게 됐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막중한 묘소에 대해 마침내 향불을 마련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즉 이미 지나간 일은 먼저의 하늘 운에 붙이지만 요즘에는 禁伐하는 명령이나 주장하는 사람도 없으니, 멀고 가까운 초동과 牧夫들이 마치 주인 없는 빈산으로 보며 왕래하는 행인들은 손가락질 아니 함이 없습니다.
한탄스럽습니다. 옛날을 거슬러 보고 지금을 살펴보니 슬픈 눈물이 옷깃 적심을 알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무릇 자손된 자들은 생각건대 이런 생각을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지난 10여 년 전에 族人 한 소년이 거리낌 없이 애쓰고 고생하며 먼 길을 걷고 물을 건너다니면서 글을 손수 전하여 묘역을 守護하는 계획을 소상히 알렸습니다. 대개 그 본심은 선조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또한 본토의 여러 친족들과 더불어 의견을 물었고 그 뜻을 하나로 모두 수렴하였습니다. 이제 그 전의 경황이 없던 때의 일이 지금에 와서야 가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살고 있는 5-6家는 비록 심히 가난하지만 이번 일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거절함이 없이 능력에 따라 분배하여 간신히 4냥씩을 준비하여 그 자본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량을 합한다 해도 풍족하지 못하므로 옛 고장 각 처의 자손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 해마다 조금씩 노력한다면 운영하려는 일은 머지않아 가히 이룰 수 있으리라 봅니다.제 마음은 기쁘고 행복하여 그 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오면서 소문에 들으니 2-3명의 자손이 그 돈을 사사로운 개인 재산으로 만들어 삼켜 버린 뒤에는 다시 그 비용을 내놓을 뜻이 없다고 하니, 그런 마음의 소재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겉으로는 선조의 이름을 거짓으로 빌리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살찌우게 하는 계획에만 힘을 다하며, 선영의 묘에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 것을 거만하게 보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으로 살펴볼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우리 종가에 이처럼 無禮한 사람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 나머지 모든 親族들은 老少 할 것 없이 손을 소매에 넣고 입을 다물고는 마침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게으르기가 가히 후풍(순후한 풍속)에 가까우니 이런 도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맡긴다는 것은 스스로 포기하는데로 일을 되돌리는 것이며, 도리어 이것은 친족을 박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시면 당장 굽어 꾸짖음을 가해 주시고 그 불가한 사유를 밝혀 주실 것이며, 만약 옳다고 여기시면 마땅히 당장 그것을 구별해 내어 추궁하고 조사할 것이며, 宗中의 몇사람에게 각자 정한 한도를 담당시키어 선영의 땅을 길이 수호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위와 같이 삼가 槐山, 淸州, 淸安, 忠州의 各 宅에 通文합니다.
收錢有司 鎰
由和[1775(영조51)--1835(헌종1)
정해(丁亥:1827. 순조 27. 필자 53세). 3월 15일
族末(먼 일가). 燾, 氵+廣(+아래에 불화 점 네개), 体(+아래에 불화 점 네개), 聲義 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