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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洛歌(상락가):상락(上洛)은 신라시대의 지명으로 경북 안동을 말하는데, '상락가'란 '안동김씨의 노래' 란 뜻으로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문중 휘 시열(時說) 종손가의 가계 역사를 43수의 연시조로 엮어본 장편 서사시조(長編 敍事時調)를 가리킨다.
檀紀 四三二五年 (西紀 一九九二). 十月. 十五日. 安東金氏 提學公派 庇安公 門中 陽德公 諱 時說 十五世孫 恒鏞 謹撰
一. 桓因聖子(환인성자) 桓雄天王(환웅천왕) 弘益人間(홍익인간) 뜻을 두고 太伯山(태백산)에 神市(신시)세워 聖女(성녀)와 婚姻(혼인)하니 檀君祖(단군조) 탄생하시네 배달민족 無窮(무궁)토다.
二. 新羅(신라)의 月城西里(월성서리)(2) 始林(시림)(3)에서 큰 빛 나네 紫色(자색)구름 영롱한 곳 흰닭소리 아름답고 金櫃(금궤) 속 閼智(알지)(4) 나시니 新羅金氏(신라김씨) 始祖(시조)시라.
三. 統一新羅(통일신라) 敬順王(경순왕)(5)은 千年社稷(천년사직) 高麗(고려) 주고 四子(사자)이신 諱(휘)(6) 殷說(은열)(7)은 大安君(대안군) 平章事(평장사)(8)요 그 三子(삼자) 平章事(평장사)叔承(숙승)(9) 安東金氏(안동김씨) 始祖(시조)시라.
四. 麗朝(려조)의 諱 日兢(일긍)(10)은 光祿大夫(광록대부) 太師大匡(태사대광) 朝鮮氏族(조선씨족) 統譜記錄(통보기록) 始祖內容(시조내용)(11) 訛傳(와전)일세 諱 利請(이청)(12)은 上洛君(상락군)이요 諱 義和(의화)(13)는 禮部侍郞(예부시랑)(14)
五. 尙書公(상서공) 諱 敏成(민성)(15)은 文科及第(문과급제) 尙書僕射(상서복사) 尙書公(상서공) 諱 孝印(효인)(16)은 熙宗四年(희종사년) 文科及第(문과급제) 兵部尙書(병부상서) 三重大匡(삼중대광)에 筆跡文章(필적문장)(17) 遺傳(유전)토다.
六. 高麗元宗(고려원종) 諱 方慶(방경)(18)은 三別抄亂(삼별초란) 平定(평정)하고 日本國(일본국) 攻擊(공격)하여 上洛郡(상락군)을 받으시니 諡號(시호)는 忠烈(충렬)이요 安東金氏(안동김씨) 中始祖(중시조)라.
七. 二世孫 諱 恂(순)(19)은 高麗忠烈(고려충렬) 文科及第(문과급제) 日本(일본) 치는 父親(부친)몰래 乘船(승선)한 뜻 더욱 높고 文英公(문영공) 判三司事(판삼사사)는 諡號(시호)이며 벼슬일세.
八. 三世孫 諱 永暾(영돈)(20)은 高麗忠烈(고려충렬) 文科及第(문과급제) 白馬山(백마산) 扈從詩(호종시)(21)가 東文選(동문선)에 아름답네 忠肅公(충숙공) 上洛府院君(상락부원군) 左政丞(좌정승) 이시도다.
九. 四世孫 諱 縝(진)(22)은 端誠勵節(단성려절) 補祚功臣(보조공신) 生歿年(생몰년)은 不傳(부전)이요 以下三代(이하삼대) 獨子(독자)로다 幷川栢田(병천백전) 設壇(설단) 세우니 重大匡(중대광) 上洛伯(상락백)일세.
十. 五世孫 諱 益達(익달)(23)은 高麗禑王(고려우왕) 文科及第(문과급제) 寶文閣(보문각) 直提學(직제학) 幷川栢田(병천백전) 設壇(설단)하니 우리는 提學公派(제학공파)(24)요 名士名將(명사명장)(25) 士脈(사맥)일세.
十一. 六世孫 諱 顧(고)(26)는 麗朝鮮朝(려조선조) 구비넘어 太宗八年(태종팔년) 文科及第(문과급제) 世宗十二(세종십이) 左司諫(좌사간) 墓所(묘소)는 長湍小南面(장단소남면) 慶南山淸(경남산청) 設壇(설단)했네.
十二. 七世孫 諱 孟廉(맹렴)(27)은 河演領相(하연영상) 사위 되고 司憲府(사헌부) 監察威容(감찰위용) 秋霜(추상)같은 嚴正(엄정)인데 二十八世(이십팔세) 哀惜(애석)하시네 天原東面(천원동면) 잠드시다.
十三. 八世孫 諱 哲鈞(철균)(28)은 典農寺(전농시) 主簿(주부)되고 임금 諱로 金(금)변 빼니 勻字碑文(균자비문)(29) 쓰셨구려 聘父(빙부)는 讓寧大君(양령대군)이요 享年(향년)二十五 슬프도다.
十四. 九世孫 諱 壽亨(수형)(30)은 掌隸院(장예원) 司議(사의)시고 追贈職(추증직)은 左承旨(좌승지)요 享年(향년) 三七 哀惜(애석)하네 天原郡(천원군) 幷川栢田(병천백전)엔 墓碑石(묘비석)이 새롭도다.
十五. 十世孫 諱 彦默(언묵)(31)은 成宗(성종)三年 出生(출생)하여 中宗(중종)一年 享年(향년) 三十五 四代(사대)가 短命(단명)이라 昏朝(혼조)로 隱遁不仕(은둔불사)요 吏曹參判(이조참판) 追贈(추증)됐네.
十六. 十一世孫 諱 錫(석)(32)은 燕山(연산)一年 出生(출생)하여 中宗(중종)十四 成均進士(성균진사) 己卯士禍(기묘사화)(33) 退遯槐山(퇴둔괴산) 領相公(영상공) 道學思想(도학사상)은 五甲祖(오갑조)(34)로 오늘 잇네.
十七. 十二世孫 一子 忠甲(일자 충갑) 明宗(명종)一年 文科及第(문과급제) 妖僧普雨(요승보우)(35) 誅請上疏(주청상소) 乙巳黨人(을사당인)(36) 流配(유배)二十年(37) 龜岩公(구암공) 깊은 性理學(성리학) 文集(문집)함께 傳(전)하도다.
十八. 十二世孫 四子 悌甲(사자 제갑) 明宗(명종)八年 文科及第(문과급제) 黃海忠淸(황해충청) 觀察使(관찰사)로 原州牧使(원주목사) 되셨다가. 壬亂(임란)에 一家殉節(일가순절)하니 文肅公魂(문숙공혼) 永傳(영전)토다.
十九. 十二世孫 五子 仁甲(오자 인갑)(38) 宣祖(선조)一年 進士及第(진사급제) 慶北庇安(경북비안) 縣監(현감)하고 左贊成(좌찬성)에 追贈(추증)되니 五甲祖(오갑조) 榮耀一世(영요일세)요 庇安公派(비안공파) 榮華(영화)로다.
二十. 十三世孫 諱 時敏(시민)은 宣祖(선조)十一 武科及第(무과급제) 壬亂(임란)에 晋州牧使(진주목사) 大捷(대첩)하고 殉節(순절)하니 忠武公(충무공) 忠節精神(충절정신)은 民族史(민족사)에 蒼然(창연)토다.
二十一. 十三世孫 諱 時獻(시헌)은 宣祖(선조)二十一 文科及第(문과급제) 大司憲(대사헌) 忠淸監司(충청감사) 禮曹參判(예조참판) 壬亂扈駕(임란호가) 參判公(참판공) 復讐使(복수사)가슴 救國精神(구국정신) 뜨겁도다.
二十二. 十三世孫 諱 時說(시열)(39)은 光海(광해)十三 武科及第(무과급제) 平南陽德(평남양덕) 縣監(현감)하고 兵曹參判(병조참판) 追贈(추증)되어 陽德(양덕)엔 頌德碑(송덕비)(40)섰네 陽德公(양덕공)의 宗家(종가)(41)라오.
二十三. 十三世孫 諱 時讓(시양)(42)은 宣祖(선조)三八 文科及第(문과급제) 光海非政(광해비정) 試題流配(시제유배)(43) 仁祖擁立(인조옹립) 崇祿大夫(숭록대부) 淸白吏(청백리) 錄選(녹선)되시니 忠翼公德(충익공덕) 貴門(귀문)되네.
二十四. 十四世孫 諱 緻(치)는 宣祖(선조)三十 文科及第(문과급제) 光海君(광해군)에 隱居(은거)하고 深谷秘訣(심곡비결)(44) 仁祖擁立(인조옹립) 安興君(안흥군) 嶺南伯(영남백)되고 吏曹參判(이조참판) 追贈(추증)토다.
二十五. 十四世孫 諱 素(소)(45)는 仁祖(인조)十三 文科及第(문과급제) 黃海忠淸(황해충청) 監司(감사)하고 吏曹參判(이조참판) 追贈(추증)토다 三致仕(삼치사)(46) 士大夫精神(사대부정신)(47) 監司公(감사공) 뜻 이어받세.
二十六. 十四世孫 諱 繁(번)(48)은 智勇(지용)을 고루 갖춰 丙亂壯士(병란장사)(49) 武科及第(무과급제) 瀋陽(심양)八年(50) 苦楚(고초)겪고 安州(안주)에 判官除授(판관제수)요 孝宗大王(효종대왕) 南山歌(남산가)(51)라.
二十七. 十四世孫 諱 榮(영)(52)은 仁祖(인조)十四 出生하여 二十一歲 享年(향년)이니 通德郞(통덕랑)이 哀惜(애석)토다 할버지 昇天(승천)하신 곳 萬年榮華(만년영화) 누리소서.
二十八. 十四世孫 諱 徽(휘)(53)는 仁祖(인조)二十 文科及第(문과급제) 咸忠慶黃(함충경황) 監司(감사)거쳐 吏曹判書(이조판서) 오르시니 判書公(판서공) 上疏文(상소문)높고 豹皮下賜(표피하사)(54) 喜雨詩(희우시)(55)라.
二十九. 十五世孫 諱 得臣(득신)(56)은 顯宗(현종)三年 文科及第(문과급제) 士禍隱遁(사화은둔)(57) 詩作(시작)하니 詩文學史(시문학사) 으뜸이요 栢谷祖(백곡조) 글 읽는 소리 醉默堂(취묵당)(58)에 울리도다.
三十. 十五世孫 諱 龜萬(구만)(59)은 肅宗(숙종)四年 文科及第(문과급제) 承政院(승정원)(60) 左承旨(좌승지)(61)로 魚水一堂(어수일당)(62) 君臣(군신)인데 普光山(보광산) 두 분 墓所(묘소)(63)는 傳說(전설)(64)함께 傳(전)해오네.
三十一. 十六世孫 諱 南挺(남정)(65)은 肅宗(숙종)十七 成均進士(성균진사) 龍讓衛(용양위)(66) 副護軍(부호군)(67)을 壽職(수직)(68)으로 받으셨고 東南人 우리 家門(가문)은 黨爭(당쟁)(69)으로 不仕(불사)토다.
三十二. 十七世孫 諱 必光(필광)(70)은 顯宗(현종)十五 出生(출생)하여 三十一歲 短命(단명)하니 門運(문운)이 哀惜(애석)토다 槐山郡(괴산군) 沙梨面(사리면)새터 그 後 五代(후오대) 墓所(묘소)로다.
三十三. 十八世孫 諱 東虎(동호)(71)는 肅宗(숙종)二十 出生하여 十一歲(십일세)에 父親(부친) 잃고 祖父膝下(조부슬하) 成長(성장)하니 戶籍奴婢(호적노비)(72) 百十六(73)이요 家勢(가세)를 알겠도다.
三十四. 十九世孫 諱 火肅(숙)(74)은 肅宗(숙종)四一 出生(출생)하여 四代獨子(사대독자) 이으시고 戶籍單子(호적단자) 二枚遺傳(이매유전) 正祖(정조)九 七十一歲壽(칠십일세수) 새터 艮坐(간좌) 잠드시다.
三十五. 二十世孫 諱 會健(회건)(75)은 英祖(영조)十一 出生(출생)하여 孫貴宗家(손귀종가) 兄弟(형제) 두고 戶籍單子(호적단자) 一枚遺傳(일매유전) 純祖(순조)一年 七十六歲壽(칠십육세수) 새터 壬坐(임좌) 잠드시다.
三十六. 二十一世 諱 由和(유화)(76)는 英祖(영조)五一 出生(출생)하여 三兄弟(삼형제)에 祭文(제문) 하나 單子三枚(단자삼매) 通文(통문)(77)남고 憲宗(헌종)一 六十一歲壽(육십일세수) 새터 丑坐(축좌) 잠드시다.
三十七. 二十二世 諱 大年(대년)(78)은 正祖(정조)二四 出生(출생)하여 後嗣(후사)없어 養子(양자)잇고 戶籍單子(호적단자) 一枚遺傳(일매유전) 哲宗(철종)十一 六十一歲壽(육십일세수) 새터 戌坐(술좌) 잠드시다.
三十八. 二十三世 諱 在浩(재호)(79)는 憲宗(헌종)十一 出生(출생)하여 水岩甲山(수암갑산) 사시다가 單子三枚(단자삼매) 祝文(축문)남고 後嗣(후사)없이 永眠(영면)하시니 養子宗家(양자종가) 또 養子(양자)라.
三十九. 二十四世 諱 相國(상국)(80)은 哲宗(철종)十三 出生(출생)하여 孫貴宗家(손귀종가) 이으시려 큰터 沼壽(소수) 陰城 移徙(음성 이사) 東學軍(동학군)에 모진 苦楚(고초)요 日帝植民(일제식민) 血淚(혈루)로다.
四十. 二十五世 諱 重應(중응)(81)은 高宗(고종)三六 出生(출생)하여 八歲(팔세)에 養子(양자)와서 三代養家(삼대양가) 三子두네 八十一歲(팔십일세) 壽(수)를 하시고 普光山下(보광산하) 잠드시다.
四十一. 二十六世 泰燮(태섭)은 陽德公(양덕공) 十四世(십사세) 宗孫(종손) 儒道傳授(유도전수) 爲先事業(위선사업) 家門中興(가문중흥) 바쁜 걸음 靑潭公(청담공) 世德祠(세덕사) 세우니 陽德公家(양덕공가) 새빛 돋네.
四十二. 世德祠(세덕사) 祠堂(사당)짓고 崇慕齋(숭모재) 세운 뜻은 上洛家(상락가) 祖上님(조상님)의 魂靈(혼령)을 追慕(추모)하고 家門(가문)의 歷史傳統(역사전통)이 久遠(구원)되게 함이로다.
四十三. 이어지는 家門歷史(가문역사) 創造(창조)되는 民族傳統(민족전통) 忠孝精神(충효정신) 선비思想(사상) 立身揚名(입신양명) 傳授(전수)하여 家門(가문)의 後孫(후손)들에게 德目(덕목)이 되게 하세.
檀紀 四三二五年 (西紀 一九九二). 十月. 十五日.
주 해 (註 解)
1. 上洛歌(상락가):상락(上洛)은 신라시대의 지명으로 경북 안동을 말하는데, '상락가'란 '안동김씨의 노래' 란 뜻으로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문중 휘 시열(時說) 종손가의 가계 역사를 43수의 연시조로 엮어본 장편 서사시조(長編 敍事時調)를 가리킨다.
2. 月城西里(월성서리):태보공(太輔公) 휘 김알지(金閼智)의 설화(說話) 속에 나오는 당시 신라(경주)의 한 지명. (<三國遺事>李丙燾譯.大洋書籍刊. 1972.p104)
3. 始林(시림) :일명'구림(鳩林)'이라고도 하는 신라(경주)의 한 지명.
4. 閼智(알지): 1) 금궤 속에서 나온 동남(童男)이 마치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고사(알에서 태어나 영특하여 왕으로 추대됨)와 같으므로 '알지'라 이름했는데 이 '알지'는 순 우리말을 한자로 음차(音借)하여 표기한 것으로 '소아(小兒), 아이, 아기'를 일컫는다. 2) 당시 탈해왕(脫解王)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오름.'알지'를 신라김씨(우리 안동김씨 포함)의 시조로 모신다.(<三國遺事> 前揭書)
5. 敬順王(경순왕):(? --978.경종8) :휘(諱)는 부(傅).태보공(太輔公) 휘 알지(閼智)의 28세손. 문성왕의 6대손. 경애왕(敬哀王)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죽은 뒤 견훤의 힘으로 등극. 후백제의 공격으로 국력이 쇠약해진데다 고려가 강대해지자 왕건에게 항복함. 시호(諡號)는 경순공(敬順公)이며 묘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최전방 철책선 100m 전방임.
6.諱(휘): 왕이나 높은 사람이 죽은 후의 이름, 또는 자기 조상님의 이름을 말할 때 높여 이르는 말.
7.殷說(은열): 고려조. 경순왕의 四子.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 역임.
8.平章事(평장사):원명은 내사시랑평장사(內事侍郞平章事). 고려 문하부(門下部)의 정2품 관직.
9.叔承(숙승):고려조. 안동김씨 시조.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 경순왕의 孫.
10.日兢(일긍):고려조.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상서(尙書) 우복사(右僕射) 삼한공신(三韓功臣), 태사대광(太師大匡)역임. 경순왕 증손.
11.始祖內容(시조내용):<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안동김씨의 시조를 '휘 일긍(日兢)'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휘 숙승(叔承)'의 와전(訛傳)임.
12.利請(이청):고려조. 상락군(上洛君). 안동태수(安東太守).충렬공의 고조부.
13.義和(의화):고려조. 위위시주부(威尉寺主簿), 예부시랑(禮部侍郞). 충렬공의 증조부.
14.禮部侍郞(예부시랑):고려시대관직. 예부(禮部)의 상서(尙書) 다음 자리. 정2품의 관직
15.敏成(민성):문과(文科)급제. 한림직사관 겸 장치서령(翰林直史館 兼 掌治署令)역임. 상서복사(尙書僕事)에 추증(追贈).
16.孝印(효인):상서공(尙書公).1192(고려명종22.추정)---1253년(고려고종40). 1208년(고려 熙宗4) 문과 급제. 정의대부(正議大夫). 병부상서,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역임.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판리(判吏), 병부 어사대사(兵部御史台事). 중서령(中書令)을 지냄. 문장과 예서(隸書)에 뛰어남.
17. 筆跡文章(필적문장):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필적으로 1)경북 영일군 내연산(內延山) 보경사(寶鏡寺)내의 원진국사(圓眞國師) 탑비(塔碑). 2) 전남 영암군의 도갑사(道岬寺)內. 3) 전남 강진군의 월남사(月南寺)內 등이 있다.
18. 方慶(방경):충렬공(忠烈公). 1212년(강종1)---1300년(충렬왕26). 자(字)는 본연(本然),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된 후 감찰어사(監察御史),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추밀원(樞密院) 부사, 원의 사신. 1270년 배중손(裵仲孫)등이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 난을 일으키자 진도, 제주에서 이들을 평정함. 1274년 원 군사와 함께 일본 대마도를 친 다음 본토를 공격하다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옴. 1281년 제2차 일본공격, 고려군 도원수로 종군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으로 패함. 그 후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郡'은 고려 五等爵의 하나. 종2품으로 국공(國公)의 아래. 식읍(食邑) 이천호(二千戶)를 봉하였는데 公은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를 받으심). 충선왕때 공은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正一品)으로 추증 됐으며 89세에 歿하시고 安東에 墓가 있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이다. 公을 우리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定)함.
19.恂(순) : 문영공(文英公). 1258(고종45)---1321(충숙왕8) 자(字)는 귀후(歸厚), 충렬공의 三子. 1279년(충렬5. 22세)에 문과급제(文科及第). 랑장(郞將)에서 학사(學事), 직강(直講)으로 전직하였다. 1274년(충열1년)에 일본 정벌때 만류하는 부친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함. 좌승지, 밀직부사, 판삼사사(判三司事-종일품)에 오름. 중대광 상락군(重大匡上洛君)에 봉해졌으며, 64세에 몰(歿) 하였고 묘는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329에 있으며 시호는 문영(文英)임. 전하고 있는 필적으로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내의 홍진국존비(弘眞國尊碑)[출전근거--<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 金恒 撰>. "밀직승지(密直承旨) 김순(金恂) 書"]가 있다.
20.永暾(영돈):문숙공(文肅公). 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 자(字)는 휘곡(輝谷). 호(號)는 균헌(筠軒) 또는 구봉(龜峰) 1305년(충렬 21) 문과급제, 충혜왕때 (1331--1332, 1340--1344, 47--60세) 삼중대광첨의사사(三重大匡僉議司事)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충목왕 때 (1345--1348,61--64세)에 좌정승 판정치도감사(左政丞判整治都監事)를 지냄. 64세에 몰하였으며, 묘는 실전하여 충남 천원군 백전(栢田)에 설단(設壇)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21.白馬山扈從詩(백마산호종시):문숙공 휘 영돈께서 1347년(충목왕3) 좌정승으로 계실 때 임금(충목왕)을 호종하고 백마산에 올라 지은 시. <扈從白馬山應御製>(임금을 호종하여 백마산에 올라 임금의 시에 응하여 지은 시) 翠保行尋蒼海上(취보행심창해상:취보를 받들고 임금을 모시어 창해 위를 찾아오니) 玉簫吹送白雲間(옥소취송백운간:흰구름 사이로 옥퉁소 불어 보내네) 紅塵一片飛難到(홍진일편비난도:한 티끌의 홍진도 날아오기 어려운데) 萬点螺分雨靑山(만점나분우청산:만점의 푸른 소라요 비 갠 뒤의 청산만 벌여 있네) 출전--<東文選>(민족문화추진회 刊. 2권. p496. )
22.縝(진): 상락백공(上洛伯公). 생몰년(生歿年) 미상.1315년(忠肅2)--1375 년(禑王1)추정.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최고 관직으로 단성려절 보조공신(端誠勵節補祚功臣), 중대광판자혜원사(重大匡判慈惠院事), 상락백(上洛伯)을 지내심. 묘는 실전(失傳)이고 충남 천원군 병천면 백전에 설단함.
23.益達(익달):제학공(提學公). 생몰년 미상. 1340년(忠惠1)-1400년(朝鮮成宗2)추정. 1380년(고려 우왕6년. 41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순대부 밀직사 좌부대언(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 지공조사사(寶文閣直提學知工曹司事)에 오름. 묘는 실전(失傳)이며 충남 천원군 백전면에 설단(設壇)함. 본 문중의 파조(派祖)이시다.
24.提學公派(제학공파):대동보(大同譜)를 편집함에 충열공(忠烈公)의 五世孫을 기준으로하여 15개파로 분류하였는데 휘'익달(益達)'의 벼슬명인 '직제학(直提學)'을 따서 '제학공파(提學公派)라 이름함.
25.名士名將(명사명장):이름난 선비와 이름난 장수. 1) 명사(名士):석(錫)--성균진사(成均進士), 기묘명현(己卯名賢), 증영의정(贈領議政) 충갑(忠甲)--안악군수(安岳郡守), 좌찬성(左贊成) 추증, 상락군(上洛君) 추증. 제갑(悌甲)--관찰사(觀察使), 원주목사(原州牧使)때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수성(守城)하다가 순절(殉節), 영의정(領議政) 추증(追贈). 시헌(時獻)--대사헌(大司憲),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를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 임진왜란시 선조를 모시고 용만까지 호종함. 시양(時讓)--병조판서(兵曹判書),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로 병자호란시 척화(斥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됨. 시호는 충익(忠翼). 치(緻)-----관찰사(觀察使), 안흥군(安興君), 천문(千文), 역술(易術)에 밝음. 소(素)-----관찰사(觀察使), 이조참판(吏曹參判)추증 휘(徽)-----관찰사(觀察使),예,이조판서(禮,吏曹判書) 득신(得臣)--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안흥군(安興君), 호는 백곡(栢谷), 시인(詩人) 2) 명장(名將): 시민(時敏)--임란시 진주목사, 진주대첩(晋州大捷)때 순(殉節), 영의정(領議政)에 상락군(上洛君) 추증. 시호(諡號)는 충무(忠武). 시약(時若)--임란시 괴산 창의병(倡義兵)선봉장, 창성부첨절제사(昌城府僉節制使) 정묘호란때 전사, 병조 참판(兵曹參判) 추증.
26.顧(고):사간공(司諫公).1389년(창왕1)--1431년(조선세종13) 자는 경보(警甫). 1404년(태종4)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1408년(태종8)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좌사간(左司諫)에 오름. 향년은 43세이며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소남면 도리촌 우봉계(長湍郡 小南面 桃李村 牛峰界) 이익재(李益齊)묘 아래(휴전선 북방)임. 속칭 수회촌(水回村)으로 현 개성부 소남면 약정동 (開城府 小南面 藥井洞) 자좌(子坐)이다. 1987년 4월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山靑郡 生草面 月谷里)에 설단함.
27.孟廉(맹렴):감찰공(監察公). 생몰년 미상.1404년(태종4)--1431년(세종13) 추정 벼슬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이름. 향년(享年)은 28세이며 묘는 경기도 양주로부터 1971년 충남 천원군 동면 탑원치(塔院峙)로 천봉(遷封)함.
28.哲鈞(철균):주부공(主簿公).생몰년 미상, 1420년(세종2)-1444년(세종26) 추정. 벼슬은 전농시(典農寺)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향년 25세임. 묘는 경기도 시흥군 개죽동(현 서울시 관악구 상도동)에서 1968년 충남 천원군 병천면 백전으로 천봉(遷封)함. 빙장은 양령대군임.
29.勻字碑文(균자비문):주부공의 원래 휘는 철균(哲鈞)인데 당시 임금(선조의 初 諱가 鈞이었음)의 휘와 같았기 때문에 '균(鈞)'자의 '金'변을 빼고 '勻'자만 비문에 새김.
30.壽亨(수형):승지공(承旨公).생몰년 미상,1440(세종22)--1476(성종7) 추정. 자(字)는 통지(通之), 과시(科試)에는 나가지 않았고 벼슬은 장예원(掌隸院) 사의(司議)를 지냈으며 후에 좌승지(左丞旨)에 추증(追贈)됨. 향년 37세. 묘는 경기도 시흥군 개죽동에서 1968년 천원군 병천면 백전으로 천봉(遷封)함.
31.彦默(언묵):참판공(參判公) 1472년(성종3)--1506년(중종1) 자는 우경(愚卿). 공은 혼조(昏朝:중종반정이 일자 연산군때 좌의정이었던 이모부 신수근(愼守勤)과 매제인 감역(監役) 정세명(丁世明)등이 살해 됐던 일)로 인해 권세가들의 친척이라 하여 은둔불사함. 향년 35세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됨. 묘는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配位(義城金氏)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 수진산 孫 陽德公(諱 時說) 묘소 위에 있었는데, 1997년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子 領相公(諱 錫)의 묘소 위로 遷封함.
32.錫(석)): 영상공(領相公). 1495년(연산1). 10.11--1534년(중종29). 4.11. 자는 공하(公瑕). 서울 주자동(籌字洞)에서 출생하고 1519년(중종14) 성균진사에 입격함. 이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했는데 공은 조광조(趙光祖)의 도학파를 따름. 이로 하여 공은 화(禍)를 피해 科試에 나가지 않고 충북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이 마을은 공의 이름을 따서 일명 '금석골(金錫)'이라함. 공의 외가 동리)로 은둔하여 수년을 살다가 이웃마을인 전법리(典法里)로 이주함. 마을 입구에는 공께서 조성했다는 숲과 이정표가 유물로 남아 있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됐고,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점령(岾嶺,일명 방아재) 개향산(開香山) 자좌(子坐)임.
33.己卯士禍(기묘사화):1519년(중종14) 훈구세력들이 이상정치(道學政治)를 주장하던 조광조(趙光祖)일파를 몰아낸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의 하나. 남곤, 심정 등 훈구(勳舊)세력이 조광조, 김식(金湜), 김정(金淨)등의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
34.五甲祖(오갑조):영상공의 子 5형제를 일컬음. 모두 당대의 명사였음. 충갑(忠甲)--문과. 龜巖公. 안악군수(安岳郡守), 증좌찬성 (贈左贊成), 상락군(上洛君). 효갑(孝甲)--문과. 아산현감(牙山縣監). 우갑(友甲)--진사. 공릉참봉(恭陵參奉)에 봉해 졌으나 불사함. 제갑(悌甲)--문과. 관찰사(觀察使). 원주목사(原州牧使)시 임란(壬亂)이 일자 전투중 전사. 증영의정(贈領議政). 인갑(仁甲)--진사. 비안현감(庇安顯監). 증 좌찬성(贈 左贊成)
35.妖僧普雨(요승보우):명종때의 승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됨. 승과를 설치하는 등 횡포가 심하자 유림들의 배불상소(排佛上疏)가 크게 일어남, 문정왕후가 죽자 귀양후 피살됨.
36.乙巳黨人(을사당인):1545년(명종1), 척신인 소윤이 대윤을 몰아낼 때 화를 입은 사람. 인종이 죽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게 됨. 이때 윤원형이 득세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하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지중추부사 정순명 등과 공모하여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 영의정 유관 등을 역모죄로 몰아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계림군도 무고로 죽임.
37.流配(유배)이십년:구암공(龜巖公)의 매부인 이휘(李煇)가 을사당인으로 몰려 국문을 받다가 매맞아 죽음, 공도 그 후 을사당인의 친척이라 하여 충청도 서청주에서 20년 간 유배생활을 함. 이때 공은 매부의 안타까운 죽음을 슬퍼하며 시조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음.
베엿도다 베엿도다 落落長松 베엿도다 (베었도다 베었도다 낙락장송 베었도다) 조곰 두엇던들 棟樑之材 되올너니 (조금 두었다면 동량지재가 되었을 텐데) 嗟홉다 大厦기우러진덜 그무어스로 기동할고 (슬프도다 큰 집이 기울어진들 그 무엇으로 기둥을 할까) 出典 : <上洛家乘>(金奎喆 소장본), 二券(券三, 五分派事實, 19쪽)
38.仁甲(인갑):비안공(庇安公). 1534년(중종29)--1594년(선조27). 자는 선초(善初). 충북 괴산읍 전법리 출생. 어려서 부친의 작고로 나이 18세에 비로소 학문 시작. 1569(선조1. 35세)에 진사 급제, 1578(선조11)년에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從六品), 직장(直長)에 제주의 감(監)을 거쳐 1586년(선조19) 주군자부(主軍資簿), 영산현감(永山縣監), 1590년(선조 23)에는 비안현감(庇安縣監)이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발발, 재직중 좌사(坐事)했다 하여 파직됨. 그 후 백의종군하여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괴산 향가로 돌아왔다가 발병하여 수(壽) 61세로 몰(歿)함. 후에 子 時讓(荷潭公)의 貴로 이조판서 지의금 부사(吏曹判書 知義禁府事)에 추증(公 歿後 33년 뒤인 1627년) 되었으며 9년 뒤(1636년.인조 14)에 子 時讓이 청백리에 녹 되자 다시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從一品)으로 추증됨.
39.時說(시열):양덕공(陽德公). 1569년(선조2)--1645년(인조23). 자는 여습(汝習). 충북 괴산 출생. 비안공(庇安公) 휘 인갑(仁甲)의 二子.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 거주. 1620(광해 12)년 무과급제. 1623(인조1) 선공감역(繕工監役). 1631(인조9) 양덕현감(陽德縣監). 수(壽)77세. 子 素(監司公)의 貴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 수진산 子坐이다.
40.頌德碑(송덕비):평남 양덕에 세워졌다는 비석. 1987년 양덕공 시제(時祭)때 길묵(吉默:通德郞公 諱 南採의 七代孫)씨 소장 가첩(家牒)에 <陽德縣監 邑人勒石追思>라고 기록됨.
41.宗家(종가):장손(長孫)으로만 내려온 집. 양덕공으로부터 13대종손-태섭(泰燮). 14대-선용(善鏞). 15대-용재(容載).
42.時讓(시양):하담공(荷潭公),충익공(忠翼公).1581년(선조14)---1643 인조21) 비안공 휘 인갑의 三子. 1605년(선조38)에 문과 급제. 인조때 병조판서로서 팔도도원수(八道都元首),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를 역임하고 호조판서를 거쳐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춘추관사를 역임. 청백리에 녹선됨.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자좌(子坐)임.
43.試題流配(시제유배):하담공(荷潭公.時讓)께서 1611년(광해12)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재직시 향시(鄕試)를 관장할 때 왕(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비난하는 시제(試題)를 출제했다고 모함하여 종성(鍾城)으로 귀양가게 됐던 일.
44.深谷秘訣(심곡비결):남봉공(南峰公.安興君.緻)께서는 역학(易學. 天文)에 매우 뛰어 났는데 그 역술을 기록한 책. 공은 인조가 등극하기 전 사주(四株)로써 그가 왕이 될 인물임을 맞춤. 현재의 역술가들에게도 매우 신통력 있는 서적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음. 심곡(深谷)은 호(號)임.
45.素(소):감사공(監司公). 1602(선조35)--1666(현종7). 자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양덕공(휘 時說)의 장자. 1630년(인조8) 진사급제. 무사참봉(巫仕參奉-종9품), 의금부 금오랑(金吾郞), 호조좌랑(戶曹左郞-정6품)이 됨. 1635년(인조13) 알성문과 급제. 이듬해 정랑(정5품)이 됨. 그 해(1636년) 후금(청나라)의 전란이 예상되매 공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자로서 선발되어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됨.
1637(인조15)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자 공이 세자를 청나라까지 모시고 감.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종2품),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남도병사(부친 노환으로 사양)를 거쳐 1644년(인조22)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가 되었고, 그 해 겨울 성절사(聖節使-중국에새해 인사로 가던 사신)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에게 들려 공금을 아껴 남은 돈을 세자의 귀국을 위한 말 준비금으로 쓰게 함.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 부친 노환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 잠깐 있다가 부친 노환으로 사양),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丞旨-정3품),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1648년(인조 26)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종2품)가 됨. 그 후 영흥부사(永興府使), 승지(丞旨), 형조참의, 호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장단부사(長湍府使), 판결사(判決使), 양주목사(陽州牧使)를 역임함. 1666년(현종7)에 몰. 수(壽) 65세.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됨.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頂 계좌(癸坐)임.
46.三致仕(삼치사):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일을 치사(致仕)라 하는데 공께서는 부친이신 양덕공의 노환이 위중해지자 그 간호를 위해 세 번 씩이나 벼슬을 사양했음. 여기서는 공의 효심을 새기려 한 것임.
47.士大夫精神(사대부정신):계급적 존재로서의 선비정신을 말하며, 온화한 기상과 인(仁)의 화평함을 보여주며, 강개(慷慨)한 기상으로 의(義-不義에 대한 正義)의 준엄함을 보여주는 정신을 말함. 공의 선비정신은 묘갈문(墓碣文<상락가승(上洛家乘)>), 치제문(致祭文<上同>) 등에 잘 나타나 있음.
48.繁(번):안주공(安州公).1604(선조 37)---1671(현종 12). 양덕공(陽德公, 時說)의 二子. 무과(武科)급제.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추어 병자호란(丙子胡亂)시 장사(壯士)로 추천되었고, 선전관(宣傳官) 겸세마(洗馬)를 제수 받음. 병란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심양(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곳)에서 8년간 모심.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 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치 않자 귀양감.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임.
49.丙亂壯士(병란장사):병자호란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자로서 장사(壯士)로 추천 받은 것.
50.瀋陽八年(심양팔년):병자호란 패전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팔년간 고초를 겪을 때 공께서 두 분을 모시며 있던 기간.
51.南山歌(남산가):효종께서 공과의 이별을 아쉬워 하며 지은 시. 그러나 현재 그 원문은 전하지 않고 있음.
52.榮(영):통덕랑공(通德郞公). 1616(광해8)---1636(인조 14). 양덕공(陽德公. 諱 時說)의 三子. 벼슬은 통덕랑이고, 향년(享年)은 21세이다. 묘는 충북 옥천군 사리면(沙梨峴) 건좌(乾坐)임. (현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앞산)
53.徽(휘):판서공(判書公). 1607(선조 40)---1677(숙종 3). 자(字)는 돈미(敦美) 호는 만은(晩隱) 또는 사휴제(四休第), 1633년(인조 11) 생·진과에 합격 하고 1642년(인조) 문과에 급제함. 이어 홍문관에 들어 갔으며 1652년(효종3)에 수찬(修撰)이 되었다. 또한 임금(효종)의 시에 화답한 희우시(喜雨詩)를 지어 임금으로부터 표피(豹皮:범 의 가죽)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그 후 의주부윤을 지나 숙종조에 강화, 개성 유수(留守)를 거쳐 평안도·함경도·충청도·경상도·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함. 수(壽) 71세. 하담공(時讓)의 二子.
54.豹皮下賜(표피하사):범의 가죽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음.
55.喜雨詩(희우시):공께서 지은 시이나 현재 그 원문은 알 수 없음.
56.得臣(득신):안풍군(安豊君). 1604년(선조 37)---1684(숙종 10) 남봉공(南峰公 諱 緻)의 자. 1642년(인조20)에 진사. 1662년(현종4) 증광문과에 급제. 장악정지제교(掌樂正知製敎)를 거쳐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를 역임. 안풍군(安豊君)에 봉해짐. 시인으로 유명. 호 백곡(栢谷), <백곡문집> 유전.
57.士禍隱遁(사화은둔):조선시대에 조신(朝臣)및 학계의 반목과 세력다툼으로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을 사화(士禍)라 하는데, 여기서는 사대사화(四大士禍--戊午,甲子,己卯,乙巳士禍) 이후 계속해서 나타난 黨爭의 소용돌이로 인해 벼슬길을 버리고 은둔한 것을 말함.
58.醉默堂(취묵당):안풍군(安豊君,栢谷)께서 지으신 누각(樓閣).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 좌측 아래. 괴강옆에 있음.
59.龜萬(구만):승지공(承旨公). 1632년(인조 10)--1699년(숙종 25). 자(字)는 元瑞(원서),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 1666(현종7년 35세)에 진사(進士)급제, 1677년(숙종3) 강서현령(江西縣令), 1678년 (숙종4) 문과급제 후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거쳐 1689년(숙종 15)에 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京畿右防御使 長湍府使)가 됨. 1693년(숙종19)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694년(숙종20) 좌승지(左承旨)에 오르고, 1699년(숙종 25) 68세로 몰(歿)함.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정(頂) 선영하(先塋下) 건좌(乾坐)임.
60.承政院(승정원):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던 관청.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
61.左承旨(좌승지):승정원의 관리로 정삼품 당상관(堂上官). 주로 호방(戶方)을 맡음.
62.魚水一堂(어수일당):1694년(숙종20)1월 22일. 공께서 좌승지(左丞旨) 재직시, 당시 영의정이던 권대운(權大運)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날 밤 숙종, 영의정 권대운, 기사관(記事官) 이주천(李柱天)·유세중(兪世重), 가주서(假柱書) 이덕운(李德運)등이 공과 함께 입시(入侍)하여 모두 술을 실컷 마시고 난 후 율시를 지었는데 위 구절은 공이 지은 시구의 일부임.<출전:조선 왕조실록(역본). 13권. 숙종20년 1월. p298.> <魚水一堂千載會(어수일당천재회):물고기와 물이 한 조당(朝堂)에서 천년만에 모였으니.> *어수(魚水):친밀한 임금과 신하 사이.
63.두 분 묘소: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정(頂)에 있는 감사공과 승지공의 묘소.
64.傳說(전설): 1)묘소를 준비할 때 본래 있던 절(현 보광사의 위쪽 탑이 있는 자리의 鳳鶴寺)이 헐리게 되자 한 승려가 후에 꾀로써 묘자리를 고치게 하여 해를 입히려 했다는 실화적 증거를 갖고 있는 전설.(<傳說誌> 충청북도 刊. 1982. p438--439) 2)묘소를 사초할 때 증평에서부터 많은 사람을 기와받이로 세워 놓고 잔디를 운반하거나, 운반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팔랑개비를 달아 계속 돌리면서 운반하도록 했다는 전설. (지역주민 口傳) 3)감사공 작고시 최초의 묘자리(괴산군 사리면 방축리 앞 안동권씨의 묘였던 곳)에 관한 실화와 같은 전설. 처음 묘자리(방축리 앞)가 탐난 감사공의 누이동생(안동권씨로 출가)께서 장사 전날 밤 은밀히 묘자리에 물을 퍼붓고 다음날 묘자리에서 물이 나는 것처럼 꾸며 묘를 다른 곳에 쓰게 했다가 후에 자신과 남편의 묘로 씀. 후에 그 후손들 중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함. (1992년 현재 그 묘들은 다른 곳으로 이장됨)(지역주민 口傳)
65.南挺(남정):副護軍(부호군). 1652년(효종3)--1731년(영조7). 자는 伯兼(백겸)으로 충북 괴산군 사리면 荷島에서 출생. 1691년(숙종17)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731년(영조7)에 용양위 부호군(龍讓衛副護軍)을 수직(壽職)으로 받음. 그 해 80세로 몰(歿)함. 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아래지경 건좌(乾坐)이다.
66.龍讓衛(용양위):조선시대 무관부로 5위(衛)중의 하나. 문종때 설치됐다가 고종때 폐지됨.
67.副護軍(부호군):조선시대 무관직으로 오위(五衛)에 속했던 종4품(從四品)의 관직.
68.壽職(수직):조선시대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서민에게 은전으로 주던 벼슬. 공은 수직으로 부호군을 받았다가, 가자(加資)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을 받음.
69.黨爭(당쟁):우리 가문은 숙종 당시 남인에 속해 있었는데 서인인 송시열(宋時烈)파와 대립되어 있었다. 그 후 서인 계열에서 실권을 쥐게 되자 남인계열은 정계에 나가길 꺼림. 그 후로 노론 소론의 대립으로 조정은 연속하여 당쟁이 끊이지 않았음. 이로써 우리 가문은 벼슬길로 부터 멀어짐.
70.必光(필광):통덕랑공(通德郞公). 1674년(현종15)--1704년(숙종30) 자는 현경(顯卿).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향년 31세로 몰함. 묘는 사리면 새터 간좌(艮坐).
71.東虎(동호):학생공(學生公).1694년(숙종20)---?(몰년 미상) 자는 산보(山甫). 몰년은 알 수 없으나 유물(호적단자)로 보아 40세 이상 생존하셨을 것으로 추측됨. 묘는 사리면 삼봉산하 오좌(午坐).
72.戶籍奴婢(호적노비): 1)호적단자에 기록돼 있던 노비(奴婢). 2)호적단자(戶籍單子):조선시대 3년에 한번씩 양반가호의 가장이 집안의 거주지, 처, 형제, 자녀, 고조 까지의 내력, 집 안과 밖에 거주하는 노비 등을 기록한 것. 2부를 작성하여 관청의 확인을 받아, 1부는 집에 보관하여 지금의 '호적등본'대용으로 이용함.
73.百十六(백십육):노비수를 말하는데 집안에서 부리던 노비는 11명, 타지에 살고 있던 노비는 105명이었음.
74.火肅(숙): 학생공(學生公). 1715년(숙종41)---1785년(정조9) 자는 회백(晦伯).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호적단자의 '國祠堂里'는 감사공께서 거주하던 현 하도로 보임). 71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의 간좌(艮坐)임.
75.會健(회건):학생공(學生公). 1735년(영조11)---1810년(순조10) 자는 여강(汝强).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76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 임좌(壬坐)임.
76.由和(유화):학생공(學生公). 1775년(영조51)---1835년(헌종1) 자는 응서(應瑞). 사리면 소매리(笑梅里) 출생. 호적단자 3매, 제문(祭文)과 공의 8대조(양덕공 휘 시열)까지의 약력을 기록한 문서가 남음. 61세에 몰하시고 묘는 사리면 새터 축좌(丑坐)임.
77.通文(통문):학생공 휘 유화(由和)께서 보광산 정상의 감사공·승지공 두 분 묘소를 사초하기 위해 1827년(순조27. 公 53세)에 친척들에게 돌린 금전 모금 문서.
78.大年(대년):학생공(學生公). 1800년(정조24)---1860년(철종11) 자는 덕로(德老). 사리면 소매리 출생. 61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 술좌(戌坐)임.
79.在浩(재호):학생공(學生公). 1845년(헌종11)---1905년(몰년 미상. 추정) 자는 여정(汝貞). 사리면 수암리에서 출생. 후에 처가인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로 이사하였다가 후사(後嗣)를 잇지 못하시고 몰하심. 묘는 소이면 갑산리.
80.相國(상국):학생공(學生公).1862(철종13)---1936 자는 원보(元甫). 25세(1887년)에 부모님 작고 후 양자. 生父는 기호(冀浩-양덕공의 7대 玄孫인 會健, 二子 由吉 子 鶴年, 一子 冀浩)인데 당시 서당 선생님이었기에 그로부터 공부를 배웠는데 통감(通鑑) 정도까지 마쳤으며 성품은 부처처럼 인자하시며 과묵하신 성품이었다 함. 보통의 키에 건강한 편이었음. 1894년(公 33세) 동학운동 발발시 공은 큰터(槐山郡 沙梨面 大基里)에서 이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동학군들에게 붙들려(양반과 이장이란 이유로) 괴산 청안읍에까지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함. 그 후 수차에 걸쳐 동학군들이 마을에 들어와 공을 괴롭혀 큰 상해를 입었다 함. 1927(66세)에 괴산군 소수면(昭壽面) 입암리(笠巖里-일명 원장골)로 이사, 2회에 걸친 수해를 입고 1935(74세)에 음성읍 읍내로 이사함. 75세에 몰함. 묘는 음성읍 용산리 묘좌(卯坐)임.
81.重應(중응):학생공(學生公). 1899(광무3 고종36) ---1979. 12. 28 일명 '재준(才俊)'. 자는 일신(日愼). 괴산군 청안면 감우지에서 출생. 생부(生父)는 상각(相珏--승지공 휘 龜萬의 二子인 南採의 三男, 東吉의 二男, 炫의 孫, 鍊百의 二男, 翊年의 孫임). 8세(1906)에 종가로 양자옴. 사리면 대기리(큰터)에서 한 동리의 파평윤씨(윤만)와 13세에 혼인. 1926(28세)에 괴산군 소수면 입암리로 이사함. 2차의 수해로 1935(36세)년 음성으로 이사. 3남 1녀를 둠. 1979(양.1980.1.)년 81세로 몰함. 묘는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보광산 선영하 자좌(子坐)에서 2000. 4. 충북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로 천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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