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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1. 監司公 諱 金素 十三代孫 金恒鏞 製作
-普光山 祭禮行事- 1. 일시 : 2007. 4. 1(일). 10:00-15:00. 2. 장소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산1번지 일대 3. 주관 : 안동김씨 제학공파 감사공(휘 素) 종손가 4. 참석자 : 22명 *감사공(휘 素) 종가 : 태섭, 승용, 한용, 항용, 예진, 오병준(외손) *통덕랑공(휘 南採-鼎光) 후손 : 장응, 태선, 태관, 태화(內子), 태억 *통덕랑공(휘 南採-晉光) 후손 : 상훈(內子), 영회(內子), 태갑, 태성, 태현(영회 子, 內子) *안주공(휘 繁) 후손 : 상석 *익원공(휘 士衡) 후손 : 雲山大師(金泰國, 보광사 스님) 5. 내용 1)보광산 토지지신 고유제 봉행 2)감사공(휘 素), 승지공(휘 龜萬) 묘소 참배 3)묘소 정비(묘역 앞 잡목 제거, 제절 평탄작업) 4)휘 동길(東吉)공 묘소 참배 5)중식 및 해설 자료 설명 6)휘 훈(燻)공 묘소 참배 7)문당묘원(文塘墓苑) 참배
1. 맺힘과 풀림의 인식(認識) 2007년 4월 1일, 1666년(현종7)의 맺힘은 331년이 지나서야 풀림으로 매듭지어 졌다. 어느 시대든지 역사는 발전과 개혁이라는 명분론(名分論)을 내세우고 이를 추진해가는 이들에 의해 진행되고 기록되어 간다. 그런데 종종 그 역사과정 속에는 추진측에 의해 피해를 입거나 뼈저린 한(恨)을 품는 자들이 발생하곤 한다. 이 피해와 한으로 맺혀진 응어리를 맺힘이라 하자.
왕조시대(王朝時代)의 피해자들은 이 맺힘을 스스로 풀어낼 수 없는 한계 조건으로 인해 대부분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 맺힘 속의 가 ․ 피해자 관계는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반대 상황으로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다. 즉 가해자의 업적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 속에 부끄러움의 역사로 변해가고, 피해자의 한(恨)은 구전설화(口傳說話)로 전승(傳承)되면서 큰 힘과 가치를 얻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한 역사는 이 맺힘을 반드시 풀림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하며, 그것도 맺힘을 갖게 한 자가 먼저 풀어내야만 되도록 대부분 진행된다. 그리고 이 풀림의 완성은 맺힘을 갖게 한 측의 적극적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또한 넉넉한 풀림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양자는 융합되어 하나로 뭉쳐진다. 그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역사의 과정이요,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사회는 휴머니즘(Humanism)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상사회(理想社會)로 점점 다가서게 된다.
바로 그 풀림의 과정 한 가운데에서 이를 추진하는 위치에 보잘 것 없는 필자가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331년간 이어져 온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산1번지의 보광산 정상의 이야기이다. 그곳에 계신 감사공(휘 金素-필자의 13대조)과 승지공(휘 金龜萬-필자의 12대조) 선조님의 묘소 조성과정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전설 이야기요, 그에 따른 맺힘과 풀림이다.
필자는 이 보광산의 맺힘과 풀림의 문제로 인해 오랫동안 적지 않게 고민하고 갈등했다. 풀림을 위해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준비하다가도 때론 남의 일처럼 객관화시켜 버리거나 억지로 합리화시키며 태연자약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8남매의 우리집은 부모님으로부터 전 형제자매들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여러 가지 불행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필설(筆舌)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속도와 충격으로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필자의 처(妻)도 병원에 입원하여 대수술을 받았다. 여기서 생각을 넓혀 근친(近親)들의 집안도 살펴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로 놀라운 사건들이 그동안 발생했으며, 현재도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들어 하고 있다.
더욱 범위를 넓혀 감사공(휘 素) 선조님 이하 후손들의 모습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후손 수와 종친간의 친목 정도, 중요 인물 등을 중심으로 살폈다. 현재 총 310가구(총인원 약 775명. 1990년 간. 안동김씨 제학공파보 기준) 가운데 59가구(8.1%)만이 겨우 그 소재가 파악되어 있고, 그 중에서 1992년에 조직 ․ 운영되고 있는 비안공 문중회의 시제와 총회에 참여하는 사람은 불과 14명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지난 2005년 4월, 양덕공(휘 時說)의 묘비와 문관석 건립 때는 근친(近親)이나 종친(宗親) 한 사람의 협조 없이 오직 종손이신 부친과 필자의 활동만으로 추진해야 했다.
승지공(휘 龜萬) 이후의 인물들을 살펴 보았다. 문과에 합격하고 출사(出仕)한 분은 겨우 2분으로 참의공(휘 汴光, 1723년)과 교리공(휘 恒光, 1773년)이 전부요, 진사나 생원과에 합격한 사람은 부호군(휘 南挺) 1분뿐이다. 또한 180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정(政) ․ 관(官)계나 학계, 재계 등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도 안타깝게 없다. 여기서 근대 우리 문중의 쇠약 원인은 조선조 선조 이후의 붕당정치에서 동인과 남인계열에 속했던 우리 문중이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노론 세력에 의해 계속해서 눌려 지내야 했고, 1800년대 이후 신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勢道) 또는 독재정치, 그리고 대원군의 강력한 사림파 탄압 정책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와 같이 우리 집안과 근친 및 문중의 상황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런 것일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과 현상들은 하늘이 의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참으로 답답하기만 했다. 원인을 찾기 위해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고민 끝에 이를 불교적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우리 문중과 집안이 이런 어려움에 처할 만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업보(業報)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있었다면 그건 무엇일까?’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딱 하나 떠오르는 것, 그건 바로 보광산 묘소를 둘러싸고 있는 사실과 전설의 이야기였다. 1666년 여름, 필자의 13대조이신 감사공(휘 素)께서 돌아가시자 그 아드님이신 승지공(휘 龜萬)께서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에 있던 봉학사(鳳鶴寺) 절을 강제 폐사(廢寺)시키고 부친의 묘소를 조성한 일이 생각났다. 그 일로 인해 전설도 만들어 졌다. 전엔 그저 흥미 삼아 듣고 별 관심 없이 흘려버렸던 것이다. 지난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월 사이 처가 입원해 있는 병원 침상에서 그 전설들을 다시 정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설 내용을 기초로 하여 우리 문중, 우리 집안의 실제 역사를 상호 대비시켜 가며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역사와 전설의 양자 사이엔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저 단순하게 우연의 일치라고 간과해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방법론을 찾았다. 숙고(熟考) 끝에 보광산의 봉학사 폐사로 인해 피해를 입고 맺힘을 갖게 된 이들을 위한 풀림 행사를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어 짧고 우둔한 필자는 토지지신(土地之神)과 과거의 피해 영혼들께 고유제(告由祭) 및 진혼제(鎭魂祭)를 올려 신(神)께 아뢰고, 한(恨) 맺힌 영혼들의 넋을 달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지난 설 명절에 아버님께 간곡하게 건의 드렸다. 아버님도 대환영이셨다. 곧 행사 날짜를 4월 1일로 잡았다. 갑자기 바빠졌다. 먼저 감사공과 보광산 일대와 관련한 모든 자료와 전설, 그리고 우리 가문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전 역사 과정 등을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2. 감사공의 별세와 행장 331년 전인 1666년 음력 6월 11일, 서울 남산 아래 주자소 근처의 남산골(현 남산 아래 충무로 2가 극동빌딩 근처)에 사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의 13대조 할아버님이신 감사공(휘 素)께서 돌아가셨다. 1년 전에 양주 목사로 나가셨는데 병이 일어 사직하고 돌아와 계셨다가 당한 일이었다. 1602년(선조35)에 출생하신 감사공의 자(字)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이시다.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荷島)에서 제학공(휘 益達)의 9대손이요, 양덕공(휘 時說)의 장자로 출생하셨다.
우리 집안이 하도(荷島)에 살게 된 것은 감사공의 부친이신 양덕공께서 1589(선조22)년경 이곳에서 약 10여리 떨어진 사리면 수암리의 황산에서 이곳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의 구례손씨 휘 록경(祿慶)공의 따님과 혼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집터는 현재 사담리 하도의 정원사 절과 그 앞 밭 일대이다.(현지인 손석복 談. 1987년 필자 조사, 채록)
<감사공 생가지>(정원사 앞) <감사공댁 주춧돌>(동네 담장 밑돌로 사용)
감사공께서는 1630년(인조8.29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하고 음보로 무사참봉(巫仕參奉-종9품)을 받은 후, 의금부 금오랑(金吾郞-종5품), 호조좌랑(戶曹左郞-정6품)이 되셨다. 1635년(인조13,34세)에는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정랑(정5품)이 되셨다. 그 해(1636년,35세) 후금(청나라)의 침범이 예상되자 공은 문무를 겸비한 자로 선발되어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셨다.
1637(인조15.36세)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가게 되자 공은 세자와 대군을 청나라까지 아우인 안주공(휘 繁)과 함께 모시고 갔다가 돌아오시기도 했다. 이때 아우는 세마(洗馬)로서 청나라에 남아 두 왕자를 모셨다.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종2품),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남도병사(부친 노환으로 사양)를 거쳐 1644년(인조22,43세)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가 되셨다. 그 해 겨울 성절사(聖節使-중국에 새해 인사차 가던 사신)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에게 들려 아껴 쓰고 남은 공금을 세자의 귀국을 위한 말 준비 비용으로 드리기도 하였다.
이어 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 부친 노환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 잠깐 있다가 부친 노환으로 사양),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정3품),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1648년(인조26,47세)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종2품)가 되셨다.
<친필 서찰1> <친필 서찰2>
그 후 영흥부사(永興府使), 승지(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황해도관찰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장단부사(長湍府使), 판결사(判決使), 양주목사(陽州牧使)등을 역임하셨다. 감사공께서는 47세(1648년)에 충청도관찰사(공은 정3품의 품계에서 종2품인 관찰사를 守職으로 받으심)를 지낸 후 무려 18년간이나 정3품의 품계에서 승차(陞差)하지 못하고 계시다가 당하신 별세였다. 이는 아마도 당시 열세당인 남인(南人)에 속하셨던 공께서 우세당인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던 시기요, 더욱이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이 강력하게 활동하던 때였기에 겪은 피해였으리라.
<충청수사 유서>
<공주 공산성의 관찰사 불망비>(맨 좌측)
임금(인조)은 충청도 관찰사에 나아가는 공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기도 했다.
1. 제작일시 : 1648(인조 26. 47세). 7. 2. 수령자 : 金素 3. 출전 : <상락가승> (1895년. 고종 32년 간. 金龜浩 著. 金恒鏞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 11(김익수 감수)
5. 원문 敎書 敎守洪淸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金素 書 <이하 생략> 6. 역문 홍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인 김소에게 내리는 임금의 교서 왕께서 이르시길 오직 국가의 근본이 되는 곳은 충청도이다. 그러므로 중신(重臣:관찰사)에게 권한을 맡길 적에는 반드시 내 뜻을 정승들(四嶽)에게 물어보는데, 내가 먼저 정한 뜻과 중의(衆意)가 서로 같도다. 돌아보건대 저 백제의 옛 강토는 실은 우리 삼한의 중요한 관문이다. 길은 호남과 영남의 兩道로 통하고 郡邑은 오십삼구역이요, 땅은 경기도와 연하여 동서로 칠팔백리이다. 세상이 어지러울 땐 중국의 양자강과 회수처럼 진영을 보호하고, 때가 평온할 때는 형초(荊楚:지금의 중국 호남성과 호북성 일대. 楚의 영토)의 門과 뜰과 같이 겉과 속이 되는 물과 산인 錦江과 鷄龍山의 험함과 굳건함이 마치 궂은 비 내릴 때 미리 준비함과 같도다. 軍營의 단단히 무장한 군사와 말들은 날래고 강하여 스스로 부역을 한다.
그동안 가뭄과 홍수가 온 후에 이어서 기근이 거듭해 왔으며 더욱이 큰 사건(병자호란)이 있은 후가 되니 불안함을 스스로 안정하게 하고 진정시켜 어루만져 줄 방책에 있어 지금 소홀함이 있다. 어루만져 편안히 다스려줄 임무를 맡을 자는 그대 말고 그 누가 있겠는가? 오직 그대라면 훌륭한 재주를 갖고 있어 큰일을 맡길 만한 데, 이것은 저 숙부[하담공-김시양]와 너무나 흡사하여 옛날 晋나라의 사안(謝安:주1)과 사현(謝玄:주1)의 관계와 같도다. 반열(班列) 중에 아주 뛰어난데 글 솜씨도 뛰어나고 무예도 뛰어나도다. 그 마음가짐이 옥과 같이 희고 모든 일을 시행함에는 칼놀림처럼 여유가 있도다. 처음에는 호조(戶曹)의 낭관(郎官)이었는데 나중에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해전(海甸:바다에 인접한 고장. 해주)의 큰 고을 관리(해주판관)로 발탁됨을 입었는데 과연 한 지역이 태평하게 되었고, 강원도(강릉부사)에 발령 받아서는 치적이 제일이었다. 갑자기 북쪽 요새(종성부사)에 발령되어서는 명예로운 칭찬이 무쌍하였으며, 이미 요새에서는 마음과 힘을 다하였고 내전(승지)에서는 왕명의 출납을 맡았었다.
생각건대 전후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始終의 공을 쌓은 능력은 참으로 볼 만하였도다. 연경(燕京)의 사천리길(성절사)에서는 조벽(趙壁)과 같이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돌아왔으며, 진양(晋陽-진주목사)의 수만호(戶)는 윤탁(尹鐸, 주2)과 같은 어진 그대에게 모두 따랐으니, 지금 충청도를 관리할 자리가 비었는데 누가 감히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오직 영남에서 높은 직위에 오른 그대가 합당하다는 의론이다. 이에 그대에게 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직을 수여하노라.
경은 마땅히 가서 곧바로 봉서(奉書)를 하여 그 직이 정지되지 않게 하라. 휘장을 걸고 관모를 벗어 공명한 치적에 어떻게 발자국을 남길까 하고 힘쓸 것이요, 천하를 맑고 깨끗이 하려는 뜻이 고을에 가득 넘치게 떨치라. 정사(政事)에 임할 때는 관대함과 엄격함을 아울러 하고,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함에 있어서는 사사로움이 없게 할 지어다.
하은주(夏殷周) 삼대처럼 인륜을 가르쳐 밝게 하고 풍속과 교화를 잘 펴도록 하라. 조그만 고을에도 忠과 信을 더욱 크게 일으키라. 자신을 잘 다스려 관원들의 근본이 되게 하며, 진실로 성실히 업무에 힘쓰고, 범죄자를 가둘 때는 법령대로 시행하여 허점에 빠짐이 없도록 신중히 하라. 모름지기 가난하고 불쌍한 무리들이 기회를 보며 인수(印綬-주3)를 풀려 하거든 빨리 백성들의 어려움을 풀어 주어 수령의 은혜가 가득 내리도록 하라. 하물며 금년의 바람과 우박의 재앙은 옛날에도 듣지 못한 것이로다. 비록 가을의 풍년을 만났다 해도 가을 조세를 행할 가망이 없으니 이런 생각으로 새로이 교화를 해야 한다. 그런 때에 좋지 못한 습관을 개혁하기 위해 소요죄에 대해 사형을 품달하는 것은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내가 통훈대부의 관직을 주어 경이 스스로 이를 결정하도록 맡기노라.
아아! 사태가 매우 험악하니 책임과 기대가 아주 무겁다. 소유문(蘇孺文 : 주4)의 법에 따르고자 함이 어찌 사사로운 은혜에 대해 조금이라도 굽힌 것이 되며, 이덕유(李德裕: 주5)가 선택한 노래는 여러 악습을 어찌 크게 변하게 하였겠는가? 오래도록 외방에서의 노고로 현관(賢官)을 갈망한다는 감탄의 소식을 모르지 않는다. 장차 앞에 많은 일이 놓여 있더라도 다스리고 이바지함에 본보기로 삼고자 하여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모름지기 이 모든 사실을 잘 알도록 하라.
*주 풀이 주1. 사안(謝安)과 사현(謝玄) : 중국의 사안은 사현의 숙부로 前 秦의 苻堅이 공격해 왔을 때 사안은 사현을 보내 肥水에서 대파하여 晋의 太保가 됨. 모두 문인이며 특히 사현의 손자가 유명한 시인 謝靈逢이다. 여기서는 김시양과 김소가 숙질간임에 비유한 말이다.
주2. 윤탁(尹鐸) : 중국 춘추때 晋사람. 趙簡子가 晋陽을 다스리게 하면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라고 요청하자 호구수를 줄여서 백성에게 득이 되게 하였다. 여기서는 김소가 진양(진주)의 목사로 재직하였던 것을 비유함이다.
주3. 인수(印綬) : 관인(官印)의 꼭지에 다는 끈
주4. 소유문(蘇孺文) : 미상. <오유란전(烏有蘭傳)>에, 세조 임금 때에 한양 땅에 두 재상이 있었으니, 한 재상의 성은 김씨요, 또 한 재상의 성은 이씨라 했다. ... "오늘은 소유문(蘇孺文)이 되어 친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내일은 겸주자사(兼州刺史)가 되어 일을 살핌은 마치 나를 두고 이름일세." ...라는 구절이 있다.
주5. 이덕유(李德裕) : 당의 楚皇 사람. 자는 文饒. 젊어서 학문에 힘썼고 큰 절의가 뛰어났다. 敬宗 浙西觀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황제가 소인들과 친하여 遊樂을 좋아하므로 붉은 병풍에 쓴 여섯 잠언 <丹屛六箴>을 올렸다. 여기서는 김소가 관찰사가 된 것을 비유함.
또한 공이 몰하자 현종은 다음과 같은 치제문을 내리기도 하였다.
1. 작성일시 : 1666(현종 7). 9. 2. 수령자 : 김소 3. 출전 : <상락가승> (1895년(고종 32) 간. 金龜浩 저. 김항용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김익수) 5. 원문 致祭文 國王遣禮曹佐郞兪夏益 諭祭于卒前監司金素之靈-- (하략> 6. 역문 국왕은 예조좌랑인 兪夏益을 보내어 죽은 전 감사 김소의 영혼에 고하여 제사하노라. 삼가 영령은 순박하고 충성스러우며 그 은 크고 건장한 인재였다. 참되어 딴 마음이 없었으며 자기의 위치를 지켜 순리를 어기지 않았다. 귀한 자리를 차지해도 다만 순실하기에 힘썼으며, 말단의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겉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 임용된 것이 지금까지 3대의 조정에 이르렀는데, 오직 평화로울 때나 험난할 때나 현명하게 노력하였고, 충청도의 각 현들을 안찰하며 선정을 펴고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어찌 왕화(王化)를 추구함에 그윽함을 띨 수 있었겠는가? 북쪽과 남쪽을 지켜내고, 뛰어나고 절개 높은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적들의 투구를 벗김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평온하게 하였다. 승정원에서 왕의 출납을 맡거나 장례원에서 공정한 판결을 함에 있어 신실하고 명료하게 하여 그 직책에 잘못함이 없었고, 내외직을 지내오면서 매양 드러나게 공을 세웠다. 내가 경의 충직함을 믿어 격려하였고 경은 도성과 가까운 지역에서 충성을 다하고 기강을 드날렸다.
오직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하면 경을 빌려 거듭 가도록 하였다. 경륜이 이러하니 백성은 큰 은혜를 입었으며 옛날의 걱정이 지금은 기쁨이 되었다. 장차 임금이 경을 불러 보아도 천하에는 슬픔만이 남았도다. 하물며 병이 더욱 깊어져 멀리 내다 볼 계책이 급한데 조정의 반열을 돌아보아도 누가 운명의 날에 나라를 충성스럽게 담당할 자가 그대와 같겠는가? 막히어 병들어 시들어 빠지게 될 것이다. 아! 과인은 사리에 밝지 못하고 통절하기에 이 마음 펼침을 위임하며 옛 규정과 의식에 따라 제를 지내고 문상하니 이 내 마음을 알아주오.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지제교 睦來善 지어 올림
*주풀이 주1. 소결(疏決) : 공정하게 처리하여 판결함. 주2. 변위(邊圍) : 변경 주3. 후사(喉司) : 승정원 주4. 비궁(匪躬) : 충성을 다함.
3. 한양에서 괴산으로, 그리고 명당터를 찾아서 당시 35세이신 아드님 승지공(휘 龜萬. 1632년(인조10)∼1699년(숙종25))께서는 생원시에 급제하시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계셨다. 부친상을 당하자 승지공은 우마차에 상여를 꾸며 공을 본댁인 괴산까지 운구해야 했다. 때는 여름(양력 7월 중순)으로 무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는 시기였으리라. 약 5일여를 걸어서 본댁(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에 도착하였고, 집 뒤에 임시로 만든 가묘(假墓)에 공을 매장했다. 이로부터 3개월간 조문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묘소지를 찾아 여러 전문 풍수인들을 각지로 보냈으리라. 이 기간 에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제일 먼저 길지로 선택된 곳은 현 사리면 사거리에서 방축골 방향으로 약 150m 가다가 길 우측 약 40m 아래에 있는 자리였다. 평지로 아주 명당자리라 했다. 묘역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 땅 속 흙도 좋았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듣고 샘을 내며 이곳을 차지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감사공의 따님이었다. 어느 날 밤, 따님(사위-밀양박씨)은 파놓은 광중(壙中)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해 주고 술에 취해 잠자도록 유도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자 따님은 파 놓은 광중에 물을 부었다. 다음날 아침, 광중에서 물이 난다는 소식에 그 묘소지는 즉시 취소되었다. 그런데 후에 그곳에 묘소를 쓴 따님의 후손들이 발복하여 크게 번창했다 한다. (*이상 부친(김태섭) 談. 이 묘는 1986년 4월, 농지정리 사업으로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그런데 족보에는 사위중에 밀양박씨는 없고 판관 칠원인(漆原人) 윤우갑(尹遇甲)과 판관 김우(金雨)만 있다.
손근성(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거주. 88세. 2007. 4. 25. 채록)님의 증언에 의하면 이 묘는 틀림없는 감사공 따님의 시가인 밀양박씨 묘이며, 매년 그 후손들이 시제를 모신 뒤 모두 보광산에 올라가서 감사공의 묘소에 참배하고 돌아가곤 했다 한다. 이로 보아 족보에는 사위 밀양박씨가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새 묘소지 찾기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천하의 명당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자리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곳은 바로 본댁 뒤의 보광산(531m) 정상에 있는 봉학사 절이었기 때문이다. 감사공이 돌아가신지 3개월이 지나고 있었기에 결심과 결행을 재촉하는 집안사람들과 풍수인들의 간절한 요청은 점점 커져 갔고, 이에 반해 봉학사 스님들과 동네 인근의 불교 신도들은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승지공께서는 진퇴양란에 서서 무척이나 정신적 고통이 컸을 것이다. 이 봉학사는 1340년(고려 충혜왕1)에 창건된 사찰로 당시 326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봉학사 창건 연대에 대한 2가지 기록 1)<충북의 문화재>(충청북도청 간. 168p)에서는 봉학사 창건 연대를 봉학사지에서 수습된 기와 파편에 ‘至元 庚辰’이란 기록을 근거로 1340년으로 보고 있다.
2)<단국대학교 박물관 고적 조사 보고 제 1책>(단국대학교 출판부. 1967년)에서는 봉학사 탑인 오층석탑의 사리공에서 수습된 금동 소상과 묵서지(1967. 6. 2. 오층석탑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 속에서 禹英奎(사리면 거주)씨가 발견한 것. 크기:가로-22.7cm, 세로-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록번호-신1819번)에 "--支那六月 二十二日---大施主 孝宗妻子奇德”이란 기록이 있는데, 이 효종은 중국 송나라때의 임금이기에 탑의 건립연대는 효종의 재위 기간인 1163년(고려 의종 17)--1189년(고려 명종 19)이 된다.
<오층석탑>
수려한 절경을 앞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이 봉학사는 보광산 주변의 주민들이 주된 신도들이었으며, 그들의 유일한 정신적 안식처이기도 했다. 널찍한 공간에 천혜의 오목한 절터는 사방의 바람을 전혀 받지 않는 아늑함이 있었다. 절 앞엔 오층석탑도 있었고 그 옆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샘물도 있었으며, 대웅전에는 석조 여래좌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절이었다.
<석조여래 본존불상>
승지공은 절 폐사(廢寺)를 위한 나름대로의 정당성(正當性)을 가져야 했다. 당시의 국가 통치이념은 숭유배불(崇儒排佛)이었다. 조선초부터 시작하여 성종 이후 더욱 강화된 불교 탄압은 중종때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명종때는 한때 승 보우(甫雨)가 등장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했고, 문정대비(文定大妃. 중종의 비. 명종때 수렴청정) 또한 이에 깊이 빠져 보우에게 큰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그러자 고려말 신돈의 횡포에 놀란 바 있던 조정 중신들은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감사공의 종조부(從祖父)인 구암공(龜巖公-휘 忠甲)은 이 요승(妖僧) 보우를 주살(誅殺)하라는 강력한 상소를 올린 바 있었다. 결국 보우는 처형(1565년. 명종20)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수 천 개의 말사(末寺)들이 계속해서 폐사되어 갔다. 이처럼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집안의 중심 정서(情緖)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 거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봉학사의 강제 폐사는 당시의 국가정책과 시대적 분위기 등으로 볼 때 크게 거리낌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결국 승지공께서는 오랜 고민 끝에 다소의 무리를 감내(堪耐)하면서 집안 노비들에게 폐사를 명(命)했을 것이다.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위세는 궁벽한 시골 괴산 사리에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드디어 절은 무너져 불태워졌고 본존불상(本尊佛像)은 목과 팔이 잘려 절터 근처에 묻혔으며 5층석탑도 쓰러졌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승려와 신도들도 있었을 것이나 이들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강권에 힘없이 제압당했고, 묘역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됐을 것이다.
<감사공(휘 素) 묘소>
<묘역 전체>
그런데 바로 이 일은 후에 전설로 재창조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게 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같은 전설은 우리 후손들에게 대(代)를 이어가며 안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적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제 그 전설을 당시 선조님들의 실제 삶과 결부하여 재구성해 보려 한다.
4. 보광산 전설 승지공(휘 龜萬)께서는 부친이신 감사공(휘 素)께서 돌아가시자 본댁인 이곳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1668년) 다시 상경하였다. 그리고 생원으로서 성균관 학업을 마치고 8년 뒤인 1677년(숙종3.46세)에 강서현령(江西縣令)의 관직을 받으셨다. 그리고 이듬해인 1678년(숙종4. 47세)에 문과 시험에 병과(丙科) 제 11인으로 영광스럽게 합격함으로써 서울과 임지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런데 감사공 장례 후 약 10여 년이 지난 1676년 경 어느날, 승지공의 집(서울 또는 괴산)에 한 승려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보광산의 감사공 묘소를 언급하며,
『현 감사공의 묘자리는 풍수지리상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좋지 않으니 속히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에 큰 불행이 닥칩니다』 라고 말하였다. 선조님들은 놀라 그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승려는 다름 아닌 감사공 묘소 조성 당시 봉학사에 있던 중이었다. 그는 그동안 강원도에서 풍수지리를 익히고 나서 절을 없앤 감사공댁에 복수하고자 절치부심(切齒腐心)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자였다. 보광산 절터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명당터로서 지세로 보아 발복(發福)을 하면 집안 가문의 번창과 위세가 10대도 넘게 크게 일어날 것 같았다. 이에 그는 이 복을 끊어내고자 계략을 꾸몄던 것이다. 그 중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묘역 서쪽의 터진 곳을 막으시오. 그 이유는 금계가 알을 품고 있 는데 옆이 터져 있으면 바람이 들어와 알이 부화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터진 부분을 막아 공기를 차단함으로써 포란 중에 있는 알을 곯게 하려는 의도였으니 곧 후손을 끊게 하려는 숨은 계략이었다. 보광산 정상의 묘역은 원래부터 동북쪽으로 높은 언덕이 자연적으로 둘러 쳐져 있어 묘소를 아늑하게 잘 감싸고 있었으며, 서쪽부분만 약간 낮은 언덕이 숨통처럼 열려 있을 뿐이었다)
『둘째, 보광산 맞은편 남쪽 산(솔티대) 골짜기의 물줄기를 묘에서 보이지 않도록 땅속으로 묻으시오. 그 이유는 포란 중에 있는 금계가 앞산 물줄기 에서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어 편안하게 알을 품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란 중에 있는 금계가 모이와 물을 먹어야 힘을 내어 계속해서 알을 품을 수가 있는데, 골짜기의 물을 막아 먹이를 없앰으로써 배를 곯게 하고 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니, 곧 후손들이 끊어지게 하거나 가난하게 하려는 속임수였다.) 라고 하였다. 이에 감사공의 아들(승지공 휘 구만-45세)과 손자들(남정-25세, 남채-14세, 남택-12세, 남식-5세)은 그 승려의 말을 의심 없이 믿고 묘소 주변을 흙으로 높이 쌓고 앞산의 수로를 고치는 대공사를 벌였다. 지금도 묘의 서쪽 터진 곳을 메운 복토지와 뒤쪽의 언덕은 돌이 하나도 없는 고운 흙으로 쌓여 있으며, 보광산 앞 산 골짜기는 요즘도 비가 오면 땅 속으로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등은 이 전설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때 이 묘역 공사를 위해서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비용이 소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중은 이와 같이 묘소지를 고치게 하여 후손들을 극도로 가난하게 하고 후손도 끊어지게 하려 했던 것이다.
* <이상의 전설내용 참고 자료 종합> 1. <傳說誌>(충청북도청 刊. 1982년. 438-439p) *보광사와 김감사묘-제공자 : 사리면 수암리 최한균(오래전 작고) 2. <충청북도지>(충청북도청 刊. 1992. 12. 2080p). *상기 <전설지>와 동일한 자료명만 열거. 3. <槐山說話集>(괴산 문화원 刊. 1999년. 207-216p) *중이 복수한 보광산 명당-제공자 : 사리면 방축리 김용태(당시 46세) 4. <괴산의 명산 35>(괴산군청 간. 2005. 12. 148-151p) *등산 코스 소개와 함께 봉학사 폐사 관계 기록
최근에 이르러서는 위에 소개한 것보다 더욱 악의적(惡意的)이고 가공(架空)한 전설이 만들어졌다. <묘자리를 알아본 석공>이란 전설인데 이는 그 동안의 구전설화에는 없던 것으로 다음과 같다. 『보광산에 가면 김감사(金監司) 모이가 있단 말이야. 거기 있던 절을 헐구 모이를 썼다는 얘기는 유명하니 다 알거고. 그 모이 앞에 가면 감사 모이니까 문관석(文官石)이 있고, 상석(床石)이 있다구. 그런데 상석이 조고만 해. 그래 그 때, 김감사 모이를 쓸 때 그 아들이 보니 너무 작아. 그래서 석공(石工) 보고 “이놈아, 상석이 너무 작다.” 그런 거야. 그랬더니 석공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상석은 점점 커집니다.”
그래. 그 아들이 아무 말 안했어. 상석이 커진다는데 할 말이 없지. 그런 줄 알었지. 그런데 그게 다 뜻이 있는 말이었어. 상석이 커진다는 말은 그 돌이 커진다는 말이 아니여. 돌이 커질 리가 있어? 돌이 커지는 걸 봤어? 깨지고 달아서 줄으면 줄었지 늘어나는 법은 없거든. 안 그려? 상석에다 제물을 하나만 놔 봐! 상석이 크지? 상석에다가 제물을 가뜩 놔 봐! 상석이 적지? 그러니까 상석이 점점 커진다는 건 제물이 점점 줄어들어 제물 놀 자리가 남는다, 이 말을 커진다고 한거여. 이제 알겠지? 커진다는 말을? 그 석공이 벌써 안겨. 김감사 집이 앞으로 기울어서 이 상석에 차릴 제물이 점점 줄어든다는 걸. 앞으로 이 상석에 제물을 다 차리지 못할 만큼 집안이 기울텐데 뭔 잔소리냐? 이 말을 뒤집어서 ‘상석이 점점 커집니다’ 한거지. 오래된 석공들은 모이를 많이 봐서 그런지 웬만한 풍수보다 아는 게 많어.』
*출전 : <槐山說話集>(괴산 문화원. 1999년 간. 207-216p) --묘자리를 알아 본 석공(제공자-사리면 이곡리 장기동. 69세)
밑도 끝도 없이 추상적이고 설득력도 없으며 그저 폄하하려는 의도만 다분하게 들어있는 유희적 전설이다. 감사공 묘소의 상석은 가로 153cm, 세로 90cm, 높이 30cm로 매우 큰 것이다. 그리고 넓적한 사각형의 고석(鼓石, 높이 27cm)이 받치고 있고 혼유석(104×58×14cm), 향로석(지름 50, 높이 44cm)도 갖추고 있어 일반적인 당시의 다른 상석들과 비교해 볼 때 결코 손색이 없다. 결국 이 전설은 허랑한 거짓 의도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석 전면>
<상석 후면>
그 외에 이 보광산과 관련한 기타 구전담과 설화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색시묘 구전담이다. 감사공 후손의 한 따님이 돌아가자 산소의 우측 아래에 모셨다고 하는데 그 묘소는 아직 미확인 상태다. (1)손석복(사리면 사담리 하도 거주. 80세.) 談. 1987년 필자 채록. (2)손성근(사리면 사담리 하도 거주. 88세) 談. 2007. 4. 24. 필자 채록 : 색시묘는 산에 오르면서 오층석탑 옆에 있다고 함)
둘째, 보광산은 감사공(휘 素)의 사패지지(賜牌之地:나라에서 내려 준 땅)라는 구전담인데, 손석복씨는 자신이 14세때(1911년 경) 김중서(감사공 후손-미상)라는 사람이『이 보광산은 사패지지이다. 함부로 나무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다. 그 후 이 산은 일제때 국유림이 됐는데 절터에서부터 색시묘 사이는 일제때 불하지에서 제외됐다고 한다.(손석복 談. 전과 동)
셋째, 보광산의 오층석탑과 관련한 전설이다. 이 탑은 원래 세워져 있던 것인데 1909년 경 괴산군 소수면 소바우 사람들이 탑 속에 혹시 보물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하여 탑을 넘어뜨린 다음 탑 밑을 팠다고 한다. 이 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손석복 談. 전과 동)
넷째, 사초관련 전설이다. 정확한 시기는 미상(1666년. 1699년, 1827년 추정)이나 감사공 또는 승지공을 포함한 양위분 묘소를 사초할 때의 전설로 다음과 같다. 1) 사담리에서 약 50리 떨어진 증평의 <조풍>이란 곳에서 떼(금잔디)를 떠 왔다. 이를 보광산의 묘소로 올릴 때는 기와받이(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물건을 옮기는 방법)로 옮겼다. 2) 잔디를 나르는 일꾼들의 상투에는 종이 팔랑개비를 달게 하고, 이 팔랑개비가 돌지 않으면 관원들이 재촉하여 작업을 서두르게 하였다 한다. (이상 부친 김태섭 談. 1980년 필자 채록)
5. 역사와 전설, 그리고 사실과 허구
감사공의 묘역 조성 후 놀랍게도 우리 가문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실현(實現)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설이야기처럼 극도로 빈한(貧寒)하고 후손(後孫) 귀(貴)한 집안으로 변해 갔다. 그 실례를 우선 감사공 종가 중심으로 살펴 본 다음 범위를 넓혀 감사공 현손대(玄孫代)까지의 전 후손들을 살펴 보겠다.
그 첫 번째 사건은 부호군(휘 南挺, 감사공의 孫)의 배위이신 정부인 광주이씨할머니의 요절(夭折)이다. 감사공 몰 후 23년 만에, 중의 권유로 행한 묘역 대공사 후 약 13년만에 부호군께서는 배위(정부인 광주이씨)를 38세(1689년, 광주이씨-35세)에 잃고 만년(80세)까지 독신으로 사셔야 하는 불운을 맞으셨다(당시 부호군의 부친인 승지공께선 경기우방어사에 재직 중). 이때 공은 배위를 괴산군 청천면 아래지경 뒷산 마루(아래 지경에서 청안면 운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10년 뒤(1699년. 48세)에는 부친이신 승지공께서 돌아가셨고, 또 5년 뒤(1704. 53세)에는 독자인 휘 필광(必光)공이 31세에 요절(夭折)하는 비통(悲痛)한 사건들이 연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부호군은 보광산의 두 분 묘소에 문관석과 망주석을 세우셨다. 부호군은 딸도 없이 두 아들인 휘 필광(必光)공과 휘 필면(必免)공을 두고 계셨는데 차자(次子) 휘 필면공은 어려서 졸(卒)하고, 장자 휘 필광공마저도 안타깝게 자신을 앞세우고 만 것이다. 아! 웬일일까?
<승지공 묘소>
<휘 필광 묘소>
승지공은 4남(南挺, 南採, 南澤, 南拭) 4녀(全州人 李震白, 全州人 李玄祚, 安東人 權世泰, 晉州人 柳益章)를 두셨는데 부호군(휘 남정)은 장남이셨다. 아내를 잃고 난 뒤 2년 후에 진사시에 합격(40세. 1691년)하여 성균관에서 학업도 하셨다. 그러나 문과시험은 포기해야 했다. 1694년의 갑술환국 이후 노론(老論)은 정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우리 남인은 재기 불능의 처지가 되었으며, 만약 문과에 합격하여 정계에 진출하기만 하면 모함을 받아 죽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 당시의 험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조선조의 붕당정치와 우리 집안 선조님들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조선의 붕당정치(朋黨政治)는 도학(道學)을 가장 이상적(理想的) 철학으로 내세웠던 일종의 재야 정치집단인 사림파(士林派-조선초부터 권세를 누리던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파)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졌는데, 1575년(선조8)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사이에 벌어진 이조(吏曹) 전랑(銓郞-이조 정랑)직에 대한 쟁탈전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동인측에서는 허엽이, 서인측에서는 박순이 그 영수였는데 이 당시 당파의 세력은 동인이 서인보다 다소 우세한 상태였다. 그리고 동인은 임란(1592년) 직전에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졌다.
이 당시 우리는 사림파 집안으로서 조선조 중종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장하고 개혁을 부르짖다가 젊은 나이에 처형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문하(門下)에 속해 있었다. 더욱이 영상공(휘 錫. 1495(연산1)∼1534(중종29))은 성균관 진사시절 조정암을 따라 도학정치를 내세우며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 14))가 일어나 조정암과 그 추종자들이 사사되거나 유배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영상공은 서울 주자동(현 서울시 중구 퇴계로 2가, 남산골 일대)에서 급히 외가(의성김씨)댁인 충북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현 문법2리 631번지)로 몸을 피해 은둔하게 되었다.
그 후 붕당정치가 시작되던 선조때의 우리 집안은 주기론(主氣論-唯物論)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는 달리 주리론(主理論-名分論)을 기본으로 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중심의 동인(東人) 계열에 속해 있었다. 당시 영상공의 아드님들인 세칭 오갑조의 다섯분들은 모두 문과, 또는 진사에 급제하고 고위 관직을 지내고 있었는데 다 같이 동인에 속해 있었다. 첫째인 구암공(휘 忠甲, 문과, 안악군수, 좌찬성 추증)은 퇴계와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아우인 만헌공(휘 孝甲)은 문과 급제(1553년) 후 아산 현감을 역임하였고, 참봉공(휘 友甲)은 진사에 합격하고 음보로 올라 공릉참봉(恭陵參奉)을 역임하고 불사(不仕)하였으며, 문숙공(휘 悌甲)은 퇴계의 제자로서 도산서원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임란시에는 원주목사로서 장렬하게 순절하신 분이시다. 계씨(季氏)이신 비안공(휘 仁甲)은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비안현감을 지냈다. 또한 구암공의 장자인 부평공(휘 時晦)은 문과 급제(1567년) 후 부평부사를 지냈으며, 문숙공의 장자인 애헌공(휘 時獻)은 문과(1588년)에 장원급제 후 예조판서와 도승지를 지냈다. 즉 붕당시작(1575년) 이후 임진왜란 종전(終戰) 직후(1599년)까지 우리 집안은 약 24년간 우세당인 동인과 남인에 속해 있으면서 다소 유리한 위치에서 비교적 영화로운 문운(門運)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들(영수-남이공)은 남인들(영수-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和議)를 주장했던 것을 문제 삼아 공격함으로써 남인은 1차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북인은 곧 선조(宣祖)의 후사(後嗣)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광해군의 즉위(1608년)와 함께 이를 지지하던 대북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소북파는 일소(一掃)되었고 영창대군과 외척인 김제남 일족도 처형되어 대북파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명청(明淸)에 대한 실리(實利) 외교라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영창대군의 살해, 인목대비에 대한 가혹한 횡포, 대북인들에 대한 편애와 서인(西人)들에 대한 질시, 이이첨의 횡포 등에 불만을 품은 서인들은 드디어 인조반정(1623년)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임란 후 인조반정까지:1599-1623) 남인인 우리 집안은 북인들에 의한 열세 속(약 24년간)에서도 문숙공(휘 悌甲)께서 임란때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아들(時伯), 부인과 함께 장렬한 전사를 하였고, 구암공(휘 忠甲)의 차자(次子)인 충무공(휘 時敏)께서 진주대첩을 이루고 전사함에 따라 임란공신 후손 및 근친들에게 베풀었던 조정의 후덕(厚德)한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 즉 이 시기 충무공(휘 時敏)의 자(子)인 남봉공(휘 緻)은 문과에 급제(1597년)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있었고, 부평공(휘 時晦)의 3子인 한림공(휘 絅)은 문과에 급제(1615)하고 한림(翰林)이 되었다.
비안공(휘 仁甲) 후손인 우리 집안에서는 장자 좌랑공(휘 時訓 : 1566-1629)께서 사헌부 감찰과 형조좌랑을 역임하셨고 서울 주자동의 어수정(御水井)이 있으며 세조때 권신 권람이 살던 집에서 살 수 있었으며, 그 아우이신 양덕공(휘 時說)께서는 52세인 1620년에 무과 급제하고 선공감역(繕工監役)을 거쳐 양덕현감을 지내셨다. 이는 광해군때 임란공신의 후손들과 근친들에게 베풀었던 큰 배려였다고 본다. 그리고 계씨(季氏)인 충익공(휘 時讓)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를 거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라도 도사시절 향시(鄕試)문제로 광해군때의 권신이며 대북파의 영수인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12년간 종성과 영해에서 유배살이를 해야 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풀려남으로써 복권되기도 했다. 이외에 이 시기 관직에서 활동했던 영상공(휘 석) 이하 주요 선조님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많은 분들이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한 것을 볼 수 있다.
1.생원공(휘 時覺) : 忠甲 2子. 생원, 2.감정공(휘 時愼) : 忠甲 4子. 임진란 참전, 선무공훈. 증 군자감정 3.교관공(휘 時進) : 忠甲 5子. 선무랑 4.충숙공(휘 時若) : 忠甲 6子. 음보, 의주부윤, 창성부사, 5.판관공(휘 時亮) : 友甲 1子. 음보, 군자감 판관. 6.첨정공(휘 時尙) : 友甲 2子. 호종공신, 훈련첨정 7.참의공(휘 時伯) : 悌甲 2子. 임란전사. 증호조참의 8.훈도공(휘 時俊) : 悌甲 3子. 간성 훈도 9.직장공(휘 時傑) : 悌甲 4子. 군자감 직장
인조반정(1623년)을 일으킨 서인은 대북파인 이이첨, 정인홍 등 수십명을 처형하고 수백명을 유배시킨 뒤 48년간 동인과 남인, 북인들에게 눌려 지내왔던 약세당으로부터 벗어나 드디어 제 1당이 되었다. 이때 남인은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서인(西人)에 이은 제2의 세력당이 되었다. 이런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분위기는 갑술환국이 일어나는 숙종 20년(1694년)까지 약 70년간 다소의 세력 변화를 거치며 지속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은 김자점(안동김씨, 익원공 후손)을 중심으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하는 원당(原黨)으로 나뉘었다. 그러는 사이 효종은 자신의 보위를 온전히 하기 위한 계략의 하나로 산림출신(山林出身-과거에 의하지 않고 정계에 진출한 사림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였는데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서인 중에서도 산당(山黨)이라 불렀다. 이들 송시열 등의 산당은 1651년(효종2) 낙당과 원당을 모두 부패한 당으로 보고 같은 서인파인 낙당의 김자점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원당까지 무너뜨리며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현종때까지 오래도록 권세를 누렸다. 또한 현종이 즉위하면서 현종의 조대비(인조의 비)가 죽자(1659년, 현종원년) 기해복제(己亥服制)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때 서인(영수-송시열)은 기년설(1주년설)을, 남인(영수-허목)은 3년설(2주기설)을 주장했는데, 결국 서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서인의 권세는 계속되었다.
그 후 1674년(현종15), 다시 현종의 대비인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죽자 이번에는 남인(영수-윤휴)의 기년설(1주년설)이 서인(영수-송시열)의 대공설(9개월설)을 누르고 채택되자 반대로 남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실로 1599년 이후 60년 만에 얻은 득세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잡은 남인의 권력은 불과 6년만인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다시 서인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짤막한 집권의 기쁨이었다. 이때 서인은 노론(송시열 중심)과 소론(윤증 중심)으로 나뉘어졌고, 1689년(숙종 15)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고, 남인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사사(賜死)시켰다. 이때 남인도 청남(淸南-송시열의 극형 주장파)과 탁남(濁南-온건파)으로 나뉘어 졌다. 그러나 5년 후인 1694년(숙종 20년)에 일어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남인은 쫓겨나고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남인은 안타깝게도 이제 완전 재기불능의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이 시기, 즉 인조반정(1623) 이후 갑술환국(1694)까지 우리 집안은 계속 남인에 속해 있었는데, 71년 중 2회에 걸친 약 11년 동안만(*1차 6년:1674년-1680년, 2차 5년:1689년-1694년) 우위에 있었을 뿐 나머지 60년간은 계속 서인과 노론에게 눌려 지내야 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좌랑공(휘 時訓-병조좌랑), 양덕공(휘 時說-무과, 양덕현감), 남봉공(휘 緻-문과, 경상도관찰사), 하담공(휘 時讓-문과, 병조판서, 4도체찰사, 도원수, 판중추부사), 감사공(휘 素-문과, 형조참의, 승지, 충청도관찰사), 사휴제공(휘 徽-문과, 이조정랑, 경상 황해관찰사, 이조판서), 안주공(휘 繁-무과, 안주판관), 백곡공(휘 得臣-문과, 병조좌랑, 동지중추부사, 시인), 승지공(휘 龜萬-문과, 정언, 장단부사, 좌승지) 등이 당시 조정의 중신(重臣)들로서 폭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특히 감사공(휘 素)은 낙서공(휘 自點)이 실권하던 때(1649년)에 충청도관찰사에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영흥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되는 서인의 득세와 기해복제 사건(1659년)으로 더욱 강성해진 서인으로 말미암아 18년간이나 3품의 벼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운을 맞이했다. 하담공의 2자인 사휴제공(휘 徽)은 이런 서인 중심의 상황 속에서도 비교적 순탄했다. 정언, 부수찬, 이조정랑, 경상 황해 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2차 복제문제(1674년)로 남인이 실권을 쥐게 되는 때인 1675년(69세, 숙종1)에는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 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승지공(휘 구만)은 2차 복제문제(1674년) 이후 남인 우세 시기인 167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 등을 역임하고, 경신환국(1680년) 후에는 노론 득세 속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장희빈의 등장과 송시열의 사사(賜死)가 일어나는 기사환국(1689년)을 맞아 장단부사(정3품)가 되었고, 갑술환국(1694년)이 일어나는 해에 좌승지 올랐으나 본격적인 노론 집권 시기 속에서 몰년(1699년)까지 힘겨운 승정원 승지 관직을 수행해야 했다.
상기 이외에 당시에 출사(出仕)한 영상공(휘 錫) 이하 인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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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禾公(휘 緯) : 忠甲-時晦의 1子. 음보, 송화현감 *通津公(휘 級) : 忠甲-時晦의 2子. 진사. 통진현감 *宣傳公(휘 綽) : 忠甲-時愼의 2子. 무과. 선전관 *侍正公(휘 絪) : 忠甲-時進의 1子. 內侍敎官 *判官公(휘 系) : 友甲-時亮의 1子. 무과. 북청판관 *參判公(휘 紀) : 友甲-時亮의 3子. 무과, 첨사, 증병조참판 *生員公(휘 紳) : 友甲-時亮의 5子. 생원, *縣監公(휘 細) : 友甲-時亮의 6子. 생원, 인제현감 *宣傳官(휘 緖) : 友甲-時亮의 7子. 무과. 선전관 *判官公(휘 大乾) : 友甲-時尙의 1子. 판관 *判官公(휘 大坤) : 友甲-時尙의 2子. 판관 *縣令公(휘 糸+喜) : 悌甲-시백의 1子. 진사. 영유현령 *陜川公(휘 縠) : 仁甲-時讓의 1子. 음보, 합천군수.
이 붕당정치에서 우리 안동김씨의 모든 종친들이 한 당파에 속해 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대체로 당시의 파당은 지역을 중심으로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인은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와 충청북도 지역에, 서인들은 이이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 충남, 전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도 지역 또는 학문 전수 관계 등으로 분당(分黨)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안동김문 15개 파 중 대부분은 동인과 남인에 속했고, 익원공파 중 일부 분들은 서인이셨던 것 같다. 인조때 영의정을 지냈던 낙서공(휘 자점)은 우리 안동김씨인 익원공파 후손이면서도 서인의 영수였던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예이다.
또한 모든 것이 철저한 소속 당의 당론과 틀 속에서 상대당과 대립돼 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즉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당대의 시인으로 유명한 구암공(휘 충갑)의 증손인 백곡공(휘 득신)과 많은 글을 주고받을 만큼 교분이 있기도 했으며, 하담공(휘 시양)의 2자로 이조판서를 역임한 사휴제공(휘 휘)은 남인이면서도 1666년 남인의 탄핵으로 삭직(削職) 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던 것 등이 그것이다.
이 갑술환국(1694년) 이후 양덕공 이하 우리 집안은 불행하게도 문과 2명(변광, 항광), 무과 4명(의만, 덕연, 덕후, 노범), 진사 2명(남정, 문규)의 급제자만 배출하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사에 급제한 후 문과 시험을 거쳐 관직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마신 불행한 부호군께서(휘 남정)는 궁벽한 시골 괴산에서 오직 43세에 얻은 하나뿐인 아비 없는 불쌍한 손자(東虎-1694년생. 10세에 부친 잃음)와 함께 부인도 없이 고독하게 사셔야 했다.
최근 부친의 조사(2007. 2.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송성익씨의 談)에 의하면 부호군께선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 사시다가 청안면 운곡리(안동김씨 안렴사공파 한주공(漢柱公) 후손들의 거주지)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타계하신 후 묘소를 운곡리에서 청천면 지경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경리 묘소에는 배위이신 정부인 광주이씨 할머니가 함께 합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2006. 10. 20. 이장시 확인) 아마도 부호군께서는 정부인이 돌아가시던 해 이전부터(부호군 38세, 1689년) 청안면 운곡리에 사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사리면 사담리에서 좌구산 옆 질마재를 넘어 30리 이상 떨어져 있으며, 안렴사공파 후손들 몇 가구만이 살고 있는 운곡리로 이사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혹시 보광산 묘소 조성 이후 봉학사 폐사에 따른 동네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부호군 이장 전 묘소:청천면 지경리>
<이장 후 묘소 : 청안면 문당리>
<묘비>
<진사급제 백패>
그 후 이어지는 가계(家系) 역사는 더욱 놀랍게 진행되었다. 아래와 같이 감사공으로부터 11대 후손에 이르기까지의 자손은 극히 귀해 진다. 감사공의 증손자 대(代)에서부터 4대는 딸도 없이 독자로 연이어 오다가 2대를 건넌 뒤에는 후손을 잇지 못해 3대는 양자를 들여야 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손(孫) 귀한 종가였다. 또한 3대(회건, 유화, 대년)는 연이은 상처(喪妻)로 인해 배위를 2분씩 두셔야 했다.
1대-구만(龜萬) 1632년(인조 10)∼1699년(숙종 25). 68세 졸. 자(字)는 元瑞(원서), 제학공(휘 益達) 후손으로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했다. 1666(현종7년)에 생원(生員)급제, 1677년(숙종 3) 강서현령(江西縣令), 1678년(숙종 4) 문과 급제 후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거쳐 1689년(숙종 15)에 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京畿右防御使 長湍府使), 1693년(숙종 19)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694년(숙종 20) 좌승지(左承旨)에 올랐고, 1699년(숙종 25) 68세로 몰(歿)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산1번지 보광산 정상에 있다. 유물로는 문과 교지 1매, 장단부사 유지 1매, 친필 서찰 1매가 있다. *배위 : 淑夫人 宜寧南氏 辛未生. 己丑 十月十七日 卒. 父 縣監 贈 左承旨 斗華. 祖 郡守 以聖. 曾祖 判官 琯. 墓 祔.
2대-남정(南挺). 1652년(효종3)--1731년(영조7). 80세 졸 자(字)는 백겸(伯兼).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 1691년(숙종17, 40세)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731년(영조7, 80세)에 용양위부호군(龍讓衛副護軍)을 수직(壽職)으로 받았다. 그 해 80세로 몰(歿)하였음. 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아래지경 건좌(乾坐)이다. 유물 : 白牌(진사급제) 1매 *배위 : 정부인 광주이씨(1655-1689) : 乙未生. 己巳 十二月 八日卒. 향년 35세. 父 正郞 象震. 祖 監司 如璜. 曾祖 嶺上 漢陰 德馨. 外祖 參奉 咸平 李滋 墓祔. *형제 상황 : 총 4남 4녀-남채(南採), 남택(南澤), 남식(南拭), 4녀:全州人 李震白, 全州人 李玄祚, 安東人 權世泰, 晉州人 柳益章)
3대-독자 필광(必光). 1674년(현종15)--1704년(숙종30). 31세 졸. 字는 현경(顯卿).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향년 31세로 몰함. 묘는 사리면 새터 간좌(艮坐)이다. * 배위 : 宜人 驪興李氏(1675-1753) : 乙未生. 癸酉 十二月 二十九日卒. 父 進士 瀧. 曾祖 監正 志宏. 少陵 尙毅 玄孫. 墓 鳥洞 乾坐. 79세 졸.
4대-독자 동호(東虎). 1694년(숙종20)---?(1734년 추정). 40여 세 졸. 字는 산보(山甫). 몰년은 알 수 없으나 유물(호적단자)로 보아 40세 이상 생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묘는 괴산군 사리면 삼봉산하 오좌(午坐). 유물 : 호적단자 1매(1732년(영조 8, 公 39세).국사당리 거주. 가내노비11명) *배위 : 坡平尹氏(1694-1751) 甲戌生. 辛未 正月 十日卒. 父 遇慶. 祖 別提 以臨. 曾祖 進士 世耈. 墓祔. 58세 졸.
5대-독자 숙(熽, 71세 졸). 1715년(숙종41)--1785년(정조9). 71세 졸 字는 회백(晦伯).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호적단자의 '국사당리(國祠堂里)'는 감사공께서 거주하던 현 사리면 사담리 荷島임). 묘는 사리면 새터의 간좌(艮坐)이다. *유물 : 호적단자 2매. 1)1매:1770(영조46). 公 56세. 內山 內二上. 墨井里. 총 奴婢 : 奴-약21, 婢-약56) 2)2매:1778(정조2), 公 64세. 內西面 國祀堂里 第6統 4. 奴婢 : 奴(38), 婢(65). 他居奴婢(노-10, 비-16). 逃亡奴婢(노-17, 비-14) *배위 : 延安李氏(1715-1803) : 乙未生. 癸亥 六月 十九日 卒. 89세. 父 遠聲. 祖 判官 濟夏. 증조 판관 聖賚(성뢰). 晦軒 崔景 玄孫. 墓 鳥洞
6대-독자 회건(會健). 1735년(영조11)--1810년(순조10). 76세 졸. 배위2 字는 여강(汝强).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76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 임좌(壬坐)임. *유물 : 호적단자 1매 (1799(정조34), 公 64세. 內山 內一 孤山里. 奴婢(타거노비는 많으나 부식되어 불명). 婢: 福丹(12세), 福禮(10세) *배위 1)광산김씨(1740-1770) : 庚申生(1740). 庚寅(1770) 11월 10일 졸. 31세. 父 希壽. 墓 靑安 東楸洞 壬坐. 2)고성이씨(1753-1835) : 계유생(1753) 을미(1835) 2월 25일 졸. 父 僉樞 聖老. 83세 졸. 墓祔
7대-유화(由和) 1775년(영조51)--1835년(헌종1). 61세 졸. 배위2 字는 응서(應瑞).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笑梅里) 출생. 호적단자 3매, 제문(祭文)과 통문(通文 : 감사공 승지공 산소 사초에 관한 통문)1매, 公의 8대조(양덕공-시열)까지의 약력을 기록한 가첩 등이 유물로 전함. 61세에 몰하고 묘는 사리면 새터 축좌(丑坐)임. *유물 : 호적단자 3매. 통문 1. 1)호적단자1 : 1823년(순조33), 48세. 槐山郡 內西面 笑梅洞 第十七統 第五號. 奴婢:癸分,卜丹(도망), 卜丹의 女 2)호적단자2 : 1826년(순조36), 公51세. 槐山郡 內西面 笑梅洞 第十五統 第二號. 奴婢:癸分, 卜丹(도망) 3)호적단자3 : 1835년(헌종1), 公 60세. 槐山郡 內西面 笑梅洞 第十四統 第二號. 奴婢: 癸分, 도망婢-卜丹, 卜丹의 女 順德 *배위 1)덕산윤씨(1776-1857) : 丙辰(1796-丙申(1776)의 오기로 보임). 2월 12일 졸. 부 흥교, 조 晸. 증조 殷相. 묘 淸州 鵂岩 丑坐. 82세 졸. 2)상주박씨(1769-1825) : 乙丑(1805-己丑의 오기로 보임. 1769) 5월 21일생. 乙酉(1825) 10월 20일 졸. 부 常欽. 조 涵. 묘 雙封. 57세 졸 *형제 상황 : 총 2남 1녀-유길(由吉), 녀1.
8대-대년(大年). 1800년(정조24)---1860년(철종11). 61세 졸. 배위2 字는 덕로(德老). 사리면 소매리 출생. 묘는 사리면 새터 술좌(戌坐)임. *유물 : 호적단자 1매 1)호적단자 : 1849년(헌종12) 50세. : 작성자-金大年(당시에는 金鎭國이라 씀). 부, 조, 증조, 외조, 처, 처부, 처조, 처증조, 처외조, 제, 제수 기록. 도망비-癸分,卜丹,順德 *배위 1)한양조씨(1794-1835.12.14) : 甲寅生(1794). 乙未(1835) 12월 14일 졸. 42세. 부 得廉. 묘 술좌 2)합천이씨(1820--?) : 庚辰生(1820) , 忌 2월 7일. 父 挺玉. 祖 光表 *형제 상황 : 총 3남 1녀-학년(學年), 극년(極年), 녀1
9대-양자 재호(在浩).1845년(헌종11)-1905년(몰년 미상. 추정). 약 61세 졸 자는 여정(汝貞). 사리면 수암리에서 출생. 후에 처가인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로 이사하였다가 후사(後嗣)를 잇지 못하시고 몰하심. 묘는 소이면 갑산리. *유물 : 호적단자 3매 유전 1)호적단자1 : 1865년(고종2), 公 22세. 槐山郡 內西面 笑梅洞 第八統 第二號 奴婢:도망비-癸分,卜丹, 2)호적단자2 : 1872년(고종9) 公 28세 槐山郡 南上面 水巖里 3)호적단자3 : 1877년(고종14), 公 34세. 槐山郡 南上面 水巖里 第十三統 第四號. 奴婢: 逃亡婢-癸分 *배위 : 安東權氏, 忌 五月 八日. (父 良燮, 祖 性陽, 曾祖 戇)
10대-양자 상국(相國) 1862(철종13)---1936. 75세 졸 자는 원보(元甫). 25세(1887년)에 부모님 작고 후 양자. 生父는 기호(冀浩-양덕공의 7대 玄孫인 會健, 二子 由吉 子 鶴年, 一子 冀浩). 1927(66세)에 괴산군 소수면(昭壽面) 입암리(笠巖里-일명 원장골)로 이사, 2회에 걸친 수해를 입고 1935(74세)에 음성읍 읍내로 이사함. 75세에 몰함. 묘는 음성읍 용산리 묘좌(卯坐)임. *배위 : 平康全氏. 壬戌(1862년) 四月 二十八日 生. 丙戌(1946) 六月 二十七日 卒. 父 相蔓. 84세.
11대-양자 중응(重應). 1899(광무3.고종36)--1979. 12. 28. 80세 졸. 일명 ‘재준(才俊)’. 자는 일신(日愼). 괴산군 청안면 감우지에서 출생. 생부(生父)는 상각(相珏--승지공 휘 龜萬의 二子인 南採의 三男, 東吉의 二男, 炫의 孫, 鍊百의 二男, 翊年의 孫임). 8세(1906)에 종가로 양자옴. 사리면 대기리(큰터)에서 이웃집 파평윤씨와 13세에 혼인. 1926(28세)에 괴산군 소수면 입암리로 이사함. 2차의 수해로 가산을 없애고 1935(36세)년 음성으로 이사. 3남 1녀를 둠. 1979년(양.1980.1.), 81세로 몰함. 묘는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보광산 선영하 자좌(子坐)임. *배위 : 坡平尹氏 尹萬. 1899년 己亥 九月 二十日生. 1993년 4월 9일 卒. 95세
12대-태섭(泰燮, 총 3남 1녀-泰淳, 泰榮, 딸1) 선조님들의 생활 거주지도 궁벽한 산골인 괴산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전하는 호적단자(戶籍單子)와 전언(傳言)을 기초로 살펴보면, 주로 보광산 주변인 사리면 일대에서 살아왔다. 호적단자 내의 고지명(古地名)은 다음과 같으나 모두 현 사리면 사담리, 소매리, 수암리 일대이다.
1. 사담리 : 荷島-2대 남정, 4대 동호, 5대 숙 2. 묵정리 : 內山面 墨井里-5대 숙 3. 고산리 : 內山面 孤山里-6대 회건 4. 소매리 : 7대 유화, 9대 재호, 10대 상국, 11대 중응 5. 수암리 : 9대 재호
그런데 전기한 것과 같이 부호군(휘 남정)만은 다소 멀리 떨어진 청안면 운곡리에서 사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담리 하도>
<감사공 거주지:사담리 정원사 앞>
<소매리>
<사담리 새터 5기 묘소지>
가산(家産) 또한 점점 가난해져 갔다. 당시 한 집안의 경제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간접 자료로는 호적단자 내의 가내 노비수와 묘역 관리 상태 등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집안에 유전(遺傳)되고 있는 호적단자(戶籍單子)에 기록된 가내 노비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감사공 이하 승지공부터 1대손으로 계산) 1)4대손 동호--1732년(영조 8, 公 39세) : 奴婢-약 11명(가내 노비수 미상) 2)5대손 숙--1770(영조46. 公 56세) : 총 奴婢 수 : 奴-약21, 婢-약56 *1778(정조2, 公 64세) 총 奴婢 수: 奴(38), 婢(65). 他居奴婢(노-10, 비-16). 逃 亡奴婢(노-17, 비-14) (가내 노비수 미상) 3)6대손 회건--1799(정조34, 公 64세) 奴婢(타거노비는 많으나 부식되어 불명). 가내 노 비수 : 2(婢 : 福丹(12세), 福禮(10세)) 4)7대손 유화--1823년(순조33, 48세). 奴婢:癸分, 卜丹(도망), 卜丹의 女 *1826년(순조36, 51세). 奴婢:癸分, 卜丹(도망) *1835년(헌종1, 60세). 奴婢: 癸分,도망婢-卜丹, 卜丹의 女 順德 5)8대손 대년--1849년(헌종12, 50세). 도망비-癸分,卜丹,順德 6)9대손 재호--1865년(고종2, 公 22세). 奴婢:도망비-癸分,卜丹, *1872년(고종9, 公 28세). *1877년(고종14), 公 34세). 奴婢:逃亡婢-癸分
<휘 동호 호적단자> <휘 숙 호적단자> <휘 회건 호적단자>
<휘 유화 호적단자>
<휘 대년 호적단자> <휘 재호 호적단자>
이상과 같이 1700년대 초인 감사공의 현손(玄孫-휘 동호)때에는 약 10여 명의 가내 노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00년대 중 후반부인 5대손(휘 숙)때는 실제 가내 노비 수를 알 수 없고, 1799년인 6대손(휘 회건)에 와서는 2명(福丹, 福禮), 1800년대 초인 7대손(휘 유화)에 와서는 1명(癸分)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8대손(휘 대년)과 9대손(휘 재호)에 와서는그나마 있던 노비(1명)마저도 도망을 갔다.
우리나라의 노비제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계속 되어 왔는데 조선조 후기인 1800년대에 이르러서는 개화기를 맞아 중인과 서얼 등에게도 관직을 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이르면 대부분의 노비들이 도망을 가거나, 양반가에서는 노비문서로 볼 수 있는 호적단자에 이들의 이름을 도망간 것으로 기록하곤 하였다. 결국 조선정부는 공노비를 1801년에, 사노비를 1894년 갑오개혁때 법적으로 폐지시켰다.
다음 묘역 관리상태를 보면 부호군부터 그 이후로는 놀라울 정도로 초라하다. 먼저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에 있는 감사공(휘 素)의 부친이신 양덕공(휘 時說)의 묘소부터 살펴보면, 이곳엔 상석, 동자석, 망주석은 있으나 묘비석이 없었다. 문관석도 깎다가 만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5년에 종손이신 부친(태섭)께서 묘 옆 땅속에 묻은 바 있다(현재의 신 묘비는 2005년 4월에 본 종가에서 문관석과 함께 세운 것임. 13대손 태섭 謹竪, 14대손 항용 謹撰)
<양덕공 묘소> <신 묘비>
<신문관석>
보광산의 감사공 묘소에는 1666년-1669년경, 또는 승지공 몰 후인 1699-1702년경에 부호군께서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관석(높이-205, 폭-64, 앞뒤-50, 두상-88 이하단위:cm), 망주석(높이-183, 폭-40), 상석(가로-153, 세로-90, 높이-30), 동자석(높이-118, 폭-40, 앞뒤-36)이 있다. 문관석은 일반적인 것보다 매우 웅장한데 특히 머리 부분이 무척 커서 전체의 1/3이 넘는다. 그런데 이곳에도 묘비석은 없다. 묘비문은 子인 승지공께서 찬(撰)한 것이 <상락가승>(上洛家乘-1895년(고종32). 金龜浩 편저)에 남아 있다.
<상락가승 내의 묘비문>
그런데 특이하게도 상석(床石) 전면에는 다른 일반적인 상석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계좌정향(癸坐丁向)>이란 방위 기록이 쓰여 있고 후면에는 <조선관찰사 안동김공 정부인 광주김씨지묘 상석(朝鮮觀察使 安東金公 貞夫人 光州金氏之墓 床石)>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일반적인 경우와 앞뒤가 바뀐 것이다. 승지공께선 승정원 좌승지(정3품)를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비문까지 만들어 놓은 부친의 묘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이것은 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묘소에는 석물이나 묘비를 세우지 않는다는 풍수인들의 속설(俗說)에 따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감사공 묘소, 상석, 동자석>
<동자석>
<상석 전후면>
<문관석과 망주석>
승지공 묘소에도 묘비가 없다. 그리고 묘비문도 전하지 않는다. 상석의 전면에는 <건좌손향(乾坐巽向)>이란 방위만 기록돼 있을 뿐이고, 후면엔 감사공 상석처럼 뒷면엔 이름자 표기조차 없다. 이는 아드님이신 부호군(휘 남정)께서 의도적으로 새기지 않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당시 子인 부호군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신 학자요 선비셨다. 때문에 사대부(士大夫)가요 양반가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부친의 묘비문을 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 점이 매우 궁금하다. 아마 이것도 감사공의 경우와 같이 새 형상의 지형이기에 묘비 건립을 피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승지공 묘소> <승지공 상석>
보광산엔 그래도 묘비는 없으나 웅장한 묘역 규모와 당시의 격식에 맞는 여러 석물들이 잘 조성되어 있어 위엄이 있다. 그러나 부호군(휘 南挺)부터 10대손(휘 相國)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8대의 전 묘소에는 묘비는 고사하고 상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안타까운 모습이다. 부호군의 묘소는 손(孫)이신 학생공(휘 東虎. 당시 38세)께서 조성하였을 것이다. 현재 세워져 있는 부호군의 신묘비와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새터의 5기 표석은 본 종가에서 1989년에 세운 것들이다. 이상으로 볼 때 우리 집안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부호군 몰년 이후인 1730년 이후부터 급격한 경제적 몰락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혹시 감사공 묘역 조성과 관련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청천면 지경리의 이장 전 묘소> <부호군 신 묘비>
<이장 후의 모습>
<사리면 새터의 휘 필광공 묘소와 표석>
또한 당시 가정 경제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통문>(通文)이란 문서가 있다. 7대손 휘 유화(由和)공께서 1827년 보광산의 감사공과 승지공의 묘역을 사초하기 위하여 돌린 것인데, 여기서 휘 유화공께서는 종가집의 가난을 애통해 하며 다음과 같이 종친들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통문>(가로-50Cm×세로-80Cm) <通文> 右文을 돌립니다. 조상 선대를 추모하는 것은 天賦의 양심이며, 분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人道의 常事라 함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요, 또한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저의 종가에 이르러서는 홀로 그렇지 못하니 어찌 개탄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저의 監司公[휘 素] 承旨公[휘 龜萬] 양대 산소의 위토(位土)가 창설 초기에는 있었으나 풍요로움과 검소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살다가 그 후 종가는 세세로 가난하고 또한 그 삶이 항상스럽지 못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할 수 없는 지경을 만나게 됐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막중한 묘소에 대해 마침내 향불을 마련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즉 이미 지나간 일은 먼저의 하늘 운에 붙이지만 요즘에는 禁伐하는 명령이나 주장하는 사람도 없으니, 멀고 가까운 초동과 牧夫들이 마치 주인 없는 빈산으로 보며 왕래하는 행인들은 손가락질 아니 함이 없습니다. 한탄스럽습니다. 옛날을 거슬러 보고 지금을 살펴보니 슬픈 눈물이 옷깃 적심을 알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무릇 자손된 자들은 생각건대 이런 생각을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지난 10여 년 전에 族人 한 소년이 거리낌 없이 애쓰고 고생하며 먼 길을 걷고 물을 건너다니면서 글을 손수 전하여 묘역을 守護하는 계획을 소상히 알렸습니다. 대개 그 본심은 선조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또한 본토의 여러 친족들과 더불어 의견을 물었고 그 뜻을 하나로 모두 수렴하였습니다. 이제 그 전의 경황이 없던 때의 일이 지금에 와서야 가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살고 있는 5-6家는 비록 심히 가난하지만 이번 일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거절함이 없이 능력에 따라 분배하여 간신히 4냥씩을 준비하여 그 자본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량을 합한다 해도 풍족하지 못하므로 옛 고장 각 처의 자손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 해마다 조금씩 노력한다면 운영하려는 일은 머지않아 가히 이룰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 마음은 기쁘고 행복하여 그 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오면서 소문에 들으니 2-3명의 자손이 그 돈을 사사로운 개인 재산으로 만들어 삼켜 버린 뒤에는 다시 그 비용을 내놓을 뜻이 없다고 하니, 그런 마음의 소재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겉으로는 선조의 이름을 거짓으로 빌리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살찌우게 하는 계획에만 힘을 다하며, 선영의 묘에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 것을 거만하게 보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으로 살펴볼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우리 종가에 이처럼 無禮한 사람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 나머지 모든 親族들은 老少 할 것 없이 손을 소매에 넣고 입을 다물고는 마침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게으르기가 가히 후풍(순후한 풍속)에 가까우니 이런 도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맡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포기하도록 일을 되돌리는 것이며, 도리어 이것은 친족을 박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시면 당장 굽어 꾸짖음을 가해 주시고 그 불가한 사유를 밝혀 주실 것이며, 만약 옳다고 여기시면 마땅히 당장 그것을 구별해 내어 추궁하고 조사할 것이며, 宗中의 몇 사람에게 각자 정한 한도를 담당시키어 선영의 땅을 길이 수호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위와 같이 삼가 槐山, 淸州, 淸安, 忠州의 各 宅에 通文합니다. 收錢有司 鎰
由和[1775(영조51)--1835(헌종1)] 정해(丁亥:1827. 순조 27. 필자 53세). 3월 15일 族末(먼 일가). 도(燾), 렴(濂+아래에 불화 점 네개), 烋, 聲義 等.
유전되는 집안의 전답(田畓)과 토지도 극히 적었다. 겨우 식생활을 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부 유전(遺傳)되던 적은 토지들마저도 10대손(휘 相國), 11대손(휘 重應)께서 괴산군 소수면 입암리(원장골)에 사실 때 2회(1926년과 1928년)에 걸친 수해로 생존을 위해 1930년 모두 매각해 버리고 411년의 역사를 간직한 괴산을 떠나 인접 지역인 충북 음성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범위를 넓혀 우리 종가댁 외의 후손상황을 보자. 감사공의 아들인 승지공(휘 구만)께서는 4자를 두셨다. 장자인 부호군(휘 南挺)은 상기와 같이 손(孫) 귀(貴)한 가문으로 이어졌고, 2자인 통덕랑공(휘 남채)과 그 아우 집안(휘 남택, 휘 남식)은 종손가와는 달리 경북 성주, 거창, 충주, 제천 등지로 이사하여 살면서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2007년 현재 감사공 후손 약 310가구 가운데 285가구인 92%가 승지공의 2자인 통덕랑공(휘 남채)의 후손인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통덕랑공(휘 남채)의 1子인 휘 정광(鼎光)공의 후손들(178가구-58%)은 휘 동직(東稷)공의 子 휘 병(炳)공이 어려서 경북 성주군 수륜면으로 옮겨 가 살면서 현재 55가구(18%)가 번성해 있고, 차자 휘 동길(東吉)공은 2가구, 3자 휘 동윤(東尹)공의 후손(휘 燻 후손)들은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학산리와 거창으로 이사가 살면서 121가구(39%)로 번성하여 가장 많은 후손 분포를 보인다. 2子인 휘 진광(晉光)공의 후손들도 충주 등지에 살면서 현재 107가구(34.5%)로 번성했고, 3子인 교리공(휘 恒光)은 문과(1773년)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손자 대(代)에서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승지공의 3자인 휘 남택(南澤)공은 현손(玄孫) 대(代)에 이르러 무사(無嗣)했다. 승지공의 4자인 휘 남식(南拭)공은 현재 4가구의 후손이 이어지고 있는데 子인 참의공(휘 忭光)은 문과(1723년, 40세)에 합격하고 이조 참의를 지냈다. 그 후손들은 현재 충남 당진, 서산 등지에 살고 있다고 하나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상기 교리공(校理公-휘 항광), 참의공(參議公-휘 변광) 두 분은 우리 안동김씨 제학공파의 마지막 문과 급제자에 속한다. 즉 참의공은 1723년에, 교리공은 1773년에 급제하였는데, 제학공파 마지막 급제자인 휘 명저(參奉公 휘 友甲-1자時亮-1자紀-1자鼎臣-2자允熙-1자海徵-明著. 1786년 급제, 자 晦叔, 肅廟 戊戌生, 正廟 丙午 文科, 江原都事, 同中樞府事 丁巳歿. 壽80) 바로 직전에 합격한 것이다. 참의공은 호서(湖西) 육군자(六君子)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며 청백리에 천거되기도 하는 등 영광이 있었으며, 교리공은 문과(1773년, 57세)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를 지내신 바도 있는데, 부친 대(代)에서 끊어졌던 문과 합격이란 가문(家門)의 영광을 이었던 분들이시다. 그런데 신라시대부터 왕족이거나 명문 사대부(士大夫)가였던 우리 안동김씨 전체의 문운(文運)은 이때(170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크게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일이며, 그 이후 우리 감사공가에도 문무과(文武科) 뿐만 아니라 생진사과(生進士科)에 오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20여 년 전(1985년), 필자는 이런 보광산 전설과 우리 집안의 실제 형편 등을 살펴보고 부친께 현재의 변형돼 있는 보광산 묘역을 최초 상태로 복원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때 부친께서는 “풍수에 의한 묘자리의 길흉은 10대를 지나면 모두 소멸된다고 한다. 이제 감사공으로부터 내가 12대손이 되니 묘소와 관련한 모든 길흉은 이제 소멸된 것이다.”라고 하시며 진행을 중지시킨 적이 있다.
6. 산신 고유제 준비
이상에서 우리 가문의 실제 역사와 전설을 자세히 조사하고 양자를 서로 대비하며 전설이 갖고 있는 진실성과 허구성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위와같이 이 둘 사이에는 상당부분 일치되는 모습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전기(前記)한 것과 같은 불행한 사건들이 연발하여 모두를 당황하게 하자 필자는 더욱 전설의 실현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풀림행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과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부친께 건의 드려 이제 이를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각종 전설과 문중 역사를 종합 ․ 정리한 해설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성으로 제수를 장만했고 전국 종친 약 30여 명에게도 행사를 통보했으며 각종 문헌의 전설 제공자들에게도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참석을 부탁했다. 특히 현 보광사 주지인 운산(金泰國)대사께는 당일 축원(祝願) 독경(讀經)을 부탁했다. 그 이유는 현재 이 보광사는 폐사된 봉학사의 석조 여래불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고, 봉학사 터로부터 불과 200m 아래에 세워진 절이기에 이는 봉학사의 후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지스님이 익원공(휘 士衡)의 21대손인 종친으로서 더욱 우리를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점심과 의식 거행을 위한 음식과 제수들, 축문, 각종 촬영도구들도 준비했다. 2일전, 모든 준비는 계획대로 진행되어 갔다. 그런데 참석하겠다던 여러 종친들이 불참을 통보해 왔다. 안타까웠다. 예상인원보다 약 10여명이 줄었다. 이날 참가 부탁을 했던 전설 제공자 김용태님(방축리 거주)에게는 다시 전화하여 오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당일 행사장에서 양자의 서먹 서먹한 만남은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았다.
4월 1일 아침, 드디어 기다리는 날이 왔다. 걱정했던 비는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맞춤 도시락을 보온 처리하여 마지막으로 차에 싣자 생질인 병준과 부총무인 태선종친이 도착했다. 7시, 이제 출발이다. 이른 아침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최고 속도를 내며 달렸다. 그런데 하늘은 황사가 뒤섞인 뿌연 안개로 가득했다. 라디오에서는 황사 주의보가 연속해서 발령되었다. 금년 중 가장 강력한 황사라고 한다. ‘하늘이시여 제발 괴산만은 좀 맑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고 빌었다. 쉼없이 달리는 차는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 아직도 뿌연 하늘은 좀처럼 개지 않았다. 괴산에 도착해서는 전원 분량의 마스크를 사기로 했다.
4시 20분경, 부산의 태관종친(휘 燻 종손)께서 벌써 괴산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새벽 3시에 부산에서 아우(태화)와 함께 출발하여 경북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 근처에 사는 태억 종친을 태우고 왔다고 한다. 정성이 놀랍다. 08시 40분, 괴산 세덕사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하여 논스톱으로 달려 온 지 1시간 40분 만이다. 승용형, 한용형도 속속 도착했다. 9시 20분, 괴산집을 출발하여 사리면 보광산으로 향했다. 도중에 사리면 수암리의 장응종친도 태웠다. 9시 40분, 사리면 수암리 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일행들을 기다렸다. 곧 청주의 영회종친이 가족 3인을 데리고 왔고, 충주의 상훈종친(故 석호님 季子)도 2명의 젊은 종친과 같이 왔다. 만난 종친들끼리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10시 10분 경, 보광산을 차로 올랐다. 산림도로는 좁고 가파랐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1시간 이상 허덕이며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산길을 이렇게 승용차로 불과 수 분 만에 오를 수 있다니. 명당은 역시 명당으로서의 대접을 받는가 보다!
보광사에 도착하여 운산대사님을 대동하고 묘소에 올랐다. 4월 초하루의 산야는 아직 누런 퇴색빛이다. 풀과 나뭇잎이 없으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보광산의 이모저모가 한 눈에 들어왔다. 10시 30분, 약 200m의 산길을 불과 3분 만에 올라 정상의 묘소에 이른다.
7. 토지지신(土地之神)이시여! 이어 행사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양위(감사공, 승지공) 선조님께 먼저 인사를 올리고 나서 양 묘소 사이 위쪽에 임시로 만든 산신단(山神壇)에 제수를 차렸다. 오랜 기간 여유를 갖고 차분하게 준비한 덕에 모든 것이 손쉬웠다. 11시에 행사는 시작되었다. 먼저 종친 여러분들께 오늘의 행사 개요, 분정 원칙과 분정표를 발표하고 제관, 집사, 축관 등 6분에게는 제복을 입도록 했다. 약간의 주의사항도 전달했다. 분정과 약식 홀기는 다음과 같다.
<산신제 분정표> 초헌관:태섭, 아헌관:상훈, 종헌관:태성, 집사:한용,태갑, 축관:항용, 집례:항용 <산신제 약식 홀기> (진설이 끝나면 초헌관은 제수를 점검하시오) 1)참신(모든 참사자들은 재배하시오) 2)분향 재배(헌관은 분향하고 재배하시오) 3)강신(헌관은 잔에 술을 받아 땅에 3번 나누어 붓고 재배하시오) 4)초헌관 헌작(헌관은 잔에 술을 받아 1잔만 올리시오.) 5)정시저(좌집사는 시저를 세 번 굴려 가지런히 하시오) 6)독축(참사자들은 모두 부복하고 축관은 독축하시오-모두 일어서시오) 7)초헌관 재배(초헌관은 재배하시오) 8)아헌관 헌작, 재배(아헌관은 잔을 올리고 재배하시오) 9)종헌관 헌작, 재배(종헌관은 잔을 올리고 재배하시오) (운산대사님의 축원 독경) 10)낙시저, 퇴잔(좌우 집사는 시저를 거두고 잔을 물리시오) 11)고예성(축관은 ‘예성’ 이라 고하고 초헌관은 복창하시오) 12)사신재배(모든 참사자들은 재배하시오) 13)분축(생략) 14)음복(집사들은 헌관에게 음복주를 주시오) 15)철상
정성으로 제(祭)를 올렸다. 의식 절차는 약식 홀기로 진행했다. 참신(參神)에 이어 초헌관의 분향(焚香), 강신(降神), 초헌관 헌작(獻爵)이 있고 난 뒤 모두 부복(俯伏)했다. 축관(祝官-필자)의 독축(讀祝)이 이어졌다. 약 4분간의 엄숙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정성어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렸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普光山 土地之神 告由祭 祝文> 維 檀君紀元 四千三百四十年(2007) 歲次 丁亥 二月 壬子朔, 十四日(양. 4. 1) 乙丑에 幼學 安東人 金泰燮은 삼가 告하옵나이다.
土地之神이시여! 일찍이 이곳에는 저의 十二代祖이신 贈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 經筵 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 成均館事 世子 左副賓客 五衛都摠府副摠管 行通政大夫 守忠淸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이신 安東金公 諱 素 선조님과, 十一代祖이신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安東金公 諱 龜萬 선조님의 墓所를 모시고 代代로 精誠으로 받들어 왔사옵니다.
그동안 土地之神님의 각별하신 保護와 도우심으로 본 墓域이 무사히 잘 保存되어 왔으며, 우리 後孫들도 神靈님의 커다란 恩惠를 입어 無事하게 지내왔음에 깊이 감사드리옵니다. 아뢰올 말씀은 本 墓域을 소재로 한 다소 폄하적(貶下的) 性格의 傳說들이 묘소 奉安 以後로 近洞에서 끊임없이 遺傳되고 있어 後孫으로서 그저 看過할 수만은 없기에 그 傳說 내용을 기초로 331年 前 이곳에 墓所를 造成하던 당시의 상황을 조심스럽게 追考해 보고, 만약 작은 허물이라도 있었다면 이를 告하고 神靈님의 善處를 구하고자 後孫여러분들과 함께 여기 모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사옵나이다.
돌이켜 보건대, 이곳은 高麗中葉에 創建된 鳳鶴寺란 절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朝鮮朝 中葉인 1666년 參判公(諱 素)선조님께서 歿하시자 本 普光山 서쪽 아래인 沙梨面 荷島에 本宅을 두셨던 아드님 承旨公(휘 龜萬)께서 현 위치에 있던 鳳鶴寺를 閉寺하고 參判公의 墓所를 造成토록 하셨으며, 후에 承旨公께서도 이곳에 安葬되셨사옵니다. 이것은 朝鮮 初부터 朝廷에서 國家의 基本 理念으로 一貫되게 추진해 왔던 崇儒排佛 政策을 더욱 强力하게 施行하던 時期의 時代的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實施된 일이었사옵니다. 그러나 그 以後 近洞 사람들은 본 墓所 奉安 과정과 관련하여 虛浪한 說話를 만들어 傳說로 口傳하는가 하면, 近代에 와서는 각종 文獻에 이를 記錄되게 하다가 最近에 이르러서는 더욱 遊戱的이고 興味本位的이며 다소 惡意的인 내용으로 再構成하여 記錄, 流布하고 있사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보아 오신 土地之神이시여! 三百 三十 餘年 前의 일을 追考해 보는 오늘, 이 傳說 내용처럼 本 墓域 造成 過程에서 우리 선조님들이나 당시 勞役者들이 本意 아니게 이곳 鳳鶴寺와 관련된 분들과 이웃 여러분들에게 身體上 害를 입혔거나 心靈上 苦痛을 주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옵니다. 이에 오늘 우리 후손들은 이 未確認된 傳說 내용이 事實일 수도 있다는 前提 下에 그때의 피해자들에 대해 人間愛的, 道德的 次元에서 진정으로 慰撫해 드리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간절히 祈願하오니 神靈님이시여! 過去 본 묘역과 관련하여 큰 被害를 입고 恨을 품었던 분들에서부터 아주 微微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靈魂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해 주시어 그 넋들이 天上界에서 平溫하게 安遊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 여기 이렇게 感謝와 鎭魂의 祭禮를 올리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과 精誠을 불쌍히 여기시어 과거의 모든 일을 널리 理解하시고 嘉納해 주시옵길 머리 조아려 비옵나이다. 끝으로 本 墓域이 永久토록 保存되고 우리 後孫들이 子子孫孫 無事, 無病하고 安寧, 無窮繁昌할 수 있도록 굽어 살펴 주시옵길 간절히 기원하옵나이다. 삼가 간소한 祭需와 맑은 술을 올리오니 降臨하시어 歆饗하시옵소서.
2007. 4. 1. 參判公 十三代孫 幼學 安東人 金恒鏞 謹撰, 奉讀
다음 아헌관(相勳)과 종헌관(泰成)의 헌작(獻爵)에 이어 보광사 운산대사님(金泰國)의 축원(祝願) 독경(讀經)이 이어졌다. 장삼(長衫)과 가사(袈裟)를 입은 스님의 위의(威儀)는 엄숙했다. 태고종(太古宗)의 독경은 일반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독경소리와 함께 울리는 목탁과 종소리는 새소리와 어우러져 은은하고 청아하게 묘역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치 산신을 공경스럽게 칭송하고 고인(故人)들의 넋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듯 했다. 그리고 고예성(告禮成), 사신재배(辭神再拜)를 한 다음 음복(飮福)을 하며 서로의 복을 빌었다. 이어서 일행은 감사공과 승지공의 묘소로 옮겨 가서 참배했다. 오늘은 제물이 있어 각각 3헌을 했다. 분정은 다음과 같았다.
1) 감사공 묘소 참배 초헌관:장응, 아헌관:영회, 종헌관:승용, 집사:태선,태현, 집례:항용
2) 승지공 묘소 참배 초헌관:태관, 아헌관:태화, 종헌관:상석, 집사:태선,태현, 집례:항용 모든 제례를 마친 다음 일행은 계획에 따라 일부 젊은이들에게는 묘역 앞의 잡목 제거를 부탁하고 나머지는 묘역 우측 능선 아래의 휘 동길(東吉)공 묘소로 가서 참배했다(헌관-장응). 약 30년 만의 참배인 것 같다. 지난 1976년 경 부친과 함께 사초한 바 있었다. 그런데 묘소는 높이 자란 나무들에 둘러 싸여 잔디가 하나도 없었고, 더욱이 산돼지의 횡포로 이곳저곳이 참혹하게 파여 있었다. 오늘 직계 후손들이 오지 않아 묘소 이장과 관련한 구체적 상의를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시 감사공 묘소로 이동하였다. 그 사이 높이 자라 있던 잡목들은 말끔히 제거되어 묘역 전면이 훤하고 시원하게 열렸다. 그리고 모든 종친들은 산돼지들이 파 일군 묘소 앞 제절의 평탄 작업과 감사공과 승지공 양위 묘소의 제초제 살포 등으로 분주했다. 또 감사공 앞의 동자석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이것도 바로 세웠다.
이 기회에 묘역 전체 규모도 실측해 보았다. 양쪽 문관석 사이(가로)는 78보(60m), 앞뒤(세로)는 40보(30.8m), 전체 둘레는 236보(181m)이다(1보:77cm 기준). 감사공 묘소의 봉분은 높이 2.2m, 앞뒤 8.4m, 좌우 7.5m이다. 엄청난 규모다. 영의정의 묘역도 이보다 큰 곳을 못 보았다. 고례(古例)에 의한 묘역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출전 : <실천예절 개론>(김득중 저. 교문사 간. 2004. 2. 25) (단위 1보:1.5m. 1척:30cm) 1품관(3정승, 판중추부사, 좌우찬성) 총 둘레:90보(135m). 한면:22.5보(33.8m). 봉분:11척(3.3m) 2품관(판서급, 감사, 관찰사 등) 총 둘레:80보(120m). 한면:20보(30m). 봉분:10척(3m) 3품관(참의,부위) 총 둘레:70보(105m). 한면:17.5보(26.2m). 봉분:9척(2.7m) 4품관(舍人, 첨정) 총 둘레:70보(105m). 한면:17.5보(26.2m). 봉분:9척(2.7m) 5품관(정랑, 도사, 판관), 총 둘레:50보(75m). 한면:12.5보(18.8m). 봉분:7척(2.1m) 6품관(좌랑, 별제, 주부) 총 둘레:40보(60m). 한면:10보(15m). 봉분:6척(1.8m) 7품 이하(직장-7, 봉사-8, 참봉-9) 총 둘레:30보(45m) 한면:7.5보(11.3m). 봉분:4척(1.2m)
8. 자료 해설과 인사
시계는 1시를 넘고 있었다. 작업이 끝나자 모두 모여 단체 촬영을 하고 준비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전 간단한 의식(儀式)을 가졌다. 먼저 종손이신 부친께서 인사말을 했고, 전 참석자들은 자기소개를 했다. 이어서 1개월 동안 준비한 26쪽 분량의 해설 자료(보광산 토지지신 고유제 행사)를 필자의 낭독과 해설을 통해 각종 전설과 구전담(口傳談), 주요 선조님 해설, 묘역 관련 각종 자료 소개, 후손 상황 등 행사 전반에 관한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모두 새롭게 종합 편집된 자료에 큰 흥미와 관심을 보였다.
이어서 모두 절 바로 앞의 학생공(휘 燻)선조님 묘소에 모여 참배하였다(헌관:태억).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묘소 이장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은 문제는 실행이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휘 훈공 선조님의 종손이신 태관종친님 중심으로 진행해야 될 것이다. 이어 일행은 모두 양덕공 종가에서 작년에 새로 조성한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의 문당묘원(文塘墓苑)으로 갔다. 작년(2006) 10월 21일 이안 조성한 부호군(휘 남정), 통덕랑공(휘 남채), 학생공(휘 정광)의 묘소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1주일 전에 식목한 밭 아래의 소나무(10그루)와 묘소 주변의 주목나무(20그루)가 파랗다. 이어서 일부 종친은 괴산읍 능촌리로 묘소 참배차 떠나고 일행 모두는 해산했다. 모두들 묵은 대업(大業)을 성대하고 후련하게 이루어 낸 것 같은 마음에 뿌듯해 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3위 묘역>
<부호군(휘 南挺) 신 묘소>
<통덕랑공(휘 南採) 신 묘소>
<학생공(휘 鼎光> 신 묘소>
9. 행사를 마치고...... 상경길의 고속도로는 다소 막히긴 했으나 3시간 만인 7시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여 온 가족들과 함께 행사 비디오와 사진을 보며 드는 저녁 식사는 너무도 달고 맛있었다. 딸 예진이와 생질 병준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고마웠다.
풀림행사 뒤 몸과 마음은 넉넉하게 풀어져 갔다. 331년 전의 맺힘은 오늘의 풀림행사로써 모두 다 깨끗하게 소진(消盡)되었으리라. 산신(山神)께서는 모든 것을 가납(嘉納)하시고, 감사공 후손들에게 묘소 지형에 따른 모든 불행(不幸)의 기운을 끊어 주시고 복(福)된 정기(精氣)만을 내려 주실 것이리라. 원한(怨恨)으로 가득 차 있던 저 세상의 모든 피해 영혼들도 이제는 맺힌 한(恨)을 풀고 편안하게 안유(安遊)하게 되셨으리라 믿는다. 보광산 주변의 주민들도 전과 같이 허랑(虛浪)한 전설의 생성(生成)과 유포(流布)를 중단하고 화합으로 융합되어 아름다운 새 보광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데 즐거이 동참하리라 믿는다. 과거와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내일을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신(神)께 빌며 이렇게 믿기로 했다. ‘이로써 감사공 우리 문중 모든 후손들은 앞으로 자손 만대(萬代)로 크신 신(神)의 가호(加護)와 축복을 받아 끝없이 번성하고 만복(萬福)이 가득할 것이라고---!’ (끝)
10. <부 록> (보광산 관련 전설 및 주요 자료 종합) 1) 전설류 가) <사지(寺誌)> (충청북도청 간. 1982년. 438p) (1)석조여래좌상(石造 如來坐像) 소재지 :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사담리의 誤記) 보광사 법당 내
당의 석불(石佛) 부처님은 원래 봉학사 금당(金堂)에 모신 주불이었는데 조성 현종때 충청도 관찰사 김소(金素)의 묘를 쓰고자 절을 헐고 부처님의 머리를 절단 파괴하여 버려졌다고 한다. 금부터 150여 년 전 보광산 산 밑 하도 부락에 사는 손씨(孫氏)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낯이 익은 노승이 찾아와서 “나는 보광산에 있는 부처이다. 나는 100여 년 동안 흙속에 묻혀 있다. 지금 때가 되었으니 나를 파내어 모시도록 하라. 나는 지금 보광사 절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양지 바른 언덕바지에 있다.” 하고는 사라졌다.
노승은 꿈에도 생시와 같이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꿈을 깬 손씨는 유생(儒生)이라 ‘중의 꿈’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튿날 밤에 또 꿈을 꾸었다. 어제와 다름없이 노승이 와서 같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이 날도 ‘중의 꿈’으로 돌려 버리었다. 사흘째 밤에 또 꿈을 꾸었는데 또 노승이 찾아와서 “내가 그대에게 두 번이나 부탁을 하였는데 말을 아니 들으니 야속하다. 내 말을 들으면 자손 번성하고 영화가 올 것이니 부디 내 말을 들어 다오”하고 사라졌다.
꿈을 꾸고 나서 손씨는 “내가 미련한 놈이지 3번씩이나 현몽을 해도 말을 안 들을 수가 있나!” 하고 이튿날 아침에 집 식구들에게 꿈 이야기를 말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알려 10여 명의 동조자를 얻었다. 그 중 같은 유생인 우씨(禹氏)와 경비를 마련하여 꿈에 이르던 곳에 가서 땅을 파보니 목이 부러진 석불이 나왔다. 산이 험하고 골이 깊어 집으로 운반할 수 없어 그곳에 바로 세우고 제례를 지냈다. 보광산에 부처님이 나왔다는 말은 입과 입을 거쳐 여러 마을로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기뻐하고 좋아하니 이상한 일이다. 손씨와 우씨는 그 후부터 재산이 일고 자손이 번창해 갔다. 그 후 어느 스님이 이곳에 절을 다시 고쳐 짓고 양지 바른 언덕바지에 있는 석불을 법당으로 안치했다. 이 때 손씨와 우씨 등 수백명이 와서 돌보아 주었다 한다. 150여 년 전 이 석불을 땅에서 파낸 손씨와 우씨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마을에 살고 있다 한다.
(2)보광사와 김감사 묘 (전게서 438-439P) 보광사는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보광산의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의 자그마한 사찰로서 김봉삼이라는 이승(尼僧)과 2명의 보살들이 조석 예불하며 목탁 소리조차 외로운 한적한 절이다.
전래하는 말에 의하면 200-300년 전까지는 보광사(혹 鳳鶴寺)라고 칭하는 거찰(巨刹)이 원래는 지금의 김감사묘 자리에 있었는데 이 보광사 절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계포란지지(金鷄抱卵之地)로서 천하에 드믄 명당이었다. 이에 탐이 난 김감사의 자손이 세도의 힘으로 절을 헐고 여기에 김감사의 묘를 만든 것이다. 묘를 쓴 뒤 몇 해 후 그 후손 집에 괴승이 나타나 “묘자리는 천하에 드믄 명당이나 한 가지 흠이 있다. 맞은편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을 보이지 않게 하면 크게 흥할 것이다.”하고 일러 주므로 이에 그 후손들이 앞산 계곡의 물을 보이지 않게 물길을 돌려 버렸으니 이로 인한 재력의 낭비가 엄청났다. 그런데 이 터는 금계가 알을 품는 형상이니 닭이 알을 품는다 해도 때때로 홰에서 내려 물을 마셔야 하거늘 부근에 물이 없으니 물을 찾아 홰에서 떠나게 되니 알이 곪아 버리게 되어 후손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 괴승은 부처의 회신(化身)으로 절을 헐게 한 벌을 내린 것이라 전하여 지며 지금의 보광사는 원래의 터 밑에 건축된 것이다.
<제공자-최한균.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나) <槐山郡 說話集> (괴산군문화원 간. 1999. 207-216p) * 중이 복수한 보광산 명당
저 보광산 꼭대기에 가면 탑이 있고 그 탑 뒤에 모이가 있어. 지금 보광산에 가면 보광사(普光寺)가 있는데 그건 나중에 진 절이고 원래 보광사는 그 묘자리에 있었대. 그런데 그 때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사람이 죽었어.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를 지낸 사람이여. 내 그 사람 이름도 알지만, 좋은 얘기가 아니니까 거명은 않겠어. 그 사람이 죽으니까 인저 유명한 풍수를 불러 묘자리를 보라고 했단 말이여. 그런데 그 풍수가 “보광산에 좋은 묘자리가 있긴 있는데-” 하거든. 그래 그 아들이, 죽은 김감사 아들이, “있으면 있는거지, 있는데가 무슨 말이냐?” 하니까 풍수가 한다는 말이 “거기 절이 있어서-” “자리면 좋다면 절이 문제냐? 거기가 어디냐?” ‘괴산 보광산에 있는 보광사 자리입니다.“ “알았다. 내 알아서 하마.” 하고 권력이 있으니까, 더구나 그 때는 불교를 탄압할 때거든. 사람을 시켜 중을 쫓아내고 절을 허물고 거기다가 자기 아버지 모이를 쓴겨. 어떤 사람은 중을 죽여서 거기 못에 묻었다고 하고 그 때 벼락이 쳤다고 해. 어쨌던 절자리에 모이를 쓴거는 사실이여. 그런데 그 때 절에서 쫓겨난 중 하나가 분하거든. 그래 복수할 생각으로 풍수를 배워가지고 몇 년 후에 거길 찾아간겨. 가니까 절은 없어지고 모이가 하나 번듯하게 있는겨. 마침 김감사 아들이 있어. 아마 있을 때 갔겠지. 가서는 “자리는 좋은데 한 가지 흠이 있구나!” 한겨. 그래 김감사 아들이 “그 흠이란게 무어냐?” 하니 이제 설명을 하는 거지. “이게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인데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데 서쪽이 허해서 닭이 알을 까지 못해 발복을 못합니다.” 그러니 중을 쫓아내고 절까지 허물고 쓴 명당인데 발복을 못한다니 그 아들이 물은 거여.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풍수에서는 지세가 강하면 그 강한 지세를 누르는 것을 진호(鎭護)라 하고 지세가 허하면 그 허한 것을 보충하는 것을 비보(裨補)라 합니다. 그래서 여기는 비보를 해야 하는데 서쪽을 흙으로 돋우어 서쪽 바람이 안들어 오도록 막아야 합니다.” “고맙다.” 고 하더니 인제 사람을 사서 서쪽을 흙을 퍼다가 돋구었어. 지금도 가보면 그 모이 서쪽으로 토성처럼 쌓은게 있어. 그런데 그걸 쌓고 나면서 그 집이 절단나는 거지. 왜 그러냐 하면, 닭이 알을 품는데 바람이 안 통하니까 곪아 버린 거여. 그래 그 집이 망했다는 전설이 내려와. 이 근동에서 보광산 김감사 모이하면 다 알어. 지금 그 후손이 제사 지내고 해. 거기 탑도 쓰러져 있었는데 지금 다시 세워놨어. <제공자:사리면 방축리, 김용태(남, 46세)>
다) <괴산의 명산 35> (괴산군청 간. 2005. 12. 148-151p)
위치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내용 : 보광산은 산세가 빼어나거나 경치가 좋고 바위가 있다든가 하는 산은 아니다. 그저 나즈막한 육산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상의 봉학사지에 얽힌 전설 같은 현실세계에 인간 욕심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접근이 용이하고 험하지 않아 가족단위로 등산할 수 있는 좋은 산이다.
산행의 시작은 모래재 고개에서 800미터 괴산쪽으로 위치한 수암리 시동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래재 고개에는 보광산 관광농원이 있어 휴식을 취하고, 특색있는 먹거리와 농원 뒤의 방가로식 숙박시설과 각종 조류를 관찰할 수 있는 사육시설이 있어 가족단위로 찾기에 좋다.
시동마을에서 보광사까지는 차도가 닦여있다. 시동마을 앞 승강장옆에 있는 보광사 안내표지판을 따라 비포장 길을 5분정도 오르면 왼쪽으로 조그만 소류지가 있고, 오른쪽엔 새농심 유기질 비료공장이 보인다. 계속되는 길은 5분정도 더 가면 가파르다. 걸어서 오르기에도 힘이 드는데 차가 오르내리고 있다. 승용차는 가지 못하고 찌프차만 통행할 수 있는 길이다. 시동마을을 출발한지 50분정도면 보광사에 도착한다.
보광사는 없어진 봉학사의 후신으로 그 명성을 간직해오고 있으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대웅전에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대웅전 처마끝에서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낮은 산들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해 보이며, 마음까지도 시원해지는 곳이다. 대웅전 오른쪽 바위 밑에선 석간수가 샘솟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넘쳐 나는 샘물이 맛 또한 그만이다. 요사체 뒤의 화장실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은진송씨 묘가 있는데, 묘 앞으로 잘 나 있는 길을 버려두고 일단 묘로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길이 잘 보이고 5분정도 가면 나뭇가지 사이로 봉학사지 5층석탑이 보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절터에 홀로 남은 5층 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있다. 탑에서 30미터 정도 가면 큰 묘가 두 개 나타나는데 이것이 봉학사와 관련 있는 묘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묘자리는 봉학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이 터가 "금계포란형"으로 천하에 드문 명당자리라. 김아무개의 자손들이 세도를 등에 업고 절을 허물어 이 명당 자리에 묘를 썼다 한다. 봉학사가 철거된 지 여러 해 지난 후 괴승이 나타나 앞산의 물길을 둑을 쌓아 돌리도록 하여 후손을 잇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묘의 바로 뒤로 주능선이 얕으막하게 지나가고 능선에 올라보면 길이 네 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200미터정도가 정상이지만 뚜렷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다. 정상을 넘어서는 헬기장 전망대가 있어 증평쪽의 평야가 시원스레 가슴을 열어 준다. 헬기장 전망대에서 5분정도 내려오면 새로닦은 임도와 만나고 보광사 진입도로 맞은편 능선을 타고 모래재 고개로 하산할 수 있다.
네 갈래 길에서 정면으로 난 내리막길을 택하면 백마산까지의 능선 종주나 소매저수지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다. 차를 시동마을이나 모래재에 두고 왔을 경우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겠지만 백마산으로 가는 능선의 고리테 고개에서 소매리 쪽으로 하산하는 것도 좋다. 능선 사거리에서 내리막길를 따라 난 키 큰 철쭉 터널 길을 40분 정도 내려오면 고리테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소매저수지로 40분정도 내려가면 사리면의 둔터골 마을로 내려온다. 둔터골에서 15분정도 더 가면 백마초등학교가 나오고 넓은 포장길에 닿게 된다. 고리테 고개에서 백마산까지는 산불이 난 후 벌채로 인해 잡목이 무성히 자라 길도 찾기 힘들고 벌채 후 잔재물이 온통 길에 널려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리테 고개에서 백마산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하고 산아래에 있는 백운사로 하산할 수도 있다. 등산코스 (산행시간:약 2시간 40분 소요) 모래재 관광농원(50분)→보광사(10분)→김감사 묘, 봉학사 5층석탑(5분)→ 정상(40분)→고리테 고개(40분)→둔터골(15분)→백마초등학교
2) 기타 자료 가) <괴산군 홈페이지>(2005년 이후) <문화유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봉학사지 오층석탑 명칭 : 봉학사지 5층석탑 구분 : 도지정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지정일 : 1976년 12월 21일 주소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봉학사지 5층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이다. 4매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세워진 석탑은 초층 탑신(塔身)만이 2매의 돌로 되어 있고, 각층의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基壇)부는 없어지고, 넓직한 지대석 위에 기단갑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얹고 탑신을 쌓았다. 각층 탑신의 면석에는 아무런 수식이 없고, 모퉁이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上輪部)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이 남아있고, 옥개석에는 5단받침과 2단의 탑신괴임을 조각하였다.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약하여 고려초기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현재 사담리 보광사(普光寺) 뒷편 옛 절터에 있는데, 1966년 이 석탑의 2층 옥개석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청동합(靑銅盒)에 들어있던 청동불상에서 ‘鳳鶴山 鳳鶴寺’라 쓰여진 시주문(施主文)이 발견되었다.
(2)봉학사지석조여래좌상 명칭 : 봉학사지석조여래좌상 구분: 도지정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지정일: 1976년 12월 21일 주소: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은 불신(佛身)만 남아있던 것을 불두(佛頭)를 찾고, 왼팔목 등을 보수한 것으로 보수부위를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으로 통식(通式)을 따르고 있으나,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항마좌는 그 예가 드문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의 높이는 95cm이다. 불두(佛頭)는 나발(螺髮)의 머리에 높은 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을 약간 숙이고 있는 상호(相好)는 원만하다. 굴곡이 배제된 네모진 상체에 띠주름같은 삼도(三道)표현, 평면적이고 네모진 형태, 둔감한 옷주름선 등에서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세부수법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산 폐사지에 있던 것을 아래쪽에 새로 지은 보광사(普光寺) 대웅전(大雄殿)에 봉안하여 1935년부터 주존불(主尊佛)로 모시고 있다.
나) <괴산지구 고적조사 보고서>(단국대학교 박물관 고적 조사 보고 제 1책. 단국대학교 출판부. 1967년) 자료 요약 (1) 보광산을 최초로 밝힌 문헌 : <東國輿地勝覽> (卷之十四. 槐山郡 山川條)에 “普光山 在 郡南二十六里 山頂有小井”이라 최초 기록 (2) <普光寺> 소개 (가)<東國輿地勝覽> (卷之 十四. 槐山郡 佛守條)에 “普光寺 舊在普光山”이라 하여 조선 중엽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寺址만 남음. (나)해발 325m (다)남아 있는 사지 모습 : 산정 가까이 석축이 3단 마련되어 있음
(3) <現 普光寺> (가)위치 : 산정(山頂)에서 약 100m 아래 (나)건립연대 : 1941년 1월 5일. (다)근거 : 대웅전 내에 보관중인 <大雄殿 建築時 施主 名單>에 “단기 4274년 1월 5일”이라 기록 되어 있음.
(4) 기타 유물 (가)五層石塔 (1)건립 연대 : 고려 초기로 추정 근거 : 1967년 발견된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의 묵서 기록 : “支那 六月二十二日......大施主 孝宗妻子奇德” 이란 기록으로 보아 효종은 중국 송나라 때 왕으로서 건립연대는 효종의 재위기간인 1163년(고려 의종 17)--1189(고려 명종19) 사이로 본다. (2)높이 : 약 5m (3)그간의 사정 :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것을 화전민 禹英奎씨가 1967년 임의로 탑을 세우다가 단국대 조사단의 제지로 중단된 후 지방 문화재로 등록 되면서 다시 세워짐. (나)石佛坐像 : 현 보광사 내에 주존불로 보관중임. 본래 옛절(구 보광사)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며 산정 뒤 산기슭에 굴러 떨어져 매몰된 것을 1972년 경 사찰에서 발굴, 수습하여 경내 露天에 이안했다가 현재 수리하여(전면에 백분을 입히고 채색함) 현 보광사에 봉안함,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됨. (다)石燈臺石 : 앞면 기록 생략.
(라)礎石 : 우영규씨가 석탑에서 남쪽 20m 되는 곳에서 우물을 파다가 다른 많은 잡석과 함께 발굴, 圓座의 株礎石, 方形 화강석재 *석재:둘레 84--62.5cm. 높이:22cm. 원좌 바깥 지름:46cm. 안지름:35.5cm
(마)塼(벽돌) : 회청색의 벽돌. 거의 방형에 가깝다. 상기 우물을 파다가 발견된 것으로 법당에 깔려 있던 것으로 추정됨. *주변길이 : 24×20.5cm. 두께 : 5.5cm
(바)碾臼(맷돌 절구) : 현 보광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 중앙의 臼孔(절구 구멍)은 후대의 가공으로 판단. 제작 연대 미상이나 봉학사에 있던 것으로 추정. 현 보광사에 보관중임. *긴 쪽 지름 : 140cm, 좁은 쪽 지름 : 115cm
다) 오층석탑 옆의 샘물에 대하여(손석복 談. 1987년 김항용 채록) 오층석탑 좌측에 있는 이 샘물은 옛날에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풀리는 깊은 샘이었는데 절을 헐 때 메웠다 함.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은 마르지 않는다고 함. 지금도 보광사에서는 이 물을 호스로 연결하여 쓰고 있음
라) 감사공 생가에 대하여 (1) 손석복 談.(1987년 김항용 채록) :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2구(荷島) 105 번지의 현 정원사(태고종. 고진수 주지승) 앞 밭 자리. (2) 송만영(사담 2구 389번지 거주. 79세. 1987년 김항용 채록.) 談 : 이 집 터 자리는 “참깨 천석을 하는 터”였다고 함. 정원사는 1977년 경 건립 됨.
마) 사담리(하도) 마을비 소개 (2003. 9. 김항용 현지 답사) <마을 입구>
<마을비 내부> (1) 건립일시 : 1993. 11. (2) 장소 : 사리면 사담리 하도 마을 중앙. 마을회관 옆. (3) 비문내용
마을 이름을 하도(荷島)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의 형상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연꽃 하(荷)자와 섬 도(島)자를 인용하여 이름을 정하였다. 마을 앞은 옛날 한양(漢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국사당(國士堂-‘士’는 ‘祠’의 誤記)이 있었고 큰 시장이 열리던 매우 번창한 곳이었다.
옛부터 학문을 숭상하여 마을에서 담을 세우고 배움에 힘써온 바 조선 현종조에 비인(庇仁)현감 손우(孫愚)공, 흥해군수 손지(孫志)공, 제주목사 손유(孫愈)공, 충청도 관찰사 김소(金素)공 등을 배출하였다.
갈잎을 뜯어다 종이 대용으로 글씨를 쓰며 글을 익혔다고 하니 그 당시의 향학열을 가히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후에도 향학의 뜻은 이어져 일제치하에서도 우종국(禹鍾國)공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써왔다. 지금 우리 마을 출신 인사들이 경향각지 각 분야 요소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것도 이렇듯 끊이지 아니한 향학열로 후진을 양성한 것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인들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더욱 복된 마을을 만들어 가자는 다짐으로 이 비를 세운다.
1993년 11월 일. 하도마을 주민 일동
3) 감사공(휘 素) 후손 분포표 (2006. 10. 현재) 감사공(휘 素)-승지공(휘 龜萬) 이후
4) 문중회 등록 감사공 후손 인원과 명단
* 감사공 후손 자료 통계 종합 1)총 가구수 : 310가구 2)문중회 등록 가구수 : 69가구 3)문중회 시제시 참여자 수 : 약 14명
5) 감사공 이하 선조님 조사서 *감사공(휘 소)이하 현손대가지 기록 1. 승지공(김구만) 김구만(龜萬) 1632년(인조 10)∼1699년(숙종 25). 68세 졸. 자(字)는 元瑞(원서), 제학공(휘 益達) 후손으로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했다. 1666(현종7년)에 생원(生員)급제, 1677년(숙종 3) 강서현령(江西縣令), 1678년(숙종 4) 문과 급제 후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거쳐 1689년(숙종 15)에 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京畿右防御使 長湍府使), 1693년(숙종 19)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694년(숙종 20) 좌승지(左承旨)에 올랐고, 1699년(숙종 25) 68세로 몰(歿)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산1번지 보광산 정상에 있다. 유물로는 문과 교지 1매, 장단부사 유지 1매, 친필 서찰 1매가 있다.
*배위 : 淑夫人 宜寧南氏(1631-1709) 辛未生. 己丑 十月十七日 卒. 父 縣監 贈 左承旨 斗華. 祖 郡守 以聖. 曾祖 判官 琯. 墓 祔. 79세 졸
2. 부호군(김남정) 후손가 김남정(金南挺). 1652년(효종3)--1731년(영조7). 80세 졸 자(字)는 백겸(伯兼).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 1691년(숙종17, 40세)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731년(영조7, 80세)에 용양위부호군(龍讓衛副護軍)을 수직(壽職)으로 받았다. 그 해 80세로 몰(歿)하였음. 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아래지경 건좌(乾坐)이다.
유물 : 白牌(진사급제) 1매 *배위 : 정부인 광주이씨(1655-1689) : 乙未生. 己巳 十二月 八日卒. 향년 35세. 父 正郞 象震. 祖 監司 如璜. 曾祖 嶺上 漢陰 德馨. 外祖 參奉 咸平 李滋 墓祔.
가.1자-김필광(金必光-부 남정) : 1674년(현종15)--1704년(숙종30) 31세 字는 현경(顯卿).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향년 31세로 몰함. 묘는 사리면 새터 간좌(艮坐)이다. 통덕랑공 *경진파보 기록내용 : 字 顯卿. 顯廟 甲寅 三月 二十七日生. 甲申 十月 十 九日卒. 墓 新昌 可里谷 艮坐 *配 宜人 驪興李氏(1675-1753) : 乙未生. 癸酉 十二月 二十九日卒. 父 進士 瀧. 曾祖 監正 志宏. 少陵 尙毅 玄孫. 묘 鳥洞 乾坐. 79세
1)1자-김동호(金東虎-부 필광):1694년(숙종20)---?(1734년 추정) 字는 산보(山甫). 몰년은 알 수 없으나 유물(호적단자)로 보아 40세 이상 생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묘는 괴산군 사리면 삼봉산하 오좌(午坐). 유물 : 호적단자 1매 *경진파보 기록 내용 : 字 山甫 肅廟 甲戌 十二月 三日生. 忌 九月 十四日. 墓 三峰下 午坐. *配 坡平尹氏(1694-1751) : 甲戌生. 辛未 正月 十日卒. 父 遇慶. 祖 別提 以臨. 曾祖 進士 世耈. 墓祔. 58세.
3. 통덕랑공(김남채) 후손가 김남채(金南採) : 1662년(현종3)-- ? 자(字)는 중정(仲靖)이며 묘는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일명 西枾谷)이다. *경진파보 기록 내용 : 字 仲靖. 顯廟 壬寅生. 忌 四月二十日. 墓 槐山 西枾谷. *配 全州李氏(1662-?) : 壬寅生. 忌 五月七日 .父 吏參 退村堂 揆. 祖 領相 分沙 聖求. 曾祖 判書 芝峰 睟光. 墓 同岡 亥坐.
가. 1자 김정광(金鼎光-부 남채) : 1686년(숙종12)-- ? 字는 성보(盛甫). 父 남채(南採)의 장자(長子), 묘는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 서시곡(西枾谷) 선영하(先塋下)이다. *경진파보 기록내용 : 字 盛甫. 肅廟 丙寅生(1686). 忌 四月 二十七日. 墓 先塋 階下. *配 孺人 羅州丁氏(1684-?) : 甲子生. 忌 五月六日. 父 道泰. 祖 參護 時潤. 曾祖 校理 彦璧. 忠靖公 應斗 后. 墓 普光山洞. (19( )년 방축리 移安 墓祔.
1)김동설(金東卨-부 정광) : 字 汝敬. 丁亥生. 忌 十一月 二十一日. 墓牟村 子坐.--손자 대에서 無嗣 *配 忠州池氏 忌 四月 七日. 父日新. 墓祔 가)1자-습(熠) : 生父 東稷. 字 季文 甲戌 十月 十六日生. 丁卯 五月 八日卒. 墓 先塋下 丑坐.
2)김동직(金東稷-부 정광) : 己丑生(1709). 戊寅 七月 二十二日卒. 墓 西沙梨面 *配 驪興閔氏 癸巳生 辛亥 三月 二日卒. 不 同樞 鎭道. 墓柿谷 艮坐 가)1자-찬(燦) : 字 汝文 甲子正月 十七日生. 己巳正月六日 卒. *配:德水李氏. 甲戌 十月 三日生. 癸酉 十二月二十八日 卒, 父 德模 雙封. 나)2자-위(煒) : 無嗣 다)3자-습(熠) : 系伯父 東卨 라)4자-병(炳) : 字 和俊. 號洛南處士 丙子生. 戊寅 十二月 十六日卒. 墓 栗峴山 亥坐 有碣. 配: 金海金氏 己丑生. 忌十二月二十二日. 父白南 墓 雙封. 公 兒時 自槐山移居 星州 自幼稱孝焉.
3)김동길(金東吉-부 정광) : 1714년(숙종40)--1775년(영조51). 62세 수(壽) 62세. 부 정광(鼎光)의 三子. 묘는 괴산군 보광산 정내(頂內) 동편 언덕 해좌(亥坐). *경진파보 기록내용 : 肅廟 甲午 十月 八日生. 乙未 五月 二十日卒. 墓 普光局內 東 亥坐. *配 全州李氏 : 忌 五月十四日. 父 國華. 墓祔. 가)1자-환(煥) : 字 有草. 庚申生 壬子 四月 二十四日졸. 墓 竹山 遠三面 佛堂洞 配:安岳李氏 壬戌生. 父 春祥. 墓祔
4)김동윤(김東尹-부 정광) : 字和老. 忌十二月 二十七日 *配:谷山延氏 忌 三月 五日. 父 萬植. 墓 臨馬谷 乾坐 가)1자-묵(黙) : 字汝黙. 己未生 庚戌 正月 六日卒. 墓 上同乾坐 配:全州李氏 忌正月 十二日 父 景煒. 墓祔 나)2자-훈(燻) : 字 汝海 癸亥生 甲寅 正月 一日卒. 享年 午十二 墓 普光山 丑坐 配:平康蔡氏 父 相鼎 知非齋 聖龜后
5)김동량(東亮):無嗣 나. 2자 김진광(金晉光-부 남채). 1694-1756. 63세 字 文祥. 甲戌生. 丙子五月 三日卒. 壽 六十三. 墓仁同 若木 霜降臺 酉坐. 有碣. *配 平山申氏 父 益恒. 祖 統制使 贈 戶曹參判 命全. 墓 上下封. 育 一男 *配 碧珍李氏 父 再茂. 祖 縣監 益章. 墓 不暮村 後 亥坐. 育 二男 1)1자-김동중(金東重-부 진광) : 字 士任. 辛丑生 乙未十一月 二十四日卒. 享年 五十五 墓 不暮洞 子坐. 有床石 *配:安東權氏 父 縣監 郤. 祖顧 曾祖 監司 修 外祖 全州李苾 墓祔 가)1자-현(鉉) : 字聖擧 辛酉生 丙戌 十月 二十三日卒 墓 不暮洞 先塋下 壬坐. 有床石 配 : 永川崔氏 忌十一月二十九日 父 進士 墓祔 나)2자-후(煦) : 字 聖晦 戊辰生 庚午 二月 十二日卒. 壽 六十三. 墓 不暮先塋下 壬坐 配 : 玉山張氏 配 : 恩津宋氏 2)2자-김동원(金東遠) 가)1자-도(燾) : 나)2자-렴(濂) : 3)3자-김동옥(金東玉) 가)1자-휴(烋) : 다. 3자 김항광(金恒光-부 남채). 1717-1785. 69세 字 士久. 丁酉生. 癸巳(1773, 57세) 文科 官 承文院 校理. 乙巳 七月 二十七日 卒. 墓 鎭川 石浦 *配 谷山延氏 父 崔喆 1)동빈 2)동언 3)동욱 4)동이
4. 학생공(김남택) 후손가 김남택(金南澤) : 1664-1745. 81세 字 叔良 顯廟 甲辰生. 壽 嘉善 副護軍. 乙丑 十月 六日卒. 壽 八十一. 墓 槐山 普光 先塋下 壬坐. *配 貞夫人 密陽朴氏 丙午生. 丙辰十二月 一日卒. 父 判書贈領相信圭. 墓祔
가. 1자-김태광(金泰光-부 남택). 1689-1753. 65세 生父 南採. 字 大來. 肅廟 乙巳生 癸酉 四月 五日卒. 壽六十五. 公以 文登鄕剡(고을이름 섬) 墓蓮峰壬坐 *配 全州李氏 庚午生 庚子 九月十日卒. 父有齡 坡谷誠中后 育一子一女 墓祔 *配 高靈申氏 庚辰生 庚子 四月 二十七日 卒. 父 攸霞隱涌后 *泰光-東佐-重羲-堯人(後孫 無嗣) 1)1자-동좌(東佐) : 甲子生. 墓 普光山 子坐 2)2자-동건(東健) : 壽七十, 墓 淸州 拜禮
5. 학생공(김남식) 후손가 김남식(金南拭) : 1671-1716. 46세 字 季鍊. 顯廟 辛亥生. 丙申 六月 七日卒. 墓 鎭川 月村 杜谷 丑坐 *配 海南尹氏 父 持平 爾厚. 祖禮美, 曾祖 忠憲公 善道. 墓附. *配 杞溪兪氏 父 命擧
가. 1자 -김변광(金汴光-父 南拭) 1694(숙종20)∼1767(영조43). 74세
자는 경실(景實). 충북 괴산 출생.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출중하여 남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1723년(경종 3. 40세)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11로 급제하여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조정랑 ·용강현감(龍岡縣監)을 지내고 1765년(영조 41) 통정대부 공조참의, 이조참의를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돌아와서 후진들의 교육과 경전을 외며 자기수양에 진력했다. 74세에 몰하였으며 묘는 당진 장항 묘좌이다. 참의 윤규범(尹奎範)이 찬(撰)한 묘갈이 있으며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이 지은 행장이 있다. 공의 문장과 학행은 조야(朝野)에 널리 떨쳐졌으며 울진과 용강에는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호서(湖西) 육군자(六君子)의 한 사람이다. 용강현감으로 있을 때 권력을 쥐고 있던 윤모(尹某) 재상의 청탁을 물리친 일화가 《목민심서》에 전한다. 죽은 뒤 1796년(정조 20) 호군(護軍) 채홍(蔡弘)의 천거로 청백리(淸白吏)에 천거되었다.
字 景實, 號赫臨齋 肅廟甲戌 二月 十三日生. 景廟 癸卯 增廣文科 歷正字 通政工議 止吏議 丁亥 七月 二十日 卒. 壽七十四 墓 唐津 長項 卯坐 參議 尹奎範 撰碣 木齋 李森煥 撰 行狀
*配 淑夫人 全州李氏 忌九月 十九日 父 參奉 玄亮 祖 正郞 台揆 曾祖 領相 聖永. 墓祔. 公 文章學行 並振 朝野 居官 淸白 蔚珍 龍岡 有去思碑 參湖西六君子 1)1자-동주(東柱) : 無嗣 2)2자-동즙(東楫) : 가) 1자-형(炯) : 묘 홍주 온동
6) 양덕공(휘 시열) 종중 문무과, 사마시 합격자 종합 1. 문과 급제자 (4) 1)김소(金素) : 시열-1자 소. 2)김구만(金龜萬) : 시열-1자 소-구만. 3)김항광(金恒光) : 시열-1자 소-남채-3자 항광. 4)김변광(金汴光) : 시열-1자 소-남식-변광.
2. 진사 합격자 (2) 1)김남정(金南挺) : 시열-1자 소-구만-1자 남정 2)김문규(金文圭) : 시열-2자 번-의만-1자 남운-2자 덕선-동눌-문규(無嗣)
3. 무과급제자 (6) 1)김시열(金時說) 2)김번(金繁) : 시열-2자 번 3)김의만(金義萬) : 시열-2자 번-의만(병진무과. 경기방어사. 묘 제천 정수동. 德慈山 有生祠堂) 4)김덕연(金德淵) : 시열-2자 번-의만-1자 남운-덕연(僉樞역임) 5)김덕후(金德厚) : 시열-2자 번-의만-2자 남욱-덕후(무신년 무과. 訓練 副正營將) 6)김노범(金魯範) : 시열-2자 번-의만-2자 남욱-덕후-노범(영묘 신미무과. 경원부사)
<안동김씨 제학공파 내 문무과 및 사마시 합격자> 1. 안동김씨 조선조 문과 합격자 수 : 141명 (총 15개 파 중) 2. 제학공파 조선조 문과 합격자 수 : 24명. 3. 안동김씨 조선조 무과 합격자 수 : 174명 4. 제학공파 조선조 무과 합격자 수 : 21명
5. 제학공파 합격자 명단 1) 김고(金顧) 경보(警甫) 태종8(무자, 1408) 식년시(式年試) 同進士16 2) 김익(金 金+주살 익) 군거(君擧) 중종14(기묘, 1519) 현량과시(賢良科試) 丙科12 3) 김충갑(金忠甲) 서초(恕初) 귀암(龜岩) 명종1(병오, 1546) 증광시(增廣試) 丙科4 4) 김효갑(金孝甲) 행초(行初) 명종8(계축, 1553) 별시(別試) 丙科21 5) 김제갑(金悌甲) 순초(順初) 의재(毅齋) 명종8(계축, 1553) 별시(別試) 丙科27 6) 김방(金昉) 선조1(정묘, 1567) 식년시(式年試) 7) 김시회(金時晦) 양오(養吾) 선조1(정묘, 1567) 식년시(式年試) 丙科3 8) 김제현(金齊賢) 사백(思伯) 선조3(경오, 1570) 식년시(式年試) 丙科17 9) 김시헌(金時獻) 자징(子徵) 선조21(무자, 1588) 식년시(式年試) 甲科1 10) 김치(金緻) 사정(士精) 남봉(南峰) 선조30(정유, 1597) 알성시(謁聖試) 丙科2 11) 김시언(金時言-金時讓) 자중(子中) 하담(荷潭) 선조38(을사, 1605) 정시(庭試) 丙科2 12) 김상윤(金相潤) 수부(<수0x6740>夫) 광해군2(경술, 1610) 식년시(式年試) 丙科10 13) 김호(金 日+戶>) 회보(晦甫) 광해군2(경술, 1610) 별시(別試) 丙科2 14) 김경(金絅) 사장(士章) 광해군7(을묘, 1615) 식년시(式年試) 丙科8 15) 김소(金素) 지백(知白) 인조13(을해, 1635) 알성시(謁聖試) 丙科1 16) 김휘(金徽) 돈미(敦美) 사휴(四休) 인조20(임오, 1642) 식년시(式年試) 丙科22 17) 김득신(金得臣) 자공(子公) 백곡(栢谷) 현종3(임인, 1662) 증광시(增廣試) 丙科19 18) 김구만(金龜萬) 원서(元瑞) 숙종4(무오, 1678) 증광시(增廣試) 丙科11 19) 김변광(金 삼수변+卞 光) 경실(景實) 경종3(계묘, 1723) 증광시(增廣試) 丙科11 20) 김가경(金可慶) 선보(善甫) 영조11(을묘, 1735) 식년시(式年試) 丙科18 21) 김덕원(金德元) 선장(善長) 영조26(경오, 1750) 식년시(式年試) 丙科32 22) 김회원(金會元) 사혼(士渾) 영조27(신미, 1751) 정시(庭試) 丙科6 23) 김항광(金恒光) 영조49(계사, 1773) 증광시(增廣試) 丙科44 24) 김명저(金明著) 정조10(병오, 1786) 식년시(式年試) 丙科9.
6. 사마시 합격자 *안동김씨 조선조(선조때까지) 사마시 합격자 수 : 59명. *제학공파 조선조(정조때까지) 사마시 합격자 수 : 20명.
1) 김곽(金) / 中宗 20 式年 進士 3등 0100 2) ♠(문과) 김효갑(金孝甲) / 中宗 35 式年 進士 2등 0009 3) 김효갑(金孝甲) / 中宗 38 式年 生員(부친 錫) 1등 0004 4) ♠(문과) 김충갑(金忠甲) / 中宗 38 式年 進士 3등 0064 5) 김우갑(金友甲) / 明宗 10 式年 進士 明宗 10 式年 進士 6) 김방(金昉) / 明宗 16 式年 生員 3등 0050 7) ♠(문과) 김시회(金時晦) / 明宗 16 式年 進士 2등 0014 8) ♠(문과) 김제현(金齊賢) / 明宗 19 式年 生員 3등 0053 9) 김종현(金從賢) / 明宗 19 式年 進士 3등 0094 10) 김인갑(金仁甲) / 宣祖 01 增廣 進士 2등 0010 11) ♠(문과) 김시헌(金時獻) / 宣祖 21 式年 生員 1등 0004 12) 김신(金紳) / 光海 08 增廣 生員 13) ♠(문과) 김소(金素) / 仁祖 08 式年 進士 2등 0017 14) ♠(문과) 김휘(金徽) / 仁祖 11 式年 生員 3등 0053 15) 김휘(金徽) / 仁祖 11 式年 進士 3등 0061 16) ♠(문과) 김득신(金得臣) / 仁祖 20 式年 進士 3등 0081 17) ♠(문과) 김구만(金龜萬) / 顯宗 07 式年 生員 1등 0004 18) 김봉지(金鳳至)/肅宗 01 (1675) 식년(式年) 생원(生員) 2등 0021 19) 김시량(金時亮) / 肅宗 01 式年 生員 식년(式年) 생원(生員) 3등 0068 20) 김인지(金麟至) / 肅宗 01 式年 生員(1675) 식년(式年) 생원(生員) 3등 0081 21) 김봉지(金鳳至) / 肅宗 01 式年 進士(1675) 식년(式年) 진사(進士) 2등 0012 21) 김남정(金南挺) / 肅宗 17 進士(1691)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 0012 22) 김문규(金文圭) /
7) 보광산 내의 실전된 문중 선조님 묘소 (6기) 1)부호군공(휘 南澤) : 壽 嘉善 副護軍. 壽 八十一. 墓 槐山 普光 先塋下 壬坐. 配 貞夫人 密陽朴氏 父 判書贈領相信圭. 墓祔 *龜萬-(3子)南澤-泰光-(2자)東健-尙羲-堯臣-鍊九-(2자)炳年(後孫 無嗣) 2)학생공(휘 東佐) : 甲子生. 墓 普光山 子坐 *龜萬-(4자)南澤-泰光-東佐-重羲(묘 대구죽곡)-堯人(後孫 無嗣) 3)학생공(휘 箕年)-1827-1877. *墓 普光山 先塋下 子坐 *龜萬-(2자)南採-鼎光-(3자)東吉-(2자)炫-聲健-鍊百-箕年--응호-(後孫 無嗣) 4)학생공(휘 聲應) : 辛卯生. 忌 十一月 十二日. 墓 普光山 臼峴 艮坐. 配 谷山延氏 墓祔. *龜萬-南採-鼎光-(4자)東尹-黙-聲應--鍊極-顯年-鳳浩-相武-(後孫 無嗣) 5)학생공(휘 聲德) : 墓 普光山 南崗 癸坐. 配 文化柳氏. 墓 雙封. *龜萬-南採-鼎光-(4자)東尹-(3자)照-聲德--由天-弼年-命浩-相圭-長應 6)학생공(휘 炳年) : 墓 普光山 南麓. *龜萬-(4자)南澤-泰光-(2자)東健-尙羲-堯臣-鍊九-(2자)炳年--善浩-(後孫 無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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