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
|
괴산에 안동김씨(제학공파 일부)가 집성촌을 이루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전인 1519년 영상공(諱 錫)께서 이곳 괴산으로 피신하여 살게 된 데부터 시작하였다. 영상공은 1459년 서울 주자동(지금의 서울시 중구 명동 충무로 대한극장 앞 극동빌딩 근처)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공은 당시 도학자로 명성 높았던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수업을 하였다. 그 후 나이 12세에 부친께서 돌아 가셨지만 불타는 학구열로 학업하여 1519년(중종 14년, 영상공 26세)에 자랑스럽게도 성균관 진사에 급제하였고, 공은 道學 문장으로써 사림(士林)들로부터 명성이 높았다.
그 때 공은 공의 스승이요, 도학사상과 도학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를 조아 그의 사상과 정치적 실현을 위해 여러 젊은 선비들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 중종 14.. 훈구세력들이 이상정치(道學政治)를 주장하던 신흥 혁명적 세력인 조광조(趙光祖)일파를 몰아낸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의 하나. 남곤, 심정 등 훈구(勳舊)세력이 조광조, 김식(金湜), 김정(金淨)등의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가 일어났다. 이에 공은 급히 피신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때마침 모친(義城金氏)께서 자신의 친정일가들이 살고 있는 괴산으로 갈 것을 제의하자 이에 동의, 황급히 가족들을 이끌고 괴산으로 도피하였다. 이때 공의 매부인 이문건(李文楗, 호는 默齋, 당시 공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생이었음)도 함께 이곳 괴산으로 피신하였다.
공은 홀로 되신 모친과 부인 행주기씨, 그리고 5세가 된 아들 충갑 등 가솔을 이끌고 괴산으로 낙향하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외가 일가들이 살고 있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일명 낙촌. 현 문법리 2구)였다. 공은 이 마을 원줄기 서남쪽 변두리에 집을 한 칸 마련하여 몇 년간 살게 되었다. 그 후 이웃 마을인 전법리(현 문법리 3구)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공의 이름을 따서 '금석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서 공은 몇가지 사업을 하였다. 첫째는 마을입구에 마을 이름을 알리는 里門 거리표(현 문법리 2구와 3구 사이의 전봅 숲 입구)를 세운 것이다. 공은 마을 이름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을 입구의 숲으로 부터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길 가 밭둑에 길이 5자(약 150cm), 넓이 약 2자(약 60cm) 되는 표석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둘째는 마을 입구쪽에 숲(현 문법리 2구와 3구 사이)을 조성했던 일이다. 공은 이곳 전법리로 이사한 뒤 마을을 돌아보고 '이 마을은 입구가 너무 허하여 재물이 흘러 나가는 형국이기에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마을 지리를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로서는 마을 입구를 토성으로 쌓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주민 능력으로는 이를 감당키 어렵다고 하자 그 대용으로 나무숲을 조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마을 앞 허한 곳을 整地하고 산에 가서 느티나무, 참나무, 오리나무 등 어린 나무 수백 그루를 캐어 이곳에 심고 가꾸었다.
그 후 나무들이 자라고 숲이 울창해지자 마을은 점차 부촌으로 변해갔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좋아하며 고사목 보식은 물론 마을의 모든 재난을 방지해 주는 수호신 역할을 해 달라는 뜻으로 지금도 매년(현재는 4년에 1번 실시-04. 9. 9. 이은재 이장 담) 정월 보름날에는 이 숲에 금줄을 치고 고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곳에서 공은 5男 2女를 낳고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 결과 아들 모두는 과거에 합격하였고 크게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영광이 있었으며 문운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자녀들은 부친께서 학문수업을 받다가 공이 몰하자 공의 매부인 묵재 이문건(李文楗. 주:星州人. 호는 默齋. 趙光祖 문하생. 기묘사화로 9년간 停擧를 당하여 괴산 호암리(현 문광면 유평리)로 낙향, 은둔불사 하다가 별시문과하여 丞旨에 오름. 淸白吏에 녹선. 乙巳士禍로 성주에 23년간 유배. 유배지에서 사망. 괴산의 花巖書院에 배향됨. 詩書에 능함. 저서<默休唱酬>)에게서 공부하였다. 특히 四子 悌甲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 황으로부터 수업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 때 忠甲은 퇴계와 아주 친분이 두터웠고 자신이 직접 아우인 제갑을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공부시키기도 했다 한다. 一子 휘 忠甲은 안악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二子 휘 孝甲은 아산군수를 지냈고, 三子 휘 友甲은 진사로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홀로되신 할머니 의성김씨와 어머니 행주기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四子 휘 悌甲은 충청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원주목사로 재직중 임진란을 만나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부인과 아들 시백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숙의 시호를 받았다. 五子 휘 仁甲은 비안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 五子의 훌륭한 업적으로 인해 이들을 일컬어 특별히 오갑파(五甲派)라 하며 제학공파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공은 이곳에서 1534년(중종 29) 향년 40세로 몰하였고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일명 방아재) 개향산 자좌에 영면하였다. 그 후 공은 四子 문숙공 휘 제갑의 공훈(임란순절)과 孫 충무공 휘 시민의 공훈(임란 진주대첩)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래 이곳의 명칭은 방아재(砧嶺-동네 언덕에 연자방아가 있어서 불려진 명칭)였는데 영상공의 묘소를 쓴 이후(숙종때로 추정) 영상공의 묘(능)가 있다하여 '능촌'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이곳 괴산에는 영상공의 후손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고, 면면히 현재까지 거주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집단 세거지(世居地)를 다음 항에서 소개한다.
<문법리 마을 입구의 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