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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자은 봉정
자은유고(紫隱遺稿)
<자은유고(紫隱遺稿)>
자은유고서(紫隱遺稿 序)
군자의 학문은 위기할 따름이다
위기의 학문이란 도리와 덕행을 몸에 익히고 심득 궁행하는 것이요
위인의 학문이란 심득궁행에 힘쓰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것을 말한다
자은처사 김공은 재식과 사장에 힘쓰지 아니하고
겸허로 자처하며 담해로 자청하여 일생을 살다가 가셨다
공은 출처와 덕행으로 이름 높은 송은 만취 선조의 영예로서
기산옹의 가학에 승발유염 되었으며 효제는 천성이요 시례는 근천으로 이루어졌다.
친환에 시탕과 당리의 정성을 다하고
친상에는 고석에 눈물의 흔적이 마르지 않았으며
훈호상화의 우애와 제가검약의 모차는 향린의 칭송을 받았다
일찌기 재종형 운산공을 사사하여 공부 하였으나
독려와 근장없이 경전의 이치를 탐구하여 학문이 발전되니 제류간에 성망이 높았다
공은 고종 무인생으로 경술 국치를 맞이할당시 삼십여세였으니
경륜과 포부를 펼쳐볼 겨를도 없이 국파군망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근역천리에 풍운은 조석으로 급변하여 나라의명운이 몰락할 때 였다
뜻있는 지사들은 혹 해외로 망명하고
혹 국내에서 활동하고 혹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이도 있었다.
그러나 노모와 백씨가 계신지라 순국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당시 시정에는 모리와 아부로 개화의 풍조에 휘말려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인사가 횡행 하였으나
탁류에도 몸을 굳건히 지켜 백의보발로 흔들림이 없으니
사류들은 조수고결한 선비라고 말하였다.
공의 평소생활은 후진을 교해하고 수분위기할 뿐이요
유소(儒所)의출입도 자제 하고 약간의 저술을 남겼다.
만제시서와 서기장갈의 사본이 적지 않았으나
경란(庚亂)에 산일되고 영성을 면치 못하니 후인의 유한일 따름이다.
구추향년으로서세하니 사류들은 <기문수지진성락 노숙향린복유유(글하는 선비 새벽별 지듯 떨어지니 고을안의 덕망있는 이 다시 누가 있는가)> 하며
향린의 앞날을 걱정 하였으며
족질 운강 위윤공은
<자소근공노대청 불리석척보애정 명리무관유수지 안빈대분낙평생
(소년시절 부지런한 공부 늙어서 더욱 정밀하고 법도에 따른 생활 진심으로 보존 했네
명리에 관여 않고 숨어서 뜻을 길러 청빈해도 분수 지켜 평생을 즐겼다네)>
하고 공의 일생을 애도 하였다
이로서 초연정개한 평생을 미루어 알수 있다.
희라 세상도애한
오늘날 학계기금의 축리여자로 유고를 간행하려 함에
한문원전을 해득하는 이가 드문지라 국역 발간이 보편화 되었지만
자력의 미급으로 우선 원문만 행간 하게 되었다
신사세말의 어느날 계회의 중의로 머릿글을 청촉하는지라 고사하지 못하였다
회상하여 공의 유자적 풍의와 유고장수의 신독을 우러르며 옷깃을 여미고
이글을 적어 삼가 서문을 대신한다
2002년 임오 원월 일 족손 창회 근서
공의 휘는 봉종(鳳鍾)이요 자는 원서(元瑞)이며 호는 자은(紫隱) 이다
1878년(고종무인 9월 12일)生~1969 (을유 12월 3일)沒
<기산유고 서문> (2003. 5. 7. 정중(도) 제공)
서문
이 책은 나의 족선조 기산 김공 휘 석유의 시문집이다
공은 실로 오문의 장덕이요 향도의 망사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저술과 선정유촉에 문필의 기록을 남겼으나 사림에서 공을 칭송한 만제장갈의 유사는 찾을 수 없다. 세대는 멀어지고 전란이 거듭됨에 영성주예의 전전이거로 당시 제제고사간에 일행기선의 글이 산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후학의 장연한 감회 금할길 없다. 하례은례(夏禮殷禮)를 오능언지(吾能言之)나 기송(杞宋)은 불가징(不可徵)이라 하고 공자께서 한탄하심은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보첩을 상고하면 참판 이돈우 도사 김도화 선생의 광기와 행장이 있다고 하였으나 천운의 순환으로 후일을 기대 하면서 이제 상전구비와 정사초록의 유고를 참고로 아래와 같이 개략을 서술한다
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조 훈업상신 충렬공 휘 방경은 중시조요 조선조 연산당시의 고사 송은 광수선생은 현조이시며 동방부자로 존앙받는 퇴도고제 만취당 사원선생은 구대조이시다. 1805년 순조 을축에 삼구단 양0공의 여섯아들중 다섯째로 태어나시니 품성이 총유 하시고 기지가 헌앙하였다
일찍이 유학을 세업으로 삼던 가정에서 승발유염으로 초학을 익히고 성장하여서는 성망 높은 선비 신암이동하 공의 사위가 되셨다. 그로부터 외0의 보익으로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한결 정진하여 대의를 효해하고 과업에 일일면진하였으며 늦게는 정재 유치명선생의 강석에 나아가 더욱 심잠하여 유망이 향방에 울연하였다
장년시절 친명으로 장옥에 출입하였으나 청운입신의 이치를 깨닫고 임하에서 정양하였다 . 5책5권 유고의 심대한 저서중에는 약간의 시편이 있으나
이는 병인양요의 프랑스군함이 양화진을 점령하고 강화에 들어올때 판서 이시원의사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자 간절한 서문과 함께 차운 하였으니 "팔월강성정기공 천왕파랑육침중 연상의리정마구 생사증안정비흉" 이라고 읊었다. 대개 보국교화와 관련된 사십여편의 시가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시장에 힘쓰지 않고 경학과 이학에 전심 하였음을 알수 있다. 1855년 철종을묘에는 영남유생 이0병공 등이 중심이 되어 장헌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의 사초가 공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산이상정 선생의 청향소와 칠조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것이 일권이다
2,3,4 권은 모두가 서편으로 외0인 신암공과 기수 정민병공을 비롯해서 류숙후 치후 이신암만0 , 이도정 0령, 이승지 건수공 등 영하명유와 경서를 강론한 서찰이 수백편이다. 문친간에는 율원 양휴공에게 질의하고 기계 노선공과 학문으로 깊이 상교하였다.
5권은 제문과 약간의 서 기가 있으며 잡저로 칠실대언이 있다
통문편을 살펴보면 안동향교 통도내문을 비롯해서 노강 임천서원통문 갈암선생 분황통문 등이 공의 수중에서 제통되었으니 그 문장의 깊이는 미루어 가히 알수 있다 이렇게 정리된 유고는 등수의 절차를 밟아 대가의 교정과 서문으로 이루어져야 하거늘 그렇지 못한 점 한스럽다. 세월을 거슬러 공의 영손 자은 봉종공이 선고간역에 일진 하였으나 유의미수로 몰세하셨다 이제 임오세말의 모일 자은공의 후학수계취회 당시 여자를 수검해서 기산고를 영인 제작하기로 취의 하였다. 계중장로분들이 소자에게 머릿글을 쓰라고 청촉하는지라 생각하면 두려울 따름이다.
학문과 덕행이 세인의 사표가 되고 고결한 정신은 당세와 후세에 교화의 영향을 끼쳤으나 초옥에서 잠해로 정양한 선인의 권두에 어찌 단문을 붙이리요마는 다만 후일 상고의 자료에 공하기 위해 잠망을 무릎쓰고 전말을 밝혀 삼가 서문을 대신 한다
2002년 임오 계동 상현 족후손 창회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