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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동북일사(韶縣東北一舍)의 허(許)에 우뚝한 병봉(丙峯)은 묘방(卯方)이 삭립(削立)하고 유방(酉方)은 완만(緩慢)하게 내리어 길다란 능선(稜線)을 이루면서 마령청벽(馬嶺靑壁)과 마주하고 주위산강(周衛山岡)은 이곳에 응(應)했으며 정치 남상(鼎峙 濫觴)이 기수(沂水)가 되어 창송단애(蒼松丹崖)에 부딪쳐 소담(小潭)을 이루었다. 여기 사진대촌(沙眞大村)을 일목조망(一目眺望)하고 구원(丘園)의 풍치(風致)가 아름다운 서북(西北)자락에 상연(爽然)히 자리한 영귀정(詠歸亭)은 선조(先祖) 송은선생(松隱先生)께서 이양현송(灑養絃誦)하던 곳이다.
선생(先生)은 1501년 연산신유(燕山辛酉)에 진사(進士)로서 반궁(泮宮)에 상류(嘗留)할 때 제생(諸生)의 역학질의(易學質疑)를 막힘없이 답변하여 존경(尊敬)을 받았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여파(餘波)로 혼정(昏政)이 거듭되자 동배(同輩)의 만류(挽留)를 뿌리치고 낙향(落鄕)하여 사절세사(謝絶世事)하고 수간망암(數間茅庵)을 정결(精潔)하게 가꾸어 영귀(詠歸)라 편액(扁額)함은 욕호기(浴乎沂)하고 풍호무우(風乎舞雩)하고 영이귀(詠而歸)의 고사(古事)를 인용(引用)함이다. 이곳에서 소오언식(嘯傲偃息)하면서 평소(平素)에 영산사(營産事)를 말하지 않고 가언선행(嘉言善行)을 칭도(稱道)하며 빈천(貧賤)을 척척(戚戚)하지 않고 부귀(富貴)에 급급(汲汲)하지 않으며경심십잠(警心十箴)을 지어 자서(自序)하고 매양 춘화물훤(春和物暄)에 유수(幽邃)한 서림(西林)을 바라보며 죽오풍청(竹塢風淸)이요 매창월백(梅窓月白)의 금부(琴賦)로 영이귀(詠而歸)하니 모두가 지상선인(地上仙人)이라 찬탄(讚嘆)하였다. 오호(嗚呼)라 96세(歲)의 향수(享壽)로 역책(易甑)하시고 유광무천(流光貿遷)한 某年에 암(庵)은 무너지고 황원(荒園)만 남으니 세사(世事)의 영허(盈虛)를 미루어 알지니라. 어사지간(於斯之間)에 창상(滄桑)이 바뀌고 정조년간(正祖年間, 1780년대)에 이르러 후손종록(後孫宗祿)등이 뜻을 모아 선적(先蹟)의 구지(舊址)를 정리(整理)하고 간살을 조금 넓혀 오가와옥(五架瓦屋)으로 중건(重建)하여 옛날의 편액(扁額)을 게판(揭板)한 연후에 당(堂)을 중심(中心)으로 동재(東齋)는 학치(學致)요 서재(西齋)는 취정(就正)이니 곧 학이치기도(學以致其道)와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이면 가위호학(可謂好學)의 논어구절(論語句節)을 뜻함이다.
이후(以後) 몇차례의 수보(修補)를 거쳐 1991年 3月 25日에는 고건물(古建物)의 규모(規模)와 특성(特性)을 인정받아 문화재 자료(文化財 資料) 234호(號)로 지정(指定)되었으며 1996年 5月 4日 형상(形象) 변경사업의 승인이 있었다. 의성군수(義城郡守)의 시공(施工)으로 금년(今年) 10月 1日에 착공(着工)하여 12月 31日에 준공(竣工)을 보았으며 3200만원의 사업비(事業費) 중 200만원은 문비(門費)로 부담하고 내부공사(內部工事)는 시공(施工)하지 못하였다.
지붕을 해체하여 산자를 바꾸고 부식연목(腐蝕椽木)의 단연(短椽) 11개와 장연(長椽) 30개를 개체하였으며 연함(椽檻)과 평고대를 새로 지었고 기와의 육할(六割) 정도를 갈아 넣었는데 기존분(旣存分)은 북(北)편에 새 기와는 남(南)편에 이어서 공사(工事)를 마무리 지었다. 당국(當局)의 성원(聲援)에 사례(謝禮)를 드리고 다만 선세유업(先世遺業)이 이손전손(以孫傳孫)으로 영전(永傳)하기 바라면서 본생 조(本生先祖) 장령공(掌令公)의 중건소지(重建小識)를 고거(考據)하여 위와같이 기문(記文)을 쓴다.
1997年 丁丑 중양절(重陽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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