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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은 높고 웅장(雄壯)함보다 영기(靈氣)가 서려야 이름이 있고 물은 깊고 맑음보다 용(龍)이 서식(棲息)하므로 세상(世上)에 알려진다. 대개(大蓋) 유수(幽邃)한 산천(山川)과 명미(明媚)한 풍광(風光)은 선현(先賢)의 얼이 깃드므로 더욱 빛을 발(發)한다. 고(故)로 중국(中國)의 무이(武夷)는 회암부자(晦菴夫子)의 정사(精舍)가 있으므로 천하(天下)에 드러났고 청량(淸敭)과 도산(陶山)은 퇴계 생(退溪先生)께서 장수(藏修)하여 해동리학(海東理學)의 진원지(震源地)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 후산정사(後山精舍)는 선조 만취당선생(先祖 晩翠堂先生)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일향(一鄕)의 사림(士林)과 후손(後孫)들이 모여 춘추향(春秋享)을 올리던 곳으로 자하산 남록 향양(紫霞山 南麓 向陽)한 비탈에 청향로회(靑香老檜)가 백년(百年)의 상설(霜雪)을 무릅쓰고 울연(蔚然)히 둘러섰고 와구(瓦丘)와 서림(西林)이 샛바람을 막아 한결 아늑한 자리에 천년(千年)의 이끼가 덮인 창연(蒼然)한 고가(古家)는 뜻있는 행객(行客)의 금회(襟懷)를 여미게 한다.
선조(先祖)께서는 1539年 중종 기해 교남고사 송은선생(中宗 己亥 嶠南高士 松隱先生)의 증손(曾孫)으로 출생(出生)하시니 천성(天性)이 자인 관후(慈仁 寬厚)하시고 일찌기 가학(家學)에 유렴(濡染)되었다.
22세시(歲時)에는 존고종숙(尊姑從叔)인 겸암 유선생 운룡(謙菴 柳先生 雲龍)과 더불어 계문(溪門)에 부급(負槃)하니 선생(先生)께서 손수 무이 관선재시(武夷 觀善齋詩, 부급하방래 금조차동석 일용무여사 상간구노력(負槃何方來 今朝此同席 日用無餘事 相看俱努力))를 써서 내리시고 군능유오차의(君能喩吾此意)하심에 선조(先祖)께서는 가슴 깊이 새겨들은 후(後), 과업(科業)의 뜻을 버리고 위기(爲己)의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셨다. 동문 성재 금선생 난수, 간재 이선생 덕홍(同門 惺齋 琴先生 蘭秀, 艮齋 李先生 德弘)과 같이 때로는 선생(先生)을 모시고 청량산 연대사(淸敭山 蓮臺寺)와 만월암(滿月菴), 월란암(月瀾菴)을 내왕(來往)하며 십재청익(十載請益)으로 15回에 亘한 문답(問答)을 도산전서(陶山全書)에 남겨 탁연(卓然)히 고제(高弟)가 되었으며 임란(壬亂)을 당(當)하여는 향사림(鄕士林)의 추대(推戴)로 의성정제장(義城整齊將)이 되어 활약(活躍)하시고 휼민시혜(恤民施惠)의 자성(慈性)은 향방(鄕邦)에 알려져 원근(遠近)의 기민(飢民)들이 운집(雲集)하였다고 행장(行狀)에 기록(記錄)되었다. 만년(晩年)에는 사훈(師訓)인 신언행(愼言行), 근독서(勤讀書), 무농상(務農桑)을 좌우명(左右銘)으로 삼고 생활(生活)하시다가 1601년 신축(辛丑) 63세로 천수(天壽)를 다 하셨다. 차(嗟)흡다!
오늘날 내외(內外) 운잉(雲仍)의 번연(繁衍)함이 모두가 선조(先祖)의 종덕여음(種德餘蔭)이리라. 아! 선조(先祖)가 역책(易甑)하신지 146년이 지난 1747년 정묘(丁卯)에 선생(先生)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의 참뜻을 존모(尊慕)하여 재사(齋舍)를 세우고 기묘(己卯)에는 묘우(廟宇)가 완성(完成)되어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봉안절차(奉安節次)를 정(定)하고 후산정사(後山精舍)라 칭(稱)하였다. 계사(癸巳)에는 주사(廚舍)를 짓고 을미(乙未)에는 원장(垣墻)을 설치(設置)하여 그 해 12월 12일 에 사림(士林)과 내외 자손(內外 子孫)이 모인 가운데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100여년간 춘추향화(春秋香火)를 올리다가 1868년 무진(戊辰) 국령(國令)에 의해 묘우(廟宇)는 헐려 유지(遺趾)만 남고 정사(精舍)는 현존(現存)하니 후손(後孫)들의 개연추모(慨然追慕)의 감회(感懷)가 무궁(無窮)하다. 어느때 복설(復設)이 있기를 바라고 누변(累變)하는 창상(滄桑)과 작금(昨今)을 달리하는 세태(世態)에 전후사(前後事)를 징(徵)하고자 선조(先祖)의 실기(實記)를 상고(詳考)하여 전말(顚末)을 약기(略記)한다. 서기(西紀) 1980년(庚申) 모춘절(暮春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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