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14-01-28 12:39 조회2,608회 댓글0건본문
기우만
상세내용
조선 말기의 의병장.
참봉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리었다. 호남의 거유인 참판 정진(正鎭)의 손자로서 가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1894년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다. 동학군이 향리에 들어왔을 때 학자의 집이라 하여 농민들 스스로 약탈을 삼갔다. 1895년에 나주에서 동학당 토평비를 세우게 되니 그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 말하고,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올렸다.
1896년 2월 제천의진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이르자 호남지방에도 의거의 기운이 짙어졌다. 3월에 광주향교로 들어가서 의사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론하니 며칠 안에 모여드는 의병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게 되어 관리들은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奇參衍)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와서 군무를 자원하였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은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을 받고 파견된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의 영을 내리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기병하였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음을 듣고 망북통곡(望北痛哭) 후 해산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유저로는 ≪송사집≫이 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