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충무공 김응하장군 신도비문-찬자 용주 조경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14-08-05 12:42 조회1,983회 댓글0건본문
조경[ 趙絅 ]
1586(선조 19)∼1669(현종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정충장군(折衝將軍) 수곤(壽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좌랑 현(玹)이고,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다. 어머니는 증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에 파천하고 조정에서 화전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듬해 집의로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응교(應敎)·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형조참의·대사간·대제학, 이조·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 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 그 뒤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에 등용,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61년 판중추부사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저서로 『용주집』 23권 12책과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