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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응하장군 신도비문-국역- 후손들 기록이 상세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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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08-05 12:40 조회2,4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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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 조증요동백 본조 증영의정 시충무 김공 신도비명
 
황명 조증요동백 본조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 행 통정대부 선천군수 겸평안도조방장 시충무 김공 신도비명병서
 
보국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겸 ▨▨판서 판의금부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우빈객 조경이 글을 짓고,
숭정대부 전행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이유승이 글씨를 쓰고,
자헌대부 전공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조희일이 전액을 쓰다.
 
명나라 만력 47년 기미년(광해군 11, 1619년) 봄에 건주의 오랑캐가 명령을 거역하자, 천자가 노하여 군사를 내어 정벌하고 또 우리나라에 군사를 요구하였다. 이는 한 집안과 같이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명나라의 경략은 곧 양호이고, 우리나라의 원수는 바로 강홍립이고, 부원수는 곧 김경서였다. 군사를 나누어 좌우영을 삼았는데, 장군은 선천군수로서 조방장을 겸하여 좌영의 군사를 거느렸다. 군사가 출행할 때에 유도독과 교유격이 전모를 맡았고, 우리의 좌영이 그의 왼쪽 날개가 되고, 이일원은 장군을 도왔으며, 홍립과 경서가 중경이 되어 심하에 이르러 진을 폈다.
장군이 일원에게 이르기를 “병법에 먼저 북산을 점령하는 자가 이긴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우리는 낮은 곳에 진을 쳤으니, 아마도 옳지 않은 듯하다. 어찌 높은 곳이 없겠는가?”하였다. 그러나 일원이 고집하고 즐겨 움직이려하지 아니하여 머뭇거리는 틈에 오랑캐의 기병 수천이 우리 좌우 쪽 진을 공격해오자, 일원이 먼저 도망하였다. 이에 오랑캐의 정예병이 모두 좌영으로 모이자, 장군이 군중에 명을 내리기를 “포를 쏘는 자는 총포에 화약을 재고, 활을 쏘는 자는 활을 당겨 나의 북 소리를 듣고 곧바로 쏘도록 하라. 거역하면 군법이 있느니라.”하였다. 이윽고 철갑을 입은 기마가 담을 넘어 나가는데, 10보도 못되는 사이에서 장군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자 오랑캐가 탄환을 맞고 죽는 자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안장이 없는 오랑캐의 말이 길을 막아서 오랑캐가 크게 무너졌다. 그러나 잠시 뒤에 오랑캐가 또 다시 건장하고 씩씩한 군사를 뽑아서 빠진 곳을 보충해 가지고 죽을힘을 다하여 나와 싸운 것이 거의 3,4차례였으나 교전할 때마다 반드시 우리 군사가 이겨 오랑캐가 장차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큰바람이 갑자기 몰려와서 모래와 자갈을 날려 사람의 얼굴을 때리고 햇빛이 어두워지면서 화기와 탄약이 허공에 날려가므로 우리군사는 그 기술을 쓸 방법이 없었다.
오랑캐가 마침내 그 기세를 타서 몰려오자, 우리 군사가 혼란해졌다. 장군이 홀로 버드나무에 기대어 큰 황색의 활을 당겨 오랑캐를 쏘니, 맞으면 반드시 활시위 소리에 따라서 쓰러져 죽은 오랑캐가 매우 많았다. 화살이 다하자 긴 칼을 잡고 치면서 싸우니, 그 베어 죽인 자가 또한 전보다 갑절이나 되었다. 장군도 수십 곳에 상처를 입어 목숨이 이미 다했으나 그래도 칼자루를 잡고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고, 노한 눈에서는 왕성하게 기운이 났다. 이때를 당하여 중경이 되었던 자들이 군사 한 부대를 내어 구원했는데 오랑캐가 비록 수가 많았으나 반드시 장군의 한번 싸움으로 그 반은 꺾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홍립과 경서는 다만 성벽 위에서 보기만 하고 거듭 간사한 마음을 내어 장군의 맹렬하고 예리한 기세를 부러워하기만 하고는 화살 하나도 오랑캐를 향해서 쏘지 않았으니, 오랑캐가 원수가 아니라 바로 홍립과 경서였다. 이소경이 말하기를 능과 율의 죄가 위로 하늘에 통했으니, 이에 오히려 스스로 죄가 있다고 할 것이나, 홍립과 경서가 스스로 죄를 알았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아아! 장군은 참으로 잘 싸웠고 또한 장하였도다. 두송과 유정은 중국의 명장으로서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도 잠시나마 오랑캐에게 짓밟혀서 피가 흘러 길에 넘쳤고 한 군신도 돌아가지 못했는데, 장군은 홀로 승세를 탄 오랑캐를 당해내고 대단히 만은 수의 오랑캐 말을 막아내어 겨우 천명의 약한 군사로 죽는 것을 보기를 돌아가는 것처럼 하여 몸소 치고 죽인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관운장이나 악무목이라도 어찌 이보다 뛰어날 수 있었겠는가. 교유격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없이 우리나라가 병기는 날카롭고 장수는 용맹스럽다는 말을 입에서 그치지 않았고, 오랑캐는 군사를 돌리면서도 오히려 버드나무 아래의 싸움터를 피하면서 반드시 말하기를 “버드나무 아래의 장수가 힘써 싸운 것이 두렵다”하였다. 또 시체를 거두어 묻으면서 말하기를 “호남자로다, 호남자로다. 다음날 다시 태어나면 원컨대 내가 이사람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장군의 이름이 중국과 오랑캐를 움직였다는 것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강개하게 몸을 죽이는 것은 쉽고, 조용히 죽음에 나가는 것은 어렵다”하였는데, 장군같은 이는 죽는다는 뜻이 본래 명령을 받는 처음에 정해졌음이 분명하도다. 아우 응해가 장군을 따르려 했으나 장군은 함께 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해서 중지시켰다. 집안사람과 영결할 적에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고 봉함하여 표기한 인장을 군리에게 부탁하여 적에게 더럽히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이것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석하도다. 재상 박승종이 장군을 천거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장군을 재주가 있다고 해서 천거했다면 어찌해서 대장을 도와서 찬후가 회음후를 천거한 것과 같이하지 못하였는가. 아니면 국운과 천시가 그 사이에 관여함이 있어서였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심하 싸움에 오랑캐의 형세가 바야흐로 성하였다. 우리가 만일 그 강한 것을 꺾어 잠재웠다면 오랑캐가 반드시 10년 동안은 떨치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그 틈에 군사를 교련시키고 군졸들을 독려시켜서 변방의 위엄을 견고하게 했다면 어찌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난리가 있었겠는가”하니, 이말이 믿을 만 하다. 홍립과 경서의 죄는 여러 대를 지나도 용서하기 어렵다.
경신년(광해군 12, 1620년) 봄에 신종황제가 장군의 힘써 싸우다가 죽은 모습을 가상히 여겨 나라의 창고에서 백금 만여 덩어리를 내어 우리나라에 크게 보내주고, 장군의 집을 돌봐주게 하였다. 이에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장군의 이름을 함께 칭송하여 서로 전하느라 왁자지껄하게 말하였으며, 갑주를 입은 무사는 장군과 함께 오랑캐와 싸우다가 잇달아서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붓을 잡은 무리들은 장군의 최후까지 싸우던 모습을 다 써서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수만은 명나라 역사에 빛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장군이 죽은 지 이제 40여 년에 가까운데도 그 일을 말하면 어렴풋하게 마치 장군이 우리가 보는 가운데에 성을 내어 큰 소리로 꾸짖는 것과 같아서 늠름하게 생기가 있는데, 그 누가 사람과 뼈가 모두 이미 썩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장군의 이름은 응하이고 자는 경희이며, 성은 김씨이다. 본래 안동사람인데 철원으로 본적을 둔지는 겨우 두어 대이다. 진은 예조참의요, 인상은 장악원정 지제교요, 인은 병조정랑이요, 지사는 참판에 증직되었는데, 장군에게 고조, 증조, 조부 및 아버지이다. 장군은 태어난지 14세만에 부모상을 당했는데, 기이한 중을 만나 좋은 언덕을 지시해주어 장사지냈으며, 제사지내는 것을 예대로 하여 동자라고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리고 약한 아우들과 우애를 지극히 잘 갖추어 향리에서 칭찬하였다. 장성하자 큰 활을 쏘았으며 활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만들었는데 제도가 달랐다. 신장이 8척이고, 지기가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한 때의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참다운 장군이라고 허여하고 모두 그 아래로 나왔다. 25세에 무과에 발탁되자 재상 박승종이 병조판서로서 천거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듬해에 해치는 자에 연루되어 파면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그날로 집에 돌아갔는데, 조금도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무신년(선조 41, 1608년)에 호남의 막하에 부장으로 있었는데, 곧 박공이 안찰사로 있을 때였다. 이때에 선조대왕의 국상을 당하여 처음에 장군이 휘하에 있었는데, 주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 끝내 게을리 하지 않으니, 듣는 자들이 유자라도 그와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경술년(광해군 2, 1610년)에 두 번째로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이시언이 백사 이상에게 급구 칭찬을 받아 이상이 발탁하여 경원판관에 임명했는데, 장차 떠나려할 때에 어떤 사람이 귀가의 딸로 아름답고 고운 자를 소개하여 장군에게 데리고 가라고 부탁했으나 장군은 이를 사양하였다. 경원에서 임기가 찼는데 관찰사 한서평이 잘못하여 하고에 두고 계속해서 막하에 있게 했었는데, 서평이 법에 저촉되어 폐해지자 장군이 남보다 먼저가서 위문하니, 사람들이 그것은 인정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장군은 말하기를 “한서평은 나의 옛 장수인데 내가 어찌 조그만 연고를 기억하여 행동을 하겠는가?”하였으니, 그 가슴속이 넓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로부터 이름과 실상이 성대해졌다. 도총과 경력을 거치고 삼수군수를 거쳐 북우후에 이르렀는데, 비록 모두 박상의 천거였지만 실상은 여러 사람의 의망에 의한 것이었다. 직책에 얽매어 북관에 있은 지 4년 동안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 심지어 나무 심는 데 힘을 써서 도장사가 벽돌을 운반한 것보다 더하였으나 자랑하지 않았다. 또한 큰 은행나무가 일찍 바람에 자빠지는 것에 다쳐서 몹시 고생하여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약을 가지고 와서 큰 소리로 부르기를 “그대가 평소에 말가죽에 시체를 싸기로 스스로 허락했는데, 이제 어찌 한 병에 죽는단 말인가”하자, 장군은 눈을 부릅뜨고 약 세 대접을 다 마시고는 마침내 깨어났다. 심하의 일에 이르러 과연 몸을 잊고 나라에 몸을 바쳐 큰 절개를 세워 모두 그 뜻과 같이하였으니, 어찌 열렬한 남자가 아니겠는가. 본조에서도 특별히 장군에게 대광의 품계에 영의정의 벼슬을 증직했으니, 국가에서 충성을 나타내고 절개를 높인 도리가 진실로 천고에 만족할 만 하도다. 아우 응해 등이 용만강 가로 돌아와 그 의관을 선영 아래에 장사지냈다.
장군의 부인은 첨추 윤수익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맏이는 익련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라우수사에 이르렀고, 성대하게 그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으나 불행히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 다음은 시련인데 일찍 죽었다. 딸은 맏이는 선전관 유신걸에게, 둘째는 유학 김기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의 아들은 승련이다. 손자 중 선전관 세귀는 익련의 소생이고, 세성은 시련의 소생이다. 유신걸은 2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탄연으로 강계부사이고, 막내 비연은 숙천부사이다. 김기는 4남을 두었으니, 익훈 · 익화 · 익문 · 익무이다. 딸은 유학 조일선에게 출가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칼과 활은 어디로 돌아갔는가.
오랑캐를 치느라 다 없어졌네.
의관은 어디로 돌아갔는가.
도끼와 같이 감추어졌네.
넋은 가지 않는 곳이 없으니,
하물며 이 여우의 언덕이겠는가?
죽어서도 얼굴이 산 것과 같았으니,
선진이 그 짝이로다.
이가 부서져 남음이 없었으니,
진원도 이보다 앞서지 못하였도다.
황제의 명령이 그대에게 복을 내리고,
벼슬을 증직하였네.
애통하도다. 저 항복한 장수여.
악명을 대대로 남겼도다.
저 유신을 이음이여.
공이 신라에 그쳤으니
누가 공과 같겠는가.
천자에게 목숨을 바침이여.
이름이 바다까지 이르러도 모자랄 만큼 떠들썩하도다.
역사에 써서 빛내고,
그 사당에 제사를 지냄이여.
잣나무 판자에 소나무 기둥으로
공손히 모셔 영혼을 편안히 하니,
빛나는 것이 마치 정절이 아득히 먼 곳까지 내리는 듯 하도다.
 
대한광무 3년 기해년(1899년) 11월 일에 세우다
 
별유사는 필구이고, 유사는 동규와 형렬이다.
 
이상의 고 영의정 충무김공신도비명은 용주 조문간공께서 지으신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께서 절의를 위하여 돌아가시자 명나라에서 특별히 요동백을 추증하였으나, 비문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천계 신유년(광해군 13, 1621년)에 편찬한 충렬록과 선정 우암 송공께서 지으신 묘정비에 모두 대서특필하였다. 그리고 비국의 계사와 후실의 일기에도 모두 실려 있으나, 직접 실록을 보니, 유문에서 고증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열성조의 사제문도 모두 옛 것을 살펴서 썼으므로, 지금에 따를 수가 없어서 그 전하는 것을 의심되는 것은 빼어놓고, 이에 황명 증요동백 여섯 글자만을 전액 및 비문의 머리에 써서 후세에 알린다. 다만 비문이 이루어진 것이 공이 돌아가신 것과 시기가 멀지 아니하였으나, 세계와 자손을 기록 한 것이 미비하여 추기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제 아울러 뒤에 기록한다.
공은 고려 충렬공 휘 방경의 11세손이다. 공은 만력 8년 경진년(선조 13, 1580년) 3월 3일에 태어나서 기미년(광해군 11, 1619년) 3월 4일에 돌아가셨다. 장손은 수사 세구이다. 아들은 음직으로 군수를 지낸 중우, 판서에 추증된 중정, 보덕을 지낸 중화, 중희이다. 중구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낸 유, 참봉 호, 숙, 통덕랑 순, 화천군 협, 통덕랑 정, 음현감 식, 부사 서이다. 유의 아들은 음직으로 현감을 지낸 주성이고, 주성의 아들은 경력 노행과 선전관 노정이고, 노행의 양자는 부총관 택기이다. 택기의 아들은 부사 선욱이고, 선욱의 아들은 부사 일구이고, 일구의 양자는 좌윤 동운이고, 동운의 아들은 광렬이니, 공에게 11세손이 된다. 지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비문이 완성되고 나서 200여년 뒤에 9세손 필구가 더욱 많은 노력을 들여 비로소 비를 세웠다.
 
숭록대부 전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우빈객 정기회가 추기하다.
 
추록은 다음과 같다.
 
휘 세성은 찬성에 증직되었고, 아들 중기는 훈장이고, 중기의 양자는 숙이고, 숙의 아들은 주극이다. 주극의 양자는 노덕이다. 노덕의 아들은 낙기와 양자로 나간 한기와 또한 양자로 나간 홍기이다. 낙기의 아들은 선계 · 선진이고, 선계의 아들은 종구이고, 종구의 아들은 동한 · 동우이다. 휘 중정의 양자는 협이고, 협의 아들은 부사 주은 · 내승 주한이고, 주은의 양자는 노겸이고, 노겸의 아들은 현감 효기이고, 효기의 양자는 군수 선문이고, 선문의 아들은 현감 항구이다.
휘 중희의 아들은 진사 명이고, 명의 아들은 주완이고, 주완의 양자는 노재이고, 노재의 아들은 내기 · 진기 · 병기이고, 병기의 양자는 선옥인데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자리에는 나가지 못했다. 휘 순의 아들은 주하로 양우에게 출후하였고, 주하의 아들은 노인과 양자로 나간 노종과 또한 양자로 나간 노겸이다. 노인의 아들은 상기 · 명기 · 충기 · 복기이고, 상기의 아들은 선모이고, 승지로 추증된 선응은 출후하였고, 선모의 양자는 승지 성구이고, 성구의 양자는 선전관 동진이다. 휘 정의 아들은 형우이고, 형우의 양자는 노종이고, 노종의 아들은 군수 문기이고, 좌참찬에 추증된 학기는 출후하였고, 문기의 아들은 수사 선경이고, 선경의 양자는 군수 필구이다. 휘 식의 아들은 주두이고, 주두의 아들은 음령 노관이고, 노관의 아들은 승지에 추증된 덕기이고, 혁기는 출후하였고, 덕기의 아들은 참판에 추증된 선찬이고, 부사 선행은 출후하였고, 선용도 출후하였다. 선찬의 아들은 동추 명구이고, 명구의 아들은 동영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자리에는 나가지 못했고, 동현은 출후하였다. 휘 서는 중삼의 양자가 되었고, 서의 양자는 복정에 추증된 양우이고, 양우의 아들은 승지에 추증된 노경이다. 노경의 아들은 참판에 추증된 협기 · 목사 용기이고, 협기의 양자는 좌윤 선용이고, 선용의 아들은 목사 봉구이고, 학구는 출후하였고, 한구는 선전관이다. 종중의 재물이 넉넉하지 못하여 지손들을 한결같이 다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개탄 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종중의 논의를 정하여 다만 7파의 사손만을 삼가 종파별로 법식에 따라 기록하였다.
 
후손 전부사 몽구가 삼가 기록하고,
전참판 동도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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