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역사연구회 철원 부사공파 묘역 및 유적지 탐방 - 김윤만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14-09-29 22:22 조회4,420회 댓글1건본문
안동김씨역사연구회 철원 부사공파 묘역 및 유적지 탐방
- 민통선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다 -
안동김씨역사연구회(안사연)는 지난 7월부터 2개월간의 홍보 및 준비기간을 거쳐 ‘민통선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2014. 9.20.(토)~9.21.(일)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및 동송읍 하갈리·양지리·동막리 등 민통선 일대에 산재해 있는 안동김씨 부사공파 선조님 묘역과 유적지를 탐방하였다.
부사공파 철원문중은 이 지역에서 500년 동안 세거·세장하고 있는 철원지역의 대성이다. 조선시대의 무벌 가문이라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덕수이씨를 들 수 있는데 우리 안동김씨에도 이에 버금가는 무벌 가문이 있는데 바로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장군의 철원 부사공파 가문이다.
조선조에서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분은 모두 9분인데 전장에서 순국하시어 충무공의 시호를 받으신 분은 이순신 장군, 진주대첩의 김시민(金時敏) 목사, 그리고 후금과의 심하 부차령 전투에서 순국하신 김응하 장군 이렇게 세분이시다. 이 세분은 또한 나란히 영의정에 추증되시기도 하였다. 우리 안동김씨 부사공파 무관반열이 조선후기 정치·군사·외교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뚜렷하지만 정작 역사학계는 물론, 우리 안동김씨 종인들조차도 이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부사공파 무인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번 안사연의 역사탐방을 기획한 것이다.
9월 21일 08:00 잠실종합운동장역 ①번 출구에는 ‘철원 역사탐방 안사연’이라 명찰을 붙인 뉴신명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봉회(鳳會) 대종회장을 비롯하여 강진·대구 등 경향각지에서 40여 종인이 탑승하였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기까지에는 상습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으나 다행히 포천 영중에서부터는 풀려 10:20 예정시간보다 다소 빨리 철원읍 화지리 산1-1 포충사(褒忠祠)에 도착하였다. 포충사에는 철원향교 전교와 포충사 원장을 역임하신 규장 전 부사공파 회장 등 철원 일가 분들이 커피와 음료수를 준비하시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포충사는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전국의 서원이 일제히 훼철될 때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은 47서원 중 한 곳인데 현재 동재와 서재 그리고 관리사를 건립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경내에는 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된 묘정비가 있는데 우람한 거북 좌대에 가첨석까지의 크기가 무려 397呝吝cm인데 숙종 9년(1683)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박세당(朴世堂)의 아들 박태유(朴泰裕)가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을 하여 건립한 것이다.
▲ 포충사
▲ 충무공 영정
▲ 충무공 위패
▲ 포충사 묘정비
▲ 묘정비 음기 일부
우리 일행은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선조 13년(1580~광해군 11년(1619)] 장군 불천위가 모셔져 있는 사우 앞에 도열하여 간소하지만 정갈하게 마련한 주과포로 고유제를 올렸다. 고유문은 다음과 같다.
요동백 충무공 참배 고유문 -방후손 영환(榮煥) 지음-
단기 4347년 9월 20일 안동김씨역사연구회 회원 일동은 요동백 충무공 할아버님께 아뢰옵니다. 충무공께서는 중국 명/청 교체기의 혼란한 중국 정세에서 광해군의 파병 명령으로 요동 심하 전투에서 순국하셨습니다. 광해군의 복심이 어떠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충무공께서는 신하된 도리로 임금의 명령에 충실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여 심하의 버드나무 아래에서 장렬히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의 상황은 뒤에 청나라가 된 후금이나 명나라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충신의 길이었습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할아버님께 요동백이라는 백작의 작위를 내려 주시었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무공의 시호를 내려 그 공을 치하하였으며, 충렬록을 간행하여 조선과 중국에 배포하였습니다. 조선시대 9명의 충무공 중 장렬히 최후를 마치신 세분에게만 영의정이 추증되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무공 김시민 장군, 그리고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 할아버님이십니다.
오늘날 이곳 할아버님 사당에 와서 보니 남북으로 갈린 우리 조국의 쓰라린 아픔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할아버님의 신도비는 마치 사격장의 표적같이 되었으며,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만 성묘할 수 있는 묘소도 여러 곳입니다. 근래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가 신기록을 갈아 치우는 관심 속에서 요동백 충무공 할아버님의 충절이 묻혀져 가는 아쉬움에 안사연의 여름답사를 이곳 부사공파 후손 묘역으로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사공파 후손들이 남북분단의 역사 속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묘소를 찾고 단장하여 왔습니다만, 아직도 할아버님의 위상과 업적이 현양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에 저희 안사연 회원들은 부사공파 후손들의 연혁과 업적을 조사·정리하고 발굴하여 무려 300여 쪽의 책자로 발간하였습니다. 모든 자료를 싣게 되면 천 쪽도 모자라지만 예산 관계상 목록만 추리고 중요한 자료만 수록하였습니다. 후일에 좀 더 자금이 모아지면 수 천 쪽의 장대한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되어 분묘와 비석을 찾아 다시 사초단장하며 그 기록을 새로이 쓰는 날이 오기를 할아버님 영전에 기원합니다. 저희 안사연 회원들은 앞으로도 묻혀져 있는 안동김씨의 훌륭한 역사를 찾아 갈고 닦아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요동백 충무공 할아버님께서도 이러한 저희들의 충심을 갸륵히 여기시어 안동김씨역사연구회가 좀 더 발전하고 영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도와주시옵기를 빌면서 간단한 주과포를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이렇게 고유제를 올린다음 11:00 동송읍 하갈리에 있는 김응하 장군의 묘소를 탐방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국보 제63호인 철조 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는 동송읍 관우리 450 도피안사에 들려 30분간 경내를 둘러본 다음 동송읍 내에 있는 갈비집 ‘금학’에서 명품 갈비탕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 도피안사
▲ 국보 제63호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점심식사를 마친 후 차창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철원평야의 황금벌판을 바라보면서 군 통제소에 도착하였다. 김응하·김응해 장군 묘역이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에 군 통제소에서 신원과 인원을 확인받은 다음 부대요원의 인솔 하에 출입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4:00 하갈리(군량동) 김응하 장군과 아우 어영대장 김응해[金應海, 선조 21년(1588)~현종 7년(1666)] 장군 묘역에 도착하여 먼저 좀 더 떨어진 곳에 모셔져 있는 김응하 장군의 묘소를 탐방하기로 하였다. 김응해 장군 묘역으로부터 오른쪽으로 500m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장군의 묘역으로 가는 길가에는 유하장군(柳下將軍)을 상징하는 듯 오늘도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우리 후손들을 열병하여 맞이해 주고 있다.
▲ 충무공 묘역 전경
선천부사를 역임하신 김응하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좌영장으로 명나라 파병군으로 출정하셨다가 사르후 전투에서 3천의 병력으로 6만의 후금 대병을 맞아 싸우시다가 중과부적으로 순국하시어 명나라 신종으로부터 요동백이라는 작호와 함께 백금을 하사 받으시고, 우리 조정으로 부터는 충무공의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증직되신 선조님이시다.
이곳 묘역은 4단으로 조성되었는데 가장 상단에 김응하 장군의 의관장묘, 2단에는 아버지 증 호조참판 김지사(金地四, 배위 선산김씨) 합장묘와 우측[돌아가신 분을 기준으로 표기함. 이하 동일함]으로는 요절한 둘째 아우 김응락(金應洛)의 묘, 3단에는 아들 전라우도수군절도사 김익련(金益鍊, 초배 및 계배 완산이씨)의 전·후분 묘, 그리고 4단에는 12세손 시종원 우시어(右侍御) 김문환(金文煥, 전의이씨)의 합장묘가 있고, 묘역 입구에는 6.25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이 비신(碑身)에 담고 있는 장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장군 사후 280년이 지난 고종 36년(1899)에 가서야 건립되었는데 총고 328员吗cm의 크기로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이유승(李裕承)이 글씨를 썼으며, 조희일(趙熙一)이 전액을 하였다.
▲ 충무공 신도비
▲ 신도비 음기 부분글씨
▲ 충무공(휘 응하) 묘소
▲ 충무공 묘비
▲ 증 호조참판 휘 지사 묘소
▲ 증 호조참판 휘 지사 묘비
▲ 증 호조참판 휘 극련 묘소
다시 온 길을 되돌아 김응해 장군 묘역으로 향한다. 길가에는 흰색 구절초 꽃이 탐스럽게도 피어있다. 어영대장 김응해 묘역은 멀리서 보아도 여러 선조님들의 묘를 합장하고 묘갈을 비롯한 석물들을 한데 모아 배치한 묘역으로 보인다.
▲ 어영대장(휘 응해) 묘역 전경
묘역 상단에는 통상 어장공이라고 불리시는 김응해 장군과 정부인 동주최씨 합장묘가 있다. 묘표를 살펴보니 사대모화사상의 표현인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지 않고 ‘조선국’이라고 당당하게 쓰여 있고, 배위이신 동주최씨의 품계를 ‘정부인’이라 하지 않고 그냥 ‘부인’으로 표현한 것이 특이하였다.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지 않고 ‘조선’으로 표기한 곳은 김중원(金重元)·김세성(金世聲), 그리고 ‘조선국’으로 표시한 곳은 김중기(金重器) 선조님 묘소가 더 있었다.
▲ 어영대장 묘비
▲ 어영대장(휘 응해) 묘소
다음 단 좌측으로부터 어장공의 아드님 증 호조참판 김극련(金克鍊, 배위 증 정부인 청송심씨)의 묘소와 김극련 선조님의 장손계 합장묘, 그리고 묘갈문 판독이 어려운 선조님 봉분이 있다. 김극련 묘표는 총고 228吷吕cm의 크기로 공의 현손인 김영우(金榮遇)가 비문을 짓고, 윤득양(尹得養)이 글씨를 써서 영조 37년(1761)에 세운 것이다. 장손계 합장묘에는 증 병조참판 김세장(金世章, 배위 증 정부인 성주이씨와 수원백씨), 증 병조참판 김중구(金重九, 배위 증 정부인 연산서씨와 전주이씨), 진사 장릉참봉 김준(金浚, 배위 공인 여주이씨), 통덕랑 김영우(金榮遇, 공인 평산신씨)와 김극련의 4자인 만호 김세웅(金世雄)의 영령이 봉안되어 있다.
세 번째 단에는 합장되신 선조님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우측으로부터 증 호조참판 김세장과 배위 증 정부인 성주이씨, 만호 김세웅, 전라도병마절도사 김중구, 진사 김준과 배위 공인 여주이씨 등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좌·우측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그 다음 열에는 망배단이 있고, 맨 앞 열에는 조선국 ‘어영대장 김응해장군 세장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앞 좌측에 김응해 장군 신도비가 파란 가을 하늘 속으로 날렵히 날아오를 듯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신도비는 총고 360呆吓cm의 크기로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박경후(朴慶後)가 글씨를 써서 숙종 10년(1684)에 세운 것이다.
이렇게 1시간동안 두 분 장군과 그 후손들의 묘역을 탐방하고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하갈리(여우산)에 모셔있는 김응하 장군의 배위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의 묘소로 이동하였다. 철원은 평야지대로 농로와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버스로 묘역까지는 못가더라도 인근까지는 갈 수가 있다. 묘역에는 호석을 두른 봉분과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측으로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 쌍이 서있다. 묘역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철원평야는 파란 가을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걸려 있고, 들녘에는 출렁이는 황금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16:20 하갈리(연주현)에 있는 김응하 장군 증조부이시며, 부사공파 철원 입향조이신 예조정랑 김인상(金麟祥, 배위 증 숙인 풍천임씨) 선조님의 묘소에 도착하였다. 파평윤씨 할머니 묘소에서 20분 거리인데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길다. 그러나 황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삼삼오오 짝을 이루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이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산길 소로로 약간 오르니 상단에 입향조 김인상 선조님 호석없는 쌍분 묘소가 있고, 하단에는 공의 장인 묘소가 역시 호석없는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봉분 전면에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측에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묘표는 비신 상부, 허리부분, 하단부에 총탄 상흔이 있고, 우측 망주석은 총탄의 상흔의 정도가 아주 극심하였다.
다시 들어왔던 도로로 나와 5분정도 더 걸어서 들어가면 좌측에 두 분 선조님의 묘역이 있다. 묘역 상단에는 김정(金瀞, 배위 공인 함평이씨) 선조님 묘소가 있고, 하단에는 공의 5대손이신 가산군수 겸 가산진병마첨절제사 김필구(金弼求, 배위 숙부인 해풍김씨) 선조님의 묘소가 있다.
이곳 묘역에서 좌측으로 가면 지척에 김응하 장군의 조부이신 병조정랑 김인(金軔, 배위 증 숙부인 순흥안씨) 선조님의 묘소가 있다. 묘는 호석을 두른 쌍분이고,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혼유석은 없다, 좌측에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 쌍이 서 있다. 이곳 묘표 역시 총탄에 비몸의 옆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많은 총탄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17:00분 하갈리 소재 묘소 탐방을 마치고 버스로 이동, 양지리 군 통제소에서 다시 신원 및 인원 확인을 한 다음 17:20 토교저수지에 도착하였다. 토교저수지는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들의 낙원으로 철원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는 버스에서 내려 20분정도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토교저수지 상류를 돌아 들어가면 남향한 산록에 김응해 장군의 증손자이신 삼도통제사 김중원(金重元, 배위 정부인 평양조씨)의 묘소가 있다. 묘역 상단이 김중원 선조님의 묘역인데 호석이 없는 합장묘로 전면에 혼유석·상석·향로석·족석이 있고, 좌측에 묘표가 있으며, 좌·우측에 동자석과 망주석이 각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묘하에도 부사공 후손의 묘가 있다.
▲ 토교저수지
이렇게 하여 18:00 오늘의 탐방일정을 모두 마쳤다. 저녁식사와 숙소는 고석정에 있는 드림파크인데 안내를 잘못하여 시간을 많이 허비하였다. 20:00경 드림파크에 여정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와 버섯전골에 소주 한잔씩 곁들여 먹는 식사가 푸짐한 잔치가 부럽지 않았다.
9월 21일 황태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08:00부터 오늘 일정을 시작하였다. 시작은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철원팔경 고석정이다. 지층의 단절로 협곡을 이룬 강 한가운데에 10m나 되는 고석암이라는 바위와 강과 계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다음은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 선조님 묘소를 탐방하러 가는 도중, 철원팔경의 하나인 동송읍 양지리의 칠만암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칠만암은 한탄강 지류인 칠만강 바닥에 현무암과 화강암으로 칠만가지 형상으로 빗어진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 그리고 옥같이 흐르는 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이곳을 탐방하고자 하는 까닭은 김응하, 김응해 두 형제분이 함께 무예를 닦으시고, 화살보다 빨리 달린 말을, 화살보다 늦게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여 애마를 베어버린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만암을 찾아내려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원래 이곳 사람들이 칠만암을 찾아가려면 절벽을 피해 하류로 내려갔다가 다시 칠만암으로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그래서 칠만암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쪽에서 내려가는 길을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 간신히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급경사 길을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디디며 내려가 보니 금강산을 삽으로 똑 떼어다 수반 위에 얹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오늘 아니면 언제다시 이 칠만암에 올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우리 일행은 한동안 칠만강 속에 빠져 있었다.
다시 우리 일행은 철원평야 드넓은 벌판을 지나 10:00 갈말읍 동막리(능내) 군부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요즘같은 엄중한 시기에 민통선과 연해있는 군부대를 방문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아무리 묘소를 참배하려는 후손들이지만 다수인의 출입이 쉬울 수만은 없다. 30분 이상 지체된 가운데 가까스로 허가를 얻어 부대요원들의 안내 하에 먼저 찾아간 곳이 김응하 장군의 둘째 아들 증 좌승지 김시련(金時鍊, 배위 증 숙부인 청해이씨) 선조님의 묘소였다. 좌승지공의 묘소는 호석이 없는 합장분이다. 전면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족석이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쌍이 배치되어 있다. 묘표는 손자인 김중기가 비문을 지었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은 같은 경내에 있는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 배위 정부인 연안이씨) 선조님의 묘소이다. 공께서는 숙종 2년(1676) 무과에 급제하시어 삼도수군통제사·훈련대장·총융사를 역임하셨다. 짧은 언덕길이지만 급경사라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니 묘역에는 호석이 없는 합장분과 전면에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 묘표가 있는데 옥개석이 없이 좌대에 비신만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묘표의 글씨는 공의 8세손 김영수(金榮壽) 공이 썼다. 공의 묘역은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에서 사초도 하면서 묘역을 돌본다고 한다. 아마도 부대장이 같은 무인으로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공의 묘소를 돌봐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이렇게 30분 가까이 두 분 선조님 묘소를 탐방하고 나서 11:00 또 인근 군부대 경내에 있는 김중기 선조님의 아버지 첨지중추부사 김세성(金世聲,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 선조님의 묘소를 탐방하였다. 이곳은 앞의 군부대에서 보다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겨우 허가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묘역을 찾아갈 때 좀 더 빨리 올라갈 요량으로 직선거리로 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이 없는 산록을 가시나무에 찔리면서 고생한 끝에 찾아 올라간 곳에 깨끗하게 단장된 묘소가 하나 나타났다. 묘소는 호석이 없는 합장분으로 전면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 묘표가 있다. 김세성 묘표는 총고 239吼吔cm의 크기로 공의 손자인 김숙(金潚)이 비문을 짓고, 전면은 박태유의 글씨를 집자하고 뒷면글씨는 박태유의 아들 박필모(朴弼謨)가 써서 숙종 44년(1718)에 세운 것이다.
이상으로 안동김씨 부사공파 철원지역 묘소 및 유적지 탐방을 모두 마쳤다. 모두의 가슴에는 이번 탐방을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이 넘쳤고, 이렇게 훌륭한 선조님을 둔 우리 안동김문에 대한 자랑스러움, 자부심이 생겨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선조님들의 행적과 치적을 널리 현양해야 할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국조장신록에 올라 있는 김세익·김흡·김선필 이 세분의 묘소가 동송읍 이길리 비무장장지대(DMZ) 북방한계선내에 위치하여 친견(親見) 할 수 없었다. 신도비 등 석물과 묘소는 잘 보존 되어있는지 궁금한 생각을 하며 통일 이후에는 우리 안사연 후배들이 다시 한 번 답사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길 기대해 본다.
13:00 옛날순두부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원래 예정대로라면 노동당사, 승일교, 백마고지, 직탕폭포, 삼부연폭포 등을 관광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오늘은 일요일 교통체증을 고려하여 점심식사를 마친 후 바로 귀경길에 올랐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 이번 행사에 처음 참석한 종인들을 위해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에 소재한 문온공파 금수단에 들려 양간공 승택(承澤), 상락군 묘(昴), 문온공 척약재 구용(九容) 선조님 단소에 참배한 후, 문화재자료 제138호 안동김씨 고가인 옛 백운루(白雲樓)를 둘러보고, 향토유적 제18호 금수정에 올라 아름다웠던 옛 영평천을 상상해 보며, 김구용 시비, 양사언 시비 앞에서는 돌에 새겨진 시문의 설명을 잠시 듣는 시간을 갖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 138호 안동김씨 고가
▲ 향토유적 제 18호 금수정
▲ 양간공 승택(承澤), 상락군 묘(昴), 문온공 척약재 구용(九容) 선조님 단소인 금수단
그런데 추석명절 밑이라 그런지 교통체증없이 18:00 예상시간보다 빨리 서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1박2일을 함께한 종인들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 송파 방이동에 있는 이름난 맛집 남원추어탕에서 저녁식사와 함께 일정 중 마지막 뒤풀이를 하였다.
이번 일정을 마치면서 부사공파 철원문중을 돌이켜보면 무과 급제자가 모두 107분이나 된다. 증직으로는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 장군이 영의정에 오르셨고, 32분이 2품 증직으로 판서·참판에 올랐으며, 실직으로 2품이상 오른 분은 어영대장을 지낸 김응해 장군을 포함하여 28분이며, 수사·영장·부사 등 정3품 이상 관직은 42분이다. 이 밖에도 정3품 이하의 군수 등 다수의 무관직 벼슬을 무수히 배출하였고, 국조장신록에도 5분이 올라있어 명실 공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벌 가문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부사공파가 무인 집안이라고 해서 문과 급제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과에 급제하신 분도 6분이나 계신다. 그 중에서도 안동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하신 김유(金濰) 선조님은 1739년에 발행한 기미보 편찬에 관여하면서 서문을 지으셨고, 또 안동부사 시절에는 영호루의 충렬공 시판을 새로 걸기도 하였다.
끝으로 이번 행사에 참여해주신 많은 종인들게 감사드리며 특히 후원금을 보내주신 여러분과 안동김씨대종회 · 익원공파 수원참의공종중 · 기념타올을 보내주신 군사공파 김재하 감사님, 기념모자를 보내주신 문온공파 김재호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이번 행사에 함께하신 종인들은 다음과 같다.
개성윤공파 : 이경·대욱
군사공파 : 발용·임수경·재이·홍인숙·태우·태영·장묵·중묵
문온공파 : 왕김숙·태연·김영자·영환·재만·영국·재호·윤만·수길·계만·영윤·상대
도평의공파 : 봉회·이순남·영회·학회·정병문(연일)·이인희·김우회
안렴사공파 : 춘식·진회
익원공파 : 재영·수목·태철·최순옥·춘식·경식·재용
서운관정공파 : 돈영·철호·규은
부사공파 : 원호·규장·재정·규세·태형
-이상 46명-
<글 윤만. 사진 발용>
댓글목록
김태철님의 댓글
![]() |
김태철 |
---|---|
작성일 |
사진과 글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