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향토지 내 낙흥부원군 자점 공 관련 설화 및 기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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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15-02-02 10:20 조회1,929회 댓글0건본문
김자점(金自點)의 탄생 설화
예로부터 낙안에 전하여 오는 전설에 의하면 김자점에 대한 전설이 많다.
옛날 낙안 고을에 해마다 15살 가량의 처녀를 제물로 받쳐야만 고을이 무사하다 하여 제를 지내 오고 있었다.
김자점의 부친이 낙안 고을 사또로 부임하여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제물을 바치던 당(堂)집을 헐어 버렸다.
이때 찬바람이 일어나며 커다란 지네란 놈이 대들보에 메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놈의 조화로구나」하면서 사또가 칼을 빼어 지네를 마디마디 토막을 내어 버렸다.
본시 지네란 놈은 몸이 끊어져도 다시 살아나는 놈이라 하여 후환을 없앨 요량으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끓이게 하여 죽여 버렸다.
그런데 지네를 토막 낼 때 사또의 두 눈 사이에 지네 피가 튀어 얼룩져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 지지 않아 몹시 불쾌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지네 피의 얼룩이 자연이 없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수태를 가졌다고 한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 아이였다. 기상이 출중하고 늠름한데다 총명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미간에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지네 핏자국의 얼룩 그대로였다.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불길한 징조인지 몰라 궁금해하면서도 아이가 너무나 영특하므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지냈다.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후에 자점은 일국의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결국 역모를 꾀하다 처형되었다. 그의 집이 있었던 곳은 역적의 집이라 하여 소(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은 저수지로 개축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마을을 못등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낙안 땅이었으나 지금은 벌교읍에 속해 있다.
김자점(金自點) 장군 2
김자점과 임경업의 만남은 묘한 악연(惡緣)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전설에 의하면 김자점은 낙안에서 태어났으며(1588∼1651)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낸 것과(1626∼1628)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가 등극하여 이괄의 난(1624)을 평정하는데 둘 또한 큰 공헌을 하였다.
1635년 당시 명나라가 쇄하고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하여 가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군신 관계로서 추종하도록 강요하여 왔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오랑캐로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청은 12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때 (1635년 병자호란) 김자점은 도원수였고 임경업 장군은 의주 부윤이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운명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감자점은 인조와 후궁 조귀인의 막강한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청과의 화친할 것을 간청하였고 임경업 장군은 그동안 명과 지내 왔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고 명과 내통하게 된다.
결국 임경업 장군은 청군에 포로가 되었고 조선에 송환되어 친국을 받던 중 김자점의 사주를 받은 형리들에 의하여 장살(杖殺)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 뒤 효종이 등극(1649)하자 1651년 조귀인과 짜고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그의 아들과 함께 결국 처형되었다.
이처럼 그들의 만남은 악연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자 그의 집터를 소(沼)를 만들었다 하는데 지금의 보성군 벌교읍 원등리 못등(옛 낙안)에 있는 못이 바로 김자점의 집터라 한다.
또한 그의 선친 묘 역시 옥산(玉山)아래 있는데 최근까지 큰 소(沼)로 남아 있어 여름철이면 이곳에 사람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빈번하여 주민들에 의해 메워지고 지금은 논으로 일구어져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김자점은 낙안 제석산의 정기를 받아 옥산 아래서 태어났으며, 김자점의 부친이 옥사장으로 있었는데 마침 사형을 당할 뻔한 선비 두 명을 구하여 주었다.
그 선비들이 은공을 갚고자 불재 넘어 범들(널박골)에 묘 자리를 잡아 주며 묘를 쓸 때 하관 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한다.
그러나 김자점의 부친은 궁금하여 하관하는 모양을 몰래 지켜보았다. 이 때 불을 밝히고 있던 한 귀(貴)동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김자점이 태어났고 나중에 역모 사건의 주범이 되었다 전한다.
화禍를 면한 변卞씨집김자점 처가
들려주신 분 : 김동순
김자점의 부인이 변(卞)씨로 처갓집이 장성이라고 한다.
김자점이 선을 보고 나오는데 처가집에서 김자점에게 이르기를 앞으로 처갓집에 오지도 말 것이며 서찰을 보낼 때에도 나무판에 글을 쓰되 곧 태워버리라고 일렀다. 이유인즉 청혼을 하고 나가는 김자점의 등에 임금왕(王)자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상(像)을 보니 앞으로 크게될 인물이지만 반면에 좋지 못한 일이 분명할 것이라 여기었던 것이다. 그 후 혼인을 하고 김자점은 벼슬길에 나가 순풍에 돛단배처럼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달리었다.
그 후 김자점이 역모에 가담하여 처형되었으나 당시 역모가 연루가 되면 중죄로 다스려 처가집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때인데 다행히 처갓집은 화(禍)를 모면하였던 것은 서로 왕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 연락을 단절하고 소식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자점(金自點) 장군과 옷고름김자점장군은 인조가 왕권을 효종에게 물려주고 나자 권세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동안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의 후광을 받아 권세를 누려 왔는데 이제 조귀인도 효종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였다.
위기감을 느낀 자점은 조귀인의 아들 숭선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역모를 도모하다가 그만 역모가 탈로나 광영현으로 귀양을 오는 도중에 향리인 낙안집에 들려 부인에게 옷가지를 챙겨 가는데 부인이 옷고름을 달지 않고 주자 옷고름을 달아 달라고 하였다.
부인은 이를 거절하며 대감께서는 분명 옷고름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길 것이니 그냥 가는게 좋다고 하자 김자점은 일국에 영상까지 지낸 사람이 체통 없이 어떻게 옷고름이 없는 옷을 입느냐고 하며 기어이 옷고름을 달아 달라고 했다.
부인은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감께선 옷고름 때문에 뒤에 크게 후회할 일이 있을 거라며 옷고름을 달아 주었다.
김자점은 옷을 갈아입고 나서 자기를 호송하여 왔던 병사들을 피하여 낙안 객사 대들보 위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옷을 가지러간 김자점이 도망간 사실을 늦게서야 알게된 병사들이 김자점을 찾으러 다니다가 찾지 못하고 낙안 객사 마루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 때 대들보 사이로 왠 옷고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옷고름 때문에 김자점은 잡히게 되었고 결국 참형을 당하였으며 그의 집은 소(沼)로 만들었다 전한다.
못 등「지동(池洞)」의 유래
조선 인조 때 권문세가였던 김자점(金自點 1588∼1651 영의정)의 후광을 받아 치부하고 세도를 부리던 동생(이름 미상)이 이곳에 살았으나, 그의 형이 1651년 역모로 귀양가서 죽을 때 역적의 집안이라 하여 김자점 동생 집을 헐고 연못을 팠다고 한다.
그 못의 위아래 거리가 약 50m 가 된다 하니, 그 당시 그의 집이 웅장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얼마만큼 세도를 부렸는가를 짐작 할만하다. 그리고 옥산 옆에 김자점의 선산이 있는데, 묘 앞의 넓은 돌이 용상(왕을 상징)바위라 하며 이로 인해 역적이 났다 하여 그의 묘를 팟는데 그 주변의 흙이 지금도 검게 나온 다고 한다.
그 뒤로 하송마을 뒷산에 있는 묘 역시 어디론가 파가고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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