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향토지 내 낙흥부원군 자점 공 관련 설화 및 기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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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15-02-02 10:24 조회2,078회 댓글0건본문
김자점(金自點)
김자점은 우리고장 출신으로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온다.
현재 벌교읍 원동리(못 등)저수지가 그의 집터였다고 하며, 지금은 메워지고 없지만 옥산 앞 광소(鑛沼)가 그의 부친 함(할아버지, 억령=億齡)의 묘였다고 하며, 역모로 몰리자 그의 집터와 부친의 묘를 파헤쳐 소(沼=연못)로 만들어 버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낙안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 볼 수가 없고 다만 구전으로 전하여 올 뿐이다.
아마 역적으로 몰려 그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삭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서 김자점에 대해서 알아본다.
김자점(1588~1651) 선조21~효종2년 조선중기 문신으로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음보(音譜)로 등용되어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광해군 말년에 대북파에 의해 쫓겨난다.
한편 명나라에선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한다. 이에 명나라에서 지원병을 요구해 왔으나 후금이 중립을 지켜줄 것을 조선에 요구한다. 이에 광해군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명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홍립에게 명의 요청을 따르되 상황을 보아 신중히 처리하라고 이른다.
1622년(광해군14년) 김자점은 이귀(李貴), 김류, 신경진, 최명길, 이괄(李适)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계획하고 이듬해(1623) 3월 12일, 홍제(弘濟院)에서 이귀, 이괄 등과 합류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1624) 인조를 왕에 추대하는데 실제 주도한 사람은 능양군 자신으로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다. 그 공으로 호조(戶曹佐郞)에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진하고 정(靖社功臣) 1등이 되었다.
한편 1624년 인조 반정 때 큰 공을 세워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자신이 2등 공신으로 추대 받아 외지인 북방 수비대로 보낸데 앙심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킨다.
이때 인조는 궁을 버리고 피난까지 가야했던 치욕을 겪었으며, 이에 김자점, 임경업 등이 이괄의 난을 평정하였는데 3일 만에 끝이 났다.
후금에서는 누르하치가 전쟁에서 죽고 태종이 왕권을 잡고 국호를 청나라로 불렀다. 청나라는 광해군의 축출에 트집을 잡고 조선을 침략하니 바로 정묘호란(1626년)이다. 인조는 청에 항복하고 형제의 의로 나갈 것을 약속한다.
그 후 청나라는 정묘호란 때 조선과 맺었던 모든 약속들을 파기하고 이어 군신 관계로 나갈 것을 요구하며 황금과 백금 백만냥, 전마 3000필, 병사 3만을 요구하여왔다. 조선은 이에 부당함을 알리고 대항할 것을 계획한다. 이에 청나라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공략하니(1636) 병자호란이다.
청군은 쉽게 조선을 장악하고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항복함으로서 일단락 되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일질로 끌려갔으며, 명과의 연을 끊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로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한편 김자점은 이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토산(兎山)싸움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외딴섬에 유배 되었다가 1639년 풀려나와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가 되었고, 이어 그의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딸)와 혼인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으며, 1642년(인조20)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때 같은 공서(功西=서인 일파)인 원두표(元斗杓)와의 세력 다툼에 의해 서인이 양분 되었으며, 낙당(洛黨)의 영수로서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1644년 좌의정에 올라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昭顯世子嬪) 강씨를 죽이려는 것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투입하여 그 혐의를 강씨에게 뒤집어 씌워 강씨를 죽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모두 제주(濟州)에 귀양보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김(金慶錄), 송준길(宋浚吉)이 효종에게 상소하여 이들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만다. 그로 인해 조정에 앙심을 품고 기회만을 엿보던 중 효종이 겉으로는 청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지켰으나 은밀히 김상헌(金尙憲)을 중심으로 청나라를 칠 기회를 노림을 알게 된다.
본래 친청파(親淸派)였던 김자점은 이 사실을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쓴 사실들을 고했다.
이에 청나라에서 군대를 국경지대에 급파하고 사신을 보내어 사실을 추궁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노력으로 일이 일단 수습되었으며 권력에서 물러난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이였던 조귀인(趙貴人)의 아들 숭선군(崇善君)을 왕위에 옹립하고자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1651년(효종21) 12월 진사(進仕) 신호(申壕) 등이 이 일을 상소하여 탄로났다.
이에 효종은 인정문(仁政問)에서 김자점의 아들 김익을 붙잡아 신문하자 김익은 모든 것을 실토하였다. 또한 조귀인이 자기 며느리 신씨(申氏) 숭선군의 아내를 저주(詛呪)한 사건이 일어나 효종이 조귀인을 사사(賜死)하고 김세룡(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을 국문(鞠問)하여 처형하게 된다. 김자점은 전라도 광영현으로 귀향을 보내지고 그후 그를 처형하라는 상소가 빗발치자 그를 사형하고 그 일문의 토지를 모두 몰수함으로서 김자점 일파를 완전 제거하고 만다.
김자점에 대해 몇몇 문헌을 봐도 그의 출생지가 불문명하다.
전설대로 그의 출생지가 이곳 낙안이라고 한다면 역사이래 이보다 더 큰 벼슬을 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안다.
아무리 그가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런 정치인들이 하나 둘이 아님을 볼 때 이분 또한 낙안의 큰 인물이였다고 생각된다.
※ 호가 낙서(洛西=낙안을 뜻함이 아닐런지)인 것으로 보아 낙안인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옥산리玉山里
낙안면 옥산마을은 지금부터 250년전(1735년경) 하동 정씨(鄭)에 의해 마을이 생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1397년 낙안읍성을 최초로 토성으로 쌓은 김빈길 장군이 태어난 마을로(온야=낙생동) 주변에 고인돌군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낙안군 읍내면에 속하였으나 1908년 융희2년에 순천군에 편입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서동, 녹동, 온야 마을을 합하여 낙안면 옥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옥산(63m)에서 옥(玉)이 난다 하여 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위치는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지점에 위치하고 마을 왼쪽에는 덕천마을이 있고 오른쪽엔 벌교읍 원등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마을 뒤 산넘어 벌교읍 지동리가 있다.
또는 산이 조그맣고 아름답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본래 마을이 있었던 곳은 옥산리 168번지 부근이였다 한다. 1910년(庚成年) 수해로 인해 마을이 물에 잠기자 마을을 옮겨 서동, 원동마을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서쪽엔 백이산이 있고 옥산에서 자라는 시누대는 곧고 질이 좋아 조선조 때는 화살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을 하였다 전한다.
마을 앞으로 낙안천이 흐르고 낙안 들이 널따랗게 펼쳐지며 일제시대 때는 옥산에서 많은 양의 흑연을 채굴하기도 하였다는데 지금도 그때 채광을 하였던 굴들이 남아 그때를 말하여 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옥산이 옛날 백이산에서 떨어져 나와 벌교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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