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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諱 閼智)할아버님 呼稱(官職名)에 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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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5-02-11 12:21 조회2,183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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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諱 閼智)할아버님 呼稱(官職名)에 대한 考察
                                                                                      金榮換(문온공파종회장,안동김씨역사연구회장. 충렬공 21대손)
 
우리 김문의 시조(始祖)이신 휘 알지(閼智)할아버님에 대하여 안동김씨문중에서는 계속하여 태보공(太輔公)으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는 잘못된 칭호라는 지적도 있었고, 경주 계림 위패에도 大輔公이라고 씌여 있으며, 경주김씨를 비롯한 타 김씨(신라김씨)는 大輔公이라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문중으로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太輔公이라는 호칭이 아무런 잘 못이 없다면 당당히 써야하며, 또 이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며, 만약 틀린 호칭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고쳐 부르는 것이 후손된 도리로서 당연할 것이라 생각되어 부족하지만 이에 대해서 논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안동김씨문중에서 사용하고 있는 태보공(太輔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우리 문중기록중에서 가장 오랜 기록인 경진보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습니다.
 
庚辰譜는 선조 13년 서기 1580년에 간행된 현존하는 최초의 안동김씨족보입니다.
여기에 서문을 읽어보았으나 시조(휘 알지)할아버님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런 기록만 있습니다.
(吾金氏自新羅敬順王之後世爲卿相至上洛公功名事業....이하 생략)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修撰官知製敎 億齡 謹序
 
 
己未譜(영조5년 서기 1739년 단기4072년)
서문중에(전략 ....我安東之金系出新羅上洛忠烈公卽敬順王十五世孫也..후략)
忠烈公13世孫資憲大夫知中樞府事九十歲 鍰(환)謹序
安東金氏世系原流
金閼智 전략.. 初冊爲太子進太輔授國政後讓位...하략
 
 
戊戌譜(정조2년, 서기1778년 단기4111년)
서문에(易曰物大然後可觀其惟我金氏之謂乎天之將啓我金也實誕金櫃之異人於焉爲一千年..하략)
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叅贊官春秋官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光國謹序
 
乙酉譜 (순조25년 서기1825년)
金禹元선조께서 쓰신 서문중에 太輔公이라고 쓰셨습니다.
(전략.....我始林之金鼻厥初而太輔公蔫生裔新羅而...후략)
通政大夫折衝將軍龍驪尉副護軍兼五衛將不肖後孫禹元謹序
 
제가 찾아낸 기록중에 가장 오래된 기록이 기미보(1739년)에서 안동김씨세계원류 시조(김알지)께서 태보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고 그후 을유보(1825년)에 김우원 선조께서 쓰신 서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壬寅譜(서기 1902년 단기4235년)
을유보에 이어서 규묵씨가 쓰신 서문에 (전략....吾金始於太輔公中於忠烈公..후략) 忠烈公二十二世孫圭黙謹序 라고 되어 있어 을유보를 답습하여 [太輔公]이라고 계속되어 집니다.
 
乙亥譜(서기1935년 단기4268년)
外部主事 文演씨께서 서문을 쓰셨는데 시조할아버님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범례 에 살펴보면 1.太輔公爲閼智爲姓金之初...이라는 기록이 있어 계속 [태보공]이라고 칭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己未大譜(서기1969년 발행) 首券
1. 89쪽 原流考證太補公金櫝之說 非出於脫解王當時也 - 이하 생략
 
2. 93쪽 太補公 事實……東國通鑑曰 昔脫解 得金閼智於鷄林 養於宮中 拜爲太補....94쪽 (譯)번역문...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되 석 탈해(昔脫解)가 김 알지(金閼智)를 시림(始林)에서 얻어 궁중(宮中)에서 길러서 태보(太補)로 삼았다.
3. 284쪽 王世系年譜....謹按始祖誕生於脫解王昔氏卽位之九年漢光武中元二年得姓金氏名以閼智官至太補……삼가 생각건대 시조(始祖)는 탈해왕(脫解王) 석씨(昔氏) 즉위(卽位) 9년 한광무(漢光武) 중원 이년(中元二年)에 탄생(誕生)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고 이름을 알지(閼智)로 지어 벼슬이태보(太補)에 이르렀다.
漢光武中元二年丁巳脫解王昔氏繼儒理王朴氏而立九年乙丑(明帝永平八年)太補公金閼智誕生
……한광무(漢光武) 중원 이년 정사(中元二年丁巳)에 탈해왕(脫解王) 석씨(昔氏)가 유리왕(儒理王) 박씨(朴氏)를 이어 왕(王)이 된 지 구년 을축(九年乙丑) 명제(明帝) 영평 팔년(永平八年)에 태보공(太補公) 김 알지(金閼智)가 탄생(誕生)하였다.
 
4. 安東金氏大同譜上系編 上編
1쪽 始祖 金閼智 新羅太補國相 追封世祖大王
 
5. 사진41쪽경주 계림의 사당에 모셔진 위패사진을 자세히 보면 [鷄林大輔公]이라고 되어 있음이 확인되고,그 밑에 설명문에는 金氏始祖大王 諱 閼智位牌라고 되어 있음을 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동김문의 기록을 살펴본바에 의하면 太輔公이라는 호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己未譜(1739년)와 乙酉譜 (서기1825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미보, 을유보에서 선조님께서 어떤 근거로 태보공이라고 쓰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후 모든 족보에서 이를 답습하여 계속하여 태보공이라고 호칭하여 왔음을 알 수 있고
최근에 발행된 기미대보나, 각 파의 파보에서도 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 볼 수 있습니다.
 
태보공(太輔公)이라는 관직명이나, 호칭이 있나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태보(太輔)
 
[야후] 백과사전 太輔--자료 없슴 太保에 대한 자료로서 삼사 ( 三師 ) 고려시대 태사(太師)․태부(太溥)․태보(太保)의 총칭.
[다음]太輔는 기록 없슴, 태보 [太保] ; 고려시대 태사(太師)․태부(太溥)․태보(太保)의 총칭.
[엠파스]太輔에 대한 기록 없음. 太保에 대해서만 기록이 있습니다. 太保;고려시대 태사(太師)․태부(太溥)․태보(太保)의 총칭.
위와 같이 검색싸이트에는 [太輔]라는 설명을 찾을 수 없어서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만든
[디지털한국]에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太輔 기록 없음. 太保에 대한 기록만 있음
[한국역사정보시스템]太輔 기록 없음[한국문집총간]太輔 자료 없음
[국가지식정보통합]太輔 자료 없음
[삼국사기]자료없음 [고려사] 자료 없음. [조선왕조실록] 자료없음.
[동국통감]자료없음. [동사강목] 자료없음
위와 같이 인터넷 검색이나 역사정보씨스템에서 검색하여도 [太輔]라는 호칭을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대보[大輔]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후백과사전]
대보(大輔)고구려․신라 초기의 관직. 국정을 총괄하는 재상의 기능을 수행했다. 중국에는 없었고 고구려․신라에만 있었던 관직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존재했던 고유의 관직을 후세에 한식(漢式)으로 표기한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유리왕 때 협부(陜父)가 대보의 지위에 있었는데, 후에 대보는 좌보(左輔)․우보(右輔)로 나뉘었다가 다시 국상(國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라에서는 남해차차웅 때의 탈해(脫解)와 탈해이사금 때의 호공(瓠公)이 대보의 지위에 있었는데, 탈해이사금 이후로는 그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이벌찬․이찬 등이 대보의 임무를 계승했는데, 이는 점차 족장층의 관료화와 관직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치․행정․군사권이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역사서(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동국통감, 동사강목)에서 찾아보았습니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7년(서기 10) 가을 7월에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무(軍務)와 국정(國政)을 맡겼다.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 (주*1)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신라 제2대왕 재위 4~24
성은 박씨. 혁거세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고,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누이동생으로 아로(阿老)가 있다. 차차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왕은 남해왕 뿐이며 《삼국유사》에는 거서간(居西干)과 동격의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巫)를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해왕 때는 정치 수장적 성격보다는 제사장적 기능이 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기 6년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우고 8년 가 어질다 하여 맏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또 대보(大輔)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14년 왜(倭)와 낙랑(樂浪)의 침입을 막았으며, 재위 21년에 죽어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三國史記,三國遺事,新羅上古世系의 再構成試圖(金光洙, 東洋學 3, 1973
 
2)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탈해를] 또는 토해(吐解)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昔)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맡겨두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다다랐다.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39년 되는 해이다. 그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줄로 끌어 당겨서 해안에 매어놓고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기가 하나 있어 그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아홉 자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고 환했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 아이의 성씨를 모르니, 처음에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그것을 따랐으므로 마땅히 작(鵲)에서 [조(鳥)를] 생략하여 석(昔)으로써 성을 삼고, 또 궤짝에 넣어둔 것을 열고 나왔으므로 마땅히 탈해(脫解)라 해야 한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한 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하여 공명을 세워라."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지리(地理)까지도 겸하여 알았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그곳을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은 후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왕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7년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이 장차 죽을 즈음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왕(先王)이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이나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고 또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땅히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어야겠다. (주*2)
脫解尼師今 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卵寶物置於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 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而出 宜名脫解"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爲大輔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 是以寡人先立 今也宜傳其位焉"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80 신라 제4대왕 재위 57~80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부왕(父王)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년에 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의 자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서기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서기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 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하여 이후 4, 5회 공격해왔다.(주*3)
서기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주*4)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서기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 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서기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三國史記;三國遺事;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韓國家族의 史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0)
 
3)삼국사기 신라본기
< 유리이사금>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앞서 남해가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
임금의 자리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시험해보자.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尼師今)이라 불렀다. 옛부터 전해져오는 것이 이와 같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 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多齒" 試以餠三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4)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 이사금>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미추(味鄒)를] 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주*5)
味鄒尼師今立 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出於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
 
 
5)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 유리명왕
<유리명왕>
22년(서기 3)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에 왕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대보(大輔)협보가 간하였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형정(刑政)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하러 나가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만약 [왕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신은 정치가 황폐하고 백성이 흩어져서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왕은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빼앗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주*6)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11)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墜地󰡓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6)고려사
고려사 > 卷九十五 列傳 卷第八 > 諸臣 >
최충 [崔冲]
전략--문종 22년(1068)에 죽자 왕이 태의감(太醫監) 이염(李塩)을 통해 조서를 내려서 아들 최유선(崔惟善) 등에게 조문했다.
“경의 부친은 사람 가운데 봉황새처럼 얻기 어려운 현자였으며 조정 고관대작들의 귀감이었다. 나라를 향상시킬 훌륭한 문장으로 일찍 재상[대보]의 자리에 올랐고, 두고두고 되씹어야 할 위대한 계책들을 떨침으로써 역대의 임금을 도와 왕업을 크게 떨치게 하였으니 아름다운 그 공적은 역사에 빛날 것이다. 그리고 시중의 높은 지위에 올라 그 남은 경사를 장성해 벼슬사는 자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주*7)
二十二年卒, 王遣太醫監李塩, 下詔弔其子惟善等曰, “卿父, 人中威鳳, 朝右元龜. 抱變齊至魯之文章, 夙登大輔, 振咀業呑黁之謀畫, 歷贊昌辰, 懿厥績, 庸光于編冊. 迨其蟬璫遺慶, 附諸冠子冕孫. 鳩杖退閑, 樂乃琴墳笙典. 臥扶宸極, 蔚爲干木之偃藩, 坐奠夢楹, 忽感宣尼之摧棟. 顧百身而難贖, 傾萬乘以荐悲. 卿等, 橫遘家艱, 尤深宅恤. 宜勉孝追之禮, 莫興過毁之哀.”
 
고려사 > 卷九十五 列傳 卷第八 > 諸臣
김한충(金漢忠)은 신라의 대보(大輔)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고조인 김유렴(金庾廉)이 경순왕을 따라 태조에게 귀부하여 공신이 되었다. 김한충은 젊어서부터 생김새가 웅위했으며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하였다. 선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해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상경차도위(上輕車都尉)가 된 뒤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 지금의 평안북도 해주군)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가혹하게 다스리지 않아 백성들이 그를 존경했다.--하략 (주*8)
金漢忠, 新羅大輔閼智之後, 高祖庾廉, 從敬順王, 歸太祖爲功臣. 漢忠, 少雄偉, 力學登第. 宣宗朝, 官累閤門引進使·上輕車都尉, 出守安西都護府, 爲政不苛, 民慕之. 하략
 
7)조선왕조실록
 
세종15 지리지/경상도/경주부/경주부
.....전략...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이르기를 "탈해왕 9년에, 밤에 금성 서쪽 시림 나무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기 있음을 듣고 날이 밝자대보(大輔)호공(瓠公)을 보내어가서 보게하니 금빛의 작은 궤가 나무에 매달리어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중략.....
거두어 길러서 이름을 김알지(金閼智)라 하였는데...... 금궤에서 나온 까닭으로 성을 김이라하였다...이하생략 (주*9)
慶州: 府尹一人, 判官一人, 儒學敎授官一人。 卽新羅故都, 漢宣帝五鳳元年甲子, 始祖赫居世開國建都-중략-金氏: 金富軾曰: “脫解王九年, 夜聞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大輔瓠公視之, 有金色少櫃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王使人取櫃開之, 有小兒在其中, 姿容奇偉。 王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 名之曰閼智, 及長, 聰明多智略。 以其出於金櫃, 故姓金氏。 閼智七世孫味雛娶新羅助賁王之女
 
 
8)東國通鑑
 
신라 첨해왕 15년, 고구려 중천왕 14년, 백제 고이왕 28년, 신사년(辛巳年), 261년
겨울 12월○신라왕 첨해(沾解)가 훙(薨)하고, 조분왕(助賁王)의 사위 김미추(金味鄒)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석탈해(昔脫解)가 김알지(金閼智)를 계림(鷄林)에서 얻어 궁중(宮中)에서 길러 뒤에 제배(除拜)하여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가 미추(味鄒)를 낳았다. 조분왕이 그의 딸로써 처(妻)를 삼아 주었는데, 이에 이르러 훙하고 후사(後嗣)가 없자, 나라 사람이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 (주*10)
 
9)東史綱目
 
신사년 신라 점해왕 15년, 고구려 중천왕 14년, 백제 고이왕 28년(위 원제 경원 2, 261)
*겨울 12월 계림의 이사금 점해가 갑자기 훙(薨)하고, 조분의 사위 김미추(金味鄒)가 즉위했다. 왕은 폭질(暴疾)로 훙하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조분왕의 사위 김미추를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이가 미추 이사금 일명 미조(味照)라 한다 이다. 어머니는 박씨이니 갈문왕 이칠(伊漆)의 딸이요, 비는 석씨 광명 부인(光明夫人)이다. 처음에 탈해왕이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궁중에서 길러 후에대보(大輔)로 제배(除拜)하였는데,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가 낳은 미추가 왕이 되니, 이가 김씨로서 나라를 차지한 시조가 되었다.(주*11)
 
 
결론
大輔라는 관직이 처음 보이는 것은 신라 남해차차웅 7년(서기10년)의 기록입니다.
탈해 이전에도 大輔라는 명칭이 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기록상 처음 보입니다.(주*1)
탈해는 大輔를 거처서 서기 57년에 신라 제4대왕에 오릅니다.(주*2)
석탈해가 왕으로 재임하는 중에 서기 58년 大輔 벼슬에 호공(瓠公)이 오르게 되고(주*3)
서기 65년에 우리 김문의 시조 (휘 알지)할아버님이 탄생하십니다.(주*4)
이후 석탈해왕은 김알지를 키워大輔의 지위에 임명하게 됩니다.(주*5)
-여기에는 탈해가 죽은 서기80년은 시조할아버님(김알지)은 16살이라고 계산되지만 이는 논외로하겠습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26세)
이런 기록 이외에 大輔라는 직위는 고구려에서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일 할 수 있었습니다.(주*6)
고려사에서는 최충이 大輔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고(주*7) 김한충은 대보(大輔)김알지의 후손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주*8)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조에 지리지 경주 기사란에대보(大輔)호공(瓠公)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주*9)
기미대보(1969)93쪽-태보공사실-에 동국통감을 인용하여 太輔公이라고 했다라고 했으나 동국통감에도 大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시 탈초가 잘못될 수도 있어 원본도 확인하여 보았으나 역시 大輔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동사강목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하여 살펴보았으나 역시 동국통감과 같이 大輔라고 되어 있습니다.(주*10,11)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역사서나 문헌에서는 太輔公이라는 단어조차 나타나지 않고 역사서에 분명히 우리 시조이신 김알지할아버님이 大輔에 오르셨다는 것으로 보아 시조할아버님의 호칭은太輔公이 아니라 大輔公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 족보에는 왜 계속하여 太輔公이라고 기록되었을까하는 것이 의문입니다만
을유보의 서문을 쓰신 金禹元공께서 大輔公을 太輔公이라고 고쳐 쓰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문제는 大라는 글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大는 발음상 대,태,다 라고 한자자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학에 밝으신 선조님께서 大輔公은 태보공 이라고 발음하여야 마땅하나 대보공이라고 모두 발음하니 大와 뜻이 같은 太를 써서 글자와 발음을 맞추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예는 조선시대 벼슬이름인 洗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洗馬의 발음은 선마라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아언비각]에 ‘洗馬의 발음을 선마(銑馬)라고 해야 하는데 세(洗)라고 발음하는 것은 잘 못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高麗, 高句麗의 麗자도 ‘리’로 발음하여 고리, 고구리로 발음 했었다고 하며, 姜邯贊 도 강한찬이라 발음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서에 분명히 大輔公이라고 되어 있고, 경주 계림에 위패에도 大輔公이라고 쓰여 있으니 우리 안김문도 大輔公이라고 쓰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을 듯 합니다. 다만 발음을 대보공이라고 해야할지 태보공이라고 해야 맞는지는 논란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洗馬의 발음이 세마로 굳어지고, 高句麗의 발음이 고구려, 姜邯贊도 강감찬으로 발음이 굳어져서 이제 세마를 선마, 고구려를 고구리, 강감찬을 강한찬으로 발음하는 것도 많은 혼란이 올 것이므로 大輔公에 대한 발음도 대세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자료가 후학들의 연구자료에 지침이 되었으면 합니다. 현종 여러분들의 고견을 기다립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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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귀한 논고 잘 읽었습니다.
개인별로 조금씩 각론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에서는 같은 의견이실 걸로 생각합니다.
저 역시 큰 틀에서 동의합니다.

재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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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제가 중국교포 2인을 상대로 대(大)와 태(太)를 발음시켜 본 결과, 성조의 떨림이나 장단을 정확하게 간파하지는 못하였지만 대는 "따/타/탈" 등으로 들렸으며 태는 "타이/타아"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을 "태왕/태성왕/호태왕(시호)"으로 기록하고 태자나 태후를 대자와 대후로 적은 기록도 고서(삼국사기)에 보인다고 한 것과 "신성하고/위대한/큰"등의 순우리말을 한글이 없으니 차음(借音)하는 과정에서 혼용한 것이라 봅니다! 태를 대보다 한 수 위의 언어나 직급으로 여겨 본문처럼 지금까지 병행하였으나 여기서는, 관직명이니 "대보공"이 옳습니다! 대통령이나 대장, 대위 등을 태동령과 대장, 태위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판단합니다.

김범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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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귀하신 글 잘 보았습니다~~
내용이 의미는 있습니다만~~~~
우리 선조님들께서 대보와 태보를 구분하지
못해서 족보에 태보라고 기록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