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月初三日 昌寧火王山途中阻苦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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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 작성일15-06-21 16:43 조회1,568회 댓글0건본문
五月初三日 昌寧火王山途中阻苦雨
오월 초사흘, 창녕 화왕산 가는 길이 장대비에 막혀 ㅠㅠ
5월 3일(日요일) 봄비가 대지를 두드리며 꽃잎이 바람에 나뒹구는 도심을 뒤로하고 대구를 지나 창녕 화왕산 발치에서 여장을 풀었다. 장장 네 시간을 달려왔다. 곧바로 빗길을 재촉하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왕산(火王山)은 창녕의 진산(鎭山)이다. 창녕의 옛 지명이 비자화(比自火), 화왕(火王)이니 불의 고을이다! 산과 옛 고을의 이름을 몰랐을 때는 왜? 온천이 솟아나는지 알 수 없었음을 독백하며 들머리로 눈길을 돌렸다.
등산로 초입의 옥천계곡 우측에서 옥천사지(玉泉寺址)를 만난다. 고려 공민왕조의 기록에 등장하는 신돈의 어미가 계성현(현 계성면)의 사찰 노비였다고 했고 그 아비는 알 수 없으나 신(申)과 신(愼) 씨가 아닌, 영산현(현 영산면)을 관향으로 하는 신(辛) 씨인 것으로 보아 당시 관내에서 벼슬아치를 했거나 절간에 시주를 상당히 할 수 있었던 재력가로 보인다! 주춧돌과 석물의 흔적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사찰로 추정이 되지만 신돈이 죽자 절도 폐쇄되었고 이후 중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빗줄기 속에서 절터의 산록은 하다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경사진 개울가를 조금 지나 다리를 건너자 친근한 얼굴과 익살스런 눈망울을 한 벅수(석장승)가 보인다. 신돈의 앞길처럼 보이지 않는 창공 아래에 커다란 누각이 있어 발걸음을 옮긴다. 관룡사(觀龍寺) 석문의 담장을 돌아 좌측길로 접어드니 등고선이 몰려든 곳에서 천년을 굽어보며 우뚝 선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이 나타난다. 신라의 석공들이 기단과 좌대를 만들며 기교를 부렸고, 미처 쪼개지 못한 돌들이 정을 맞고 박석처럼 자연석 틈새에서 디딤돌이 되었다. 서라벌 남산에서 같은 모양을 한 돌들을 만날 수 있다.
바람결에 조릿대들이 펄떡거리며 비린내를 풍기는 숲에서 보이지 않는 새들이 길게 울었다. 관룡산(754M) 정상을 알리는 표석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자 <상도>와 <허준> 드라마 세트장이 나온다!
이곳에 관향을 둔 창녕조씨와 창녕성씨들 중에 인물들이 많아 허준이 인근의 산음(산청)땅에서 의술을 연마할 때 단골로 성대감이 출연하기도 한다. 반전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 두 성씨 중에서 인물이 많았다. 고려후기 김구용(1338-1384) 선생의 "창산군만사(昌山君挽詞)"의 오언율시는 창녕 성사달(成士達 1380년 몰)의 죽음을 애도한 시로 첫 행이 '昌寧山水好(창녕은 산수가 좋아)'로 시작이 된다.
화왕산성 동문으로 들어서서 널찍한 산성길을 따라 걸었다.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과 발자국 소리까지 비바람과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연못과 우물의 흔적은 살필 수 없어 답답했으나 정상에 올라서니 희미하게나마 운무를 뒤집어쓴 성곽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제주의 오름들과 같았다. 밝은 날에 오면 희한한 광경일 듯싶었다. 갑자기 추위를 느껴 급히 하산을 서두르며 서문을 나와 발걸음을 옮기려 해도 날머리(말흘리) 쪽이 급경사에 계단도 많아 더딘 대다가 쉬지 않고 온 터라 목이 칼칼했다.
하산이 막 끝나는 곳에 가야의 무덤들이 능선을 타고 구름이 머물다 간 자리에서 드러났다. 순장자인 어린 시녀의 뼈에서 가혹한 삶을 더듬었다. 주인이 일찍죽어 그녀도 함께 묻혔다고 했다. 선택할 수 없는 삶과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이 가야 백성들의 운명이었다. 1500년 전의 사연이다.
무덤들이 열도처럼 이어져 그런가? 그 무렵, 전쟁과 죽음을 피해 동북진하여 캄차카반도를 지나 알류산열도를 건너 미서부해안을 따라 맥(예맥족의 맥족)이곳 즉 맥이족이 사는 곳(멕시코)과 중남미까지 이동하는 한반도 북쪽의 선조들이 마치 무덤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고 있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아파치(아버지의 미국 발음), 본래는 나도왔슈라는 슈족 인디언 그리고 애리조나 인디언의 윷놀이 규칙(설명서)에 윷판의 모자리는 좋다(Jouta)로 사용하던 돌은 돌(Stone)이라 하지 않고 우리처럼 말(Horse)이라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아스태가제국에선 화가를 다기려(다그려), 점쟁이는 다마틴이(다마추는이) 그리고 멕시코 원주민의 풍습에 고시네(우리의 고수레)와 제물을 "미끼"라고 하는 점과 칠레의 마부체족이 우리말 그대로 도끼를 도끼(Toqui)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우리말과 풍습, 연장, 놀이의 방법에서 일치하며 그중 2007년 발견되어 가장 주목받은 알류산열도 초입의 아막낙섬 온돌이 압권이다. 온돌은 유기(놋그릇)와 인간의 도토리 섭취와 함께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기다리며 유기 양푼에 막걸리를 가득 붓고 거푸 두 그릇을 비워 마른 목을 적시며 가야의 무덤들을 보고 있노라니 함께한 옆의 아낙이 "왜? 매번 쓸쓸하게 혼자 다니는 것이냐!"며 궁금해 한다. 그 아낙은 내가 늘 남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지 못한 터라 독특하여 그랬던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다. 난 사족을 달지 않고 웃음으로 답을 주었다. 그저 내가 좋아 찾아가고 보고 느끼고 살피고 만지고 눈에 넣고 가슴에 담으면 즐거운 게 여행이고 소풍이 아니겠는가?
창녕땅에서 궁금하고 관심있던 ◯남휘(남이장군 아버지)와 정선공주묘 ◯비봉리유적[기원전 800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배(목선)가 출토]은 짬을 내어 다시 찾기로 하고 두 파수가 지나 뻐꾹새 우는 밤, 잠들 수 없어 지난 산행의 느낌을 적다.
고조선 이후 우리 선조들이 전쟁과 죽음의 위협을 느껴 더 춥고 먼 길을 달려 멕시코와 중남미로 천천히 움직여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남긴 것에 대한 긍지를 느껴 언론과 손성태 교수의『우리민족의 대이동,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를 보고 읽어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기술하였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윷놀이 기록"이었다. "왜? 모(말)가 최고인데 모놀이라고 하지 않고 윷(소)놀이라고 하는 것일까?"가 늘 의문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훗도(백도)를 써 흥미를 더하듯 선조들의 최초 말판과 막대기 숫자는 현재와 달랐다는 점도 그곳에 남아 전하는 기록과 유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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