暮春日細雨裏登淸風飛鳳山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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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 작성일15-06-21 16:47 조회1,710회 댓글0건본문
暮春日細雨裏登淸風飛鳳山頂-
저무는 봄날, 가는비 속에 청풍 비봉산 정상에 올라------.
4월 19일(日, 음력 3월 초하루)에 40여 명을 태우고 안산을 출발한 새벽부터 봄비가 내려 도시는 무거웠고 습한 날씨는 자연스레 마음과 몸을 스산하게 하였다. 하행길은 일기예보 덕분인가? 원주 치악산 휴게소까지 거침이 없다. 신림을 지나 제천 어귀에서 우회전하여 금성면을 통과해 드디어 "청풍명월의 고장"에 들어섰다. 금수산 북쪽 사면을 따라 유순한 옛길 위로 아스팔트길이 만들어졌고 길가엔 마지막까지 처연하게 꽃잎을 떨어뜨리는 벚나무들이 주마등처럼 후딱후딱 지나간다!
90년 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물태리 언덕으로 오르는 옛 나루를 대신하는 다리가 하나였는데 다시 다리 하나를 더 놓았다. 지금 옮겨진 옛 고을 관아가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를 향해 청풍대교라 칭하고 있는 다리를 지난다.
청풍(淸風)은 조선조 후기까지도 현재 제천은 현(縣)이었던 것과는 달리 꽤 큰 고을(郡)로 현종의 정비(正妃)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관향(본관 청풍김씨)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어 유지되던 맑은 바람과 밝은 달(淸風明月)의 고장이었고, 시인묵객들이 시문을 많이 남긴 "한벽루(寒碧樓)"의 이름처럼 차고 푸른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극치를 보여주던 고장이었다.
물길로 충주를 지나 단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옥순봉 아래에 놓인 천하의 절경이라 벼슬아치들이 임지로 가는길이나 유람을 위해 많이 찾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 제비봉 아래 수역의 수몰 전 옛모습이라 상상을 하면 될 터이다. 담수가 아닌 흐르는 물에 비친 구담(구담봉)이나 뱃놀이를 하며 보았던 옥순봉은 얼마나 시심을 자극했겠는가? 그래서 오죽하면 단양군수로 있던 이황(퇴계)선생이 옥순봉을 단양팔경에 집어넣고 청풍부사에게 청을 하여 단양의 경계로 삼고자 했었겠는가?
청풍처럼 왕비의 친정집 관향이라는 이유로 승격되는가 하면 조선조 왕가에선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살다간 인목대비(영창대군 모)와 소현세자빈 강씨(인조 큰며느리) 그리고 인현왕후(숙종비)와 혜경궁 홍씨(정조 모)의 한 많은 사연을 기록한 『계축일기』와 『심양장계』,『심양일기』,『인현왕후전』,『한중록』등이 전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영조는 충청도를 공홍(공주, 홍성)도로 전라도를 전광(전주, 광주)도로 강원도를 강춘(강릉, 춘천)도로 부르라는 교지도 내렸다. 모두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인물들이 충주와 나주, 원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정조는 다시 공충(공주, 충주)도로 바꾸면서 이인좌의 출생지인 청주까지 서원현으로 강등시켰다. 이 같은 민란의 조짐 때도 봉수가 올랐다. 청풍 오현봉수는 풍기를 지나 죽령을 넘어온 단양의 신호를 서쪽 충주로 보냈다. 봉수가 넘나들던 지역의 사대부들과 고을 수령들은 임금에게 계사(啓辭)를 올리고 임금의 처분을 기다렸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이도 있지만 확실히 "씨는 숨길 수 없다!"가 옳은 듯싶다! 선조와 광해, 인조(반정), 숙종, 영조가 궁중 여인들과 자식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연산군만큼이나 비겁하게 굴었었다.
연산과 광해의 유년시절과 비교하면 경종(장희빈 자)과 정조(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자)가 그나마 잘 버티다 일찍 죽거나 치적을 남겨 비교를 보인다.
청풍을 노래한 17세기 대표시인 김득신(백곡, 충무공 김시민의 손자) 선생의 5언율시 한 수를 소개하고 싶다. 문집의 차례로 보면 충주와 수안보를 지나 단양에 이르기 까지 유람하며 특히 청풍지역과 관련하여 많은 시를 남긴 까닭은 절경 중에서도 이곳이 으뜸이라 판단되었을 게다.
◈淸風郡 청풍군 - 삼가 졸역
東遊投峽裡 동쪽 골짜기 속에서 쉬려는데
石路馬徐行 자갈길에 말도 걸음 더뎌
重木羅如待 나무들은 마중하듯 늘어섰고
群峰近若迎 여러 봉우리는 맞이하듯 가깝네
圓沙春雨細 둥근 모래톱에 봄 가랑비 내리니
枉渚暝煙生 굽이도는 물가에 밤안개 이네
見此詩材富 이를 보자니 시감이 일어
狂吟慰客情 미친 듯이 읊고 나그네 정 위로하네
그때 이곳이 고향인 벗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오르고자 하는 "비봉산"을 가리키며 "저기 산 형태를 보면, 독수리가 비상하려는 모습이 아닌가?"하였는데 산 이름이 "비봉산(飛鳳山)"인 것은 이제야 알고 찾아가는 길이다.
조선조 시인이 청풍에 들어설 때처럼 봄가랑비(春雨細)가 입산 전에 내리다 잠시 멎었다. 두어 시간 질퍽거려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디뎌 정상에 올랐다. 목을 축이고 가랑비에 꿈틀거리는 산맥들을 굽어보니 먼 산은 더 어둡고 금수산과 월악산이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운무의 장관을 보여준다. 가까운 민가들은 옛고을의 강가에 기대어 안온했고 옮겨진 음택(산소)들이 숲을 등지고 늘어서 있다. 하산길엔 모노레일이 있어 불편사항이 없나 살펴보려 이용을 한 번 해보았다.
80년대 초 충주댐으로 물이 차오르면서 지워진 관아와 향교자리에 물안개가 피워 올랐고 물길을 따라 진상하던 쏘가리와 자라는 사라지고, 멀리갈 수 없는 실향민들은 물이 말라 옛것들이 조금씩 드러날 때 고향을 찾아와 자기가 다니던 학교 담벼락과 다리난간에서 기억을 더듬다 돌아갔다.
함께하신 산우님들 감사합니다! 재석 삼가 몇 자 후기에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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