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又訪南海錦山 - 다시 남해 금산(보광산)을 찾아서------.

페이지 정보

재석 작성일15-06-21 16:49 조회1,767회 댓글1건

본문

又訪南海錦山 - 다시 남해 금산(보광산)을 찾아서------.

 10년 전 초봄, 단신으로 남녘을 향해 달려가 푸른하늘 위에 떠 있는 보리암(菩提庵)을 찾았을 때의 감회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마침 금강산의 <건봉사>에서 부처님 치아사리를 친견하고 며칠이 안 되었던 터라 기억이 더 또렷하다. 여행은 참 즐겁고 기쁘거나 슬픈 기억의 저 편에 존재하는 추억 덩어리를 어루만지게 하는 묘한 달콤함의 언어다.

 그 무렵 미륵(미래)불이 오기 전 중생을 구제해주며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현신)으로 나타난다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기도도량인 동쪽 끝 낙산사 <홍련암>과 서쪽 끝 섬 속의 섬,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를 둘러 본 것 역시 이젠 고스란히 아련한 옛일이 되었구나!

 4일(토), 늦은 밤 안산을 출발한 차량은 지친 나그네를 싣고 삼천포를 지나 경상우수영의 어느 바닷가 골목에 내려놓았다. 는개가 그칠 줄 모르고 머리위로 쏟아지며 얼굴에서 포말을 굴렸다. 새벽 네 시 반, 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어슴푸레한 등산로 초입에서 동료들을 따라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걸었다. 인기척에 놀라 낯선 이방인의 출입을 경계하는지 새들도 둥지를 박차고 날아 기다란 울음을 뱉으며 숲에서 퍼덕거렸다.

 구름이 뚫고 간 자리인 듯 커다란 암벽이 길을 가로 막았는데 쌍홍문이라 한다. 정상 봉수대 아래의 커다란 암벽에 음각된 "由虹門上錦山(홍문이 있기에 금산에 오르다, 홍문이 있는 까닭으로 금산이 최고다)"에서 짐작하듯 절경이었다!

 상주포 관리인과 아무개 진사와 동행한 전한림학사 주세붕이 가정(嘉靖)연간 무술년에 다녀간 기록으로 보아 1538년의 일이다. 무지개(虹 홍) 석문을 들어서니 비로소 선계(仙界)의 경내로 접어든 느낌이다. 옛사람들이 지나간 아득한 심연의 대숲이 사그락거릴 때 난, 혼자남아 안개속에서 자지러지다 혼절했다.

 혼돈의 어둠을 잊고 천상에서 빚은 암봉들이 운무와 어우러져 태연하게 반겼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제석봉을 지나며 선녀가 있을법한 아름답고 멋스러운 주막을 만났다. 어쩜 첩첩산중에 이리도 운치있는 주막이 있을까?

 하산길에 들러 목을 축이자고 약속하고 지나간다. 정상의 표지석을 보지 못하고 봉수대에 올랐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잘 보전되고 있었다. 1592년 조일전쟁 때 동래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 한양으로 날랐다.

 오늘은, 4월 5일(음력 2월 17일)이다. 는개와 바람이 일어 일행들은 아쉬워했지만 난 이미 눈 속에 광경을 담아온 터라 견딜 만 했다. 흔히『난중일기』라는 이충무공의 「계사(1593년)일기」 2월 17일자 기사를 들여다보자!

 "陰而不雨, 終日東風, 중략 午後, 往見右水伯, 하략" - 흐리나 비는 안 옴, 종일 동풍이 불다, 오후에 우수사를 보러 감"

 그날, 같은 날 조일전쟁 중 전라좌도수군절제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진영에 궂은날임에도 찾아 왔음을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많은 생각을 하며 1390년 무렵 이성계가 조선 건국 전에 다녀갔다고 전하는 보리암에서 발길을 잠시 멈추고 암벽마다 새겨진 이름을 찬찬히 둘러보고 왔던길을 되짚어 하산하였다.

 그 후 해안로를 따라 태평양을 굽어보며 시오리길을 더 걷고, 고향에 들렀다가 새벽에 급체하여 산에 오르지 못한 백송이(가명) 양의 고향집 인근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귀가길에 올랐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 풍기 군수로 있을 때, 한국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다.

 

 바람이 전하는 말을 미처 다 듣지 못하고 다시 삼천포로 나와 또 그렇게 흐린날의 기억을 한 장 만들어 본다!

 남해 금산 보리암을 다녀와 몇 자 생각나는 대로 대부 재석 삼가 쓰다.

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환
작성일

오랫만입니다. 소식 들으니 반갑기 그지 없네요.  자주 들려 소식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