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안동김씨 제학공파 안동일대 예절연수***

페이지 정보

대종회 작성일15-10-20 20:03 조회2,071회 댓글0건

본문



                           안동김씨 제학공파 안동일대 예절연수

                                         안동김씨 제학공파는 10월 3일부터 4일까지 안동일대로 예절연수를 다녀왔다.

 

<1일차>

대종회장 봉회, 수도권종회 회장 태선 등 24명의 종인들은 전세버스를 타고 건호종친은 승용차로 사당역에서 8시 20분에 출발하였다.

추석이 지난 가을의 하늘은 맑고 화창했다. 버스 안에서는 이른 시간에 출발하기 때문에 아침식사 대용으로 미리 준비한 떡과 음료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괴산까지는 2시간 30분이 소요될 것으로 예정했는데 의외로 고속도로

소통이 원활하여, 중간목적지인 괴산군 능촌리에 예정한 대로 10시 30분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종친들과 인사를 나누고 혹시 필요할지
 
몰라 백현사 재실에 있는 이불 5채를 싣고, 태옥 제학공파 회장 등 종인 6명을 태우고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 있는 죽주박씨할머니

단묘로 향했다. 태옥회장님께서 종친들을 위해 옥수수 2박스를 쪄 오셔서 버스에서 나누어 먹었다. 아주 맛있었다. 태옥회장님께 거듭
 
감사에 말씀을 드린다. 괴산서 34번 국도를 타고 연풍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고 문경, 예천을 지나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산154번지에

12시 20분에 도착하였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1시간이나 단축된 것이다. 우선 죽주 박씨 묘소에 도착한 일행은 준비해간 과일과 포를

진설하고 봉회 대종회장님을 헌관으로 하여 고유제를 지냈다. 고유제를 마치고 간단히 할머니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냉평국대부인

(冷平國大夫人)은 충렬공(忠烈公)의 배위(配位)로 문하성(門下省) 기거랑(起居郞) 지제고(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따님이다. 관향은
 
죽주(竹州 : 경기도 안성)이시며 문영공 묘지석에는 음평군대부인에 봉해지셨는데, 후일 냉평국대부인으로 추증되신 듯하다. 충렬공

보다 먼저 돌아가셔서 예안현(안동시 예안면)에 모셨으나 묘소를 실전하여 단묘를 모시게 되었는데 단묘는 삼소재 김종락(익원공파)

선조님이 1800년대 중반에 경북 평산읍 회곡리 산154번지에 조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9일 충렬공 향사와 같은 날
 
회곡동에서 냉평국대부인 세향을 모신다.” 설명을 마치고 단묘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아래로 내려와 충렬공 유허비각을 보았다.

유허비각은 충렬공께서 출생하고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허비가 세워졌었는데 세워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1635년(인조 13)에 유허비가 실전된 것을 발견하였다하니, 훨씬 그 이전에 유허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확인할 수가 있으나
 
연대와 장소는 미상이다. 그 후 1717년(숙종 43) 정유년에 비를 세울 곳을 정하고 1765년(영조 41) 을유 3월에 건너편 안산에 비를

세웠는데, 비각은 1814년(순조 14) 갑술년에 이건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충렬공께서 평소에 기거하시던 초당 임좌에 그해 5월 25일 미시에
 
입주하고 동월 28일 묘시에 상량하였다. 하지만 근이백년여년의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많이 쇄락된 것을 1985년 7월 20일 구비각을 철거

하고 동년 7월 26일 15시에 입주하고 27일 12시에 상량하여 오늘에 이른다. 설명을 듣고 다시 상락재로 이동하여 재실을 보고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상락재(上洛齋)는 냉평국대부인의 제례를 모시기 위한 재실이다. 1976년 6월 30일에 개량주택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지금의 상락재는
 
1996년에 개축하였다. 아마 1800년대 중반에 단묘를 조성할 때에는 재실 이름이 음수재였는데 쇄락하여 1940년에 안렴사공파 문연

선조님이 충렬공 재실 현판으로 음수재를 썼다. 이후부터 충렬공 재실이 음수재로 되었다.” 설명을 마치고 버스가 주차된 아래

마당으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안동 시내의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1시 20분 옥동손칼국수집에서 안동김씨 안동지역종친회 동수회장님과
 
용준총무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안동종친회에서 제공하는 안동국시와 소주를 아주 맛있게 먹고 2시 10분경 안동종친회 동수회장님의
 
인솔로 일행은 낙동강 고수부지에 있는 안동탈춤공원에서 열리는 안동탈춤축제와 안동민속축제를 둘러보았다. 공연은 오후 3시 이후에
 
열린다고 하는데 시간상 행사장 주위를 둘러보고 2시 46분에 탈춤공원 입구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안동종친회 회장님과 총무님과

헤어져 충렬공 묘소가 있는 녹전면 죽송동 음수재로 출발하였다. 오후 3시45에는 충렬공 할아버지의 신도비각에 도착, 신도비를 보고
 
설명을 들었다. “
충렬공께서 1300년 8월 16일에 돌아가신 후 왕명에 의하여 신도비를 건립한 사실은 문헌상에 기록은 있으나 어느 때
 
어디에 건립하였는지 그 연대와 장소가 미상이었다. 아마 그때의 신도비는 수차 망실되었고 그 후 수백년 동안을 재건치 못하고 내려오다

가 1968년 11월 3일에 대종회가 창립 발족되자 오랫동안 침체하였던 위선사업을 착수하기로 하여 제1차적으로 충렬공 재실을 중건하였고
 
제2차 사업으로서 신도비를 건립하기로 하여 안동군 녹전면 구송동 산119의 3에 부지 111평을 매입하여 특지 종인들의 각별한 협조 하에
 
1971년 11월 26일에 현재의 신도비를 건립하고 종인 100여명이 서울 청량리역에서 특별기동차를 대절하여 안동 현지에 내려가 경향 각지에

서 운집한 수백명의 종인 및 지방 유지 내빈과 더불어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설명을 마치고 우리는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시 버스

에 올라 음수재로 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 잠시 고생을 하였다. 오던 길을 돌아 신도비각으로 와서 음수재로 이동하였다. 오후 4시 20분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우선 음수재에 간단한 짐을 내려놓고 오후4시 44분 충렬공 할아버지 산소로 올라가서 고유제를 올렸다. 분방으로는
 
헌관은 제학공회장님 단잔으로 하기로 하고 집례는 태선 대축은 성회(안렴사공파) 좌집사 용항 우집사 해응으로 결정하고 제를 올렸다.

그리고 충렬공 묘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충렬공께서는 1300년 8월 16일 개경 백목동 앵계리에서 돌아가시자 유언에 따라 9월
 
3일에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현재 위치는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능골 산19-1번지이고 묘소 규모는 묘소와 상석1기, 묘비

2기, 동자석 2기, 문관석 2기, 망주석2기로 구성되어있다. 충렬공의 묘소는 국내 몇 안 되는 고려 중기 묘소 중의 하나로 상계의 봉분은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인 사각의 호석을 둘렀고, 중계에는 상석1기와 묘비2기 동자석2기를 배치하였고, 하계에는 문관석2기와 망주석2기를
 
배치하여 고졸하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준다. 구묘비는 1602년(임인 선조 35)에 세웠고 비문은 외손인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순찰사 李時發(1569~1626, 경주인)이 지었으며 선교랑 행제용감 참봉 曺友仁이 썼다. 신묘비는 1966년에 건립하였는

데 金思玉(충렬공23세손)이 묘비 글씨를 썼다.

광산김씨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1455~1534)의 묘가 충렬공 묘소 위에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지만, 지금은 두문중이 화해하

고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광산김씨들은 충렬공의 셋째 사위인 권윤명의 2남4년중 맏사위인 김수의 후손들로 충렬공의 외외

손 이다.
” 설명을 마치고 묘소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였다. 오후 5시 30분에는 재실로 돌아와 재실 뒤에 있는 영정각 참배를 하고 숙소

인 재실에 짐을 풀었다.

오후6시에 태선 수도권종회 회장의 진행으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간단한 예의를 마치고 회장인사의 말씀과 이어 회장님의 사회로 봉회
 
대종회장님, 태옥 제학공파종회장님, 광도 문온공 종손님, 성회 안렴사공파 전대종회 부회장님에 이어 태섭 양덕공종손님을 소개하였는데
 
특회 태섭님은 93세의 고령임에도 이와 같이 참석해주셨다는 치하의 말씀이 계셨다. 이후 모든 종인은 회장님의 호명에 따라 일어나서

자신의 소개와 참가하게 된 소감 등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7시 10분에는 안동의 명물 안동찜닭이 도착하였다. 그런데 처음 주문한
 
것과 내용이 달랐다. 안동찜닭과 식사가 준비 되어야 했는데 찜닭만 도착한 것이다. 하는 수없이 재사 유사님에게 부탁하여 밥을 짓게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종인들이 불평없이 음료, 주류 등을 들며, 밤이 늦도록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

다.

 

<2일차>

다음날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재실 내부를 정리하고 간단히 세면을 한 후 7시 20분에 경북 의성군 사촌마을로 이동하였다. 8시 20분에

사촌마을 도착하였는데, 이곳에는 벌써 김정중 사촌마을 해설사가 마중을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 서로 인사를 나누고 김정중 해설사가

이야기하기를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라 식사하기 전에 근처의 유자정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유자정을 보고 와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유자정으로 같다. 가는 길에 성균관 부관장으로 계시는 김창회 종친님의 집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봉회 대종회장님이
 
집으로 가서 창회종친님을 모시고 유자정으로 왔다. 창회종친께서 옆문으로 들어가 정문인 청화문(淸和門)을 열어 우리가 유자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유자정 마당에서 창회종친님의 유자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8시 52분에 창회종친님과 기념촬영을 하고 현경식당

으로 와서 맛있는 간고등어와 올갱이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 40분에는 사촌마을자료전시관을 구경하고 김정중
 
해설사로부터 사촌마을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자료를 보았다. 10시에는 후산정사에 가서 김희윤 도평의공파 종손님을 만나 인사

를 하고 후산사에 가서 만취당 사원선조님에게 고유제를 올렸습니다. 고유제의 분방은 헌관 태섭, 대축 성회, 집례 희윤, 찬인 용두, 좌집

사 용항, 우집사 해응으로 결정하고 제를 올렸다. 간결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올려진 제례에는 희윤종손님이 준비하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제례복과 우리 제학공파와는 다른 진설과 예법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제례를 마치고 10시 30분에는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어 후산정

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정사(精舍)의 역할은 ‘학문을 가르키려고 지은 집,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라고 한다. 후산정사는

만취당을 추모하는 동시에 후손들이 공부하고 정신을 수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후산정사 경내에는 관선문(觀善門), 정사(精

舍), 사당(祠堂), 주사(廚舍)가 있는데 이를 통틀어 후산정사라 한다. 정사는 교육을 담당하는 장소이고, 사당은 만취당(晩翠堂)위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올렸으며, 주사는 향사 음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10시 42분에는 사촌서림으로 이동하였다. 서림은 입향조
 
감목관공 휘 자첨 선조님이 이곳에 나무를 심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천연기념물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서림은 수령이 300~600년,

높이 15~25m나 되는 상수리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종의 노거수들이 길이 1,040m, 폭 40여m의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1986년에 후손들이 ‘서림사적비’를 세우고 울타리를 조성하여 숲을 보호하고 1991년 의성군에서는 조선 후기 유학자 ‘천사김종덕선생

유허비’를 세우고 1992년에는 ‘안동김씨사촌입향6백년추원비’를 건립하였다. 서림을 따라 한참을 가니 11시 6분에 丙申倡義 기적비에
 
도착했다. 丙申倡義기적비는 1896년 2월1일 의성유림들이 향교에서 창의하여 운산 김상동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2월 20일 북상하던
 
관군을 저지하기 위해 구성산에서 전투를 치루게 되었는데 관군 2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3월 28일 관군 150여명이 황산으로쳐

들어와 27명이 전사하였고, 관군은 의병의 본거지였던 사촌마을을 무차별 방화하여 5백년을 가꾸어온 마을과 전적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 사건을 사촌마을에서는 황산 참혹의 변이라 한다. 사촌문중에서는 2009년 마을 입구 우회 도로변에 丙申倡義기적비를 세워
 
나라를 지키다 가신 님을 추모하고 있다.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버스를 타고 영귀정으로 향했다. 11시 21분 영귀정에 도착하여 희윤종

손님으로 부터 영귀정의 내력을 들었다. “영귀정은 1501년(연산군7)에 진사가된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1563)가 지은 정자로 16세

기 전기에 지은 건물이다. 영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

키고 동재는 학치재(學致齋) 서재는 취정재(就正齋) 현액을 걸었다. 이 정자는 초가로 지어졌는데 1808년(순조8) 송은공 9세손 함인재 종

록(含忍齋 宗錄)이 문중의 뜻을 모아 다섯 칸 기와집으로 중수하고 현액을 바꾸어 걸었다.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1991년 ‘경상북도문

화재자료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서 후송재를 둘러보고 12시에 만취당에 올랐다. 만취당에는 도평의공

파 종친 여러분이 오셔서 자리를 잡고 계셨다. 우리가 만취당에 올라 도평의공파 종친님들에게 예을 다해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서로 인

사 소개를 하였다. 종부님이 마련해 놓은 송편과 과일, 오미자차 그리고 소주를 아주 맛있게 먹으며 서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우리가

준비해간 폐백을 드렸다. 폐백으로는 수건 40장과 약간의 향촉비, 용두종친이 직접 짠 띠풀 초석을 드렸다. 만취당은 송은 김광수의 증손

인 만취당 김사원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로 안동김씨 집성촌 사촌문중의 상징물이자 자존심이다. 자호를 만취

(晩翠)라 하고 호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1582년(선조 15)에 착공하여 1584년(46세) 10월에 완성한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의 목조 건물로 임란 이전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이 건축물은 수없이 많은 전란과 역사의 전환기를 거치면서도 불타지 않았다. 또 한번도 해체 복원되지 않고 원형대로 보존해온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유가(儒家)의 옛 건축물이다. 현판은 석봉 한호(石峰 韓濩)의 글씨라 전해온다. 건축 당시에는 마루와 난간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였는데 현재의 모양이 된 것은 1727년(영조3)에 건물 동편에 방 두 칸을 증축하여 복재(復齋)라 하고, 1764년(영조

40)에 대들보와 기와를 교체하면서 서편에 방 한 칸을 증축하면서부터이다. 1983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고 2014

년 6월 9일 “국가 보물 1825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종택은 1576년(선조9)에 사원선조님이 60여칸으로 창건하였는데 현손이신 이중선조

님이 중수하면서 반으로 줄였고, 1816년(순조16)에는 규모를 10여칸으로 줄였고, 1896년 丙申의병 때 소실되어 5칸 반 겹집으로 중건하였

지만 6.25전쟁을 겪으면서 보수가 어렵게 되자 1959년에 철거하고 정침(正寢) 5칸 겹집과 서편에 곡자(曲子) 2칸으로 고쳐 짓고 사랑채 3

칸 반겹의 곡자와 대문채 3칸을 신축 하였다. 2007년 봄 문중 예산으로 종택 대문채에 3간 반겹, 동편에 곡자 2칸, 정침 동편에 1칸을 달

아 ‘ㅁ’자형으로 30여칸을 완성하여 “도평의공고려”(都平議公古廬) 현액을 걸고 2008년 7월 19일 종손과 대종회장, 내외손들, 외부 인

사들 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준공식을 거행하였고 지금이 이르고 있다. 40여분간의 만남을 마치고 집 쥐위에 있는 만년송을 보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현경식당으로 가서 야채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만취당에서 먹은 다과와 술은 희윤 종손님이 마련한 것이고 점심은
 
도평의공파 사촌종중에서 마련해주셨다. 오후 1시 30분에 계획한 시간에 출발하여 3시에 괴산에 도착 태옥회장님과 명응 경응 태섭 승용
 
용두 종친님들이 내리고, 서울로 출발 6시에 사당역에 도착 하여 1박2일의 일정으로 계획된 행사가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행사에 참여해

주신 종친님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