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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익대부 밀직사사 보문각대제학 안동김공 승용지묘 원주군부인 원주원씨(奉翊大夫密直司事寶文閣大提學安東金公承用之墓 原州郡夫人原州元氏)
▲ 대제학공 휘 승용 묘소 및 묘비 (2003. 4. 발용(군) 제공)
봉익대부 밀직사사 보문각대제학 휘 승용 묘비명(奉翊大夫密直司事寶文閣大提學諱承用墓碑銘)
(2002. 10. 27. 발용(군) 제공)
공(公)의 휘(諱)는 승용(承用)이시니 신라경순왕(新羅敬順王)의 후손이시다.
경순왕이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부마(駙馬)가 되시고 후손(後孫) 태수공(太守公) 휘이청(諱利請)께서 안동(安東)으로 적을 받으시니 자손(子孫)이 따라서 본관(本貫)으로 삼았고 삼대(三代)를 지나서 휘효인(諱孝印)은 병부상서(兵部尙書)이시며 휘방경(諱方慶)을 낳으시니 재차(再次)나 일본을 정벌하신 공훈(功勳)으로 상락공(上洛公)에 봉(封)해지고 시호(諡號)가 충렬공(忠烈公)으로 국세를 융성케한 명신(名臣)이니 이 분이 공의 조부(祖父)이시고 고(考)의 휘는 선(?)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이시며 비(?)는 순창군부인(淳昌郡夫人) 설씨(薛氏)시니 사재경(司宰卿) 안(晏)의 따님으로 사남(四男)을 낳으시니 공이 차례로 두 번째 분이시다.
어리실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셔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아니하시더니 장성(長成)하심에 따라 문행(文行)이 탁이(卓異)하시고 절의(節義)가 청직(淸直)하셨고 원주군부인(原州郡夫人) 원씨(元氏)와 혼인하시니 수문전(修文殿) 대제학(大提學) 근(瑾)의 따님이시라 순일(純一)하신 덕(德)이 있어 효도와 공경으로 시부모님을 모시었고 옳은길로 자손을 가르치셨다.
공께서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발탁되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내셨고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이르시니 어버이를 섬기심에 영화로이 봉양(奉養) 하시었고 임금을 바르게 보좌하셨으니 당시에 명망(名望)이 세상에서 누가 이에 더했으리오.
원(元)나라 조정에서도 선무장군(宣武將軍) 관고려군진국만호(菅高麗軍鎭國萬戶)의 벼슬을 선수(宣授)하였으나 아! 하늘이 어찌하여 오랜 수(壽)를 주시지 않으시고 충숙왕(忠肅王) 十六年(一三二九) 기사(己巳)에 원 나라에서 환국(還國)하시다가 三月갑술일(甲戌日)에 도중(道中)에서 세상을 마치시니 충숙왕이 들으시고 심히 놀라시어 통분하면서 습(襲) 염(殮) 관구(棺柩)등을 지극히 갗추어 주시었고 특히 천금을 내려서 호상(護喪)의 비용으로 쓰게하여 영구(靈柩)가 천리(千里)길을 돌아올 때 망망한 대해(大海)를 건너서 강진군작천면남산동(康津郡鵲川面南山洞) 술좌(戌座)에 장사하였다. 이남일녀가 있었으니 장남 후(厚)는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 상락군(上洛君)이요. 이남 구(玖)는 감찰사장령(監察司掌令)이었고, 따님은 진주류지정(晋州柳之淀)에게 출가하니 류지정은 진주부원군(晋州府院君)이다.
상락군(上洛君) 후(厚)가 삼남삼녀(三男三女)를 낳으니 장남에 칠우(七祐)는 밀직사사(密直司使)이며 차남에 칠림(七霖)은 개성윤(開城尹)이었고 삼남에 칠양(七陽)은 수안군사(遂安郡事)로서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며 호(號)는 강은(康隱)이고 따님에서 장녀는 함양박거실(咸 陽朴居實)에게 출가하니 벼슬이 판사(判事)이며, 차녀는 선산김군정(善山金君鼎)에게 출가하니 벼슬이 대언(代言)이고 삼녀는 광산노숭(光山盧崇)에게 출가하니 벼슬이 정승(政丞)이며 시호(諡號)는 경평공(敬平公)이었다.
장령(掌令) 구(玖)가 이남을 낳으니 성목(成牧)은 공조전서(工曹典書)이며 이남에 천순(天順)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그 나머지 후손은 가히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수백년전에 석물(石物)을 갖추고 비갈(碑碣)도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상석(床石)이 부숴저서 제수(祭需)의 진설(陳設)이 어렵게 되었고 묘갈(墓碣)도 마멸되어 글자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손된 자(者)로서 어느 누구가 눈물을 머금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묘하(墓下)에 사는 후손들이 비록 여러해 동안 경영해 왔으나 빈한(貧寒)한 소치로 아직까지 정성(精誠)을 이루지 못하고 지연(遲延)된 바이었으나 이제 후손들이 성의를 같이하고 힘을 모아 비용을 연출(捐出)함으로 해서 적은 것아 쌓였으니 금년봄 청명날 그 옛날 비석을 물려내고 장차 새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여러종친들이 불초손(不肖孫) 중회(重會)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여러번 말하니 분명치 못한 사람이 조상의 사실에 있어 감히 아는것이 없을 뿐 아니라 하물며 전고(典故)에 그리 밝지 못하야 사양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외람히도 두서 없는 말로서 삼가 위와 같이 지으니 황공황공 하나이다.
孔子 誕降後四十二壬寅(西紀一九六二年)正月上旬에
二十三世孫 重會 지음
대제학공 휘 승용 묘지명(大提學公 諱 承用 墓誌銘) 소개
▲ 묘지석 (국립박물관 소장. 2002. 1. 27. 주회(안) 자료 조사. 제공)
묘지명(墓誌銘) 소개(2002. 9. 12. 태영(군) 제공)
原文 (※口는 지원되지 않는 글자임)
口天曆二年己巳歲 三月甲戌 宣授宣武將軍 管高麗國萬戶 匡靖大夫 密直使 寶文閣大提學 上護軍 金公 奉表朝元 賀口口渡鴨錄江 感疾 흥于新安旅館 是月庚辰 靈柩乘傳入京都 殯於孤柳洞私第 越四月丙申 葬于墨洞北山之麓鳴呼 公 諱承用 永嘉人 曾祖皇 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追奉 中書令 諱孝印 祖皇 中奉大夫 都元帥 推忠宣力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 三重大匡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事 世子師 上洛公 諱方慶 父皇 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典法判書 上護軍 諱瑄 母皇 朝靖大夫 司宰卿 薛仁儉之女也 公之爲人 沈重寡言 溫和正直 常怡怡如也 長身斗膽 眞得宰相體 居官 淸儉爲務 尤善於將人 出將則與士卒 同甘苦 動得人心 臨民則吏不敢欺 民皆仰如父母 入相則履正奉公 執節不移 公 平生交人 淡若水 藏否不掛口 乃以朋黨之忌 逆志於先祖 出牧完山州 移刺益城府 又遠移長興府 靈光郡 非人望也 계爲東藩兵馬使 兼監倉安集淮陽道 抑摩鎭合浦營 兼慶尙全羅道巡問使 是公望也 노肅持風憲 折獄秋曺 咸有令聞 中外服其平 公以門資 年方十四 直調天和寺眞殿 二十三 登進士第 二十七 帶弓箭 入侍皇元 自衛尉注簿 歷官通禮門祗候 神虎衛長史 秘書郞 軍簿佐郞 都官正郞 監察侍史 司宰少尹 國子司業 司憲掌令 摠部議郞 司憲執義 判內府事 헌部典書 同知密直事 密直使 皆관大學士 上將軍 階奉常 中顯 中正 奉順 通憲 至匡靖大夫 此其詳也 公先娶僉議贊成事 元瓘一女 生二男一女 一子曰厚 今爲西部副令 二子曰玖 爲郎將 女嫡開城判官 柳之演 生子女若干 先公歿 後娶大護軍李資女 監察侍史 朴永堅女皆無後 鳴呼 年登六十二 年不謂상 官登金紫階 官不謂卑 爵齒則於公何겸之有哉 但滿腹經綸大度 不得殿施於 廟堂之上 重爲三韓惜之 二孤 知子爲先君舊執 泣血口誌 濡淚滋毫 爲之銘曰
鵠峰過제 鴨水汪洋
勤王一夢 督口還鄕
家塡喪亂 國失忠良
上洛功業 公盛傳揚
今忽卒去 誰襲餘芳
口美于石 爲口口光
千秋萬祀 永天不忘
中正大夫 密直司左副代言 三司右尹 寶文閣提學知製敎 李 叔 琪 述
譯文 (2002. 9. 7.태영(군) 제공)
천력 2년 을사세 삼월 갑술, 李叔琪 술 ※연대 : 충숙왕16년 (원 천력2년). 1329년
(---前 마 멸 ---) 천력(天曆-원나라 문종(文宗)의 연호> 2년 기사년(1329. 충숙16) 3월 갑술(甲戌)에 선수선무장군(宣授宣武將軍) 관고려국만호(管高麗國萬戶)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密直使)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상호군(上護軍) 김공이 표(表)를 받들고 원나라에 하례(賀禮)하고돌아오다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에 걸려 신안(新安)의 여관에서 죽었다.
이달 경진(庚辰)일에 영구(靈柩)가 역마(驛馬)로 운송되어 서울에 들어와서 고류동(孤柳洞)에 있는 사저(私邸)에 빈청(殯廳)이 마련되었다. 다음 달인 四월
신(丙申)일에 묵동(墨洞)의 북쪽 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의 휘(諱)는 승용(承用)으로 영가(永嘉-안동(安東)의 고호)가 본관이다.
증조는 정의대부(正議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 지제고(知制誥)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봉(追奉)된 휘 효인(孝印)이며, 조 는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 추충선력정난정원공신(推忠宣力靖難定遠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判典理事) 세자사(世子師) 상락공(上洛公) 휘 방경(方慶)이다. 부 는 봉익대부(奉翊大夫)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전법판서(典法판書) 상호군(上護軍) 휘 선(瑄)이며, 모 는 조정대부(朝靖大夫) 사재경(司宰卿) 설인검(薛仁儉)의 딸이다.
공은 사람됨이 매우 점잖고 말수가 적었으며 온화하면서도 곧았고 항상 화락(화樂)한 모습을 지녔고, 훤칠한 키에 대담한 배짱은 정말 재상(宰相)의 풍채로서 손색이 없었다. 관직(官職)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검소하기를 힘썼으며 특히 통솔력이 매우 뛰어났다. 장수로 나가서는 사졸(士卒)과 함께 동고동락 하여 언제나 인심을 잃지 않았고, 지방에 수령(守令)이 되어서는 아전들이 감히 속일수도 없었으며, 모든 백성들은 부모처럼 받들었다. 중앙으로 돌아와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공무를 정도로 처리하여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지조(志操)를 바꾸지 않았다. 공은 사람과 사귐에 물 처럼 담담(淡淡)하게 하여 평생에 남의 잘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붕당(朋黨)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선왕(先王)의 뜻에 거슬려서 완산주(完山州)의 목사로 나가게 되었고, 이어 익성부(益城府) 자사(刺使)로 옮기게 되었으며, 또 더욱 멀리 떨어진 장흥부(長興府)와 영광군(靈光郡)에 까지 가게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동번병마사겸회양도감창안집사(東藩兵馬使兼淮陽道監倉安集使)와 억마진(抑摩鎭) 합포영(合浦營) 겸경상전라도순문사(兼慶尙全羅道巡問使)를 역임한 것은 공론에 따른 것이었고 일찌기 조정의 풍헌관(風憲官)이 되었을 때나 형조(刑曺)에서 옥사(獄事)를 처결 할때에는 언제나 칭송을 받았으며, 온나라 사람들이 그 공평함에 신복(信服) 하였다. 공은 문음(門蔭)으로서 나이14세가 되자 곧 천화사진전(天和寺眞殿)에 조용(調用)되었으며 23세에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하였다. 27세에는 무사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여 원(元)에 갔었다. 위위주부(衛衛注簿)로 부터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신호위장사(神虎衛長史), 비서랑(秘書郞), 군부좌랑(軍簿佐郞), 도관정랑(都官正郞), 감찰시사(監察侍事), 사재소윤(司宰小尹), 국자사업(國子司業), 사헌장렬(司憲掌令), 총부의랑(摠部議郞), 사헌집의(司憲執義), 판내부사(判內部事), 헌부전서(言+獻部部典書),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밀직사(密直使), 한림원및보문각 대학사(翰林院,寶文閣大學士), 상장군(上將軍)을 역임 하였으며 품계(品階)는 봉상(奉常),중현(中顯), 중정(中正), 봉순(奉順), 통헌(通憲)을 거쳐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공의 상세한 이력이다.
공은 처음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원관일(元瓘一)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1녀를 낳았다. 첫아들은 후(厚)인데 지금 서부부령(西部副令)이고, 둘째아들은 구(玖)인데 낭장(郎將)이다. 딸은 개성판관(開城判官)유지연(柳之演)에게 시집가서 자녀를 두었다. 첫부인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나중에 대호군(大護軍) 이자(李資)의 딸 및 감찰시사(監察侍史) 박영견(朴永堅)의 딸에게 장가 들었으나 모두 후손을 두지 못하였다.
아아! 향년(享年)이 예순 둘이니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아니며 금자(金紫)의 품계에 올랐으니 관작(官爵)이 낮은 것도 아니니, 공에게 있어서 연세(年歲)나 관작은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다만 가슴 가득한 경륜(經綸)과 커다란 도량을 조정에서 펴보지 못하였으니 우리나라를 위하여 매우 애석하다.
두 아들이 내가 선군(先君)의 오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울면서 지문(誌文)을 청하니 눈물을 붓끝에 적시어 명(銘)을 짓는다.
곡봉(鵠峰)을 지나니
압록강 넘실 넘실
돌아와 왕 뵈오려는 한가지 생각에
돌아가는 고향길 빨리 가자 독려 했네.
집에는 상사(喪事)와 화란(禍亂)을 만나고
국가는 충량한 신하 잃었네.
상락공(上洛公)의 공업은
공이 전해 드날렸건만
이제 문득 돌아가시니
누가 뒤를 이을건가.
이 아름다움 돌에 새겨
어둔 묘혈(墓穴)에 빛 삼으니
천년 만년 지나도록
길이 빛나 잊혀지지 않으리.
중정대부 밀직사좌부대언 삼사우윤 보문각제학 지제교 이숙기 술(中正大夫 密直司左副大言 三司右尹 寶文閣提學 知製敎 李 叔 琪 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