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김항용 소장본> (2005. 4. 11. 항용(제) 제공) (1) 문집 입수 경위 : 2005. 4. 7. 제11회 고서전시회(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특별전시전)에서 호고당(재갑(군) 운영)에서 항용 매입.
<구암문집 소개> (2003. 6. 항용(제) 제공) 1) 발간일 : 1815(순조15) 2) 발간자 : 金禹元 1735(영조1)--1825(순조25). (忠甲-時進-緬-得秋-重鎰-可精-漢謙-禹元) 3) 기타 : 발간자인 상기 김우원공은 위 문집 외에 이를 전후하여 <구암문집 乾, 坤>2책(1812년, 순조12년), <백계세고>1책(1814, 순조14), <구암연보>(1815. 순조15) 등을 연속 발간한 바 있음.
*서문 찬자 이익운(李益運) 소개 (디지털 한국학 자료) 1748(영조 24)∼1817(순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수(季受). 이조판서 징대(徵大)의 아들이다. 채제공(蔡濟恭)의 문인이다.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80년(정조 4) 정언(正言)이 되었다. 1782년 스승인 채제공을 위하여 신변(伸辨)을 하다가 이 때문에 파직을 당하고, 1794년 역인(逆$인03)의 죄를 논하다가 강화부(江華府)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죄가 용서되어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벽파(僻派)의 논척(論斥)으로 연석(筵席)에서 방자한 습성이 심하다고 하여 다시 흑산도에 유배가 결정되었다가 특별히 사면되기도 하였다. 그해 11월 정조가 영남 22읍에 견휼(蠲恤)의 윤음을 내릴 때, 경상도위유사(慶尙道慰諭使)가 되어 여러가지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801년(순조 1) 경기도관찰사 재직시에는 주문모(周文謨)와 관련된 천주교신자 18인을 잡아들여 심문한 뒤 그 중 3인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뒤 스승 채제공의 관작이 추탈되던 때에 이윤행(李允行)·박명섭(朴命燮) 등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805년 직첩(職牒)을 다시 받아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2년 뒤 이시수(李時秀)의 추천으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양하다가 1812년 반송사(伴送使)에 임명되었다. 1815년 대사헌 재직 때에는 성균관유생들에 의하여 당시 사학(邪學)을 비호하였다는 탄핵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도 유생 양규(梁珪)·심의영(沈宜永)의 척사소(斥邪疏)에 걸려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1835년(헌종 2) 정숙(靖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영인본 구암집> 소개
<구암집>(1970년 경 발간한 영인본) 1) 영인본 발간자 : 김상형 (충갑 12대손) 2) 발간일 : 1983. 10. 상한. 3) 구성 내용 : <구암문집>과 <구암연보> 합본 영인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