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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12. 항용(제) 제공)
<원 문> 朝鮮國 贈純忠積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世子貳師 知經筵成均館事五衛都摠管上洛君 行通政大夫金忠神道碑銘幷序
龜巖金公之歿, 至今數百之久, 神道無顯刻. 其後孫相馨懼, 而囑余表, 不文辭不獲已, 略述如左. 謹按, 公姓金, 諱忠甲, 字怒初, 號龜巖, 又號梧竹散人, 安東人, 得姓以來, 歷新羅·高麗, 多有公伯學士. 入李朝, 有諱顧, 事太宗, 歷翰院, 至左司諫. 是生諱孟廉, 司憲府監察, 是公五世祖也. 高祖 諱哲鉤, 典農寺主簿, 曾祖 諱壽亨, 掌隷院司議, 贈左承旨. 祖諱彦默. 力學尙氣節, 早世, 曾吏曹參判. 考諱錫, 受業於靜菴門, 早成司馬, 以小學律己, 名重士林. 値己卯禍, 隱遯不仕, 贈領議政. 贈貞敬夫人, 幸州奇氏, 持平逈女, 甚有婦德.
中宗乙亥十一月二十三日, 公生于終南山下鑄字洞. 自四歲, 不喜遊戱, 動止端重, 向禮於默齋李先生文 , 從事性理之學. 中廟癸卯, 中生進兩試. 乙巳, 妖僧普雨, 挾左道, 以迷人. 公以白衣, 陳疏, 請誅幾陷不測之禍. 丙午, 登別試文第分隷槐院, 丁未, 以良才驛壁書之禍, 尋配淸州, 丁卯宣祖卽位, 蒙宥放還, 特除司諫院正言, 俄除北道兵馬評事, 還爲正言, 又移持平尋, 拜獻納, 庚午, 拜承文院判校, 尋拜軍器寺僉正, 以賀至書狀官, 赴燕京, 還除司憲府持平. 公屢登臺者, 自任 直彈章 論, 知無不言, 言無不入, 貪宰墨吏, 莫不 手, 時稱有是君有是臣, 朝廷多有不悅者. 辛未 以持平出宰安岳郡, 癸酉丁母夫人憂, 居廬墓下, 哀毁踰制, 晟昏哭墓, 乙亥 制, 越三日, 易 于槐山廬舍, 卽十月初四日也. 初葬于先瑩下, 後移 于忠州新塘乾支山巳坐之原, 以弟三子忠武公, 諱時敏, 策勳之貴, 贈純忠積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上洛君. 前配, 光州金氏 檢閱 神童女. 甲辰卒葬于高陽沙斤寺洞, 癸丑春移 . 生一男 時晦 兵曹佐郞. 後配 昌平李氏 參奉 成春女, 甲午卒 葬于今天原郡 川面佳田里桃汀山麓卯坐. 生四男二女男, 曰時覺生員, 時敏慶尙右道兵馬節度使宣武二等功臣, 贈領議政上洛府院君諡忠武公, 時愼 贈軍資監正, 時進內侍敎官, 女長適睦興復, 次適府使 李時益. 後配生男二女一男, 曰時若登武科, 以昌城府, 使丁卯之亂, 被執不屈而死. 餘不錄.
公志慮專精一, 主力行, 爲文汪洋大肆, 自成一家, 至於醫卜地誌, 無不涉 , 常曰 "爲學必以聖賢爲主, 爲文必以兩漢爲高, 意氣超邁, 志尙堅確, 湖陰 鄭公士龍, 讀公之詞賦, 常稱當代文章, 或以爲春風 水之樂, 或以爲仙風道骨, 飄然物外, 臨大節而不可奪者, 在斯人云. 公之於乙巳禍, 痛哭李學士輝屍傍, 傍若無人, 長松歌一曲, 凜然如霜雪, 此可以知公平生氣卽矣.
銘曰
世世忠孝 閥聯翩又爀熏. 有父己卯賢子策壬辰勳. 一性淸直節不容普雨妖. 良才驛有禍仁賢俱罹沃. 人無敢近者獨自挺身哭. 千秋凜不朽長松歌數曲. 貞珉今雖勒莫述其萬一. 陵矣谷遷日樵牧勿侵 安東 權容稷 謹撰 不肖孫 相馨 謹書 大韓民國五十八年丙辰 月 日立
<번역문>
贈純忠積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世子貳師 知經筵成均館事五衛都摠管上洛君 行通政大夫金忠神道碑銘幷序
구암(龜巖) 김(金)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수백 년이 되도록 지금까지 묘도(墓道)에 현각(顯刻)이 없는지라. 그 후손(後孫) 상형(相馨)이 비명(碑銘)을 촉탁(囑託)하나 내가 본디 글 못 하는 고로 사절하였으나 부득이 좌(左)와같이 약술한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오 이름은 충갑(忠甲)이요 자(字)는 서초(恕初)요 호(號)는 귀암(龜巖)이오 또 호(號)는 오죽산인(梧竹散人)이라 하고 그 본관은 안동(安東)이라. 성(姓)을 얻은 이래 신라(新羅) 고려(高麗)를 지나오는 동안 공(公)이며 백(伯)이며 학사(學士)가 많이 났었다.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고(顧)라는 할아버지께서 태종(太宗)을 섬겨 한원(翰苑)을 지내시고 좌사간(左司諫)에 이르시다. 이분께서 이름 맹염(孟廉)을 나으시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신데 공(公)의 5세조요 고조(高祖)의 이름은 철균(哲鈞)이시니 전농사주부(典農寺主簿)시고 증조(曾祖)의 이름은 수형(壽亨)이니 장예원사의(掌隸院司議)이시고 좌승지(左承旨) 증직(贈職)을 받으셨다. 할아버지 언묵(彦默)은 공(公)의 고조(高祖)라. 학문을 힘쓰시고 기절(氣節)을 숭상하다가 일찍 돌아가신 후 이조참판(吏曹參判) 증직(贈職)을 받으셨다. 부친의 이름은 석(錫)이니 조정암문(趙靜庵門)에서 수업을 하시어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소학(小學)』으로 자기 수신을 삼아 사림(士林)에 명망(名望)이 높으셨다. 기묘(己卯)화를 만나 종적( 迹)을 감추시고 환로(宦路)에 나가시지 않으셨는데, 돌아가신 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追贈)된 행주기씨(幸州奇氏)로, 지평(持平 형(逈)의 딸인데 매우 부덕(婦德)이 있다.
중종(中宗) 을해(乙亥:1515년) 11월 23일에 공(公)이 서울의 남산 아래 주자동(鑄字洞)에서 탄생하시었다. 4세로부터 유희(遊戱)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행동이 단중(端重)하시었고 예(禮)를 묵재(墨齋) 이문건(李文楗)선생에게 물으시고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하시었다. 중종(中宗) 계묘(癸卯:1543년)에 생원(生員)과 진사(進仕) 두 시험에 합격했다. 을사(乙巳 1545년)에 요사한 중인 보우(妖僧普雨)가 좌도(左道)를 권위로 장악하고 민중을 미혹(迷惑)하는데, 이때에 공이 백의(白衣)로 주상께 상소(上疏)하다가 비상한 화를 당할 번하기가 측량할 수 없었다. 병오(丙午)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올라 괴원(槐院)에 들어가셨다. 정미년(丁未年)을 당하여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의 좌로 청주(淸州)에 유배됐다가 정묘(丁卯)선조대왕(宣祖大王) 즉위(卽位)하시는 동시 놓아주시고 특히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제수하시고 곧 북도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를 지내시고 돌아와 정언(正言)·지평(持平)·헌납(獻納)을 역임(歷任)하시고 경오(庚午)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이 되시고 하지서장관(賀至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 돌아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시었다. 공(公)께서 여러번 대성(言論機關)에 오르매 자신이 경직함을 맡아 글장마다 핵론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하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어 탐재묵리(貪財墨吏)가 손을 거두지 않는 이가 없어 이때에는 이르되 참 임금과 참 신하가 있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신미년(辛未年)에 지평(持平)으로 봉양하기 위하여 안악군(安岳郡)을 제수 하였다. 계유년(癸酉年)에 모부인(母夫人)상(喪)을 당하여 묘하(墓下)에 돌아와 저녁새벽이면 항상 산소에 가서 곡(哭)하시다가 을해년(乙亥年에) 이르러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시고 3일을 지나 괴산(槐山)촌집에서 돌아가셨다. 즉 10월 4일이라. 초장은 선영하에 모시었다가 그 후 바로 충주신당건지산사좌지위(忠州新塘乾支山巳坐之原)에 이장하였다. 제삼자 충무공(第三子 忠武公) 휘(諱) 시민(時敏)이 책훈(策勳)으로 귀하게 되어 순충적덕보조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 성균 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상락군(贈純忠積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上洛君)에 증직되었다. 전배(前配)는 광주김씨(光州金氏) 검열(檢閱) 신동(神童)의 딸이라. 갑진(甲辰)에 졸(卒)하시어 고향으로 모시었다가 계축(癸丑) 봄에 이곳으로 합폄(合 ) 하였다. 1남을 낳으니 시회(時晦)로 병조좌랑(兵曹佐郞)이오. 후배(後配)는 창평이씨(昌平李氏)참봉(參奉)성춘(成春)의 딸인데 갑오(甲午)에 졸(卒)하여 지금의 천원군(天原郡) 병천면( 川面) 가전리(佳田里) 도정산(桃汀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시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시각(時覺)은 생원(生員)이오 시민(時敏)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선무이등공신 영의정(慶尙右道兵馬節度使宣武二等功臣, 贈領議政)에 추증(追贈)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시호(諡號)는 충무공(忠武公)이오, 시신(時愼)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追贈)되고, 시진(時進)은 내시교관(內侍敎官)이오, 딸은 장녀는 목흥복(睦興復)에게 출가(出嫁)하고 차녀는 부사(府使) 이시익(李時益)에게 출가했다. 후배(後配)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남아(男兒)는 시약(時若)이니 무과에 올라 창성부사(昌城府使)로 정묘호란(丁卯胡亂)에 둘째 아들과 더불어 같은 날 해를 입어 절사(節死)하였다. 그 나머지는 생략(省略)한다.
공(公)은 뜻과 생각이 전정(專精)하여 한결같이 힘써 행하고 글공부하는데 넓은 바다같이 크게 펼쳐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의복지지(醫卜地誌)에도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항상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데는 성현을 위주로 하고 문장을 하는데는 양한(兩漢)을 위주로 하여, 뜻과 기운이 초매(超邁)하고, 지상(志尙)이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명종선조(明宗宣祖)때 최고문장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공(公)의 사부(詞賦)를 읽어보고 당대 문장이라 항상 칭찬했으며, 혹 봄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春風 水) 즐거움이 된다고 했으며, 혹 신선의 골격이며 도인의 풍채로 여겨 물외에 표연(飄然)하며 대절(大節)이 당당해서 빼앗기지 않을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했다. 공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학사(學士) 이휘(李輝)의 시체 곁에서 통곡하되 옆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하고 장송가 한 곡조가 서리와 눈발같이 늠연(凜然)하니 공(公)의 평생 기절을 가히 알만하다.
명(銘)에 말하다.
대대 충효의 문벌이 끊어지지 않고 혁혁(赫赫)하였다. 공(公)의 부친은 기묘명현(己卯明賢)이시고 아들은 임진(壬辰)에 큰 공(功)을 세웠다. 평생에 청직한 절의는 보우(普雨)라는 요승(妖僧)을 용서치 않으셨다. 양재역(良才驛)의 화(禍)가 있어 현량한 이가 다 여기에 얼키였다. 사람이 감히 가까이 하는자 없으나, 홀로 자신이 나아가 통곡하네. 천추(千秋)에 늠름(凜凜)하여 썩지 않으리, 장송가(長松歌)몇 곡은. 비석을 이제 새긴다하나 그 만분의 일도 쓰지 못한다. 언덕이 없어지고 골짜기 옮기는 날이라도 초동목수는 아무쪼록 보호하여 침범하지 말라.
계해모춘二十五日 裔孫 相衡 謹譯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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