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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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계재공 소개

 2. 친필 소개

3. 그림 및 진본 관람기

 4. 거주지 조사

5. 안사연 거주지탐방

 6. 쌍계재 시문 종합

7. 거문고 관련 논문

 8. 우주두율 발문

9. 한백륜신도비명

10. 각종 문헌 내의 기록 자료 종합

 

본문

p11.png 4. 쌍계재 거주지 조사 자료

         (2003. 8. 19. 주회(안) 제공)

1) 서울600년 4권 (1996, 김영상)

琴軒의 雙溪齋 (금헌의 쌍계재) - 성균관 북쪽 운치 깃든 절경

-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2)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김유(金紐)

★자고는 평양부원군 ★조준(趙俊)의 외손이니 부귀가에 나서 젊을 때부터 방랑하여 단속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짓는 데에 능했으며 또 행서와 초서를 잘 썼고 거문고까지도 뛰어났다.

여러번 대과(大科)에 당선되어서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대신들이었다. 잔치 베풀기를 좋아했으니 술잔 같은 모든 도구들이 지극히 호화롭고 사치했으며, 문아(文雅)가 한 시대를 휩쓸었다.

서재를 남강(南江)에 짓고 또 반궁(泮宮) 북쪽 골짜기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서 매양 봄이면 친구들을 불러 시를 짓고 실컷 마시며 멋지게 놀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지목했으니, 시와 글씨와 거문고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년에 두 발이 마비되어서 일어나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얘기하고 술 마시고 시 읊조리는 것은 여전하였다. <용재총화>

이李자는 金자의 잘못이다 유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세조때 사람. 문과하여 벼슬은 판서. 그림을 잘 그렸다. <연려실기술 별집>

필적모간 <해동명적> <초로관주>

-泮宮(반궁) : 반궁은 周代 諸侯(제후)의 學宮(학궁). 여기에서는 成均館의 별칭

 

3) 쌍계재 찾기

(2005. 4. 11. 태서(익) 제공)

<연려실기술>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해동잡록>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자고(子固)요, 호는 금헌(琴軒)이다. 세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와 등준시(登俊試) 두 과(科)에 합격하여 이조참판이 되었다. 시와 글씨, 거문고를 잘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로 지목하였다. 또 음률(音律)에도 정통하였으며 일찍이 성균관 북쪽 골짜기에 쌍계재(雙溪齋)를 짓고, 봄마다 벗을 맞이하여 시를 읊고 늘어지게 노래 부르며 한가로이 지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쌍계재(雙溪齋) 옛터가 성균관 반수(泮水)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姜希孟)의 부(賦)에, “서울 왼쪽 경계요, 반궁(泮宮)의 북쪽 언덕이네. 풍운은 모여 흩어지지 않고, 동학(洞壑)은 아늑하고도 넓도다.

* 글 읽는 소리[絃誦] 공자묘에서 들리는데,

* 성중에서 살 곳을 찾아, 멀다고 여겨 찾지 않은 곳 없었다네. 반수(泮水)에 찾아보다가, 물 근원 다 가서야 이 자리 얻었다네. 남쪽을 앞으로 하고 북쪽을 등졌으니, 군자의 거처할 곳이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동쪽으로 흐르는 초교(初橋) 물은 수원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나오는데, 동반수(東泮水)는 성균관 앞 다리와 식당교(食堂橋)와 비각교(碑閣橋)를 경유하고, 서반수(西泮水)는 집춘문(集春門) 앞 다리를 경유하여 대성전(大成殿) 남문 밖에서 합하며,

 

<서울 육백년사>자료

* 조선의 서울 천도 후 태조 6년(1397)에 문묘(文廟) 즉 공자묘(孔子廟)를 중심으로 하는 성균관 건물의 기지(基地)를 지금의 명륜동으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7월에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서무(東西璥) 등 대소 건물을 완성하고 정도전(鄭道傳) · 권근(權近)을 성균관 제조(提調)로 임명하여 유생(儒生)들로 경사(經史)를 강(講)하게 하니 이것이 현재의 성균관의 첫 출발이었다.

 

* 흥덕동(성균관 부근)시내―향교―장경교―초교(흥인문 안)―오간수문(합류)

* 성균관 흥덕동천수(興德洞川水)가 향교 · 장경교 · 초교를 거쳐 오간수문으로 흘러가며

* 성균관 부근의 흥덕동의 여러 개울물은 동편에 있는 향교(香橋)를 비롯해서 관기교(觀旗橋) · 광례교(廣禮橋) · 토교(土橋)를 지나서 장경교(長慶橋) · 신석교(新石橋) · 초교(初橋)에 이르러 흥인문 남쪽에 있는 오간수문(五間水門)과 합친다

 

* 향교;성균관 동쪽인 현 명륜동 1가 16번지 명륜파출소 앞쪽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부근 흥덕사가 있었으므로 흥덕골 또는 흥덕동이라 하는 곳인데, 산수가 매우 맑고 아름다운데다 온갖 꽃나무 · 화려한 누각 · 큰 연못들이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이 연달아 피어 늘 꽃동산을 이루었다 한다. 그리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인 흥덕골 꽃구경 또는 연꽃구경[흥덕상연(興德賞鍊8]으로이름났던 흥덕동 뒷산에서 흐르는 하천을 건너기 위해 놓았던 다리가 바로 향교이다. 여기서 ‘한도십영’이란 장의심승(藏義尋僧) · 제천완월(濟川翫月) · 반송송객(盤松送客) · 양화답설(楊花踏雪) · 목멱상화(木覓賞花) · 전교심방(箭郊尋芳) · 마포범주(麻浦泛舟) · 흥덕상화(興德賞花) · 종가관등(鍾街觀燈) · 입석조어(立石釣魚)를 말한다.  

 

<결론>

연려실기술에서 쌍계동은 잘못된 표기가 아닌가 생각되며 쌩계재로 하는것이 맞을것 같습니다.

반궁(泮宮)과 공자묘(孔子廟)는 성균관을 뜻합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흥덕동(지금의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부근)시내가 눈에 뜨입니다. 흥덕동 뒷산에서 흐르는 하천을 건너기 위해 놓았던 다리가 바로 향교(현 명륜동 1가 16번지 명륜파출소 앞쪽)라 하니 흥덕동 뒷산이 쌍계제터는 아닐까요.

일단 쌍계재터는 현재 성균관 구내는 아니고 혜화국교나 그 밑쪽이 아닐까 하는 혼자 생각을 해봅니다

 

*<서울육백년사>에서

화원 이징(李借8은 당대의 달인이었는데 위세를 빌어 인평대군은 그에게 단청화원으로 일하게 하였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일을 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이 집도 후에 허물어졌고 장생전(長生殿)이 들어서게 되었다.

같은 타락산 아래에 신광한(申光漢)의 제택이 있었다. 세칭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로 알려져 있었고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쓰고 새긴 ‘홍천취벽(紅泉翠壁)’의 4자가 있어 유명하였다. 이 집이 있던 곳은 지금의 동숭동인데 이 일대에는 남숭문(南尙文) · 강세황(姜世晃) · 남치원(南致元) 제택과 쌍계재가 있었다.

 

「쌍계동은 반궁(泮宮, 성균관) 위 골짜기에 있는데, 두 개의 샘이 시내(澗)를 이루며, 김자고(金子固)가 시내를 끼고 집을 지어 복숭아 나무를 심고 무릉(武陵)을 모방하였다.」

하였다고 하였다. 강희맹의 부에는

「김자고가 문아(文雅)로 당시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호준(豪俊)한 사람들이 많이 따르며 놀았다.」

라고 읊었다. 자고(子固)는 참판 김유(金紐)의 아호이다.

 

<출처;서울육백년사>

 

   * 홍천취벽(紅泉翠壁)

종로구 동숭동 129,130번지 동숭동 뒷산이 낙타산(駱駝山)인데 낙산(駱山)이라 통칭한다. 이는 이 산 중앙부가 돌출하여 마치 낙타(약대)의 등과 흡사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 산에는 ‘낙타유방’이라고 하여 약수가 두 군데 있으니 이화동 약수와 신대 약수가 그것이다. 신대(申臺)란 기재(企齋) 또는 낙봉(駱峯)이란 호를 가진 신숙주(申淑舟)의 손자 신광한(申光漢, 1484∼1535)의 옛 집자리다. 신대 약수 석비에 ‘홍천취벽(紅泉翠壁)’이란 4자의 각자가 있으니, 시 · 서 · 화 3절의 칭을 듣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씨다. 이 근방에 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암벽이 훼손되어 현재는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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