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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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계재공 소개

 2. 친필 소개

3. 그림 및 진본 관람기

 4. 거주지 조사

5. 안사연 거주지탐방

 6. 쌍계재 시문 종합

7. 거문고 관련 논문

 8. 우주두율 발문

9. 한백륜신도비명

10. 각종 문헌 내의 기록 자료 종합

 

본문

p11.png 9. 쌍계재께서 지으신 한백륜 신도비명

           (2005. 4. 18. 발용(군) 제공)

韓伯倫(한백륜) 신도비명  (한백륜의 신도비는 인천시 서구 마전동(능말)에 있음)

 

公의 諱는 백륜(伯倫)이요 자(字)는 자후(子厚)이다. 감사공 창(監司公 昌)의 아들이요 찬성공 계복(贊成公 季復)의 손자이다. 公은 어려서부터 비범(非凡 : 뛰어남)하여 경술(經術 : 經書에 관한 학문 또는 統治方法)을 통달(通達)하고 기국(器局 : 재능과 도량)이 크고 활달(豁達)하였다.

 

처음에는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直長同正)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여러 번 전근(轉勤)하여 의빈부도사(儀實莩事)가 되었다. 성화 무자(成化 戊子 : 1468)에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올랐다. 처음 창릉(昌陵 : 睿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지금 의 王大妃를 선(選)하여 소훈(昭訓)을 삼았는데 이때에 즉위(卽位)하여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고 公은 보국숭록대부 청천군(報國崇綠大夫 淸川君)으로 진계(進階)하고 오위 도총관(五衛 都摠管)까지 겸하였다.  이윽고 역당(逆黨)이 일어 난(亂)을 일으키거늘 公이 左右에서 힘을 다하여 제거(除 去)하니 이로 인(因)하야 익대공선(翼戴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고 기죽(己丑 : 1469년)에 대광(大匡)을 더하고 겨울에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今上께서 대통(大統)을 입계(入繼)하고 王大妃를 높여 母后로 삼고 公의 대우(待遇)를 더욱 후(厚)하게 했다. 경인(庚寅 : 1470)년에는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에 제수되고 경연(經筵)도 公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하였다.

 

신묘(辛卯 :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下賜)받고 겨울에는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리고 甲午(1475)년 5月 丁亥日에 병(病)으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48이라.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애통해하여 조회를 파하고 누차 내신을 보내 사제(賜祭)를 하고 부의(賻儀)를 등(等)에 넘게 했으며 장례(葬禮)는 외조고(外祖考)를 대우(待遇)하던 고례(故例)대로 하고 시호(論號)를 양혜(襄惠)라고 했다.

 

公은 관후(寬厚)하고 화평(和平)하여 늘 선세(先世)의 미덕(美德)을 계승하였고 몸이 국구(國舅)가 되어 문벌의 경사(慶事)가 더욱 컸지만 마음 갖기를 더욱 겸손하게 하였으니 公의 높은 복덕(福德)으로 보아 마땅히 그 영화(榮華)를 누릴 터이요, 장수(長壽) 도 할 터인데 갑자기 이지경에 이르니 천도(天道)가 어찌하여 이렇게 박(薄)하였을까? 아, 애통하도다. 公의 病이 위독할 때에 유명(遺命)하기를 모든 상제(喪祭)를 일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하라고 했다 하니 여기에서 더욱 公의 平日의 수양(修養)한 바를 알 수 있도다. 甲午年 7月 己卯日 손시(巽時)로 금릉현=김포군(金陵縣=金浦郡)의 남쪽, 지금의 음단리(音段里)에 예장(禮葬)하였다. 夫人은 서하부 부인 임씨(西河府 夫人 任氏)니 公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나 고양군(高陽郡)에 장사(葬事)하였다가 이제 옮겨서 公墓에 부장(부葬)하였다.

 

夫人은 바로 감찰(監察) 휘 유(諱 柔)의 따님이니 監察도 王大妃 때문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을 증(贈)하였다. 夫人은 얌전하고 아름다워 현행(賢行)이 있어서 능 히 덕문(德門)의 배필(配匹)이 될만하여 王大妃를 出生했으니 땀의 순차(順次)로 長女 인것이다. 男의 長은 환(歡)이니 통정 돈영부도정(通政 敦寧莩正)이요, 次는 열 항 순(悅 恒 恂)이요. 女는 종실 귀성군 준(宗室 龜城君 浚)에게 갔고 次는 돈영부직장 남효원(敦寧府直長 南孝元)에게 갔고 次는 문소전참봉 원재(文昭殿參奉 元재)에게 갔고 次는 어리다. 王大妃의 아들 현(현)이 제안대군(齊安大君)이요, 女의 長은 貞淑公主요, 次는惠順公主이니 먼저 卒했다. 直長이 一男을 生하니 걸(傑)이다.

 

葬禮를 모신지 3個月만에 도정(都正)이 그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請하므로 내 감히 사양치 못하고 서(序)하고 銘해주노니

 

  德도 주었거니와 福도 주었는데

  그 壽에 대하여는 어찌 인색하였는고

  울창한 저 뫼뿌리여 차가운 저 강물

  여기서 公의 유당(幽堂)임을 銘하여 영원히 傳하노라.

         첨지중추부사 김 뉴(僉知中樞府事 金 紐)가 짓다.

 

*한백륜 소개

韓伯倫(한백륜) 묘역(인천광역시 기념물 54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서구 마전동(능안마을) 산120-4

 면 적 : 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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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伯倫(한백륜)은 朝鮮廟(조선묘) 世宗9年(1427. 7. 4)에 誕生(탄생) 成宗5年(1474. 5. 3) 享年(향년) 48歲(세)에 逝去(서거)하였으며, 字(자)는 子厚(자후)요, 號(호)는 毅菴(의암), 本貫(본관)은 淸州(청주), 諡(시)는 襄惠(양혜)이며 淸州韓씨(청주한씨) 襄惠公派(양혜공파) 中始祖(중시조)이다.

 

朝鮮廟(조선묘) 제8대 睿宗大王(예종대왕)의 妃(비) 安順王后(안순왕후)의 아버지로서 淸川府院君(청천부원군)에 封(봉)해졌으며 세종28년(1446년) 겨울 弱冠(약관) 19세에 官職(관직)에 出仕(출사) 五衛都摠管(오위도총관)등 要職(요직)을 거쳐 성종원년(1470년)에 議政府(의정부) 右議政(우의정)에 除授(제수)되었다.

 

奉職(봉직)하는 동안 2차에 鐵券敎書(철권교서)를 받는등 文武(문무)를 겸비한 忠直(충직)한 功臣(공신)으로 外戚(외척)의 近臣(근신)이라는 汚名(오명)을 씻고자 여러차례 官職(관직) 辭任(사임)을 奏請(주청)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陞差(승차)시켜 保國(보국)토록 하였다. 또한 살고 있는 집이 너무 낡고 陋醜(누추)하여 친구들이 改修(개수)하도록 請(청)하니 웃으면서 “先人(선인)께서 물려준 것으로 비바람만 가리면 足(족)하네” 하며 淸貧(청빈)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다.

-묘지명게재-

 

예종원년(1469. 5. 20)에 내려진 鐵券(철권) 爵號(작호)는 推忠定難翊戴功臣輔國崇祿大夫淸川君五衛都摠莩摠管(추충정난익대공신보국숭록대부청천군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稱(칭)하고 성종원년(1470. 4. 6)에 大匡輔國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淸川府院君(대광보국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청천부원군)으로 重用(중용)되며, 성종2년(1471. 3. 27)에 純誠明亮經濟佐理二等功臣(순성명량경제좌리이등공신)으로 冊祿(책록)되는 2차의 鐵券敎書(철권교서)가 내려진다.

- 조선왕조실록 게재 -

 

韓伯倫(한백륜)은 溫和(온화)하고 謙遜(겸손)한 性品(성품)을 지닌 朝鮮朝(조선조) 前期(전기)에 淸白(청백)한 忠臣(충신)으로 當代(당대) 名望家(명망가)인 鄭麟趾(정인지), 韓明澮(한명회), 申叔舟(신숙주)등과 國政(국정)에 참여하다 薨(훙)하니 高陽郡(고양군)에 禮葬(예장) 되었던 配位西河府夫人(배위서하부부인) 豊川(풍천) 任(임)씨(1472. 5. 8서거)와 함께 이 墓域(묘역)에 安葬(안장)되었다. 그 時代(시대)를 잘 描寫(묘사)한 5편의 靑蓋瓦(청개와)로 된 墓誌銘(묘지명, 1981년 발굴)에 韓伯倫(한백륜)의 淸廉潔白(청렴결백)과 獻身的인 爲國忠節(위국충절)의 정신이 잘 새겨져 있어 후세들에게 많은 龜鑑(귀감)이 되고 있다.

 

墓域(묘역) 안에는 그 당시 三絶(삼절)이라 부르고 世祖實錄(세조실록)과 睿宗實錄(예종실록) 편찬에 크게 기여한 文臣(문신) 金紐(김뉴)가 지은 神道碑(신도비)와 그 외 墓碑(묘비)등 敷石物(부석물)이 있다.

 

지금 이곳 마을을 陵安(능안)골이라고 부르는데 韓伯倫(한백륜)의 墓(묘)가 陵(능)과 같이 크다하여 陵(능)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命名(명명)되어 전해오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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