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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순문 묘갈 (2004.8.20. 발용(군) 제공) 有明朝鮮國?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官直提學尙瑞院正沈公墓碣銘 幷書 資憲大夫前議政府右參贊兼知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金安國 撰 宣務郞承文院正字 金魯 書 (後略)
유명조선국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예문관 직제학 상서원 정 심공 묘갈명 병서 자헌대부 전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사 홍문관 제학 동지성균관사 김안국은 글을 짓고 선무랑 승문원 정자 김로는 글을 쓰다. (후략) ▲ 심순문 묘소 전경
▲ 심순문 묘갈
비(碑) 전면에는 여의주를 올려다보는 한 마리의 용이 있고, 밑에는 운문 (雲紋)이 있으며, 후면에도 앞면과 동일하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고 측면에는 운문과 용꼬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비(碑)의 마멸상태는 양호하며 전체가 판독 가능하다.
▲ 심순문 묘갈 탁본(전면)
▲ 심순문 묘갈 탁본(후면)
심순문(沈順門) 1465(세조 11)∼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지(敬之). 청송부원군 회(澮)의 손자이고, 내자판관 원(湲)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연원(連源)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학업에 뜻을 두지 않고 방황하였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여 엄히 훈계하고 교육하니,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어 열심히 학문을 닦게 되었다.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었다. 이어서 박사에 승진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부수찬·정언·부교리·지평을 거쳐, 1503년 장령에 올랐다.
이때 국왕 의복의 장단을 지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고 이듬해 갑자 사화에 연루되어 개령현(開寧縣)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여 연산군의 폐정을 자주 지적하였다. 중종 때에 복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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