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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양중(李養中) 묘갈 (2005. 1. 3. 발용(군) 제공)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군 초월읍(草月邑) 신월리(新月里) 山 22-1 건립연대 : 1518年(중종 13) 찬 : 김안국(金安國) 서 : 김 노(金 魯) 立 : 이 손(李 蓀) 비규모(碑規模): 총고 137cm, 비고 122cm, 폭 42cm, 후 16cm 서자경(書字徑): 음기(陰記)2.0cm 비재질(碑材質): 비신(碑身) : 대리석, 대석(臺石) : 화강암
1518년에 건립된 이 비는 비좌원수(碑座圓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대석에는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비의 마멸은 상부가 심해 일부 판독이 난해한 곳이 있으며, 묘소에는 숙인 진주강씨(晋州姜氏)와 합장. 호석·상석·향로석·족석·혼유석·계체석·장명등·망주석이 있다. 그리고 1990년 5월에 세운 비좌개석의 대리석 묘표는 후손 이경순(李景淳)이 비문을 짓고, 이지희(李志熙)가 글씨를 썼으며, 묘소입구에 있는 비좌이수의 대리석 신도비는 1982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장석기(張錫驥)가 비문을 지었다. 이 묘소는 1989년경 광주군 동부면 덕포리[현 하남시]에 서 천장한 것이다. 이양중(?~?)은 고려 후기의 절신(節臣).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방귀(方貴)의 아들이다.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 후 은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므로 태종이 수차례 방문하여 부임을 종용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광주(廣州)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신도비 탁본(42*122)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 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金安國 撰, 正德十三年冬會孫 秉忠奮義靖國功臣崇祿大夫漢山君蓀 立石玄孫女婿 進士 金魯 書.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경연사홍문관제학동지성균관사 김안국은 글을 짓고, 현손녀사위 진사 김로는 글씨를 쓰다.
▲ 이양중 묘소 전경
▲ 이양중 신도비
▲ 신도비 부분 글씨
<출전 :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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