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구만(金龜萬)1632년(인조 10)∼1699년(숙종 25)--(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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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승지공 및 연보 소개

 2. 묘소 사진 소개

 3. 교지 및 유서 소개

 4. 친필 소개

 5. 시문 소개

 6. 치제문 소개

 7. 만사 소개

 

본문

p11.png 6.<致祭文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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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작일시 : 1699(숙종25)

2. 수령자 : 김구만

3. 출전 : <상락가승>(1895년(고종32). 金龜浩 著. 김항용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자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김익수 감수)

5. 원문    致祭文(원문생략)

6. 역문

 

국왕은 신하 예조좌랑 朴師東을 보내 죽은 전 부사 김구만의 영혼에 고하여 제사하노라.

영령은 명신의 자손이요 대대로 벼슬을 지낸 옛 문벌이라. 天品은 고지식함에 가깝고 입은 아부하지 않았다. 소질이 많으며 文名이 뛰어났다. 행함에 있어서는 재주를 겸하여 여유가 있었고, 이름은 진사시에 올라 칭송이 士流에 드높았다.

 

처음에는관직에서 재능을 펴지 못했으나 애써 수고를 다하여 나중에는 공적이 있었다. 늦게서야 문과에 올라 승진하는 길이 마침내 열렸다. 대석(臺席: 승지)에 세 번 오를 정도로 그 풍채가 가히 볼 만 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관이 되었는데 지역 풍속이 안정되었다. 낮은 벼슬도 사양치 않았는데 역승(驛丞)이든지 절도사의 영(營)에 있든지 재주가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큰 고을을 맡아 서울을 튼튼히 하였고, 여러조(曹)에 역임하였는데 주로 요직에 있어 궁궐에 출입하면서 상소문의 옳은 것은 올리고 나쁜 것은 막는 적당한 활동을 하였다.  내가 연경에 가 있을 때 그대는 내 곁에서 실로 나를 보살피고, 화답하며 서로 즐겼던 것이 어수일당(漁水一堂:임금과 신하의 친절한 사이)이었다.

 

경연석에서는 성심으로 진언하여 사치로 문란해진 것을 개혁하고, 나라를 위하여 먼 장래까지 생각하여 나라를 튼튼히 보호하는데 힘썼다. 비복들에게는더욱 더 어질게 대하여 돌보아줌이 매우 돈독하였고 전원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기회를 보아 농사도 짓곤 하였다. 명예가 훼손됨이 없었고 관직에 나아가거나 물러감에 있어서는 항상 신실하였고 험한 길에 조심하듯 하고 장마가 걷힌 듯하였다.

 

남녘땅의 현령으로 명을 받았다가 동강(東崗: 강원도, 경북의 동쪽지방)에 수령으로 천거되어서는 편안하고 한가하게 자적하다가 만년에 은혜를 입어 관동의 절도사(또는 절제사)로 겨우 돌아왔는데 2년만에 갑자기 별세하니 인재로 쓰임이 다하지 못하고 영원히 구천으로 떠나고 말았다. 충성스럽고 순박한 성품과 뛰어나게 특출한 모습은 이제 끝이로다. 만나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내 마음 아리고 슬프도다. 이미 이품(二품)의 반열에 올랐으나 부임하지도 못했도다. 나라에서 논의하여 슬픈 일을 담당하는 일에 있어 특별한 은전으로써 함께 도와 약소하나마 예관을 보내 제를 올리고 문상하니 흠향할 지어다.

 

通訓大夫司僕寺正 知製 洪重夏 지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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