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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주 자연사 박물관 내에 있는 남봉공의 <유한라산기> 현판 액자>
<유한라산기 번역문> 출전 : <탐라지>(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편찬). 주요내용은 2002년 7월 "도서출판 푸른역사"에서 펴낸 "역주탐라지"에서 발췌함. “내 일찍이 한라산이 바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듣고 등정(登頂)하여 장하게 유람하고자 마음먹고 있었으나,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1609년(광해군 1)초봄에 천관랑(天官郞)으로 임금님의 은혜를 입어 특별히 제주통판(通判;판관)에 임명받았다. 이 해 3월 비로소(제주로)건너가게 되었다. 바닷길에서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니 그다지 험준하지 않은 듯하였다.
길다랗고 커다란 산록(山麓)이 한 면에 가로질러 있을 뿐이었다. 몰래 스스로 말하기를,‘세상에서 소위 영주(瀛洲) 라는 곳은 곧 이 산이니 삼신산(三神人)의 하나로 신선이 산다고 하여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한 게 아닌가! 언뜻 인정이란 귀로 듣는 것을 귀하다 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천하다고 그럴 것인가! <산을>찾아가서 살피어 의혹을 깨뜨리고 싶지 않겠나’ 라고 하였다. 부임하고 10여 일 만에 마침 민응생(閔應生)군과 함께 한라산의 승경(勝境)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 민군(閔君)은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조만간 당신께서 틈을 타서 한번 오른다면 이 사람도 따라 나서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선경(仙境)은 만나기 어렵고 인사(人事)는 어그러지는것이니, 공무에 바빠 거의 겨를이 없다‘고 하자 ’옛 사람이 이르기를 공무를 다 마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관사(官事;관청일)를 다 완료하길 기다린다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내 갈 계획을 결심하고 민군과 이효성(李孝誠) 및 정기수(鄭麒壽) 등과 함께 말을 타고 성(城)을 나섰으니, 때는 마침 4월8일이었다. 오던 비는 개어 따뜻한 날씨는 화창하고 들판은 손바닥 같은데 예쁜 푸새가 펼쳐 있었다. 무쉐내(鐵川) 냇가의 물을 따라 말을 타고 올라가니 철쭉과 진달래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 빛나며 눈으로 볼수록 조용히 읊으니 모두 그림 가운데 있는 듯하다. 가다가 20여 리에 이으러 언덕 가에 쉬면서 낭떠러지의 시냇물을 굽어보니 온갖 골짜기의 푸른 숲이 우거져 사랑스럽다. 얘기하며 발걸음을 옮기니 이미 정오(正午)가 되었다. 드디어 말을 타서 산으로 들어가니 한 줄기의 길은 마치 뱀처럼 얽혀 돌아 구부러졌다. 고죽(苦竹:참대)은 땅을 덮고 교목(喬木:곧은 큰 나무)은 하늘을 가렸다. 비스듬히 모자를 쓰고 녹음(綠陰)아래를 지나니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 나로 하여금 몸과 맘이 모두 상쾌함을 느끼게 하였다.
노로오롬(獐嶽)을 거쳐서 삼장골(三長洞)에 들린 다음 삼장(三長)에서 볼레오롬(浦涯岳)을 넘어 비슬거리며 남쪽으로 향하여 한 정사(精舍)에 이르렀는데 높은 곳은 안개와 구름이고 얕은 아래는 푸른 바다를 압도하니 이곳이 곧 존자암(尊者菴)이다. 8,9칸이나 되는 판자집은 띠로 지붕을 덮어 사치스럽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았다. 한 외국의 승려가 문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맞아 선당(禪堂:참선하는곳)으로 안내하기에 그 스님의 이름을 물으니 수정(修凈)이라고 하였다.
내가 좌우를 돌아보며 일러 말하기를 “이 산은 아득하여 먼바다 2천리 밖에나 떨어진 곳인데<우리가 유람하는 것은>실로 평생 꿈에서도 오지 못할 곳이거늘, 우리가 오늘 놀러 찾아온 것이 운수가 좋은 게 아닌가!” 하니,모두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웃으며 말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산색(山色)이 갑자기 캄캄해지며 천둥소리가 바위를 울렸다. 모두 생각한다는 것은 다 헛되어 비어버리고 불등(佛燈)만이 반짝거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짤막한 율시(律詩)를 읊으며 지어 민군에게 보였다.
새벽에 큰바람이 불어 그 성난 바람소리가 산악을 흔들더니 민군이 놀라서일어나 창문을 열면서 말하기를, ‘풍세(風勢)가 몹시 사나워 날씨가 자못 침침하여 비록 산정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멀리 바라보기란 어렵습니다. 후일을기다려 유람하여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은 참으로 옳다. 다만 옛 사람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묵묵히 기도하면 형악(衡岳)의 그름도 걷히게 된다.‘고했으니,정성을 드리면 잘 풀려나갈 수 있다. 나의 현명함이 비록 만(萬)에 하나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마음속의 정성은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그대는 좀 천천히 기다리지‘라고 대답하였다. 동이 터 밝하오자 과연 바람은 잔잔해져 드디어 일찍 식사를 마쳐 갈길을 재촉하였다.
스님 수정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니 겹겹이 중첩된 언덕과 오름이 겹쳐 길은 매우 위태로웠다.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빽빽한 골짜기를 헤쳐 나서니 점차 아름다운 경지(境地)로 들어섰다. 6,7리나 지나 영실(靈室)에 다다르니 골짜기가 자못 넓게 트인 바로 이곳이 옛 존자암의 터전이다. 천길 푸른 절벽이 둘러 있어 마치 병풍처럼 우뚝하며, 위에는 괴석(怪石)이 마치 나한(羅漢)처럼 500여 개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래는 샘이 잔잔하게 졸졸 흘러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스님 수정이 나에게 알리기를, ‘골짜기 속에는 백록(白鹿)이 영주초(瀛洲草)를 뜯어먹어 왕왕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본답니다. 실로 여기가 신선이 산다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나는 흥겨워 시(詩)로써 읊어 마치기도 전에 종자(從子;따라 다니는 사람)가 말하되,여기에서 봉우리를 오르기까지는 아지고 멀어 오래 쉴 수가없습니다.‘라고 하여 부득이 다시 골짜기를 나섰다. 골짜기 동남쪽 산자락에 한 석굴(石窟)이 있어 이름하여 수행(修行)이라고 하였다. 옛날 한 도승(道僧)이 그 안에 살았더니 무너진 온돌이 지끔껏 남아 있다. 수행굴(修行窟)을 나서 10여 리 지나니 칠성대(七星臺)에 다다랐다. 이 대(臺)에서 동쪽으로 다시 5리쯤 지나 쳐다보니 석벽(石壁)이 깍아지른 듯 우뚝 서서 기둥처럼 하늘을 떠받쳤다. 이것이 곧 이른바<한라산>상봉(上峰)이란다. 이에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밀고 당기며 올라가니 험한 돌길이 구름에 닿아 인적이 통하지 않았다.
온 산이 향나무요, 위로는 우거진 숲으로 해를 가리우고 아래로는 둥굴레가 바위 위로 얽혔다. 뭇 풀과 온갖 꽃은 그런 틈에 뿌리도 박혀 있지 못했으며 층층 봉우리와 절벽에는 얼음과 눈이 아직도 쌓여 있어 가죽 겹옷을 입었어도 추운 기운이 몸에 스며들어 움츠러져 실로 인간 세계가 아니로다. 정오(正午)에 비로소 정상 위에 닿아 혈망봉(穴望峰)을 향하여 대좌(對坐)하였다. 이 봉우리는 한 구멍이 꿰뚫어 건너 통해 볼 수 있으니 그런 까닭으로 지어진 명칭이다. 사면이 봉우리로 둘러 마치 성곽 속에 연못이 있는 듯, 그 깊이는 장여(丈餘;한 길 남짓)쯤 된다. 이를 백록담(白鹿潭)이라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뭇 신선이 이 연못에서 백록(白鹿)에게 물을 마시게 하였으니,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때에 햇볕이 거울에 비추듯 하고 해색(海色)이 옷 다려놓은 듯, 위아래로맞닿아 가없이 아득한데 맑은 바람은 솔솔 불고 기특한 향기는 코를 찔렀다. 바위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불며 망건(網巾)을 걷어 멀리 살펴 바라보니 동남쪽은 영파(寧波).유구(琉球). 남만(南蠻;남쪽오랑캐). 일본(日本). 마라(磨羅;지금의 마라도).지귀(地歸;지금의 지귀도). 무협(巫俠). 송악(松嶽).산방(山房). 성산(城山)이요 서북쪽은 백량(白粱). 청산(靑山). 겅두(鯨斗). 추자(楸子). 사서(斜鼠). 비양(飛楊). 화탈(火脫) 등 크고 작은 온 섬과 가까운 뭇 산이 모두 손 닿을 곳에 들어온다. 삼읍(三邑)의 보루(堡櫐)가 솔밭처럼 정립(鼎立)하고 바둑판 같이 펼쳐져 또렷하게 내 눈 밑에 깔려 얽혀진 개미 떼가 구릉(丘陵)에 기생(寄生)하는 듯하다. 다만 하늘은 더욱 높고 바다는 더욱 트였으니 형체는 더욱 작아지고 시야는 더욱 멀어만 가서 내가오른 봉우리는 바로하늘 끝 펀펀히 빈 곳에 떠 있는 듯하다. 바람에 나부끼는구나! 마치 세속을 잊어버리고 홀로 신선이 되어 훨훨 나니 말로나 문자로 가히 형용할수 없다. 지난번 맘속에 간직한 의혹은 통쾌히 풀릴 수 있어 비로소 그 실속과 명성을 믿게 되었다
수정(修淨)이 나서면서 ‘예로부터 이제까지 이 산을 유람하는 자 중에서 등정(登頂)한 자 그 수를 알 수 없지만 늘 구름과 비바람으로 컴컴하여 지척(咫尺)을 가리지 못하니 모두 어쩔 줄 모르고 돌아 나섰습니다. 일찍이 승경(勝境)을 샅샅이 탐색한 이가 없는데 이제 명석한 당신께서 왔기 때문에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날씨가 쾌청하여 하늘과 땅의 신비함이 드러났습니다. 참으로 선골지인(仙骨之人;신 의 골격)이 아니면 어찌 이런 데 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놀이에 능히 갖출 수 있겠습니까! 고 하니 좌중이 활짝 웃었다. 나도 무릎을 치며 탄식하여 이르되, “우리는 모두 속세의 사람으로 선경(仙境)을 밟아 수성(壽星;남극 노인성)을 굽어보며 인간의 탈을 벗어 삼생(三生)의 빛을 갚아 내 가슴이 시원하다. 극히 흉중(胸中)이 넓어져 운몽(雲夢)을 삼킬 듯 할 뿐만 아니라 얻은 바가 크지 않았겠는가! 원미지(元微之)의 시에, ‘내 옥황상제(玉皇上帝)의 향안리(香案吏)일세, 귀양살이로 봉래산(蓬萊山)에서 살리라.‘고 하였으며, 간재(簡齌)의 시에 ’올해 귀양살이 아니었으면 이 기특한 일을 다투어 이루었으리.‘ 하였다.
<원미지. 간재>두 사람은 바로 오늘을 말한 것이리라.‘하고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돌을 씻은 다음 써서 승적(勝迹;뛰어난 자취)을 기록하고 꽃 자기(磁器) 사발에 술을 부어 실컷 취하려 하니 좌우는 모두 사양하여 마시지 않았다. 한 순배 돌아 마셔 멈추자 주방(廚房) 사람이 향기로운 잎새를 따서 찻물을 끓여 내놓았다. 한 잔을 시음(試飮)했더니 청향(淸香;맑은 향기)이 뼛속에 스며들어 신선이 되고 바람을 타서 먼 곳을 노닐며 다니니 비록 경옥(瓊玉)같은 음료라도 이를 넘지 못할 것이다. 요리조리 다니고 있을 무렵 종자(從者;심부름꾼)가 알려오기를, “날이 벌써 저물었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산 북쪽을 따라 부축하면서 내려와 늘 기봉(奇峰)과 험한 절벽을 만나면 지팡이에 의지하여 간혹 돌 뒤에 앉아 쉬고 나서 10여 리를 지나 비로소 말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언덕 가의 그윽한 꽃은 울긋불긋 혹은 새하얗게 서로비추고 이때에 진기한 길짐승과 괴이한 날짐승이 안개 자욱한 숲 속에서 지저귀며 날아갔다. 이생(李生;李孝誠)이 나에게 말하기를 “휴대하고 온 술을 다시 가지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잠깐 시냇가에 멈추어 다시 한번 마셔 취하고 달빛을 밟으며 돌아가는 것이 또한 좋지 않습니까?고 하니 나는 ”그렇게 하자“고 맞장구쳤다.
가시덩굴에 앉아 주량에 따라 마셨다. 마시고 나서 서로 재촉하여 산을 내려 오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헤어지기 섭섭한 듯하였다. 마치 친구를 이별하듯 유달리 그리워지는 감회에 젖어들렀다. 소사(小使;심부름꾼)가 갑자기 ‘저 해상의 신기루는 역시 하나의 신기한 광경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내가 그곳을 보니 층층 누각(樓閣)이 우뚝 솟아올라 떨어지는 해와 없어지는 노을의 광채가 서로 비추어 없어졌다가 보이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이(말로) 형용하기란 어려웠다. 모두 서로를 돌보며 ‘생각하건데 하늘이 님(판관 김치를 지칭)에게 속인(俗人)들이 볼 수 없는 경관(景觀)을 전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까! 온갖 기기괴괴(奇奇怪怪)함이 기쁘고 즐거우며 놀랍고 두렵다는 것이 차제(次第;차례)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님이 대단하신 것을 하늘이 알아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손뼉치며 웃어댔다.
갑자기 어둠이 들자 새들은 모두 날아가고 산에서 달이 떠 드디어 제주성으로 들어서니 성문은 닫아 있지 않았다. 며칠 뒤에 민 군이 나에게 ‘앞서 한라산을 유람한 자취가 인멸(湮滅)되어 전하지 못할 수 있으니 님께서 글로 써서 오래 남게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자 나는 문장이 졸렬하나 사양하지 못하고 이 글을 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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