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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묘비문 소개 (2003. 6. 20. 항용(제) 제공)
安興君 南峰 김치(1577~1625)의 묘갈은 顯宗15년(1674년) 증평읍 율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아들인 柏谷 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 사위인 崔 渲이 썼다.
가) 원 문
先君碑陰記 公姓金, 諱緻. 字士精, 號南峰. 十三世祖高麗上洛公方慶, 以功食采于安東, 新羅敬順王後也. 傳十一世, 諱忠甲. 司憲府持平贈議政府左贊成, 公之大考也. 初娶翰林金神童女, 生諱時晦. 丁卯登第, 秉史筆而名位不大, 公之考也. 再娶內禁衛李成春女, 生諱時覺時敏時愼時進. 時敏娶學生徐應文女, 無子. 以晋州判官, 値海寇與戰大剋之, 陞拜兵馬節度使. 又大戰, 賊三敗北. 親自巡城, 竟中流丸而卒. 以豊功茂著, 贈領議政, 封上洛君, 公之養考也. 考配尙衣院直長楊彦漑女.
以萬曆丁丑七月初七日生公. 公生而魁傑. 其性甚聰敏. 丁酉 捷謁聖科, 爲承文正字. 己亥, 以春坊說書. 陞司書, 轉拜兵曹佐郞 弘文館修撰 司憲府持平. 出宰海美興德, 恩威幷施, 吏 而民懷. 戊申, 復入玉堂薇垣, 轉爲吏曺佐郞, 兼賜暇湖堂. 己酉, 除濟州判官, 廉 直持身, 廓革苛政, 疲氓 蘇, 歷成均司藝宗簿司僕正. 癸丑, 爲嶺南均田使正田役, 入爲兵曺參知司諫院大司諫吏曺參議. 乙卯, 丁養大夫人喪. 戊午, 除兵刑工參議承旨, 皆不就. 當是時, 光海政亂倫 廢大妃之論起. 公憤 大言曰. 時蕁乎, 遂居龍湖. 足不到城市者六年, 詩酒自娛. 逮仁祖反正, 以東萊接倭重地, 拜公府使. 不但爲才局, 且以弗干廢妃故也. 公視民如傷, 刪其衆弊, 民鑄銅碑立. 待倭宴餉之餠精潔, 歲弊之給, 亦得其宜. 倭亦感德, 送寶 奇器. 乙丑, 爲慶尙道觀察使, 宿病復 , 五月二十七日. 卒于安東客舍. 得年四十九, 葬淸安縣南栗峙. 丁酉, 夫人以疾終, 葬公之墓左. 公宇量深 , 喜 不形於色, 宏略出衆, 一松沈相喜壽, 以公可爲都元帥薦之. 盖從時議, 配吏曺參判泗川睦詹女. 生一男得臣, 文科掌令. 得臣娶掌令金聲發女,
生男女五. 一男天柱, 娶學生柳成廈女, 生四男. 一女而早死. 二女歸文科縣監崔渲. 生一男二女. 三男天 , 娶進士李繼道女, 生五男一女. 四女歸縣監李重輝, 生一男. 五男天揆, 娶幼學李承淵女, 生三男一女. 副室出長曰得齡爲司馬. 次曰得成得平. 嗚呼, 至情無文. 只序列世系子孫, 不記事實, 則後人何觀焉?
男 通政大夫 掌樂院正 兼知製敎 得臣 撰 孫 通政大夫 掌 院 判決事 崔演 書 崇禎 紀元 四十七年 甲寅 九 月 日 立
나) 번역문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휘(諱)는 치(緻)이다. 자(字)는 사정(士精)이요, 호(號)는 남봉(南峰)이다. 13세조(十三世祖)는 고려(高麗)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이니, 공(公)을 세워 안동(安東)에 식채(食采)했는데, 신라 경순왕(新羅敬順王)의 후손이다. 11세를 전해 내려오니 휘(諱)는 충갑(忠甲)이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시니 공(公)의 할아버지이시다. 처음 한림(翰林) 김신동(金神童)의 딸에게 장가가서 휘(諱) 시회(時晦)을 낳았다. 정묘(丁卯)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사필(史筆)을 잡아 명성과 지위가 크지는 않았으니, 공(公)의 아버지이다. 두 번째 내금위이성춘(內禁衛李成春)의 딸에게 장가가서, 휘(諱) 시각(時覺)·시민(時敏)·시신(時愼)·시진(時進)을 낳았다. 시민(時敏)은 학생(學生) 서응문(徐應文)의 딸에게 장가갔으나 아들이 없었다.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왜적을 맞아 싸워 크게 이겨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승진했다. 또 크게 싸웠는데 적이 세 번 패배(敗北)했다. 친히 성을 순시하다가 마침내 유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많은 공이 드러나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니, 공(公)의 양아버지이다. 아버지의 배필은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 양언개(楊彦漑)의 딸이다.
만력(萬曆) 정축(丁丑;1577년) 7월7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태어나서 몸집이 크고 건장했으며 성품이 기특하고 매우 총민(聰敏)했다.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알성과(謁聖科)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에, 춘방설서(春坊說書)가 되었다. 사서(司書)로 승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를 제수 받았으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나아갔다. 해미(海美)와 흥덕(興德)의 원으로 나아갔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아전들을 온화(溫和)하게 하고 백성들을 품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에 다시 옥당 미원(玉堂 薇垣)으로 들어와, 이조좌랑(吏曺佐郞)으로 전보(轉補)됐으며 겸(兼)하여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에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제수 받았는데 렴직(廉直)으로 자신을 지켰으며(持身), 가혹한 정치를 크게 개혁하고 피폐(疲弊)해진 백성들을 이에 소생(蘇生)시켰으며, 성균사예종부사복정(成均司藝宗簿司僕正)를 지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영남균전사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이 되었으며 병조참지사간원대사간이조참의(兵曺參知司諫院大司諫吏曺參議)으로 들어왔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에 양(養)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병형공참의승지(兵刑工參議承旨)에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당시(當時), 광해군(光海君)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윤리를 어겨 대비(大妃)를 폐비(廢妃)한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공(公)이 분격하면서 크게 말하기를 "시국이 좋지 않구나." 라고 하고 드디어 용호(龍湖)에 거처했다. 성시(城市)에 나아가지 않은 지가 6년이 되었으며,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동래(東萊)에 왜를 접촉할 때 땅을 중히 여겨, 공(公)을 부사(府使)로 제수했다. 재주와 국량(局量)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폐비(廢妃)에 관한 일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을 상처 보듯이 했으며 대중들의 폐(弊)를 줄여주어 백성들이 돈으로 비(碑)를 세웠다. 왜(倭)를 대접할 때 향연(饗宴)의 음식을 정결히 하고 세폐(歲弊)를 지급하여 또한 그 마땅함을 얻었다. 왜가 또한 덕에 감동하여 보검(寶劍)과 기이한 그릇을 보냈다. 을축(乙丑)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되었는데, 묵은 병이 다시 재발되어 5월 27일 안동객사(安東客舍)에서 졸(卒)했다. 연세가 49세인데 청안현 (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례(葬禮)지냈다. 정유(丁酉)년에 부인(夫人)이 병으로 임종(臨終)하여 공(公)의 묘(墓) 왼쪽에 장례(葬禮)지냈다. 공(公)은 기량(器量)이 깊고 침착하여 기뻐하고 노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큰 지략이 출중 (出衆)하여, 재상인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가 공(公)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추천했다. 대개 당시의 논의에 따라 이조참판(吏曺參判) 사천목첨(泗川睦詹)의 딸을 배필로 맞았다.
일남 득신(得臣)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장령(掌令)이 되었다. 득신(得臣)은 장령(掌令) 김성발(金聲發)의 딸에게 장가가서, 1남2녀를 낳았다. 1남은 천주(天柱)로 학생(學生) 유성하(柳成廈)의 딸에게 장가갔다. 4남을 낳았다. 1녀는 일찍 죽었다. 2녀는 문과(文科) 현감(縣監) 최선(崔渲)에게 시집가서 1남2녀를 낳았다. 3남 천척(天척)은 진사(進士) 이계도(李繼道)의 딸에게 장가가서 5남1녀를 낳았다. 4녀는 귀감(歸監) 이중휘(李重輝)에게 시집가서 1남을 낳았다. 5남 천규(天揆)는 유학(幼學) 이승연(李承淵)의 딸에게 장가가서 3남1녀를 낳았다. 부실(副室)이 낳은 장남은 득령(得齡)으로 사마(司馬)에 합격했다. 그 다음은 득성(得成)과 득평(得平)이다. 아! 지극한 정은 글로 할 수 없다. 다만 세계 자손(子孫) 서열(序列)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후인이 어찌 알아보겠는가?
男 通政大夫 掌樂院正 兼知製敎 得臣 撰 孫壻 通政大夫 掌隸院 判決事 崔演 書 崇禎 紀元 四十七年 甲寅 九 月 日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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