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구(金 九)1876(고종13). 7. 11.∼1949. 6. 26--(익)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백범 및 연보

 2. 영정

 3. 동영상

 4. 주요 사진 자료

 5. 창작 음악극 소개

 6. 백범 김구 노래

 7. 창작 오페라

 8. 한국 위인 전기 전집

 9. 백범기념관 개관 학술대회

10. 백범 동상 제막식

11. 보성 은거지 기념관 개관

12. 기타 각종 자료 소개

1) 북한의 백범 유적지

2) 백범 묘비문

3) 만시(장개석과 정인보)

4) 경순왕의 33대손 기록

 

본문

p11.png 4. 주요 사진 자료 소개

1) 묘소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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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 묘소>(2003. 3. 9. 발용(군) 제공)     

 

2) 동상 (남산공원 내)

(2003. 8. 17. 안사연 탐방.  발용(군)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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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박정희> 글씨가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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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범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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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일지>(내부)(2002. 영환(문) 제공) <백범일지>(2002. 12. 19. 한국고미술 네트워크. 경매 완료된 친필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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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九先生血鬪史 >(嚴恒燮(엄항섭) 著 .국제문화협회/1948년.3판) (2002. 12. 25. 발용(군) 제공)

 내용 : 백범 김구 선생의 항일운동을 기록한 책으로 백범선생의 비서를 지낸 엄항섭이 펴냄. '김구선생소전'과 이봉창의거, 윤봉길의거, 최근식. 유상근의거 그리고 항일운동을 함께한 한 동포들과 중국의 풍경 등을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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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1집>(2003. 6. 1. 백범학술원 간. 태인(안.대종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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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경교장>(2003. 1.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 간.  2003. 8. 17. 항용(제) 제공)

 

4) 백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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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기념관 준공식>(2002. 10.22. 효창공원 내. 만길(익) 사진 제공)

 

 5) <상해 임시정부 청사>

(2001. 2. 20. 항용(제) 현지 답사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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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상해 임시정부 청사앞에서>(필자 뒷편 푯말이 보이는 건물 안 쪽의 1,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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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안내판>                                  <입구의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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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의 백범 흉상>

 

 6) <백범 관련 사진 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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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2002. 영환(문) 제공)           <모친 곽낙원 여사 동상>(2002. 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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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비석> (2002. 영환(문) 제공)

 

* 위 사진 관련 기사 소개

(2004. 10. 19. 윤만(문) 제공)

왼쪽 : 신 · 백범 선생 · 곽낙원 · 인

회포를 돕는 비석 / 동아일보. 1924. 2. 18. 월

이 사진은 항자 보도한 바와 가치 사회를 위하야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맛나서 남이 격지 못한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녀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잇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상히 녁이여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여러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대 조선어학자 김두봉(朝鮮語學者 金枓奉) 씨의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짓고 이 빗돌 위에 잇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싀어머니 곽 씨(郭 氏.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49)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 아들 김인(金仁.5)이요, 왼편에 잇는 아해는 그 두째 아들 김신(金信.2)이다. 늙은 싀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엇지 참아 감기엇스랴 !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히 누은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7) 친필 암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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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필 암각문>(2002. 영환(문) 제공)

 

8) 애국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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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애국가(1945. 10. 18)> (2003. 6. 19. 태서(익) 제공)

 

9) <백범 선생과 아들 신(信)>

(2003. 1. 28. 은회(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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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보산 영천암에서의 백범]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38선을 넘고 평양에 도착하여 50년 만에 다시 찾은 평양 대보산 영천암에서의 백범선생과 아들 신. 이 곳은 백범 선생이 승려 행세로 숨어 계시던 곳 [1947. 4. 26]

  

10)[덕수궁에서의 망중한] (2003. 1. 28. 은회(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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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진은 백범이 이승만의 노선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을 때 이상만 목사와 찍은 것인데,모당의 기관지 구실을 하던 모일간지는 이상만의 얼굴을 이승만으로 바꾸어 양 영수가 합의한 것처럼 기사를 써 민심을 호도했다. (1947년)  

 

11) [휘호에 열중하는 백범] (2003. 1. 28. 은회(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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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의 글씨는 심하게 떨림체이다. 이는 1938년5월 장사에서 저격받아 심장아래 박힌 총알이오른쪽아래로 이동하여 수전증이 심해진탓이다. 그래서 백범자신은 자신의 서체를'총알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12)1946. 5.18. 유해를 봉환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신 백범 선생(2003. 1. 28.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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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세상에 호소하여, 정당한 공론을 구하려 함과 아울러 우리는 이른바 폭행을 찬양하는 자가 아니며, 혁명의 사선을 넘나든 우리에게는 이 길이 최소의 역량을 가지고 가장 위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이라는 확고한 인식에서 출발되었다.' 『도왜실기』중에서

 

왼쪽 : 선우진. 백범 선생. ○. ○. 방응모. 정인보. 안낙생. 김명동. 안우생.

 

13) <백범선생 시찰기념. 4282년(1949). 5. 23.(1949. 6. 26. 서거 1개월 전의 사진)>

 

        (2003. 11. 2. 용주(안) 자료 제공. 사진 소장자-태준(안. 화산군 휘 澍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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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중경을 떠나기 앞서 연화지 '임정' 청사 앞에서의 한국독립당 요인들과 김구선생>

(2004. 5.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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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중앙)

 

14)<1946. 7. 6. 8.15후 첫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천장되는 3의사의 유해 운구 광경>

(2003. 1. 28. 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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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백범일지』중에서

 

15) <의암묘소 참배시 쓴 백범의 고유문(告由文)>

(2004. 10. 19.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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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백범의 판화(24.5x18cm) >

(2004. 10. 19.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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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四方)에 태극(太極)문양에 "平安" 의 글자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백범의 정신이요,

산과 해를 상징함은 조국강산의 안일과 발전을 바람하는 형상. 요즈음처럼

핵문제 등으로 어수선할 때 더욱 생각나는 작품이다.

도장은 백범의 白文과 金九之印의 朱文을 사용하였다. 등사용 잉크로 제작함.

 

17) <현재의 삼의사 묘역 모습>

(2003. 1. 28. 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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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의 비어있는 곳은 안중근의사의 봉환을 위해 남겨 두었다.)

 

18) <삼의사 묘소 아래에 있는 '遺芳百世' 마지막 글자에 있는 백범 관련 글>

 (2003. 3. 9. 발용(군) 사진 제공)

 

            "戊子 春日 金九 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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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서거 당시의 사진 자료듶>

(2003. 5. 9. 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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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당시의 사진 자료>(2003. 5. 9. (영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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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당시의 사진 자료>(2003. 5. 9)

 

20) <백범 데드 마스크>

(2004. 10. 19.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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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_데드마스크/1996/208 x 170/수묵채색/작가소장

 

21)<백범 친필 모음>

(2002. 3--6. 영환(문), 태서(익). 항용(제)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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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 친필 및 해설>

(2003. 1. 28.  은회(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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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장군의 시 '북정(北征)']--1933년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 직후에 이 휘호를 즐겨 썼으며 해방후 신탁통치를 거론하던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던 1947년에 다시 그가 좋아하는 남이장군의 시를 휘호로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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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만세, 독립자유, 독립정신>--반탁운동이 계속되던 1947년 정초부터 백범은독립정신이란 휘호를 남긴 이래로 독립만세독립자유란 휘호를 즐겨 썼다. 백범이 선호한독립이란 곧 반탁 반좌익을 의미하며 모스크바결정을 재식민지에로의 길로 보는 정세관을반영한 것이다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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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절개를 기리는 휘호>--1948년 남북한은 각각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닫고 경교장에 쇄도하던 정치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던 시절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하지않겠다는 의지를 이렇게 다졌다(194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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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於大義名分>--'대의명분에 죽고 민족정기에 산다'는 자신의 사생관을 표현한 휘호. 생명의 위협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일생을 통해 백범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확신했다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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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애인>--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194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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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2003. 11. 12. 은회(익) 제공)

 

 <백범작 8폭 병풍 (32×130)지본>

(2004. 10. 19.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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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詩解)

이나라 독립과 통일에의 염원을 몸소 실천하신 민족의 거성 백범 김구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회고하여 볼때 선생의 고매하신 애국혼은 천주만방에 길이 국민의 마음속에 새겨지리라 믿는다. 이에 본 작품은  안두희에게 살해 당하시기 월여전의 작품으로 그 내용이 자주독립과 조국통일을 그 얼마나 간절히 희구하시었나를 엿볼 수 있는 애국시로써 이 유묵을 접함에 있어 재삼 옷깃을 여미고 숙연히 자기 성찰의 기회가 마련되리라 믿어 의침치 않는다.

 

梅花能紅李花白  春心何處無顔色  (매화능홍이화백 춘심하처무안색).

不應尙有一梅枝  可是東君若留客  (불응상유일매지 가시동군약유객)

向來開處當嚴冬  白者未白紅未紅  (향내개처당엄동 백자미백홍미홍)

至今已時丈人行  肯與年少爭春風  (지금이시장인행 긍여년소쟁춘풍)

 

매화꽃은 붉고 배꽃은 흰데 깊은 봄 어느곳인들 아름답지 않으리

오리려 한 매화가지가 응치않음은 봄이 오면 손님을 머룰게 하려함인가

지난번 꽃필적엔 엄동이었지 흰 것은 희지않고 붉은 것도 붉지 못했네

지금은 이제 어른의 대오에 끼었으니 젊은이와 함께 봄바람을 다투어보리

 

1982년     4월     23일

 

鑑證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백강(白岡 )  조경한 趙驚韓

解意   한학및서예가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매산(梅山) 김선원金善源

 

 <백범 휘호>

(2004. 10. 20.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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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能以 待兒女之心 待父母 乃是眞孝子

可見待父母之心 萬萬不及 待兒女之心也

不亦大可歎哉

 

사람이 아녀를 대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대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효자다. 그러나 부모를 대하는

마음이 전혀 아녀자를 대하는 마음에는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으니, 또한 크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 <백범 관련 자료 및 휘호 모음> (2003. 6. 19. 태서(익) 자료 제공)

 

 (1) <백범 서명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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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백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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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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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서한과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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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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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각종 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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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아드님이신 金信께서 소청평에게 보낸 편지>

 

 23)<백범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곳 사진 소개> (2004. 10. 19.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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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일월 대한건곤 김구

靑丘日月 大韓乾坤 金九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가 마이산 이산묘 맞은편 우측 암벽의 높은 곳에 새겨져 있다.

 

 24) <손민석 소장 백범 휘호> (2003. 3. 4. 은회(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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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대한민국(1986.6.10)과 북한(1993.8.15)에서 발행한 백범 우표>

(2002. 5. 31. 태서(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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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백범 휘호>

(2003. 3. 13.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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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백범 암살 사건 배후세력 진상조사 청원서>

(2003. 3. 13. 발용(군) 제공)

1967년 목포시민 16,088명이 백범 김구 선생 피살사건 배후 세력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면 제출한 청원서

이 청원서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7년 치러진 6.8총선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목포에서 출마한 김대중 후보가 정견발표회 및 개인 연설회를 통해 상대후보이자,박정희 대통령이 공천한 공화당 입후보자 아무개씨는 백범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의 배후 조정 인물이라고 폭로하자, 목포시민 김상성 님 등 16,088

명이 백범 김구 선생 암살사건의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국회에 낸 청원서의 원본. 청원서를 제출한 날짜는 1967년 6월16일. 청원서를 제출한 사람은 목포시민 김삼성 외 16,08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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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옥과 미술관의 백범 휘호>

1) 발견일시 : 2003. 4. 16.

2) 소장처 : <옥과미술관>(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 1-3번지 ☏ 061-363-7278~9, Fax: 061-363-7279 ) http://www.asan.or.kr/

3) 촬영일시 : 2003. 4. 16. 안사연 6명 현지 방문. 열람 및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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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안사연 백범 친필 암각문 답사>

(1) 일시 : 2003. 8. 16. 09:00-.   

(2) 장소 : 경기도 의정부시 산 89 <석굴암>일대   

(3) 답사자 : 6명-상석(제),상하(제),윤만(문),발용(군),항용(제),윤식(문)   

(4) 답사내용 : 백범 김구선생의 친필 암각문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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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앞 안내판>(향토유적 제8호. 백범께서 상해로 망명하기 전에 일시 피신 했던 곳이며, 해방후 이곳을 자주 방문하셨고

1949년 3월부터 백범의 친필을 받아 3개월간 조각하여 세운 것이라 기록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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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백범 간찰 소개

(2003. 12. 15.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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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백범 필적

(2004. 1. 12. 태영(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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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 해설>

1) 연대 : 1946. 5.

2) 소장처 : 국회의사당

3) 집필 과정 : 이 글은 백범 김구선생이 1946년 5월에 진해시 방문기념으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한시 ’진중음(陳中吟)’중에서 쓴 것을 진해시 해군사관학교입구 남원로타리에 시비로 세운 것임.

4) 내용  :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도 감동하고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 산이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준다.

 

32) 金九行書(김구행서) 소개  (2004. 8. 26. 윤만(문) 제공)

 

○ 유물명칭 : 김구행서(金九行書)

○ 국적시대 : 한국(韓國)

○ 재      질 : 지(紙) / 기타(其他)

○ 크      기 : 높이(높이) : 32 cm / 너비(너비) : 105 cm

○ 용도기능 : 문화예술(文化藝術) / 서화(書畵) / 글씨(글씨) / 일반서예(一般書藝)

○ 소장기관 : 학교(學校) / 대구대(대구대)

○ 유물번호 : 대구대(대구대) 635

 

백범 김구 선생의 글씨.

 

<일반적 형태 및 특징>

 "束國干?"가 행서로 쓰여져 있다. 왼쪽에는 丁亥仲秋 白凡 金九과 함께 낙관이 찍혀 있다.

행서(行書)는 정자체를 조금 바꾸어 쉽게 하려는 목적에서 서체의 점과 획 사이를 흘러가는 서법으로 쓴 글시체이다. 이 서체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김구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1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33) 백범 유묵 병풍  (2004. 8. 26. 윤만(문) 제공)

 

유물명칭 : 백범 유묵 병풍

국적시대 : 한국(韓國) / 대한제국(大韓帝國)

크      기 : 가로(가로) : 131 cm / 세로(세로) : 33 cm

용도기능 : 문화예술(文化藝術) / 서화(書畵) / 글씨(글씨) / 일반서예(一般書藝)

소장기관 : 학교(學校) / 육군사관(육군사관)

유물번호 : 고대군사재(고대군사재) 8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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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유묵이다. 이것은 원래 시 한 수를 병풍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고,

두 귀(句)씩 되어 있는 것을 6귀를 수집해서 후손들이 6폭의 병풍으로 제작한 듯 하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34) 海東淸風碑(해동청풍비) (2004. 8. 26. 윤만(문) 제공)

 

   종   목 : 시도기념물   82호

 명   칭 :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

 분   류 : 석비

 수   량 : 397㎡

 지정일 : 1990.08.07

 소재지 :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478-2

 소유자 : 장광상

 관리자 : 장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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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유림들에게 항일의식을 드높인 자하 장기석 선생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장기석(1860∼1911)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하다 39세의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여 43세에 학문을 두루 통달하였다. 그 뒤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에 힘썼으며, 일제 때 경찰서장으로 부터 경축식에 참석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단식을 시작하였고 의식을 잃어 일본경찰들이 음식을 먹이려 하자 그릇으로 서장을 때려 옥중에서 생을 마치었다.

비는 평평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형태이다. 비문은 심산 김창숙이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글씨를 썼다. 1936년 전국 유림에서 뜻을 모아 세웠으나 그 이듬해에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버려진 것을, 광복 후 조각들을 찾아 모아 다시 세웠다. 비 옆에는 1937년 일본경찰이 비를 깨부수려 할때 목숨을 끊어 이에 항거한 부인 박씨를 기리는 비가 함께 놓여 있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해동청풍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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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휘호 6점 소개

(2004. 9. 3. 윤만(문) 제공)

 

(1) 휘호 1-<청천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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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김구선생님께서 쓰신 글이 있습니다. 친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당시 백범김구선생님밑에서 쭉 일해오셨기 때문에 김구선생님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으시고 김구선생님께서 쓰신 글도 몇개 가지고 계시지요. 그게 우리 집안 가보처럼 쭉 내려져 오고 있네요.

얼마전 신문을 보니 경매사이트에 김구선생님의 글이 올라왔다는 말에 저도 왠지 사람들에게 우리집에 있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올려봅니다.

위에 노란색으로 처리한 부분이 친할아버지 성함이구요. 김구선생님 전시회할때마다 항상 연락이 와서 우리 집과 할아버지 댁에 있는 김구선생님 글들을 빌려가곤 한답니다. 정말 자랑거리죠..

이렇게 나라가 경제도 안좋고 나쁜 일도 많은 상황에 정치인들이 다시 한번 그 어려운 때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2) 휘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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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휘호3-백범 김구선생 미공개 휘호 -[연합뉴스 2004-06-2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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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친동생 남의(南儀.2003년 작고)씨에게 전달한 휘호.

사회부 기사참조/사회/ 2004.6 .25 (서울=연합뉴스) ( )

 

 (4) 휘호4-친필휘호 인터넷 경매 작품

     출전 : [스포츠투데이 2004-01-2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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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로 추정되는 작품이 인터넷 경매에 매물로 나왔다. 지난 26일 인터넷 경매사이트 옥션(auction.co.kr)에 ‘지성감천’이라는 150㎝×50㎝ 크기의 김구 선생 친필 휘호 작품이 올라온 이후 네티즌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작품을 내놓은 박모씨(38)에 따르면 이 휘호는 박씨의 조부대부터 집안에 전해내려오던 것으로 지난 1920∼30년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진위여부는 명확하지 않지만 박씨는 "인사동 화랑에서 진품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라며 "거래에 앞서 구매 희망자가 원하는 감정인에게 다시 감정을 받을 용의도 있다"고 밝혔다.네티즌들은 이 작품이 경매물건으로 나오자 진짜인지 반신반의하면서도 ‘독도 문제로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마당에 김구 선생의 친필이 맞다면 좋은 소식’이라며 반기는 분위기다. 구매문의도 10여건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박씨가 제시한 경매 시작가격이 3,000만원으로 비교적 고가여서 응찰자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미현 mihkim@sportstoday.co.kr

 

 (5) 휘호5-휘호 공개

   출전 : [중앙일보 2002-02-2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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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26일 서울 효창동 백범회관에서

1940년대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로 근무했던 핸더슨의 부인에게서 기증받은 선생의 친필 휘호를 공개하고 있다.

사진=김성룡 기자 < xdragon@joongang.co.kr >

 

(6) 휘호6 - 김구선생 글씨(명가필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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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보인계 책자

(2007. 1. 29. 은회(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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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에 김구선생을 중심으로 조직하고 만든 <보인계> 출자금 책자이다.  

37) <백범 일지> 속의 사진 자료

(2008. 3. 21.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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