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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6. 26. 발용(군) 제공) 제목 : 한국위인전집, 김구. 출판사 : (주)학원출판공사,
제목 : 김 구 (1876∼1949) 독립 운동가로 호는 백범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는 18세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다. 전봉준의 동학군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 해주에서 호응하였다가 실패 후 만주의 의병단에 들어갔다. 한때 마곡사의 스님이 되기도 하였던 그는 1911년 105인 사건 으로 17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1914년 출옥하였다. 1919년 3.1 운동때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를 지시한 장본인이었다. 1940년 한국독립당의 당수가 된 그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 1944년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되었으며, 광복후에는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 섰다. 1948년 유엔의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으로 가 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하였다. 1948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1. 왜놈과 비누
화톳불이 탁탁 불티를 날리며 타고 있었다. 마당에는 차일이 쳐지고 음식상이 차려졌다. 부엌에선 지짐질과 국수를 마는 아낙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창암(김구의 어릴 때 이름)은 이 때 열두 살로, 작은할아버지 댁 잔치에 와 있었다. 눈빛은 샛별처럼 반짝였고, 불거진 광대뼈며 턱뼈가 다부져 보였다. 이 때만 하여도 혼례는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때 올리는 법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부를 데리러 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야, 온다……. 신랑 신부가 온다. 한 젊은이가 들 건너 고개를 넘어오고 있는 등불을 재빨리 발견하고 외쳤다. 어서 가서 가마꾼을 교대해 주자. 젊은이 몇 사람이 뛰어갔다. 사랑방에선 작은할아버지가 이웃 마을의 귀한 손님을 대접하고 있었다. 이 작은 할아버지는 창암의 일가 친척 가운데 가장 잘 살았다. 그래서 기쁜 잔칫날을 위해 해주 감영 에서 기생까지 불러 왔다. 잔칫집은 더둑 떠들썩해졌다. 안에서 일하던 아낙네들까지 신랑 신부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에헴! 하며, 몸집이 자그마한 작은할아버지도 사랑방에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으나 맨 상투 차림이었다. 뭣들 하고 있느냐? 상을 내오너라. 이윽고 깔아 놓은 멍석 한가운데 사이 놓이고, 향로와 잔대도 모두 갖추어졌다. 마침내 신랑 신부가 도착했다. 가마에서 부끄러운 듯이 신부가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왔다. 신부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도 저런 누님이 있었으면. 신랑 신부가 상 앞에 섰다. 작은할아버지는 축문을 읽으려다가 잠깐! 하고 막내아들에게 일렀다. 냉큼 안에 들어가서 갓을 가져오너라. 막내는 쏜살같이 뛰어가 갓을 가져왔다. 작은할아버지가 지난 봄 한양에 갔을 때 사온 갓이다. 그는 이렇듯 경사스런 날 의관(옷과 갓)을 잘 갖추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작은할아버지가 갓을 쓰고 두루마기 옷깃을 여미며 축문을 잃으려 할 때, 느닷없이 건넛마을 이 진사의 호령 소리가 들렸다. 이놈, 네가 감히……. 창암은 물론이고 모여 섰던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이 진사는 청암의 작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갓을 벗겨 짓밟으며 소리질렀다. 네놈이 상놈 주제게 감히 갓을 써? 에잇, 더럽다. 이 진사가 가래침을 돋우어 뱉고 나가자, 그 뒤를 따라 다른 양반들도 저마다 침을 뱉으면서 가 버렸다. 상놈? 창암은 무슨뜻인지 잘 몰랐으나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왜 작은할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일까? 남의 잔칫집에 와서 실컷 먹고, 행패까지 부리며 침을 뱉고 가는 사람들을! 가자, 집으로. 누군가 뒤에서 창암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아버지였다. 백범 김구는 1897년, 황해도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떨어진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곽씨였고, 아버지는 김순영이었다. 창암이 태어난 병자년에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 이 맺어졌다. 흥선 대원군은 10년간이나 섭정을 하다가 물러갔다.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로 나라 밖 사정에 대해 너무도 캄캄할 때, 섬나라 일본은 벌써 군함을 끌고 와서 우리의 바다를 침범했다. 그러자 이를 발견한 강화섬의 우리 포대가 이를 포격했다. 이듬해, 일본은 군함을 다시 보내어 우리를 위협하면서 조약을 강요했다. 힘이 없는 우리 조정은, 서로 외교관을 교환하고 항국를 열어 무역을 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럴 즈음, 평생을 일본과 더불어 생사를 겨루던 백범이 태어난 것이다. 창암은 이미 태어날 적부터 몸집이 크고 어머니 젖도 힘차게 빨았다. 집이 가난하여 피죽도 제대로 쑤어 먹지 못하는 어머니라 젖이 잘 나올 까닭이 없었다. 아기는 늘 배가 고프다고 울어댔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아기를 안고 다니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였다. 이 무렵 어린 아이들에게 홍역과 천연두는 무서운 적이었다. 특히 천연두는 마마 라 부르며 모두 무서워했다. 마마는 돌림병이라 마을에 들어왔다 하면 으레 아이들이 몇 명씩 죽었다. 사람들은 마마귀신을 달래기 위해 마을 어귀 덤불에 울븟불긋한 천 조각을 걸어 놓고 떡이나 밥도 바쳐 가며 빌었다. 창암은 네 살 때 마마에 걸렸다. 어머니는 이 때 터주 에 정화수를 떠 놓고 밤마다 빌었다. 마마에 걸리면 높은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 그 높은 열 때문에 삼장이 약한 어린이는 견뎌내지 못하고 죽는 일이 많았다. 이윽고 높은 열이 몸 밖으로 나오면 온몸에 붉은 얼룩점이 돋는다. 그렇게 되면 일단 생명을 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때 할머니들은, 꽃이 피었다. 우리 아기 꽃이 피었다 하며 기뻐한다. 창암의 발진은 유난히 크고 심했다. 어머니는 그 열꽃이 곪은 것을 복 대나무 침으로 찔러 고름을 빼 주었다. 그리하여 창암의 얼굴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굵은 곰보자국이 남게 되었다. 창암의 집은 매무 가난했다. 그래서 자주 여기저기로 아사하며 옮겨 살았다. 백범은 스스로 어린 시절을 돌이키며 말했었다. 집이 가난하여 나는 어려서 바지란 것을 입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커다란 저고리를 나의 저고리와 바지와 두루마기로 삼아 입고 자랐다.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이사 갑시다. 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말에 깜짝 놀랐다. 어머니로선 텃골을 떠난다는 것이 엄청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비록 홧술을 마시며 남과 시비를 잘 했지만, 본디 착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만 하지 않겠소. 창암이 다섯 살 때 이사간 곳은 강령 삼거리라는 곳이었다. 강령은 해주와 옹진 사이에 있는 고을이다. 바닷가로 앞에 갯벌이 펼쳐졌고, 그 뒤에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창암네 집은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 있어 호젓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모님은 이 곳에 옮겨와서 열심히 일했다. 남품팔이도 하였고, 때로는 갯벌에 나가 게나 조개를 줍기도 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창암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모른다. 그것보다 그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강령에 이사 온 며칠 뒤의 일이었다. 부모님은 일을 나가시고 창암은 혼자 집고기가 심심하여 삼거리까지 놀러 갔었다. 창암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아이들이 자치기 를 하며 놀고 있었다. 창암은 그들과 함께 놁고 싶었다. 나도 함께 놀자. 그러자 사팔뜨기 아이가 엉뚱한 곳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어디 살고 있니? 저기 산 밑의 외딴 집이야. 며칠 전 해주에서 이사왔다. 그래? 넌 거지로구나. 함께 놀지 않겠어. 뭣라고? 창암은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몸집은 그 아이보다 훨씬 컸다. 창암은 거지란 소리에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여럿이었고 큰 아이들이라 창암은 오히려 매를 맞았다. 창암은 매를 맞은 것보다 거지란 놀림을 받은 게 더 분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하여 집에 있는 부엌칼을 가지고 가서 사팔뜨기 아이네 집 수수깡 울타리를 뜯다가 들키고 말았다. 이 녀석, 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창암은 입술을 깨물고서 대답하지 않았다. 사팔뜨지 양호의 아버지는 창암을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너 토담집 아이로구나. 양호에게 놀러 왔으면 대문으로 들어올 것이지. 그 순간, 그는 설움이 복받쳤다. 아녜요, 쟤가 나더러 거지라고 했기 때문에 혼내 주러 왔어요! 하며 창암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양호 아버지는 껄걸 웃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양호를 아저씨가 혼내 주어야겠구나. 그러니 내일 다시 와서 함께 의좋게 놀아라. 창암은 가슴에 맵혔던 응어리가 단번에 풀렸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아버지는 고단하여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지만, 창암은 방문을 살며시 열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컴컴했으나 양호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서 삼거리로 갈 참이었다. 창암네 집에서 삼거리까지는 꽤나 멀어 10분 이상이 걸렸다. 캄캄한 밤길을 겁도 내지 않고 창암은 양호네집까지 네네 뛰어가서 큰 소리로 불렀다. 양호야, 양호야, 나 창암이야. 놀자. 그랬더니 양호는 불이 환하게 켜진 사랑방 문을 열고 얼굴만 내밀고서 대답했다. 난 밤에 놀지 않아. 왜? 밤에는 호랑이가 다니기 때문에 놀지 않는 거야. 그러니 내일 놀자. 그러면서 양호는 창암을 몹시 용감하게 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새삼 놀란 것처럼 물었다. 넌 무섭지도 않니? 아아니. 난 공동묘지라도 지금 혼자 갈 수 있어. 창암과 영호는 이 때부터 친해졌다. 창암은 어느덧 감거리의 골목 대장이 되었다. 창암이 태어나던 해에 강화도 조약이 맺어졌다. 그러자 일본의 장자꾼들이 쏙아져 들어 왔다. 그리고 1881년 4월에는 별기군 이라는 것이 창설되었는데 일본 장교를 교관으로 맞아 훈련을 시켰다. 별기군은 대우가 좋았지만, 구식 군인들에게는 봉급으로 주는 쌀마저 여러 달치를 밀렸다. 그래서 구군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이 임오군란 으로 창암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일어낫다. 그 해 어느 여름날, 어머니는 마당에서 잿물을 내리고 있었다. 비누가 없었던 예날엔 잿물에 옷을 빨았다. 즉, 먼저 짚을 태워 재를 만든 다음 그 재를 시루에 떡가루 앉히듯 차곡차곡 쌓고 거기에 물을 붓는다. 그렇게 내린 잿물에 빨래를 삶고 물에 헹구면 때가 빠졌다. 색시, 좀 쉬었다 가겠수. 그 때 웬 할머니가 허리에는 자루르르 차고 머리에 보퉁이를 이고서 집으로 들어왔다. 뜨락에 앉아 할머니는 보퉁이를 풀었다. 검은 쑥떡 같은 네모 난 덩어리가 몇 개 그 속에 있었다. 할머니, 그게 뭐지요? 비누라우. 비누가 뭐지요? 어머니가 다시 묻자 할머니는 수다스럽게 설명했다. 색시, 그것도 몰랐수? 양잿물 이라우. 때도 잘 빠지고 빨래하기도 쉽지. 한 개에 수수 두 되만 내구려. 어머나! 저희는 사지 않겠어요. 그런 곡식도 없거니와 양잿물을 왜놈 장사꾼이 가져온 거라면서요. 할머니는 계속 졸랐으나 끝내 팔지 못하고 가 버렸다. 창암은 이때의 광경이 오래도록 눈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비누 와 왜놈 이라는 말이 그의 귓속에서 쟁쟁울렸다. 이듬해 봄이었다. 장터에 갔더너 아버지가 해거름도 되기 전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약주를 한잔 하셨는지 기분이 썩 좋앙 보였다. 여보, 우리 다시 텃골로 돌아가기로 했소.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봉지 두 개를 꺼냈다. 이것은 물감이오, 당신에게 새 옷은 못해 줄망정 물감이나 들이면 어떨까 싶어 사왔소. 어머나, 비싼 것일 텐데요. 좀 비싸긴 해. 한 봉지에 엽전 한 푼이니까. 어머니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감 봉지를 받아 뜯어 보았다. 하나는 빨간 가루가 들어 있고 하나는 파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물감은 왜놈 장사꾼 물건인데, 물이 잘 든다더군. 헌 치마라도 물만 들이면 새 치마가 된다든가. 창암은 아버지의 말에 섬뜩하여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물감 봉지를 반짇고리 한 구석에 처박고 저녁을 지으러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그대로 쓰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창암은 이 때다 싶어 재빨리 일어섰다. 그리고 물감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시냇물이 갯벌에 흘러들고 있었다. 창암은 그 시냇물 하나에 물감 봉지를 거꾸로 세웠다. 그랬더니 물이 금방 핏빛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신기했다. 창암은 남은 물감 봉지도 또 다른 물줄기에 쏟았다. 그러자 그 물은 파랗게 물들면서 푸른 뱀처럼 꼬불꼬불 아름답게 흘렀다. 이윽고 빨강과 파랑의 두 물줄기가 합쳐지기 시작했다. 이 때 어머니가 물을 버리거 나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에구머니, 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니!
2. 배운다는 것
창암은 아버지를 누구보다 무서워했다. 약주를 좋아하셨고, 술이 취하면 곧잘 남하고 싸웠다. 아버지는 힘이 장사여서 다른 사람들을 땔리기도 했는데 매맞은 사람들이 관가에 고밯하여 몇번 잡혀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창암은 그 무서운 아버지가 오히려 못났다고 생각되었다. 아버진 분하지도 않으세요? 그랬더니 여느 때의 아버지라면 버럭 소리라도 지를 텐데 뜻밖에도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아녜요. 저는 아까 분해서 몸이 마구 떨렸어요. 작은 할아버지께서 무슨 잘못이 있길래 그런 업신여김을 당해야만 하지요? 그것은 말이다, 그들은 양반이고 우리는 상것이기 때문이다. 양반? 양반이 뭐지요! 아버지는 그 말에 대답이 없었다. 묵묵히 얼마쯤 걸어 가다가 문득 다른 말로 설명했다. 창암아, 너도 양반이 되고 싶으냐? 양반이 뭔지 알아야 되고 싶거나 하잖아요. 그러나 양반이 남의 잔칫집에 가서 행패나 부리고 침을 뱉는 사람들이라면 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는 이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쓴웃음일망정 아버지가 갑자기 좋아졌다. 창암아, 양반이 되려면 글을 배워야 한다. 알겠니? 사람이 배우질 못하면 평생토록 고생만 하게 된다. 알겠어요. 그러니깐 상것은 글을 모르기 ㄸ대문에 가난하게 살고 남에게 업신여김도 당하는거군요. 그렇죠, 아버지? 어쨌든 너는 글을 배워야 한다. 내일이라도 작은할아버니와 의논하여 우리 마을에 글방을 하나 앉히도록 하자. 이튿날, 창암은 아버지와 함께 작은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잔치 다음 날이라 집안은 웃음꽃이 피어 있어야 할 텐데 조용하기만 했다. 작은할아버지는 울화병으로 누워 있었다. 오오, 왔느냐. 창암의 절을 받고서야 겨울 일어났으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느냐? 이 녀석이 아저씨 댁에 가자고 졸라서요. 창암이가? 작은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텃골은 안동김씨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이 무렵에는 한 말에 같은 성씨끼리 모여 사는 게 보통이었다. 작은할아버지는 나이도 많고 살림도 넉넉하여 마을에서의 발언권도 세었다. 그러나 잘 산다는 것은, 판편 마음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가난한 일가들을 도와 주어야 했고, 일가들도 도움 받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걸핏하면 손을 벌렸다. 창암의 아버지 심군영은 성질잉 난폭하고 술을 잘 마셨다. 그래서 혹시 돈이라도 얻으러 왔나 싶어, 눈살이 찌푸렸졌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딘지 여느 때의 그와는 달랐다. 창암이 옆구리를 찌르며 재촉했다. 네가 할아버지께 여쭈어라. 네. 할아버지, 저는 글을 배우고 싶어요. 글을? 어째서 글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니? 저는 어제 너무 분했어요. 남의 잔칫집에 외서 행패를 부리는 양반이 분했어요. 그런 양반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앟으려면……. 작은할아버지는 그만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내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이제껏 하지 못했을까! 우리 김씨는 상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는가. 여보게, 조카! 노인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감돌았다. 이 아이에게 우리 조상에 대해 말해 주었나? 이 물음에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아뇨, 제가 워낙 무식하다 보니……. 작은할아버지는 그 대답에 별로 탓하거나 하지도 않고 창암에게 다정한 얼굴로 차분히 조상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이야기를 잘 듣도록 해라. 우리의 시조 할아버지는 산라의 마지막 임금이던 경순왕이시니라. 너는 그 할아버지의 33대 손이 된다. 경순왕은 포악한 경훤이 싫어 덕망이 높았던 고려 왕건 태조에게 나라를 넘겨주셨단다. 창암은 눈도 깜작이지 않았다. 그 뒤 대를 내려와, 명장이던 김방경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분은 처음에 몽고군과 싸우셨고 진도와 탐라(제주도)를 토벌하셨다. 태풍 때문에 실패는 하셨지만 몽고군과 연합하여 왜국을 치셨느니라. 이 충렬공의 현손(손자의 손자) 익원공이 곧 우리 집안의 중시조(갈라진 시조)로 너에게는 21대 할아버지가 된다. 창암은 가문의 내력을 듣는 사이, 어린 마음이었으나 뿌듯한 긍지를 느꼈다. 얼마나 자랑스런조상인가. 그런데 말이다……. 작은할아버지의 말끝이 갑자기 흐려졌다. 너의 12대 할아버지께서 그만 역적으로 몰리셨던 거란다. 넷? 창암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12대 할아버지란 바로 인조 반정 때의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올랐던 김자점이다. 그가 어째서 역적으로 몰렸는지 남겨진 기록은 적다. 당파 싸움, 그리고 청나라와 가까웠다는 정도가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몰락하자 살아 남은 몇몇 사람이 이 곳 텃골로 도망쳐 숨어 살게 되었단다. 창암은 아홉 살 때부터 글을 배웠다. 이 때의 글공부란 한문이었고, 먼저 천자문 부터 배웠다. 양반집 아이들은 세 살, 늦어도 여섯 살이면 한문 공부를 시작한다. 천자문을 계획대로 석 달에 뗀 창암은 이어 동문선습 과 명심보감 을 배웠다. 동몽선습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을 읽을 때는 그것을 몇 번이고 새겨 가며 읽었다. 천지만물 중에 유인이 최귀이니라. 사람이 온갖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까닭은 무엇일까? 또 그 귀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창암은 그것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들이 학문이 높아지자, 아버지는 희망을 걸며 말했다. 양반으로 생세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누구보다 꿋꿋했던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축하여 해주는 물론이고 안악, 신천, 장연 등지로 다니며 병을 고치는 데 힘썼다. 이래서 창암은 자연히 글공부를 그만두어야 했고, 큰집에 맡겨져 나무를 하거나 소를 먹이거나 하였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아버지의 중풍을 많은 차도가 있었다. 1년 남짓 여러 곳을 돌아 다니는 사이에 말도 다시 하게 되었고, 다리도 불편하나마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아버지는 텃골로 돌아오자 창암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매우 어지러운 형편에 놓여 있다. 너는 천주학 이란 말을 들어 보았느냐? 아아뇨. 나라에서는 그 천주학을 금하고 있다. 나는 천주학 교도가 목이 잘려 죽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마는 나라가 아주 어지럽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창암은 이 때 나라가 어지럽다는 사실보다 사람이 믿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일에 감명을 받았다.
3. 동학과 의병
창암은 열일곱 살 때 해주에서 실시된 과거에 응시했다. 1892년의 임진 경과(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는 과거)로, 이것이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였다. 그런데 창암은 보기 좋게 낙방을 했다. 세월이 바뀌어 양반 상놈 차별을 않는다더니 헛말이었구나. 그의 실망은 컸다. 더욱이 과거에 모여든 수많은 지원자와 시험장의 무질서는 창암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이 나라가 이토록 썩었던가! 이대로는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러나 창암으로서는 당장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너무 실망할 것 없다. 너는 글이라도 배웠으니 그것을 써 먹어야 한다. 창암도 그 문제를 심각히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관상쟁이가 되려고 마의상서 를 연구했다. 그뿐 아니라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 얼굴을 관찰하면서 관상학을 배웠다. 그러나 관상은 아무래도 그에게 맞지 않아 풍수를 공부하였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창암이 다음으로 눈길을 돌린 것은 병서 였다. 손자 , 오자 , 육도삼략 과 같은 책을 구하여 읽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뒷날 그에게 많은 참고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 주막집에서 창암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한창 서학(천주학)이 극성을 떨더니, 요즘에는 동학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더군. 서학에 대해선 창암도 조금은 지식이 있었다. 그래서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동학을 알고 싶은데 누굴 찾아가면 될까요? 음, 동학이라면 갯골에 사는 오응선과 최유현을 찾아가서 물어 보게나. 창암은 기뻐하며 갯골로 그들을 찾아갔다. 가서 밤을 새며 동학 이야기를 들었다. 동학의 제 1대 교주 수운 최제우는 열다섯 살 때 하늘의 계시 를 받았다. 그리하여 유,불,선 의 3교를 합한 교를 만들고, 서학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동학 이라 했다. 동학은 돈이 있고 없고, 또 양반 상놈을 가리지 않고 입도시켜, 잠깐 사이 그 세력이 커졌다. 그러자 당시의 조정에선 뚜렸한 죄명이 없이 최제우를 체포하여 철종 14년에 처형했다. 수운 선생이 순교한 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제 2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고 계십니다. 특히 임진년(1892)에는 ㅓ수만의 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 모여 수운 선생의 억울함을 나라에 호소했지요. 그러나 나라 에서는 핑계만 대고 오히려 탄압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척양척왜 (서양과 일본을 배격한다는 것)의 주장을 결코 꺽지 않을 겁니다. 창암은 즉시 동학에 입도했고, 이름도 창수로 바꾸었다. 창수는 교리를 열심히 익혔고 포교에도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동학의 교주 해월로부터 황해도의 동학도 연비(신도) 명부를 보고하라는 명령이 갯골의 오응선 등에게 내려졌다. 이리하여 항해도 대표 열다섯 명이 뽑혔는데 창수도 여기에 끼였다. 어머님, 다녀오겠습니다. 저는 이미 동학에 목숨을 바친 몸이오니 부모님에게 불효이오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니다. 너는 내 장한 아들이다. 어머니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아들을 격려해 주었다. 일행은 교주가 있는 충청도 보은에 이르렀다. 해월 최시형은 이 때 이미 예순 살을 넘었으나 매우 건강해 보였고 검은 구렛나룻이 창수의 인상에 남았다. 그 양쪽에는 동학의 대제자 손병희, 김연조 등이 있었다. 창수는 이 보은에서 한 살 더 먹어 열하홉 살이 되었다. 그 해 1월이었다. 남쪽에서 농부 차림의 젊은이가 달려와 급한 소식을 알렸다. 남접이 마침내 일어났단 말인가! 동학은 이 때 남접과 북접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다. 남접은 보다 과격했고, 북접은 보다 온건했다. 해월은 그 동안 북접을 지지하고 있었다. 북접의 지도자 손병희는 이런 말을 하며 신중론을 폈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밤도 때가 되어야 송이가 벌어지고, 감도 무르익어야 그 꼭지가 떨어진다. 남접의 지도자는 보로 전봉준이었다. 녹두 장군 전봉준은 마침내 일어나 부안을 점령하고 황토마루에서 전라 감사의 관군을 무찔렀다. 이어 정읍,영광을 치고 5월 31에는 전주를 점령했다. 그 때 조정에선 청국에 구원을 청했는데, 엉뚱한 일본군이 뛰어들었다. 전봉준은 일본군이 들어오자 스스로 전주성을 내 주고 동학군을 해산시켰다. 왜적을 내쫓으려고 일어났는데 왜적이 들어 왔으므로 참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청국군을 선전 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했고, 청일 전쟁에서 이기자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이리하여 이 해 9월, 전봉준은 다시 일어났으며 교주해월도 맞서 싸울 것을 명했다. 호랑이가 몰려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다. 참나무 동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 한다. 창수 일행은 이 때 해월로 부터 각각 접주의 첩지(임명장)를 받고 해주로 발길을 재촉했다. 창수는 이제 겨울 열아홉 살이라 아기접주 라는 말을 들었다. 해주로 돌아오자 창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 팔봉접 이라 했고, 푸른 삽사에 팔봉 도소라 쓴 큰 갓발과 척양척왜의 구호를 내걸었다. 창수는 또 자기들만의 강령을 만들어 지키기도 했다. 사람들은 격문과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특히 팔봉접에는 총 가진 사냥꾼들이 많아 그 수가 700명이나 되었다. 창수는 전에 병서를 읽은 일이 있었다. 그 지식이 이런 때 쓰이게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미처 몰랐었다. 아무래도 팔봉 접주가 우리의 선봉자이 되어 주셔야겠소. 그럴 때 남쪽에서 슬픈 소식이 들렸다. 9월14일, 동학의 남접과 북접은 열네 살의 소년부터 여든 살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3백만 명이 라는 사상최대의 민중을 동원했다. 이 가운데 전봉준의 남접은 논산을 공락하고 다시 공주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우금치 고개에서 이레 동안의 혈전을 벌였고, 맨주먹의 동학군은 신무기를 가진 일본군 앞에 패주했던 것이다. 전봉준도 도망쳐 순창의 어떤 집에 숨어 있었는데 아전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는 것이었다. 모두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한 탓이었다. 창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젊고 씩씩한 사람100명만 남겨 매일처럼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신천 청계동에 사는 진사 안태훈으로 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는 안중근의 아버지로 덕망이 높았다. 그는 이 때 청계동에 의려소(의용대)를 두고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며 동학군을 토벌하고 있었다. 안 진사는 나라를 근심하는 분으로, 전부터 김 접주의 인물을 아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이 곳 회학동과 청계동은 20리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만일 양군이 충돌한다면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느냐며, 신중히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수는 곰곰히 생각하고 구월산으로 부대를 이동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구월산에는 이동엽이라는 접주 아래 동학군이 전부터 있었다. 동엽의 부하들은 질서 문란했고 매일 술만 마시며 가까운 마을에 내려가 못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런 행동을 하지. 창수는 부하 이종선을 돌아보며 크게 한숨 지었다. 이 접주 아래에 있는 참모 하나를 잡아다가 볼기를 때리면 어떨까요? 좀 거친 방법이지만 흐트러진 군기가 바로 잡히고 못된 무리의 고약한 짓을 없앨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좋겠군, 그렇게 하시오. 며칠 뒤, 창수의 거처로 이종선이 찾아왔다. 이 접주의 참모 태 아무개를 잡아다가 볼기를 흠씬때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녀석들이 전보다 많이 얌전해 진 것 같습니다. 음, 그 이야기는 얼마 전에 들었지. 그래서 그들이 정신을 차렸다면 다행일세. 네. 그런데 조금 전 이 접주께서 술과 고기를 보내시며 지난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자고 합니다. 술과 고기를 보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그러나 접주님의 허락을 받아야겠기에 이렇게 왔습니다. 그거야 좋은 일이지. 다만 지나치게 술에 취하지 않도록 하고 각별히 불조심을 시키게. 종선은 물러갔다. 창수는 이윽고 들려 오는 부하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얕은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난데없는 총 소리에 그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창수는 어둠 속에서 칼을 찾아내자 문을 박차고 툇마루로 뛰어나갔다. 바깥엔 눈이 펑펑 날리고 있었고, 군사들 막사에서는 불길이 치솟아 눈 덮인 하얀 뜰을 비추고 있었다. 이 영장, 이 영장! 창수는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그러자 어수선한 중에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 접주는 건드리지 마라! 이종선만 잡아 죽이면 된다! 그것은 이동엽의 목소리였다. 순간, 창수의 눈이 확부릅떠졌다. 왜놈의 공격인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같은 동학군끼리 기습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창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장은 어떻게 되었지? 저기…… 저 동구 밖에 총 맞고 쓰러져 있습니다. 창수는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그리로 뛰어갔다. 종선은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창수는 그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창수는 동학군이고 뭐고 싫어졌다. 구월산을 내려오면서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가자. 포수는 자기 품 안에 뛰어든 궁지에 몰린 새는 쏘지 않는다고 한다. 안 진사는 의로운 사람이니까 나를 도와 줄 것이다. 청계동에 이른 창수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 단 하나뿐인 통로인 고개 마루턱엔 파수병이 지키고 있었으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사나이로 태어나 어찌 구차스런 인생을 보낼까. 차라리 호걸스럽게 죽는 것만 못하리라. 풍수를 배운 일이 있는 창수는 청계동이 천역적 요새임을 알아보고, 안 진사를 만나기도 전에 그 사람됨을 알 것 같았다. 과연 안 진사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쫓기는 사람을 이렇게 받아 주시니 뭐라 감사할 말씀이 없습니다. 진사 어른께 저의 목숨을 맡기겠으니 처분대로 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라를 참으로 걱정하고 잘 해 보려던 일인데 무엇이 꺼림칙하겠소. 청계동에 있는 동안은 아무런 걱정 말고 지내시구려. 안진사는 텃골에 있는 부모님까지 청계동으로 모셔와 함께 지내도록 해 주었다. 안 진사는 중군, 정근 ,공근의 세 아들이 있었고, 의사 안중근은 이 때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다. 하루는 안 진사 사랑에서 우연히 만난 김형진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나는 이제 청나라에 갈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청나라가 아주 없어지기나 한 것 처럼 까맣게 잊고 왜놈들의 섬나라만 들먹거리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차 일본과 싸우자면 청나라와 손을 잡아야만 했다. 창수는 그와 함께 청나라로 가기로 했다. 창수와 형진은 청계동을 떠나 먼저 평양으로 갔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함경도 고원과 정평을 지나 함흥에 이르렀다. 백두산을 눈앞에 두고 오르지 못한 채 이들은 마침내 두만강을 건너 통화,관전,임강,환인 같은 곳을 방랑했는데 놀랍게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었다. 창수와 형진은 가는 곳마다 동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특히 창수가 동학의 접주였다는 말에 어떤 노인은 그의 손을 잡아 주며 눈물을 흘렸다. 수고 많았소. 정말로 수고가 많았소. 창수는 이곳에서 김이언이라는 사람이 일본군과 싸울 의병을 키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청인 장교를 하나 만났다. 그들을 보더니 청인 장교는 말고삐를 ㄹ당기며 물었다. 조선 사람이오? 그 정도의 중국말은 지난 한두 달 중국 땅에서 지낸터라 쉽게 알아들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무어라 쏘아대듯 묻는다. 창수는 이런 때를 대비하여 준비한 백지와 붓을 꺼냈다. 뭐라고 물으셨소? 필담이 시작된 것이다. 청국인은 붓을 건네 받아 이렇게 글씨로 물어왔다. 조선 사람으로 왜인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왜적은 나와 더불어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요! 그랬더니 청인 장교는 크게 소리내어 우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는 청나라 장군 서옥생의 아들로, 아버지가 평양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나는 왜적이 아버지의 원수라 미워하지만 당신은 어째서 그들을 원수라고 부르시오? 당신은 우리 조선이 왜적 때문에 망국의 위험에 빠져 있음을 모르시오? 이는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라도 아는 일이오. 청인 장교는 그제야 부끄럽게 여기며 사과했고, 창수와 의형제가 되기를 청했다. 창수는 삼도구라는 곳에서 김이언을 만났다. 삼도구는 압록강 건너쪽에 있다. 여기서 초산,강계,벽동은 바로 강 건너라 의병을 양성하여 공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창수의 나라 사랑하는 정신이 이처럼 꾸준히 키워지는 동안, 조선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었다. 청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콧대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청국은 조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 버렸고, 만주의 요동반도도 일본에게 내 주었다. 일본의 세력이 이렇게 갑작스레 확장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나라들이 있었다. 특히 프랑스,러시아,독일 같은 나라들은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열강의 힘 앞에 무릎을 꿇는 일본을 보고 왕비(민비)는 이 기회에 그들의 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왕비의 계획을 눈치 챈 미우라라는 일본 공사는 왕비를 없앨 음모를 꾸몄다. 미우라는 왕비와 사이가 몹시 나쁜 흥선 대원군에게 왜인 건달들을 보내었다. 대원군을 앞세우고 궁궐에 들어가서는 왜인 건달들에게 왕비를 죽이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일본도를 휘두르는 왜인들과 대원군이 궁궐에 들이닥치자 왕실 시위대는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 싸웠으나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어서 궁궐 구석구석 샅샅이 살펴라.! 그들은 궁녀들 속에 숨어 있던 왕비를 찾아 내었다. 왕비는 결국 왜인 건달들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그 시체는 불태워지고 말았다. 창수도 이 국모 시해 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너무도 분격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동안은 아무 말도 못할 정도였다. 남의 나라 국모를 죽이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4. 국모의 원수
국모의 원수를 갚자! 왕비가 시해되자 나라 안 곳곳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국모 시해 못지않게 사람들이 격분했던 것은 단발령 이었다. 상투를 자르라는 것이었다. 창수는 고향에 돌아와 있다가 평양에 볼일이 있어 치하포 나루터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1896년 2월의 일이다. 새벽녘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그도 잠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밥상을 기다렸다. 나루터의 밥집이라 방이 넓었고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창수의 눈에 대뜸 거슬리는 자가 있었다. 구석일망정 자리도 널찍하게 차지했고, 주인이 굽실거리며 밥상도 제일 먼저 가져다 주었다. 더욱이 그는 상투 없는 까까머리라 비위가 상했다. 창수는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 꽥 소리를 질렀다. 여보 주인! 어서 밥상을 갖다 주시오. 밥집 주인은 힐끔 창수를 쳐다볼 뿐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창수는 더욱 괘씸하여 목청을 돋구었다. 나는 오늘 해 안으로 700리 길을 걸아야 하는 사람이니 밥 일곱 상을 나에게 가져오시오. 창수가 소리친 까닭은 주인에게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자의 거동을 보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그 자는 말없이 제 밥만 먹고 있을 뿐 창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제법 담찬 녀석인데..... 창수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인은 별 미친 녀석도 다 있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 자는 밥을 빨리 먹어치우고 곧 일어날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창수는 그 자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 이거 처음 뵙습니다. 우리 인사나 서로 합시다. 그 때서야 힐끔 창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황해도 장연에 사는 정가라고 하오. 먼저 실례하겠소이다. 그는 수저를 놓더니 옆에 놓인 보자기로 싼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일어났다. 창수는 그 순간 아무래도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그의 조선말은 꽤 익숙했으나 장연지방의 사투리는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그 막대기 같은 것은 무엇인가. 왜놈의 칼이라고 생각되었다. 막대를 잡는 방법도 칼 잡는 손놀림으로 보였다. 그러자 창수의 머리에 퍼뜩 떠오른 게 있었다. 이 자가 왜놈이라면……, 국모를 죽인 일당의 하나가 아닐까! 소문에 의하면 그 자들이 조선팔도에 쫙 깔려 우리의 내막을 알아 내려 하고 있다는데……. 그래 틀림없다. 창수는 그 자가 나가자 바로 뒤따라 나갔다. 이 밥집의 구조는 다른 보통집과는 조금 달랐다. 갯벌과 가까이 있어서인지 양반집 사랑채처럼 댓돌이 높았고, 방과 마당 사이에 기둥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으며, 기역자로 꺾인 방을 따라 챙처럼 지붕이 덮인 통로는 그대로 봉당이었다. 그 수상한 자는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주인에게 밥값을 치르고 있었다. 창수는 그 자 옆을 슬쩍 지나는 척하다가 발을 재빨리들어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 자는 높은 댓돌에서 굴러 떨어졌다. 창수는 다시 뛰어내리며 그의 배를 힘껏 내리 밟고 두 손으로 목을 졸랐다. 이 갑작스런 일에 모든 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사람들이 몰려나오려고 했다. 창수는 목을 죄는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외쳤다. 누구라도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덤벼드는 녀석은 모조리 죽일 테다! 이 때, 그 왜놈은 아직도 한 손에 막대를 잡고 있었는데 죽을 힘을 다해 칼을 뽑으려 했다. 창수는 다시 껑충 뛰어올라 목을 두 발로 내리밟으며 그 칼을 빼앗아 찔렀다. 피묻은 칼을 한 손에 들고 창수가 다시 댓돌로 올랐을 때, 사람들은 엎드려 벌벌 떨었다. 밥집 주인 이화보는 두 손을 싹싹 비벼 대면서 애원했다. 이 어리석은 놈이 눈이 없어 장사님을 몰라뵈었습니다. 그러나 전 왜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사옵고, 밥을 팔아먹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네 죄를 네가 알았다면 용서해 주마. 냉킁 내려가서 녀석의 소지품을 가져 와라.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 그는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라는 자였고 엽전 800냥을 가지고 있었다. 창수는 그 돈을 사람들에게 뿌려 주고 시체를 강물에 버리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호령했다. 종이와 붓을 가져 오너라. 창수는 종이에 썼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인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 석달 뒤, 창수는 해주 감옥에 갇혔다. 이 무렵, 사법권은 아직 우리 나라에 있었으나 항해 감사 는 창수가 왜인을 죽인 죄수이므로 사건이 중대하다고 생각하여 상급재판소에 넘기기로 했다. 1896년 7월 25일, 벌써 옥에 갇힌 지도 석 달이 되었다. 창수는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에 태워졌다. 인천 감옥에 옮겨진 창수는 다른 죄수와 함께 수용되었다. 그런데 감ㅂ망에 들어가자 누군지 반갑게 부른다. 장사님! 그는 치하포의 밥집 주인 이화보로, 살인 죄인을 그대로 놓아보냈다는 죄로 잡혀 와 있었다. 이화보는 창수를 만나자 신바람이 나서 다른 죄수들에게 떠들어 댔다. 여러분! 이분이 제가 말씀드렸던, 주먹으로 왜놈을 때려 죽이신 그 장사님입니다. 더욱이 이분은 국모님 원수를 갚으셨다 하며 자신의 주소와 이름까지 써 놓고 가셨답니다. 다른 죄수들도 이말에 창수를 예사롭지 않게 보았다. 이 무렵, 어머니는 인천까지 따라와 감옥 앞 객주집에서 식모 노릇을 하면서 아침 저녁 사식을 넣어 주고 면회를 왔었다. 창수는 이 때 옥중에서 장티푸스를 앓고 있었고 손톱으로 이마에 충자까지 새켜 자결할 생각마저 가졌었다. 그 해 8월 31일, 창수의 첫 심문이 있었다. 경무관 김순근이 높은 곳에 앉아 심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왜놈 순경까지 앞에 칼을 세우고 거만하게 있는게 아닌가. 너는 치하포에서 왜인을 하나 죽인 일이 있느냐? 있습니다. 어째서 죽였지? 재물을 뺏기 위해서였나? 아니오, 나는 국모님의 원수를 갚은 것이오. 재물을 뺏은 일은 없소. 밥집 주인 이화보에게 물으면 아실것이오. 김순근은 깜짝 놀랐다. 비로소 김창수가 예사 죄수가 아님을 알았다. 놀란 것은 경무관뿐 아니라 재판정의 조신 사람 관속 모두가 똑같았다. 장내가 술렁거리자 와타나베라는 왜인 순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옆의 통역관에게 묵고 있었다. 창수는 그것을 보자 호통쳤다. 이놈! 왜놈 순경은 듣거라. 세계 어느 나라에 통상화친한다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국모를 죽이는 일이 있다더냐! 창수는 이 일로 갑자기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어머니도 면회 와서 말했다. 창수야, 네가 왕비마마의 원수를 갚았다 해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더라. 김순근 영감님은 너에게 보약을 사 먹이라고 돈을 주었고, 객주집 주인이며 손님들도 도와 줄 일은 없느냐면서 친절하게 해 주니, 어미로서 얼마나 떳떳한지 모르겠다. 두 번째 심문을 받던 날에는 창수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재판정에 들어 가자 김순근은 그 옆을 지나면서 살며시 속삭였다. 오늘은 왜놈의 고관이 왔으니 그들을 더욱 꾸짖어 주게. 세 번째 심문은 9월 10일에 있었다. 이 때는 김순근 보다 더 높은 감리사 이재정이 직접 심문했다. 이 때도 창수는 당당하게 왜인 고관을 꾸짖고 , 다시 덧붙였다. 이렇듯 나는 중전마마를 위해 왜인을 때려 죽였소. 그러니 그 책임은 나에게 있고, 밥집 주인 이화보는 아무런 죄가 없소. 그를 석방하도록 하시오. 이리하여 이화보는 석방되었다. 화보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다. 심문은 세 번으로 끝이었다. 이제는 판결만 기다릴 뿐이었다. 이 때부터 창수에게 면회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책을 읽으라고 넣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감리서 에 다니는 젊은 관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의 말이 창수에게 감명을 주었다. 지금, 세상은 하루하루 바뀌어 가고 있소. 무조건 왜국을 배척하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 아니오. ...... 왜국은 비록 우리에게 원수이긴 하나, 냉정히 따져봅시다. 왜국은 겨우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못한 나라였소. 그런데 그들은 개국 정책을 앞서 받아들여 우리보다 훨씬 앞서고 있소. 비록 원수일지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 하오. 창수는 이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젊은 관리가 두고 간, 청나라에서 펴낸 대서역사 (서양사), 세계지리 (지리책) 따위를 들쳐 보았다. 마침내 창수는 며칠 동안을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그렇다, 힘을 키우는 게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또 왜국이 미운 게 아니라 그들의 불의가 미운 것이다.! 창수의 눈은 그만큼 넓어졌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감옥 안의 그의 생활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하루하루 뜻 있게 살려고 했다. 넣어 주는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창수는 스스로 배웠을 뿐 아니라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억울한 이의 소장을 대신 써주었다. 그런 소문이 바깥까지 들려 황성 신문 에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 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창수는 감옥에서 해를 넘겼다. 하루는 신문을 보다가 이런 대목을 읽었다. 인천 감옥의 김창수를 비롯한 몇몇 사형수의 형을 머지않아 집행한다고 한다. 이 때부터 창수에겐 하루가 고통스러웠다. 대로 만든 용수를 쓰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죄수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며칠 뒤 사형수들은 독방으로 옮겨졌다. 면회 오는 사람들은 전과 다름 없었지만, 어딘지 태도가 달랐다.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창수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든가 엉뚱한 말로 얼버무렸다. 다만 어머니만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창수는 그것이 다행스러웠다. 어머니가 아신다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어느 날 , 밖이 떠들썩해지며 여럿이 뛰어오는 발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창수는 그 발 소리가 운명의 발 소리처럼 들렸다. 덜커덩! 감방의 문이 열렸다. 김창수! 이제는 살았소! 달려온 것은 옥사장과 몇몇 옥졸이었다. 창수! 감리 대감과 경무관 나으리를 비롯한 인천 감옥의 사람들이 아침부터 밥 한 술 뜨지 못하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오? 차마 우리 손으로 어찌 창수를 죽일 수 있을가, 그 걱정만 태산 같았지 뭔가.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아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시어 김창수의 사형을 면해 주라고 하셨소. 이튿날, 어머니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창수를 면회하러 왔다. 창수야, 네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애써 주신 분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있고말고! 이 어미는 어젯밤까지도 몰랐다만 너의 사형에 대해 벌써부터 신문에 났던 모양이더라. 그래서 인천의 물상 객주 32명이 너를 위해 사방 통문(주문자를 숨기기 위해 관계한 사람의 이름을 둥글게 사발모양으로 쭉 써 놓은 것)을 돌렸지 뭐냐. 호오, 사발 통문까지요? 그래. 통문의 내용은 쇠뿔골(우각동)에서 김창수가 처형된다면 인천에 사는 사람은 어느 집이고 빠짐없이 매호당 한 사람씩 쇠뿔골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일 때에는 엽전 한 푼씩 갖고 와서 창수의 몸값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창수는 그 말을 듣자 뜨거운 눈물이 나왔다. 감옥에서 한 해가 또 지나갔다. 하루는 낯선 사람이 창수를 찾아왔다. 나는 강화에 사는 김주경이라 하는데 선생의 소문을 듣고 크게 감탄했습니다. 선생 같은 분이 옥에 갇혀 있다면 나라의 큰 손실입니다. 김주경은 아전 의 자식으로 돈이 많았다. 그는 이 때부터 창수의 석방 운동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애를 썼다. 그러나 몇 달을 뛰어다녔지만 돈만 없어졌다. 그래서 주경은 석방 운동을 단념하고 마지막으로 면회와서 쪽지 하나를 남기고 갔다. 새는 새장을 벗어나야 비로소 날 수 있고, 고기가 통발을 벗어나니 어찌 예사롭다고 하리요. 그 뜻은 탈옥을 은근히 권하는 말이었다. 창수는 마침내 탈옥을 개획했다. 탈옥 예정일은 1898 년 3월 9일. 창수는 미리 쇠꼬챙이 하나를 구해 두었다. 그리고 옥졸을 불러 돈을 쥐어 주며 부탁했다. 내가 오늘 죄수들에게 한 턱 내려고 하니 술을 사다주시구려. 그 날 밤, 80여 명의 죄수들이 술과 고기를 한껏 먹고 취흥이 무르익자, 창수는 옥졸에게 또 한번 부탁했다. 죄수들이 모처럼 노래라도 부르고 싶어하니 허락해주십시오. 그러나 너무 시끄럽지 않도록 하시오. 옥졸은 창수에게 얼마의 돈을 받았기 때문에 눈을 찡긋해 보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벼렸다. 창수는 죄수들의 노랫소리로 시끄러운 틈을 이용해 쇠꼬챙이로 땅굴을 파고 조덕근 등 계획을 함께 한 죄수 몇 사람을 먼저 내보냈다. 창수가 맨 나중에 나가 보았더니 조덕근 등은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떨고 있는 게 아닌가. 뭣들 하고 있지? 사나이가 한 번 무슨 일이고 시작했으면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로써 행도해야지. 창수는 그들을 꾸짖고 한사람 한사람 받쳐 주어 한길 반이나 되는 담을 넘어가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수가 담을 넘으려 할 때, 밖에서 요란한 호각 소리가 들렸다. 탈옥이다! 앞서 나간 조덕근 등이 들킨 모양이었다. 창수는 운을 하늘에 맡기고 담을 넘었다. 담 너머에 공터가 있고 담이 또 하나 있었는데 파수 보던 순경들은 비상 소집이되어 조덕근 등을 쫓아갔는지, 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수는 마침내 어둠을 틈타 그 문을 빠져나갔다. 감옥에서 탈출한 창수는 곧장 남으로 내려가 수원, 오산, 강경, 무주, 남원에 들렀고, 다시 북으로 올라와 전주, 목포, 광주, 함평, 강진, 고금도, 황도, 장흥, 보성, 화순, 동북, 순창 같은 곳을 다니며 방랑했다. 마침내 그는 공주 계룡산에 이르렀다. 계룡산엔 갑사, 신원사, 동학사 같은 예절이 있는데 창수가 일찍이 공부한 풍수와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갑사를 구경 오셨소? 창수가 법당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마흔 살쯤 된 사람으로 매우 점잖았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중이 되는 것도 괜찮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라리 불도를 닦는 게 나을 것이오. 그러나 이 곳보다 마곡사에 높은 도를 깨친 스님이 있다 하니 그리로 갑시다그려.
5. 국내 투쟁
창수는 우연히 알게 된 이 생원이란 그 사람과 마곡사를 향해 걸었다. 제행 무상……. 세상사도 지나고 보면 한낱 꿈, 노형, 어찌하려오. 세상의 일일랑 훌훌 털어 버리고 나와 같이 중이됩시다. 이 생원은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중이 되겠다고 했다. 창수도 탈옥한 몸이니만큼 절에 숨는 것이 괜찮겠다고 여겨졌다. 마곡사의 고승 용담 화상은 창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우리 불문에선 오는 이를 쫓지 않고, 가는 이를 막지 않는다. 너는 절에 오래 있을 몸이 아니다. 일하면서 있고 싶으면 있어라. 마치 창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이리하여 창수는 머리를 깎고 원종 이란 법명을 받았으며 하은당 이란 늙은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하은당은 사뭇 들어볶다시피 자질구레한 일을 시켰다. 원종, 허리가 아프다. 꽉꽉 주물러라. 창수는 절에서 나무도 해 오고 물도 긷고 밥도 지어야 했는데, 상좌 중까지 잔 일을 시켰다. 그는 몇 달을 참아 가며 지냈지만 슬그머니 불평도 생겼다. 이건 중이 아니라 절 머슴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하은당이 불렀다. 너는 글을 읽을 줄 알겠지? 네, 조금요. 그러면 이 경문을 배우도록 하라. 만 번, 10만 번쯤 읽어라. 그것은 반야 심경 이었다. 반약 심경은 글자가 260자 밖에 되지 않지만 불교의 진리가 압축되어 있다. 창수는 이 반야 심경을 열심히 읽었다. 이럭저럭 중이 된지 반 년이 지났다. 용담 화상이 그를 불렀다. 어디, 반야 심경에 대해 좀 알았느냐?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경을 일게 되면 답답하던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용담은 미소를 머금었다. 창수가 섣불리 불경에 대해 알았노라고 한다면, 목탁 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줄 창이었다. 그렇다면 되었다. 내일부터 이 절을 떠나 동냥을 하여라. 우선 서울 새 절로 가는 게 좋겠지. 1899년 3월, 창수는 서울로 올라왔다. 이 때 이미 대한 제국은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왜놈 헌병이 우리 동포를 잡아가고 있었다. 1900년, 창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창수는 그 때 승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에 대한 관의 추궁이 일단은 끝났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사람이 어떤 은혜를 받고 그것을 모르는 척한다면 이는 짐승만도 못하다 하겠습니다. 제가 인천 감옥에 있을 때 강화 사람 김주경이 저를 석방시키려고 재산까지 없애 가면서 애를 써 주었습니다. 그 때 편지로 고맙다는 말은 했으나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게 사람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창수는 강화로 주경을 찾아갔으나 가족들도 몇 년째 그의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주경의 동생 진경의 집에 머물면서 주경의 아들 윤대의 글공부나 가르치며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다. 창수의 서당은 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아이들이 30여 명으로 늘었다. 이 무렵, 창수는 이름을 김구 라고 바꾸었다.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러나 주경의 소식은 여전히 알길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구는 매우 불길한 꿈을 꾸었다.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물었다. 너, 황천이란 글자를 써 보아라. 황천은 저승이란 뜻이다. 김구는 그 꿈 이야기를 진경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버님이 걱정되오. 무슨 병환이라도 나셨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곧 떠날 준비를 하고 해주로 달려갔다. 이틀 뒤 저녁 무렵 집 안마당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뛰어 나오며 말했다. 아이구, 네가 용케도 돌아왔구나! 아버지가 다시 병이 도져 몹시 위중하시다. 어서 들어가 보아라! 아버지는 간호한 보람도 없이 김구가 돌아온 지 14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1901년 2월의 일이었다. 1903년 김구가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났다. 그러자 친척 할머니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혼인말을 가져 왔다. 어머니도 그이 혼인을 몹시 바라는 눈치였기 때문에 김구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다만 세 가지 조건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첫째, 재산이 없어도 좋은가. 둘째, 처녀는 어느 정도 글을 배워야 한다. 셋째, 서로 만나 말을 주고 받아도 좋은가. 이것만 들어 주신다면 승낙하겠습니다. 할머니는 펄쩍 뛰었다. 다른 것은 다 좋지만, 장가도 들기 전에 남의 집 색시를 만나 볼 수는 없소. 그러나 의외로 색시 쪽에서 좋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김구는 중매장이 할머니와 색시 어머니가 지켜 보는 가운데 장연 처녀 여옥과 맞선을 보았다. 김구는 이 때 물었다. 저와 혼인할 생각이 있습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자, 김구는 다시 물었다. 혼인은 앞으로 1년 뒤에 올리기로 하고, 그 때까지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글을 배울 수 있겠소? 이 말에도 처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할머니를 통해 그렇게 하겠다는 승낙을 해 왔다. 이리하여 약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여옥은 결혼식을 올릴 때쯤되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구는 1904년 스물아홉 살 때 김천의 최준례와 결혼했다. 이듬해인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온 나라의 애국 청년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약은 협박에 의한 것이니 무효다. 즉시 폐기하라. 기독교의 투쟁도 활발했다. 김구는 진남포 대표로 서울 상동 교회 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 참가했다. 이 때 참가한 사람으로 뒷날 동지가 된 전덕기, 이동녕, 옥관빈, 조성환 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김구는 안악의 양산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김홍량을 알게 되어 그와 친하게 지냈다. 1909년에 해서 교육 총회 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김구는 학무 총감으로 뽑혔다. 이 교총 의 목적은 황해도 일대의 모든 학교가 연합하자는 데 있고, 교육 계몽을 적극 추진하여 한 면에 학교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김구는 이 목표 달성을 위해 바삐 뛰어다녔다. 재령, 장연, 송화 등 가는 곳마다 강연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송화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무렵 송화에는 황해도 일대의 의병을 토벌하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어 그 분위기가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김구는 대담하게도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조선 사람이 일본을 배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왜적을 맹렬히 공격했다. 연설이 반도 끝나기 전에 군중은 강제로 해산되고 김구는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왜놈의 헌병 장교는 까무러진 김구에게 찬물을 끼얹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똑바로 말해라! 거짓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다 아니까. 무엇을 똑바로 대라는 것이오, 내용도 말하지 않고. 그럼 좋아. 너는 은치안을 알 테지? 은치안? 모르는 이름이오. 거짓말 마라.! 왜인 장교는 긴 칼로 마룻장을 울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리 윽박지르더라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청계동은 알고 있지? 청계동이라면……. 알고 있단 말이지. 그 청계동 출신의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각하를 총으로 쐈다. 너도 그 공범자지? 김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이 얼마나 통쾌한일인가. 김구는 소년 시절의 중근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김구는 한 달 남짓 갖은 심문을 받은 끝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그는 재령 보강 학교 의 교장 겸 선생으로 일했다. 이 때 이 학교에는 장덕준과, 학생이던 장덕수가 학교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고 있었다. 또 이 무렵 그는 나석주와도 몇 차례 만났으며, 노백린과 이재명을 만나기도 했다. 이 무렵, 신민회 라는 비밀 단체가 있었다. 이것은 1907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만든 것으로 이갑, 전덕기, 양기탁, 안태국, 이동녕, 이동휘, 김홍량, 그리고 김구 등 400명이 그 비밀 회원이었다. 1910년 8월, 드디어 나라가 망했다. 이른바 일본은 국권 강탈 을 하고 통감부 대신 총독부를 둔것이다. 이 때 김구는 서울의 양기탁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비밀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누군가 말했다. 왜적이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각 도에 도독부 를 두고 저들과 맞서야 하오. 황해도 대표로는 김구가 뽑혔다. 김구는 같은 학교의 김홍량에게 이것을 알려 주었고, 함께 독립 운동을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도 깊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 좀 열어 주시오. 나, 안명근이올시다. 아니, 자네가? 김구는 놀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명근은 안 의사의 사촌 동생으로 김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 밤중에 어쩐 일인가요? 네, 안악의 부자들이 독립 자금을 낸다 약속하고선 도무지 내놓아야지요. 그래서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때를 보일까 하오. 김구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팔짱을 끼었다. 독립 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은 좋지만 그것을 억지로 거둬들인다면, 그 일이 과연 옳다 할 수 있을까? 며칠 뒤, 김구는 신문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허, 이 사람 기어이 일을 저질렀군. 신문엔, 사리원 역에서 육혈포를 가진 괴한 체포! 이름은 안명근이라 한다. 고 씌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김구는 곧바로 김홍량, 한필호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남산에 있는 경무 총감부로 끌려갔다. 심문하는 왜놈은 대뜸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아느냐? 끌려 왔을 뿐이지, 까닭은 모른다. 그렇다면 실토를 하도록 맛을 보여 주마. 그러고는 다짜고짜 천장에 거꾸로 매달고 때렸다. 심문과 고문은 매일 계속되었다. 그 날도 김구는 끌려나가 고문을 받았다. 왜놈이 이것저것 묻다가 불쑥 물었다. 너는 학교 선생이라면서. 그렇다. 네가 가르치던 학생 가운데 똑똑하고 너를 따르던 학생도 있었겠지. 그야 있다. 그 학생이 누구냐? 김구는 망설였다. 그러나 선생이 자기를 따른 학생의 이름을 말한들 별이이야 있겠는가 생각되었다. 최중호라는 학생이다. 그런데 며칠 뒤, 심문실에 끌려나간 김구는 아차 싶었다. 그 곳에 최중호가 끌려와 모진 고문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김구는 이 때부터 왜놈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고문도 그들이 쓰는 간사한 함정의 하나였다. 어떤 죄를 자백받기 위한 방법이 아니고, 죄를 억지로 만들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복도에서 고문을 받고 나오는 한필호를 만났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김 선생님. 모른다고 했더니 지독한 악형을 받습니다. 나는 이제 죽을 거예요. 김구는 소리를 높여 격려했다. 한 선생, 그게 무슨 약한 말이오. 정신력마저 잃는다면 정말 이 지옥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오. 한 선생은 잡혀 온 양산 학교 선생 가운데 나이도 가장 어렸고 몸도 약했다. 며칠 뒤 그가 마침내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구는 가슴을 치며 슬퍼했다. 김구는 김홍량과 어느 날 대질 심문을 받았다. 그 때 김구는 생각했다. 김홍량은 어느 누구보다 양산 학교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다. 내가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만은 꼭 살려 내보내야 한다. 그리하여 김구는 심문에 갑자기 협조하였고, 홍량에게 유리하도록 말했다. 그리고 홍량의 용기를 돋우기 위해 이런 말을 건냈다. 거북이 진흙 속에 빠져 있을망정, 기러기는 멀리 바다를 나네. 거북이는 김구의 구 자이고, 기러기는 홍량의 홍 자로서 김홍량을 가리킨다. 이 때의 사건이 안악 사건 으로 1911년 8월, 첫 공판이 있었다. 법정에 들어가 피고석에 앉았을 때, 어머니와 철 모르는 딸 화경이 방청을 하러 와 있었다. 재판 결과, 김구는 15년 형과 보안법 관계로 2년 더해지는 중형이 내려졌다. 형이 확장되자 그는 서대문 감옥에 옮겨졌고, 그 때부터 기나긴 감옥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구는 좀처럼 가족과의 면회가 하락되지 않았는데 18개월 만에 겨우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김구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관찰사 벼슬을 한 것 보다 더 자랑스럽다. 우리 걱정은 말고 네 몸이나 소중히 하여라. 안악 사건의 관련자로 징역 10년 형을 받은 최명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염성 옴에 걸려 독방에 결리 수용되었다. 혼자 갇혀 있으니 얼마나 쓸쓸할까. 김구는 간수의 발 소리가 들리자 일부러 뒹굴며 몸을 북북 긁었다. 간수는 이상히 여기고 소리쳤다. 그게 뭐하는 짓이지? 미칠 듯이 가려워서요. 가렵다고? 이를 잡으면 되잖아. 그러자 미리 짜고 있던 같은 방의 죄수들이 입을 모아 떠들었다. 김구는 지독한 옴쟁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옴이 옮았는지 가려워요. 간수는 김구를 최명식의 방으로 옮겨 주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 안으며 기뻐했다. 그 날 밤, 두 사람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것이 감옥의 규칙 위반이라는 이유로 김구는 끌려나가 몽둥이로 심하게 얻어맞았다. 이 때 김구는 왼쪽 귀 위쪽 무른 뼈를 다쳐 귀가 짝짝이처럼 보이게 되었다. 감옥에 수감된 지 1년쯤 지났을 때 일본의 메이지 천황 이 죽었다. 김구는 대사령 이라는 것에 의해 형기가 8년 감형돼 7년이 되었다. 이어 그 천황의 처가 죽었다하여 형기는 다시 5년으로 감형, 이미 지난 3년을 빼면 2년밖에 남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이름의 거북 구 자를 아홉 구 자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왜놈의 호적에서 완전히 떠나자는 뜻에서였다. 또 호는 백범 이라 했는데 이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 백정에서 한 자를 따오고, 잘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란 뜻의 범부 에서 또 한 글자를 따 만들었다. 백범은 그 무렵 대우가 가장 나쁘다고 알려진 인천 감옥에서 보내졌다. 그 때 인천은 축항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죄수를 그런 중노동에 내보내 마구 부려먹었다. 백범으로선 인천 감옥은 추억이 많은 곳이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이 익은데, 혹시 당신은 김창수가 아니오? 백범은 놀라며 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17년이 지난 옛일이 떠오른다. 좀도둑으로 잡혀와 한 감방에서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구려. 당신은 문종철……. 헤헤헤, 역시 김 서방이로군. 자네가 달아난 덕분에 나는 그 때 매를 죽도록 맞았지. 그것 미안하구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또 들어와 있소? 소가 한 마리 있기에 그 고삐를 끌고 갔더니 소도둑이라 하더군. 에끼, 이 사람! 웃을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감옥 문을 나설 때, 이런 곳에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건만 제 버릇은 개도 주지 못한다는 말처럼 의지가 약해서인지 또 들어오기도 한다. 백범은 한없이 서글펐다. 인천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는 사이 백범은 가출옥이 되었다. 1914년 7월의 일로, 3년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은 셈이었다. 그 후, 그는 3,1운동이 있기까지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았다.
6. 임시정부
처음에 감옥에서 나왔을 때, 어머니는 백범의 손을 잡고 그 꿋꿋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애비야, 너는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마는 너는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화경이는 몇 달 전에 그만 죽고 말았구나. 겨우 일곱 살밖에 안 된 화경이가……. 아버지가 걱정한다고 병난 것을 한사코 알리지 말라고 해서 너에게는 그 소식마저 전하지 못했구나. 이 말을 들었을 때 백범의 마음은 오죽이나 아팠을까?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이미 마흔네 살이었다. 그는 비장한 결심을 품고 사리원을 거쳐 기차로 압록강을 건넜다. 김구는 4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 때 상하이에는 신한 청년당 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립 임시 사무소 가 설립되어 있었고, 현순이 그 대표자였다. 이들은 4월 11일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세워 각 총장을 추대하고 있었지만, 추대된 인물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고 아직은 정식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상하이 임시 정부가 제대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도산 안창호가 돌아와 내무 총장을 맡고 나서부터였다. 8월의 어느 더운 날, 백범은 안창호를 찾아갔다. 안 총장, 나를 임시 정부의 문지기로 써 주시오. 네? 도산은 깜짝 놀랐다. 김구라면 이미 이름이 알려진 독립 투사였고 나이도 마흔 살이 넘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쥐꼬리만한 자기 경력을 내세우며 보다 높고 편한 자리를 탐내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의 뜻은 알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내일 국무회의에 올려 의논하겠습니다. 회의의 의결로 백범에게 임시 정부 경무 국장의 직책이 주어졌다. 이 무렵, 상하이에는 중국 땅이면서 중국의 법이 미치지 못하는 특수 지역이 있었다. 그것은 조계 라는 것으로, 프랑스 조계, 영국 조계, 공동 조계가 있었다. 임시 정부는 프랑스 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임시 정부를 파괴하기 위해 영사관 경찰과 특무 기관을 설치했고, 돈을 물쓰듯이 써 가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백범은 경무 국장으로 그들의 밀정 잠입을 막는 일을 하였다. 동농 김가진은 친일파는 아니었으나 국권 침탈이 이루어졌을 때 대신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 부터 남작이란 작위를 받았다. 그런 동농이 아들 의한을 데이고 상하이에 망명해 왔다. 일본 제국의 남작이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면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라! 일본 영사관은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돈으로 매수하면 어떨까요? 김가진의 아들 의한의 처남되는 자로 정필화라는 자가 있습니다. 이 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화는 백범의 물샐 틈 없는 경계망에 걸려들어 민족 반역자로 처단되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계획이 시작도 되기 전에 실패하고 말았잖아! 영사관 경찰 우두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일이 해결되나? 너는 이번 실패에 책임을 지고 할복 자실이라도 해야 한다. 알겠나? 넷, 각하! 그러나 김구란 녀석은 무서운 상대입니다. 요즘 와서 여러 가지로 정보를 수집하고 조사하여 그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김구는 바로 24년 전, 당시 특수 임무를 띠고 있던 우리 일본 제국 장교를 살해한 범인으로 사형 언도까지 받은 자였습니다. 이 못난 자식! 그렇다면 더욱더 김구를 없애야만 하지 않겠나. 이렇게 된 바에는 김가진의 문제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김구부터 없애도록 하라. 핫! 부하는 우두머리 앞에서 연신 땀을 닦았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듯 빙그레 웃었다. 각하, 좋은 수가 있습니다. 황학선이라는 자를 알고 계실 테죠. 그를 이용하는 겁니다. 황학선은 해주 사람으로 독립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임시 정부에서도 그를 믿고 본국이나 다른 곳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집에서 재우도록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어느덧 돈에 팔려 왜놈 앞잡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선은 영사관 경찰을 비밀히 만났다. 그들 사이에 어떤 밀담이 오고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학선의 사위 나창헌이 프랑스 조계 안의 어떤 양옥을 세내어 병원을 차렸다. 이 나창헌과 김의한은 친구였다. 의한은 자기 처남 정필화가 경무국 손에 의해 죽자 임시 정부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의한은 불량배 10여 명을 고용하여 임시 정부 청사를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범인들은 경무국 손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백범은 물었다. 너는 우리 동포로서 어찌하여 임시 정부를 습격했는냐? 그것은 경무국의 손에 의해 처남 정필화가 죽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그 같은 감정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화를 민족 반역자로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의심나는 점을 캐물었다. 불량배를 고용하는 돈은 어디서 났지? 너에게 그런 돈은 없을 텐데……. 의한은 처음에는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으나 마침내 실토하고 말았다. 친한 나창헌이 대 주었습니다. 잡혀 온 나창헌은 돈을 대어 주어 준 목적을 묻자 떳떳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독립 운동은 존경하고 있소. 그러나 동포가 동포를 죽이는 일에는 찬성할 수 없어 돈을 대주었소.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그대는 공부한 조선 젊은이가 아닌가. 지난 기미년 독립 만세 때 수천명의 우리 동포가 단지 평화롭게 만세를 불렀다는 죄 하나로 왜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 따라서 우리는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죽음으로써 임시정부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비록 동포라도 왜적의 편이 되었다면 이는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헌과 의한은 김구의 말에 깊이 뉘우치며 고개를 숙였다. 백범이 5년 동안 경무 국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동포가 왜놈의 돈에 팔려 민족 반역의 죄를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했으며 민족 반역자는 용서없이 처단했다. 독립 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처움에 독립 운동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국내는 접어 두고 해외에서 활약한 독립 운동만 보다라도 중국의 동북 지방(만주) 일대와 연해주(시베리아), 그리고 미국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교포가 많이 사는 곳에 따라 그들 나름대로 독립 운동이 일어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왜적과 싸우려면 독립 운동을 상해의 임시 정부 아래 하나로 뭉쳐야 한다. 임시 정부는 그 단결에 힘썼다. 그래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이동휘가 상해로 왔다. 동휘는 함경도 단천 사람으로 궁전 근위 대장을 지낸 사람이다. 특히 동휘는 이갑, 이준과 손을 잡아 서북 학회 를 만들고 보성 학교 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동휘는 상하이로 온 뒤 임시 정부 국무 총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백범, 공원으로 산책을 가지 않겠소? 동휘는 공윈의 조용한 곳에 이르자 말했다. 백범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릇 혁명이란 피를 흘려야만 하는 것인데 임시 정부가 걷은 길은 그렇지가 못하오. 선생의 말은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소련의 공산 정권은 1917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국제적으로 퍼뜨리려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렇소. 첫째, 독립 운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오. 우리가 그런 돈을 저들로부터 받아 이용하자는 것이오. 그 순간, 백범은 엄숙한 얼굴로 되었다. 선생, 우리의 독립 운동은 우리 대한 민국의 독자적인 운동입니다. 어떤 제 3자의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은 그들에게 얽매이는 것이며, 우리 임시 정부 헌장에도 어긋납니다. 총리께서 하신 말씀은 큰 잘못이라,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선생께선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이동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돈을 끌어쓰려 했음은 큰 잘못이었다. 이 무렵, 백범의 어머니는 하도 생활이 어려워 중국인의 쓰레기통을 뒤져 거리서 배추나 무 부스러기를 가져다가 끊여 먹기도 하였다. 애비야, 듣자 하니 사람들이 살기 좋은 미국으로 간다고 너도나도 상해를 떠난다고 하더라. 우리도 차라리 미국에나 가자꾸나. 어머님, 그 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어째서냐? 혁명 운동은 호화스런 곳에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녀석아, 그게 네 고집이라는 것이다. 이 못난 아들 김구는 죽을 때 죽더라도 절대로 제 한몸의 안락을 위해 중국 땅을 떠나지는 않겠습니다. 드디어 어머니는 회초리를 손에 잡았다. 백범은 어머니의 회초리를 맞으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는 물었다. 네가 나한테 맞는 게 아프고 분해서 우느냐? 예전에는 어머니께서 때리시는 게 아팠는데 오늘은 어머님께서 맥이 없으십니다. 어머님이 이렇듯 힘없이 늙어 가시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면 저를 이렇게 때려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백범은 더욱 슬프게 소리 높여 울었다. 어머니도 회초리를 버리고 함께 울었다. 1923년 겨울, 검은 구름이 백범의 가정을 덮었다. 부인이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이래야 무료 병원으로 약값은커녕 하루하루 끼니를 이을 쌀마저 없었다. 둘째 아들 신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할 정도인데 배가 고프다고 울어댔다. 아가야, 아가야 울지 마라. 할머니는 신을 없고 달랬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한인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가난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래서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마침 백범이 돌아와 있었다. 애비야, 너 돈 가진 것 없니? 백범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병원에서 약도 사 먹이지 못한 아내의 손을 잡고 안타까워하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신이 몹시 보채는구나. 돈이라도 있다면……. 백범은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주머니 속까지 뒤집어가며 찾았다. 하늘의 도움일까? 1전짜리 구리돈이 하나 굴러나왔다. 그 돈으로 물 한 주전자와 설탕 조금을 살 수 있었다. 신은 그 설탕물을 먹서야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빈 젖을 빨며 잠이 들었다. 그러던 1924년 1월 1일, 겨우 서른여덟 살이던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무렵 김구는 내무 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우남 이승만도, 도산 안창호도 떠나 버린 임시 정부였다. 임시 정부의 운영 자금은 주로 미국의 교포들이 대 주고 있었는데 처음의 열기와는 달리 이것도 끊어졌다. 임시 정부 청사로 쓰는 건물은 집세가 36달러였는데 그것마저 몇 달씩 못 내었다. 그러는 중에도 일본의 세력은 점점 커 갔다. 이제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대륙까지도 집어삼키려 했다. 1927년, 백범은 쉰두 살로 임시 정부 국무령(최고 책임자)이 되었다. 당시 의정원(국회)의장이던 이동녕이 백범에게 권했던 것이다. 상하이의 뒷골목, 중국인과 한인들이 뒤섞여 사는 곳에 헙수룩한 중국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흰옷 입은 조선 여자들은 그를 보더니 한 마디씩 했다. 김 영감. 두상, 김 두상. 또 어떤 여자는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아이구, 저놈의 두상! 거짓꼴을 하고 이 집 저 집 돌아 다니는 모습을 하며……. 이 노인이 바로 백범 김구였다. 이런 백범의 모습은 바로 이 무렵의 독립 운동가의 숨김없는모습이었고, 임시 정부의 현실이었다. 백범은 백범일지 에 썼다. 한창 때에는 상하이만 해도 1천 명이나 있었던 독립 운동가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되는 형편이다. 아아,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백범은 비록 거지꼴의 늙은이 모습이었으나, 그이 마음에는 아직도 불길 같은 독립 정신이 살아 있었다. 그것은 이봉창 의사의 일본천황에 대한 폭탄 투척,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 사건으로 증명되었다.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뿐 아니라, 잠들었던 동포의 마음과 침략을 받고 있던 중국인의 마음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김구 주석이 누구냐?
7. 조국 광복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순국! 백범은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당히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은 물론이고, 이번에 훙커우 공원에서 시라카와 대장 등을 폭살시킨 윤봉길은 한인 애국 단원 이며 그 주모자는 김구다! 이 성명서가 나가자 세계는 모두 김구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중국인은 너도나도 임시 정부에 대한 원조를 스스로 청하고 나섰다. 이뿐만 아니라 이것은 뒷날 중국의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한인 윤봉기의 의거는 중국인 3억의 원수를 대신 갚아 준 것이다. 1933년 8월, 백범은 장 제스 총통과 만났다. 장 총통은 악수를 하며 말했다. 당신이 백범 선생이구려. 일찍이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군요.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백범 선생. 중국과 한국은 옛날부터 형제의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임시 정부를 도와 드릴 방법이 없을까요? 백범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그러시다면 앞으로의 독립 전쟁을 위해 사관(장교)을 양성하고 싶습니다. 1931년의 만주 사변 이 있고 난 뒤부터 우리의 독립군은 거의 없어졌다. 백범은 그 독립군을 다시 일으킬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겠지요. 곧 그 방법을 연구해 봅시다. 이리하여 중국군 사관 학교에 조선인 젊은이가 입학하여 훈련을 받게 되었다. 독립군의 간부였던 이청천, 이범석 등이 직접 훈련을 담당하기도 했다. 1934년, 그 동안 인과 신 두 아들을 데리고 해주에 돌아가 있었던 어머니가 중국으로 왔다. 실로 9년 만에 다시 만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 하지 않고 자네라 하겠다. 또 말로 꾸짖기는 하겠지만 회초리는 들지 않겠다. 이것은 자네가 사관 학교를 세우고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다니 그러는 것이다, 백범은 어머니를 남경으로 모시고 집을 따로 마련하여 지내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김 주석 어머님 생신이 2월 26일이라 합니다. 평생을 고생만 하신 어머님이니 조촐한 생일상이라도 차려 드립시다. 그 곳 동지들이 돈을 모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백범의 어머니는 말했다. 이왕이면 그 돈을 나에게 주지 않겠소? 그걸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 먹을 테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이윽고 생신날이 되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갔더니 백범의 어머니는 총 두 자루를 내놓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생일은 여러분의 정성만으로도 배가 불러요. 이 총으로 왜적 하나라도 더 물리칩시다. 1937년 7월, 일본은 마침내 중국에 대한 전면적 전쟁을 일으켰다. 중국군은 일본의 공격 앞에 전세가 몹시 불리했다. 일본은 중국의 수도이던 남경을 폭격했다. 이 때 백범이 세들어 살던 집도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백범이 간신히 무너진 흙더미를 헤치고 나와 보니 사람들의 울부짖음 속에 여기저기 시체가 수없이 뒹굴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은 다행히 무사했다. 간밤의 폭격에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놀라기는 무얼 놀라. 그보다는 우리 교포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남경이 위태로워 임시 정부는 장사, 중경으로 옮겨 갔다. 이제는 어엿한 독립국 정부 대우를 받으면서 중국 정부와 행동을 같이했다. 장사에 있었을 무렵인 1938년 5월, 백범은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갈라져 있던 국민당, 혁명당, 한독당 등 민족 진영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 때 갑자기 괴한 하나가 회의장에 뛰어들어와 권총을 마구 쏘았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김구가 맞아 쓰러지고 현익철, 유동철, 이청천이 차례로 총에 맞았다. 이청천 장군만 가벼운 상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크게 다쳤다. 특히 백범은 의사가 보고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가망이 없습니다. 장례를 치를 준비나 하십시오. 그러나 백범은 끈질긴 생명력을 지보였다. 한 달 가까이 병석에 눕긴 했으나 기적적으로 완쾌했다. 총을 쏜자는 이운한으로, 3당 통합에 사소한 감정을 품었던 것이다. 백범이 퇴원하여 어머니한테 인사를 가자, 어머니는 말했다. 자네가 한인 총에 맞아 살아 있는 것이 왜놈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하구나. 백범은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며 다리가 뻣뻣해졌다. 진찰을 했더니 심장 옆에 박혀 있던 총알이 오른쪽 갈비뼈 근처로 옮아 갔다고 했다. 수술은 할 수 있었으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 관계는 없고, 다리의 마비도 곧 나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백범은 총알을 그냥 몸속에 두기로했다. 이 때문에 백범은 그 뒤 손이 떨리는 수전증에 걸렸다. 중경에 옮긴 뒤 백범은 중국 정부에 제의했다. 한국과 중국은 같은 배를 탄 공동 운명체다.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 그 길을 열어 달라. 이 무렵 어머니가 위독했다. 백범은 정성껏 간호했지만 워낙 나이가 많으셔서 회복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백범은 슬픔 속에서 광복군 편성을 위해 바삐 뛰어다녔다. 아무리 장제스 총통을 비롯한 중국 정부 요인들이 응원해 준다고는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편성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갖 어려움 끝에 광복군이 편성되었고 전선 가까운 서안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백범은 광복군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고,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우리 동포의 학도병 이나 지원병 에게 뿌리는 전단도 만들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너희들은 나이가 어리고 타고난 운이 비참하여, 남만 못지않은 찬란한 문화의 핏줄을 가졌것만, 저 몹쓸 원수 왜놈의 협박과 우혹으로 세상 부끄럽게 지원병이라는 이름 아래 말과 소같이끌려다니며, 멋모르고 뜻없이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구나. 참호 속에서 포성을 들을 때, 누가 일러주기나 하듯 너의 염통은 저절로 아프리라. 들에서 재가 될 때 너의 혼백은 끊임없이 울리라. 조상의 혼령을 뵈올 때 너를 어루만지면서 비참해하시는 조상의 손은 너를 더욱 아프게 하리라. 자기 나라의 명예를 되찾지 못하고, 왜놈이 이끄는 대로 비참한 구렁 속에 헤매고 있음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이 전단을 주워 몰래 읽고,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이 500명도 넘었다. 백범은 학도병에서 탈출한 광복군 간부 50여 명에게 격려 연설을 하였다. 조국 대한의 아들 여러분! 여러분을 맞는 나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찼고, 마음 또한 든든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 밖에 나와 있기 때문에 나라 안 소식을 잘 모릅니다. 그동안 동포 모두가 아주 왜놈이 다 된 줄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항거하여 용감히 탈출한 여러분을 보니……. 우리 한민족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 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알려졌다. 임시 정부의 사람들은 그 내용을듣고 처음에는 모두 기뻐했다. 한국의 독립의 대해 처음으로 연합국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한국의 독립을 미국, 영국, 중국이 보장한다고 하네. 우리가 오랫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은가! 백범도 물론 기뻐했다. 그러나 카이로 선언을 자세히 읽고 검토하는 그의 얼굴빛은 흐려졌다. 외교 부장,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하면서 뒤에 꼬리를 붙인 것은 무슨 뜻인가? 주석, 나도 그 꼬리가 마땅치 않게 여겨져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하던 참입니다. 다시 말해서 카이로 선언에는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켜 준다. 는 꼬리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카이로 선언에 서명하신 장 총통께 직접 물어 보고 따져야만 하겠소. 이리하여 주석 김구, 외교 부장 조소앙, 선전 부장 김규식 등이 장 총통을 찾아갔다. 그리고 12월 15일, 임시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며 지배할 슬기와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다른 민족이우리를 다스리거나 또는 노예로 삼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또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국제 지배도 원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일본이 무너지는 그 순간 독립되어야 한다. 백범은 적당한 절차 라는 꼬리가 달린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백범 김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 을 고비로 멸망의 길을 치딛고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그들은 그 동안 온갖 기승을 부려 왔다. 1944년, 일본은 학병 제도 라는 것을 만들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사람이 딸리자, 이제껏 얕보고 차별하며 탄압했던 조선 사람을 갖은 달콤한 말로 꾀어 전쟁에 내보낼 궁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게 바로 지원병이나 학도병이었다. 중국에는 그 때 미국 군사 고문단이 와 있었고, 막대한 군사 원조를 했다. 중국에 와 있는 미국 사령관 웨더마이어 장군은 광복군에게도 낙하산 훈련을 시켰다. 또 미군의 정보 기관이던 오에스에스(OSS)의 유격 훈련도 받게 했다. 이것은 일본군이 끝끝내 저항할 때 한반도에도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1945년 8월 8일, 백범은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함께 비행기편으로 서안에 갔다. 이튼날은 오에스에스 훈련을 받는 사람들을 찾아보고 저녁에 그 곳 중국군 사령관 축 장군 만찬회에 참석했다.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에 나와 있을 때였다. 축 장군이 전화를 받고 뛰어들어오며 외쳤다. 일본이 드디어 항복했다 하오! 아! 왜적이 항복! 백범은 말을 잊지 못했다. 얼마나 감격스런 순간이냐! 그러나 백범의 마음은 오히려 씁씁했다. 어째서일까? 그 동안 얼마나 고생하며 광복군을 키우고 참전할 준비를 해 왔던가! 그리고 이제 막 훈련 받은 우리 젊은이들이 국내에 잠입시키려 할 때 왜적이 손이 들다니! 백범은 서안에서 중경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백범은 임정 요원들과 협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 임시 정부는 기미년 3월 1일에 본토인 국내에서 우리의 피를 흘린 결과로 조직된 오직 하나뿐인 그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부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디찬 겨울비였다. 세찬 바람에 마지막까지 달려 있던 나뭇잎이 우수수날렸다. 중경 변두리에 있는 쓸쓸한 공동 묘지였다. 거기에 일흔 살의 백범이 두루마기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비를 흠뻑 맞아 가며 산소의 누런 잔디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산소. 그리고 몇 달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맏아들 인의 무덤……. 백범은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8. 자주 독립
해방이 된 지도 어느 새 두 달이 훨씬 지났다. 그 사이, 백범이 걱정하던 일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었다. 백범은 그 동안 귀국을 서둘렀다. 먼저 중국에 계속남아 중국 정부와 교섭하고 연락할 대표를 결정했다. 또 국내에 가져갈 임시 정부의 문서도 정리했다. 그 가운데는 1919년 이후 국내의 애국자로부터 받은 독립 운동 자금의 금액, 날짜, 보낸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도 있었다. 그런 바쁜 가운데도 미국과 소련 두 나라에 의해 조선이 분할 점령된다는 소식에, 백범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들이 이제 조국에 돌아가고자 함은 조선인의 독립, 조선인의 자유, 또 통일된 조선의 정부수립을 달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임시 정부는 북위 38도선에 의한 조선의 분할 점령에 대해 단연 이를 반대한다. 백범이 더욱 서글펐던 것은, 대한 민국의 유일한 정통적 임시 정부로서 귀국하는 자격이 미군당국에 의해 거부된 사실이었다. 1945년 11월 5일, 마침내 백범 일행은 중국 정부가 마련해 준 비행기를 타고 상해 훙커우 공원에 착륙했다. 거기에는 6천 여 명의 교포가 아침 일찍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 여기는 윤봉길 의사가 왜적에게 폭탄을 던진 곳이 아니냐. 11월 23일, 백범 일행은 마침내 고국을 향해 서해 바다 상공을 날았다. 누군가 창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아, 보인다. 조선 땅이……. 저 멀리 구름 아래, 꿈에도 그리워하던 조국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가시작했는지 애국가의 합창이 터져 나왔다.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울음을 삼키는 것인지, 노래라기보다 차라리 울음이었다. 백범의 안경에 어느덧 뽀얀김이 서렸고, 그것이 그대로 두 줄기의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윽고 비행기는 김포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가! 환영 나온 동포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미군 병사 하나가 대기시켜 놓은 장갑차를 가리키며 어서 타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은 미 군정 당국의, 노혁명가에 대한 너무나도 무례한 대접이었다. 하지만 백범은 별로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남이 시켜 준 해방이고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오히려 앞으로의 독립을 찾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되었다. 오늘 오후 4시, 백범 선생 일행 15명이 귀국했다.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애국자 백범 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오 것이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환성을 올렸다. 백범 선생이 돌아오셨다! 임시 정부가 돌아왔다. 골목 골목마다 거리 거리마다 술렁대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가 왔다! 우리 지도자가 왔다! 감격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국민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은 김구 선생 만세! 를 부르며 숙소로 정해진 서대문의 경교장 으로 달려갔다. 경교장 앞을 메운 사람들 때문에 서대문 일대는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먼저 귀국한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왜적과 싸운 사람들이 경교장에 인사를 하러 왔다. 백범은 고국의 첫밤을 흥분 속에서 새웠으리라. 그러나 나라의 앞날은 더욱더 힘겹고 어둡기만 했다. 갑작스런 해방으로 모든 사람들이 들떠 있었다. 일제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애국자들이 너도 나도 나라를 위해 한 몫을 하겠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이 당시 정당의 수만 205개나 되었으니, 그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내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라 할 것이다. 이런 백범이었던 만큼 정당들의 싸움은 서글픈 일이었다. 정당은 크게 민족 진영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12월 19일, 백범은 임정 환영식 석장에서 힘주어 말했다. 남북 조선의 동포가 단결해야 하고, 좌파, 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남녀 노소가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몸 속에는 단군 할아버지의 성스러운 피가 흐리고 있습니다. 몇몇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빼놓고 우리 동포는 마치 한 사람처럼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이런 단결이 있은 뒤에야 우리는 독립 주권을 이룩할 수 있고, 38선을 없앨 수 있고, 완전 자주 독립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모스크바에서는 우리 나라 운명을 놓고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 장관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12월 24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미, 소 두 나라 군 사령관은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돕는다. 그리고 미,영,중,소 네 나라에 의한 신탁 통치제를 실시함과함께……. 신탁 통치! 임시 정부! 이제 겨우 왜적의 사슬에서 풀려났는데 또 임시 정부라고? 그뿐인가, 신탁 통치, 다시 말해서 미국 등 네 나라가 통치하는 기간을 5년이나 두겠다고 한다. 우리의 주권은, 우리의 독립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처음에 신탁 통치안이 발표되었을 때 민족 진영은 물론이고 공산당도 이를 결사 반대했다. 이리하여 12월 31일, 눈이 하얗게 덮인 서울 운동장에서 영하 20도의 강추위도 무릅쓰고 임시 정부 주최의 산탁 통치 반대 집회가 열렸다. 군정청 내무 부장이던 신익희는 경찰 대표와 함께 백범을 찾아와 공손히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임시 정부 주석이신 백범 선생님 지도아래 치안을 확보할 것이며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겠습니다. 미 군정청은 백범을 괄시했으나, 우리 국민은 진심으로 임시 정부를 따를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당황한 미국 국무 장관 번즈도 성명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탁 통치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 그 때 조금만 더 민족이 단합하고 힘을 모았던들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가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상전의 지시를 받은 공산당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공산당의 배신에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다. 신탁 통치를 받아들이겠다니! 민족 반역이 아닌가! 이 때부터 민족 진영과 공산당은 싸우기 시작했다. 백범은 나라의 앞날이 너무도 서글퍼 암담할 뿐이었다. 장차 이 민족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 때 더욱 놀라운 소식을 들렸다. 1946년 4월 6일, 외신은 이렇게 전했다. 미 점령 당국은 남조선에 한하여 조선 정부 수립에 손을 댔다고 한다. 백범은 이 때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 정부가 아닌 어떠한 형태의 단독 정부라도 반대한다! 공산당과는 도저히 타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남한만의 정부라도 우선 세우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런 제의를 내놓았다.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총선거 실시 및 통일 정부 수립 이후의 미,소 두나라의 군대 철수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자! 이것은 백범이 바라는 일이었다.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미국이 이런 제의를 내놓게 된 이유도 그 동안 우리 민족 진영이 신탁 통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그나마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이 제의는 유엔 총회에서 가결되었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미 공산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고 한반도를 적화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48년 1월 12일부터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 준비가 유엔에 의해 시작 되었다. 백범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철칙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세우려 하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망정 나 한 몸의 구차한 편안함을 위해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않겠다……. 백범은 이렇듯 자신을 위한 어떤 감투나 편안한 여생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완전한 자주 독립, 그것도 통일된 나라의 백성이 되어 눈을 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백범은 공산당도 동포인데 설마한들 민족이 분열되는 단독 정권 수립을 바라지는 않겠지?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38선을 넘어 이북에 가서 공산당과 협상을 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선생님, 가지 마십시오. 가셨다가는 공산당에 속습니다. 하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또 경교장에 몰려와서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백범은 말했다. 여러분의 말처럼 공산당과의 협상이 백 번 해가 있을 뿐 이익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결국 통일 문제는 누구하고 의논하겠소? 여러분들은 우리의 갈라진 땅을 구하고 의논하겠소? 여러분들은 우리의 갈라진 땅을 이대로 놓아 두었다가, 통일은 나중에 동족끼리 피 흘리는 싸움으로 해결하자는 거요? 말해 보시오. 어서 말해 보시오. 여러분들도 통일에 대한 좋은 생각이 있다면, 이 김구가 평양에 가지 않아도 좋은 방안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아무도 백범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백범은 마침내 김규식과 함께 38선에 이르렀다. 신문기자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사진을 찍고 질문했다. 새삼 이제 무슨 말을 하겠소. 우리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밤중이라도 어서 가야 하겠소.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산당과의 협상은 실패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백범과 우사 김규식을 따로따로 떼어 놓은 작전을 썼던 것이다. 우사는 혼자만 평양의 숙소에 안내된 뒤 김두봉과 뚱뚱한 소련 군복의 사나이의 방문을 받았다. 김두봉은 한글 학자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연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백범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우사와 마주 앉자 말했다. 연희 전문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께 배운 김두봉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김두봉은 옆에 앉은 젊은이를 소개했다. 이분이 김일성 장군입니다. 당시 김일성 하면 전설적인 독립군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김일성은 가짜였다. 1910년 또는 1920년대에 독립군으로 활약했던 김일성이라면 적어도 쉰 살 이상은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김일성은 겨우 서른살 안팎이었다. 우사가 말했다. 김 장군, 백범 선생이 이틀 전에 이 곳에 오셨는데 만나 뵈었나요? 아뇨, 아직……. 김일성은 그것을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김 주석을 모셔 오면 어떨까요? 아니 그럴 것 없이 우리가 찾아뵙도록 합시다. 우사는 김일성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일어섰다. 김일성은 엉거주춤 따라왔다. 네 사람이 백범의 숙소로 가자, 김구는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백범 선생님,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아, 김 장군……. 백범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손을 맞잡는 손이 없었다. 어느 새 김일성은 방바닥에 꿇어앉으며 큰 절을 하고 있었다. 이런 김일성이었으나 그 역시 소련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백범은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백범이 돌아온 직후,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마침내 5월 27일 국회가 이루어졌고, 이승만은 제헌국회(헌법을 정하는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뽑혔다. 1949년 6월 26일. 한 육군 소위가 일요일이라 조용한 경교장에 나타났다. 경교장을 지키는 경찰관들은 별 생각없이 그를 들여보냈다. 여느 때도 김구를 따르는 군인들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경교장 아래층 응접실에서는 비서 선우진, 이국태, 이풍식 등이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서실 문 앞에서 육군 소위가 거수 경례를 했다. 포병 사령부 안두희 소위입니다. 주석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백범은 이 때 2층 서재에서 글씨를 쓰고 있었다. 12시 30분, 2층에 안두희가 올라가자 곧이어 총 소리가 들렸다. 탕! 탕! 탕! 이마에 붉은 피를 흘리면서도 백범은 젊은이를 타이르려는 듯 몸을 피하지 않았다. 두 번째 총알은 머리 앞을, 그리고 세 번째 총알은 아랫배에 맞았다. 백범 김구의 암살! 신문사의 호외가 뿌려졌고, 임시 뉴스가 라디오 전파를 탔다. 온 나라 안이 발칼 뒤집혔다.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경교장에 달려온 사람은 심산 김창숙이었다. 창숙은 방바닥을 치며 울부짖었다. 우리 백범을 어떤 놈이 죽였느냐! 어떤 놈이 시켜서 죽였느냐! 백범이 어떤 인물인데……. 백범이 얼마나 큰 인물인데 감히……. 뒤이어 달려온 부통령 이시영도 김구의 싸늘한 몸을 안고 통곡했다. 백범! 백범! 나를 두고 먼저 가다니!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있는가! 총탄에 쓰러진 지 10일 만인 1949년 7월 5일, 일흔 네 살에 세상을 떠난 백범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아침부터 경교장으로 몰려드는 조객들 때문에 서대문 거리가 미어지고 통곡 소리는 인왕산을 흔들었다. 집집마다 조기를 내걸고,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아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가는 마지막 길을 슬퍼했다. 서울 운동장에서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영결식을 가졌다. 이어 장지인 효창 공원에서 하관식이 있었다. . 백 범이 얼마나 큰 인물인데 감히……. 뒤이어 달려온 부통령 이시영도 김구의 싸늘한 몸을 안고 통곡했다. 백범! 백범! 나를 두고 먼저 가다니!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있는가! 총탄에 쓰러진 지 10일 만인 1949년 7월 5일, 일흔 네 살에 세상을 떠난 백범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아침부터 경교장으로 몰려드는 조객들 때문에 서대문 거리가 미어지고 통곡 소리는 인왕산을 흔들었다. 집집마다 조기를 내걸고,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아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가는 마지막 길을 슬퍼했다. 서울 운동장에서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영결식을 가졌다. 이어 장지인 효창 공원에서 하관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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