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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16. 태서(익) 제공) 효종조 고사본말(孝宗朝故事本末) 김자점(金自點)의 옥사
기축년(1649)에 인조가 승하하여, 김자점이 국정을 담당하자 집의 김홍욱(金弘郁)이 맨 먼저 공격하고자 하니, 지평 임중(任重)이 이에 응하여 마침내 함께 김자점이 탐하고 방종하여 나라를 좀먹는 죄를 탄핵하여 아뢰었다. 이때 김익희(金益熙)와 신면(申冕)은 서로 권력을 다투어 공격하였는데, 김익희가 산인(山人)주D-001을 끼고 신면이 자점의 당이란 것을 특히 논하고 아울러 황호(黃?)에까지 말이 미치니, 임중이 싫어하여 따르지 않으므로 임중을 시끄럽게 공격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 《염헌집》임중(任重)은 상원(相元)의 아버지이다.
○ 조정의 신하간에 원당(原黨)과 낙당(洛黨)의 명목이 있었는데, 낙당은 바로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이요, 원당은 바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 원두표이다. 두 사람이 각각 당을 만들어 서로 헐뜯으니, 선비들 중에는 그 당에 물들지 않은 사람도 함께 지목을 받은 이가 있었다. 대사헌 조경이 심대부(沈大孚)ㆍ장응일(張應一) 등과 함께 자기네들과 다른 무리를일망타진하고자 하니, 조복양(趙復陽)이 한 마디 말로 그 마음을 꺾어 그 계책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송곡(趙松谷) 행장〉 ○ 기축년 8월에 양사에서 아뢴 대략에, “김자점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조정을 그릇되게 해서 방금 멀리 귀양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거기에 붙고 조은 무리들도 약간의 징계를 가하여 조정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라 감사 이시만(李時萬), 서산 군수 이이존(李以存), 부제학 신면, 호군 이지항(李之恒)ㆍ이해창(李海昌), 전 집의 엄정구(嚴鼎?), 광주 부윤(廣州府尹) 황호 등은 혹은 아부하여비밀히 결탁하고서 사람들의 갖은 비난을 꺼리지 않으며, 혹은 김자점의 농락을 받아 세력을 조성하니 청의(淸議)에서 버림을 받고, 사대부들에게 욕을 끼쳤으니, 함께 벼슬을 깎아 버리기를 명하옵소서.” 하였다. 《동춘집》 ○ 또 아뢰기를, “사대부는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며 공신 재상과 명성이 높은 무리들은 길이 서로 다른 것인데, 예조 참의 이행진(李行進)과 승지 이시해(李時楷) 등은 원두표의 문하에 출입하며 압객(狎客 서로간에 예의도 차리지 않는 극히 친밀한 손님)이라는 칭호가 있어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모르니, 식자들이 침을 뱉고 더럽게 여기며 청의(淸議)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함께 파직하옵소서.”하였다. 《동춘집》 ○ 이전에 김자점이 궁중과 결탁하여 국권을 농락하고 조정을 어지럽힐 때, 몇몇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가까이 세력을 조성하니, 온 나라에서 분하다 하고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대관들이 바야흐로 자점을 논핵함에 있어 형을 너무 가볍게 논하니, 대사간 김여경(金餘慶), 집의 송준길(宋浚吉), 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이 자점을 멀리 귀양보내고 그 당류 7, 8명은 영영 벼슬에서 삭제할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자점은 선조의 훈구지신이므로 비록 죄가 있어도 귀양보낼 수 없다.”고 비답을 내렸는데, 매우 온당치 않으므로 여러 대관들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간신(諫臣)의 말을 꺾는 것은 나라의 흥망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자점이 이로 인해서 정승에서 파면되니, 그의 무리들이 원망하였다. 이로써 자점이 불측한 음모를 하면서 몰래 청국 사람에게 모함하며 말하기를, “김상헌과 김집(金集)이 청국을 배척하는 괴수이다.”고 하였다. ○ 11월에 신면 등을 멀리 귀양보낼 것을 특명하니, 장령 송시열이 귀양보내는 것은 너무 중하다는 뜻으로써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외인(外人)들이 이것을 과중하다고 불복한다 하니, 더욱 조정의 기강이 퇴폐함을 알겠다. 한심함을 금할 수 없다.” 하였는데, 뒤에 경연에서 말하는 이가 있어 신면에게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하여 정배시켰다. ○ 경인년 2월에 대사헌 이후원, 대사간 조석윤 등이 자점의 죄를 논하니, 임금이 부처(付處)하기를 명하였다. 자세한 것은 위에 나왔다. ○ 이후원이 또 자점에게 죄를 더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자점의 죄는 벌써 꿰미(貫)가 찼는데주D-002 부처에 그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의 전후에 범한 죄를 밝혀서 논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그 뜻(청국에 거슬릴까 두려워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3월에 비로소 광양(光陽)으로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 신묘년 12월에 해원 령(海原令)영(暎), 진사 신호(申壕) 등이 자점의 반역 음모를 고변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와서 친히 국문하니 역적 익((?) 자점의 아들)이 자복하고 바로 공모한 무장(武將)을 끌어대어서 자점과 김익이 죽음을 당하였다. 《조야첨재》 ○ 자점이 처음 귀양갈 때에 그 무리들 스스로가 서로 의구심을 품고 사류들을 제거할 계책으로, 김익이 부제학 신면에게 모의하니, 신면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오직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만약 친밀한 역관으로 하여금 정명수(鄭命壽)에게 통하여 산인(山人)을 제거하면 우리들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익이 그 말을 조아 이형장을 시켜 청국에 참소를 행하여 드디어 청 나라 사신이사문(査問)하게 되었던 것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흉악한 계책이 더욱 낭자하였다. 신면은 매맞아 죽고, 그때에 형장은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만에 이르렀는데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국문하여 자복을 받고 수레에 찢어 죽였다. 《조야첨재》 ○ 이전에, 임금이 자점의 적소(謫所)에 내시를 보내어 그 문서를 수색하여 오니, 조정 신하의 편지와 지방 장수 및 수령들의 편지가 많고, 또 원망하는 말과 흉한 형적이 드러난 것이 있었는데, 모두 안에다 머물러 두고 조정에 내리지 않았다. 뒤에 경연에서 이 말을 하니 임금이 “볼 것이 없어서 이미 불태웠다.”고 답하였는데, 이는 옥사가 너무 커질 것을 두려워함이었다. 대역을 다스린 뒤에는의례 하의(賀儀)가 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으로서 반역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니, 하례할 것이 없다.” 하고, 마침내 하례를 받지 않았다. 《조야첨재》 ○ 그때, 임금이 죄인을 친히 국문하였는데, 낙형(烙刑)을 시행할 자가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낙형은 주(紂)가 만든 혹형이므로 후세의 임금 중 이것을 사람에게 시행한 이가 없었고,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역적을 다스릴 때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임금으로서 친히 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빛이 변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피하였다. 《식암집(息庵集)》 ○ 그때, 죄인을 국문하여 그 당류를 적발시켰는데, 국문을 맡은 한 사람이 문사랑(問事郞)을 시켜 죄수에게 타이르기를, “네가 관련된 자를 말한 것은 무관뿐이니 어찌해서 문신은 고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정태화가 나와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묻는 말은 틀렸소. 문무를 막론하고 같은 당류만을 묻는 것이 옳거늘, 어찌 죄수로 하여금 무관은 두고 문관을 고하라 할 것이오.” 하고, 다시 묻지말기를 명하니, 당인(黨人) 가운데 의구하던 자가 비로소 안심하였었다. 《식암집》국문을 맡은 이는 바로 판의금 원두표였다. ○ 이전에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에 궁중의 사람 중 자점에게 옛날 은혜를 입은 자가 있어, 자점에게 와서 말하기를, “대궐 안의 사람들이 은밀히 말하기를, ‘대감은 신하로서 동궁을 섬길 뜻이 없다.’ 하니, 상공이 이때에 권세를 떠나면 혹시 만에 하나 구제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위태함이 금방 닥쳐올 것이오.” 하니, 자점의 집에서 이 말을 듣고 그 맏아들 김연(金鍊) 이외에는 놀라고두려워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신묘년 옥사에 이르러 임금이 전교를 내리기를, “자점이 신하로서 나를 섬기지 아니하고자 한 것은 내가 알고 있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비로소 궁중 사람의 소문이 헛말이 아닌 것을 알았다. 《공사견문》 ○ 자점이 부귀가 융성하여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서 시골 선비로서 글 잘하는 사람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그 아들 김익의 글을 대신 짓게 하여 과거에 뽑히게 하고, 또 그 손자 세룡(世龍)을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이기를 도모하여 점쟁이를 유인하고 협박하여 거짓으로 그의 사주가 좋다고 칭찬하도록 하여 임금을 속여 왕가와 혼인을 맺으니, 그 기세 앞에는 억누르면 꺾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동궁에 있을 때에도 그에게 거슬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였으나, 자점은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몸은 죽음을 당하고 집안에 종족이 남지 않게 되었다. 《공사견문》 ○ 당초에 자점의 손자 세룡이 인조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옹주는 후궁 조씨(趙氏) 소생이다. 안팎으로 결탁하여 흉한 음모가 무성하여 저주하는 일이 궁중에서 일어나고 역모가 밖에서 싹텄으니, 임금은 일이 자의대비(慈懿大妃)에게 관계되므로 옹주의 어미 조씨만 죽였다. 삼사와 백관들이 세룡의 아내와 그의 동복(同腹)인 왕자 징(徵) 숭선군(崇善君) 과 숙(潚)낙선군(樂善君)을 함께 처단할 것을 청하니, 진선(進善) 송시열이 아뢰기를, “조(趙)가 이미 죄를 받았고 그 아들은 그 흉모를 꼭 미리 알았는지도 모르는데, 선왕의 혈육을 죽게 함은 불가하다.” 하고, 한 문제(漢文帝)와 회남왕(准南王)의 일을 인용하며, 두 왕자를 보전하여 임금에게 형제를 죽였다고 비난하는 논의가 없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도 차마 벌을 시행하지 못하고 외딴섬에 안치시켰다. 《조야첨재》 ○ 왕자 징의 어미 조씨가 김자점과 안팎이 되어 불측한 음모를 하였는데, 자점의 손부(孫婦)는 또 조씨가 낳았다. 낙성위(洛城尉) 세룡(世龍) 흉악한 음모가 더욱 드러났으나 임금의 지친(至親)인 까닭으로써 차마 한결같이 법대로 처단하지 못하였다. 이후원(李厚源)이 비록 옥사의 체모를 들고 굽히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의 전교가 간절함에 이르니, 이후원도 이에 순응하였다. 성왕(聖王)이 법을 굽히고은혜를 펴는 아름다운 뜻을 이룬 까닭에 조씨의 자녀는 지금까지 안전하다. 〈이완남(李完南) 시장〉 낙성위(洛城尉)옹주(翁主)를 처음에는 효명옹주(孝明翁主)로 봉하였다. ○ 송시열이 이후원에게 준 편지에, “세룡의 아내가 흉한 일을 행한 것이 회남(淮南)의 모반한 것과 같으며, 이선(二善) 숭선(崇善)ㆍ낙선(樂善) 과 흉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봉(鳳)과 계(桂)주D-003의 무고함과 다름이 없는데, 주자(朱子)가 회남왕(淮南王)에 대하여서도 오히려 한 문제(漢文帝)가 그를 촉(蜀)으로 귀양보내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비난하였으니, 통진(通津)과 촉이 비록 멀고 가까운차이는 있으나 귀양가서 나쁜 풍토에 고생되기는 일반이니, 주자의 이론으로써 생각해 보면 세룡의 처도 오히려 귀양보낼 수 없는데, 하물며 이선(二善)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우암집》 ○ 신묘년에 조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 의 옥사가 있었는데, 그때 귀인의 어미가 이미 죽었으나 추형(追刑)할 논의가 있으므로, 정태화가 당시 인조의 전교 인조 주륙흉당(誅戮凶黨)조에 기록되었다. 를 임금에게 아뢰어 일이 정지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대신(臺臣)오정위(吳挺緯)의 아룀으로 인하여 드디어 육시하였다. 《공사견문》 ○ 부원수 유비(柳斐)의 서녀가 김자점의 첩이 되었는데, 자점이 패한 뒤에 항상 말하기를, “자점의 며느리, 손부(孫婦), 딸들이 의복과 거처를 반드시 효명옹주를 본받았다.” 하였다. 신하의 딸로서 왕녀를 본받고자 하였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공사견문》 ○ 대사헌 ?가 아뢰기를,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의 서매(庶妹)가 자점의 첩이 되어 자점과 가장 친밀하였으니, 통제사의 중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익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오지 않았는데, 만약 의심스럽다 하여 정익을 체직하면 장차 사람마다 스스로 의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옛사람이 ‘나의 진심을남의 뱃속에 넣어 주라.’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자점이 오랫동안 정승의 직에 있었으니 한때 문무관 중에 누가 그 집에 출입하지 아니하였으리까. 만약 평소에 서로 잘 아는 것으로써 모두 억지로 죄를 씌우면 아마 조정에 한 사람도 완전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심을 진정시키는 계책은 전부 대신에게 있으며 나와 경이 벌써 굳게 정한 바가 있으니, 비록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감히 제 뜻대로 할 수 있으리오.” 하였다. 《식암집》 ○ 이형장이 정명수를 빙자하여 그와 안팎이 되어 세력을 심히 펼쳤는데, 자점을 처형하면서 형장을 연루자로 처형시켰으니, 마땅히 청국에 알려야 할 것이므로 사신갈 사람을 택하였다. 수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조동립(趙東立)이 아니면 갈 사람이 없습니다.” 하여, 조동립을 보냈는데 연경에 이르자, 명수가 말하기를, “형장의 죽음은 반드시 나 때문일 것이다.” 하니, 동립이 말하기를, “형장의다른 죄는 고사하고, 그대가 우리 나라에 올 때에 조정에서 은화를 형장에게 주어서 그대에게 전하게 한 것이 다 밝은 표시가 있는데, 이번에 처형되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보니 그 은화가 많이 있었다. 그가 그대를 저버림이 이와 같았는데 다른 것이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니, 명수가 잠자코 다시 해독을 부리지 못하였다. 《통문관지》 ○ 변사기(邊士紀)가 김자점의 심복으로서 수원 부사가 되자,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예전에 송 나라 적청(狄靑)이 추밀사로 조정에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일컫는데, 구양수(歐陽脩)가 파면시키기를 청하기를, ‘당 나라 주자(朱?)는 본래 반역할 뜻이 없었으나 부하의 협박에 의하여 한 것이니, 예로부터 반란하는 자가 반드시 그 본심으로 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신이 몸이 늙어 의혹이 심하여 지나친 염려가 없지 않아서, 아직 드러난 증거가 없는 일로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뢰어 위로 전하의 총명을 모독하고 아래로 대신의 노여움을 촉발하게 되었으나, 어찌 반드시 지나친 염려는 깊은 계책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후일에 불행히 만일의 일이 있을 때에는 노신을 말하지 않았다고 이르지 마옵소서.” 하더니, 이때에 와서 자점의 역모한 일이 발각되자 변사기가 과연 역모에 참여한 것이 드러나니, 사람들이 비로소 홍무적의 선견지명을 탄복하였다. 〈홍무적의 비〉 ○ 경기 감사 김광욱(金光煜)이 수원 부사 변사기를 파출시키자, 영의정 이경여가 변사기를 유임시키기를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감사에게 추고하기를 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또 감사가 변사기를 하고(下考)에 두었는데, 그때 자점이 사기와 연락하여 역모를 한다고 바깥 소문이 떠들썩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수원은 실로 서울 부근의 중요한 번진인데 감사가 변사기를 죄로 파출시킨 것은 그 뜻이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신이 유임시키기를 아뢰어 청하였고, 전하께서 또 추고하기를 명하셨는데, 얼마 안 되어 또 하고에 두어 마치 감사가 임금과 대신에게 서로 겨루듯이 하니, 감사의 사체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따라서 김광욱이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경멸하는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경기 감사 김광욱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뢴 내용을 보니 늠연(凜然)하여 옛 대신의 풍도가 있으니, 김광욱은 파직시키고 변사기는 유임시켜서 국사에 마음을 다하게 하라.” 하였는데, 자점의 옥사가 일어나자 사기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맨 먼저 나왔었다. 자점의 아들 김연은 바로 시백의 사위로, 김연과 그 아들 세창(世昌)이 모두 바야흐로 국문을 받는데, 시백은 정승의 지위에 앉아서 대의로 사피하지 못하였더니, 판의금 원두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역적을 옹호하는 대신이 어찌 감히 국문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내가 여기 있는데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하는고. 판의금은 속히 나가라.” 하였다. 경여와 시백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일어나 나가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벌써 생각하였으니 경들은 나가지 말라.” 하였다. 세창은 처형하였고, 김연도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시백이 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의 사관을 보내서 효유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연양(延陽)의 시장〉 ○ 장령 이형(李逈)이 아뢰기를, “시백의 아들 이한(李?)은 역적과 친하니, 청컨대 중도부처하옵소서.” 하고, 대사간 이시해(李時楷)는 “시백의 동생 시방(時昉)이 역적에게 아부하였으니 청컨대 귀양보내옵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윤허하지 아니하고, 좌의정 김육에게 묻기를, “내가 우의정(이시백)에게 간절히 효유하였으나 아직 조정에 나오지 않으니, 진실로 염려스럽도다.” 하니,좌의정이 대답하기를, “대관이 지금 그 동생과 아들을 논하고 있는데, 우의정이 무슨 마음으로 나와 일을 볼 수 있겠습니까. 시해는 원두표의 지시를 받은 자이니 귀양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개성 유수의 자리가 지금 비어 있으니 원두표를 그 자리에 내어보내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참으로 대신다운 말이로다.” 하고, 명하여 이시해는 중도부처시키고 원두표는 개성 유수로 내보냈더니, 시백은 감히 스스로 편하게 여기지 못하고 휴가를 내었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역적이 가까운 친족 중에서 난 불행한 일은 액운에 부칠 일이지 경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하물며, 경은 선조(先朝)의 구훈(舊勳)이며, 나라의 기둥이니, 청백한 그 지조와 충성된 그 마음은 어찌 나라 사람들만이 알겠는가. 실로 천지신명이 증명할 것이다.” 하니, 시백이 마침내 부르는 명에 조아서 나와 일을 보았다. 〈연양의 시장〉 ○ 이시해가 이시방에게 품은 감정을 풀려고 시방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니, 김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시해는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이니, 내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김육의 묘지〉 ○ 갑오년(1654) 6월에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임금이 전교를 내려 의견을 구하니, 부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올린 소의 대략에, “어느 시대에 역란의 변고가 없었으리오마는 역적 조가(조귀인(趙 貴人))와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능토(陵土)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선왕이 총애하는 여자를 죽이고 사랑하는 아들을 귀양보냈으니, 이 어찌 전하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역적 조가의죄가 하늘에 통하였으니, 징(?) ㆍ 숙(潚)을 연좌하는 것은 마땅하나, 어린아이로 힘줄과 뼈가 굳지 못하고 혈기가 충실하지 못한데, 하루아침에 외딴섬에 위리안치되었으니 위태로운 약한 목숨이 어찌 죽음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비록 슬퍼하며 후회하고 한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한 문제가 회남왕이 죽은 뒤에 밥을 먹지 않고 슬피 울었을 뿐더러, 민간에서 풍자한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노래에 문제가 종신토록 불쾌하였던 까닭입니다. 회남이 몸소 반역을 하였는데도 오히려 문제가 그 죽음을 애통해하였거늘, 하물며 지금 징과 숙은 그 어미의 죄로 연좌된 것이고, 당초에 흉모에 참여하지 않은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선왕께서 징과 숙을 염려한 것이 역시 지극하였으니, 궁실을 만들고 전토와 노비를 주었음은 어찌 길이 그 부귀를 누리어 명대로 한평생을 잘 살기를 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구속되고 갇혀서 고생되고 슬퍼하고 근심하며 두려워하여 죽을 날이 멀지 않으니,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영혼이 어찌 애통해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선왕의 영혼이 상제의 좌우에 있어 하늘과 일체이니, 지금 상서롭지 못한 재변이 내린 것도 반드시 이 까닭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불행히도 두 아이가 혹시 병에 걸려서 마침내 죽게 되면, 후세에 전하께서 끝내 동생을 죽였다는 허물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돌아가신 부모 섬기기를 산 부모와 같이 하는 효도로써 태묘에 들어가서 선왕께 제사를 드릴 때에 어찌 부끄러운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 소현(昭顯)의 세 아들 가운데 두 아들은 벌써 죽었고, 그 하나가 남아 있는데 역시 외딴섬에 구금되어 있으니, 만약 다시 요절한다면 소현의 후사가 끊어질 것입니다. 가령 소현이 당초에 아들이 없었더라도 전하께서 그 뒤를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해 주어야 마땅할 것인데, 어찌 차마 그 있는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무심히 보고 그 살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전하께서 용서할 뜻이 있었는데 대신들이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아아, 전하의 이 마음은 참으로 천지의 호생하는 덕주D-004이며, 성인의 측은한 어진 마음입니다. 대신된 자가 이미 그 아름다운 뜻을 순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막아서 방해하니, 그들은 어질지 못하고 또 충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선왕의 뜻을 계승하시어 은혜로운 명을 내리셔서 두 동생과 한 조카를 급히 소환하여, 그 속적주D-005을 돌려주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남이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진실로 가상하다.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노라.” 하니, 안팎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행진(李行進)이 소를 올려 헐뜯기를, “우원은 다만 역적 조가를 번안하기 위하여 선왕을 훼손하고 임금을 속여서 스스로 곧은 이름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또 어전에서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원을 사랑하여도그 악한 것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행진이 임금이 본래 우원을 어질게 여김을 알고 이때를 틈타서 중상하려는 것이었다.
이어서 대사헌 이시해가 일어나서 우원을 탄핵하여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고, 간원에서도 찬동하는 이가 있어서 삼사의 논의가 같지 않았는데, 공의(公議)를 잡고 이론(異論)을 세운 이(홍우원 옹호파)로서, 이상진(李尙眞) ㆍ 이정영(李正英) ㆍ 남중회(南重晦) ㆍ 이만영(李晩榮) ㆍ 정석(鄭晳) 등의 일곱 사람은, 외직으로 나가기도 하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임금이 경연에서 여러 번 불쾌한 전교를내리니 사람들이 모두 우원을 위태롭게 여기고, 우원은 문 밖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가을이 되자 대신 이시백이 아뢰어서 임금이 다만 우원의 체직을 명하였더니, 겨울에 이르러 사헌부의 탄핵이 비로소 그쳤고, 얼마 있지 않아서 두 왕자와 소현(昭顯)의 아들을 석방하기를 명하고 다 그 관작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우원의 말을 쓴 것이다.
○ 숙종 을묘년에 신면의 아들 종화(宗華)가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소를 올려 자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니, 임금이 소를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윤5월에 한재로 인하여 죄인들 중 억울함이 있는가를 살펴서 처리할 때 종화가 또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의 아비 면(冕)은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와 이성 삼종(異姓三從)의 친척으로서 나이가 서로 같고 교분도 두터웠었는데, 불행히 을유년사이에 익희가 친구를 고자질하여 아뢰어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험함을 보고 면대해서 말하고 편지로 책망하였더니, 그는 친구간에 한때 책선주D-006하는 말을 가지고 드디어 종신토록 한을 품었습니다. 그때 재상들도 모두 익희의 그름을 배척하여, 익희가 외직으로 돌아다니게 되니 부끄럼과 분함이 더욱 쌓여서 기회를 타서 참소를 꾸며, 끝내는 산인(山人)을 협박하고 유인하여 공격하는 바탕을 삼았으니, 이것이 실로 기축년에 사헌부의 탄핵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신의 아비가 죄를 입었다가 곧 풀렸고, 신묘년 겨울에 마침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고 상신(相臣) 원두표가 새로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자 신의 아비가 말하기를, ‘두표는 일찍이 병자년 남한산성이 포위당하였던 날에, 군사들을 시켜 소란을 일으켜서 협박한 죄가 있고, 또 갑신년 역적을 다스린 뒤에 거짓 전령을 만들어서 연성군(延城君) 이시방의 형제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비록 재능과 지력이 일세를제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점잖게 일하는 데는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아뢰어 체직하기를 청하였더니, 한 달이 못 되어 역옥(逆獄)이 갑자기 일어났는데, 두표가 판의금이 되어 중상하고 협박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세룡이 신의 아비를 연루로 끌어들일 때의 입증은 곧 안철(安澈)이었는데, 그때에 금부에서 수색한 정안(政案)과 조보(朝報)를 얻어 보고 세룡의 말한 바를 상고하니, 신의 아비와 안철이 서로 만났다는 때가 바로 안철이 병사(兵使)에서 갈리지 아니하고 아직 안주(安州)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말이 헛되므로 상신(相臣) 이경여ㆍ정태화ㆍ김육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억울하다고 주장하여 전하께 면대를 청하기까지 하여, 처음에는 정형(停刑)을 허락했었는데, 역적 익(?)이 자복한 뒤에 이르러 두표가 말하기를, ‘네가 지금 끌어댄 것이 모두 무사(武士)이니, 이 밖에 어찌 문관 명사(文官名士)를 끌어댈 이가 없겠느냐?’ 하니, 익이 바로 신의 아비를 끌어서 대답하였으며 그 인증은 전부 역적 형장(馨長)에게로 돌렸었는데, 이듬해 봄에 형장이 환국하여 엄하게 국문하던 날, 효종께서 특별히 명하여 신의 아비가 그 일에 참여하여 아는가를 캐어물으니 형장이 두세 번 부르짖으며 ‘내 이미 역모를 한 것으로 형을 당할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것이 있으리오마는, 신면에 대해서는 심히 억울하고 억울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원두표의 아들 만춘(萬春)이 그때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 절절(節節)이 신변(伸卞)하였다. 〈술이〉 ○ 판의금 민희(閔熙)가 임금의 물음에 답하여 아뢰기를, “추안에 기재된 바를 취하여 상고하니, 세룡의 공초에 말하기를, ‘신면이 변사기 ㆍ 안철과 함께 한때에 그 아비(자점)의 집에 이르니, 그 아비가 나라를 원망하며 역모할 뜻을 세 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고, 익의 공초에는, ‘역모할 일은 상의하지 않았고 신면이 나에게 권하여 이형장으로 하여금 청국과 통하여 군사를 청하였다가 의주(義州)에머물게 하고 산인(山人)을 잡아가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했습니다. 신면의 죽음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그 뒤에 형장이 청국으로부터 돌아오니 중도에서 잡아다가 문목(問目) 외에 별도로 비밀히 묻기를, ‘기축년 청국 칙사가 올 때에 네가 서도(西道)에 있었는데 그때 김익과 신면이 너에게 통지한 일이 없었느냐.’ 하자, 형장의 대답이, ‘신면은 본래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데 무슨 통지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신면은 죄를 범한 일이 없으나, 오직 자점의 집에서 수색해 온 문서 가운데, ‘신면이 대사간이 되니 마땅히 나를 탄핵하는 의논을 정지시키겠지.’ 하는 말이 있어, 마침 송준길(宋浚吉)이 신면을 낙당(洛黨)이라고 공격하는 말과 부합되었으며, 또 신면의 위인이 기세를 부리고 권세를 좋아해서 동류에게 미움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그 아들(종회)이 아비를 위해서 호소하는 것을 인정의 도리로 막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술이〉 ○ 을묘년 7월에 큰 한재(旱災)로 인하여 억울한 죄인들을 살펴서 풀어준 때에 우의정 허목(許穆)의 아룀에 전교하기를, “이 한재를 걱정하여 죄수를 살펴서 풀어주는 날을 당하여 보통 죄인은 모두 은혜로운 사면을 받았는데 세룡(世龍)의 처만은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으니, 제가 비록 반역을 범하였으나 효종께서 처음에 이미 죽이지 않기로 하였고, 선왕(현종)께서도 석방시키고자 하였으나 단행하지못하였었는데, 지금은 또 병들어 망가진 사람이 되었으니 특별히 석방시키라.” 하였다. 〈술이〉 ○ 이해 10월에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신묘년의 역옥을 다스릴 때에 판의금으로 있었으므로 당시 옥사의 정상을 잘 압니다. 신면과 안철이 공모하였다는 말은 처음에 세룡의 초사에서 나왔는데 초사 중의 날짜와 서로 어긋나므로 대신이 아뢰어 다시 익에게 물으니, 익의 초사 가운데, ‘신면과 같이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가 역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뒤에형장의 초사에 신면의 죄없는 실상을 간곡히 말하여 효종께서도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어찌 선조(先朝)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여 억울함을 씻어 주지 않을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역모를 범하지 않았으면 그 관작을 회복시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술이〉
[주 D-001] 산인(山人) : 김집(金集)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등 연산(連山)과 회덕(懷德)의 산림학자(山林學者)들을 말한다. [주 D-002] 죄는 벌써 꿰미(貫)가 찼는데 : 옛말에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악이 찰 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주 D-003] 봉(鳳)과 계(桂) : 명종(明宗) 때에 무고한데 원통히 죽은 왕자 봉성군(鳳城君)과 계림군(桂林君)을 말한 것이다. [주 D-004] 호생하는 덕 : 경전(經傳)에 “천지의 덕은 만물을 낳고 기르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주 D-005] 속적 : 속적(屬籍)은 왕실의 족보(族譜)에 든다는 말인데, 죄가 있으면 속적에서 삭제한다. [주 D-006] 책선 : 친구간에 서로 선(善)하기를 충고하고 책망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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