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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大東奇聞(대동기문)] 내의 선조님 金自點(김자점) (2003. 12. 26. 윤만(문) 제공) - 김자점이 선왕의 유언을 보고도 혼자만 슬퍼하지 않다 -
김자점은 안동김씨로 자는 성지, 호는 낙서이다. 좌의정을 지낸 김질의 오대손이며 역시 좌의정을 지낸 유홍의 외손으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계해년에 이귀·김류와 함께 반정을 일으킨 후 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인조를 왕위에 올렸으니, 이는 모두 자점의 계책이었다.<소대기년>
동평위 정재륜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날 의정부 녹사로 자점 집에 출입했던 사람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효종께서 왕세자이실 적에 모셨던 궁인으로 자점 집안의 은혜를 입었던 이가 자점에게 일러 주었지요. ‘대궐 사람들이 몰래 말하기를, 상공께서 내심 세자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고들 합니다. 상공께서 지금 권세를 다 던지시면 만에 하나라도 목숨을 건지실지 모르거니와 권세를 계속 누르시려 한다면 위험을 선 채로 기다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자점 집안에서 이 말을 듣고도 큰 아들 련 외에는 누구하나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신묘년 반역 옥사를 국문할 때 효종께서, ‘자점이 신하로서 나를 섬기지 않으려는 것을 내 안지 이미 오래되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제서야 그 궁녀가 들었다던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요.”』
『신묘년 김자점 반역 옥사를 국문하면서 효종은 이렇게 하교했다. “선왕께서 나를 세자로 정하신 뒤, 후원 어수당에 납시고는 나더러 곁에서 모시라 한 후 반정에 참여했던 훈구 대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보시고는, ‘내 몸에 중한 병이 들었으니 필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소. 경들은 앞으로 세자를 잘 살펴 주오.’라고 부탁하셨다.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들었으나 자점만은 슬픈 마음이 전혀 없이 불쾌한 기색만을 크게 드러내었으니 그 마음이 어떠한지를 내가 진작 알았었다. 또 선왕께서 사소한 병환으로 편찮으실 적에 나더러 서연을 계속하라 명하시기에 감히 그 시간을 어기지 못했다. 당시 자점은 영의정으로 세자의 스승을 겸했는데, 세자 시강원의 아전을 불러서는 임금의 병환 중에 서연을 열었다 하여 나 몰래 그 아전을 옥에 가두었다. 내가 그 일을 보고 자점이 오래 전부터 나를 섬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동평견문록>
자점의 손자 세룡이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옹주는 조귀인의 소생이었다. 신묘년에 세룡이 대권 안팎의 사람들과 모의하여 대궐에 저주를 퍼뜨리는 변을 일으켰으나 효종은 그 일이 자의대비와 관련된 관계로 세룡의 어미에게만 사역을 내렸다. 이어 자점이 수원부사 변사기와 역모를 꾸며 숭선군 징이나 낙선군 숙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고변이 임금에게 올라오자, 임금이 친히 국문하여 자백을 받아내었다. 결국 자점의 아들과 세룡이 같이 처형되었고 세룡의 처와 징과 숙도 법에 따라 처벌 받았다.<송자대전 수차> 《출전 : (국역)쉽게 풀어쓴 대동기문(하) pp164~167/국학자료원/2001》
- 이귀(李貴)를 소마(疏魔)라고 지목하다 -
이귀(李貴)는 연안(延安) 사람이니 자는 옥여(玉汝)요 호는 묵재(黙齋)이다. 선조(宣祖) 무오(戊午)에 생원이 되고 율곡(栗谷)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변무(卞誣)의 소(疏)를 짓는 데는 세상에 그 짝이 없었다. 계묘(癸卯)에 문과에 급제하고 계해(癸亥)에 김류(金瑬) 등과 거의(擧義)하여 정사공(靖社公) 1등에 기록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찬성(贊成)이 이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인조(仁祖)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과 동시에 책훈(策勳)되었다.
귀(貴)의 딸이 김자점(金自點)의 아우 자겸(自兼)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寡婦)가 되어 참찬(參贊) 오겸(吳謙)의 아들 언관(彦寬)과 함께 도망해서 거창(居昌)의 석굴(石窟)로 들어갔다가 일이 발각되자 언관(彦寬)은 매맞아 죽었고, 이씨(李氏)는 중이 되어 자수궁(慈壽宮)에 있으면서 김상궁(金尙宮)과 사귀어 모녀(母女)가 되기를 약속하고 일찍이 말하기를, “아버지와 남편의 형 자점(自點)이 대북(大北)에게 미움을 받는다.”하여 날마다 원통함을 하소연했다.
계축(癸丑) 정월에 한유익(韓惟翊)이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의 일을 계청(啓請)하여 화가 장차 멀지 않다고 하자 귀(貴)가 두 아들을 데리고 명령을 기다리면서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기를, “이천(伊川)이 음식을 준 것과 곡산(谷山)이 술을 준 것과 장성(長城)이 포목을 상으로 준 것과 숙천(肅川)이 명주를 준 것에 있어서 신(臣)을 낳은 것은 아비요, 신(臣)을 살린 것은 성명(聖明)이니, 이제 악명(惡名)을 입었으니 가마솥의 형벌을 받기를 원합니다.”했다. 이에 김상궁(金尙宮)이 광해(光海)에게 고하기를, 이평산(李平山:貴)은 온 세상이 버린 사람이요 김서방(金書房:自點)은 가련한 인생이온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능히 이상한 계획을 하겠습니까?“하자 광해는 머리를 끄덕였다.
자점(自點)은 외숙 유대건(兪大建)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힘을 써서 드디어 정계(停啓)하니 광해가 비답을 내리기를, “서서히 결정지으려 한다.”하니 이에 제공(諸公)들이 마음놓고 일을 했다. 공은 젊어서부터 강개(慷慨)하여 자주 글을 올려 일을 말하니 사람들이 그를 소마(疏魔)라고 지목했다.<일월록(日月錄)>
《출전 : 신완역 대동기문/명문당/2000/(중)pp266~268》 - 심기원이 무신들 탓에 화를 입다 -
심기원은 청송심씨로 자는 수지이며 석주 권필 문하에서 공부했다. 계해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에 녹훈되었고 임오년에 의정에 올라 좌의정까지 지냈다. 갑신년에 남한산성 수어사가 되었다가 광주부윤 권억과 함께 모반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로 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 하루 전날, 같은 무리인 황헌과 이원로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를 통해 임금에게 밀고하여 기원은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소대기년> 동평위 정재륜은 이렇게 썼다. 『--(중 략)--』
『또 내가 젊었을 적에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김자점의 옛 종을 만나게 되어 그 집안이 화를 입고 패망한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이렇게 말해 주었다. “우리 주인이 자기 아들만을 끔찍이 사랑하다보니 그거 하나 귀하게 만들려고 못하는 일이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이름난 사대부를 가까이 하여 파당을 만들어 싸우게 하고는 자기는 그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파당 우두머리 된 자치고 목숨을 보전한 자가 있나요? 우리 쥔이 패망한 것은 이름난 사람을 가까이 하고 권세를 좋아한 까닭이겠지요.”』<동평견문록>
자점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까지 오른 훈구 대신으로 영의정까지 올라 부귀가 융성했다. 그러나 오히려 만족하지 못하고서 아들 식을 장원급제시키려고 글 잘 짓는 시골 선비를 많은 돈으로 매수하여 대신 글을 지어 급제하게 만들었다. 아들은 홍문관에 들어갔고 이어 이조정랑까지 되니 그 집 문전은 사람들로 이전보다 배나 들끓게 되었다. 자점은 또 손자 세룡을 옹주에게 장가들이려고 점쟁이를 꾀고 을러 거짓으로 그 운명을 좋게 말하게 한 후 왕명을 속여 왕가와 사돈을 맺었다. 그 기세에 눌려 아무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심지어 효종조차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역시 자점에게 밉보일까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점은 까마득히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다가 끝내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되었고 그 집안은 깡그리 멸족을 당하고 말았다. 그 재앙의 근원을 캐어보면 모두가 자식을 위해 영예를 구한 때문이며 손자를 위해 왕실과 혼인하려 한 때문이었다. 강빈의 옥사 때 소현세자의 집안과 강빈의 친정이 김자점 때문에 모두 멸족되어 버렸으니 이 무슨 마음에서 그리했던가? 위와 같은 문헌 《출전 : (국역)쉽게 풀어쓴 대동기문(하) pp161~164/국학자료원/2001》
- 김원량(金元亮)이 옷을 찢어 소(疏)를 쓰다 -
김원량(金元亮)은 경주(慶州) 사람이니 자는 명숙(明叔)이요 호는 미촌(麋村)이다.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대의(大義)를 찬성하자 우재(迂齋) 이후원(李厚源)이 말하기를, “유생(儒生)이 이 일에 어떠할까?”하니 원량(元亮)이 말하기를, “조여우(趙汝愚)와 태후(太后)의 명령으로 영종(寧宗)을 옹립(擁立)할 때 주자(朱子)가 그와 함께 일을 했다.”했다. 우재(迂齋)가 또 말하기를, “책을 실어 뜰에 가로 놓고 소반을 받들어 피를 마신 것이 옛 날에도 또한 이러한 유생(儒生)이 있었는가.”하니 원량이 말하기를, “이것은 면할 수 있다.”했다.
계해(癸亥) 반정(反正)하던 날에 함께 위교(渭橋)에서 맞지 않고 논공행상(論功行賞)하던 날에 이르러 몹시 힘껏 사양하여 삼등정사훈(三等靖社勳)에 책록되고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갑자(甲子)에 정찬(鄭燦)이 이괄(李适)의 반(反)하는 것을 고하자, 원량(元亮)이 본래 괄(适)과 더불어 깊이 믿는 터라, 많은 말로 청하여 보존하였다. 이윽고 괄(适)이 반(反)하자 자점(自點)이 아뢰어서 그를 가두니, 원량(元亮)이 옷을 찢고 피를 찍어 소(疏)를 썼으나 올려지지 못했다.
임금이 장차 남쪽으로 거동할 때 김류(金瑬)에게 묻기를, “원량(元亮)을 어떻게 처리할까?”하니 유(瑬)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자점(自點)이 말하기를, “머물러 두어 적에게 이용당하게 할 수 없습니다.”하고 드디어 사람을 보내어 베었더니 현종(顯宗) 2년에 훈작(勳爵)을 회복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월성군(月城君)을 증직했다.<인물고(人物考)>
김류(金瑬)가 기자헌(奇自獻)··김원량(金元亮) 등 49인을 베기를 청하자 이귀(李貴)가 힘껏 반대하기를, “이들은 지위가 높은 재신(宰臣)들이니 반드시 괄(适)과 같이 반(叛)했을 리가 없다.”했다. 이 때 권첩(權帖)이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승평(昇平)은 반드시 무후할 것이요 연평(延平)은 뒤에 반드시 창성하리라.”하더니 뒤에 그 말이 과연 맞았다.<일월록(日月錄)> 《출전 : 신완역 대동기문/명문당/2000/(중)pp304~305》
- 신흠(申欽)은 면(冕)이 마땅히 죽을 것을 알았다 -
신흠(申欽)은 평산(平山) 사람이니 자는 경숙(敬叔)이요 호는 상촌(象村) 또는 현옹(玄翁)이다. 선조(宣祖) 을유(乙酉)에 진사하고 병술(丙戌)에 문과에 급제했다. 광해가 정치를 어지럽히자 문을 닫고 물러가서 춘천(春川)의 소양강(昭陽江) 위에 있더니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불러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했다. 완남(完南) 이후원(李厚源)에 젊었을 때 와서 선공(先公)의 비명(碑銘)을 공에게 청하자 공은 처음 보고 맞아서 상좌(上座)에 앉히고 기꺼이 대하기를, “내일 모레 오시면 마땅히 명(銘)을 지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했다. 완남(完南)은 그가 관대(款待)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괴상히 여기고 약속한 날에 가보니 공은 과연 명(銘)을 지어 놓았다가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다음 날에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요. 나에게 손자 면(冕)이 있는데 그 죽고 사는 것이 반드시 그대의 손에 달렸으니 감히 그대에게 부탁하노라.”했다.
그 후 24년에 자점(自點)이 역모(逆謀)로 인해서 베임을 당하는데 면(冕)이 연좌되어 죽게 되자 완남(完南)이 그 옥사를 다스리다가 공이 면(冕)을 부탁하던 말을 임금에게 아뢰고 용서해 주자고 청하였다. 임금은 상촌(象村)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탄식하기를 마지않고 그 죽음을 면해 주려 했으나 홍기천(洪沂川)이 면(冕)의 누이의 사위로서 굳이 반대하여 마침내 죽었다.<송자대전 수차(宋子大全隨箚)>
공은 문형(文衡)을 맡고 벼슬은 영상(領相)에 이르렀으며, 인조(仁祖)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출전 : 신완역 대동기문/명문당/2000/(중)pp339~340》
- 임경업(林慶業)의 말도 역시 길게 울고 죽다 - - (전 략)
병술(丙戌) 3월에 정사(正使) 이경석(李景奭), 김육(金堉)을 보내어 연경(燕京)에 들어가 경업을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청하자 섭정왕(攝政王) 다이곤(多爾袞)이 경업을 잡아 보내는데 옷은 비록 호복(胡服)을 입었지만 머리털은 깎지 않았다. 임오(壬午)로부터 5년 동안 망명(亡命)하여 여러번 서경(西京:平壤)을 지나니 서경(西京)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 김자점(金自點)이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는데 비밀히 다른 뜻을 가지고 충의(忠義)의 사람을 베어 없애고 있었다. 그는 본래 경업과 숙감(宿憾)이 있는 터라, 갑신(甲申)에 심기원(沈器遠)이 없는 죄를 있다고 거짓말한 일로 해서 매를 때리면서 엄하게 심문(審問)하자 경업은 큰 소리로 호통치기를, “나라 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경솔히 나를 죽이느냐?”하고 마침내 옥(獄)에서 죽으니 이 날 초목(草木)들이 마치 장마비에 젖은 것과 같았다.
이보다 먼저 장군이 타던 말은 하루에 반천 리를 달리고 두어 길되는 구덩이를 뛰어 넘었는데, 장군이 도망해 나올 때 굴레를 벗겨 버리면서 말하기를, “슬프다. 이 어리석은 말아, 어찌해서 몸을 오그리고 눈물을 흘리느냐?”했다. 그 뒤에 이 말은 사복시(司僕寺)에 들어가 내구마(內구馬)가 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마부(馬夫)가 앞에 와서 말하기를, “너의 옛 주인이 죽었다.”고 하자 말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세 번 울고 죽었다. 경업은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처음에 장군은 기생첩을 얻었는데 얼굴이 아름다웠었다. 장군이 일찍이 동배(同輩)들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말하기를, “자점(自點)은 죄로 마땅히 베어야 한다.”했었는데, 그 첩이 이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장군이 망명(亡命)한 뒤에 그 여인이 자점(自點)에게로 가서 살면서 그 말을 모두 자점에게 했기 때문에 얽어서 죽인 것이다. 여색(女色)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슬픈 일이다.<강상문답(江上問答)> 《출전 : 신완역 대동기문/명문당/2000/(하)pp38~39》
- 신정(申晸)의 매시(梅詩)가 기아(箕雅)에 실려졌다 - 신정(申晸)은 평산(平山) 사람이니 자는 인백(寅伯)이요 호는 분애(汾崖)이다. 문정공 흠(文貞公欽)의 손자로서 인조(仁祖) 무자(戊子)에 생원(生員)·진사(進士)가되고 현종(顯宗) 갑진(甲辰)에 문과에 급제했다.
김자점(金自點)이 비밀히 후궁(後宮) 조씨(趙氏)와 결탁했는데 조씨(趙氏)의 딸이 자점(自點)의 손부(孫婦)가 되자 세력이 더욱 부풀었는데 공의 누이가 조(趙)의 자부(子婦)가 되니 이 까닭에 공의 부자(父子)가 같이 스스로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자점(自點)이 조(趙)와 함께 역모(逆謀)를 하게 되자 종형(從兄) 면(冕)은 자점(自點)과 친밀했기 때문에 장사(杖死) 당했으나 공의 집은 홀로 면하니 이것으로 그의 생각이 깊고 먼 것을 알 수가 있었다.<인물고(人物考)> - (후 략)
《출전 : 신완역 대동기문/명문당/2000/(하)p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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