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2003. 6. 20. 태서(익) 제공) 1646년 인조(仁祖)가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죽이려는 내심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투입한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미루어 죽였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濟州)에 유배보내게 하였다.
1649년(인조27) 효종이 즉위하자 김상헌 등을 등용하여 북벌(北伐)을 꾀하고, 그를 파직시켰다. 다음해 그는 유배지인 홍천(洪川)에서 심복인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음과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에 청(淸)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명(溟)의 연호를 쓴 사실을 청(淸)에 알렸다. 이에 청나라는 크게 의심하고 대군(大軍)을 보내 진부(眞否)를 물었으나 효종(孝宗)의 기민한 수습으로 무마되었다. 결국 그의 반역행위가 드러나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가 1651년(효종2) 아들 김익(金?)의 역모가 드러나 역모죄로 아들과 함께 사형당하였다. 그가 마포구 성산동 풀뭇골에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