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 <연려실 기술 내의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20. 윤만(문) 제공) (1) ▣ 연려실기술 제27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해(李澥) 집안의 변 ▣
○ 이해 ㆍ 이점 등이 원정(原情)하기를, 삼성의 추관과 금부당상이 일을 덮어둔 잘못을 극력으로 말하니, 금부당상김자점 ㆍ 정광경(鄭廣敬) ㆍ 김기종(金起宗)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해 등의 일은 그 실정을 밝혀 보면 혹 가히 용서할 점이 있사오나 그 한 일을 돌아보면 무고죄를 면키 어렵습니다. 다만 그 고한 바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인하였거나 상을 바래서 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죄를 주면 천하의 효자의 뜻을 상할 것이고 죄를 주지 아니하면 국가의 반좌의 법률을 폐하게 되오니, 대신들과 의논하시어 재결하심이 어떠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엄하게 교지를 내려 묻기를, “의논하여 아뢴 공사(公事)는 누가 주장하였느냐.” 하고 이어서, “모두 체차하고 판부 이해 등은 모두 놓아 보내라.” 하였다. 《응천일기》
(2) ▣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정묘년의 노란(虜亂) ▣
○ 24일에 세자에게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명하였는데, 무군도체찰사(撫軍都體察使)이원익(李元翼), 좌의정신흠(申欽),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한준겸(韓浚謙), 병조 참판이민구(李敏求), 순무사심기원(沈器遠), 통어사유비연(柳斐然), 동양위(東陽尉)신익성(申翊聖)이 따랐다.
○ 27일에 인조가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로 피난해 들어가니, 영의정윤방(尹昉), 우의정오윤겸(吳允謙), 이조 판서김류(金瑬), 찬성이귀(李貴), 병조 판서이성구(李聖求), 예조 판서이정귀(李廷龜), 호조 판서김신국(金藎國), 참판최명길(崔鳴吉)ㆍ김자점(金自點)ㆍ장유(張維) 등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따라갔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사신(使臣) ▣
○ 계미년에 사은사로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을 보냈다.
○ 인평대군을 보내 조위(吊慰)의 뜻을 아뢰고 향(香)을 올렸다. 태종(太宗)이 갑자기 붕어(崩御)하였다.
○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보내 등극(登極) 및 북원(北原)의 여러 주(州)와 몽고(蒙古)가 귀순한 것을 경하하고 겸하여 세폐(歲幣)를 감하여 준 것에 사은하였다.
○ 갑신년에 사은사로 우의정이경여(李敬輿)를 보냈다. 세자가 2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3월에 돌아왔다. ○ 부사는 홍무적(洪茂績)이었다.
○ 김자점 등을 보내 북경(北京)을 평정한 것을 경하하였다.
○ 을유년에 인평대군을 보내 연경(燕京)에 도읍 정한 것을 경하하고, 전후의 은명(恩命)에 사은하였다. 세자와 대군이 돌아왔다.
○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훙서(薨逝)하였으므로 공조 정랑(工曹正朗)윤성거(尹聖擧)를 보내 예부(禮部)에 문서로써 통보하였다.
○ 김자점 등을 보내 사신을 보내 조위(吊慰)하여 주고 부의(賻儀)를 준 데 대하여 사은하고, 또 세자를 다시 책봉해줄 것을 주청하였다.
○ 병술년에 우의정 이경석(李景奭) 등을 보내 세자 책봉에 사은하였다.
○ 전창군(全昌君)유정량(柳廷亮) 등을 보내 운선(運船)을 면해 준것과 임경업(林慶業)을 돌려보낸 것에 사은하였다.
○ 정해년에 인평대군을 보내 사은하였다. 포당(布黨)이 칙서를 선포하였다.
○ 사은사로 영안위(永安尉)홍주원(洪柱元)을 보내고, 겸하여 연공(年貢)을 진헌하였다. 오흑(五黑)이 칙서를 선포하였다.
○ 무자년에 사은사로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을 보냈는데 의주(義州)에 이르러 죽었다. 부사(副使)임담(林墰)으로 하여금 군관(軍官) 2명을 더 데리고 가도록 하였다.
○ 기축년에 사은사로 우의정 정태화(鄭太和)를 보냈다. 격대(格待)가 칙서를 선포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 영안위 홍주원을 보내 부음(訃音)을 고하고 시호(諡號)를 청하고, 또 대비(大妃)의 주본(奏本)을 갖추어 왕위 계승을 주청하였다.
○ 인흥군(仁興君) □을 보내 책봉에 사은하고 겸하여 연공(年貢)을 진헌하였다. 이만(李㬅)과 노협(盧協)의 편에 부쳐 왜(倭)의 사정에 대하여 장계(狀啓)를 올렸다.
○ 효종 경인년에 영중추(領中樞) 김육(金堉)을 보내 섭정왕비(攝政王妃)의 상(喪)에 조위를 진달하고 향(香)을 올렸다.
○ 사은사로 인평대군을 보냈다.
○ 금림군(錦林君)의 딸로서 의신공주(義信公主)라 이름하고 원두표(元斗杓)를 호행사(護行使)로 삼았다.
○ 인평대군을 보내 진하(進賀)하였다. 액색흑(額色黑)이 칙서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겸하여 연공을 진헌하고 왜(倭)의 사정을 변명하였다.
○ 신묘년에 전창군(全昌君)유정량(柳廷亮) 등을 보내 황제의 친정(親政)을 경하하고 칙유(勅諭)를 내려준 것에 사은하였다. 합아(哈阿)가 왜의 사정에 관한 칙서를 선포하였다. 또 섭정왕에 대하여 조위의 뜻을 진달하고 향(香)을 올렸다. 이어서 섭정왕을 추탈(追奪)하는 조서를 받들었으나 사신이 이미 북경에 갔으므로 해서 뒤쫓아 돌아오게 할 수 없어 예부에 문서를 보내 알렸다.
○ 우의정한흥일(韓興一) 등을 보내 황비(皇妣)를 부묘(祔廟)한 것과 황태후에 존호(尊號)를 올린 것과 섭정왕을 추탈(追奪)한 것을 경하하고 이만(李㬅) 등이 복직한 것에 사은하였다.
○ 인평대군을 보내 황후 책봉을 경하하고 겸하여 연공(年貢)을 진헌하였다.
○ 임진년에 사복첨정(司僕僉正)이수창(李壽昌)을 보내 조소원(趙昭媛)과 김자점(金自點)의 역옥(逆獄)을 보고하고, 변사기(邊士紀)의 네 아들을 수색하여 체포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3) ▣ 연려실기술 제28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조조의 상신(相臣) ▣
[김자점(金自點)]
김자점의 자는 성지(成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김질(金礩)의 후손이요, 유홍의 외손이다. 포의 정사 일등공신이 되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이 되었다. 계미년에 정승을 배수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기축년에 갈리었고, 경인년에 귀양갔으며, 신묘년에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 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괄(李适)의 변(變) ▣
○ 김원량(金元亮)은 어려서부터 명예를 좋아하고 조행(操行)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 그 이름이 드러났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영남 유림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책 상자를 짊어지고 가서 그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다. 반정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발탁되어 6품에 올랐다. 김시양이 경세에게 묻기를, “원량이 유생으로서 반정의 공훈에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세가 말하기를, “그가 김자점(金自點)ㆍ이시백(李時白)등과 서로 친하였으므로 비록 함께 모의한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참여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공훈을 책정할 때 원량이 3등으로 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시양이 경세ㆍ임숙영(任叔英)과 홍문관에 모였을 때 시양이 말하기를, “원량 자신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니 3등 공신으로 녹훈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기니 어찌된 것인가.” 하였더니 경세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자, 숙영이 말하기를, “내가 원량과 매우 친하였는데, 원량이 어느 날 찾아와서 반정의 모의를 말하기에 내가, ‘녹을 먹고 나라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종사를 위하여 이러한 거사를 하려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나, 그대는 유생으로서 위로 홀로 된 부모를 모시고 있는데 일이 만약 실패하면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충성과 효도를 모두 잃어버리겠소.’ 하였더니 원량은 얼굴빛이 변하여 가버렸다. 원량과 이괄은 6촌간으로서 이괄이 반정에 참여하게 된 것도 원량을 통한 것이다.” 하였더니 경세가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해 겨울, 문회가 고변하자, 원량이 자기가 영변 판관으로 가서 이괄을 정탐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여러 공신이 크게 의심하여 허락하지 않았다가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원량을 심문하고자 청하여 마침내 베었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인발이 죽은 체하고 이괄에게 항복한 것도 원량 때문이다.” 하였는데 그의 친구 나만갑(羅萬甲)ㆍ조직(趙溭) 같은 무리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원량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한다. 《하담록》
○ 원량은 이괄의 부자를 깊이 믿었으므로, 이괄이 고발당하자 자기의 전 가족이 이괄을 보장하겠다고 하였는데,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승지김자점이 아뢰어 그를 가두게 하였더니, 원량이 옷을 찢어서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소를 썼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여 역적을 충성스럽다고 인정하여 감히 다른 뜻이 없다고 보장하였다가 드디어 임금을 속인 것이 되었으나,신의 본 마음은 하늘의 해가 증명할 것입니다. 대개 이괄은 곧 신의 타성(他姓)의 근친으로 평소에 논하는 바나 몸가짐이 한결같이 사대부 같았고, 그 아들 이전(李旃)은 어려서부터 신의 집에 드나들며 소학(小學)ㆍ가례(家禮) 등의 책을 배웠고, 또 한때의 선생과 점잖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었고, 나이가 적고 배움이 없다 하며 벼슬 받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이때문에 그를 허여하였습니다. 속임수를 쓴 것이 이에 이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정찬(鄭澯)이 고발하였을 때에 신의 생각으로는 정찬이 폐위된 광해군 때의 훈척(勳戚) 집안의 신하이므로 이괄이 그와 함께 모의하였다 함은 사실에 가까운 것 같지 않아서 끝내 의심하지 않았다가 이제 반역한 신하의 인척으로 전하의 의혹을 사게 되었으니 신은 땅에 들어가도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하였었는데, 그 소는 끝내 올려지지 못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남으로 떠나려 할 때, 판의금김류(金瑬)에게 묻기를, “가두어 놓은 여러 죄수들을 모두 죽일 것인가, 김원량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김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자점이 재빠르게 말하기를, “남겨 두었다가 적에게 넘겨 주어서 적이 이용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자점의 친한 사람을 보내어 옥중에서 목을 베게 하니 이경생(李更生)이 자점에게 말하기를, “김아무개는 어진 선비인데 죽였으니 사람들이 장차 공을 어떻게 생각하겠소.” 하니, 자점이 크게 말하기를, “선비를 죽였다는 비난은 내 자신이 감당하겠소.” 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 예전에 말하기를, “김원량은 진실로 죽음을 취할 만한 점이 있었으나 그 마음이야 어찌 의심하리오.” 하고, 또 자점에게 말하기를, “네가 원량이 예전에 관서(이괄이 부원수로 있은 영변)의 수령을 원하였다는 것으로 의심의 단서를 삼으니, 그렇다면 내가 예전에 무주(茂朱)현감을 구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의심할 수 있는가.” 하였다.〈김원량의 묘표(墓表)〉○ 원량이 사람들이 서변 임명은 싫어 피하는 것을 보고서 분개하여 영변의 수령이 되기를 청하였다.
○ 3월에 장만(張晩)ㆍ정충신(鄭忠信) 등 29명을 진무(振武)공신으로 녹공(錄功)하였다. 이시발(李時發)ㆍ최현(崔晛) 등은 공이 있었으나 함께 녹훈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장만이 여러 번 소를 올려 아뢰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월록》
(4) ▣ 연려실기술 제30권 효종조 고사본말(孝宗朝故事本末) 김자점(金自點)의 옥사 ▣
기축년(1649)에 인조가 승하하여, 김자점이 국정을 담당하자 집의 김홍욱(金弘郁)이 맨 먼저 공격하고자 하니, 지평 임중(任重)이 이에 응하여 마침내 함께 김자점이 탐하고 방종하여 나라를 좀먹는 죄를 탄핵하여 아뢰었다. 이때 김익희(金益熙)와 신면(申冕)은 서로 권력을 다투어 공격하였는데, 김익희가 산인(山人)주D-001을 끼고 신면이 자점의 당이란 것을 특히 논하고 아울러 황호(黃㦿)에까지 말이 미치니, 임중이 싫어하여 따르지 않으므로 임중을 시끄럽게 공격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 《염헌집》임중(任重)은 상원(相元)의 아버지이다.
○ 조정의 신하간에 원당(原黨)과 낙당(洛黨)의 명목이 있었는데, 낙당은 바로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이요, 원당은 바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 원두표이다. 두 사람이 각각 당을 만들어 서로 헐뜯으니, 선비들 중에는 그 당에 물들지 않은 사람도 함께 지목을 받은 이가 있었다. 대사헌 조경이 심대부(沈大孚)ㆍ장응일(張應一) 등과 함께 자기네들과 다른 무리를 일망타진하고자 하니, 조복양(趙復陽)이한 마디 말로 그 마음을 꺾어 그 계책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송곡(趙松谷) 행장〉
○ 기축년 8월에 양사에서 아뢴 대략에, “김자점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조정을 그릇되게 해서 방금 멀리 귀양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거기에 붙고 조은 무리들도 약간의 징계를 가하여 조정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라 감사 이시만(李時萬), 서산 군수 이이존(李以存), 부제학 신면, 호군 이지항(李之恒)ㆍ이해창(李海昌), 전 집의 엄정구(嚴鼎耈), 광주 부윤(廣州府尹) 황호 등은 혹은 아부하여비밀히 결탁하고서 사람들의 갖은 비난을 꺼리지 않으며, 혹은 김자점의 농락을 받아 세력을 조성하니 청의(淸議)에서 버림을 받고, 사대부들에게 욕을 끼쳤으니, 함께 벼슬을 깎아 버리기를 명하옵소서.” 하였다. 《동춘집》
○ 또 아뢰기를, “사대부는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며 공신 재상과 명성이 높은 무리들은 길이 서로 다른 것인데, 예조 참의 이행진(李行進)과 승지 이시해(李時楷) 등은 원두표의 문하에 출입하며 압객(狎客 서로간에 예의도 차리지 않는 극히 친밀한 손님)이라는 칭호가 있어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모르니, 식자들이 침을 뱉고 더럽게 여기며 청의(淸議)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함께 파직하옵소서.”하였다. 《동춘집》
○ 이전에 김자점이 궁중과 결탁하여 국권을 농락하고 조정을 어지럽힐 때, 몇몇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가까이 세력을 조성하니, 온 나라에서 분하다 하고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대관들이 바야흐로 자점을 논핵함에 있어 형을 너무 가볍게 논하니, 대사간 김여경(金餘慶), 집의 송준길(宋浚吉), 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이 자점을 멀리 귀양보내고 그 당류 7, 8명은 영영 벼슬에서 삭제할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자점은 선조의 훈구지신이므로 비록 죄가 있어도 귀양보낼 수 없다.”고 비답을 내렸는데, 매우 온당치 않으므로 여러 대관들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간신(諫臣)의 말을 꺾는 것은 나라의 흥망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자점이 이로 인해서 정승에서 파면되니, 그의 무리들이 원망하였다. 이로써 자점이 불측한 음모를 하면서 몰래 청국 사람에게 모함하며 말하기를, “김상헌과 김집(金集)이 청국을 배척하는 괴수이다.”고 하였다.
○ 11월에 신면 등을 멀리 귀양보낼 것을 특명하니, 장령 송시열이 귀양보내는 것은 너무 중하다는 뜻으로써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외인(外人)들이 이것을 과중하다고 불복한다 하니, 더욱 조정의 기강이 퇴폐함을 알겠다. 한심함을 금할 수 없다.” 하였는데, 뒤에 경연에서 말하는 이가 있어 신면에게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하여 정배시켰다.
○ 경인년 2월에 대사헌 이후원, 대사간 조석윤 등이 자점의 죄를 논하니, 임금이 부처(付處)하기를 명하였다. 자세한 것은 위에 나왔다.
○ 이후원이 또 자점에게 죄를 더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자점의 죄는 벌써 꿰미(貫)가 찼는데주D-002 부처에 그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의 전후에 범한 죄를 밝혀서 논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그 뜻(청국에 거슬릴까 두려워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3월에 비로소 광양(光陽)으로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 신묘년 12월에 해원 령(海原令)영(暎), 진사 신호(申壕) 등이 자점의 반역 음모를 고변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와서 친히 국문하니 역적 익((釴) 자점의 아들 ☞식(鉽)의 오기임)이 자복하고 바로 공모한 무장(武將)을 끌어대어서 자점과 김익(☞식)이 죽음을 당하였다. 《조야첨재》
○ 자점이 처음 귀양갈 때에 그 무리들 스스로가 서로 의구심을 품고 사류들을 제거할 계책으로, 김익(☞식)이 부제학 신면에게 모의하니, 신면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오직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만약 친밀한 역관으로 하여금 정명수(鄭命壽)에게 통하여 산인(山人)을 제거하면 우리들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익(☞식)이 그 말을 조아 이형장을 시켜 청국에 참소를 행하여 드디어청 나라 사신이 사문(査問)하게 되었던 것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흉악한 계책이 더욱 낭자하였다. 신면은 매맞아 죽고, 그때에 형장은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만에 이르렀는데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국문하여 자복을 받고 수레에 찢어 죽였다. 《조야첨재》
○ 이전에, 임금이 자점의 적소(謫所)에 내시를 보내어 그 문서를 수색하여 오니, 조정 신하의 편지와 지방 장수 및 수령들의 편지가 많고, 또 원망하는 말과 흉한 형적이 드러난 것이 있었는데, 모두 안에다 머물러 두고 조정에 내리지 않았다. 뒤에 경연에서 이 말을 하니 임금이 “볼 것이 없어서 이미 불태웠다.”고 답하였는데, 이는 옥사가 너무 커질 것을 두려워함이었다. 대역을 다스린 뒤에는의례 하의(賀儀)가 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으로서 반역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니, 하례할 것이 없다.” 하고, 마침내 하례를 받지 않았다. 《조야첨재》
○ 그때, 임금이 죄인을 친히 국문하였는데, 낙형(烙刑)을 시행할 자가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낙형은 주(紂)가 만든 혹형이므로 후세의 임금 중 이것을 사람에게 시행한 이가 없었고,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역적을 다스릴 때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임금으로서 친히 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빛이 변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피하였다. 《식암집(息庵集)》
○ 그때, 죄인을 국문하여 그 당류를 적발시켰는데, 국문을 맡은 한 사람이 문사랑(問事郞)을 시켜 죄수에게 타이르기를, “네가 관련된 자를 말한 것은 무관뿐이니 어찌해서 문신은 고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정태화가 나와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묻는 말은 틀렸소. 문무를 막론하고 같은 당류만을 묻는 것이 옳거늘, 어찌 죄수로 하여금 무관은 두고 문관을 고하라 할 것이오.” 하고, 다시 묻지말기를 명하니, 당인(黨人) 가운데 의구하던 자가 비로소 안심하였었다. 《식암집》국문을 맡은 이는 바로 판의금 원두표였다.
○ 이전에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에 궁중의 사람 중 자점에게 옛날 은혜를 입은 자가 있어, 자점에게 와서 말하기를, “대궐 안의 사람들이 은밀히 말하기를, ‘대감은 신하로서 동궁을 섬길 뜻이 없다.’ 하니, 상공이 이때에 권세를 떠나면 혹시 만에 하나 구제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위태함이 금방 닥쳐올 것이오.” 하니, 자점의 집에서 이 말을 듣고 그 맏아들 김연(金鍊) 이외에는 놀라고두려워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신묘년 옥사에 이르러 임금이 전교를 내리기를, “자점이 신하로서 나를 섬기지 아니하고자 한 것은 내가 알고 있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비로소 궁중 사람의 소문이 헛말이 아닌 것을 알았다. 《공사견문》
○ 자점이 부귀가 융성하여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서 시골 선비로서 글 잘하는 사람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그 아들 김익의 글을 대신 짓게 하여 과거에 뽑히게 하고, 또 그 손자 세룡(世龍)을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이기를 도모하여 점쟁이를 유인하고 협박하여 거짓으로 그의 사주가 좋다고 칭찬하도록 하여 임금을 속여 왕가와 혼인을 맺으니, 그 기세 앞에는 억누르면 꺾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동궁에 있을 때에도 그에게 거슬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였으나, 자점은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몸은 죽음을 당하고 집안에 종족이 남지 않게 되었다. 《공사견문》
○ 당초에 자점의 손자 세룡이 인조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옹주는 후궁 조씨(趙氏) 소생이다. 안팎으로 결탁하여 흉한 음모가 무성하여 저주하는 일이 궁중에서 일어나고 역모가 밖에서 싹텄으니, 임금은 일이 자의대비(慈懿大妃)에게 관계되므로 옹주의 어미 조씨만 죽였다. 삼사와 백관들이 세룡의 아내와 그의 동복(同腹)인 왕자 징(徵) 숭선군(崇善君) 과 숙(潚)낙선군(樂善君)을 함께 처단할 것을 청하니, 진선(進善) 송시열이 아뢰기를, “조(趙)가 이미 죄를 받았고 그 아들은 그 흉모를 꼭 미리 알았는지도 모르는데, 선왕의 혈육을 죽게 함은 불가하다.” 하고, 한 문제(漢文帝)와 회남왕(准南王)의 일을 인용하며, 두 왕자를 보전하여 임금에게 형제를 죽였다고 비난하는 논의가 없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도 차마 벌을 시행하지 못하고 외딴섬에 안치시켰다. 《조야첨재》
○ 왕자 징의 어미 조씨가 김자점과 안팎이 되어 불측한 음모를 하였는데, 자점의 손부(孫婦)는 또 조씨가 낳았다. 낙성위(洛城尉) 세룡(世龍) 흉악한 음모가 더욱 드러났으나 임금의 지친(至親)인 까닭으로써 차마 한결같이 법대로 처단하지 못하였다. 이후원(李厚源)이 비록 옥사의 체모를 들고 굽히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의 전교가 간절함에 이르니, 이후원도 이에 순응하였다. 성왕(聖王)이 법을 굽히고은혜를 펴는 아름다운 뜻을 이룬 까닭에 조씨의 자녀는 지금까지 안전하다. 〈이완남(李完南) 시장〉 낙성위(洛城尉)옹주(翁主)를 처음에는 효명옹주(孝明翁主)로 봉하였다.
○ 송시열이 이후원에게 준 편지에, “세룡의 아내가 흉한 일을 행한 것이 회남(淮南)의 모반한 것과 같으며, 이선(二善) 숭선(崇善)ㆍ낙선(樂善) 과 흉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봉(鳳)과 계(桂)주D-003의 무고함과 다름이 없는데, 주자(朱子)가 회남왕(淮南王)에 대하여서도 오히려 한 문제(漢文帝)가 그를 촉(蜀)으로 귀양보내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비난하였으니, 통진(通津)과 촉이 비록 멀고 가까운차이는 있으나 귀양가서 나쁜 풍토에 고생되기는 일반이니, 주자의 이론으로써 생각해 보면 세룡의 처도 오히려 귀양보낼 수 없는데, 하물며 이선(二善)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우암집》
○ 신묘년에 조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 의 옥사가 있었는데, 그때 귀인의 어미가 이미 죽었으나 추형(追刑)할 논의가 있으므로, 정태화가 당시 인조의 전교 인조 주륙흉당(誅戮凶黨)조에 기록되었다. 를 임금에게 아뢰어 일이 정지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대신(臺臣)오정위(吳挺緯)의 아룀으로 인하여 드디어 육시하였다. 《공사견문》
○ 부원수 유비(柳斐)의 서녀가 김자점의 첩이 되었는데, 자점이 패한 뒤에 항상 말하기를, “자점의 며느리, 손부(孫婦), 딸들이 의복과 거처를 반드시 효명옹주를 본받았다.” 하였다. 신하의 딸로서 왕녀를 본받고자 하였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공사견문》
○ 대사헌 ☐가 아뢰기를,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의 서매(庶妹)가 자점의 첩이 되어 자점과 가장 친밀하였으니, 통제사의 중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익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오지 않았는데, 만약 의심스럽다 하여 정익을 체직하면 장차 사람마다 스스로 의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옛사람이 ‘나의 진심을남의 뱃속에 넣어 주라.’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자점이 오랫동안 정승의 직에 있었으니 한때 문무관 중에 누가 그 집에 출입하지 아니하였으리까. 만약 평소에 서로 잘 아는 것으로써 모두 억지로 죄를 씌우면 아마 조정에 한 사람도 완전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심을 진정시키는 계책은 전부 대신에게 있으며 나와 경이 벌써 굳게 정한 바가 있으니, 비록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감히 제 뜻대로 할 수 있으리오.” 하였다. 《식암집》
○ 이형장이 정명수를 빙자하여 그와 안팎이 되어 세력을 심히 펼쳤는데, 자점을 처형하면서 형장을 연루자로 처형시켰으니, 마땅히 청국에 알려야 할 것이므로 사신갈 사람을 택하였다. 수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조동립(趙東立)이 아니면 갈 사람이 없습니다.” 하여, 조동립을 보냈는데 연경에 이르자, 명수가 말하기를, “형장의 죽음은 반드시 나 때문일 것이다.” 하니, 동립이 말하기를, “형장의다른 죄는 고사하고, 그대가 우리 나라에 올 때에 조정에서 은화를 형장에게 주어서 그대에게 전하게 한 것이 다 밝은 표시가 있는데, 이번에 처형되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보니 그 은화가 많이 있었다. 그가 그대를 저버림이 이와 같았는데 다른 것이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니, 명수가 잠자코 다시 해독을 부리지 못하였다. 《통문관지》
○ 변사기(邊士紀)가 김자점의 심복으로서 수원 부사가 되자,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예전에 송 나라 적청(狄靑)이 추밀사로 조정에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일컫는데, 구양수(歐陽脩)가 파면시키기를 청하기를, ‘당 나라 주자(朱泚)는 본래 반역할 뜻이 없었으나 부하의 협박에 의하여 한 것이니, 예로부터 반란하는 자가 반드시 그 본심으로 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신이 몸이 늙어 의혹이 심하여 지나친 염려가 없지 않아서, 아직 드러난 증거가 없는 일로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뢰어 위로 전하의 총명을 모독하고 아래로 대신의 노여움을 촉발하게 되었으나, 어찌 반드시 지나친 염려는 깊은 계책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후일에 불행히 만일의 일이 있을 때에는 노신을 말하지 않았다고 이르지 마옵소서.” 하더니, 이때에 와서 자점의 역모한 일이 발각되자 변사기가 과연 역모에 참여한 것이 드러나니, 사람들이 비로소 홍무적의 선견지명을 탄복하였다. 〈홍무적의 비〉
○ 경기 감사 김광욱(金光煜)이 수원 부사 변사기를 파출시키자, 영의정 이경여가 변사기를 유임시키기를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감사에게 추고하기를 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또 감사가 변사기를 하고(下考)에 두었는데, 그때 자점이 사기와 연락하여 역모를 한다고 바깥 소문이 떠들썩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수원은 실로 서울 부근의 중요한 번진인데 감사가 변사기를 죄로 파출시킨 것은 그 뜻이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신이 유임시키기를 아뢰어 청하였고, 전하께서 또 추고하기를 명하셨는데, 얼마 안 되어 또 하고에 두어 마치 감사가 임금과 대신에게 서로 겨루듯이 하니, 감사의 사체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따라서 김광욱이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경멸하는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경기 감사 김광욱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뢴 내용을 보니 늠연(凜然)하여 옛 대신의 풍도가 있으니, 김광욱은 파직시키고 변사기는 유임시켜서 국사에 마음을 다하게 하라.” 하였는데, 자점의 옥사가 일어나자 사기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맨 먼저 나왔었다. 자점의 아들 김연은 바로 시백의 사위로, 김연과 그 아들 세창(世昌)이 모두 바야흐로 국문을 받는데, 시백은 정승의 지위에 앉아서 대의로 사피하지 못하였더니, 판의금 원두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역적을 옹호하는 대신이 어찌 감히 국문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내가 여기 있는데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하는고. 판의금은 속히 나가라.” 하였다. 경여와 시백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일어나 나가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벌써 생각하였으니 경들은 나가지 말라.” 하였다. 세창은 처형하였고, 김연도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시백이 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의 사관을 보내서 효유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연양(延陽)의 시장〉
○ 장령 이형(李逈)이 아뢰기를, “시백의 아들 이한(李憪)은 역적과 친하니, 청컨대 중도부처하옵소서.” 하고, 대사간 이시해(李時楷)는 “시백의 동생 시방(時昉)이 역적에게 아부하였으니 청컨대 귀양보내옵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윤허하지 아니하고, 좌의정 김육에게 묻기를, “내가 우의정(이시백)에게 간절히 효유하였으나 아직 조정에 나오지 않으니, 진실로 염려스럽도다.” 하니,좌의정이 대답하기를, “대관이 지금 그 동생과 아들을 논하고 있는데, 우의정이 무슨 마음으로 나와 일을 볼 수 있겠습니까. 시해는 원두표의 지시를 받은 자이니 귀양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개성 유수의 자리가 지금 비어 있으니 원두표를 그 자리에 내어보내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참으로 대신다운 말이로다.” 하고, 명하여 이시해는 중도부처시키고 원두표는 개성 유수로 내보냈더니, 시백은 감히 스스로 편하게 여기지 못하고 휴가를 내었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역적이 가까운 친족 중에서 난 불행한 일은 액운에 부칠 일이지 경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하물며, 경은 선조(先朝)의 구훈(舊勳)이며, 나라의 기둥이니, 청백한 그 지조와 충성된 그 마음은 어찌 나라 사람들만이 알겠는가. 실로 천지신명이 증명할 것이다.” 하니, 시백이 마침내 부르는 명에 조아서 나와 일을 보았다. 〈연양의 시장〉
○ 이시해가 이시방에게 품은 감정을 풀려고 시방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니, 김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시해는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이니, 내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김육의 묘지〉
○ 갑오년(1654) 6월에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임금이 전교를 내려 의견을 구하니, 부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올린 소의 대략에, “어느 시대에 역란의 변고가 없었으리오마는 역적 조가(조귀인(趙 貴人))와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능토(陵土)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선왕이 총애하는 여자를 죽이고 사랑하는 아들을 귀양보냈으니, 이 어찌 전하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역적 조가의죄가 하늘에 통하였으니, 징(澂) ㆍ 숙(潚)을 연좌하는 것은 마땅하나, 어린아이로 힘줄과 뼈가 굳지 못하고 혈기가 충실하지 못한데, 하루아침에 외딴섬에 위리안치되었으니 위태로운 약한 목숨이 어찌 죽음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비록 슬퍼하며 후회하고 한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한 문제가 회남왕이 죽은 뒤에 밥을 먹지 않고 슬피 울었을 뿐더러, 민간에서 풍자한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노래에 문제가 종신토록 불쾌하였던 까닭입니다. 회남이 몸소 반역을 하였는데도 오히려 문제가 그 죽음을 애통해하였거늘,하물며 지금 징과 숙은 그 어미의 죄로 연좌된 것이고, 당초에 흉모에 참여하지 않은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선왕께서 징과 숙을 염려한 것이 역시 지극하였으니, 궁실을 만들고 전토와 노비를 주었음은 어찌 길이 그 부귀를 누리어 명대로 한평생을 잘 살기를 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구속되고 갇혀서 고생되고 슬퍼하고 근심하며 두려워하여 죽을 날이 멀지 않으니,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영혼이 어찌 애통해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선왕의 영혼이 상제의 좌우에 있어 하늘과 일체이니, 지금 상서롭지 못한 재변이 내린 것도 반드시 이 까닭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불행히도 두 아이가 혹시 병에 걸려서 마침내 죽게 되면, 후세에 전하께서 끝내 동생을 죽였다는 허물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돌아가신 부모 섬기기를 산 부모와 같이 하는 효도로써 태묘에 들어가서 선왕께 제사를 드릴 때에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 소현(昭顯)의 세 아들 가운데 두 아들은 벌써 죽었고, 그 하나가 남아 있는데 역시 외딴섬에 구금되어 있으니, 만약 다시 요절한다면 소현의 후사가 끊어질 것입니다. 가령 소현이 당초에 아들이 없었더라도 전하께서 그 뒤를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해 주어야 마땅할 것인데, 어찌 차마 그 있는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무심히 보고 그 살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전하께서 용서할 뜻이 있었는데 대신들이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아아, 전하의 이 마음은 참으로 천지의 호생하는 덕주D-004이며, 성인의 측은한 어진 마음입니다. 대신된 자가 이미 그 아름다운 뜻을 순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막아서 방해하니, 그들은 어질지 못하고 또 충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선왕의 뜻을 계승하시어 은혜로운 명을 내리셔서 두 동생과 한 조카를 급히 소환하여, 그 속적주D-005을 돌려주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남이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진실로 가상하다.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노라.” 하니, 안팎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행진(李行進)이 소를 올려 헐뜯기를, “우원은 다만 역적 조가를 번안하기 위하여 선왕을 훼손하고 임금을 속여서 스스로 곧은 이름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또 어전에서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원을 사랑하여도그 악한 것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행진이 임금이 본래 우원을 어질게 여김을 알고 이때를 틈타서 중상하려는 것이었다. 이어서 대사헌 이시해가 일어나서 우원을 탄핵하여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고, 간원에서도 찬동하는 이가 있어서 삼사의 논의가 같지 않았는데, 공의(公議)를 잡고 이론(異論)을 세운 이(홍우원 옹호파)로서, 이상진(李尙眞) ㆍ 이정영(李正英) ㆍ 남중회(南重晦) ㆍ 이만영(李晩榮) ㆍ 정석(鄭晳) 등의 일곱 사람은, 외직으로 나가기도 하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임금이 경연에서 여러 번 불쾌한 전교를내리니 사람들이 모두 우원을 위태롭게 여기고, 우원은 문 밖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가을이 되자 대신 이시백이 아뢰어서 임금이 다만 우원의 체직을 명하였더니, 겨울에 이르러 사헌부의 탄핵이 비로소 그쳤고, 얼마 있지 않아서 두 왕자와 소현(昭顯)의 아들을 석방하기를 명하고 다 그 관작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우원의 말을 쓴 것이다.
○ 숙종 을묘년에 신면의 아들 종화(宗華)가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소를 올려 자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니, 임금이 소를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윤5월에 한재로 인하여 죄인들 중 억울함이 있는가를 살펴서 처리할 때 종화가 또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의 아비 면(冕)은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와 이성 삼종(異姓三從)의 친척으로서 나이가 서로 같고 교분도 두터웠었는데, 불행히 을유년사이에 익희가 친구를 고자질하여 아뢰어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험함을 보고 면대해서 말하고 편지로 책망하였더니, 그는 친구간에 한때 책선주D-006하는 말을 가지고 드디어 종신토록 한을 품었습니다. 그때 재상들도 모두 익희의 그름을 배척하여, 익희가 외직으로 돌아다니게 되니 부끄럼과 분함이 더욱 쌓여서 기회를 타서 참소를 꾸며, 끝내는 산인(山人)을 협박하고 유인하여 공격하는 바탕을 삼았으니, 이것이 실로 기축년에 사헌부의 탄핵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신의 아비가 죄를 입었다가 곧 풀렸고, 신묘년 겨울에 마침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고 상신(相臣) 원두표가 새로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자 신의 아비가 말하기를, ‘두표는 일찍이 병자년 남한산성이 포위당하였던 날에, 군사들을 시켜 소란을 일으켜서 협박한 죄가 있고, 또 갑신년 역적을 다스린 뒤에 거짓 전령을 만들어서 연성군(延城君) 이시방의 형제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비록 재능과 지력이 일세를제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점잖게 일하는 데는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아뢰어 체직하기를 청하였더니, 한 달이 못 되어 역옥(逆獄)이 갑자기 일어났는데, 두표가 판의금이 되어 중상하고 협박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세룡이 신의 아비를 연루로 끌어들일 때의 입증은 곧 안철(安澈)이었는데, 그때에 금부에서 수색한 정안(政案)과 조보(朝報)를 얻어 보고 세룡의 말한 바를 상고하니, 신의 아비와 안철이 서로 만났다는 때가 바로 안철이 병사(兵使)에서 갈리지 아니하고 아직 안주(安州)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말이 헛되므로 상신(相臣) 이경여ㆍ정태화ㆍ김육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억울하다고 주장하여 전하께 면대를 청하기까지 하여, 처음에는 정형(停刑)을 허락했었는데, 역적 익(釴☞식鉽)이 자복한 뒤에 이르러 두표가 말하기를, ‘네가 지금 끌어댄 것이 모두 무사(武士)이니, 이 밖에 어찌 문관 명사(文官名士)를 끌어댈 이가 없겠느냐?’ 하니, 익(釴☞식鉽)이 바로 신의 아비를 끌어서 대답하였으며 그 인증은 전부 역적 형장(馨長)에게로 돌렸었는데, 이듬해 봄에 형장이 환국하여 엄하게 국문하던 날, 효종께서 특별히 명하여 신의 아비가 그 일에 참여하여 아는가를 캐어물으니 형장이 두세 번 부르짖으며 ‘내 이미 역모를 한 것으로 형을 당할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것이 있으리오마는, 신면에 대해서는 심히 억울하고 억울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원두표의 아들 만춘(萬春)이 그때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 절절(節節)이 신변(伸卞)하였다. 〈술이〉
○ 판의금 민희(閔熙)가 임금의 물음에 답하여 아뢰기를, “추안에 기재된 바를 취하여 상고하니, 세룡의 공초에 말하기를, ‘신면이 변사기 ㆍ 안철과 함께 한때에 그 아비(자점)의 집에 이르니, 그 아비가 나라를 원망하며 역모할 뜻을 세 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고, 익(釴☞식鉽)의 공초에는, ‘역모할 일은 상의하지 않았고 신면이 나에게 권하여 이형장으로 하여금 청국과 통하여 군사를 청하였다가의주(義州)에 머물게 하고 산인(山人)을 잡아가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했습니다. 신면의 죽음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그 뒤에 형장이 청국으로부터 돌아오니 중도에서 잡아다가 문목(問目) 외에 별도로 비밀히 묻기를, ‘기축년 청국 칙사가 올 때에 네가 서도(西道)에 있었는데 그때 김익(釴☞식鉽)과 신면이 너에게 통지한 일이 없었느냐.’ 하자, 형장의 대답이, ‘신면은 본래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데 무슨 통지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신면은 죄를 범한 일이 없으나, 오직 자점의 집에서 수색해 온 문서 가운데, ‘신면이 대사간이 되니 마땅히 나를 탄핵하는 의논을 정지시키겠지.’ 하는 말이 있어, 마침 송준길(宋浚吉)이 신면을 낙당(洛黨)이라고 공격하는 말과 부합되었으며, 또 신면의 위인이 기세를 부리고 권세를 좋아해서 동류에게 미움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그 아들(종회)이 아비를 위해서 호소하는 것을 인정의 도리로 막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술이〉
○ 을묘년 7월에 큰 한재(旱災)로 인하여 억울한 죄인들을 살펴서 풀어준 때에 우의정 허목(許穆)의 아룀에 전교하기를, “이 한재를 걱정하여 죄수를 살펴서 풀어주는 날을 당하여 보통 죄인은 모두 은혜로운 사면을 받았는데 세룡(世龍)의 처만은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으니, 제가 비록 반역을 범하였으나 효종께서 처음에 이미 죽이지 않기로 하였고, 선왕(현종)께서도 석방시키고자 하였으나 단행하지못하였었는데, 지금은 또 병들어 망가진 사람이 되었으니 특별히 석방시키라.” 하였다. 〈술이〉
○ 이해 10월에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신묘년의 역옥을 다스릴 때에 판의금으로 있었으므로 당시 옥사의 정상을 잘 압니다. 신면과 안철이 공모하였다는 말은 처음에 세룡의 초사에서 나왔는데 초사 중의 날짜와 서로 어긋나므로 대신이 아뢰어 다시 익(釴☞식鉽)에게 물으니, 익(釴☞식鉽)의 초사 가운데, ‘신면과 같이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가 역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것이며, 그 뒤에 형장의 초사에 신면의 죄없는 실상을 간곡히 말하여 효종께서도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어찌 선조(先朝)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여 억울함을 씻어 주지 않을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역모를 범하지 않았으면 그 관작을 회복시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술이〉
[주 D-001] 산인(山人) : 김집(金集)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등 연산(連山)과 회덕(懷德)의 산림학자(山林學者)들을 말한다. [주 D-002] 죄는 벌써 꿰미(貫)가 찼는데 : 옛말에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악이 찰 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주 D-003] 봉(鳳)과 계(桂) : 명종(明宗) 때에 무고한데 원통히 죽은 왕자 봉성군(鳳城君)과 계림군(桂林君)을 말한 것이다. [주 D-004] 호생하는 덕 : 경전(經傳)에 “천지의 덕은 만물을 낳고 기르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주 D-005] 속적 : 속적(屬籍)은 왕실의 족보(族譜)에 든다는 말인데, 죄가 있으면 속적에서 삭제한다. [주 D-006] 책선 : 친구간에 서로 선(善)하기를 충고하고 책망한다는 뜻이다.
(5) ▣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3 등과 총목(登科摠目) ▣
3년 임진 10월 증광시에서 세자의 가례와 입학. 역적 김자점(金自點) 토벌의 3경사여증제(呂曾齊)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별의 변괴[星變]주D-086
[주 D-086] 별의 변괴[星變]옛날에는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나면 그것을 변괴라 하여 인사(人事)에 관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당시에 그런 일이 있었다.
(6) ▣ 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박홍구(朴弘耈)의 옥사 갑자년 ▣
○ 그때 임금이 윤의립(尹毅立)의 딸을 세 차례나 간택(揀擇)의 대상주D-002에 넣게 하여 장차 혼인을 정하려 하였더니, 김자점(金自點)ㆍ심명세(沈命世) 등이 어전에서 극력 반대하였으므로 임금이 크게 노하여 엄한 전교를 내렸다. 이귀가 올린 소의 대략에, “역적 인발(仁發)의 흉악함은 이괄보다 더하는데도 의립은 그의 숙부로서 연좌됨을 면하였으니 이는 2백 년 이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일시의은혜로운 특전으로 된 것이니 후세까지 법으로 전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또 인발과 역적 이괄의 죄악은 한가지이니 만약 의립이 역적 이괄의 숙부였다면 전하께서 그의 딸에게 혼인을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 소를 간직하고 의정부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의립이 경상 감사가 되었을 때 이귀가 말하기를, “그의 재주는 비록 아깝다 할 만하다. 그러나 역적 인발의 숙부로서 법에서는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지만 특별히 일시의 은혜로운 특전으로 죄를 면하게 되었으니 감사라는 중요한 임무를 곧 바로 줄 수 없다.” 하고, 이내 경연에서 법에 의거하여 반대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타당(他黨)이라고 배척한다.” 하여, 여러 번 꾸짖는 전교를 내렸으나 의립은 공론으로 말미암아 부임하지 못하였다. 《연평일기(延平日記)》
(7) ▣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조사(詔使) 본국의 사신이 돌아올 때에 보내준 조칙(詔勅)도 아울러 첨부하였다. ○ 《조야기문(朝野記聞)》에는 내관(內官)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
○ 3년 임진 순치 10년, 형부 시랑(刑部侍郞)의이도기(宜爾都奇) 등이 와서 조소원(趙昭媛)ㆍ김자점(金自點)이 반역을 도모한 일에 대하여 위로하였다.
(8) ▣ 연려실기술 제27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저사(儲嗣)를 정하다 ▣
○ 윤6월 2일에 임금이 졸지에 여러 대신과 육경을 양화당(養和堂)으로 불러 이르기를, “내 병이 갈수록 더욱 중한데 세자를 정하지 못했고, 원손은 어리고 약해서 그가 장성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 등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영상김류가 아뢰기를, “조야가 함께 세자께서 오래 사시기를 빌었사오나 갑자기 돌아가시니 망극하여 아뢸 바를 모르고 있던 중 성교(聖敎)가 이 같으시니 전하의 뜻이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혹은, “조야의 촉망이 원손에게 있으니 이 어찌 바꾸지 못할 상도가 아니리오. 상도를 지키는 외에 다시 아뢸 바가 없다.” 하였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더하고 덜하며 한결같지 않아서, 정신과 기운이 점점 전과 같지 않고, 나라 일은 날로 더욱 어렵고 위태롭다. 내 생각에는 두 대군 중에서 세자를 가려 봉할까 한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전하의 전교는 반드시 종사의 큰 계획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게 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다시 이르기를, “여러 신하는 모두 각각 그 회포를 말하라.” 하였다. 좌상홍서봉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몸소 창업과 중흥을 겸하셨사온데, 어찌 왕업의 어렵고 큰것을 생각하여 걱정을 깊이 하지 않으십니까. 옛글을 상고하건대 태자가 없으면 태손(太孫)이 마땅히 잇는 것은 떳떳한 법이오, 바꾸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상도에 어긋나는 행동은 국가를 편안히 하는 도리가 아니옵니다. 전하의 전교는 비록 깊은 염려가 담긴 것이겠습니다만 노신(老臣)의 생각은 이러할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다. 비록 시절이 태평하더라도 반드시 장성한 군주를 얻어야 비로소 국가가 편안하다.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서랴. 내 병이 이와 같고 나라의 일이 이와 같은데, 또한 경 등의 말 역시 이 같으니, 알 수 없도다.” 하였다. 영부사(領府事)심열(沈悅)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홍서봉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장자가 승통하고 장손이 계속하는 것은 예로부터의 일이옵고, 비록 미령(未寧)한 병환에 계시오나 춘추가 젊으시고 원손의 나이도 이미 10세가 되었으니 어린 임금을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또한 많은 일입니다. 막중한 종통을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낙흥(洛興 김자점)의 의견은 어떠한고.”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병환의 깊으심과 국사의 어려움을 깊이 근심하시므로 종사의 대계를 위하여 이렇게 전교하시니 어찌 원대한 생각에서 나옴이 아니겠습니까. 시험적으로 여러 신하에게 물어서 재량하여 처리하시면 심히 다행할까 합니다.” 하였다. 판부사이경여가 아뢰기를, “좌상의 말이 만세토록 변하지 않는 상도입니다. 권도는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세밀히 살펴서 이치에 합당한 연후에 행할 수 있습니다. 대개 능히 상도를 지킬 수 있으면 비록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더라도 혹 지탱할 수 있습니다. 혹 경솔히 권도를 써서 일이 그 차서를 잃고 보면 화난이 일어날 것입니다. 옛날 제왕이 신중히 하였던 것은 이 까닭이오니 전하께서 자세히 옛글을 보시어 깊이 득실을 상고하여 생각해서 신중히 처리하시면 어찌 종사에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원손이 인망이 있은 지 이미 오래인데 일조에 바꾸게 된다면 떳떳함을 어기고 차서를 잃게 되니, 이것이 곤란합니다. 말이 한 번 나가면 반드시 인심이 물결처럼 일렁거릴 것이니 깊이 걱정되옵니다. 따라서 저사(儲嗣)를 바꾸는 일은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하는구나. 그러면 세조께서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지 않고 예종에게 위를 전했으나 그 당시에 이의가 없었던 것은 그 당시의 사람이 모두 어질지 못했기 때문이냐. 무릇 대신은 나라와 더불어 즐거움과 걱정을 같이 하고 그 밖의 일은 헤아리지 않는 법이니 대신은 마땅히 이같이 해야만 될 것이다. 또 이른바 인심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고 했는데 어찌그럴 수 있겠느냐. 마땅히 행해야 할 시기에 권도를 행한다면 이 역시 인심을 진정시키는 계책이다. 어찌하여 인심이 물결처럼 일렁거릴 것을 걱정하랴.” 하였다. 서봉(瑞鳳)이 아뢰기를, “일에 상도와 권도가 있는데 권도는 상시 쓰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전하에게 그 상도를 지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였다.
○ 임금이 이르기를, “이 일은 영상이 결정할 일이다. 대신이 비록 많으나 누가 이 책임을 담당하려 하겠느냐. 감히 남에게 미루지 말라.” 하였다. 유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수상이오나 어찌 감히 홀로 결단하겠습니까. 계해년에 전하를 받들어 난리를 평정하고 반정했으며 또 산성(山城)에서 계교를 정하고 꾀를 결단함이 모두 종사를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의 계획도 역시 종사의 존망에 관계된 것인데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다만 존망이 여기에 결정되는 줄을 알지 못하므로 이같이 우러러 진언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이르기를, “옛날에는 대신이 국사를 담당하면서 뒷날의 걱정을 생각지 않았다. 태종조 때 만일 양녕(讓寧)의 일로써 백관이 정청하는 것을 그때 태종이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큰 화가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또 허락한 것은 국가를 중히 여겼으므로 자기 몸을 돌아다보지 않은 것이로다.”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덕종은 정축년에 승하하고 예종이 무자년에 왕통을 이었었는데, 세자를 책봉한 일은 비록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성묘(成廟)의 나이가 이미 10세이고 월산(月山)도 차츰 자랐는데, 세조의 처리하신 것이 이와 같았사오니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월산의 인사는 분명하지 않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덕종이 승하할 때는 성묘가 심히 어렸고, 예종이 즉위하던 처음에는 성묘의 나이 이미 12세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과연 경의 말과 같다면 월산을 당연히 세워야 할 것이나, 일은 혹 때를 따라 변통하는 것이어서 감히 교주고슬로만 할 것이 아니로다. 만일 떳떳한 도리로 말한다면 세조가 어찌 예종에게 전위할 수 있으며 예종이 또한 어찌 성묘에게 전위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이는 비록 어진 이를 가리고자 해서이지만, 그때 국사가 간난함에 이르지 않았었는데 어찌 반드시 이같이 하였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세조께서 중흥하셨으니 새로 만든 나라와 같다.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고, 성묘의 어짐이 예종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다. 오늘의 일은 경 등의 뜻과 서로 합치할 줄 알았는데, 이제 경 등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매우 한심하도다. 예로부터 제왕이 종사를 위해 극진한 정성을 쓰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한 무제는 부인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어찌 심히 잔인하지 아니한가. 내 병이 전에는 깊지 않더니 금년에는 거의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데 시사(時事)가 이에 이르렀으니 모름지기 대계를 정해야겠노라.” 하였다. 김류가 또, “대신들이 어찌 감히 홀로 결단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육경들은 또한 각각 뜻을 말하라.” 하니, 공조 판서이시백이 아뢰기를, “국가의 대계를 신이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전하의 뜻도 반드시 종사의 대계를 위하신 것이고, 대신이 아뢰는 바도 역시 종사의 대계를 위한 것이오니 오직 전하의 재결 여하에 있습니다.” 하였다. 찬성이덕형이 아뢰기를, “좌상의 말이 옳으니 다시 더 아뢸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구인후가 아뢰기를, “소신이 무슨 지식이 있어서 감히 대사를 의논하리까. 이는 전하와 대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판윤윤휘(尹徽)도 아뢰기를, “신은 아는 바도 없이 외람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사오니 어찌 감히 국가의 대사를 의논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스스로 결단하기에 달려 있사옵거늘 어찌 소신의 말을 기다리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공조 판서도 말하라.” 하니, 시백이 대답하기를, “홍(洪) · 이(李) 두 대신은 모두 상도로써 말했는데 신의 의견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이경석은 아뢰기를, “나라에 장성한 임금이 있는 것이 사직의 복이라 할 것이오나, 아들을 바꾸어 세우지 말라는 것도 이 또한 옛사람의 교훈입니다. 상도의 밖에 어찌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국가의 안위를 능히 밝게 알아 거북으로 점치는 것처럼 환하다면 전하의 사려가 진실로 깊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 그렇지 않으면서 이처럼 상도와 다른 일을 한다면 반드시 의혹이 생길 것이오니 이해의 단서를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이식은 아뢰기를, “신이 유신(儒臣)의 반열에 참여하였사오니 만일 옛일을 물으시면 신이 진실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권변(權變)의 도에 이르러서는 신이 어찌 감히 찬성하겠습니까. 대신들에게 물으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유신들은 무엇 때문에 글을 읽었는가. 대사에 임해서 결단할 줄을 알지 못하면 글을 읽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이식이 또 아뢰기를, “만일 상도를 지켜서 종사가 위태하고 상도를 지키지 않아서 종사가 편안할 것 같으면 오늘날의 일도 혹 옳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일 반드시 그렇지 않다면 상도를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좌참찬김수현(金壽賢)은 아뢰기를, “소신은 나이 80이 넘고 또 지식이 없사온데 어찌 능히 경솔하게 대사를 의논하리까.” 하였고, 우참찬김육은 아뢰기를, “신이 오래 입시하지 않았다가 이제 성상의 얼굴을 뵈오니 기후가 자못 회복된 것 같사온데 중대한 일을 하필 급급하게 하시나이까. 오직 전하와 대신들이 서로 침착하게 의논하여 정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정태화는 아뢰기를, “소신의 뜻도 역시 김육(金堉)과 서로 같사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양사 장관도 또한 말하라.” 하니, 부제학이목(李楘)이 아뢰기를, “제왕가의 일이란 극히 중하고도 큰것이옵니다. 상고 시절 순후한 때에도 계사(繼嗣)하는 것이 중대하므로 성스러운 제왕이나 밝은 임금이라도 근신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이 혼란한 세상에 상도를 변역하오면 인심이 반드시 의혹될 것이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여 분명하지 않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관이 쓰고 있으니 모름지기 큰 소리로 말하라.” 하였다. 이목이 대답하기를, “종사의 대계는 마땅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정할 일이거늘 신이 무슨 소견이 있어 감히 말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대로 말하라 하신다면 다만 경상(經常)의 도가 있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제신들이 모두 일의 처결을 대신에게 돌려보내니 대신이 정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경 등이 한갓 유자의 말만 하는구나. 내 병이 만일 혹시 불행하게 되면 경 등이 어떻게 할지 모르겠구나.” 하였다. 좌우가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자점이 아뢰기를, “막중한 일을 감히 지연할 수 없습니다. 속히 결단함이 옳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은 귀가 먹어서 능히 여러 신하들의 말을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만 뜻밖에 전하의 하교가 이에 미치시니 졸지에 당한 일을 또한 어찌 능히 졸지에 정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러면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전하의 뜻이 종사의 대계에서 나오시고, 궁중의 일은 외인의 알 바가 아니니, 이는 오직 전하의 참작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의 뜻도 나와 같도다.” 하였다. 이는 대군이 둘이 있는데 모두 어둡고 용렬하나 장성한 이가 어린 대군보다 조금 나으므로 한 말이었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양녕대군은 덕을 잃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많았으므로, 중외에서 실망하여 심지어는 조신들이 정청(廷請)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원손은 덕을 잃은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놀라고 의혹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원손의 사부가 또한 이 자리에 있으니 감히 원손의 기질이 어떠한지를 알 것이다.” 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원손은 기질이 영특하고 비범합니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원손이 비록 어리시나 덕을 잃은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명백히 전교하시면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즉시 결정짓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원손의 인사(人事)는 본래 뜻을 밝힌 적이 없을 뿐더러 결코 큰일을 담당할 자가 아닌데 경 등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는 경 등의 말이 곧지 못한 것이로다. 속언에 이르기를, ‘어린아이는 세 번 변한다.’ 하였으니, 어찌 감히 어릴 때 한 일로써 그 나이 자라서 할 일을 알겠는가. 낙흥(洛興)은 그 말을 다 하라.” 하였다. 자점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필연 깊은 생각과 앞일을 염려하심이 있으시므로 이같이 하셨는데, 막중한 일을 머뭇거리며 미루기만 할 것이 아니오라 다시 여러 신하에게 각각 제 소견을 말하게 하여 속히 결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홍서봉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바는 경상(經常)의 법도이온데, 권도로 마땅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전하의 뜻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경상의 도로 말하자면 신민의 바라는 바가 이미 있사온데 전하의 물으심이 이 같으시니, 이것은 일의 상도가 아니옵니다. 신이 어찌 감히 경솔히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반드시 이렇게 한 뒤에라야 종사가 편안하고 국가가 보존된다면 일시의 권도도 또한 어찌 감히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원손을 슬하에 두고 보신 지 이미 오래시니, 그 어질고 불초함은 이미 밝게 헤아리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과연 일을 맡길 수 없으시면, 전하께서 마땅히 침착하게 물으시고 실정을 의논하여, 대소 신하들과 중외의 서민들에게 종사를 위하시는 전하의 지극한 계획을 밝게 알린 후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 듯합니다. 지금 전하의 전교는 원손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은 말씀하시지 않고, 어리다는 것으로만 말씀하십니다. 예로부터 어린 나이에 계사(繼嗣)하여 덕을 이루고 나라를 보존한 이가 역시 하나 둘이 아닌데, 어찌 나이가 어리다는 것만으로써 경솔하게 처리한단 말입니까. 여러 신하들이 모두 세적(世嫡)이 당연히 왕위를 이을 줄 알고 촉망한 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뵙는 자리에서 전교가 이 같으시니 상도 이외에 다시 무슨 말로 대답하리까. 전하의 이 처사가 만일 혹시라도 사사로이 사랑하시는 데 기인하거나, 참소로 인해서 나오는 것이라면, 신이 비록 쇠약하고 용렬하오나 또한 대신의 뒷자리에 참여했으므로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오리까. 전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어지신 마음으로 일호도 사사로운 뜻이 없고, 다만 종사와 생민을 위한 큰 계책으로 상도를 어기고 권도를 행하시는 것이라면, 옛날에도 역시 이런 일이 있었으니, 이는 신이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굳이 간쟁할 것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덕형(德泂)이 아뢰기를, “역대로 세자를 바꾸는 즈음에 목숨을 걸고 간쟁한 일이 많사온데, 신하로써 이 일에 대하여 어찌 경솔하게 순종하겠습니까. 생각건대 오늘 일은 전하의 부득이하신 데서 나온 것이니, 또한 어찌 일호의 애증인들 그 사이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전하와 대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면 대신들의 뜻은 정해졌는가. 내게 두 아들이 있는데 반드시 그 중에 낫고 못함이 있을 것이다. 누가 낫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는 신 등이 감히 정할 바 아니오나 덕이 같으면 연치 차례로 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도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서봉이 대답하기를, “대군이 사대부와 더불어 서로 면접한 일이 없사오니 어찌 그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아들을 아는 데에 아버지만한 이가 없다.’ 하였사오니, 이는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이 옳도다. 이 일은 반드시 이같이 급속하게 할 것이 아니지만 청 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세자를 물을 것이므로 오늘 이런 일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명백히 여러 신하에게 전교한 연후에 물러나가게 함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봉림대군으로 세자를 삼는다.” 하였다. 《병술록(丙戌錄)》
(9) ▣ 연려실기술 제37권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임오년 알성과 때의 최세일의 옥사 ▣
○ 대사간윤덕준(尹德駿)이 올린 소의 대략에, “최석정의 세 번 올린 차자의 말뜻은 진실로 하나하나 이치에 합당한 줄은 신이 알지 못하오나, 그 이른바, 요망한 무당과 역적 종년을 친히 힐문하는 것이 임금의 체통이 아니라 한 것이 실로 충성스럽게 전하를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개 국가의 형살은 맡은 관원이 있는 것이며, 역적의 옥사같은 것은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대신과 사헌부에서맡아보게 하여 그 잘못하는 것만 다스릴 뿐이오니, 하필 전하께서 친히 국문하셔야 쾌하게 다스려집니까. 신묘년 김자점의 옥사 때, 효종이 자점에게 낙형(烙刑)을 하려 하니 그때에 대신들이 즉석에서 말씀드려 임금이 친히 볼 것이 못 된다 하니, 효종이 안색이 변하여 안으로 들어가셨다 합니다. 신이 들은 바, 옛일이 이러하오니 친히 국문하시는 것이 반드시 의리에 합당한지 모르겠사옵니다. 강세귀(姜世龜)의 상소문에 조심성 없이 말한 것은 전하의 말씀과 같으니 비답할 것이 못 되면 도로 돌려주면 족한데 먼 곳으로 귀양보내니, 아마도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이 70세가 지났고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 사는 사람이 무슨 이해 관계가 있다고 스스로 음험하게 전하를 공갈하려는 계책을 꾸미겠습니까. 아아, 역적에 대한 전하의 법은 이미 시행되었으니, 지금 국가의 제일 급무는 오직 세자를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이른바, 보호한다는 것은 침식(寢食)이 편한 것뿐만 아니라, 그 심정을 위로하여 쌓인 것이 없도록 함입니다. 전날 재상(宰相)의 상소에, ‘세자가 마땅히 장희빈의 초상에 나가서 곡을 하여야 하며, 혹 이를 못하면 당연히 세자궁 관원을 보내 호상(護喪)하여야 한다.’고 한 것을 예조에서 일체 못하게 하니, 전하께서 비록 장씨는 법으로 처단하였사오나 오히려 그 마지막 가는 길을 생각해서 그가 세자를 낳아서 기른 공을 갚아야 할 것이오며, 세자에 있어서는 낳아준 은혜를 절로 끊을 수 없습니다. 선왕 대에 있어서 사부(師傅)의 초상에도 세자가 친히 가서 문상하며, 또 세자궁 관원들은 글을 가르치는 직책이나 사부와 세자 빈객(賓客)의 초상에 모두 세자궁 관원들이 세자의 영을 받고 가서 조상하는 법인데, 낳아준 은혜가 사ㆍ부ㆍ빈객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대의(大義)가 궁하므로 세자가 비록 그 정리대로 다할 수 없다 하오나 마땅히 이후에 있을 장례 때에는 세자궁 관원을 보내어 조금이나마 동궁의 정리를 펴게 하소서. 희재를 살려주고 업동을 가볍게 다스린 것은 그때 대신들이 일을 그르친 책임을 실제로 면치 못하나 그 심사는 단연코 다른 의도가 없다는 전날 전하의 하교(下敎)가 실로 의리에 밝은 성인(聖人)의 말씀이옵니다. 영돈녕윤지완이 당초 남구만에게 보낸 편지 사연은 실상은 도리를 어긴 것이오나 이것이 개인 편지라면 그것을 드러내어 죄줄 것이 아니오며, 끝판에 윤지완이 스스로 소를 올려 그 편지 내용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잘못되었다고 허물하였을 뿐입니다. 또 대신은 보통 관원과 달라 일마다 견책(譴責)을 하여 조정 체모를 상하게 할 수 없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계에 함부로 헐뜯고 욕하고 조금만 의견이 틀리면 곧바로 배척하고 자기들과 의견이 합치되기만을 바라서 도리어 자질구레하게 되니, 온 나라의 공론이 과연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민언량은 희재와 결탁하여 전하의 교지를 속였는데도 천지간에 목숨을 연장한 지가 10여 년이 되었다가 이제 와서 형벌을 받으니 실상 하늘이 토죄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이미 실성하였고 또 사실 아닌 허망한 내용이 많습니다. 오시복과 권중경을 오히려 죄가 불확실하다고 가벼운 법률을 썼는데, 오도일은 실상 관계도 없는 자인데도 남에게 오랫동안 미움을 받은 소치로 망측한 죄에 같이 몰아넣고, 언량이 죽기 전에 밝혀내지도 않고 오늘날 귀양보내기를 청한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하니, 비답에, “소의 말이 하나하나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거니와, 하필 친히 국문하느냐는 말은 극히 놀랍고 괴이하다.” 하였다.
(10) ▣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
사헌부에서는 아뢰기를, “금(金)의 차사가 말한 바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니 지방의 장수들이 마땅히 엄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해야 할 것인데도 의주 부윤이준(李浚)의 말은 조금 그럴듯하였으나, 평안 병사이항(李沆)은 감히 두세 오랑캐 차사가 승인할 만한 말을 입밖에 내어 규례에 따라서 결정할 것처럼 말하였으니, 비록 무부(武夫)의 무식한 소치이나 강상(綱常)의 대의로 따져본다면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하소서. 도원수김자점(金自點)은 명령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변방 일에 유의하여 반드시 평소 정한 규모와 계획이 많을 것인데, 크고 작은 계책을 멀리 서울에서 통제하기 결코 어려울 것입니다. 급속히 전진하여 군무를 점검하고 신칙하여, 밤낮으로 변에 대비하도록 명하여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 3월에 금(金)의 차사가 장단(長湍)을 지나자 박노를 보내 타이르고 예물 단자를 주게 하니, 받지 않고 가버렸다.
○ 군무(軍務)에 관한 임금의 전지를 서도로 내려보냈는데, 오랑캐의 차사 등이 빼앗아갔다.
○ 도원수김자점, 종사관정뇌경(鄭雷卿), 별장안영남(安頴男)이 서도로 내려갔다. 《일월록》《조야기문》
○ 김자점(金自點)이 피곤한 백성을 몰아쳐 정방성(正方城)을 쌓는데, 또 형벌과 매질로써 위엄을 세워 인심을 점점 더 잃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올 겨울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어떤 사람이 혹, “적이 온다.”고 하면 바로 성을 내었다. 동방(冬防)이 이미 지났는데도 성을 지킬 군졸을 하나도 더 첨가하여 방비하지 않고, 의주 건너편에 있는 용골산(龍骨山)부터 봉화불을두어, 원수(元帥)가 있는 정방성에서 그치게 하였으니, 대개 이는 봉화가 만일 도성에 이르면 소란스러워질까 염려해서였다. 12월 6일 이후에 연이어 두 번 봉화를 들었는데, 자점은 말하기를, “이것은 박노가 들어가서 오랑캐가 반드시 나와 환영하는 것이다. 어찌 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치계(馳啓)하지 않다가 9일에서야 비로소 군관 신용(申榕)을 보내 의주에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신용이 순안(順安)에 이르니 적의 기병이 이미 가득 차 있자, 곧장 돌아와 감사홍명구(洪命耈)에게 고하니, 명구가 크게 놀라 단기(單騎)로 자모산성에 달려 들어갔다. 신용이 돌아와 자점에게 보고하니, 자점이 말하기를, “망녕된 말로 군정(軍情)을 어지럽힌다.” 하고, 목을 베려고 하자, 신용이 말하기를, “적이 내일에는 마땅히 여기에 당도할 터이니 우선 나를 죽이지 마시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나중에 보냈던 군관이 또 와서 급함을 보고하는데 신용이 말한 바와 같으니, 비로소 장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은 강을 건너서 성진(城鎭)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올라오면서 화친을 맺으려 한다고 칭하며, 바람같이 달려와, 변방을 지키던 신하들이 올리는 장계를 적이 모두 탈취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변방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병자록》
○ (☞12월) 12일에 의주 부윤임경업(林慶業)의 장계가 들어왔는데, 9일에 압록강 건너편에 적병이 가득찼더니, 이날 저녁에 적병이 길을 나눠서 강을 건너 길을 배로 하여 급히 나아간다고 하였다.
○ 오후에 도원수김자점의 장계가 또 도착하니,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았지만, 또한 이렇게 빠른 것은 알지 못하였다. 《병자록》《난리잡기(亂離雜記)》
○ 10일에 두 원수(元帥)김자점(金自點)ㆍ심기원(沈器遠)과 부원수신경원(申景瑗)과 강원 감사조정호(趙廷虎) 등이 대궐에 나아가 대죄하니 모두 잡아 가두었다. 12일에 명하여 자점 등의 죄를 논하였는데, 모두 마땅히 군율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13일에 명하여 자점을 귀양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중도부처하라고 명하였다.
(11) ▣ 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목성선(睦性善)의 소(疏) 을축년 ▣
세자빈을 간택할 때 윤의립의 딸이 간택 대상 중에 들어 있었다. 임금의 뜻은 윤(尹)에게 있었으나 공신들이 윤이 자기 당파가 아니라 하여 꺼려서 사간(司諫)이상급(李尙伋)으로 하여금 경연에서, 윤씨는 역적의 족속으로 국혼에 합당치 아니함을 논하게 하였다. 대개 의립의 형인 경립(敬立)의 서자가 이괄을 따라 반란하였다가 죽었고 의립도 연좌를 겨우 면했기 때문이다. 김자점ㆍ심명세 등이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다. 명세가 아뢰기를, “동궁의 배필은 마땅히 좋은 가문에서 택하여야 하므로 악한 죄를 범한 자는 그 간택의 대상에 섞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양사도 이에 호응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국혼을 정지하도록 하고 자점을 성문 밖으로 쫓아내고, 명세는 충주로 귀양보내었으며 상급 역시 파면시켰다. 왕자 인성군 공(珙)은 역적의 공초에 이름이 나왔으므로 조정에서 법대로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을축년에 검열(檢閱)목성선(睦性善)과 정자(正字)유석(柳碩)이 구언(求言)하는 전교에 따라 소를 올리기를, “조정에서 인성을 죽이기를 청한 것은 임금을 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공신이 윤씨와의 혼인을 파하기를 청한 것은 공정한 마음에서가 아닙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칭찬하는 답을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는 사람들이 분히 여겨, 성선 등이 서인을 공격하여 물리치고자 한다 하여, 이식(李植)ㆍ이명한(李明漢)ㆍ이경석(李景奭)ㆍ박황(朴潢)은 소를 올려 비난하였고, 대사간이성구(李聖求)는 성선의 소를 불사르기를 청하여 서인에게 아첨하고자 하였으며 부제학김상헌(金尙憲)은 말하기를, “성선 등은 역적 족속의 딸로써 국모를 삼고자 하며, 또 여러 역적이 추대하려는 왕자에게 붙어서 시대가 평화로우면 외척(여기서는 윤의립을 말한다)의 도움을 받으려 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인성군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말한다) 인성군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의 보답으로 공을 받으려 한다.” 하였다. 그의 말이 심히 각박하였으므로 임금이 그를 체직시켰다. 삼사에서 여러 날 유석 등을 논죄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백창(鄭百昌)이 술 좌석에서 이민구에게 말하기를, “너의 집 세 부자 중에 만약 한 사람이라도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자가 있었다면 목(睦)의 소를 불사르기를 청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였더니, 민구가 안색이 변하여 일어섰다. 그 다음해에 임금이 자점과 명세를 석방하고 성선을 발탁하여 정언(正言)으로 삼자, 대간이 논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성선이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몇 달이 안 되어 또 성선을 발탁하여 헌납(獻納)으로 임명하니 대간이 또 논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성선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하담록》
(12) ▣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 ▣
○ 도원수김자점(金自點)이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동선령(洞仙嶺)에 군사를 내보내 적병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 청 나라 임금이 대병(大兵)을 이끌고 온 뒤로는 감히 적을 죽일 뜻을 내지 못하고, 황해 감사이배원(李培元))과 병사 이석달(李碩達)에게 군사 5천 명과 어영 포수 수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느린 걸음으로 토산(ꟙ山)에 도착하였다. 토산에서는 척후도없이 일찍 길을 떠났다. 적병 6천여 명이 갑자기 닥쳐와 군사가 모두 섬멸되었다. 자점은 혼자 말을 달려 본읍 주산(主山)으로 올라가고 종사관 정태화(鄭太和)는 창황히 관아 속으로 들어가고, 강음 현감(江陰縣監)변사기(邊士紀)는 여염집에 들어가서 속수무책으로 결박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영 포수가 일시에 총을 쏘므로 적이 여러 차례 패하여 살아남은 자가 수천에 지나지 않으니 해가 질 무렵에 퇴진하였다. 이튿날은 서로 버티다가 끝내 다시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으니, 이것이 어영군의 힘이었다. 후일에 조정에서 정태화와 변사기를 담략이 있다 하여 드디어 크게 등용하였다. 재령 군수(載寧郡守)최택선(崔擇善)은 적에게 잡혀서 살해당했다. 자점은 다만 어영군을 거느리고 미원(彌原)에 도착하여 새 원수 심기원(沈器遠)과 각도 감병(監兵)과 더불어 20여 일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다가 임금이 출성(出城)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전진하였으므로, 기원은 나주(羅州)에 귀양보냈다가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옮겼고 오래지 않아 석방하였으며, 자점은 진도(珍島)에 안치(安置)하였다가 곧바로 중도(中道)에 옮기고 기묘년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양사(兩司)가 여러 달을 논란하여 고집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3) ▣ 연려실기술 제27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심기원(沈器遠)의 옥사 ▣
○ 기원이 극형을 받을 때 김자점이때 □상(□相)이 되었다. 이 감형도사(監刑都事)를 불러 말하기를, “역적을 형벌할 때에 먼저 머리를 베고 그 다음에 팔과 다리를 베는 것이 전례이지만, 이 역적은 전례를 따라 벌을 행할 것이 아니라, 먼저 팔을 베고 다음으로 다리를 벤 뒤에 나중에 머리를 베라.” 하였다. 그러자 이시백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역적에게 형벌을 행하는 절차는 조종조(祖宗朝)의옛법이 있는데, 새법을 만들어 이렇게 하는 이가 어찌 고종명(바르게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자점의 아들이 시백의 사위였는데도 시백의 말이 이와 같았다. 《공사견문》
○ 임경업(林慶業)이 공초에 연루되어 잡히자, 위관(委官)김자점이 사사 감정으로 죽였다. 《조야첨재》
(14) ▣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광해군을 안치하다. 세자를 폐하고 사사하다. 붙임 ▣
○ 6월 2일에 대사헌 이귀와 지평 심기원ㆍ김자점이 아뢰기를, “폐인(廢人) 질(祬)이 구멍을 뚫고 도망쳐 나간 것은 형적을 측량하기 어려우니, 나라 사람이 함께 놀랄 일이요, 국법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죄입니다. 대비께서 말씀이 계시었고 정부의 의논이 모두 같았으니, 삼사가 합계하여 대의로 결단할 것을 청한 것은 실로 한 나라의 공통된 공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그 말을 번복하여앞뒤가 모순되게 피혐으로 떠들썩하며, 서로 잇달아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하여 이미 연계(連啓)하지도 않고 또 정계(停啓)하지도 아니 하니, 대간의 일을 의논하는 채통을 크게 잃었습니다. 청컨대 양사를 모두 바꾸소서.” 하였다.
○ 3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죄인 질(祬)을 빨리 처단하시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 이때 이귀ㆍ김자점ㆍ심기원은 폐세자를 법대로 처단하기를 청하고 윤황(尹煌)ㆍ이준(李埈)ㆍ김상(金尙)은 전은(全恩)을 주장하였더니, 그날로 이준을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윤황을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김상을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내보내었다. 7일 정사
○ 부제학 정경세(鄭經世)ㆍ부응교 이민구(李敏求)ㆍ교리 심액(沈詻)ㆍ수찬 이경여(李敬輿) 등이 상소하기를, “신등이 합사(合司)한 공론에 대해 그 처음 설을 번복할 수 없으니,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사헌 이귀ㆍ대사간 이현영(李顯英)ㆍ집의 정종명(鄭宗溟)ㆍ사간 정온ㆍ장령 이상급(李相伋)ㆍ지평 김자점ㆍ헌납 김세렴(金世濂)이 아뢰어 그 피혐하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고 공격하였다.옥당에서 차자를 올려서 양사가 출사하기를 청하고, 18일에 또 양사의 청을 쾌히 따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는 그대들에게서 이런 의논이 나올 줄 생각 못하였는데,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니 놀랍고 괴이함을 금치 못하겠다. 이러한 의논을 하지 않도록 하여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라.” 하였다
(15) ▣ 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죽음 ▣
○ 이조 참판홍서봉의 소에, “신은 3일 조반 전에 허적이 변을 알려주는 편지를 받고 이서(李曙)에게 달려가 알렸고 신경진ㆍ구굉ㆍ김자점ㆍ김류ㆍ이귀에게 그 편지를 두루 보였는데 황진(黃縉)이 뒤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이 역적이 훈련도감중군(中軍)이계선(李繼先)을 믿고 거사했다.’고 말하였는데, 그때 마침 전하께서 오랑캐의 사신을 접대하던 때여서 이의배(李義培)를 불러 신경진에게 쪽지를전하게 하였고 정오쯤에 김득성 등 네 사람이 신의 집에 있는 황진을 찾아와서 역적들이 판교(板橋)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때에는 도성에 들어올 것이므로 우리들이 몸을 빠져 먼저 왔다고 말하므로 신이 비변사에 가서 이를 여러 신하에게 알리고, 진성(振聲) 등을 시켜 승정원에 고변하게 하였으며 또 이서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신서회ㆍ이두견을 데리고 남대문ㆍ수구문(水口門)에 매복하여 여러 역적을 잡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16) ▣ 연려실기술 제30권 효종조 고사본말(孝宗朝故事本末) 청 나라 사신이 사문(査問)하다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이경석을 위리안치하다. ▣
경인년(1650) 2월에 청 나라 군사가 관외에 주둔하고 연달아 칙사 6명을 내보내니, 8일에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장계를 올렸다.
○ 이언표(李彦標)라는 자가 있어 김자점의 심복이 되어 연달아 오랑캐와 결탁하여 큰 화를 만들어 내려 하고, 자점이 또 역관(譯官)이형장(李馨長)과 결탁하여 오랑캐에게 참소하며 말하기를, “새 임금이 옛 신하를 쫓아내고 산림의 인사를 등용해서 군사를 일으켜 오랑캐를 치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청 나라 칙사 6명이 이것을 조사한다고 하니, 임금이 듣고 크게 놀라고 근심하여 밤새도록자지 못하고 여러 신하를 불러다 보고 의논하니,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먼저 대답하기를, “사문(査問)한다 하는 것은 공갈인 듯하나 청 나라 여러 대관(大官)이 함께 오는 것은 반드시 중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니, 사문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도 없으며, 문자와 접대에도 반드시 의심과 성냄이 많을 것인데, 이것 역시 신의 죄입니다.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신하로서 사사로이 외국의 사신과 교제할 수 없다는 의리를 생각하고 뇌물로 그들의 마음을 줄겁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마다 성을 내는 것입니다.” 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이 일은 말로 다투기도 어렵고, 뇌물로 해결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지금 비록 그들이 소간(所幹)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나 신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감히 직접 그것을 담당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경이 담당해서 무사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점점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므로, 경석이 아뢰기를, “일의 기미를 미리 예측할 수는 없으나 스스로 담당하여 그 끝을 보아서 국가가 이로 인하여 무사하게 되면, 미천한 한 몸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접대할 사람을 택하기 어렵습니다마는, 원두표(元斗杓)는 저희들과 일찍이 서로 틀린 일이 없었으니, 기용하여 원접사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 〈백헌연보(白軒年譜)〉합록
○ 그때 임금이 전일(광해조)에 혼탁하고 어지러운 무리들을 버리고 김상헌 등 여러 어진 사람을 신임하여 국내의 정사를 닦을 계책을 쓰니, 김자점이 그의 도당을 시켜 청 나라 사람에게 밀고하고, 또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내었는데, 그것은 지문에 청국 연호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인들이 크게 의심하여 군사로써 국경을 위압하고, 사신 두어 패가 와서 그 일의 허실을 물으려고 하였다. 임금이즉위한 처음에 양사에서 벌써 자점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었는데, 오랑캐 사신이 온 것을 듣고는 대소 관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다투어 자점을 위안하며 화를 늦추기를 바라고자 하였으나, 이후원(李厚源)은 간신(諫臣)조석윤(趙錫胤)과 집의 이홍연(李弘淵) 등과 함께 불가하다고 다투니, 임금이 드디어 자점을 부처(付處)하기를 명하고, 그 두 아들도 함께 밖으로 내쳤다. 조정에서 지문(誌文)에 대하여 강론할 때에 여럿이 말하기를, “마땅히 별본을 급히 만들어 그 연호를 새겨서 보이라.”고 하니, 후원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비밀히 하고자 하면 더욱 드러나니, 별본을 새기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종전부터 지문에 연호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저 사람들의 거조는 언제나 경솔하게 하지 않는데, 만약 힐문한다면 이것은 장차 참으로 전쟁의 실마리를 일으키는 것이니, 어찌 우리의 변명으로써 중지될 것입니까.” 하였다. 혹은 전하기를, “오랑캐가 능에 묻은 지문을 보기 위하여 선릉(先陵)을 동요(動搖)하여 증험하고자 한다 하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후원이 말하기를, “일이 여기에 이르면 일국의 군신들이 죽을 각오가 있을 뿐, 다시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 하니, 여러 사람의 논의가 마침내 정하여졌는데, 청국 사신이 마침내 이 일을 제기하지 않았다. 대개 자점의 흉악한 모략이 거의 나라를 전복시킬 뻔하였으나, 임금의 침착하고 밝게 처리함을 힘입어 북쪽 사신이 다만 혼인을 맺자는 논의만 하고 돌아갔으니, 이로부터 인심이 김자점을 더욱 통분해하였으나, 그가 공이 있는 옛 신하인 까닭으로 임금이 끝내 보전하고자 하였다. 신하들이 한 달 남짓 힘써 간쟁하자 비로소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완남(李完南) 행장〉
(17) ▣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계해정사(癸亥靖社) ▣
○ 이귀가 당시 일에 강개하여 반정할 뜻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었을 때 신경진(申景禛)은 북우후(北虞候)로 있었는데, 이귀는 경진이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인 줄 알고 마음으로 서로 깊이 결탁하였다. 이귀가 체직되어 돌아온 후 신유년 4월에 아내의 상사를 당하자 경진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당시 상황에 말이 미치자, “지금 세상이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인가.” 하였다. 이귀가 희롱삼아 답하기를, “이때는 태평성대라 할 만한데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고변을 할 것이다.” 하였더니, 경진이 “내가 먼저 고변할 것이니 어쩔 것인가?” 하여 이귀가 그 뜻을 추측하고 드디어 의논을 정하였다. 이귀가 전에 벌써 심기원(沈器遠)ㆍ김자점(金自點) 등과 약속을 하였고 최명길(崔鳴吉)도 모의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최명길은 매우 두려운 마음에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이귀의 집을 찾아감에, 이귀가 안석에 기대어 계집종을 시켜 머리를 빗으며 태연히 말하고 웃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하였다. 장유가 듣고 사림(士林)의 화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귀에게 빨리 시골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이귀는 대의(大義)를 들어 그를 꾸짖었다. 《연평일기(延平日記)》 행장 합록
○ 이귀가 이름 있는 선비인 김자점ㆍ심기원과 무장(武將) 신경진ㆍ구굉 등과 함께 김여물(金汝岉)의 아들 김류와 협의하였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가 시의(時宜)에 부합하지 못한 채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이때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경진의 아버지 신립(申砬)과 김류의 아버지 여물(汝岉)이 임진왜란 때에 충주에서 함께 전사한 인연으로 평소 정의가 두터웠으므로 경진을시켜 뜻을 통하게 하였더니 김류가 이를 허락하였다. 《일월록》
김류는 천성이 비범하고 기국이 엄숙하고 단정하며 또한 문장을 잘하고 지략이 있었다. 일찍이 대궐 뜰에서 책문 시험을 볼 때에 병무(兵務)에 대해 매우 잘 논했으므로 사람들이 장상의 재목이 된다고 여겼는데, 이 때문에 광해주 때에도 자주 원수(元帥)의 물망에 올랐다. 계해년 정사(靖社)에 모든 사람이 추대하여 영수(領袖)로 삼은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금이 반정하기 전에세 번 그 집에 찾아가서 큰일을 도모하였다. 《남계집(南溪集)》
○ 이귀가 심기원을 청하여 평산에 함께 있으면서 평산을 모의하는 장소로 삼는 한편 최명길과 김자겸은 서울에 머물러 모든 일을 주선하였다. 또한 도원수(都元帥)한준겸(韓浚謙)을 찾아가 가만히 그 뜻을 통하였고, 또 감사 이명(李溟)과 함께 국란을 구할 뜻을 약속하였다. 《연평일기(延平日記)》
○ 임술년 겨울에 양사가 합하여 이귀와 김자점이 서궁을 도와 보호하려 하였다고 아뢰었다. 이날 밤에 남이공(南以恭)이 유희분의 집에서 이정귀(李廷龜)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화가 곧 일어날 것이니 빨리 주선하시오.” 하였다. 이정귀가 즉시 희분을 만나 이귀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극력 말하니 희분이 마음을 움직여 일이 무사히 넘어갔다. 〈월사행장(月沙行狀)〉
○ 대사간 유대건(兪大建)이 또한 자점의 외숙이었으므로 탄핵을 받았다. 이에 광해는 대북(大北)이 중북(中北)을 모함하여 넣으려는 계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하여, “풍문을 듣고 옥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그만두고 죄를 묻지 않았다. 《연평일기》
○ 계해년 1월에 정언 한유상(韓惟翔) 등이 아뢰기를, “이귀와 김자점이 오랫동안 음모를 꾸미며 서궁을 돕고 보호하였으니 화가 멀지 않아 일어날 것입니다. 청컨대, 미리 도모하소서.” 하였다. 이때 광해는 마침 김상궁(金尙宮)과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어 놀고 있었는데 김상궁이 광해의 손을 잡고 크게 소리지르며 말하기를, “바깥 의논이 가소롭습니다. 성지(成之)자점의 자 김생원이 어찌 이러한뜻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광해가 “천천히 처결하겠다.” 하니 유상 등이 또 아뢰기를, “크게 간(奸)한 것은 신(信)과 비슷하고 충성된 말은 귀에 거슬립니다. 훗날 설사 후회할 일이 있어도 신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 마소서.” 하니 광해가 이르기를, “증거 없는 말로 충성되고 어진 이를 억울하게 해치지 말라.” 하였다. 이로써 흉악한 무리들의 계교는 행해지지 못하였고 반정의 모의는 날로 굳어졌다. 《조야첨재》
○ 이보다 먼저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동생 자겸(自兼)의 아내였는데, 일찍이 과부가 된 후에 정조를 잃고 절간으로 떠돌아다니며 아미타불을 섬겼는데, 일설에는 자겸이 젊어서 좋아하여 죽을 때에 아내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삼가 불도를 닦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씨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에 들어가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간음한 일이 발각되어 잡히어 심문을 당하게 되니 궁중에들어가기를 원하므로 광해가 허락하였다. 일설에서 광해가 풀어주고 성중(城中) 자수궁(慈壽宮)에 있게 하였는데 이씨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生佛)이라 일컬어 신봉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한다. 궁중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김상궁과 사귀어 모녀 간을 맺게 되었다. 항상 말하기를, “아버지 이귀와 시숙 자점의 충성을 불행하게도 대북(大北)이 질시하여 항상 모해를 받는다……” 하였다. 나날이 억울한 것을 호소하고 또 자점을 후원하여 뇌물을 쓰는데 부족하면 김상궁에게서 꾸어서 다른 궁인에게 주고 또 다른 궁인에게 꾸어서 상궁에게 바치니, 이렇게 돌린 것이 수천 냥이므로 모든 궁인들이 기뻐하여 모두 자점을 성지(成之)라 자를 부르며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광해가 유상(惟翔) 등이 아뢰는 말을 듣고 매양 잡아 신문하고 싶어도, 상궁과 개똥이[介屎] 등이 말하기를, “성지는 지극히 충성스런 사람이며, 더구나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다른 모의를 할 것입니까.” 하니 광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잡록(續雜錄)》 ○ 일설이란 것은 《일월록(日月錄)》에 있는 것이다.
○ 이귀의 딸이 정조를 잃은 일로 사간원에서 삼성 추국(三省推鞫)하기를 청하고 이귀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 김자점이 뇌물을 주어서 김상궁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므로 김상궁은 그 억울하다는 것을 힘써 변명하였다. 그 때문에 광해가 대간의 탄핵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탄핵이 정지되자, 이귀가 상소를 하여 대간과 조정에서 대질하여 무고죄를 밝히기를 청하였으나 광해가 또한 그만두었다. 《하담록》
○ 이후원(李厚源)이 이이분(李以攽)에게 함께 가기를 청하였는데 이분은 유홍(惟弘)의 아들이다. 유홍이 강계에서 귀양살이 할 적에 부사로 있던 김류와 서로 친했던 까닭이었다. 이분이 거사가 성사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숙부 유성(惟聖)에게 말하였더니, 유성은 김신국(金藎國)에게 말하고, 신국은 박승종에게 말을 하였다. 승종이 크게 놀라 이분으로 하여금 대궐에 들어가 고변케 하기를, “김류ㆍ이귀등이 방금 군사를 홍제원에 모아 오늘 밤에 대궐을 침범할 것인데 훈련대장 이흥립이 안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들어가 아뢰니 대신과 금부 당상들이 대궐 앞에 모였다. 이날 김자점은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하여 김상궁에게 보내었더니, 광해는 궁인과 함께 한참 놀고 즐기는 판에 고변하는 글이 올라왔으므로 그냥 버려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이윽고 해가 저물어 대궐 문을 닫으므로 승종 등이 부득이 의금부 당상관과 낭관과 함께 대궐문 밖 비변사로 물러나 기다리고 있었다. 《하담록》
○ 밤이 되자, 이괄이 군관 20여 명을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먼저 갔는데 고요하기만 하고 사람의 형적이 없었다. 근심하고 낭패할 즈음에 홀연히 한 점의 불빛이 서북 산 아래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기다리니,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송영중(宋英重)ㆍ한교(韓嶠) 등이 각각 모집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조금 뒤에 장유(張維)가 와서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고변을 하여 벌써 국청을 개설하고 사방으로 나가 체포하는데,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확(李廓)이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을 나왔다.”고 하였다. 이때 미리 약속하였던 모든 군사가 태반도 오지 않았고 장단(長湍)의 군사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다만 대오(隊伍)도 되지 않던 수백 명 오합지졸만이 이 소식을 듣고는 겁을 내고 무너져 흩어지려 할 판이었다. 이귀가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다 입을 대고 말하기를, “대장 김류가 오지 않고 일이 이미 이쯤 되었으니, 반드시 그대가 대장이 되어야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나도 평일에 본래 군사 일에 등한하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힘을 얻기 어렵소.” 하였다. 드디어 이괄을 추천하여 대장으로 삼고 말하기를, “나(이귀 자신)부터 누구든지 규율을 어기면 목을 베시오.” 하고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줄지어 이괄에게 전하게 하니 이괄이 기꺼이 따랐다. 곧이어 군관들을 불러 써두었던 의(義) 자 수백 조각을 꺼내어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니, 모두 옷 뒤에 달아 표적을 삼았다. 이시백(李時白)이 말하기를, “군에 계통이 서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빨리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괄이 곧 그 말대로 하여 엄하게 부서를 단속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 《연평일기》
○ 처음에 이시방(李時昉)이 빨리 서궁에 문안갈 것을 청하니, 인조가 김자점에게 함께 가기를 명하고 경운궁으로 달려갔다. 분병조 참판(分兵曹參判) 유순익(柳舜翼)이 나와 맞이하였는데, 이는 그 전날에 대비를 받들기 위하여 입직시킨 사람이었다. 곧 승전내시(承傳內侍)를 불러서 반정한 사실을 아뢰니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 깊이 갇히어 있어도 와서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밤중에 승지와 사관도 없이 이렇게 직접 아뢰느냐? 공주는 이미 죽어서 담 밑에 묻혀 있다.” 하였는데 이는 대비가 전일에 영창대군의 일처럼 또 공주를 뺏으러 온 것인가 의심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에 자점 등이 승지 민확(閔雘)을 불러 아뢰게 하였으나, 끝내 답을 내리지 않으므로 곧 이러한 사실을 인조에게 아뢰니, 인조가 다시 이귀에게 명하여 가게 하였다. 〈연평행장〉
○ 윤10월 김류 등 54명의 공을 녹(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라 칭하였다. 1등 낙흥군(洛興君) 김자점(金自點)ㆍ청원군(靑原君)심기원(沈器遠)과 2등 □□군 심기성(沈器成)ㆍ철성군(鐵城君)이괄(李适)ㆍ□□군 이수(李邃)와 3등 □□군 김련(金鍊)자점의 아들 등은 뒤에 모두 역적을 도모하여 훈(勳)이 깎이었다. 지평 김원량(金元亮)은 처음에 3등으로 기록되었다가 갑자년에 억울하게 죽었는데,후에 호조 판서 월성군(月城君)을 증직하고 다시 3등에 녹하였다. 1등 광천군(廣川君)이흥립(李興立)과 2등 순원군(順原君) 박효립(朴孝立)도 모두 깎이었다. 지금 훈적(勳籍)에는 47명이 있다.
(18) ▣ 연려실기술 제27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강빈(姜嬪)의 옥사 ▣
○ 밤에 김자점 ㆍ 구인후 ㆍ 홍진도(洪振道)를 불러들여 누누이 전교하기를, “강씨가 젊었을 때에는 별로 불순한 일이 없더니 심양에서 나온 뒤로부터 인사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가 심양에 있을 때의 행동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지난해에 나왔을 때에 제 아버지의 궤연에 가보려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더니, 그 때문에 자못 불순한 뜻이 있었다. 아주 돌아와서부터는 양양자득한 기상이 점점더하였다. 지난 가을에 여종 몇 사람이 죄로 인해 내쫓기자 나의 거처 가까이에 와서 큰 소리로 발악하고 심지어 통곡까지 하였다. 그러더니 그날 밤부터 문안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을 시켜 문안하는 것마저 전폐해 버렸다. 어버이에게 대해서 분한 마음을 품는 것이 이렇듯 해괴할 수가 있단 말이냐. 전에 심적(沈賊)이 임금을 임금으로 알지 않는 마음이 있더니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는 뜻이 생겼었다. 강(姜)이 또한 임금을 임금으로 알지 않는 마음이 이와 같다. 지금 임금을 업신여기는 뜻이 있는 것은 마음속에 믿는 데가 있고 또 그 무리들이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오늘 일로써 보면 과연 그러하도다. 심지어 그를 위해 죽으려고 한 자도 있다. 그가 심양에서 올 때에 금과 비단을 많이 가져온 것은 외정(外庭)의 여러 신하들도 모두 아는 바인데, 이것을 흩어 준다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후환을 없애기 위함인데, 여러 사람들이 그를 구호하기를 저번 영창(永昌)을 구호한 것과 같이하니 진실로 괴이한 일이로다. 훗날에 만일 변고가 있고 보면 지금 그를 구원하는 자들이 살기를 바라겠는가. 그의 죄가 그와 같은데도 옹호함이 이와 같으니 강석기의 딸은 죽일 수 없겠구나.”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전날 정사(鄭使)가 왔을 때에 세자를 돌려보내기를 청하자고 말을 꺼내니 전하께서 신을 불러 보시고 정의 동궁을 돌려보내기를 청하자는 데에 흉한 계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신이 답하기를, ‘청국이 만일 흉한 계교가 있다면 저들이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고 세자 돌려보내는 일을 칭탁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르기를, ‘청국의 모든 일은 음흉하고 비밀이 있으니 어찌 측량하리오.’ 하였습니다. 신이 심양에 갈 때에 이 일을 품하였더니 전하께서 이르기를, ‘경이 모름지기 그 실정을 자세히 살펴서 만일 흉한 계교가 아니거든, 세자를 돌려보내기를 청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거든 안면을 보지 않는 것이 옳다.’ 하셨습니다. 신이 이 명을 받은 뒤로 비로소 전날의 대답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또 소현세자가 나올 때에 일이 편하지 못한 것이 많았으며 심지어 고갯길로 말을 달리기도 하므로 신은 생각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이러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세자가 그곳에 있을 때나 혹은 나가서 사냥을 할 때에 강원(講院)에서 장계를 올리면 강씨가 반드시 들여다가 보고 가필하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했으니 어찌 부인이 바깥일을 간여함이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이제 이 한 과부가 종사에 득죄하여 죄악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다만 전하께서 처리하실 일이시지 신자가 감히 의논할 것이 아니옵니다. 독약을 넣은 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단서가 없사온데 두세 가지 죄목이 심히 중하오니 당초에 여러 신하가 혹 금부에 일을 내려서 극형을 쓸까 염려하여 그러했던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이경여 ㆍ 이경석은 내가 일찍이 심히 후하게 대우했는데 지금 이 행동은 마치 사업으로써 스스로 기대하는 것 같다. 어찌 의리를 저버림이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 8일에 이경석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성인이 천토(天討)를 행하니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오더라도 불쌍히 여기고 슬피 여기는 뜻이 그 사이에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볍거나 무겁게 처리하는 것은 일마다 모두 조금씩 다른 법입니다. 이에 친귀(親貴)와 훈로를 대우하는 것도 역시 구별이 있습니다. 하물며 이러한 인륜의 막대한 변고를 만나서 다시 되풀이하여 상량하지 않고, 갑자기 곧장일체의 법률을 더하게 하여 대신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대간에서도 차마 간하지 못한 채 오직 담당자가 고율(考律)하도록만 맡겨 둔다면 후세의 의논은 감히 알 수 없거니와 또 일시의 여론도 이 일을 과연 흡족히 여겨서 쾌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전하께서 훗날에 돌이켜 생각하시면 반드시 신 등이 말하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가령 조정 신하들이 모두 지극히 못나서 혹 그 무리를 보호하고 세력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목전의 이해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아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돌아보고 의지할 것 없는 한 과부를 위하고 전하의 위엄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제 죽음을 재촉하겠습니까. 제 몸을 잘 위하는 자는 반드시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번 광해 때에 큰 옥사가 여러 번 일어나서 억울하게 걸린 자가 한없이 많아서 발을 포개고 서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정한 뒤로부터는 비록 역옥(逆獄)이 있었어도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 옥과 흙이 스스로 구별되듯 하니 사람들이 횡액에 걸릴 것을 근심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수일부터 엄한 전교가 계속해서 내려오니 사람마다 장차 보전하지 못할 것같이 여겨서 거의 광해 때의 풍색과 비슷하니 심히 불행한 일이옵니다.” 하였다.
○ 12일에 전교하기를, “강(姜)의 죄가 가득 찼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아끼니 인심이 여기에 이를 줄은 알지 못했도다. 당초에 전교에서 율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말한 것은 그 뜻이 분수와 의리를 엄하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닌데 이것을 가지고 말을 고집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만일 이 일을 소홀히 하다가 변고가 생겨 일이 불측한 지경에 이르고 보면 비록 뉘우쳐도미치지 못할 것이다. 강을 폐출하여 사사한다는 뜻을 양사에 말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다시 아뢰기를, “양사를 부르는 것은 곧 말하여 보낼 것이나 국가의 막중한 일을 대신들도 미리 알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대신을 명하여 부르시어 모두 같이 말씀하심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를 내려, “그리하라.” 하였다. 빈청 김자점 ㆍ 이경석 ㆍ 구인후 ㆍ 최명길 에서 아뢰기를, “강의 죄악은 조정 신하들이 알지 못하는 자가 없습니다. 다만 일이 중대하니 살피고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감히 어리석은 생각으로 아뢰는 것이니,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전하께서 은혜와 의리를 참작하시어 이미 결정된 명을 내리셨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해당 관사에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알았노라.” 하였다.
○ 이때 임금의 노여움이 몹시 심하여 조정 신하들이 감히 강빈의 일을 말하지 못했으므로 정언황의 소가 정원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김자점이 장차 죄주기를 청하려 하는 데 이경석이 옳지 않다고 해서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남파집(南坡集) 행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