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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간도서 소개 (2003. 4. 26. 항용(제) 제공) <허난설헌>. 김성남 지음. 244쪽. 동문선 간. 16000원
<2003. 4. 26. 동아일보 소개 내용> [문학예술]'허난설헌'…허난설헌이 꿈꾸던 仙界는 어드메뇨? 남성음여성음
조선시대의 여인 허난설헌은 현실의 굴레를 넘어 선계에서 노닐며 천상의 사랑을 꿈꿨다.동아일보 자료사진 ◇허난설헌/김성남 지음/244쪽 1만6000원 동문선
<머리말>여성은 이름이 없었던 시대인 조선에서도 뚜렷한 이름과 자(字), 호(號)를 지녔고 그 이름이 국경을 넘어 천재시인으로 불렸던 이가 바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그는 허씨의 5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그 일부만이 남아 동생 허균의 손을 거쳐 1608년에 ‘난설재집(蘭雪齋集)’으로 간행됐다. 그의 시는 평범한 규방시인의 범주를 넘는 초월적 상상력과 세련된 형식미를 갖춘 것으로 높이 평가돼 왔다. 그는 “조선에서, 여자로, 김성립의 처로” 살아야 함을 ‘세 가지 한(恨)’으로 여겼으나, 그 콤플렉스 속에 안주하지 않고 시를 쓰며 선계(仙界)로 비상하는 나비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거울 속 난조(鸞鳥)’처럼 겨우 27세에 삶을 접었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그를 현대적 담론의 자리로 끌어내려 했으나,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리매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은 모처럼 그의 시에 담긴 상징과 기호를 잘 풀어 21세기의 한국 여성들 앞에 마주 앉혀 놓은 역작이다. 저자는 중국에 전래된 허난설헌의 시와 관련된 문헌들을 검토하고, 그 바탕 위에 그의 시세계를 성실하게 조명하며 연보와 ‘난설재집’을 덧붙여 책을 엮어냈다. 이 책은 허난설헌의 생애와 문학을 현대적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분석하되 쟁점별로 관련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정리했다. 남편과의 갈등과 상처, 학문적 성장과정과 시 창작, 중국문단의 반응, 표절 시비 등이 그의 주요 관심사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시에서 펼치려 했던 그에 대해 박지원과 홍대용이 서로 판이한 견해를 보인 점이나, ‘조선시선(朝鮮詩選)’ ‘고금여사(古今女史)’ 등 명대(明代) 서적들이 허난설헌의 시를 평가하고 수록한 과정을 세밀히 검증한 것이 돋보인다.
또 표절 시비의 시대상황적 배경이라든가 명나라 문단의 이문화(異文化) 현상이 허난설헌 시집의 출판 동인이 되었던 사실에 주목한 점도 예리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연구 성과는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한 중국문헌자료들에 견주어 풀어 놓은 ‘유선시(遊仙詩)’의 신화적 해석에 있다. 허난설헌이 ‘규방’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선계(仙界)는 자유와 평등, 행복을 추구하는 여신들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선계가 너무나도 인간적이라는 지적이 이채롭다. 여성의 굴레를 벗으려는 시도, 인간적 고뇌를 탈피하고자 했던 노력이 결국 너무나도 여성적이고 인간적인 천상(天上)의 사랑으로 귀납됐다는 말이다. 유선시 작품을 분석한 곳 중 일부에서 작품 내 등장인물의 이미지를 시인 자신으로 확대해석한 흠은 아마도 텍스트에 대한 지나친 애정 몰입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허난설헌의 삶과 시를 마무리하는 일은 아무래도 독자의 몫인 듯하다.
정연봉 배재대연구교수·국문학 jybong54@hanmail.net
*서적 내 관련 내용 소개 (2002. 12. 20. 태서(익) 제공) (1) 간단한 연보
1세(1563, 명종18년) :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8세(1570, 선조3년) :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15세(1577, 선조10년) : 난설헌은 이 때 서당 김성립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 23세(1585, 선조17년) :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몽유광산산』를 지었다. 27세(1589, 선조21년) : 짧은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1590년(선조23) : 이 해 11월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선조25) :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쟁중에 싸우다가 죽었다. 1598년(선조31) : 이 해 봄 정유재란때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보여주다. 이 시가 『조선시선』『열조시선』등에 실렸다. 1606년(선조39년) : 허균은 이 해 3월 27일 중국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주어 『난설헌 집』은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선조40년) : 이 해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난설헌집의 발문은 태안 피향당에서 지었다. 1711년 :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38세(1606, 선조39년) :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줌. 『난설헌집』은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비로소 중국에서 . 1913년 : 이 해 1월 10일 허경란이 난설헌의 시를 읽고 감화받아 자신이 소설헌이라고 칭하며 시를 지은 <소설헌집>이 활자본으로 신해음사에서 출판되었다.
(2) 閨怨歌(규원가) 일부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3) 哭子歌(곡자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엄격한 사회제도에 묶여 여인네는 '오직 술이나 음식을 의논할 뿐이며, 옷이나 바느질하고 물이나 길으며 절구질이나 잘 하면 넉넉하다'고 여겨질 따름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던 시절에 주옥 같은 글로써 삶을 노래하고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서애 유성룡으로 하여금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고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빛나 눈여겨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울리는 것은 빼어난 옥구슬이 서로 부딪힘이요, 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과 화산이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다. ... ... 사물을 보고 정감을 일으키며 시절을 염려하고 풍속을 민망케 함에 있어서는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다.
(4) 난설헌의 문학세계 평론
한가지도 세상에 물든 자국이 없으니...하며 감탄을 숨기지 못하게 했던 여인. 스물일곱 해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2백수 남짓한 한시를 남겨 조선 시대의 가장 빛나는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난설헌은, 경상감사와 부제학을 지낸 학자 허엽의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성과 봉의 두 오빠를 위로 하고, 홍길동전을 지은 균을 아우로 둔 난설헌은 조상적부터 문학이 뛰어 났던 허씨 집안에서 재주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배우기를 즐겨서 여러 스승을 찾아 다녔던 허엽은 자기의 글 배울 적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었고, 여성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시대에 오빠 봉은 난설헌을 자신의 글벗인 이달등에게 나아가 시를 배우게 해 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난설헌은 일찍이 남다른 글재주를 보였다. 그녀는 이미 여덟 살이던 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란 장시를 써서 많은 이로부터 시재를 인정 받았다.
그녀는 풍부한 정감을 갖고 있으며 이 정감을 곧잘 시로 표현하어 주위의 찬사를 얻곤 헀는데, 어여쁜 용모와 재치, 타고난 시재는 십여살의 허난설헌을 신동이라 불리게 했다. 그러나 난설헌에게도 불행은 왔다. 열네 살 된 해 난설헌은 부모가 정해주는 안동 김씨의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시댁은 5대째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과거 공부를 한다고 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고, 게다가 아내와 시를 주고 받으며 즐거움을 나눌 만한 위인도 못 되었다 한다. 반면에 난설헌은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만족할 수는 없는 뛰어난 재주와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비범한 아내에 대한 열등감에서인지, 남편 김성립은 집에 있는 날보다 기생과 함께 노는 날이 더 많았다.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하고 날마다 첩의 집에서만 노는 남편에게 난설헌은 옛날의 첩은 재주가 있었건만, 오늘의 첩은 재주가 없더라라는 뜻깊은 편지를 써보내 그를 꾸짖어 보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내방가사의 걸작 "규원가"는 남편과의 불화와 그로 인한 고독을 빚어낸, 눈물과 인종(忍從)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심경토로의 산물이다. 거기서 난설헌은 '부생모육(父生母育) 신고(娠苦)하여 이내 몸 길러낼 제, 공후배필 못 바라도 군자호구 원하더니, 삼생(三生)의 원업(怨業)이요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유협 경박자를 꿈같이 만났으니, 상시의 마음쓰기 살얼음을 디디는 듯, ...... 간장이 구곡되어 구비구비 끊겼어라. 차라리 잠을 들어 꿈에나 보려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속에 우는 짐승, 무슨 일 원수가 되어 잠조차 깨우는고, ......'하고 잠 못들며 비통해 하다가 '세상의 설운 사람 수없다 하려니와, 박명한 홍안이야 날같은 이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동살동 하여라'고 끝내 통곡하는 것이다.
난설헌의 비애는 남편의 난봉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남편으로 향하는 애정까지 보태어 키웠던 아들과 딸이 다 크지도 못한 채 차례로 떠나는가 했더니, 평화로웠던 친정도 옥사에 휘말려 오빠 봉과 아우 균이 이리저리 귀양길에 올랐다. 난설헌에게 닥친 안팎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다. 다정다감한 그녀는 오로지 시로써 고달픈 심정을 가누어야 했다. 스물 세살이던 해에 난설헌은 어머니의상을 당해 친정에 잠시 머물렀다. 하룻밤 꿈에 그녀는 신선의 세계에서 노닐다가, 구름을 따라 날던 한떨기 붉은 꽃이 아래로 떨어지는 모양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난설헌은 문득 시 한 수를 지었다. 그중 한구절을 '부용의 꽃 삼구 송이 붉은 채 서리 찬 달 아래 떨어지니'라고 읊으니, '삼구'란 27을 뜻한다. 서리 찬 달 아래 지는 '삼구' 송이 부용꽃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듯이 그녀는 27해에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 삭이던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 안은채,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했던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쓴 글을 다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뒷날 불길을 피한 그녀의 작품 일부가 동생 허균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소개되어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군의 야트막한 한 동산에 그녀의 두 아이의 무덤을 바라보고 묻혔다. 죽은 지 400여년이 지난 뒤에 세워진 그녀의 묘비는 '굴종만이 강요된 질곡의 생활에 숨막혀 자취도 없이 왔다가 간 이 땅의 여성들 틈에서도 부인은 정녕 우뚝하게 섰다' 는 글귀가 그녀를 애잔히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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