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 <국역 석릉세적> (1996.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간)의 기록 내용 西堂공 휘誠立의 기록 -- [지봉유설]에 휘誠立에 대하여는 부인 허난설헌과 비교하여 너무 격하시킨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으나, 서당공께서는 문과급제자로서 [성소부부고]에도 휘誠立께서 [策文]을 잘 짓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국조인물고]에 휘魯, 휘弘度, 휘 의 비문이 다른 명현들과 함께 전하여 지고 있고, [해동역대명가필보]에는 우리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의 혈맥을 있게 하여준 휘自行의 외조부 徐甄(서견)의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다.
2)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7호 (2000년 1월)> 在埈(서운관정공파 부이사장) 기고 내용 (2002. 5. 27. 주회(안) 제공) 서당공(휘誠立)은 왜적을 막고저 의병을 모집하고 宣陵과 靖陵의 의병을 모집, 왜적과 싸우시었다.
3) <연려실 기술 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8. 윤만(문) 제공)
▣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임진왜란 임금의 행차가 서도(西道)로 파천(播遷)가다 ▣ ○ 이때 왜적의 소식이 날로 급박해졌다. 임금이 비변사에 명하여 장수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여 전라 좌수사를 삼았으니 좌상(左相) 유성룡이 추천한 것이다.
○ 변방의 사정을 아는 재신(宰臣)을 골라 하삼도(下三道)를 순찰케 했다. 김수(金晬)를 경상 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로 삼고, 윤선각(尹先覺)일명 국형(國馨)을 충청 감사로 삼아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케 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었으므로 서울과 지방이 편한 것만 알고 부역을 꺼려 원성이 가득하였다. 양남(兩南)에 쌓은 성은 모두 모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크고넓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만 힘썼다. 《징비록》
○ 임진년 봄에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나누어 보내어 변방 준비를 순시(巡視)하게 했다. 이일은 충청ㆍ전라도에 가고, 신립은 경기ㆍ황해도에 가서 모두 달이 넘어 돌아왔는데 활ㆍ화살ㆍ창ㆍ칼이나 점검(點檢)하였을 뿐이었다. 신립은 본래 잔폭(殘暴)하기로 이름이 있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웠다. 《조기야문》ㆍ《징비록》
○ 특별히 승지 김성일을 경상 좌병사에 임명하였다. 비변사에서 유신(儒臣)은 이 소임에 합당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징비록》
○ 이때 도성 안 선비들이 천ㆍ백(千百)으로 떼를 지어, 미치광이나 괴물처럼 노래하고 춤추며 웃다가 울고 하여 부끄러움을 모르고 도깨비나 무당의 흉내를 내며 다니니 흉하고 놀랍기 말할 수 없었는데, ‘등등곡(登登曲)’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명가(名家)의 자제인 정효성(鄭孝誠)ㆍ백진민(白震民)ㆍ 극신(柳克新)ㆍ김두남(金斗南)ㆍ이경전(李慶全)ㆍ정협(鄭協)ㆍ김성립(金誠立) 등 30여 명이 그것을불렀다. 사람들이 이것을 난리 나고 나라 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일월록》
4) 지봉선생집에서 (2003. 10. 6. 윤만(문) 제공)
▣ 金正字誠立遷葬挽二百五十言 066_138a ▣ ▶ 066_138b --金君我良執。氣高才絶倫。少小卽同袍。情如兄弟親。 文藝妙一世。發軔靑雲春。奈何造物猜。長途淹驥足。 壬辰海寇至。我赴嶺南幕。君時假記注。立語銀臺門。 安知此一別。永作生死分。我還聞君訃。痛哭龍津夕。 天乎何不仁。使君至此酷。無兒亦無壽。斯理諒難詰。 扣心問天公。好惡一何謬。老洫彼何修。終身能守牖。 凶短此何辜。才豐而命嗇。天公爲▼噓。謂我何迷惑。 人生各有數。脩短非一道。曹蜍生固死。百歲未爲老。 顏回死猶生。三十還非夭。壽亦何足喜。夭亦何足悼。 達人貴信命。所以不怨天。天亦何爲哉。但各任其然。
▶ 066_138c --我聞天之言。心腸頗開豁。死生本回環。禍福相倚伏。 君子盍勉旃。令名爲不朽。持此欲慰君。君其知也否。 浩浩天壤間。萬事竟何有。 ≪芝峯先生集卷之十五 禁中錄己酉十二月。止庚戌五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