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성립(金誠立)1562(명종17)∼1592(선조25)--(서). 허난설헌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서당공 소개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4. 배위-허난설헌 소개

 1) 허난설헌

 2) 생애

 3) 친정 가계

 4) 일간지 기고내용

 5) 서울 거주지 자료

 6) 영정

 7) 친필 서화

 8) 묘소

 9) 시비소개

10) 생가 탐방

11) 규원가 소개

12) 신간도서소개

13) 오페라 소개

14) 일화(서당공과 난설헌) 소개

15) 허난설헌집 위작설 모음

16) 허난설헌작품 모음집

17) 허난설헌집 종합 소개

18) 연극 공연 관람기(안사연)

19) 고문헌(백옥루산량문) 경매 입수기

20) 허난설헌 창작소설 소개

21)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22) 허난설헌의 삶을 통한 여성들의 삶

 

본문

p11.png 4. 허난설헌 소개

2) 허난설헌의 생애  (2002. 8. 30. 영환(문) 제공)

      - 정리: 류주환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 난설헌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발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조선 중기로서 당시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선조 즉위 이후 사림세력의 득세로 인하여 격화된 붕당정치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 허씨,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초희라는 이름은 장성해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번이라는 자는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옛부터 전해져온 여선(女仙)인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난설헌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난설헌은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엽(1517 - 1580)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난설헌의 어머니는 허엽의 둘째 부인이었으며 허엽은 첫째 부인인 한씨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성(筬)을 두었고 김씨부인과의 사이에는 봉([竹封]), 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의 2남 1녀를 두었다. 허엽은 난설헌 18세 때 상주에서 객사했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許筬, 1548 - 1612)은 호가 악록(岳麓)이고 이조·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작은오빠 허봉(許봉, 1551 - 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고 자가 미숙(美叔)인데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봉은 1583년, 난설헌 21세 때 율곡 이이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가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가 술에 의해 몸을 망쳐서 난설헌 26세 때 객사했다. 그는 난설헌보다 12세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난설헌의 재능을 아껴주었다.

 

그리고 동생 허균(許筠, 1569 - 1618)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서 호는 교산(蛟山)이고 형조·예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지식이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허균은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이며, 후일 혁명을 준비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처형당했다. 간단히 말해서 봉, 난설헌, 균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허엽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화담 서경덕 등에게 문장을 배웠다. 난설헌은 작은오빠 봉, 동생 균과 같이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 난설헌은 문장을 집안에서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고 도교의 신선세계에 대해 배웠다.

 

난설헌은 특히 태평광기(太平廣記; 중국 송(宋)나라 학자 이방 등이 편찬한 설화집. 신선, 도술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옴.)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것은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달(月)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

 

난설헌의 글재주는 허균과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허균 자신도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시를 써서 누나인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에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 (女娘료亂送秋千) (*다스릴 료)란 시구가 있었다. 이를 보고 난설헌이 '잘 지었다. 다만 한 구가 잘못되었구나.'라고 말했다. 균이 '어떤 구가 잘못되었는가?' 하고 물으니 난설헌이 곧 다음과 같이 고쳐 주었다.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을 하면서 가버렸다.' (門前還有斷腸人, 白馬半拖黃金鞭)

 

난설헌의 시들은 도교적인 측면과 당나라 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화담 서경덕에게 배웠는데 이것도 난설헌이 도교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작은오빠 하곡 허봉은 난설헌보다 12세나 위였기 때문에 난설헌의 어린 시절에 충분히 그녀를 가르쳐 줄 위치에 있었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 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난설헌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4세나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고, 자는 여견(汝見)·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던 것 같다. 그의 처남이었던 허균은 그를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글을 잘 짓는 자"라고 평했다. 즉,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 과거(科擧)의 문장은 우수하였다 한다.

 

그는 외모가 잘 생기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공부에도 그다지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1589년(선조 22), 즉 난설헌이 죽던 해, 자기 나이 28세가 되어서야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후처로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맞아들였다. 난설헌이 죽고 3년 후인 그의 나이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싸우다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벼슬은 정9품의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루었다. 그는 자식이 없이 죽어서 집안에서 양자를 들였다.

 

난설헌의 외모는 뛰어났고(佳人; 이덕무 청장관전서), 성품도 어질었다(賢; 허균의 학산초담)고 한다. 난설헌은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 글을 쓸 때에도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허부인난설헌집 부경란집)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즉 파자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고 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  

 

다른 얘기에는 김성립과 친구들이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김성립의 친구가 거짓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서 놀고 있다'고 했다. 난설헌이 이를 전해 듣고는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를 한 구절 써서 보냈다.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郎君自是無心者, 同接何人縱半間) 이를 보고 사람들은 난설헌이 시에도 능하고 기백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성립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난설헌을 멀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또 역설적으로 평소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1579년 5월(난설헌 17세)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다음해인 1580년 2월(난설헌 18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작은오빠 허봉은 시집간 누이동생인 난설헌을 아껴서 시도 지어 보내고 붓도 선물하였다. 난설헌의 글재주를 아끼는 마음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다. 특히 1582년(난설헌 20세)에는 허봉이 난설헌에게 "두율(杜律)" 시집을 보내 주면서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써주었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년(난설헌 21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난설헌 23세), 상을 당해 외삼촌댁에 머물렀는데 이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지었다. 이 해에 허봉이 방면되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1588년 9월(난설헌 26세), 금강산에 있던 작은오빠 허봉이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난설헌 21세 때) 가기 전의 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香案: 향로나 향합 따위를 올려놓는 상)과 마주앉아 시사(詩詞)를 지었다고 한다.

(이능화(李能和),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자신의 세계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난설헌이 지은 시와 문장이 집 한 간에 가득 찼다고 한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역)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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