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득신(金得臣)1604(선조37)∼1684(숙종10)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백곡공 및 연보 소개

 2.주요 사진 자료 소개

 3.친필 서찰 소개

 4.김가행 교지

 5.제1회 학술발표회

 6.백곡집 판목

 7.묘소 소재지(율리)

 8.사마소 소개

 9.취묵당 소개

10.묘비문 소개

11.교지 촬영 소개

12.각종 설화 소개

13.각종 문헌 자료 소개

14.취묵당 탐방

15.식파정 탐방

16.진천군지의 백곡시

17.식파정의 백곡시

18.박구당 만시

19.독서광 백곡

20.의유당 관북유람일기의 백곡

21.400주년 탄신 기념

22.백곡집과 연보

23.친필서찰 경매품

24.백곡 2녀 묘소 탐방기

25.순암문집에서

26.백곡집 목차

27.독수기

28.논문-백곡 유묵(遺墨)과 간찰(簡札)두 편

29.제6회백곡 김득신 기념 백일장

30.백곡시 가곡

31.박사논문-백곡김득신연구

 

 

본문

p11.png 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자료 소개

1) <순오지> 서문을 쓰신 백곡노인(柏谷老人) 김득신(金得臣) 

(2003. 8. 30. 주회(안) 제공)

범우사에서 간행하고 있는 범우문고의 118번 홍만종의 <순오지>를 구입해(1,800원) 읽어보니 홍만종은 제학공파 백곡 김득신 선조님과 절친하셨던 분이고, 홍만종의 저술 <소화시평>에도 김득신의 서와 <명엽지해>에 김득신의 종남총지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1994.10월, 옮긴이 전규태 (전주대 교수, 문학박사)

 

이조 효종, 인조 때의 학자였던 홍만종의 생몰 년대는 미상(未詳)이다. 그는 학자인 동시에 시평가(詩評家)로서 널리 학문에 통하고 많은 평문을 남겼다. 그의 자는 우해(宇海 또는 于海)이고 호는 현묵자(玄默子)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이 <순오지>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조 25년인 1647년에 서호(西湖)에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15일 걸려 이를 완성했기 때문에 이 책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이처럼 그는 문학 평론에도 번득이는 날카로움이 있다. 홍만종이 태어난 것은 인조 때로서, 백곡 김득신, 동명 정두경과 매우 절친해서 그들과 함께 시문을 즐겼으며 권력이나 금욕에 급급하지 않고 평생을 음영과 저술로서 보냈다.

<순오지> 이외에 그의 저서로는 <역대총목>, <소화시평> <시화총림> <명엽지해> 등이 있는데 <소화시평>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명한 비평서이며 <명엽지해>는 설화집이다.

 

■ 자서 ---이 책을 쓴 다음해 봄 무오(戊午)년 가을에, 우해 홍만종 (豊山後人 玄默子)

무오(戊午)년 가을.

서호(西湖)에서 내가 병을 얻어 앓아 누웠으니, 낮에도 사람을 접할 수가 없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앉았으나 나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옛날 글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말과, 사람들에게 구전되어온 속담 등을 기록하여 다른 사람을 시켜 한 권의 책을 제작케 하고 보니 제작기간이 겨우 보름밖에 걸리지 않아 이 책 이름을 <순오지(旬五志)>라 했다.

이 책은 내가 병중에 시간을 보내고 근심을 잊고자 하는 내용으로 된 것이지, 여러 대가를 위해서 쓴 것은 아니다.

풍산후인(豊山後人) 현묵자(玄默子)는 이 책을 쓴 다음해 봄에 자서를 썼다.

 

■ 서문 ---기미(己未)년 8월 20일, 백곡노인(柏谷老人) 김득신(金得臣)

내가 일찍이 순오지(旬五志)의 원 저자인 현묵자(玄默子) 홍우해(洪宇海)의 집에 갔다가 그가 보관한 책 속에서 순오지라는 책 한 권을 보았는데 처음에 나는 그 제목만 보고 생각하되, 이 글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예전부터 있던 것으로 여기고 의아해 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다 보니 이것은 바로 우해(宇海) 자신이 지은 것임을 알았다.

우해는 어린 시절부터 도가(道家)의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선술(仙術)을 몹시 좋아했다. 그러던 차 우해는 서호(西湖)로 귀양을 갔는데, 수양하는 여가중 우리나라 역사와 예술, 유교 도교 불교, 문장가 음악가 등의 글들을 모아보고, 또 이름난 사람의 별호(別號)와 시골 방언(方言)에 이르기까지 널리 찾아보고 갖추어서 기록해 두었다.

그 중요한 골자를 살펴보자면, 세상을 교화(敎化)하고 사람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어긋나지 않았다. 또 가끔 가다가는 다소 재미있는 말을 섞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도 하엿으니, 이는 역시 옛날 한(漢)나라 때 사가(史家)인 사마천(司馬遷)과 후한(後漢)때 역사가며 문장가인 반고(班固) 같은 이가 진(秦)나라 때 희담(戱談) 배우인 우전(優전)과 한(漢) 무제(武帝) 때 해학가인 동방삭(東方朔)의 사적을 기록한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렇듯 우해의 이 뜻하는 바는 두 갈래가 있을 수 없고, 또한 한 갈래라도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바탕이 원래 깨끗한 정신을 가지고 뛰어난 회포로 남에게 보여지는 특이한 사상은 세상 밖으로 생각을 몰아내고 천하에 높은 정경을 달려서 속세(俗世)를 벗어난 듯한 기상이 있다. 또 이 글을 모아 쓰는 데 있어서도 선악을 구별하여 움직임에 따라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이것은 참으로 옛 사람의 글쓰는 체통을 깊이 깨달았다고 할 만하다.

이것은 본래 옛일을 즐기고, 문장에 능란하며, 또 의리에 밝은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이같은 훌륭한 글을 쓸 수가 있겠는가

이 책을 <순오지>라고 이름 지은 것은, 이 책을 제작한 기간이 꼭 15일이 걸렸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열어구(列禦寇)가 쓴 <列子>의 '순오이반(旬五而返)'이란 뜻을 의미한 것이다.

오호라, 이 책은 비록 우해가 보고 들은 대로 수집했다고는 할지언정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두 사실 그대로다. 후세에 역사를 쓰는 사람은 한(漢)나라 때 제실(帝室)의 문고(文庫)인 난대(蘭臺)와 책을 쌓아둔 비서성(秘書省)인 봉관(蓬觀)에 감추어둔 서적을 제외하고 보면 장차 이 책을 택할 것이니라. 나는 이 책을 세상에 널리 전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여 이 서문을 우해에게 준다.

기미(己未)년 8월 20일

백곡노인(柏谷老人) 김득신(金得臣) 쓰다

 

 2) 백곡집 속의 <관동별곡> 감상의 글

(2003. 10. 21. 은회(익). 주회(안) 제공)

(1) 원문 (은회 제공)

 

關東別曲序 金 得 臣 <栢谷集>

 

關東別曲鄭松江之所作也吾家有女隷能唱別曲余兒時每聽之不知爲奇及束髮聽之稍以爲奇之丁丑兵後客遊關東之悉直有少妓能唱關東別曲常常招邀竹樓而聽不 淸興如濤亦且如有藻思之浩浩眞奇曲白岐峰關西別曲武人許 雇工歌趙玄谷流民嘆歌皆亞也昔者讀書于西湖之地藏刹閱三個月旅懷殊不樂欲慰溯召諸衲子請唱歌一衲子應曰吾善歌關東別曲勵聲而唱聽之若有凌雲之氣而懷事妥帖其後累過西原縣遇歌妓請歌關東別曲而聽盖其聲之纖麗非悉直妓之匹也頃年訪友於 洞 上有小冊子取之手披卽關東別曲也或以諺字書或以文字書若使余記性聰明借見以誦而性甚魯鈍雖百遍目視不能誦故摩 而止矣曺友仁聽關東別曲不制飄然遺世之興遂往遊關東作續關東別曲見者稱之昔李澤堂謂余曰嶺南文章曺友仁第一以此揆之續別曲必奇而不得見未知與松江所作別曲何如也曺友仁之別號 齋松江名澈

 

文會序 金 得 臣 <栢谷集>

 

余觀今之顚冥之徒或以博塞會或以飮醵會或以漁獵會以文會之者不可得見余嘗恨之乃者許某甫金某甫皆成癖於文者與三四個人日日相會或諷讀古文或  品物而其雄篇狂汁袞袞不竭可以期雷 聲名其比諸 目鉢心棘刺造 者則如卞鵠 金某甫曰吾 以文會友久而不怠不可知名此會曰文會 則局於 不至怠於諸君意何如諸君曰唯唯必以 名之者盖久而不怠之意金公之勉戒可 古人曰禮稱獨學陋使無孤陋之弊也以故許金兩公知其然必與韻人學子結 無孤陋之弊此近者罕見盛事也然不以書籍難可博識書籍者文會之本也各出書籍債與時逐而息其息有裕則多質書籍以備文會]時披閱欲爲博識之資其志至矣況 之諸公皆以信義相孚 之有始而有終不必道也金某甫使余不分伏獵者爲序辭遜不可已於此題識以贊 顔如甲

 

(2) 번역문 (주회 제공)

      출전 : <우리 옛글 백가지, 1997, 한일사>

 

▣ 관동별곡에 대한 소감 (關東別曲序) ---김득신

 

관동별곡은 鄭松江(=정철)이 지은 작품이다. 우리 집에는 계집종 한 명이 있었는데, 그 계집종이 관동별곡을 매우 잘 불렀다.

그리하여 나는 어릴 때부터 늘 그 노래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자라서 머리를 묶고 상투를 올렸을 때쯤 되어서야 그 노래가 훌륭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지난 정축년 (=1637년, 병자호란 다음 해에 청에 항복) 전쟁이 끝난 뒤에 나는 관동을 실직(=삼척의 옛 이름)에서 노닌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그 지방의 젊은 기생 한 사람이 이 관동별곡을 매우 잘 불러 늘 그를 竹樓(=?삼척 죽서루) 에 불러다 놓고 노래를 시켰다. 그러면 나의 감흥이 고조될 뿐만아니라 詩文에 대한 상상도 넓어짐을 느꼈었다. 참으로 훌륭한 노래였다.

 

내 생각에는 백기봉(白岐峰=명종때 학자로서 이름은 광홍)의 관서별곡이나 무인 許 (허전)의 고공가(雇工歌=머슴살이의 고통을 풍자한 노래)나 조현곡(趙玄谷)의 流民嘆歌(조민탄가) 등은 다 그 아류작으로 관동별곡에는 못 미치는 작품들이었다.

 

내가 옛날 西湖(서호=현재의 한강의 서쪽)의 지장찰이라는 절에서 석달동안을 독서한 일이 있었는데, 나그네로서의 회포가 자못 심각하여서 중을 불러 놓고 唱歌하기를 부탁하니, 중 한 사람이 이르기를 "제가 관동별곡을 좀 부를 수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다듬어 노래를 불렀다. 그의 소리는 속세를 떠난 듯한 기상이 숨어 있어서 마음 속에 품었던 울적함이 단번에 풀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뒤로 여러번 西原縣(=청주)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그 지방의 歌妓를 불러오게 하여 관동별곡을 노래로 청해 듣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는 섬세하고 곱기가 실직(=삼척)에서 듣던 젊은 기생의 노래 소리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몇해 전에 나는 館洞(=?)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의 책상 위에 작은 책자가 하나 놓여 있어 무심히 그 책을 들추어 보았더니 뜻밖에 그것은 관동별곡이었다. 거기에는 전편이 한글(언문)로도 씌어 있고 또 한자로도 씌어 있었다. 만일 내가 기억력이 좋았다면 그것을 빌려 보고 모두 외웠을 터인데 나는 성품이 원체 노둔하여 백번을 보아도 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냥 책을 어루만지기만 하고 말았었다.

 

조우인(=?1602년 이시발 撰 충렬공 김방경 묘갈명 書) 은 이 관동별곡을 듣고 글을 내용을 생각하며 표연히 세속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껴, 마침내 관동지방에 가서 노인 뒤에 續관동별곡 이라는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曹友仁 : 자는 여익, 호는 매호 또는 이재. 첨지중추부사, 우부승지 역임. 시와 그림, 글씨에 능하여 三絶이라고 불린다.

 

옛날에 이택당(李澤堂=李植)이 나에게 이르기를 "영남의 문장으로는 조우인이 제일일세" 하였는데,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 속관동별곡도 매우 진기한 작품임이 틀림없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읽어 보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이 송강의 작품과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조우인의 별호는 이재이고 송강의 이름은 철이다. [栢谷集}

 

3) <종남총지>의 글 하나 (2003. 10. 25. 은회(익) 제공)

 

외양  (2003. 10. 25. 은회(익) 제공)

말을 살핌은 비쩍 마른 데서 놓치게 되고 선비를 알아봄은 가난에서 실수가 생긴다.

相馬失之瘦, 相士失之貧. -김득신(金得臣), 《종남총지(終南叢志)》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처음 온달이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이렇게 말한다. “삼가 시장 사람의 말은 사지 마시고, 나라 말로 병들어 비쩍 말라 쫓겨난 놈을 고른 뒤에 이것을 사십시오.

 

” 겉보기에 살지고 번드르르한 말은 시장 사람의 말이다. 병들어 비쩍 말라 뼈가 다 드러난 말은 나라의 마굿간에 있다가 병들어 쫓겨난 말이다. 하지만 혈통이 다르다. 시장 사람 말은 기껏해야 마차 끄는 데나 쓸 수 있지만, 전장에 나가 싸우는 장수의 말이 될 수는 없다. 세상에 천리마가 없었던 적은 없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없었을 뿐이다.

 

혈통 좋은 천리마도 기르는 사람을 잘못 만나면 비루먹어 병든 말이 된다. 겉만 보고는 잘 알 수가 없다. 비쩍 말랐다고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말 가운데 명마가 있다.꾀죄죄한 행색 때문에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는 가난한 선비 가운데 숨은 그릇이 있다. 하지만 우리 눈은 언제나 껍데기만 쫓아다닌다. 번드르한 겉모습에 현혹되어 속는다.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 김득신(1604-1684)은 본관 안동(安東), 자 자공(子公), 호 백곡(柏谷). 당시 한문4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문명(文名)이 세상에 알려졌다.

 

공부할 때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주력했고 특히 <백이전(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지었다. 저서에 ‘백곡집’(柏谷集) ‘종남총지’(終南叢志) 등이 있다.

 

4) <연려실 기술 내의 기록 내용> (2003. 11. 20. 윤만 (문) 제공)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병서류(兵書類) ▣

 

《연기신편(演機新篇)》 : 안명로(安命老)가 지었고, 김득신(金得臣)이 서문을 지었다.

 

5) [大東奇聞(대동기문)] 내의 선조님 金得臣(김득신)   

(2003. 12. 27. 윤만(문) 제공)

김득신(金得臣)은 백이전(伯夷傳)을 억만(億萬)번 읽었다 -

김득신(金得臣)은 안동(安東) 사람이니 자는 자공(子公)이요 호는 백곡(柏谷), 또는 귀석산인(龜石山人)으로서 감사(監司) 치(緻)의 아들이다. 현종(顯宗) 임인(壬寅)에 참봉(參奉)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嘉善)에 올랐고 안풍군(安豊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80세가 지난 후에 화적(火賊)을 만나 상처를 입고 졸(卒)했다.<국조방목(國朝榜目)>

 

본래 노둔(魯鈍)해서 글 읽는 것이 남의 갑절이나 되었고 한유(韓柳)의 글은 거기에서 추려 읽은 것이 만여 번에 이르렀고 가장 백이전(伯夷傳)을 좋아하여 읽기를 1억 1만 3천 번에 이르니 드디어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억만재(億萬齋)라고 이름지었다. 경술(庚戌)에 온 나라에 흉년이 들고 이듬해에는 큰 역질이 들어서 도시(都市)나 시골에 시체가 쌓인 것이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웃음의 말로, “금년에 죽은 사람과 그대의 글 읽는 숫자와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많은가.”했다.<해동시화(海東詩話)> 호행(湖行)의 절구(絶句)에 말하기를,

 

“호서를 다 다니고 진관으로 향하니, 먼 길 가도 가도 잠시도 한가하지 못하네. 나귀 위에서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니 저문 구름 쇠잔한 눈, 이것이 어느 산인가.

(湖西踏盡向秦關 長路行行不暫閒 驢背眠餘開眼見 暮雲殘雪是何山)”했고 또 말하기를,

 

떨어지는 해에 평평한 모래로 내려가니, 자던 새가 먼 나무로 날아가네. 돌아가는 사람이 늦게 나귀를 타니, 다시 앞 선의 비가 겁나네.

(落日下平沙 宿禽投遠樹 歸人晩騎驢 更怯前山雨)“했다. 또 말하기를,

 

저녁 노을이 강 모래에 옮기니, 가을 소리가 먼 나무에서 나네. 소치는 아이가 송아지를 꾸짖어 돌아가니, 옷이 앞산의 비에 젖네.

(夕照轉江沙 秋聲生遠樹 牧童叱犢歸 衣濕前山雨)“ 했다.<해동시화(海東詩話)>

《출전 : 신완역 대동기문/명문당/2000/(하)pp124~125》

 

☞ (국역)쉽게 풀어쓴 대동기문(하) pp404/국학자료원/2001에 풀어 쓴 시.

 

  충청도 땅 다 지나 관중으로 들어서니

  먼먼 길 가고 또 가 쉴 틈도 없으이.

  말 등에서 졸다가 눈뜨고 바라보니

  저녁 구름 잔설 남은 저 산 이름 무엔고.

 

  평타분한 모래밭에 황혼이 지니

  잘새는 먼 나무에 날아 든다네.

  나그넨 느지막히 나귀를 타고

  앞산에 비 오는가 걱정한다오.

 

  강가의 모래톱엔 저녁놀지고

  먼 나무엔 가을 바람 불어온다네.

  송아지 채근하며 돌아가는 저 목동

  앞산 비에 옷이 다 젖어 버렸네.

 

6) 진천 백곡 저수지의 <식파정> 소개 (2002. 5. 26. 윤만(문) 제공. 2004. 1. 23. 주회(안) 현지 탐방 소개)

 출전 : 진천군지(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94)

(1)pp 1321. 4. 樓亭(루정) 息波亭(식파정)에 대해

소재지 : 진천읍 건송리 775.  크기 : 전면 2간, 측면 2간 팔작집.  시대 : 조선 효종 4년(1653) 창건, 고종 30년(1893) 중건.

 

-- 『息波亭詩文集(식파정시문집)』에 의하면 이 정자는 효종 4년(1653)에 陽城人(양성인) 李得坤(이득곤)이 창건하고 그 호를 따라 식파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栢谷(백곡) 金得臣이(김득신)이「식파정기」를 찬하였다. 고종 30년(1893) 그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고 韶山學人(소산학인) 閔瑾植이 「식파정중건기」를 쓰고 1954년 다시 중수하였다. 최명길, 김득신,송시열, 채지홍 등의 식파정 題詠(제영)이 전한다.

 

-- 이 정자는 원래 두건리 앞 냇가에 세워졌는데 지금은 진천의 백곡저수지 산정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는 목조와가로 전면 2간, 측면 2간, 팔작집이며 「息波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  참고사항 : 식파정은 그 경관이 뛰어나 先賢(선현)들이 많은 시를 남겼다. 여기에는 이득곤, 최명길, 채익선, 김득신, 송시열, 채지홍 등이 쓴 제영들을 소개한다. 이 시들은 『常山誌(상산지)』『鎭川郡誌(진천군지)』1974, 『내고장전통가꾸기』(진천군,1982)에 실려 있다.

 

(2) 息波亭(식파정)】에 있는 백곡 김득신의 시 소개(pp1323 및 pp1368)

 

白雲深鎖處(백운심쇄처) : 흰 구름만이 깊이 스며 있는 이 고장에

高築逸民家(고축일민가) : 높다랗고 편안하게 지낼 집 마련했구려

赤梁今秋葉(적량금추엽) : 금년 가을에 나뭇잎은 빨갛게 물들었고

薰開舊菊花(훈개구국화) : 국화꽃은 옛 향기 그대로 풍기는구나

鏡中山影倒(경중산영도) : 거울 속엔 산 그림자가 거꾸로 섰고

( )外柳絲斜(첨외유사사) : 처마 끝엔 수양버들가지 드리웠구나

一曲歌樽酒(일곡가준주) : 한 곡조 노래 부르고 또 술 마시니

胸襟動太和(흉금동태화) : 이내 심정 평화 속에서 오락가락하누나

 

 * pp 1349. 제6절 題詠(제영) 1. 개관

 

-- 題詠(제영)이라 함은 시의 형식에 대한 개념이 아니며, 시의 주제나 소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작가가 임의로 소재를 선택하여 吟詠(음영)한 일반 漢詩(한시)와는 다르다. 일정한 詩題(시제)나 어느 지방의 특정 소재를 대상으로 하되, 그 지방의 대표적 物象(물상)이나 특성있는일정 지역의 개관 등을 吟詠(음영)한 詩歌(시가)라야 題詠(제영)이라 할 수 있다.

 

(3) 名勝(명승)에 대한 題詠(제영)(pp1350)--頭陀山(두타산)을 노래한 金得臣(김득신)의 詩(시)

     頭陀山(두타산)】 백곡 김득신 (pp1364 및 pp1384)

 

行行路不盡(행행로부진) : 가도가도 길은 한량이 없는데

萬水更千峰(만수경천봉) : 이물 저물 건너다 보니 또 천봉이로구나

忽覺招堤近(홀각초제근) : 홀연히 절 가까와진 줄 알게 되었는데

林端有暮鍾(임단유모종) : 숲 저편에는 저녁 종소리 들리는 듯

 

 * 頭陀山 : 진천읍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높은 산이 있다. 초평면과 괴산군 도안면을 경계로 하는 해발 598m의 두타산이 그것이고 그 산허리인 초평면 영구리 542번지에는 고려 태조 원년(918)에 證通國師(증통국사)가 청건한 영수암이 있다. 이 절의 뒤편에 靈泉(영천)이 있었기 때문에 靈水寺(영수사)라고도 부른다. 조선 순조 30년(1831)에 僧(승) 妙益(묘익)과 지방민이 힘을 모아 중수하였고, 고종 5년에 李韓(이한)이 다시 수축하였다. 이 절의 대웅전 앞에는 3층 속탑이 있다. 이절을 감싸주는 두타산 상봉에서 청주가 눈앞에 가깝게 내려다 보인다. 산성터가 남아 있는 산의 허리에는 하얀 갈대 숲이 우거져 예부터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상산팔경 중의 하나인 "頭陀暮鍾(두타모종)"은 바로 두타산과 영수암에서 흘러 나오는 종소리를 말함이다

 

   (4)  백곡 김득신의 【息波亭(식파정)】題詠(제영)(pp1368)

 

卜築幽居靜散中(복축유거정산중) : 그윽하게 살고자 한적한 곳에 복축을 하니

人疑千古夏黃公(인의천고하황공) : 사람들은 옛날 황공이었나 의심을 하는구나

今觀斗建風光美(금관두건풍광미) : 지금 이 고장 풍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니

正與桃源臭味同(정여도원취미동) : 진정코 도화선경에 노는 취미와 무엇이 다르랴

 

7) 二十功臣會盟錄  (2005. 2. 4. 은회(익) 제공)

 

寧國功臣 黃? 嫡長子 定略將軍兼  宣傳官 臣 黃碩耉

靖社功臣 李時昉 嫡長子 奉正大 夫金井道察訪 臣 李恢

靖社功臣 趙? 嫡長子 通訓大夫  行顯陵參奉 臣 趙伯耘

佐翼功臣 權攀 嫡長孫 通訓大夫 行昌陵參奉 臣 權?

宣武功臣 金時敏 嫡長孫 朝奉大夫  行肅寧殿參奉 臣金得臣

 

8) 백곡선조 묘갈명

(205. 2. 7. 주회(안) 제공)

출전 : 柏谷先祖集 附錄

附錄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安豊君金公墓碣銘 幷序

 

公姓金。諱得臣。字子公。號柏谷。安東人。安興君諱緻之子也。以萬曆。甲辰十月十八日生。其生也。安興君夢見老子。故幼名夢聃。幼而魯。十歲始就學。十九。史略首章僅二十六字。而三日不能口讀。安興公猶且勤誨之曰。是兒命直文曜。長必大以文鳴於世也。公亦諄謹不好弄。讀書不怠九年學略解其蒙。時作聯語輒警拔。翌歲。安興公宰東萊。行戒之曰。若勉讀書。毋妄交遊。公遂閉戶日孜孜講誦。期而覲。進所製詩。安興公喜曰。文已發?矣。力攻之遠就也。公始聞奬賞語。喜甚而舞。乙丑。丁安興君憂。服?。而其文益肆。先輩屈膝。華聞丕振。詩甚高潔淸疏。調新而格奇。澤堂李公植,北渚金公?。競許騷壇第一。當華使時見推。以白衣製述官官。卽權石洲名?。進士。舊也。龍湖漢江等作。至荷宸褒。世以爲榮。平生讀古書極勤苦。負?山寺二十年。有不讀。讀必數萬遍。於伯夷傳則至數十萬。仍名小齋曰。億萬。獨其科擧文。與俗尙詭。屢進屢以屈。安興君命。限六十應擧。壬午。中司馬。壬寅。登文科。由成均學諭。陞典籍。旣直公館。出語人曰。昨吾冒風。寒冷透骨。旣直廬煖。如火欲汗。此 化也。人而久擅造化權不祥。我將歸矣。識者謂足以警世云。遂歸槐壤。築舍于開香山先塋側。扁曰醉默。詩酒自娛。除拜不就。或?起。一謝成均之直講,司藝,憲府掌令,兵,工,禮曹員外,濟用,司僕,掌樂,軍資,宗簿,司導寺正,槐院判校,江原都事,?基,洪川,旌善等宰。是公履歷而又預知製敎選。其得邑也。朝議以公騷人。闊於事沮之。公少嘗蔭補參奉。以大夫人在。故勉赴官。俄棄之。辛酉。用世勳陞通政。癸亥。以優老典。階嘉善。襲封安?君。甲子秋。患泄痢。且病疽。八月?九。捐館。壽八十一。始公善相人。多奇驗。自謂相有兵死法。惟修飭?可免。病早草。昏逑忽曰。吾頰有刃痕否。適會家人。先備殮?衣衾。有惡少輩夜持兵入劫取之。公已冥然。刃過頰而不省。仍遂屬?。其前知多類此。訃聞。賜祭賻如儀。葬在淸安縣左龜山壬坐之原。從先兆也。公相貌奇古。天稟淸高。如方外士。於世味?如也。家居屢空。晏如也。無一點塵俗態。嘗言吾不欺心不欺人。言必副約必踐。不作皺眉事。不走權貴門。是一生心跡也。又勉學者無以才不猶人自晝也。莫魯於我。終亦有成。在勉?而已。若不具不廣。當致精於一一而成。勝於傳而無成者。此皆公祈自得也。公質行尤篤。有庶母性悖。公待以至誠。竟底感化。鄕先生朽淺黃公宗海。甚重公而賢之。久堂朴尙書長遠。少學於安興公。與交至?。一日値公初度。却酒食涕泣曰。吾思久堂。心忽然若失。意者其殆乎及訃至。果以其日逝。公之著述甚富。多散佚於丙子亂。見存僅千篇。酷好山水。遊如金剛山,白馬江及湖西四郡等地。杖屢?遍。詩具在可以觀焉。且嗜草聖。?醉無聊。必揮灑而遣興焉。未嘗示人。故世無知者。公係出新羅。有高麗上洛伯方慶。爲十四代祖。高祖諱錫。進士,贈領議政。愍己卯士禍。隱不仕。曾祖諱忠甲。持平,贈左贊成。祖諱時晦。文[科] 富平府使,贈典翰。考安興公後。其季上洛府院君。寔諱時敏。死節於晉。戰功殊偉。錄宣武勳。贈領議政。安興公號南峯。卒官嶺南伯。以公推▒恩。贈亞銓。?泗川睦氏。吏曹參判詹之女。公配金氏。籍慶州。考聲發。掌令,贈都丞旨。沖菴先生 諱淨四世孫也。擧三男二女。男長天柱。贈吏判。娶贈吏參柳成廈女。生四男。可敎別提。可訓。可行縣監。可聲。一壻朴沔。次天挺。娶廣寧君李繼道女。生五男。可遠。可近參奉。可迪。可虔監察。可尙。一壻崔?。次天揆。娶李承淵女。長適判決事崔渲。有子起昌。壻典籍權惺。次適郡守李重輝。有子濂。內外孫曾合數十人。銘曰。

 

無懷葛天之民。老杜孟郊之詩。行心八十年兮如一日。讀書億萬數兮。奇之又奇。四尺之墳兮。千古之名。九原難作兮。噫。

通政大夫行兵曹參議知製敎李玄錫撰 號游齋官判書

九寸侄通訓大夫行司僕寺主簿金鳳至書

 

 9) 백곡선조 행장초

(2005. 2. 7. 주회(안) 제공)

출전 : 柏谷先祖集附錄

附錄

行狀草

 

王考姓金。諱得臣。字子公。號柏谷。安東人也。鼻祖諱閼智。新羅時追封文王。十六代祖諱傅敬順王。十四代祖諱方慶。封上洛伯。諡忠烈公。十三代祖諱恂登第。三重大匡判三司事上洛君。諡文英公十二代祖諱永旽登第議政府參議政上洛君。十一代祖諱縝。重大匡判慈惠院使上洛伯。十代祖諱益達。登第。密直司左副代言寶文閣直提學。知工曹司事。九代祖諱顧。入我朝登第。通政左司諫。兼世子右輔德。輔德生諱孟廉。司憲府監察。監察生諱哲句。登第。典農主簿。主簿生諱壽亨。登第。掌隷院司議。贈通禮院左通禮。通禮生諱?默。從仕郞。贈承政院左承旨。承旨生諱錫。成均進士。贈領議政。曾祖諱忠甲。文科持平。贈左贊成上洛君。祖諱時晦。文科富平都護府使。贈弘文館典翰有弟諱時敏武科策宣武勳封上洛府院君。諡忠武公。贈領議政。於王考爲養祖也。考諱緻。號南峯。文科慶尙道觀察使。贈吏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封安興君。以王考承襲封君推恩故也。?泗川睦氏贈貞夫人。靑坡處士玄軒公諱世秤之孫。吏曹參判諱詹之女也。以爲曆甲辰十月十八日。生王考。曾王母有孕。曾王父夢。得一靑衣童。抱置膝上。傍人問此何兒耶。曾王父答曰。此乃老聃也。夢覺而俄生。因名曰夢聃。及長。作詩曰。前身柱下史。蓋感應是夢而作也。年?舞象。重經痘疾性傷質魯。十歲。始受曾史於曾王父。而天皇一章學三日。不成口讀。三考之外舅梅溪公睦參判敍欽來見謂曰。已之。曾王父曰。是兒質魯雖如此。然命直文曜。他日可以文嗚於世。十五。雖勤受業。文理未違。而間成聯句。則其調格出世俗態。且留意於書法。草聖尤奇。三十後棄之。末年。人或?求。則必乖?書之。癸亥春。曾王父出宰東萊。出城之日。戒王考曰。勿浪遊。王考自聞戒後。閉門勤讀。不懈於鉛?之功。甲子春。來覲于東萊府。曾王父曰。汝所讀幾何。所作有幾首。王考獻以曾所製科詩五六首。覽畢乃曰。汝今則成儒。此後在汝力行之如何耳。王考退入內柬軒。喜且蹈舞。乙丑。丁外艱。丁卯服關。其秋。梅溪公作宰林川。往拜之。則梅溪公曰。汝之文辭。至於何境耶。吾欲試爾才。月夜設(??)床於蓮亭前。招諸子弟呼韻曰。汝曹各賦短律。王考卽應聲而對曰。星斗?干月滿天。石池秋光鎖寒煙。黃花依舊樽仍在。千載陶君若箇邊。梅溪公大加稱贊曰。有是父有是子。其郡有文人知詩者。梅溪公親子弟所製詩及王考所賦詩幷出示之曰。君可以考之。其人曰。諸作皆可考。此一律。是誰之作也。非吾等所可考也。異日必以詩大鳴於世矣。自?以後。大肆力於文墨。發憤忘食。諷讀不休。殆二十年。尤工於詩。體格必遵乎老社。雖隻宇片言。皆祖述古語而作之。非自已創出而用之。贄見澤堂李尙書植。澤堂曰。聞名久矣。今見詩與文。可爲當今之第一。由是文名大振。梅溪公見澤堂曰。當今詩文。誰爲第一。答曰。令公之甥侄金某之詩。爲當時第一云。壬午司馬。益勤??之業。班,馬,韓,柳,歐,蘇,戰國策,庸學,南華經及杜律,唐律等詩。讀至數萬。而伯夷傳則億讀。故名其小齋曰億萬齋。平生述作。積成卷軸。失於丙子亂。餘存?千篇。一時傳誦於縉紳章甫之間。至若龍湖絶。流撤宸聰。漢江一律。亦登睿覽。韋士之詩。違于禁中。古罕有者。王考常曰。吾詩勝於此者多矣。而此詩尤得稱焉。詩句之得名。其亦有數耶。是未可知也。仁廟朝。以白衣充製述官。未及赴而大明亡。寢是行。乙酉。拜肅寧殿參奉。而王考 志兄在於蔭官。不欲就之。梅溪公曰。汝家貧親老。不能備朝夕之供。奚以不仕耶。再三?迫。不得已屈意肅謝。而未幾辭棄。擺脫家事。負?孜孜以窮年者。亦二十餘年。丁酉。丁內艱。己亥服除。其後屢擧不中。人以詩能窮人目之。壬寅。登文科。以年老拜國子學諭。陞拜典籍。肅謝。拜成均直講。兵工曹佐郞,江原道都事司憲府掌令者再。濟用監正者再。司僕軍資宗簿寺等正,豊基郡守。皆不就。洪川縣監旌善郡守。皆以臺臣宰巨能文淸疏。不合長民之才沮之。不赴。拜禮曹佐郞司導寺正成均司藝承文院判校掌樂院正兼知製敎。未幾下鄕。王考與世抹?。無意於仕宦。不欲與人浮沈也。釋褐之初。結舍於槐壤先?之側。名其堂曰醉默。詩酒自娛。遺外聲利。以爲終老之計。王考與朴尙書久堂長遠爲莫逆交。人謂異姓天倫。久堂留守開城時。地遠便疏。不聞消息者累月。十月十八日。乃王考?日。一家子姓略備酒肴以進。王考推而不御曰。昨夢不吉。余心慽慽。想久堂捐館矣。越五日。凶音黑至。考其日子則十月十八也。辛酉。以世勳陞資通政。癸亥。以年滿八?襲封安?君。一家設慶宴。酒半。王考謂曰。吾因以得之。終至成功。志願畢矣。延此遐壽。秩呑優走。世襲勳封。▒分極矣。甲子七月。?毒痢委頓床褥。氣息奄奄。而用藥多方。旋得差道。大腫忽發於左股上。藥不見效。八月三十日。 碑文曰二十九日。行狀曰三十日。宗家忌記曰三十日。至今行祀以三十日矣。 屬?于醉默堂。監司以訃聞。特命賜賻賜祭。別賻加 ▒。蓋盛典也。冬十一月二十九日。葬于淸安縣左龜山壬坐之原。曾王父墓外?下也。王考性度高潔。無一點塵埃態。任眞天然。無所緣飾。內志貞固。所守堅確。不喜粉華。儉約是務。襟懷坦夷。不以利欲動其心也。與人言。以不欺爲本。與朋友交。以取信爲先。平生雅好山水。遊歷靡遺。關東金剛扶餘白馬等處。遍觀諷詠以暢其懷。尤愛?串泉石之秀麗。至於十往來不倦。而其諷詠諸作。載在文集中。家本淸貧。四壁空立。而家人不堪其苦。王考處之晏然。略不介意。?飯蔬食。唯自甘心焉。常曰。雖細微之事。預則立。不預則不立。明日之事。今日熟講深究而行之。故事務少無差謬矣。配慶州金氏贈貞夫人。司憲府掌令贈承政院都承旨聲發之女。文簡公沖菴先生淨之四代孫也。生三男二女。長曰天柱。娶學生柳成廈女。生四男一女。長曰可敎。司甕院參奉。生二男一女。皆幼。次可訓出繼。生一女幼。次可行生一男二女皆幼。次可聲生二女皆幼。次女適文科通政崔渲。生一男一女。男曰起昌。生一男一女。歸進士權。生一男一女。次男天挺出繼於王考之堂兄縣監得宗。娶生員李繼道女。生五男一女。長曰可遠。生一男。次可近。生一男三女。次可迪。生二女皆幼。次歸士人崔?。生一男二女皆幼。次可虔次可尙皆未娶。次女適郡守李重輝。生一男。曰濂。生一女。次男天揆娶學生李承淵女。生三男一女。男可居生一女。次皆幼。長男及兩女皆先王考歿。此是公孫行中所?而無名諱。不知出於誰手。然草本不在他。而獨吾家有之。則爲石村公所撰也無疑焉。

 

10) 동명선생집에서

(2007. 1. 29. 영환(문) 제공)

 

東溟先生集卷之四  정두경(鄭斗卿)

因朴安陰寄金子公 得臣

 

住處溪山好。年來信使疏。聊因五馬去。爲寄一行書。

二月花開未。高堂燕到初。應成投轄飮。明府且停車

 

정두경(鄭斗卿)

1597(선조 30)∼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인·학자.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지승(之升)과 증조부 담($담03), 종증조부 염(#염11)·작(碏)은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1626년(인조 4) 문학으로 이름있는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는 벼슬없는 선비로서 부름을 받아 김류(金#유15) 등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 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십난 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 法篇〉·〈징편 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 七條疏〉와 〈원이설 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

 

11) 후천선생집에서

(2007. 1. 26. 영환(문) 제공)

 

朽淺先生集卷之一   후천   황종해(黃宗海  )

金 得臣 子公  韻

天遊隨處有眞樂。不必名區可遣愁。休詑北涯皆勝景。自多南郭亦淸秋。

月同平野三更照。鷗共長川十里浮。我欲俱收足無力。未知君肯乞扁舟

 

與金得 臣 子公  書  

 

昨荷左顧。迨用感篆。夜來侍奉諸況焉如。顓頊不廉。寒氣料峭。未委此時。何以治任上道。

爲之馳情倍品年來。住在相望之地。萬事相倚。肝膽相傾。劇有情味。而忽此分携。淸塵日遠。

南浦傷心。可堪悠悠。初擬略搆荒詞。以寫黯然之懷。而沈呻之中詩罪益多雖欲自力末由也已。

悵望不及。只增弸鬱。君子之別。贈之以言。則其敢全然噤默。以負相愛之情乎。士之名計。

非祗爲競葩藻取科目而已。聖賢許多經籍。亦豈浮辭浪語。汚人行止之比。竊願左右。

毋徒以嘲風弄月爲事。劃將聖賢言行。體貼身心上。又於洛中多人中。擇得有道之人。

與之爲友爲師。始卒毋怠。不至虛了一生。是實朋友之望也。餘紙狹不宣。  謹狀

 

 * 황 종 해(黃 宗 海)

1579년(선조 12년)에 태어나서 1642년(인조 20년)에 돌아갔다. 본관은 회덕이고 호는 후천이다. 아버지는 덕휴이고 아들을 훌륭

하게 기른 분이다. 그는 24세 때 한강 정구를 사사하여 심성의 학문을 연마하였다. 목천에 서원이 없는 것을 탄식하여 후배의 강학처를 제공하고저 도동서원을 세웠다. 목천의 제일의 유학자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며, 순조 때에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문집이 지급까지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현동(縣東) 삼성동(三省洞)에 있다.

 

자는 대진(大進)이고, 호는 후천(朽淺)이다. 본관은 회덕(懷德)으로 황덕휴(黃德休)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자 양호(兩湖) 유생(儒生)들과 함께 상소(上疏)하여 정인홍의 전횡을 논박하였고,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였으며, 1618년 연산(連山)으로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 예학(禮學)을 강의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유(張維)의 천거를 받아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628년(인조 6)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목서흠(睦? 欽) 등의 천거로 영릉참봉(英陵參奉)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장현광(張顯光)·김장생·조익(趙翼)·김득신(金得臣) 등과 서신 왕래하였고,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에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12) 염헌집에서

(2007. 1. 24. 영환(문) 제공)

   출전 : 恬軒集卷之二    임상원(任相元) .   詩 西河任相元公輔著

 

(1)謝柏谷金丈得臣來訪。病不能出見

淸漳病臥斷尋招。未有高談破寂寥。門掩只慙勤命駕。榻懸終阻挹仙標。

才名欲托三都賦。起色誰回八月潮。聞楣槐灘饒勝具。倘因秋興寄瓊瑤  

 

(2)訪金柏谷得臣留贈

峽江雲起放船初。  獨向孤山訪隱居。久識高情輕組綬。    終知隹境在樵漁。

開筵喜把陶公酒。  入室欣窺惠子書。共倚薜蘿仍聽雨。    一床相對練光 餘

 

(3)送玄上人。寄金柏谷得臣

漢中霜鬢倦遊年。歸去槐江一釣船。  淸夢已離名利障。高懷自愛辟支禪。

書窮萬遍稱能讀。詩過千篇任必傳。  莫道閉門徒寂莫。桓譚久識子雲 玄

 

  * 임상원(任相元)

1638(인조 16)∼1697(숙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공보(公輔), 호는 염헌(恬軒).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중(重)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목사 갱생(更生)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5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평안도도사를 지냈으며, 1671년 정언을 거쳐 용강현령이 되었다가 1673년 교리로 승진되었다.

1676년(숙종 2) 청풍부사로 있을 때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80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에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1684년 대사간에 이어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686년 대사헌을 지내고, 1687년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공조판서와 우참찬·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문명이 있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유배시킬 때 전야(田野)에 방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염헌집》 10책과 《교거쇄편 郊居瑣篇》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13) 타문집속의 백곡 시문 (2007. 1. 23. 영환(문) 제공)

 

(1) 죽남집에서

  출전 : 竹南堂稿卷之二     오준(吳竣)

次金柏谷韻

梯飆曾踏素琴樓。萬壑松聲六月秋。

遙望竹西歌吹路。靑山一髮是楊州。

 

盡把書囊載柁樓。滿天星月動高秋。

鍾聲半夜來神勒。已過黃驪第一州。

 

오준(吳竣)

1587(선조 20)∼1666(현종7).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 이조참판 백령(百齡)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지평·장령·필선·수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뒤인 1639년(인조 17) 한성부판윤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뒤 1643년 청나라 세조의 즉위에 즈음하여 등극부사(登極副使)로,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효종 1)에 예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형조판서·대사헌·우빈객(右賓客) 등을 거쳐 1660년(현종 1) 좌참찬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왕가의 길흉책문(吉凶冊文)과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사(公私)의 비명을 썼다.

특히 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죽남당집》이 있으며, 글씨로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忠武公李舜臣碑), 구례의 화엄사벽암대사비(華嚴寺碧巖大師碑), 회양(淮陽)의 허백당명조대사비(虛白堂明照大師碑)·이판이현영묘비(吏判李顯英墓碑), 광주(光州)의 의창군광묘비(義昌君珖墓碑), 일본 닛코사(日光寺)의 닛코산조선등로명(日光山朝鮮燈爐銘), 안성(安城)의 대동균역만세불망비(大同均役萬世不忘碑),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의 벽응대사비(碧應大師碑) 등의 비문이 있다.

 

  (2)염헌집에서

 

恬軒集卷之二  임상원(任相元)

詩 西河任相元公輔著

謝柏谷金丈得臣來訪。病不能出見

 

淸漳病臥斷尋招。未有高談破寂寥。門掩只慙勤命駕。榻懸終阻挹仙標。

才名欲托三都賦。起色誰回八月潮。聞楣槐灘饒勝具。倘因秋興寄瓊瑤  

 

訪金柏谷得臣留贈   

 

峽江雲起放船初。獨向孤山訪隱居。久識高情輕組綬。終知隹境在樵漁。

開筵喜把陶公酒。  入室欣窺惠子書。共倚薜蘿仍聽雨。    一床相對練光 餘

 

送玄上人。寄金柏谷得臣

 

漢中霜鬢倦遊年。歸去槐江一釣船。淸夢已離名利障。高懷自愛辟支禪。

書窮萬遍稱能讀。詩過千篇任必傳。  莫道閉門徒寂莫。桓譚久識子雲 玄

 

임상원(任相元)

1638(인조 16)∼1697(숙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공보(公輔), 호는 염헌(恬軒).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중(重)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목사 갱생(更生)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5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평안도도사를 지냈으며, 1671년 정언을 거쳐 용강현령이 되었다가 1673년 교리로 승진되었다.

1676년(숙종 2) 청풍부사로 있을 때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80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에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1684년 대사간에 이어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686년 대사헌을 지내고, 1687년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공조판서와 우참찬·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문명이 있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유배시킬 때 전야(田野)에 방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염헌집》 10책과 《교거쇄편 郊居瑣篇》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3)<후천선생집>(朽淺先生集)에서

 

朽淺先生集卷之一   후천   황종해(黃宗海  )

次 金 得臣 子公  韻

 

天遊隨處有眞樂。不必名區可遣愁。休詑北涯皆勝景。自多南郭亦淸秋。

月同平野三更照。鷗共長川十里浮。我欲俱收足無力。未知君肯乞扁舟

 

與金得 臣 子公  書  

 

昨荷左顧。迨用感篆。夜來侍奉諸況焉如。顓頊不廉。寒氣料峭。未委此時。何以治任上道。

爲之馳情倍品年來。住在相望之地。萬事相倚。肝膽相傾。劇有情味。而忽此分携。淸塵日遠。

南浦傷心。可堪悠悠。初擬略搆荒詞。以寫黯然之懷。而沈呻之中詩罪益多雖欲自力末由也已。

悵望不及。只增弸鬱。君子之別。贈之以言。則其敢全然噤默。以負相愛之情乎。士之名計。

非祗爲競葩藻取科目而已。聖賢許多經籍。亦豈浮辭浪語。汚人行止之比。竊願左右。

毋徒以嘲風弄月爲事。劃將聖賢言行。體貼身心上。又於洛中多人中。擇得有道之人。

與之爲友爲師。始卒毋怠。不至虛了一生。是實朋友之望也。餘紙狹不宣。  謹狀

 

황 종 해(黃 宗 海)

 

 1579년(선조 12년)에 태어나서 1642년(인조 20년)에 돌아갔다.

본관은 회덕이고 호는 후천이다. 아버지는 덕휴이고 아들을 훌륭

하게 기른 분이다. 그는 24세 때 한강 정구를 사사하여 심성의

학문을 연마하였다. 목천에 서원이 없는 것을 탄식하여 후배의

강학처를 제공하고저 도동서원을 세웠다. 목천의 제일의 유학자

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며, 순조 때에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그

의 문집이 지급까지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현동(縣東) 삼성동

(三省洞)에 있다.

 

자는 대진(大進)이고, 호는 후천(朽淺)이다. 본관은 회덕(懷德)으로 황덕휴(黃德休)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자 양호(兩湖) 유생(儒生)들과 함께 상소(上疏)하여 정인홍의 전횡을 논박하였고,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였으며, 1618년 연산(連山)으로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 예학(禮學)을 강의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유(張維)의 천거를 받아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628년(인조 6)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목서흠(睦? 欽) 등의 천거로 영릉참봉(英陵參奉)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장현광(張顯光)·김장생·조익(趙翼)·김득신(金得臣) 등과 서신 왕래하였고,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에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회덕황씨

황종해(黃宗海)는 황덕휴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1년(광해군3)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1613년(광해군5)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1618년(광해군10) 연산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을 강의 받았다 1628년(인조6)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에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그의 아들 황유(黃裕)는 태종의 부마로 회천위에 봉해졌다. 후천(朽淺) 황종해는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덕휴(德休)의 아들로 광해군 때 유생들과 함꼐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학을 배웠다. 인조반정 후에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동명선생집>에서

 

東溟先生集卷之四  정두경(鄭斗卿)

因朴安陰寄金子公 得臣

 

住處溪山好。年來信使疏。聊因五馬去。爲寄一行書。

二月花開未。高堂燕到初。應成投轄飮。明府且停車

 

정두경(鄭斗卿)

1597(선조 30)∼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인·학자.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지승(之升)과 증조부 담($담03), 종증조부 염(#염11)·작(碏)은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1626년(인조 4) 문학으로 이름있는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는 벼슬없는 선비로서 부름을 받아 김류(金#유15) 등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 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십난 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 法篇〉·〈징편 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 七條疏〉와 〈원이설 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

 

 (5) <호곡집>(壼谷集)에서

 

壼谷集卷之九  남용익(南龍翼)

 

槐州東閣與金子公 得臣 詞丈走筆聯句。次弇州二十韻

 

黃堂偸暇日。相對共欣然。 公 一葉知秋早。三杯引興偏。 雲

雲陰移小砌。日脚照華筵。公 勝事兼良會。新歡續舊緣。  雲

追隨思洛下。談笑劇樽前。公 質愛金無礦。詞驚玉有煙。  雲

歎吾衰相甚。羨子大名傳。公 鄕貢曾聯䄘。官郊昔駐鞭。  雲

幾年成別夢。今世檀詩權。公  序齒推張說。論文愧謫仙。 雲

重逢湖外地。共滯崍中天。公  未及浮査節。將同泝漢舡。 雲

江州南到久。京國北歸先。公 已限閑忙境。空吟聚散篇。  雲

七歌雖似甫。三絶敢如虔。公 倏若三星會。終難四美全。  雲

蠖蟲長局縮。鵬鳥任騰鶱。公 見月思玄度。登樓憶仲宣。  雲

離心悲此夕。後約在何年。公 永擬辭簪組。尋君佛嶽顚。  雲

 

남용익(南龍翼)

1628(인조 6)∼1692(숙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령.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부사 득명(得明)의 아들이다.

1646년(인조 24)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과 삼사를 거쳐, 병조좌랑·홍문관부수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잠시 경사도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삼사로 돌아왔다.

1655년(효종 6)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관백(關白)의 원당(願堂)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 공급이 중지되고, 여러가지 협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다.

이듬해 돌아와 호당(湖堂)에 뽑혀 들어갔고 문신중시에 장원,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형조·예조참의, 승지를 역임하고 양주목사로 나갔다.

현종 때는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을 빼고는 전 참판을 지냈으며, 잠시 외직으로 경상·경기감사로 나갔다가 형조판서에 올랐다.

1680년(숙종 6)부터 좌참찬·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689년 소의 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아 숙종이 그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여기에 극언으로 반대하다가 명천으로 유배되어 3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효종·현종·숙종 3대에 걸쳐 청화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문명을 날렸으나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늘 근신하고 근면하였다.

저서로는 신라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명인 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 箕雅》 및  《부상록 扶桑錄》, 그리고 자신의 시문집인 《호곡집》을 남겼다.

 

 (6)<구당선생집>(久堂先生集)에서

 

久堂先生集卷之一  박장원(朴長遠)

遊三角山中興寺。權士逑 伉 ,金子公 得臣 ,金建中同遊

已負尋山計。茲行忽孟冬。石門寒日隱。苔逕濕雲封。

廢堞悲前代。荒碑記古蹤。諸天知漸近。林杪出疏鍾

 

寄子公  

自我遊江國。知君憶故林。書中如對面。夢裏亦論心。

缺岸春潮急。環洲暮靄深。樓高易愁思。獨費短長吟

 

詩○淮安錄庚午辛未年間。公外祖沈忠烈公宰淮陽。而忠烈公弟判書公宰安邊。淮與安隔一嶺。忠烈公奉板輿往來二府。公時隨侍有此錄。自謹次外大父郡齋卽事韻至楓岳與晴峯分路。卽是時作

 

金子公遠來相訪

久謂死於亂。何緣得並生。別離未堪恨。邂逅忽相驚。

握手各垂淚。聞言皆厭兵。況哀張也逝。寧忍此時情。

原韻 子公

誰知此會有。幸賴又偸生。顏面看仍舊。艱難說輒驚。

晝常聞野哭。夢亦避胡兵。錫友幽明隔。那堪獨愴情。

 

成歡驛樓。口占贈別子公。 二首

風颯陂塘氣似秋。驛邊殘日更遲留。天收急雨生明月。欲看荷珠急上樓。

雨黑河南古驛樓。客行兼爲賞荷留。預愁明日分岐處。萬樹蟬聲報早秋

 

次子公韻

村居相對只茅簷。流轉殊方百慮兼。多病形骸長服藥。一秋消息早穿簾。

故人惜別淸尊滿。遠客思歸白髮添。跨馬出郊聊極目。海山無數劍鋩尖。

 

詩○淮安錄庚午辛未年間。公外祖沈忠烈公宰淮陽。而忠烈公弟判書公宰安邊。淮與安隔一嶺。忠烈公奉板輿往來二府。公時隨侍有此錄。自謹次外大父郡齋卽事韻至楓岳與晴峯分路。卽是時作

 

金子公遠來相訪

久謂死於亂。何緣得並生。別離未堪恨。邂逅忽相驚。

握手各垂淚。聞言皆厭兵。況哀張也逝。寧忍此時情。

原韻 子公

誰知此會有。幸賴又偸生。顏面看仍舊。艱難說輒驚。

晝常聞野哭。夢亦避胡兵。錫友幽明隔。那堪獨愴情。

 

成歡驛樓。口占贈別子公。 二首

風颯陂塘氣似秋。驛邊殘日更遲留。天收急雨生明月。欲看荷珠急上樓。

雨黑河南古驛樓。客行兼爲賞荷留。預愁明日分岐處。萬樹蟬聲報早秋

 

次子公韻

村居相對只茅簷。流轉殊方百慮兼。多病形骸長服藥。一秋消息早穿簾。

故人惜別淸尊滿。遠客思歸白髮添。跨馬出郊聊極目。海山無數劍鋩尖。

 

 詩○西原錄

丁丑至月初二日。子公來訪於西原旅舍。夜坐聯句

 

西原客舍歲將闌 仲久 。草木蕭條凍雪殘 子公 。不遇故人那此境 仲久 。且搜奇句敵高官 子公 。孤燈照壁寒無焰 仲久 。薄酒盈杯味更酸 子公 。明日挹淸堂上去 仲久 。共憑危檻聽風湍 子公 。

 

雨雪交霏節已闌 仲久 。羈人贏得鬢毛殘 子公 。藥鑪茶鼎供多病。高馬朱門付達官 仲久 。身世政同潘岳拙。詩篇敢擬聖兪酸 子公 。如今何必傷遭亂。本是深潭自激湍 仲久 。

 

次子公韻

南石橋邊路。西原郭外村。那知瘦杜甫。忽訪病文園。

烏鵲喧休市。笳簫咽閉門。俱爲望鄕客。今夕倍銷魂

 

又次子公韻

足繭湖西數十程。逢君垂淚說昇平。華筵夜飮月沈閣。快馬春遊花滿城。

亂來爲客謀衣食。到處無人識姓名。何事官梅且欲着。望鄕吾已不勝情

 

晩發天安。夜投金子公幽居

策馬衝泥泥浩蕩。伏龜亭下政黃昏。燒痕夾岸方知路。雨氣沈山不辨村。

塵裏冥行曾已熟。客間疲役更堪論。羨君一室閒無事。對卷停燈獨閉門

 

詩○驪江錄

 

有懷子公  

自君東入海。吾亦客驪州。嶺路常通夢。江雲每起愁。

月明神勒寺。花暗竹西樓。會合期何日。相思白盡頭

 

寄金子公書於曹亞使

有客客三陟。其人潘陸才。又能壯士飮。誰肯王孫哀。

把酒迎群帝。吟詩倚五臺。憑君寄書札。爲勸早歸來

 

寄金子公

君爲五臺客。我滯驪江頭。驪江之水出自五臺山。遙遙千里西南流。

流波之中足鯉魚。何無一書令人愁。兩地離懷已秋序。空嗟急景無停留

 

詩○南征錄是年秋。公訪尹聘君於嶺南。自自驪江向嶺南至水橋道中。卽是時作

金子公自嶺南移家忠州之新塘。卽日見訪。盛稱鏡湖堂之勝。爲賦一律

有客來從東海東。自言曾訪鏡湖翁。名因賀監風流勝。閣擅滕王州邑雄。

銀闕轉空秋水白。金鴉颺彩曉雲紅。仙區入夢身匏繫。骨蛻何人老此中

 

送子公入京

萬逕千山雪政飛。逢君忽復送君歸。曼翁若問吾消息。歲暮江村獨掩扉

 

次石洲八音歌。寄金子公

金生江海士。得我爲鍾期。石交二十載。暫別輒相思。

絲飮日無何。雖賤亦不悲。竹溪慕前隱。愧我不得追。

匏繫朝市間。何事賦歸遲。土婁非無計。予心子知之。

革舊際中興。低徊任君嗤。木果此相投。敢道文章爲

 

送金進士子公南歸

三月湖州路。君今戰勝歸。故鄕寒食節。新樣稱身衣。

夜雨催花動。春帆共鳥飛。那堪離別後。柴戶掩斜暉

  

詩○花縣錄自次子公韻至養痾。係錄中作

 

次子公韻

風塵聚散幾多年。此日他鄕復此筵。朋友自傷追送意。男兒輕賦遠遊篇。

春流岸岸初經雨。寒食村村不起煙。嶺樹明朝遮兩眼。離杯且莫惜頻傳。

 

原韻 子公

乖角相思已隔年。今春逢着又離筵。世間誰惜馮唐老。嶺外人驚蘇子篇。

日暖郵亭梅似雪。雨晴官路草如煙。煩君莫道湖州遠。一札須憑信使傳

 

次子公韻

風塵聚散幾多年。此日他鄕復此筵。朋友自傷追送意。男兒輕賦遠遊篇。

春流岸岸初經雨。寒食村村不起煙。嶺樹明朝遮兩眼。離杯且莫惜頻傳。

 

原韻 子公

乖角相思已隔年。今春逢着又離筵。世間誰惜馮唐老。嶺外人驚蘇子篇。

日暖郵亭梅似雪。雨晴官路草如煙。煩君莫道湖州遠。一札須憑信使傳

 

次鄭東溟君平 斗卿 寄永同叔父韻贈子公

亂後餘生困。年來此會稀。勑廚供客饌。勸酒汚征衣。

紅見梅花綻。靑知柳葉歸。那堪嶠南路。春雁背人飛。

嶺路客行遠。京關音信稀。從敎安邑酒。剩濕侍臣衣。

野燒山腰入。春光沙觜歸。相追惜別處。愁見暮雲飛。

 

原韻 東溟

之子先君子。治聲古亦稀。長留鬱林石。付與老萊衣。

縣已栽花罷。車應冒雨歸。春來桑葉綠。山雉向人飛。

 

次韻 子公

二月今將盡。芳花發處稀。霜華添老鬢。風力捲春衣。

小縣煙霞暮。深林鳥雀歸。一辭京國久。惟有夢魂飛

 

示子公

小邑依山麓。喬林擁草亭。溪聲來客枕。苔色滿公庭。

雨檻詩初就。風窓酒易醒。忽驚寒食節。猶作一浮萍

 

贈子公

笑領銅章度嶺時。風煙着處馬行遲。酒醒山館初聞雨。興動官梅忽得詩。

與君共作他鄕會。怪我能成此段奇。海岳高尋應有待。丁寧莫負九秋期

 

贈子公

嶺外征途遠。湖西春日遲。吾儕會異縣。茲事若前期。

雨黑留人處。花明送客時。相傾百壺酒。各賦幾篇詩

 

與子公分路

稽山霧罷路高低。五馬南征匹馬西。黃澗赤津樓上去。酒醒離思各悽悽。

 

黃澗駕鶴樓。有懷子公

山頭霧初罷。晩飯出稽州。峽束疑無路。林開忽聳樓。

叢篁花盡亞。亂石水交流。恨不携吾友。新詩此共搜

 

寄金子公  

才疏縣小絶無營。長夏樓居枕簟淸。詩着海棠微雨色。夢驚山竹亂鴉聲。

携家未覺身爲客。耽酒唯應醉得名。問子何時能命駕。懸知不惜白雲程

 

次子公韻  

小邑天成峽裏村。村前一派水分源。竹深時見驚麏竄。谷邃還疑猛虎蹲。

訟息一春恒鎖印。客來今日始開門。憑君莫話當時事。北望朝廷醉眼昏

 

縣齋書懷示子公二十韻

邑里絃歌愧子游。使君無事但遨遊。吏人纔暑山頂。漁子相邀到水頭。蔭樹行春時見鹿。臨淵乞雨更沈牛。不空北海樽中酒。猶得歐陽果下騮。鶴洞轉幽思着屐。鰻溪初漲可方舟。趙侯文字鐫奇石。鄭老經營有一樓。歲月幾回陵谷變。風煙猶帶古今愁。爲官自幸依廬阜。作記何能似柳州。峽裏旅懷還悄悄。夢中鄕路劇悠悠。移床夜貯松窓月。煮茗朝浮石鼎漚。千里故人驚忽到。一旬東閣得相留。他鄕命駕君容易。異境尋眞我自由。盤薦陸蓴絲樣細。杯傾杜酒蟻添浮。簿書久滯窮遊宴。政化還妨速置郵。官裏廚羞貧亦辦。袖中詩本醉難收。幽棲雅志宜長往。聖主隆恩待暫酬。田里終尋陶令賦。江湖那免范公憂。誅茅且結三間屋。拄扙 편001時臨百丈湫。謀食肯爲兒女計。鍊丹應逐道家流。何當共入桃源去。花發知春葉落秋

 

편-001]扙 : 杖

 

次子公韻 二首  

落日前溪散彩霞。溪頭開盡刺桐花。公庭訟息猶嫌鬧。整履携筇步水涯。

心同僧靜與雲閑。天遣吾人臥此間。德裕千峯爲後嶺。頭流萬疊是前山

 

次子公韻

煙柳如絲綠萬條。畫樓東畔是官橋。長安俠客南踰嶺。腸斷佳人舞細腰

 

示子公

湖州客子滯他鄕。聽雨經旬不下堂。桑葚欲甘鴉啄數。芹泥初濕燕含忙。

看山我得公餘句。掃地君燒坐處香。莫道冷官無一事。松枝作架竹編房。

 

次子公韻 二首

雨餘山日閃餘暉。已掩林中白竹扉。長夏公庭無客到。繞簾雙燕自飛飛。

鰻溪之水淸若空。黃石山氣常蔥瓏。日接永嘉金子飮。時時裸體竹林中。

 

柬子公  

峽深公事少。坐嘯度三秋。落葉塡官路。歸雲擁縣樓。

吏愁村酒覓。民怪岳僧留。得句憑誰說。支頤夢柏州。

 

漫吟用去年子公韻

病來心力省經營。忽得新詩分外淸。投竹野鴉拖暝色。隔林村犬吠秋聲。

自知懶性難供世。終擬閑居不用名。昨夢分明尋故里。華山西畔是歸程。

 

宵直玉堂題子公詩卷

凡材慙愧鼠偸倉。夢罷凝香上玉堂。三洞雲煙衣濕翠。九霄星月燭分光。

借詩此夜同蘇李。伴直何人學孟王。明日紫宸朝退後。携錢共醉酒壚傍

久堂先生集卷之三

 

簡金子公。 二首。○時公也新除參奉入直肅寧殿  

長安二月雨初收。日夕相思兩處愁。病起春城花滿眼。詩成淸廟雪侵頭。

漸看物色偏生態。又聽禽聲已嘯儔。菖杏節來身繫縛。共憐歸夢着西疇。

春色今年已滿城。知君厭直此時情。老夫病劇懸鞍久。詩伯官卑束帶生。

宮苑繁花迎麗日。市橋垂柳媚新晴。何當共就終南宅。斗酒賖來細細傾

 

報子公書

不見斯人二月破。頻將尺素問如何。書生病後煙花盛。燕子來時風雨多。

出處如今同墮網。光陰從古劇飛梭。燒香癡坐簾垂地。強緝閑詩却睡魔

 

偶次晦翁先生集中韻示子公  

君能張旭草聖傳。又能宗之望靑天。昌陵道傍一杯別。問我西遊曷月旋。別來隨處長相思。江樓雪月漁浦煙。榮名之人蟣蝨如。問學之士農馬專。一朝策騾凌大河。儒裝書劍還蕭然。鈴齋務屛引急觴。老狂依舊飮中仙。自比鄭莊勤置驛。顧同杜甫懶回鞭。酒闌却憶十年事。昔會安陰今白川。爲問挐舟向湖南。何如據石臨淸泉。一官一集非我事。爲君強和伐木篇

 

臘月末送子公還京

客間已度臘嘉平。分路君今向洛城。得酒休須拚痛飮。將詩不必取虛聲。

要知古聖相傳祕。的指吾心本體明。敬字拈來究竟法。免敎終作一書生

 

早春郡齋夜坐。有懷子公

凡才曾汚幾官曹。撫字西州卒歲勞。病後羸形淸似竹。春來歸思涌如濤。

臥聞前浦寒潮急。起視中天片月高。忽憶故人分手處。凍泉晴雪是臨皐

 

聞張季遇 留 亡。見金子公書

執友云亡命矣夫。壽多廣漢少橫渠。渠今觀化歸天上。我尙爲人守貊墟。

一樹寒梅棲草莽。半輪明月映空虛。此心海內誰知者。淚濕花山數字書。

 

別後有懷子公

古峽官人冷。淸秋客子悲。石枯灘更響。霜重草全衰。

百計違心素。千愁集鬢絲。那堪相送地。又負菊花期

 

久堂先生集卷之四

 

詩○東州錄幷序○錄中酬唱之詩合二十餘首。而所選只八首。自陪叔父入淸平山至歸路値雨。係錄中作

 

陪叔父入淸平山。金子公,黃道原 晙 偕

幾度淸平去。茲遊料未曾。欣然侍吾叔。況復有親朋。

古峽江濤吼。秋天岳翠增。欲將今日趣。摹寫與林僧。

次韻 叔父

暮入淸平寺。仙緣若有曾。鍊丹憐老釋。秉燭對詩朋。

山骨天邊瘦。溪聲雨後增。自慙齒已暮。頭髮禿如僧。

又 子公

渡江入洞府。仙境見何曾。引興那無酒。論詩況有朋。

經秋楓葉積。向夕水聲增。病客元消渴。香茶乞嶽僧。

 

次子公韻  

黃生能飮者。嗔我勸杯遲。金子詩名大。揮毫發興奇。江風吹葉盡。峽雨帶煙滋。簿牒妨觴詠。吾嗟甚矣衰。

原韻 子公

羈人留不去。其奈雨晴遲。息老名聲遠。然師字體奇。暮林黃葉脫。秋石紫苔滋。憑檻沈吟苦。應添兩鬢衰。

 

黃生自忠原見訪。云去秋與子公遊俗離山。而頗說其峯壑之勝。爲賦三絶

聞君秋醉俗離中。驢背看馱瘦子公。更說珊瑚臺上鶴。秪今惆悵舊巢空。

俗離蒼翠聳雲中。中有禪房着性公。遊客自言曾聽法。滿襟塵慮此時空。

羨君遊跡遍湖中。蠟屐尋山擬謝公。更說十分奇事在。水晶峯上看秋空

 

八月旬後一日。與子公,建中。出漢上口號

秋陰障日有餘姿。匹馬群行似不羈。近侍古來難浪跡。親朋此會亦佳期。

終山隱隱纔通逕。淸漢滔滔故作池。歸去怳然如一夢。五更待漏鬢垂 一作成 絲。

秋陰障日有餘姿。匹馬群行似不羈。近侍古來難浪跡。親朋此會亦佳期。

終山隱隱纔通逕。淸漢滔滔故作池。歸去怳然如一夢。五更待漏鬢垂  一作成 絲。

久堂先生集卷之七

 

 詩

與金子公,黃道原守歲。次高適韻。 二首

櫪馬林鴉不得眠。滿堂童稚亦欣然。持杯壽母丁寧祝。每覺來年勝去年。

醉後三豪相對眠。雪花霜鬢共飄然。明朝祝聖無他語。只是千年更萬年

 

示子公

雪水溶溶漲此溪。閑行得句政堪題。寒天落日依山盡。側島殘雲去樹低。

未忘時危頭自皓。忽逢春至意都迷。耳聞征雁雙雙北。應過吾鄕石瀨西。

 

雪水溶溶漲此溪。閑行得句政堪題。寒天落日依山盡。側島殘雲去樹低。未忘時危頭自皓。忽逢春至意都迷。耳聞征雁雙雙北。應過吾鄕石瀨西。

 

疊前韻示子公

希天希聖仰濂溪。書解曾參谷老題。精一未傳心已殆。利名難透事皆低。

光陰鼎鼎何由挽。岐路茫茫到處迷。楊柳微風吹獨立。月輪猶在小橋西。

 

久堂先生集卷之七

詩○松都錄幷序○酬唱之詩合五十餘首。而只抄十三首。自待子公至次子公韻。係錄中作

 

待子公

山園雪月好誰看。坐聽松風分外寒。之子有期應不負。計程今夜宿天安。

 

次韻 子公

尊前顏面共相看。忘却中宵朔氣寒。欹枕官齋成小睡。依依歸夢到長安。

 

次子公韻  

碧嵩千載興亡地。唯見孤雲自在閑。風物幾回悲過客。樓臺太半對層巒。

寒郊老木長亭畔。明月疏鍾古堞間。與子相逢當歲暮。不堪雙鬢倍詩斑。

 

原韻 子公

西遊客子幾時還。汩汩人寰不暫閑。淸響尙留啼恨水。翠鬟猶在聳重巒。

廢城喬木朝煙外。荒店疏林夕照間。惆悵繁華今已過。只看螭陛古苔斑

 

次子公韻

一別音書隔。相思老病催。幾經新月破。復見故人來。

葭管浮灰動。梅梢暖氣廻。此堂侔醉白。且莫訴含杯

 

次子公韻  

有酒恒同醉。無詩不共吟。老來傷旅鬢。夜坐憶家林。

晴雪峯巒積。寒雲睥睨侵。流光此中促。忽覺一冬深。

 

原韻 子公

鄕國思歸客。隆冬抱病吟。身如猿失木。心羨鳥投林。

半壁燈花落。疏簾月色侵。持杯相勸處。不覺四更深

 

次子公韻

有酒恒同醉。無詩不共吟。老來傷旅鬢。夜坐憶家林。

晴雪峯巒積。寒雲睥睨侵。流光此中促。忽覺一冬深。

 

原韻 子公

鄕國思歸客。隆冬抱病吟。身如猿失木。心羨鳥投林。

半壁燈花落。疏簾月色侵。持杯相勸處。不覺四更深

 

次子公韻  

黃昏鍾動閉衙門。聽雪燈前憶故園。醉裏誤疑蕭寺宿。夜窓松檜朔風喧。

 

原韻 子公

空庭吏散掩重門。急雪紛紛下小園。此夜燈前欹枕宿。天磨飛瀑夢中喧。

 

次子公韻

緬思麗祖應昌期。羅祚終輸寶鼎移。佛敎誤傳家化日。孫謀無賴國亡時。靑松黃葉仙翁讖。

流水殘雲 一作雪月寒鍾 過客詩。舊德不隨年代泯。路人猶指顯陵碑。

 

次子公韻

柏谷春應動。松山雪政深。君今又回轡。誰與共開襟。

野日蕭蕭暮。城雲處處陰。那堪垂老別。長路更關心。

 

槐江醉默堂八詠 堂卽金子公所居

隱見巖姿雨後加。幽人春望岸烏紗。東風莫遣顚狂甚。放杖明朝試訪花。 右瓮巖看花

寒棲前夜硯池氷。萬木朝來凍欲折。淸賞唯憐岳面皚。不愁僧舍渾埋雪。 右佛岳賞雪

槐安郡前江可憐。數家茅屋住江邊。居民幸獲魚鹽利。門泊西湖估客船。 右江口商船

野渡人歸樵唱罷。蒼蒼暝色前林鎖。 一作小童持炬催江舸 閑人取適不論魚。只愛詩中使漁火。 右頭漁火

長橋跨水水粼粼。路指郊原草色新。未病褰裳民自得。豈知渠作畫中人。 右野橋行人

蒹葭摧折露爲霜。水碧沙明兩相間。估客移舟發棹謳。幾行驚起隨陽雁。 右浦沙驚雁

黃牛古峽水西南。遠勢微茫旭日含。最是十分難狀處。餘霞纔散作浮嵐。 右牛峽朝嵐

南有神龍在山湫。幾許噓雲又泄霧。第怕遊人脚底雷。天瓢趁暮輕行雨。 右龍湫暮雨

 

憶金子公

選部初休沐。灘居暫滯留。風帆雀津暮。煙樹鷺湖秋。詩句時時得。身痾稍稍瘳。有懷人不見。涼月在西樓。

 

久堂先生集卷之七

詩○松都錄幷序○酬唱之詩合五十餘首。而只抄十三首。自待子公至次子公韻。係錄中作

 

憶金員外 卽柏谷  

槐陰淹別日。松下拆書時。新葺三間屋。勤求八詠詩。

依俙輞川畫。浩蕩鹿門期。目極湖雲暮。歸鴻續過遲

 

久堂先生集卷之八

 

招隱書懷次韻寄子公

別我同袍歲幾廻。新春猶阻尺書來。南留久作池中物。北望應登江上臺。

梅蕊耐寒能獨訪。竹林經臘更須栽。杭州袖裏新詩本。工部林中濁酒杯。

市罷人歸橫野艇。客稀誰到損庭苔。幽居是處名何用。要路當年眼不開。

靜慕考槃雖濩落。閑吟伐木且徘徊。山思蠟屐供探歷。水着浮槎待泝洄。

莊叟自甘龜曳尾。屈平虛道鴆爲媒。小山招隱猶堪賦。莫遣相思老病催

 

疊前韻有懷子公

故人湖外隔雲岑。一別三年老病侵。世上榮枯皆昨夢。體中安否是來音。

暮天渺渺窮雙眼。秋月盈盈鑑寸心。飯顆相逢定何日。尊前聽誦白頭吟

 

贈子公二十韻  

昔別三年後。今秋八月中。相迎眞款款。餘事便空空。

梧瀨西江北。槐州上黨東。漁樵留俊士。簪笏誤衰翁。

病爲塵勞劇。詩因地勝雄。夢廻心愈苦。書到字偏工。

撫迹悲萍梗。搜材愧藥籠。江山閑者主。出處異而同。

共勉根基地。誰收刊落功。來猶喜命駕。去似怯抨弓。

覓酒謀諸婦。題詩倩小童。櫪空嘶瘦馬。門掩叫寒蟲。

旅店良才月。歸帆漢水風。容顏從此隔。音墨若爲通。

有客能傾蓋。如依自直蓬。開懷俱白首。對菊尙靑叢。

阿堵添斯疾。詞場付我公。天時屬歸燕。人意似翔鴻。

晩節宜相戒。離言豈易終。前期雖有在。休惜遞詩筒。

 

 憶子公臨行子公自鄕至暫敍而別  

相逢相別也悤悤。獨在孤舟明月中。楮島落帆投古寺。手披僧卷憶詩翁

 

久堂先生集卷之十四

送金子公南歸序

 

夫名勝恥也。實勝善也。人苟能眞知實勝之爲善而名勝之爲恥。則心日休而無憂矣。余友金君子公。

少有奇氣疏節。而以能詩伏一世。人知其有詩而不知其爲人之如何。旣而棄其詩。學爲古文。

於莊,馬,韓,柳,歐,蘇之屬。大肆其力。而駸駸乎作者畛域。然亦以詩聞也久。故人猶不知其有文也。

旣而又棄其文。遂反以求之於孔子,子思,孟程之書。伏裡之數年。其所見煞高。而人亦知其有文而不知其爲學矣。

夫何故。其實在我。而名也在人。人之知之。知有其名。不知有實。而實有所掩焉耳。亦何與於我哉。惟當益務其實。

不貴其名。而孶孶焉不已。則向所謂日休者在是。而靜虛動直之學。不難致矣。歲庚寅仲秋。訪我自湖之西。

是我至春之明年也。計欲轉入淸平。作半日之遊。蓋緣忙歸而取見山之名也。余挽而止之。以爲姑取其名。

曷若終求其實哉。子公乎。與我約以來歲。共入仙洞息庵之間。窮探影池龍潭之勝。而見其眞面目。

則此亦務實之一端也。子公然我言。遂宿留州宅五六箇日。乃告南歸。余 缺 剟取周子通書中數語以別

 

*박장원(朴長遠)

1612(광해군 4)∼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

 

직장(直長)을 지낸 훤(烜)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생원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그해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외할아버지인 심현(沈$현02)을 따라 강화도에 피난하였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1640년 정언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승지로 있을 때에 남인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58년 상주목사에 이어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1664년(현종 5)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에 이어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예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뒤 자청하여 개성부유수에 부임, 재직중에 죽었다.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     )에 남인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58년 상주목사에 이어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1664년(현종 5)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에 이어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예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뒤 자청하여 개성부유수에 부임, 재직중에 죽었다.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7) <金剛山錄>

(2007. 7. 24. 영윤(문) 제공)

柏谷先祖文集冊六-雜著

 <원문>

乙巳八月丁卯。發高城郡抵百川橋。楡岾僧十餘屬持籃輿待之。與李大來,柳海宗各乘。踰狗嶺至楡岾。日已仄因留寢。戊辰詰朝。乘籃輿至蹴水窟。奇巖稜角參差。捨籃輿。扳木根而上絶壁。尋狹窄細路而徐行。厓下停籃輿。攀隱仙臺而登。據翠石縱觀十二瀑。其狀若倒銀河拖長虹。瀑之左右。蒼壁爲屛。石角或如攢劍。或如列戟。有大者小者。蒼檜密密。丹葉雜糅。瀑之上石間。古有靑鶴寄巢。歲甲寅。棄巢而去。其後弗復廻。此僧之相傳說也。恐日脚沒雲。還下來。乘籃輿至內水岾。此內外山界也。內山僧持籃輿已待。余暫憩息。打包吃朝飯。乘籃104_194b輿下邃谷。望見天半崱屴之峯橫亘雲外。意甚壯之問之。僧曰毗盧峯矣。仍吟許荷谷八月十六夜獨立毗盧頂之句。至李許臺邊。有木橋腐朽。神渡之。乘籃輿至彌勒臺邊題名。至摩訶衍古庵。義湘師之所搆云。登階。老釋兩人出而迎之。相與語。且題名于柱上。仰見庵後峯巒峭峻。上揷蒼穹。下詰曲石逕。觀危巖側立一銅柱。搆二層閣。心極危之問之。僧曰古之普德師刱之。閱數千祀而不頹。豈非普德師之精靈爲護持而然歟。至萬瀑洞。其磐石或平或夷或坱 。其泉流或俴或深。而弗似瀑布之狀。然得此萬瀑之名。未知古之何者名之而名實不相符耶。盤石上。楊蓬萊所寫蓬萊楓岳元化洞104_194c天八字。至今蟠屈。怳若蛟龍踴躍飛騰之狀。許筠寄崔簡易書曰。楊蓬萊字畫之壯。與此山爭雄。豈不信矣乎。自萬瀑洞出石門。至表訓寺。此波崙菩薩所創。距楡岾五十里也。催夕飯。以止枵腹之雷。又向長安寺而去。與方伯李子喬相遌。日將昏黑。飮燒春一醆。紓其弸菀而驩謔。明燭促膝。杜子美所詠夜闌更秉燭相對如夢寐者。正謂此也。己巳早朝。李子喬別吾儕去。吾儕乘籃輿還歸表訓。携柳海宗上正陽寺。寺麗祖所建。未及其寺也。先陟天逸臺而周覽其山之勝狀。優於隱仙臺之所見。至正陽寺。憩歇惺樓。倚欄放目。非天逸隱仙之比也。諸峯羅列。不可勝數。余問僧曰。諸峯皆有名乎。曰。各有104_194d其名。欲聞其名。略擧梗槩。以手指之曰。彼獅子峯也。彼小香盧峯也。彼金剛臺也。彼穴網峯也。彼五賢峯也。彼大香盧峯也。彼望高臺也。彼安養峯也。彼白馬峯也。彼十王峯也。彼觀音峯也。彼長慶峯也。彼釋迦峯也。此歇惺樓之所觀梗槩也。此山峯數。或曰一萬二千峯。或九萬六千峯。難可計其數也。愛諸峯奇奇怪怪之狀。留數日于歇惺樓。目在之其峯。或有大者。或有小者。或有圓者。或有尖者。或有飛者。或有舞者。或有戟立者。或有人立者。或有龍盤者。或有虎踞者。或離而合者有之。或縱而橫者有之。或先而後者有之。或而凹者有之。或東或西或南或北者簇簇相排。此山之峯。多現於人目者。104_195a唯獨歇惺樓也。是故欲觀此山之眞面者。不先他所。必先於此所。蓋爲盡見諸峯之狀而先到耳。其形勝必欲次第之。歇惺樓第一。隱仙臺第二。摩訶衍第三。餘外無可寄目處。而擧世稱勝地。必以萬瀑洞爲第一。余不勝捧腹。李啓賢謂余曰。欲見金剛山。直往正陽寺。登歇惺樓留三日。則不勞登陟而可以盡見諸峯。其言果符。啓賢之出入金剛。已四十餘年所。方伯之裨將任翊夏。武弁之魁傑。擬觀正陽勝致。昨日隨吾儕同到。半餉間遊翫。日未匿旋歸。方伯留官吏數輩數日。爲吾儕。以其所餘糇糧海錯餽之。所供極侈靡。蓋自槐州至高城。道路之遠近。溪山之秀麗。郡縣之肥 。人俗之美惡。舍之不104_195b紀。

 

 <국역>

 

 금강산록1665년 을사년(현종 6년) 8월 14일 정묘일.

고성군(高城郡)을 출발하여 백천교(百川橋)에 도달하니 유점사(楡岾寺)의 승려 10명이 남여(藍輿)를 갖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래(李大來), 유해종(柳海宗)과 각기 남여를 타고서 구령(狗嶺)을 넘어 유점사에 도착하였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유숙하였다.

 

8월 15일 무진일.

이른 아침 남여를 타고서 축수굴(蹴水窟)에 도착하니, 기이한 바위가 뾰족하고 가지런하지 않았다. 남여에서 내려 나무뿌리를 끌어당기며 절벽에 올라가서 좁고 가는 길을 찾아 천천히 걸어가다가 벼랑 아래에 남여를 멈추고서 은선대(隱仙臺)를 부여잡고 올라가 푸른 바위에 의지하여 12폭포를 두루 보니, 그 모습은 마치 은하수를 뒤집어 놓은 것 같고 긴 무지개를 끌어당겨온 듯하였다. 폭포 좌우에는 푸른 절벽이 병풍을 이루었는데, 돌 모서리가 혹은 칼을 모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창을 나열해 놓은 것도 같았으며,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고, 푸른 노송나무는 빽빽하고 붉은 잎들이 섞여 있었다. 폭포 위의 돌 틈에는 그 옛날 청학(靑鶴)이 깃들어 살던 둥지가 있었는데, 갑인년에 둥지를 버리고 떠나가 그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바, 이는 승려들이 전하는 말이다. 해가 질까 염려되어 도로 내려와 남여를 타고 내수점(內水岾)에 이르렀으니, 이곳은 내금강과 외금강의 경계이다. 내금강의 승려들이 남여를 갖고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쉬면서 행장에 있던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서 남여를 타고 깊은 골짜기로 내려와 창공으로 높이 솟은 봉우리가 구름 박으로 뻗친 것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매우 장엄하다고 여겨져 물어보니, 승려가 “비로봉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곡(荷谷) 허봉(許篈)의 “八月十六夜, 獨立毘盧頂”이라는 구절을 읊었다. 이허대(李許臺) 가에 이르니 나무다리가 부패하였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건넜다. 남여를 타고서 미륵대(彌勒臺) 옆에 도착하여 이름을 적고서 마하연(摩訶衍)의 옛 암자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은 의상대사(義湘大師)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계단에 올라가니 늙은 승려 두 사람이 나와 맞이하였다. 함께 말을 하고서 기둥 위에 이름을 쓰고 암자 뒤의 험준한 봉우리를 우러러보니, 위로는 창공에 꽂혀 있고 아래로는 돌길이 구불구불하였다. 위태로운 바위에 구리 기둥 하나가 옆에 서 있는데, 2층 누각을 얽어 놓았기에 마음 속으로 심히 위험한 것 같아 물어보니, 승려는 “옛날 보덕사(普德師)가 세운 것인데 수십 년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았으니, 어찌 보덕사의 정령이 수호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만폭동(萬瀑洞)에 도착하니, 너럭바위는 혹은 평평하기도 하고 혹은 넓기도 하며 그 물결은 혹은 얕고 혹은 깊은데, 폭포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이 만폭(萬瀑)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옛날 어떤 이가 명명한 것이기에 명실상부하지 않은지는 모르겠다. 너럭바위 위에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써 놓은 ‘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는 지금까지 꿈틀거리며 교룡(蛟龍)이 뛰어올라 비상하는 모양처럼 황홀하다. 허균(許筠)이 간이당(簡易堂) 최립(崔岦) 에게 보낸 편지에서 “봉래 양사언의 글씨의 장엄함은 이 금강산과 자웅을 겨룰만 하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믿을 만한 말이 아니겠는가? 만폭동으로부터 석문을 나와 표훈사(表訓寺)에 이르렀다. 이 곳은 파륜보살(波崙菩薩)이 창건한 것으로 유점사와의 거리는 50리이다. 서둘러 저녁을 먹어 뱃속의 우래소리를 그치게 하고서 또 장안사(長安寺)를 향하여 갔다. 방백(方伯)인 이자교(李子喬)와 만났는데 날이 장차 저물려고 하였다. 소주 한 잔을 마셔서 긴장을 풀고 즐겁게 담소하는데 등불을 밝히고 가까이 앉았으니, 두보가 노래하던 “밤 깊자 다시 촛불 들고서, 상대하고 있으니 꿈 속과 같네.”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리라.

 

8월 16일 기사일.

이른 아침, 이자교가 우리와 고별하고서 떠나고 우리는 남여를 타고 표훈사로 돌아갔다. 유해종을 데리고 정양사로 올라갔다. 정양사는 고려 태조가 창건한 것이다. 그 절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천일대(天逸臺)로 올라가 그 산의 좋은 경치를 두루 보니 은선대에서 보았던 것보다 좋았다. 정양사에 도착하여 헐성루(歇惺樓)에서 쉬었는데, 난간에 기대어 눈을 돌려보니 천일대와 은선대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여러 봉우리들이 나열되어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여러 봉우리마다 모두 이름이 있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각기 명칭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름을 듣고자 하니 대략 그 대강을 거론하였는데,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 곳은 사자봉, 저 곳은 소향로봉, 저 곳은 금강대, 저 곳은 혈망봉, 저 곳은 오현봉, 저 곳은 대향로봉, 저 곳은 망고대, 저 곳은 안양봉, 저 곳은 백마봉, 저 곳은 시왕봉, 저 곳은 관음봉, 저 곳은 장경봉, 저 곳은 석가봉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헐성루에서 볼 수 있는 대강의 풍경이다. 이 산 봉우리의 숫자를 혹은 일만이천봉이라고 하고 혹은 구만육천봉이라 하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여러 봉우리들이 기괴한 모습을 사랑할 만하여 며칠 동안 헐성루에서 머물고 나니, 눈 안에 남겨 두었는데, 그 봉우리들은 혹은 큰 것도 있고 혹은 작은 것도 있으며, 혹은 둥근 것도 있고 혹은 뾰족한 것도 있으며, 혹은 나는 것도 있고 혹은 춤추는 것도 있으며, 혹은 창처럼 서 있는 것도 있고 혹은 사람처럼 서 있는 것도 있으며, 혹은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은 것도 있고 혹은 범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것도 있으며, 혹은 떨어졌다가 만난 것도 있으며 혹은 멋대로 가로지른 것도 있으며, 혹은 앞서다가 뒤진 것도 있으며 혹은 오목하고도 볼록한 것도 있으며,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혹은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있는 봉우리들이 모여서 서로 밀치는 듯하였으니, 이 산의 봉우리들이 사람의 눈에 많이 나타나는 곳은 오직 헐성루 뿐이다. 이런 까닭에 이 산의 진면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을 우선하지 않고 반드시 이곳을 우선시하니, 여러 봉우리들을 다 보기 위하여 먼저 오는 것이다. 그 형승(形勝)을 구태여 순서로 정한다면 헐성루가 첫째이고, 은선대가 둘째이며, 마하연이 셋째이다. 나머지는 눈 둘 곳이 없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승지(勝地)를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만폭동을 으뜸으로 치고 있으니,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계현(李啓賢)이 나에게 이르기를, “금강산을 보고자 하면 바로 정양사에 가서 헐성루에 올라 3일을 머문다면 올라가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해도 여러 봉우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과연 부합하였다. 이계현은 금강산에 출입한 지 이미 40여 년이었다. 방백의 비장(裨將) 임익하(任翊夏)는 무관 중에 걸출한 인물로서 정양사의 빼어난 경치를 보려고 어제 우리를 따라 함께 왔다. 잠시 동안 유람하고서 날이 저물기 전에 바로 돌아왔다. 방백이 관리 몇 명을 며칠 동안 머물게 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남아 있는 마른 식량〔餱糧〕과 해산물로 대접하였는데, 장만한 것이 매우 사치스러웠다. 괴주(槐州)에서 고성까지 도로의 멀고 가까움과 산수의 수려함, 군현(郡縣)들의 비옥함과 척박함, 풍속의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버려두고 쓰지 않는다.

 

(번역은 조선시대 유산기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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