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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S 방영 자료 소개 (2004. 5. 10. 상석(제) 제공)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정민(한양大국문과교수)지음 을 소개 하면서 柏谷公(諱得臣)의 학문과 생애를 다루면서 억만재(취묵당)와 괴강의 동영상과 함께 삽화의 형식을 빌어 일화가 방송되어 그길로 책방을 들러 조심스레 펼쳤다.
책에는 <智水염筆>홍한주(洪翰周;1798~1866)에 실린 글로 김득신은 지혜가 부족하고 재주가 몹시 노둔했는데도 외워 읽기를 몹시 부지런히 했다.독서록(독수기:讀數記)이 있었는데 천 번을 읽지 않은 것은 기록에 올리지도 않았다.사마천의 <史記>중에 (백이전) 같은 것은 1억1만3천 번을 읽기에 이르렀다. 뒤에 한 번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 집을 지나가는데,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말 고삐를 끌던 하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夫學者載籍極博"어쩌고저쩌고 한 것은 나으리가 평생 맨날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알겠습니다요!.하였다. 김득신은 그제서야 그 글이 <백이전>임을 알았다.그 노둔함이 이와 같았다.하지만 만년에는 능히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또한 구한말 하겸진(河謙鎭,1870~1946)은 <東詩話>에 적기를 김득신은 괴로이 읖조리는 癖벽이 있었다.시에 몰두할 때면 턱수염을 배배 꼬며 형상조차 잊었다.그의 아내가 어쩌나 보려고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추쌈을 얹어놓고 양념장은 두지 않았다.아내가 물었다."간이 싱겁지 않나요?" 그가 말했다. "응?어쩌다 보니 잊었구려." 또 비오는 밤에 시구를 찾다가 마루로 나가 오줌을 누는데 추녀 끝에 매달려 있던 방울이 요강으로 떨어졌다.오줌에서 방울 소리가 나는 줄 알고 ,새벽 내내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또 한 번은 鄭斗卿이 지은 <過慕華館>이란 시의 "해 지는 모화관,가을 바람에 정두경(落日慕華館,秋風鄭斗卿)"이란 구절을 좋아했다.뒤에 모화관을 지나가다 뜻을 얻어,"해 지는 모화관,가을 바람에 김득신"하고 읊조리더니 금세 기쁘지 않은 낯빛으로 "사람의 이름 글자도 또한 음률과 관계가 있구나"라고 말했다.
끝으로 <천재와 둔재>라는 소제목에 정약용과 黃德吉(1750~1827)등이 김득신의 독서에 대해 쓴 글이 남아 있는데, 이 중 황덕길이 쓴 <김득신의 독수기 뒤에 쓰다(書柏谷得臣讀數記後)>를 인용 하였는데 "일찍이 선배들을 살펴보니,--중 략--하지만 그들의 문장은 단지 한때 재능이 있다는 이름만 얻었을 뿐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다."
作家의 말;글의 앞부분에서 황덕길은 김득신의 피나는 노력을 언급하며,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고 했다.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정신이 자라,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천재들의 글은 한 편도 전하지 않고 풍문만 무성할 뿐이다.김득신은 그렇지 않았다.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사람은 김득신의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스승으로 모실 일이다.
2) 미쳐야 미친다 ; 不狂不及 <정민 지음> (2004. 5. 10. 태영(군) 제공 김득신의 독수기(讀數記)와 고음벽(苦吟癖) … 全文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번 척 보고 다 아는 천재도 있고, 죽도록 애써도 도무지 진전이 없는 바보도 있다. 정말 갸륵한 것은 진전이 없는데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바보다. 끝이 무디다 보니 구멍을 뚫기가 어려울 뿐, 한번 뚫리게 되면 크게 뻥 뚫린다. 한 번 보고 안 것은 얼마 못 가 남의 것이 된다. 피땀 흘려 얻은 것은 평생 내 것이 된다.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자못 엽기적인 노력가다. IQ가 절대로 두 자리를 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그는 평생을 두고 잠시도 쉬지 않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역대 시화(詩話)속에는 믿기지 않는 그의 둔재(鈍才)와 무식한 노력이 전설처럼 돌아다닌다. 한 사람의 인간이 성실과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를 그는 보여준 사람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음의 〈독수기(讀數記)〉 한편만 읽어봐도 알 수가 있다.
〈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老子傳)〉․〈분왕(分王)〉․〈벽력금(霹靂琴)〉․〈주책(周策)〉․〈능허대기(凌虛臺記)〉․〈의금장(衣錦章)〉․〈보망장(補亡章)〉은 2만번을 읽었다. 〈제책(齊策)〉․〈귀신장(鬼神章)〉․〈목가산기(木假山記)〉․〈제구양문(祭歐陽文)〉․〈중용서(中庸序)〉는 1만 8천 번, 〈송설존의서(送薛存義序)〉․〈송수재서(送秀才序)〉․〈백리해장(百里奚章)〉은 1만 5천 번, 〈획린해(獲麟解)〉․〈사설(師說)〉․〈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송궁문(送窮文)〉․〈연희정기(燕喜亭記)〉․〈지등주북기상양양우상공서(至鄧州北寄上襄陽于相公書)〉․〈응과목시여인서(應科目時與人書)〉․〈송구책서(送區冊序)〉․〈마설(馬說)〉․〈후자왕승복전(朽者王承福傳)〉․〈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후십구일부상서(後十九日復上書)〉․〈상병부이시랑서(上兵部李侍郞書)〉․〈송료도사서(送廖道士序)〉․〈휘변(諱辨)〉․〈장군묘갈명(張君墓碣銘〉은 1만 3천 번을 읽었다. 〈용설(龍說)〉은 2만 번 읽었고, 〈제악어문(祭鱷魚文〉은 1만 4천 번을 읽었다. 모두 36편이다.
〈백이전〉․〈노자전〉․〈분왕〉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읽은 까닭은 정밀하기 때문이었다. 〈제책〉․〈주책〉을 읽은 것은 기굴(奇崛)해서고, 〈능허대기〉․〈제구양문〉을 읽은 것은 담긴 뜻이 깊어서였다. 〈귀신장〉․〈의금장〉․〈중용서〉 및 〈보망장〉을 읽은 것은 이치가 분명하기 때문이고, 〈목가산기〉를 읽은 것은 웅혼해서였다. 〈백리해장〉을 읽은 것은 말은 간략한데 뜻이 깊어서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은 것은 스케일이 크면서도 농욱하기 때문이다. 무릇 이들 여러 편의 각기 다른 문체 읽기를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와 《사기》, 《대학》과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는 싣지 않았다. 만약 뒤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괴산 취묵당(醉黙堂)에서 쓴다. 만 번 이하로 읽은 것은 아예 꼽지도 않고, 만 번 이상 읽은 36편 문장의 읽은 횟수를 적은 글이다. 도대체 김득신의 미련이 아니고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정작 내게 놀라운 사실은 그가 허구 헌 날 같은 글을 되풀이 해 읽으면서 읽은 횟수까지 빠짐없이 적어두었다는 점이다.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는 꿈에 노자(老子)를 만났다. 그래서 아이적의 이름은 노담(老聃)을 꿈에서 보았다고 해서 몽담(夢聃)으로 지어 주었다. 하지만 신통한 태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는 머리가 너무 나빴다. 10살에야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흔히 읽던 《십구사략(十九史略)》의 첫 단락은 겨우 26자에 지나지 않았건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다. 저런 둔재가 있느냐고 곁에서 혀를 차도 아버지는 화내지 않고 되풀이 해 가르쳤다. 아들이 노자의 정령을 타고났으니, 자라서 반드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을 두둔해 주었다.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그것이 오히려 대견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떠듬떠듬 나아간 공부는 김득신의 나이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글 한 편을 지어 올리기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그 글을 받아 보고 크게 감격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더 노력해라. 공부란 꼭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서 물러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후 그는 더욱 분발해서 남들이 즐겨 읽는 글 수백 편을 뽑아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도 길을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남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옛 글을 외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른 선비들은 그가 식당에서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저 친구 또 고문을 외우고 있구먼!’했을 정도였다. 밤에는 늘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누가 물으면 “잠에서 깨어 가만히 손으로 문지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타고난 둔한 재질은 어쩔 수가 없었던 듯, 홍한주(洪翰周, 1798-1866)의 《지수염필(智水拈筆)》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득신은 지혜가 부족하고 재주가 몹시 노둔했는데도 외워 읽기를 몹시 부지런히 했다. 독서록이 있었는데 천 번을 읽지 않은 것은 기록에 올리지도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중에 〈백이전〉 같은 것은 1억 1만 3천 번을 읽기에 이르렀다. 뒤에 한번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 집을 지나가는데,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나는구나.” 말 고삐를 끌던 하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학자(夫學者) 재적극박(載籍極博) 어쩌구저쩌구 한 것은 나으리가 평생 맨날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알겠습니다요. 나으리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그 글이 〈백이전〉임을 깨달았다. 그 노둔함이 이와 같았다. 하지만 만년에는 능히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는 〈백이전〉을 1억 1만 3천 번 읽은 것으로 이름났다. 이때 1억은 지금의 10만을 가리키니, 실제 그가 읽은 횟수는 11만 3천 번이다. 그 자신도 이것을 자부해서 자신의 거처에 ‘억만재(億萬齋)’라는 당호를 내걸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얼마나 머리가 나빴으면 그는 길가다 우연히 들려온 〈백이전〉의 한 구절을 기억 못했다. 말고삐를 끌던 하인조차 질리게 들어 줄줄 외우던 글을 말이다. 후손인 김유헌(金由憲)은 선조의 〈독수기〉를 읽고 쓴 글에서 “옛날 우리 백곡 선조께서는 만년까지 손수 여러 책을 베껴 써서 늙어서도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 번을 읽고 천 번을 읽고, 만 번 억 번에 이르도록 읽었다. 글의 맥락이 담긴 복선이 있는 곳은 밑줄을 긋고 둥근 점을 잇대어 놓았다. 핵심 의미가 담긴 곳에는 흘려 쓴 글씨로 곁에다 주를 달았다. 삼가 필적을 살펴보니 쇠바늘과 은철사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고 적고 있다.
그의 일화는 대부분 엉뚱하고 기발해서 사람을 포복절도하게 했다. 한번은 또 한식날 말 타고 들 밖으로 나갔다가 도중에 5언시 한 구절을 얻었다. 그 구절은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었다. 마땅한 댓구를 찾지 못해 끙끙대자, 말고삐를 잡고 가던 하인 녀석이 연유를 물었다. 마땅한 댓구를 못 찾아 그런다고 하니, 녀석이 대뜸 ‘도중속모춘(途中屬暮春)’을 외치는 것이 아닌가?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하였네”로 그럴싸한 댓구가 되었다. 깜짝 놀란 김득신은 그 즉시 말에서 내리더니, “네 재주가 나 보다 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 하고는 하인 녀석더러 말을 타게 했다. 하인은 씩 웃으며, 사실은 이 구절이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 나으리가 날마다 외우시던 당시(唐詩)가 아니냐고 했다. ‘아 참 그렇지!’ 하며 김득신은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는 것이다. 좀더 엽기적인 이야기로는 이런 것도 있다. 역시 홍한주의 《지수염필》에 보인다.
김득신이 또 한번은 ‘풍지조몽위(風枝鳥夢危)’, 즉 ‘바람부는 가지에 새의 꿈이 위태롭고’란 한 구절을 얻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알맞은 댓구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새벽에 집안 제사를 지낼 때였다. 가을 밤이라 달이 밝고 이슬은 흰데 벌레소리가 뜨락에 가득했다. 막 제주(祭酒)를 올리려는데 갑자기 ‘로초충성습(露草虫聲濕)’, 곧 ‘이슬 젖은 풀잎에 벌레소리 젖누나’란 구절이 떠올랐다. 앞서의 구절에 꼭 맞는 대구(對句)였다. 마침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더니만 잔을 높이 들어 자기가 마셔 버렸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 해도 반드시 내 이 술 마신 것을 칭찬하셨을 게야.”김득신의 일은 흔히 이 같은 경우가 많아 사람들을 포복절도케 하곤 했다. 또 한번은 시 짓는 벗들과 압구정에 올라가 시를 지은 일이 있었다. 괴롭게 온 종일 생각하다가 저물녘이 되자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겨우 두 구절을 얻었네만 아주 훌륭하다네.” 사람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삼산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 떨어지고, 이수는 백로주에서 둘로 나뉘었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일세. 멋지지 않은가?” 사람들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정말 그대의 시란 말인가? 이것은 이백(李白)이 지은 〈봉황대(鳳凰臺)〉시일세.” 백곡은 그만 머쓱해져서 “그런가?”라고 했다. 마침내 길게 탄식하더니 그 아래를 이렇게 이었다. “천년 전 적선(謫仙)이 나보다 먼저 얻었으니, 석양에 붓 던지고 서루(西樓)를 내려오네.(千載謫仙先我得, 夕陽投筆下西樓)” 듣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몇 년을 끙끙대던 댓구가 떠오르자 너무 기쁜 나머지 제사상에 올리려던 술을 자기가 마셔 버렸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단한 호주가(好酒家)가 제삿날인 것을 깜빡 잊고 술에 엉망으로 취해 들어왔다. 온 가족이 제사를 못 올리고 기다리다가, 제사상에 올리라고 술을 따라 주었다. 그는 잔을 들어 가만히 보더니 단숨에 벌컥 들이키더니 ‘술 맛 참 좋다!’ 하더니만 그만 벌렁 누워 잠들어 버렸다. 하지만 제사 지내다 말고 시상이 떠올라 돌아가신 아버지께 올리려던 술을 자기가 마셨단 이야기는 그에게서 처음 듣는다.
두 번째 이야기는 하루 종일 끙끙대다가 누구나 아는 이백의 시 두 구절을 생각해내고는 자기가 지은 것으로 착각하다 남들을 웃긴 이야기다. 구한말 하겸진(河謙鎭, 1870-1946)은 《동시화(東詩話)》에서 다시 이런 일화를 적고 있다.
김득신은 괴로이 읖조리는 벽(癖)이 있었다. 시에 몰두할 때면 턱수염을 배배꼬며 형상조차 잊었다. 그의 아내가 어쩌나보려고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치쌈을 얹어놓고 양념장은 두지 않았다. 아내가 물었다. “간이 싱겁지도 않아요?” 그가 말했다. “응? 어쩌다 보니 잊어 버렸어.” 또 비오는 밤에 싯귀를 찾다가 마루로 나가 오줌을 누는데 추녀 끝에 매달려있던 방울이 요강으로 떨어졌다. 오줌에서 방울 소리가 나는 줄로 알고, 새벽 내내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또 한번은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과모화관(過慕華館)〉이란 시의 “해 지는 모화관, 가을 바람에 정두경(落日慕華館, 秋風鄭斗卿)”이란 구절을 좋아했다. 뒤에 모화관을 지나다가 뜻을 얻어, “해 지는 모화관, 가을 바람에 김득신(落日慕華館, 秋風金得臣)”이라고 읊조리더니 금새 기쁘지 않은 낯빛으로 “사람의 이름 글자도 또한 음률과 관계가 있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무언가에 한번 몰두하면 아예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머리 나쁜 것을 알아 외우다 못해 통째로 삼킬 지경으로 읽고 또 읽었다. 읽는 것이 지금처럼 눈으로 훑어보고 마는 간서(看書)가 아니라 리듬을 얹어 소리내어 읽는 성독(聲讀)이고 보면 그의 독서 횟수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또 좋아하는 시는 외우고 외우다 어느 순간에는 자기가 지은 것으로 착각할만큼 몰입하였다. 곁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노력을 거듭해서 그는 마침내 큰 시인이 되었다. 머리는 나빠서 외워도 금세 잊어버렸지만, 삶의 자리는 언제나 반듯했다. 약속한 일에 대한 기억력은 의외로 또렷했다. 문집에 실린 〈기문록(記聞錄)〉의 두 단락을 읽어 보자.
김득신이 한번은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의 집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었다. 홍공은 출타하고 없었고 그만 혼자 있었다. 한 종이 솥을 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종이 말했다. “빚 받을 집에서 뽑아 왔습니다.” 김득신은 책을 거두어 그 길로 서둘러 돌아오려 했다. 홍공이 오는 길에 그를 보고 까닭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굳이 묻자 솥을 뽑아온 일을 가지고 대답했다. 홍공은 “이것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 내 집에 과부가 된 누이가 있는데 혼자 한 일이다. 실로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며 간곡히 사과해마지 않았다. 김득신은 그제서야 그만 두었다.
김득신은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과 서로 사흘 걸리는 거리에 살았다. 몇 년 전에 아무 해 몇 월 몇 일에 서로 방문하기로 미리 약속을 했었는데, 틀림없이 기일에 맞추어 이르렀다. 한번은 약속을 했는데 마침 비바람이 크게 불고 날이 늦은지라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 과연 그가 이르렀다. 그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빚 대신 가난한 집 솥을 뽑아 가지고 오는 각박함을 보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의 집을 박차고 나왔다. 그 잊어버리기 잘하는 사람이 몇 년 전에 한 벗과의 약속만은 잊지 않고 지켰다. 이런 독실함이 품성의 바탕에서 그의 근면한 노력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김득신의 엽기적인 독서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듯, 정약용과 황덕길(黃德吉, 1750-1827)등이 이에 대해 쓴 글이 남아 있다. 이 중 황덕길이 쓴 〈김득신의 독수기 뒤에 쓰다(書金伯谷得臣讀數記後)〉란 글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일찍이 선배들을 살펴보니, 김일손(金馹孫)은 한유의 문장을 1천 번, 윤결(尹潔)은 《맹자》를 1천 번 읽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논어》와 두시를 2천 번 읽었고, 최립(崔岦)은 《한서》를 5천 번 읽었는데, 그 중에서 〈항적전(項籍傳)〉은 두 배를 읽었다. 차운로(車雲輅)는 《주역》을 5천 번 읽었고, 유몽인(柳夢寅)은 《장자》와 유종원의 문장을 1천 번 읽었다. 정두경(鄭斗卿)은 《사기》를 수천 번 읽었고, 권유(權愈)은 《강목(綱目)》 전체를 1천 번 읽었다. 지금까지 동방에서 대가의 문장을 논할 때면 반드시 이분들을 지목하는데, 그 시를 읽고 글을 읽어보면 그 글이 어디서 힘을 얻었는지 알 수 있다.
근세에 재주가 뛰어난 자로 칭송을 받는 자로, 중추(中樞) 곽희태(郭希泰)는 다섯 살에 〈이소경(離騷經)〉을 다섯 번 읽고 다 외웠다. 그 아들 곽지흠(郭之欽)은 일곱 살에 〈이소경〉을 일곱 번 읽고 외웠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권유의 아들 권호(權頀)와 종제(從弟) 권민(權愍)이 어릴 적에 〈우공(禹貢)〉을 가르쳐 총명한지 시험하였다. 문장의 뜻을 다 가르친 뒤, 책을 덥고 외우게 하니, 권민은 바로 외웠고, 권호는 한 번 읽은 뒤에 외웠다. 그들의 총명한 재주가 남들보다 뛰어나니 비록 옛날에 암기력이 뛰어난 장수양(張睢陽)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들보다 낫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문장은 단지 한 때 재능이 있다는 이름만 얻었을 뿐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다.
글의 앞부분에서 황덕길은 김득신의 피나는 노력을 말하면서,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고 했다. 부족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린다. 단순무식한 노력 앞에는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정신이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한번 터진 식견은 다시 막히는 법이 없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어려운 책을 몇 번 읽고도 줄줄 외웠던 천재들의 글은 지금 한편도 전하는 것이 없다. 지금 남은 것은 그런 천재가 있었다는 풍문뿐이다. 김득신은 그렇지가 않았다. 공부를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사람은 김득신을, 아니 그의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스승으로 모실 일이다.
이서우(李瑞雨, 1633-?)가 쓴 〈백곡집서(柏谷集序)〉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기로 한다.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히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기를 억 번 만 번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어려서 깨달아 기억을 잘한 사람은 세상에 적지 않다. 날마다 천 마디 말을 외워 입만 열면 사람을 놀래키고, 훌륭한 말을 민첩하게 쏟아내니, 재주가 몹시 아름답다 하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저버려 게으름을 부리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그만 두어 버리고, 늙어서도 세상에 들림이 없으니, 공과 견주어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함부로 몸을 굴리고,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청춘을 탕진한다. 무엇이 좀 잘 된다 싶으면 너나 없이 밀물 들 듯 우루루 몰려갔다가, 아닌 듯 싶으면 썰물 지 듯 빠져나간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고 칭찬만 원한다. 그 뜻은 물러 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 한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 여기에서 무슨 성취를 기약하겠는가? 옛 사람들이 김득신의 노둔함을 자주 화제에 올렸지만, 비아냥거리자는 것이 아니라 외경(畏敬)을 담은 것이었다. 지금도 세상을 놀래키는 천재는 많다. 하지만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는 성실한 둔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한 때 반짝하는 재주꾼들은 있어도 꾸준히 끝까지 가는 노력가는 만나 보기 힘들다. 세상이 갈수록 경박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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