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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려실 기술에서 (2003. 11. 16. 윤만(문) 제공) (1)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야사류(野史類) ▣
중 략 《남궁록(南宮錄)》 이정귀(李廷龜),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김시양(金時讓) , 《장빈호선(長貧胡撰)》 윤기헌(尹耆獻) 《부계기문(涪溪記聞)》 김시양 , 《일사기문(逸史記聞)》 결 , 《자해필담(紫海筆談)》 김시양 , 《문산시화(蚊山詩話)》 허균 《계곡만필(谿谷漫筆)》 장유(張維) ,
(2) ▣ 연려실기술 제4권 문종조 고사본말(文宗朝故事本末) 문종(文宗) ▣
○ 2년 임신년(1452) 여름에 임금이 승하하였다. 임금의 묘호를 의논할 때에 ‘효(孝)’자를 쓰려 하였으나, 한 가지 덕에 치우친다는 이유로 ‘문(文)’으로 시호하였다.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금의 화상 한 본이 있었는데 후에 잃어버렸다.
○ 신익성(申翊聖)이 하담(荷潭)으로 김시양(金時讓)을 방문하고, 조용히 말하되, “병자호란 뒤에 비로소 열성(列聖)의 모습이 그려진 족자 한 축을 얻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인종(仁宗)의 어진이라고 의논하였다 하였지만, 나는 그 용안의 수염이 길게 그려졌다는 말을 듣고 혼자 문종의 어진이라고 하였더니, 대신들이 듣고서 낭청(郞廳)을 보내어 상세한 내용을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문쇄록(謏聞瑣錄)》속에 기록된 문종의 수염이 매우 길었다고 한 부분에 찌를 붙여 보냈습니다. 대신들이 그래도 안 믿더니, 다시 표구할 때 묵은 배접을 벗겨 보니, 그 뒷면에 문종의 진(眞 화상(畫像))이란 글자가 씌어 있으므로,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습니다” 하였다. 김시양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 야록(野錄) 중에 있는 문종의 의표가 웅위(雄偉)하고, 수염이 매우 길다는 구절은 기억하나 《소문쇄록》을 지은 조신(曺伸)은 곧 연산군 시대의 조위(曺偉)의 서제로, 문종을 뵈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고, 《소문쇄록》을 가져다 살펴보니, 그런 내용이 없고 그 말이 씌어 있는 책은 《용재총화(慵齋叢話)》였다. 《하담록(荷潭錄)》
(3) ▣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정묘년의 노란(虜亂) ▣
○ 윤도ㆍ변흡 등이 황해도에 도착하였으나 조정에서 화친을 의논하였기 때문에 감히 싸우지 못하고 황해 병사이익(李榏), 부원수정충신(鄭忠信), 황주 판관(黃州判官)이숙(李䎘), 문화 현령(文化縣令)경신후(慶信後), 봉산 군수(鳳山郡守)나덕헌(羅德憲), 신계 현령(新溪縣令)이이성(李以省)과 함께 수안(遂安)딴 본에는 신계(新溪)로 되어 있다. 에 주둔하였다. 오랑캐가 화친을 맺고 물러가면서 그곳을 지나가는데,그때 충신 등은 갑옷을 벗어 놓고 군사를 쉬게 하고 있다가 오랑캐의 무리가 갑자기 이르자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다. 윤도는 미처 달아나지 못하여 휘하의 장병들을 거느리고 문루에 올라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계획을 하였는데, 오랑캐가 “화친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말하여 청하여 서로 만나 보고 떠났다. 이때 장만은 평산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봉 현령(牛峯縣令)이상절(李尙節)이 도망쳐 와 장만에게 보고하기를, “모든 장수가 모두 오랑캐 군사에게 붙잡혔습니다.” 하니, 장만이 급히 행재소에 아뢰어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기문(記聞)》에는 “이익 이하 모두가 사로잡혔는데 신후는 적에게 화살을 쏘다가 힘이 다하여 해를 입었고, 덕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운운.” 하였다. 이때 김시양(金時讓)이 호소사(號召使)정경세(鄭經世)와 더불어 함창(咸昌)에 모였는데, 좌중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니, 시양이 말하기를, “이 소식은 반드시 헛소문일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비록 싸우는 데는 능하지 못하나 달아나는 데는 능하니,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었다면 혹 이런 염려가 있지만 들판에서 오랑캐를 만났는데 어찌 모조리 사로잡혔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서쪽으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조야기문》《하담록》
○ 계해년(1623) 8월에 수찬 김시양(金時讓)이 의주 부윤에 임명되자, 비변사에 말하기를, “나는 오랫동안 변방에서 귀양살이를 해서 변방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다. 변방의 성문 밖은 바로 적의 국경이므로 적이 왔음을 알려줄 척후(斥候)와 봉화(烽火)가 없으면 적이 낮에 쳐들어올 경우에는 성문을 미처 닫을 사이가 없고, 밤에 쳐들어올 경우 성위에서 화살 하나도 쏠 사이가 없다. 군졸들을 격려하여성위에 올라가 밤을 경비하는 것은 곧 변란을 듣고 나서의 일이다. 만일 군졸들에게 항상 성을 경비시킨다면 군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 안주(安州)를 지키게 한다면 적이 의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서 성을 지키는 방비를 하여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조정이 나를 그곳에 보내는 것은 지키게 하려는 것인데, 번연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부임하였다가 국가가 패망하는 화가 나 때문에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조정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은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 최명길이 소를 올리기를, “김시양은 폐조(廢朝) 때에 죄를 얻고 12년 동안 북으로 옮겨갔다가 남으로 이동하며 귀양살이를 하다가 조정에 돌아온 지 겨우 2, 3개월도 안 되었으니, 다시 변방으로 내보내는 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게다가 김은 비록 재주는 있으나 본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니, 변방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을 명하였다. 이민구(李敏求)가 시양에게 말하기를, “만일 허락하였더라도 사실 지킬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김을 겁쟁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오랑캐의 군사가 의주에 쳐들어와 수문(水門)을 통해 들어와서 성위로 올라와 군졸들을 죽인 뒤에야 온 성중이 비로소 시양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담록》
(4) ▣ 연려실기술 제28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조조의 상신(相臣) ▣
[이성구(李聖求)전라 감사 ㆍ 경기 감사] 이성구의 자는 자이(子異)며, 태종의 8대손이요, 호는 분사(分沙)이다. 수광(晬光)의 아들로 갑신년에 났으며,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무신년에 문과에 올랐다. 정축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올랐는데 갑신년에 죽었다.
○ 대비를 폐할 때에 바른 것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가 정협(鄭浹)을 천거한 죄로 정승에서 파면되자 공이 지평으로서 반박하기를, “이항복이 정협을 천거하여 쓸 때에 어찌 후일에 정협의 반역을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대신에게까지 연루시킴은 너무 심합니다.” 하였으나, 간당들이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반정할 당시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함부로 잡아 가둔 사람들을 너그럽게놓아 주고, 성문의 통행 금지를 풀고, 광해조 때 만든 침향산(沈香山)을 불태우고,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은 모두 공이 먼저 주장하여, 새로운 교화를 도운 것이다. 〈동주집(東洲集)비문〉
○ 정묘년에 전라 감사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병이 갑자기 위독하였다.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어, “급히 돌아오게 하고 후임의 도착을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 이규(李烓)의 전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다가 탄핵을 입어 벼슬이 떨어지자, 양화강(楊花江) 위에 우거하면서 집에 써 붙이기를 ‘만휴암(晩休菴)’이라 하였다. 어느 날 불이 났는데 나와서 밭둑에 앉아 말하기를, “술독은 탈이 없느냐.” 하더니,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 하고, 다른 것은 묻는 것이 없었다.
○ 죽던 날 저녁에 흰 기운이 올라와 하늘에 가득하더니 흩어지지 않고 땅에 비추어 밤이 밝았다.
○ 임금이 반정하던 당시에, 공은 사간이 되었는데, 기생을 파하도록 건의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뽑혀왔던 기생들을 모조리 돌려보내었으니 이것은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큰 정사였다. 얼마 후에 공이 의정부의 사인이 되었을 때에 지은 한 절구(絶句)가 있으니,
이원을 파하자고 아뢴 것은 간관이란 직명 때문이었는데 / 奏罷梨園爲諫名 연못의 정자에 오니 기생이 없으므로 풍정을 저버렸네 / 却來蓮閣負風情 못물은 가득하고 연꽃은 서늘한데 / 池塘水滿芙蓉冷 홀로 난간에 기대어 빗소리 듣는구나 / 獨凭危欄聽雨聲 하였으나 이는 농담이었다. 김시양(金時讓)이 화답하기를,
청루에 박행하다는 이름을 피하지 않았으니 / 不避靑樓薄倖名 한 장의 소가 참으로 임금 사랑하는 심정이 있었네 / 封眞有愛君情 어찌 응향각(연못 가의 정자 이름) 빗소리 듣는 날 / 如何聽雨凝香日 도리어 당초 정성(음탕한 음악) 내친 것을 후회하는가 / 却悔當初放鄭聲 하였다. 《하담록》
(5) ▣ 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괄(李适)의 변(變) ▣
○ 그때 정용영(鄭龍榮)과 그의 아들 정찬(鄭澯) 역시 심문을 받았는데, 용영이 곤장을 맞게 되자 정찬이 나아가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의 곤장을 면해 준다면 내가 그 실상대로 고하겠습니다.” 하니 추관(推官)이 앞으로 나가 묻고 문사랑(問事郞)김시양(金時讓)이 그 공술을 받았는데 정찬이 말하기를, “이괄이 반역하려는 실상을 토로한 자가 있습니까?” 하므로, “없다.” 하니 정찬이, “이괄이 이달그믐께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여 개천(价川)ㆍ순천(順川)ㆍ곡산(谷山)ㆍ수안(遂安)의 길을 따라 올라오기로 약속하였는데, 문회가 이미 고발하였으니 이괄이 반드시 금부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베고 이미 군사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우리 형은 한명련의 사위로서 이괄의 행동을 탐지하여 고발하려고 명련의 처소에 가 있는데 금명간에 반드시 올라올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면 “명련이 공모하였는가?” 하자 정찬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그러나 협박을 받아 반란에 가담하였을는지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기자헌도 역모에 참여하였는가?” 하니 정찬이 대답하기를, “딴마음이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그들이 서로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또, “너의 아버지도 아는가?” 하였더니, “아들이 하는 바를 아버지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추관김류 등 이괄이 반역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던 이들이 모두들 크게 놀라 용영을 불러 물었더니 용영이 대답하기를 “윤인발(尹仁發)이 죽은 것처럼 꾸미고 남 몰래 이괄에게 가서 그의 술책가(術策家)가 되어 있습니다.” 하였더니 추관이 모두, “윤인발이 살아 있다니 이 사람의 말은 모두가 믿을 수 없다.” 하고 끌어내려 곤장을 쳤는데 이는 지난해 10월에 인발이 이부 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살해되어 그 낯가죽이 벗겨지고 거세된 채 내버려진 것을 그의 집에서 장사지냈다고 소문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담록》
○ 저탄(猪灘)에서 패하고 장만과 이시발이 여러 장수를 불러 일을 의논할 때 모두 걱정된다고 하는데 김시양(金時讓)은 홀로 말하기를, “이괄의 턱 아래에 군살이 달려 있는데 이는 곧 낭(狼)이 제 턱살을 밟게 되는 형상[狠跋其胡]주D-002이니 마침내 반드시 낭패하여 죽게 될 것이다.” 하니, 장만이 심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괄의 턱에 달린 살은 제비 턱과 호랑이 머리로 봉후(封侯)의 형상주D-003이라하더니 이제 공의 말을 들으니, 과연 낭(狼)의 턱살이구나.” 하고,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보내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하담록》
[주 D-002] 낭(狼)이 제 턱살을 밟게 되는 형상[狠跋其胡] : 이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말인데, 낭(狼)이라는 짐승은 턱살이 처져서 걸을 때에 턱살을 밟다가 꼬리를 밟다가 하는 짐승인데 여기서는 앞뒤로 곤란을 가져온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 D-003] 제비 턱과 호랑이 머리로 봉후(封侯)의 형상 : 상법(相法)에, ‘호두연함(虎頭燕頷)은 봉후(封侯)할 좋은 상이라.’ 하였다.
○ 이욱(李煜)을 사로잡아서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김시양이 말하기를, “교외에 나가 적을 맞았고 또 말에 먹칠을 하였으니 적을 따른 형적이 명백하다.” 하고 드디어 죽이게 하였다. 이욱이 형벌을 받음에 임하여 외치기를 “안망구(安望久)가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하였는데, 안망구는 적의 진중에서 이욱을 불러간 자이다. 《일월록》
○ 김효신(金孝信)이 강작(康綽)을 이끌고 역시 이괄의 명령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숙천(肅川) 땅에 이르렀을 때 강작이 칼을 빼어 효신을 찌르다가 효신의 부하에게 살해되니 장만이, “강작이 이괄을 위해 효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효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하며 효신의 공을 높이고 그를 발탁해서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김시양이 그 사실을 충신에게 물으니 충신이 말하기를, “강작이여러 번 효신을 달래어 이괄에게서 달아나 귀순하자고 하였으나, 효신이 듣지 않았다. 강작이 효신을 찌르면서 외치기를, ‘내 이 역적 때문에 의롭지 못하게 죽는다.’ 하였다. 효신이 이미 강작을 죽였는데 이괄의 군사는 벌써 멀리 떨어져 있어 쫓아갈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하여 원수에게 나아가서 그 말을 뒤집어 강작에게 허물을 덮어씌웠다. 따라서 효신은 충절 있는 이들을 해치고도 오히려 그 공을 누리니 심히 통분하고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시양이 뒷날 이 말을 장만에게 하니 장만이 빙긋이 웃으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끝났는데 정충신이 이런 말을 반드시 할 필요가 있을까.” 하였다. 《하담록》
○ 이욱(李煜)의 아우 이환(李煥)이 욱과 함께 반역하였다가 도망하였다. 이환은 국구(國舅)한준겸(韓浚謙)의 서(庶)사위이다. 김시양이 원수와 여러 공들에게 말하기를, “이환이 권세에 의지하여 면죄되면 왕법(王法)이 폐하여져서 나라의 체모가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장차 추적하여 체포하려 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환도하던 날 시양이 주막에 숙박하고 있는데, 한회일(韓會一)이찾아와 준겸의 말을 전하기를, “이환이 김확(金矱) 일가와 함께 수원 땅에서 피란하였는데, 이환이 적에게 붙었다고 공이 그가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잘못 듣고 장차 그를 처벌하고자 한다 하니, 만약 공이 믿지 못하겠거든 이확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내 어찌 일개 서녀로써 감히 나라의 역적을 놓아 주리오 하였다.” 하니, 이환은 드디어 면죄되어 수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하담록》
○ 무인 전 군수 아무개는 이괄에게 붙었는데, 그는 구천군(龜川君) 수(晬)의 서매부였으므로 김시양(金時讓)이 수에게 묻기를, “사람들의 말에 아무개가 적을 따랐다 하는데, 적을 따랐는데도 요행히 죄를 면한다면 국법이 장차 폐하여질 터이니 공은 종실의 중신으로서 어찌 한 명 누이를 위하여 나라의 역적을 놓아줄 수 있습니까. 공의 말씀을 듣고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던바 수의 얼굴빛이 변하더니한참 만에 천천히 말하기를, “공이 종사의 일로서 나에게 물으니 내 어찌 감히 숨기리오. 아무개는 사실 이괄을 따랐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베었다. 《하담록》
○ 김원량(金元亮)은 어려서부터 명예를 좋아하고 조행(操行)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 그 이름이 드러났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영남 유림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책 상자를 짊어지고 가서 그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다. 반정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발탁되어 6품에 올랐다. 김시양이 경세에게 묻기를, “원량이 유생으로서 반정의 공훈에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세가 말하기를, “그가 김자점(金自點)ㆍ이시백(李時白)등과 서로 친하였으므로 비록 함께 모의한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참여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공훈을 책정할 때 원량이 3등으로 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시양이 경세ㆍ임숙영(任叔英)과 홍문관에 모였을 때 시양이 말하기를, “원량 자신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니 3등 공신으로 녹훈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기니 어찌된 것인가.” 하였더니 경세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자, 숙영이 말하기를, “내가 원량과 매우 친하였는데, 원량이 어느 날 찾아와서 반정의 모의를 말하기에 내가, ‘녹을 먹고 나라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종사를 위하여 이러한 거사를 하려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나, 그대는 유생으로서 위로 홀로 된 부모를 모시고 있는데 일이 만약 실패하면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충성과 효도를 모두 잃어버리겠소.’ 하였더니 원량은 얼굴빛이 변하여 가버렸다. 원량과 이괄은 6촌간으로서 이괄이 반정에 참여하게 된 것도 원량을 통한 것이다.” 하였더니 경세가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해 겨울, 문회가 고변하자, 원량이 자기가 영변 판관으로 가서 이괄을 정탐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여러 공신이 크게 의심하여 허락하지 않았다가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원량을 심문하고자 청하여 마침내 베었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인발이 죽은 체하고 이괄에게 항복한 것도 원량 때문이다.” 하였는데 그의 친구 나만갑(羅萬甲)ㆍ조직(趙溭) 같은 무리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원량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한다. 《하담록》
○ 예전에 이시발이 명을 받고 적을 방어하러 나가 평산(平山)에 주둔하였는데 이서(李曙)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어서 왔다. 시발이 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때마다 곧 이서에게 전령(傳令)하여 이에 응하게 하였는데, 하루에도 서너 차례나 되었다. 정보의 말이 같지 않았고 전령 역시 따라 변하였다. 이서가 반정의 원훈(元勳)으로서 권세가 바야흐로 성하므로 김시양(金時讓)이 시발에게 말하기를, “금일일의 형세를 보건대 한 조각 종이의 전령으로서는 완풍(完豐)〈부원군이서〉을 제압할 수 없으니 그로 하여금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꾸게 하고 자주 전령함을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하였으나, 시발이 따르지 않았다. 이괄이 이미 토벌된 후 이서가 이귀(李貴)와 함께 방어하지 못하였다 하여 죄를 받게 되자 이서가 보관해 두었던 그때의 전령 문서를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호령이 이처럼 자주 변하여 동서로 달려 왔다갔다 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어떻게 적을 맞아 싸울 수 있었겠소. 이것이 과연 나의 죄인가.” 하였다. 장만이 진무공(振武功)을 감정(勘定)할 때 임금이 명하기를, “문관은 기록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시발(李時發)ㆍ김기종(金起宗)ㆍ남이웅(南以雄)ㆍ최현(崔晛)ㆍ김시양(金時讓)이 모두 삭제되었다. 연말에 장만이 시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진무공신에 문신을 녹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이 판서(시발)가 반정의 원훈들에게 거슬렸기 때문이라 하니 만약 나를 따르던 문신만을 녹훈하기를 청하면 반드시 허락받을 것이다. 문신을 녹훈하지 못하게 한 일이 부득이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이번 회맹(會盟)이 행하여지기 전에 다시 청하겠다.” 하였다. 며칠 후에 기종(起宗)ㆍ이웅(以雄)만을 녹훈할 것을 청하였더니 과연 허락하였다. 《하담록》
○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이 이괄ㆍ한명련(韓明璉)을 목 베어와서 항복하였으므로 그 죽음을 특별히 면하고 나누어 귀양보내었다가 수년 후에 대사령(大赦令)으로 사면하여 편의대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문웅(文雄)ㆍ박영신(朴榮臣)의 아들 지병(之屛) 등이, 수백(守白)이 이괄의 무리였다고 해서 복수한다고 명분삼고 대낮에 서울 거리에서 수백을 목베고 소를 올려 살인한죄를 처벌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문웅 등이 비록 복수라고 하였지마는, 제 마음대로 인명을 살해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이를 사형시키지 않으면 이 뒤로부터 복수라 칭하고 마음대로 살인하는 자가 잇달아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의금부에 명하여 심문하게 하고 심문한 글이 올려지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김류(金瑬) 등이 그 효성을 여러 번 칭찬하고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웅 등이 반드시 사형받을 줄을 각오하고 죽였다면 효가 되겠지마는 지금 조정의 공론이 반드시 이와 같을 줄 알고서 수백을 죽였을 것이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 역시 이중로가 반정 공신이라 하며 마침내 그 사형을 면하여 주었다. 《하담록》
(6) ▣ 연려실기술 별집 제1권 국조전고(國朝典故) 외척(外戚) ▣
○ 김좌명(金佐明)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백부인데, 과단성 있고 사(私)가 없어서 먹줄처럼 분명하여 조정에서 믿고 중히 여겼다. 그런데 이초로(李楚老)도정(都正) 만이 홀로 말하기를, “이 사람의 재능은 요순(堯舜) 시대에 났더라도 반드시 헛되게 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외척의 처지에 있는 자가 모두 김공으로 구실을 삼아 반드시 그처럼 국정에 참여하려고 한다면 오늘날 김공의 국가에대한 노고가 다른 날에는 반드시 국가의 체면을 손상하는 장본이 될 것이다.” 하였다. 해숭위(海嵩尉)의 두 아들 지(墀) 구(坵)가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식견이 높고 투철하며 논의가 구차하지 않아서 크게 동료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김시양(金時讓)만이 말하기를, “이는 국가의 복이 아니다. 부마(駙馬) 집 자제는 순백하고 문채가 적으니 음관(蔭官)으로 집 일이나 이어나가면 족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재능과 인망이 원래 드러나 장차 반드시 국가의 소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일에 이런 처지에 있는 자들이 그 재주가 미치지 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이 사람들을 구실로 삼아 궁중의 권세를 끼고 함부로 승진하려 한다면 누가 그 세력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사견문》
(7) ▣ 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서쪽 변방[西邊] ▣
[중국사람]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진리(陳理)가 참람한 칭호를 물려받아 무창(武昌)에 도읍하고 있다가 명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고황제(高皇帝)가 명하여 명왕(明王)진(珍)의 아들 명승(明昇)과 같이 고려로 옮겨서, 명승은 송도(松都)에 머무르게 하고 진리는 또 청양(靑陽)으로 옮겼다. 진리는 키가 특히 커서 보통 사람의 머리 위에 쑥 올라왔다. 무창에서 40명의 첩과 백색준마 (駿馬) 40필을 끌고 와 있다가, 진리가 죽으니 첩과 말이 1,2년 사이에 서로 잇달아 죽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월정만록月汀漫錄》
○ 김시양(金時讓)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관서(關西)에 사는 진가(陳哥) 성을 가진 사람이 자칭 진리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군역(軍役)을 면제해 달라고 하니, 그 일을 병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다. 시양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진리는 아들이 없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거짓말이다.” 하니, 동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리가 아들 없는 것은 우리들이 듣지 못했다.” 하자, 시양이 감히 홀로 들은 사실을고집하지 못하고, 드디어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가 진리ㆍ명승 등이 우리 나라로 옮겨 올 때에 ‘병정(兵丁)도 만들지 말고, 상민도 만들지 말라.’ 고 한 조서의 글귀로써 아뢰니, 명하여 그 군역을 면제해 주었다. 시양이 병이 나서 강촌(江村)에 가 있을 때에 우연히《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다가 진리가 아들이 없다는 말이 있으므로, 곧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성현이 조정에 벼슬할 때가 진리의 사건과 겨우 5,60년 뒤이며, 또 그 외손과 놀았다고 하였으니, 그 아들 없는 것은 자세히 알았을 것입니다. 관서에 사는 진가 성의 사람을 조사하여 조정을 속인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병조 판서 심기원(沈器遠)이 아뢰기를, “이수광(李晬光)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있을 때에 ‘진리의 자손이 있어서 특별히 고황제(高皇帝)의 조칙으로 군역을 면제해 주었다.’는 말이 《지봉유설》에 실려 있으니, 조사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김시양에게 말하기를, “지봉이 본 황제의 조칙에, ‘천봉(天鳳)모년(某年)에 오왕(吳王)의 영지(令旨)로 진리의 자손은 상민도 만들지 말고, 관원도 만들지 말라’ 등의 조목이 있고, 또 어보(御寶)와 어압(御押)이 있으니 믿을 만하다.”고 하니, 시양이 말하기를, “진우량(陳友諒)을 죽일 때에 원 순제(元順帝)는 아직 연도(燕都)에 있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신복(臣服)하는 것도 옛날과 같았으니, 비록 진리를 고려로 보내려고 해도 될 수 없었다. 홍무(洪武) 5년 공민왕 21년 임자 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자문으로 진우량 ㆍ명승의 집안 식구들을 보내면서 ‘병정도 만들지 말고 상민으로도 만들지 말고 편안히 살면서 지내게 해 주라 하였으니, 천하가 크게 통일 된 지가 이미 5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한림아(翰林兒)가 원을 참람히 일컬으며, 오왕(吳王)의 영지와 조칙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도장을 찍었을 리가 있느냐”고 하였다.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8) ▣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임해군의 옥사 ▣
○ 임자년 6월 4일에 양사(兩司)에서 합계하기를, "전라도사(全羅都事)김시언(金時言)뒤에 시양(時讓)이라고 고쳤다. 이 전에 주서(注書)가 되었을 때, '삼 사(三司)가 고변한다'는 말이 있었으며 충홍도(忠洪道) 시관(試官)이 되어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 같이 한다.는 것으로 시험문제를 내었고 이번 무안(務安)에서 보이는 증광시(增廣試)에서는 '사호(四皓)가 유씨를 멸(滅)하였다.'는 것을,출제하였으므로 유생(儒生)이 고치기를 청하였더니, 또 '당나라 태종(太宗 )이 사관(史官)에게 바로쓰기를 명하였다.'는 것으로 출제하였다는 소문이 서울과 지방에 퍼졌는데 듣기에 놀랍습니다. 잡아다가 국문하소서'하였다.
○ 김시양이 호서시(湖西試)를 맡아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같이 한다'는 것으로 논제(論題)를 냈고, 뒤에 호남시(湖南試)를 맡아서는 참시관(參試官)윤 효선(尹孝先)과 함께 '사호가 유 씨를 멸하였다'는 것으로 출제하였더니 사자(士子)들이 문제를 고칠 것을 청하므로, 참시관 김정목(金庭睦)이 '당나라 태종이 사관에게 바로 쓰라'고 명한 것으로 출제하였다. 정홍원(鄭弘遠)ㆍ유 광 (柳洸)이 모두그 도(道)에서 벼슬하였는데 당시의 논의에 아부한 자로서 낙제하고 크게 분해하며 원망하여 이이첨에게 말하기를, "사호 가 유씨를 멸한다는 것은 내암(萊菴 인홍의 호)의 무신년 소를 기롱한 것이고, 사관에게 바로 쓰기를 명하였다는 것은 임해의 옥사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하였다. 이이첨이 그때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사간 이성(李惺)과 합계하여 김시양ㆍ김정목ㆍ윤효선 등의 죄를 논하고, 또 아뢰기를, "역적 이진의 변이 나던 초기에 시양이 삼사가 고변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니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였다. 시양이 옥에 갇힌지 넉 달 만에 종성(鍾城)으로 귀양갔고 정목은 회령(會寧)으로 귀양갔으며 효선은 이진을 고변한 원훈(元勳)으로 죄를 면하였다. 김시양이 길에서 이경탁(李敬倬)을 만났는데 경탁이 말하기를 , "내가 일찍이 현무문(玄武門)의 일을 바로 썼다는 시제(試題)로써 향시(鄕試)에 장원하였고, 김상용은 또 신하가 임금보기를 원수같이 한다는 것으로 영남에서 선비들에게 시험보였는데, 이것으로 자네가 중한 죄를 받을 줄을 어찌 생각했겠나. 세상의 험난함이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하담록》
(9) ▣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하다 ▣
○ 계해년 5월 25일 이경전(李慶全)과 윤훤(尹喧)이 주문(奏文)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명륜록》
처음에 이산해(李山海)는 대북(大北)의 괴수였고, 인홍과 이첨은 곧 그의 졸개였다. 처음에 산해가 공량(公諒)에게 붙어서 세자를 정하는 일에 농간을 부리고 재주를 부린 것은 오로지 신성군(信城君 인조의 백부)을 위한 것이었고 본래 광해에게 충성을 바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조에게 죄를 얻게 되자 스스로 광해에게 붙어서 전후로 안면을 바꾸고 좌우로 꾀를 부렸으니, 김시양(金時讓)이 이른바 “의심하여 두 마음을 품고 감정을 풀어 끝내 대비를 폐위시켰다.”고 한 것이다. 산해가 죽고 나서는 경전(慶全)이 그 아비의 일을 이어받아 인홍과 이첨의 모주(謀主)가 되어 은밀히 사주하여 하지 않은 짓이 없었다. 당시 여러 흉적들이 올린 소를 보면 경전이 폐주의 주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경전은 흉하고 간사한 것이 여러 역적에 비하여 가장 교활하였기 때문에 비밀한 곳에서 말없이 움직이고 몰래 주선하였으니, 일찍이 외면으로는 여러 역적처럼 간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소장은 올린 적이 없었고 단지 수의(收議) 한 장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드러난 형적을 가지고만 죄를 논하면 인홍ㆍ이첨 등과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반정 후 죄를 다스리던 시초에 인홍과 이첨처럼 즉시 목을 베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릇 풀을 제거할 때 뿌리를 뽑으면 끝내 목숨을 보전할 수 없기에 반정한 이튿날에 경전이 곧 최명길(崔鳴吉)을 찾아가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으니, 명길의 아버지 기남(起南)이 곧 그와 함께 공부하던 친구며 명길 또한 전부터 아버지의 친구로 대접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명길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해와 달이 다시 밝아(반정을 말함) 죄를 다스리는 것이 엄한데 어르신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경전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반드시 죽을 줄은 알지마는 자네는 부디 어른과의 정의를 생각하여 이 죽을 목숨을 구해주게.” 하며 여러 가지로 애걸하였다. 명길이 비로소 측은하게 여기며 “비록 구해드리고 싶으나 실로 구할 수 있는 계책을 생각해낼 수 없습니다.” 하니 경전이 곧 낮은 소리로 “임금이 등극하시면 당연히 중국에 주청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바닷길을 건너는 것은 사람들이 회피하는 일이다. 만약 나를 주청사로 가도록 주선해 준다면 바닷길에 꼭 죽게 되지는 않겠지만 설사 죽더라도 영광이 되어 자손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며, 다행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어찌 공로를 생각하여 내 목숨을 살려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명길이 그 꾀를 음험히 여기면서도 그 지혜에 감복하여 한참 동안 보다가 허락하였다. 대개 반정 후에 주청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사신을 선택하여 보내야 하는데 외교에 능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뱃길에 빠져 죽는 자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모두 피하여 조정에서는 보낼 사람을 선택하기가 어렵던 참에 명길이 경전을 추천한 것이다. 경전은 평소 지혜가 많고 문장이 넉넉하다고 알려졌고 또 중국의 사정에 익숙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말하여 마침내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청사로 보냈는데, 새 임금을 책봉(冊封)하는 일을 마치고 돌아왔기에 죄를 받지 않고 집에서 늙어 죽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청의(請議)를 주장하는 이들이 끝내 한때의 공로로 그의 죄악을 씻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손이 청반(淸班)에 나서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당쟁이 치열해진 뒤에야 비로소 청반 길에 통하였다. 《청야만집》
(10) ▣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다 ▣
○ 이효원 등이 다시 이성과 정조 등이 인홍의 말을 견강부회하여 안팎에서 작간(作奸) 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회산잡기(桧山雑記)》
○ 이효원의 계사가 입계(入啓)되고 미처 내려오기 전에 다음날은 별과(別科)의 시장을 여는 날이었므로 바야흐로 시관들이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로 나가자, 홀연 안에서 말을 전하기를, “임금님의 병환이 위급하다.” 하므로 승지 등이 창황히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달려가니, 어의 허준(許浚)이 나오면서, “전하의 병환이 극히 위중하여 어찌할 수가 없다.” 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들어왔으나 유영경은영남 유생들이 계속 상소하여 그에게 죄줄 것을 청하고 있어서 성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늦게 왔는데 날은 이미 저녁 때였다. 안에서 , “대신들은 들어와 유교(遺教)를 들으라.”고 명하여 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徳馨)ㆍ이항복(李恒福)ㆍ윤승훈(尹承勳)ㆍ유영경(柳永慶)ㆍ기자헌(奇自献)ㆍ심희수(沈喜寿)ㆍ허욱(許頊)ㆍ한응인(韓応寅), 도승지 유몽인(柳夢寅), 주서 김시양(金時譲) 등이 입시하니, 임금이 문안에 누웠는데 용포(龍砲)를 몸에 걸치고 그 위에 옥대(玉帯)를 얹고 기절한 지 이미 오래였다. 덕형이 말하기를, “고례(古礼)에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殞命)하지 않는다.’하였으니, 청컨대 부인들은 물러가소서.” 하였다. 덕형이 또 말하기를, “마땅히 조용히 하고 기다려야 한다.” 하였다. 대신 이하가 차례로 나와 슬피 울고 빈청으로 물러가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으니 승전색(承傳色)김봉(金鳳)이 대비(大妃)의 명을 전하기를, “계 자와 어보(御寶)를 동궁에게 보냈으나 받지 않는다.” 하자, 대신이 아뢰기를, “임금(아직은 세자)께서 슬피 곡하는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받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김봉이 또 대비의 명으로 봉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와서 전하기를, “지난 겨울 위급할 때에 받은 글이다.” 하였다. 겉봉에는 ‘세자에게 주는 유서’ 라고 쓰여 있고 속에는 ‘동기간을 내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대하고, 사람의 참언(讖言)이 있더라도 듣지 마라. 감히 이로써 부탁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김봉이 다시 들어가더니 또 봉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겉봉에는 ’유(柳) 영경(永慶) ㆍ한(韓) 응인(応仁) ㆍ 신(申) 흠(欽)ㆍ 허(許) 성(筬) ㆍ박(朴) ㆍ 동량(東亮) ㆍ 서(徐) ㆍ 성(渻) ㆍ 한(韓) 준겸(逡謙)‘ 이라고 쓰여 있고, 안에는 ’어질지 못한 이 몸이 임금의 자리를 욕되게 하고 신민에게 죄를 져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질 듯 두려웠는데, 이제 홀연히 큰 병을 얻었으니 길고 짧은 것이 수(数)가 있고 죽고 사는 것이 명이 있는지라, 낮과 밤이 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성현도 면치 못한 바이니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마는, 대군(大君 영창대군)이 어려 미처 성장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 걱정될 뿐이다. 내가 죽은 후에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만일 어떤 사설(邪説)이 있더라도 제공(諸公)들은 애호하고 붙들어 주라. 감히 이를 부탁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김봉이 인하여 말하기를, “유는 영의정이요, 한은 우의정이며 신은 신흠이요, 허는 허성, 박은 박동량, 서는 서성, 한은 한준겸이다. 이것도 또한 작년 겨울 병환이 위급했을 때 받든 글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하담록》
(11)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여러 사당[諸祠] ▣
○ 숭인전(崇仁殿)은 평안도 평양성 밖 기자묘(箕子墓) 옆에 있는데, 기자를 향사하는 전각이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폐백을 내렸다. 고려 숙종조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건의하여 기자의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워 중간 제사를 지냈는데, 충숙왕(忠肅王)이 평양부에 명하여 기자사(箕子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종조에 판한성부사 권홍(權弘)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기자의 어짊은 온 천하 만대에 이르도록 다 함께 경모하는 바입니다.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은(殷) 나라에 3인(三仁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이 있다.”고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예약과 문물이 중화(中華)와 견줄 수 있는 것은 기자가 조선에 봉함을 받아서 팔조의 교화[八條之敎]를 시행한 까닭이오니, 동방에 끼친 공이 대단히 크므로 태조가 개국한 뒤에 사전(祀典)의 첫머리에 기자를 실었사오니, 옛 성인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묘에 사적을 새긴 비가 없어서 공덕을 세상에 찬양하여 나타낼 수 없사오니, 청컨대, 문신을 시켜 비문을 지어 묘 아래에 세워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참찬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여 묘 아래에 세웠다.
기자전(箕子殿)은 평안 감사가 참봉을 선출ㆍ임명하여 지켜왔다. 광해조 계축년, 정사호(鄭賜湖)가 감사로 있을 때에, 칭호를 고쳐 ‘숭인전(崇仁殿)’이라 편액을 내리고, 선우식(鮮于寔)을 기자의 후손이라 하여 숭인감(崇仁監)으로 임명하니, 품계는 정6품이었다. 그런데 정묘년의 난리에 숭인감인 선우흡(鮮于洽)이 노(盧 청병(淸兵))에 항복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그 죄를 논하여 관직을 삭제하여버리고, 그 도에 명하여 다시 선우 성 가진 자를 뽑게 하였더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태주(泰州) 사람 선우경(鮮于慶)을 임금에게 아뢰어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명하여 그가 적손인지 지손인지를 조사하게 하니, 시양이 다시 아뢰기를 “멀고도 아득한 명족의 후예를 누가 원손인지 지손인지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성이 ‘선우’인 까닭에 그 명에 응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삼은 것은 소식(蘇軾)이 선우신(鮮于侁)에게 준 시와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의 글씨본에 쓴 서문에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을 취한 것이니, 이 말도 또한 근거가 박약하다. 광해조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 서로 허위로 만든 것은 반정 초에 즉시 폐지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조고 있으니 탄식할 일이다.《하담파적록》뒤에 전감(殿監)을고쳐 ‘참봉’으로 하였다.
인조 계해년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정축년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다. 숙종 기미년에 도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기축년에 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12) ▣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모문룡(毛文龍)이 살해되다. ▣
○ 오랑캐의 군사가 강화하고 물러가자, 문룡은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화친한 것을 보고 마음이 두려워, 매양 차관(差官)을 파견하여 예물을 가지고 오랑캐 속을 왕래하였으니, 대개 스스로가 오랑캐와 통하고 있는 것을 보여 □ 우리 나라에서 이간책을 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모두 진실된 것은 아니었다. 모문룡의 차관이 창성(昌城)을 경유할 때에 부사남궁인(南宮戭)이 그 차관과 더불어 서로 기뻐하였는데,차관이 비밀리 그 문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오랑캐와 화친을 맺는 친밀한 말이었으므로 베껴서 몰래 조정에 아뢰니, 조정에서 크게 칭찬하여 상을 내리고, 모문룡의 실정을 능히 알아냈다 하여 옷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하였다. 기사년(1629) 봄에 조정에서 모문룡의 차사가 삭주(朔州)를 경유하는데 부사정명진(鄭名振)이 그냥 앉아서 모문룡의 실정을 살피지 못하였다 하여 준엄하게 꾸짖었다. 모문룡의 차사가 마침 왔으므로 명진이 문서를 보기를 요구하니, 차사가 크게 노하여 꾸짖고 갔다. 창성에 이르러 남궁인을 꾸짖기를, “나와 그대는 친밀하여 형제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문서를 내 보여주었던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돌아서서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였는가. 이 말이 만일 가도에 들어가면 나는 반드시 죄를 입어 죽을 것이다.” 하고, 문서를 내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남궁인이 밤새도록 달래어 마음속을 드러내 보인 연후에야 비로소 차사가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남궁인이 베껴서 감사 김시양(金時讓)에게 보고하니, 시양이 장계를 올리기를, “차사가 비록 남궁인과 서로 친밀하다 하나 일이 이와 같이 탄로된 만큼 반드시 다시 문서를 보여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농간하는 술책이 있는 것이니, 예여청(倪余聽)의 일과 같은 속임수가 없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였다. 비변사에서는 회계(回啓)하기를, “이 일은 사람마다 모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남궁인에게 전적으로 맡기소서.” 하였다.
이에 앞서 무진년(1628)에 문룡이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에 이르러 창졸간에 지키는 장수를 위협하여 재물을 탈취하고 돌아가 몹시 만족해 하더니, 이해 4월에 또 군사를 거느리고서 등주에 가려고 하였다. 조정에서 시양에게 명하여 가서 전별하게 하였는데, 시양이 가도에 들어가니 접반사홍보(洪靌)도 가도에 있었다. 이때 문룡은 경솔하고 천박하며 거짓을 꾸미는 태도가 용모와 언어에나타났으며 과장되게 공을 자랑하기를 좋아하였다. 시양이 홍보에게 말하기를, “도독이 이번에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오.” 하니, 홍보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소?” 하자, 시양이 말하기를, “두고 보시오.” 하였다. 문룡이 홍보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근일에 또 조시준의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조그만 일이므로 내가 우선 용서하지만 이후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홍보는 창성(昌城)의 일이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장계하기를, “남궁인의 일은 신이 진실로 믿지 못하여 조정에 아뢰었는데 채용되지 아니하여 문룡에게 조롱과 모욕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조정에서 비로소 깨닫고 남궁인을 곤장을 쳐서 내쫓도록 명하였다. 문룡이 이미 가도를 떠나자 홍보도 섬에서 나와 6월에 시양과 평양동포루(東炮樓) 위에서 만났는데, 원숭환(袁崇煥)이 문룡을 죽였다는 소식이 마침 이르자 홍보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영감이 모문룡이 이제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말하고, 또 유해(劉海)도 장차 죽을 것이라 말하더니 이제 모문룡이 이미 죽었으니, 유해도 또한 반드시 죽겠다.” 하였다. 《하담록》
(13) ▣ 연려실기술 별집 제13권 정교전고(政敎典故) 노비(奴婢) ▣
○ 우리 나라에서 군역(軍役) 해당하는 자는 겨우 15만 명인데, 사삿집 종이 40만 명이나 된다. 듣건대, 고려조에서는 양처병산(良妻幷産)의 법이 없었기 때문에 당대의 권신(權臣)이 부(富)는 일국에서 제일이었으나, 노비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고려조에는 군사가 많았다고 한다. 반드시 그것이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국사를 보면 양처병산의 법이 영락(永樂) 8년에 정해졌는데, 누구의 건의로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대개 천한 여자는 남편이 정하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소생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기 어려우니,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 옳은 법이다. 따라서 천한 사람은 이미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 것이니, 사삿집 종의 병산(幷産)한 아이가 어찌 또 아버지의 신분을 따를 수 있을 것이랴. 이렇게 된다면 사삿집 종의 수효가 많아지고, 나중에는 군사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하담록》 영락 8년은 곧 태종 9년 기축인데, 그때에 그러한 법을 정한 일을 찾아 볼 곳이 없다. 김시양(金時讓)이 보았다는 국사가 역시 어느 책인지를 알 수 없다. 《문헌비고》
(14) ▣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유해(劉海) 형제의 일 ▣
○ 평안 감사김시양이 아뢰기를, “유흥치가 즉시 오랑캐에게 투항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흥치가 믿고서 난을 일으킨 대상은 투항한 서달(西㺚)인데, 투항한 서달 역시 오랑캐에게 죄를 얻고 목숨을 아껴 도망온 것이니, 반드시 다시 오랑캐 땅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흥치가 북쪽으로 달아나려는 계획이 필시 이 때문에 지연되는 것입니다. 명 나라 조정의 병력이 흥치를 토벌하여제거하기에 부족하면 치지도외할 뿐이지 반드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여 바다를 건널 리가 없으니, 당 나라 때의 번진(藩鎭)과는 사세가 같지 않습니다. 4, 5개월도 못 되어 흥치는 북쪽으로 달아나지 않으면 동쪽으로 침범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흥치가 만일 조정의 뜻이 접반사한테 있는 것을 안다면 그는 반드시 접반사를 잡고서 기화(奇貨)로 삼아 단연코 내보낼 리가 없고 방비도 더욱 엄하게 할 것이니, 접반사를 아끼려다가 단지 해치게 될 것입니다. 방금 수륙으로 흥치를 토벌하는 거사가 없다면 이정(李靖)이 이른바, ‘예컨대 당검(唐儉)주D-001의 무리는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지로 나온 역관의 말은 당(唐)의 양변(楊弁)의 15리의 광명(光明甲)이라는 말과 같음을 면하지 못하니, 조정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큰일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흥치 형제가 89척의 배를 띄워 등주(登州)로 향하다가, 7월에 도로 가도에 주둔하였다. 딴 본에는 8월에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 흥치가 섬 백성들을 협박하여 달아나 등양도(登洋島)로 들어갔다. 관군이 파하고 돌아오니, 흥치가 황제의 칙명을 받아 섬을 다스린다고 거짓 일컫고 관도(款島)에 자문을 보냈다. 《촬요》
○ 흥치가 섬에 돌아온 뒤 그 부하 장수들이 우리 역관을 불러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힐문하였는데, 공갈 협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서가 장계를 올리기를, “실로 천자께서 유흥치에 관한 일로 조명(詔命)을 내려 우리 나라를 타이른 것이 없으니, 신은 흥치가 반드시 섬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고 또 장차 변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이 뜻을 수군에 통하고 상의하여, 변에 대응하여 헤아리소서.” 하였다.
○ 흥치가 차관(差官)이매(李梅)를 우리 나라에 보냈으므로 정유성(鄭維城)을 회답사(回答使)로 삼아 가도에 보내니, 흥치가 회답하기를, “전개(專价)가 두 차례 편지를 가져오니 선의를 인정할 만하다. 다만 그 말이 너무 지나치게 격노하였으니 아마도 다 풀리지 않은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번에 섬에서 일어난 사건은 실로 듣기에 놀라운데 족하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천자를 위하여번국(藩國)을 지키는 몸이니 영토 안에 비상 사태가 일어나면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치는 것은 바로 나의 직무이다. 죄를 용서하고 책무를 맡긴다는 천자의 명을 듣자 즉시 군사를 거두었으니, 애당초 족하에게 사사로이 노한 것이 아니다. 족하가 과연 능히 황조(皇朝)를 위해 시종일관 충절을 다하고 오랑캐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함께 운수를 갚는 의리를 지킨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소홀히 대하겠는가. 서도 지방은 흉년이 들어 곡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나 섬 안의 군사와 백성이 서로 도와온 지 이미 오래이니, 곡식의 가격을 공평하게 하기를 힘써 피차가 각기 병들지 않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 이때 조정에서는 군사를 거두도록 명하였는데, 흥치가 김시양이 싸움을 주장한 것을 가장 미워하므로, 시양을 체차하고 민성휘(閔聖徽)를 대신 감사에 임명했다. 《하담록(荷潭錄)》
○ 신미년에 흥치가 죽자 남은 무리들이 오랑캐에 투항하니, 오랑캐 군사가 강을 건너와 곽산(郭山) 서쪽에 꽉 들어찼다. 이에 감사 민성휘가 검산성(劍山城)에 있으면서 이 사실을 보고하니, 조정이 크게 놀라 정충신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공문을 띄워 성휘에게 나가 피하도록 하소서.” 하니, 충신이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성휘가 만일 성을 버리고 나온다면 성안의 군사들이반드시 울부짖으면서 만류할 것이니, 소문이 나면 좋지 않습니다.” 하였다. 김시양이 말하기를, “오랑캐 군사는 반드시 섬 안의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하여 온 것일 터이니, 우리에게는 해가 없을 듯하다.” 하더니, 다음날 서쪽에서 소식이 왔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하담록》
○ 문룡 때부터 호(號)가 마진인(馬眞人)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가도를 왕래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섬라국(暹羅國) 사람으로 나이는 170세이며, 이무기나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 가두고 귀신을 잡고 쫓아서 변화가 헤아릴 수 없다.”고 하니, 섬 안에서 모두 숭배하고 받들어 신으로 여겼다. 임신년에 또 마진인이 가도에 오니 접반사가 치계하기를, “마진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장차 오랑캐 군사와 싸우려 합니다.” 하니, 김시양이 말하기를, “이것은 허황한 말이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의주 부윤이 급히 보고하기를, “마진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련성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이서(李曙)가 시양에게 말하기를, “공이 처음에 허황한 말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시양이 말하기를, “의주 부윤이 허황한 말에 속은 것이다.” 하자, 이서가 말하기를, “공의 스스로 잘난 체함이 이와 같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의주 부윤이 치계하기를, “마진인이 나왔다고 말한 것은 한인(漢人)들의 허황한 말입니다.” 하니, 이서가 비로소 크게 놀라 말하기를, “공은 어떻게 그것이 허황한 말임을 알았는가?” 하자, 시양이 말하기를,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지 못한 것일 뿐이다. 마진인이 스스로 170세라 일컬었는데, 비록 이것이 과장된 말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장차 백 살이 되는 늙은이일 것이니 반드시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을 것인데, 어찌 스스로 싸움터에 나가 죽으려 하겠는가.” 하니, 정승들이 다 탄복하였다. 《하담록》
○ 유해(劉海)는 우리 나라 진주(晉州)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신(愼)이며, 이름은 민(敏)이요, 아버지는 응창(應昌)이다. 만력(萬曆)22년 왜변 때에 한 가족 9명이 노략질당하자, 유해는 11살에 유정(劉綎)의 군사에 들어가 유정의 성을 따르고 이름을 해라고 고쳤다. 차관(差官)으로서 조선에 와서 진주에 내려가 아버지를 찾겠다고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에게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하였다. 일찍이 그 아우는 6살 때에 왜국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 재물을 저축하였는데, 아버지가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백금(百金)을 속바치고 석방시키니, 이해에 돌려보내 오는 우리 나라 백성들과 함께 돌아왔다. 임금이 응창에게 6품의 벼슬을 주어 위로하고, 유해는 돌아가 유정과 함께 오랑캐를 정벌하다 전사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
(15) ▣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
○ 김시양을 도원수로 삼았다.
○ 이때 오랑캐가 대장 소도리를 보내 세폐(歲幣)를 요구하며 10여 일을 머물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신득연을 보내 회보하게 하였더니, 소도리가 불쾌한 말을 하고 가버렸다. 유독 김시양과 이서만이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총융사이서와 병조 판서김시양이 모두 겁을 낸다고 하교하였다. 득연이 심양에 가서 오랑캐에게 쫓겨 돌아왔다. 시양이때 원수가 되었다. 이서쪽을 순시하다가 안주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서 또 김대건(金大乾)을 보내 다시 세폐를 허락하기 어렵다는 말을 거듭하여 화친을 끊을 뜻을 보이니, 시양이 대건을 의주에 머무르게 하고 소를 올리기를, “강약이 같지 않으면 세폐는 한(漢)과 당(唐)도 면하지 못한 바입니다. 그들의 환심을 잃어서는 안 되니, 천하의 일은 모두 뒤에 잘못을 뉘우치고 고칠 수 있지만 이 일만은 뉘우쳐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충신이 같이 상소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종사(從事)구봉서(具鳳瑞)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화친을 끊기로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니 상소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십시오.” 하니, 시양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점쟁이가 말하기를, ‘내가 금년에 귀양살이를 할 화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소가 올라가면 삼사에서 반드시 죄주기를 청할 것이므로 점쟁이의 말이 이제 반드시 맞을 것이다.” 하였다. 시양이 평양에 돌아오자 민성휘(閔聖徽)가 말하기를, “오랑캐의 욕심이 한이 없으니 만약 결전하지 않으면 만족을 모르는 욕심에 응하기 어려우며, 도내(道內)의 인심도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상소를 하는가.” 하니, 시양이 말하기를, “도내의 인심은 내가 미처 알 수 없지만 오랭캐가 만일 군사를 움직이게 되면 그 수가 반드시 적어도 3, 4만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무슨 수로 갑자기 3만의 군사를 마련하여 대응할 수 있으며, 설사 군사의 수가 서로 맞는다 하더라도 모두 보병으로 제대로 교련을 받지 못하였으니, 오랑캐가 달(㺚)의 기병으로 짓밟으면 비록 설령 한신(韓信)과 백기(白起)를 장수로 삼는다 하더라도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계유년 1월 임금이 비변사에 하교하기를, “김시양과 정충신 등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멋대로 사신을 머무르게 하여 인심을 꺾으니 머리를 베어 여러 사람을 깨우치고자 한다.” 하자,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전진(戰陣)에 임하여 실수한 죄와는 같지 않으니, 청컨대 잡아 올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하였는데,시양은 영월(寧越)에, 충신은 당진(唐津)에 정배하였다가 대간들의 의논으로 장연(長淵)으로 고쳤다. 2월에 임금이 장차 친정(親征)하려고 송경(松京)에 진주하려고 하는데, 대건이 강을 건너 오랑캐의 국경에 들어가지 못한 채 돌아오니 임금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세폐를 허락하였다. 다음해인 갑술년에 시양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로부터 그는 입을 다물고 군사 일에 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하담록》
(16)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 회령(會寧) □□사우(□□祠宇) 만력 병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ㆍ김시양(金時讓)
(17) ▣ 연려실기술 제21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사(政事) ▣
○ 명 나라 사신이 장차 도착하게 되는데 나라에서 쓸 비용이 없어서 귀양간 사람에게 은을 바치고 풀려는 것을 허락하였다. 형조(刑曹)로 하여금 귀양간 사람을 이름을 나열하여 아뢰게 하니 장차 그 중에서 선택하려고 하였다. 이에 귀양간 집에서는 궁중에 연줄을 대려고 도모하였다. 신흠(申欽)ㆍ서성(徐渻)ㆍ박동량(朴東亮)ㆍ한준겸(韓俊謙) 등은 모두 왕실과 혼인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각각 은 수백 냥을바치고 석방되었다. 김시양(金時讓)이 말하기를, “비록 그들이 뛰어난 명망이 있으나, 반드시 선비들의 공론에서는 천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였더니, 인조 반정 때에 신흠은 서인의 영수였기 때문에 감히 허물을 말하는 사람이 없어 맨 먼저 이조 판서가 되고 오래지 않아서 정승으로 임명되었다. 은을 바치고 죄를 면하는 명이 내리니 이명준(李命俊)이 은을 장만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은을 내고 풀려 나가고 싶지만 창졸간에 준비하기 어렵다.” 하니, 김시양(金時讓)이 말하기를, “해조(該曹)에서 이름을 나열하여 아뢰었으니 도모하지 않는 사람은 여기 들지 않을 것이니 공은 지나치게 근심하지 마시오.” 하니, 이명준이 그렇게 여기지 않더니 그 명단중에서 선택하여 결정이 내린 뒤에야 명준이 김시양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하담록》
(18) ▣ 연려실기술 제21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윤선도(尹善道)가 소를 올려 이이첨을 논하였다. 병진년(1616) 겨울 귀천군(龜川君) 수(晬)붙임 ▣
○ 윤선도가 소를 올려 이첨의 죄를 논하는 동시에 승종과 희분이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죄를 아울러 논하였는데 이는 선도가 희분의 집안과 인척 관계로 그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여 그 자취를 엄폐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첨의 당이 그 망녕된 것을 논하고 경원으로 귀양보내었다. 김시양(金時讓)이 부계(涪溪)종성(鍾城) 에 귀양가 있을 때 선도와 친척 관계가 있어 서로 왕래했는데 선도가 직언한것으로서 죄를 입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시양이 “공의 상소문은 대신은 논하지 않고 유독 승종과 희분의 말하지 않은 죄만 지적했으니 또한 말세의 말입니다.”하니, 선도가 무안해 하였다. 이극건(李克健)이 또한 소를 올려 이첨을 논하다가 종성으로 귀양갔는데 사람됨이 어리석고 광기가 있어, 스스로 “희분과 서로 의논하여 소를 올렸다.”고 자랑하였다. 그것은 대개 희분이 당시에 권세를 떨쳤기 때문에 변장(邊將)과 수령들에게 그들이 희분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자기를 후하게 대접하도록 한 것이었다. 시양이 우연히 묻기를, “공은 선도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하니, 극건이 “연령이 같지 않아서 처음에는 서로 몰랐지만 요사이 서로 상소를 의논하기 위하여, 희분의 집에 자주 모인 연후에 매우 친숙해졌습니다.”하였다. 후에 시양이 선도에게 말하였더니 선도는 부끄러워 답하지 못하였다. 계해년 반정한 초기에 유생(儒生)으로서 소를 올린 죄로 귀양간 사람은 모두 6품 벼슬로 등급을 뛰어서 임명되었는데, 임숙영(任叔英)이 “선도가 희분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과 김제남(金悌男)이 반역을 모의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안다는 말이 있으니, 죄를 면한 것도 다행인데 표창해서 올려 쓸 수는 없습니다.” 하니, 여론이 이를 옳게 여겼기 때문에 다만 의금부 도사로 임명하였다. 《하담록》
(19) ▣ 연려실기술 제29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조조(仁祖朝)의 명신(名臣) ▣
[김신국] ○ 병자년 난이 지난 뒤, 김시양이 공(☞ 김신국)을 보고 말하기를,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어 그것을 힘입어 망하지 않았으니, 남한산성은 보배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대도 또한 이런 말을 하오.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오.” 하니, 시양이 그 말에 매우 감복하였다.
(20) ▣ 연려실기술 제22권 원종 고사본말(元宗故事本末) 원종(元宗)과 인헌왕후를 추숭하다 ▣
○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에 대간이 대궐 안에 빈소를 모시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니 인경궁(仁慶宮)의 별전(別殿)으로 나가서 빈소를 모시자고 청하니 임금이 듣지 않았다. 장사할 때에 장차 그 별전(別殿)으로 반혼(返魂)하려 하니 대간이 또 그 옳지 못함을 논하고 옛집으로 반혼하기를 청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사간 이윤우(李潤雨)와 헌납 권도(權濤)에게 이르기를, “대간의 계사(啓辭)는 마땅히성실해야 될 것이오. 이리저리 흔들려서 시속의 의론에 구차스럽게 영합해서는 안 된다. 당초에 대관(臺官)의 말을 채용하여 별전(別殿)으로 나가 빈소를 모셨다가 이내 그곳에서 반혼(返魂)을 한다면 무슨 말로써 간할 것인가, 어찌 별전에 빈소 모시는 것은 옳다고 하면서 별전으로 반혼(返魂)은 할 수 없는 이치가 있는가. 임금께서 대관(臺官)의 의론을 존중하지 않음이 마땅하다.”하니 권도와 이윤우가 모두 묵묵히 말이 없었다. 이민성(李民宬)이 김시양에게 이르기를, “진유(眞儒)로 예(禮)를 아는 이가 없어서 조정의 의논이 이와 같이 시끄러웠으니 만약 율곡과 서애(西厓)가 오늘날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했다. 시양은, “공의 견해는 이와 같으면서 승정원의 동료의 의론에 따라 임금에게 대관의 의논을 따르기를 청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하니 민성이 “사람이 보잘것없고 명망이 가벼우니 어찌 감히 앞장을 서서 그 서슬에 맞서겠는가.”하였다. 《하담집》
○ 계해년 반정한 초기에 김시양(金時讓)은 영해(寧海)로 귀양가 있고, 이명준(李命俊)과 심액(沈詻)은 영덕(盈德)으로 귀양가 있다가 모두 풀려 나오자, 즉시 경계의 근처에서 만나기를 약속한 후 서로 작별하고 돌아가면서 명준은“천명(天命)이 다시 새롭고 만물이 새 세상을 보게 되었는데 무엇이 오늘날의 큰 일이 되겠는가.”하니 시양은 “정원군(定遠君)의 추숭일 것이다.”하였다. 명준은 “임금께서는방지(旁支)로써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했으니 어찌 사친(私親)을 추숭하겠는가.”하니 시양은 “이는 그렇지 않다. 한(漢) 나라 선제(宣帝)는 들어와서 소제(昭帝)를 계승했는데 사황손(史皇孫)을 추존하지 않은 것은 소제가 일찍이 사황손으로써 아들을 삼지 않았으니 선제가 어찌 감히 자기가 귀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아버지로 하여금 다른 사람( 소제)을 아버지로 삼게 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이와 다르다. 정원군은 바로 선조(宣祖)의 아들이니 태묘에 아버지의 위차를 빠뜨릴 수 없다. 정원군을 추존하면 부자가 서로 계승하게 되고 태묘의 위차도 갖추어질 것이니 진실로 예(禮)에 합당하다.”하자, 명준은 “공의 말이 옳다.”하였다. 명준은 장령(掌令)으로서 먼저 서울에 이르렀고 시양은 예조 정랑으로서 잇달아 이르렀다. 명준은 “조정의 의논이 추숭하는 것을 사론(邪論)이 영합한다고 하여 심히 배척하기 때문에, 비록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지만 우리들의 견해는 실로 예(禮)에 합하는 것이다.”했다. 얼마 후에 시양이 장유를 방문하였는데 김원량(金元亮)이 또한 자리에 앉았다가 “박지계는 예법상 당연히 추숭해야 된다고 하더라.”하니 장유는 그 옳지 못함을 극력 반박하였다. 시양은 “이 의논이 나오지 않았으면 진실로 좋겠지만, 이미 나왔으니 조만간에 반드시 시행되고야 말 것이다.”하니, 장유는 “어찌하여 그렇게 되겠는가?”하고, 시양은 “두고 보시오.”했다. 최명길이 시양에게 이르기를 “장유의 말을 들으니 공(公)이 추숭의 의론은 반드시 시행될 것이라 했다 하니 그런 일이 있는가?”하자 시양은 “그렇다.”하였다. 명길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김장생이 예(禮)를 잘 알기로 이름이 났는데 소(疏)를 올려 임금에게 선조(宣祖)를 아버지로 삼기를 청하였다. 부제학 정경세가 차자를 올려 “만약 선조(宣祖)를 아버지로 삼는다면 정원군(定遠君)을 형으로 삼게 되니 예(禮)에 크게 합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덕흥군(德興君)의 전례에 의거하여 정원군을 높여 대원군으로 삼았다. 을축년 겨울에 명길이 시양에게, “옛날의 예절을 널리 상고해 보니, 지금 추숭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 말이 옳았다.”하였다. 병인년 명길과 이성구(李聖求)가 시양을 방문했는데, 명길은 “추숭하는 것이 예에 부합한다.”하고 성구는 “예(禮)에는 어긋난다.”하여, 각각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심히 다투며 논박하였다. 얼마 후에 계운궁(啓運宮)이 승하하니 임금이 명령하여 초상의 모든 예절은 한결같이 국상(國喪)에 의거하게 하였다. 대신이 재신(宰臣)과 삼사를 거느리고 간언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길은 부제학이었는데 의논이 같지 않음으로써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니 조정의 의론이 그를 사특한 의론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청현직의 선발에는 추천되지 않았는데 김류(金瑬)가 극력 주장한 것이었다. 《하담록》
○ 신미년(1631, 인조 9) 여름에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추숭하기를 청하고 별묘(別廟)에 제향하기를 청하면서도 오히려 당시의 의논을 꺼려서 감히 그 설을 다 말하지 못하였다. 임금께서 그의 의논을 내려 보내니 오윤겸(吳允謙)과 좌의정 김류(金瑬)가 공경과 재상, 삼사를 거느리고 여러 날 동안 간언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공사(公事)로 오윤겸의 집에 갔더니 오윤겸이 조정의 의논을 언급하자, 시양은“추숭이 반드시 예(禮)에 부합하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지마는 한ㆍ당(漢唐) 이하의 제왕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설령 임금께서 이 일을 하신다 해도 허물을 보면 인(仁)을 아는 일주D-019에 불과할 것입니다. 임금께서 반드시 하고자 하시는데 조정에서 굳게 간언한다면 반드시 귀양보내고 벼슬에서 내쫓는 위엄을 시행할 것이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인(仁)만을 아는 과실을 없이 하려다가 도리어 임금을 큰 과실에 빠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하니 오윤겸은 “공(公)의 말을 듣고서 매우 환하게 깨달았습니다.”말하였다. 얼마 후에 임금이 김류를 체직시키니 윤방(尹昉)이 다시 정승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윤공(尹公)은 반드시 다른 의견을 내세워 임금의 뜻을 거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후에 추숭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니 윤방이 겉으로는 조정의 의논을 따라 공공연히 간언했으나 속으로는 몰래 추숭을 주장하였다. 어느 날 공경과 재상들과 함께 빈청(賓廳)에 있으면서 시양에게 이르기를, “조정에서 만약 극력 간언한다면 임금께서도 반드시 따르실 것입니다.”하니, 시양은 “정승의 의사가 이와 같다면 마땅히 입이 쓰도록 간언하여 정성을 다해서 기어이 임금의 마을을 돌릴 것이니, 누가 감히 금지시키겠습니까.”했다. 윤방은 조용히 있고 여러 재신(宰臣)들은 모두 빙그레 웃었다. 이귀는 상신(相臣)들은 마땅히 조정에서 다툴 수 없다고 하면서 장유(張維)를 꾸짖어 욕하여 말씨가 심히 거칠었는데 이는 장유가 조정의 의논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정귀(李廷龜)가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면서 “이 사안은 한 집안의 일이 아닌데 조정의 공회(公會)에서 어찌 이같이 무례할 수 있소.”하였다. 윤방이 태연하니 시양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에야 비로소 윤공의 도량이 큰 것을 알았다.”고 하자, 나만갑(羅萬甲)은, “이것이 어찌 도량이 크다고 할 수 있소. 염치가 없어서 그러한 데 불과하다.”했다. 시양이 명길을 방문하였는데 윤방의 손자 구(坵)가 때 헌납이 되어 명길과 정쟁(廷爭)할 계사를 의논하여 정하고 있었다. 시양이 웃으면서 명길에게 이르기를, “공은 이미 추숭을 주장했으니 정쟁의 문자는 지휘할 수 없습니다.”하니, 윤구가 얼굴빛을 변하면서 일어났다. 《하담록》
○ 과거에 장유(張維)가 차자를 올리면서 예경(禮經)의 말을 인용하여 추숭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극력 논변했는데, 정경세(鄭經世)는 차자를 올려 추숭의 의논을 공격하고 장유의 차자로써 예법의 정도를 얻었다고 했다. 어느 날 김시양이 최명길ㆍ장유와 비국(備局)에 모였는데 장유가 최명길을 공격하여 사론(邪論)이라고 하니 최명길이 벌컥 성을 내어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면서 “나의 추숭하자는 의논은누구에게서 나왔소. 공이 추숭함이 예법에 부합한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차자를 올리라고 권했기 때문에 나는 공의 말을 따라 한 것입니다. 지금의 일로써 생각해 보면 공이 나를 시켜 조정 의논을 시험삼아 탐지하게 하고는 공은 이에 그 설을 고쳐서 스스로 조정의 의논에 붙고 있습니다.”하였다. 시양이 웃으며 장유에게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떻습니까?”하니, 장유는 얼굴이 빨갛게 되면서 “내가 예(禮)를 자세히 상고하지 못하여 이런 말이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그 잘못을 깨달았다.”하였다. 전후로 의논이 다름이 이와 같았다. 《하담록》
○ 김광현과 강석기(姜碩期) 등이 죄를 입으니 장유(張維)가 김시양(金時讓)에게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정의 의논을 정지시키고 임금을 지나친 거조(擧措)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하였다. 김시양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비록 마음으로는 추숭을 주장하는 사람일지라도 감히 입에서 꺼내지 못하는 것은 영합한다는 비난을 받기 때문입니다.”하였다. 장유가 마음속으로 그렇게여겼다. 이성구(李聖求)는 갑자기 자신의 설을 변경하여 임금의 뜻을 따랐다. 《하담록》
(21) ▣ 연려실기술 제29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조조(仁祖朝)의 훈신(勳臣) ▣
[정충신(鄭忠信)] ○ 김시양이 언젠가 조용히 묻기를, “공이 이괄이 반란한 것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와 이괄의 친분이 형제와 같은 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것이오. 또한 문회(文晦) 등에 의해 고발되었던 것은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잡혀 문초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소. 그리고 이괄이 모반할 때, 내가 영변(寧邊) 근방에 있었으니, 만약 사람들이의심하게 된다면 나의 본심을 천하에 분명히 밝히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성을 버리고 도망나옴으로써 내 본심을 밝혀서 사람들이 절로 믿도록 한 것이었소.” 하였다. 《하담록》
[민성휘(閔聖徽)] ○ 경상 감사 김시양이 임금에게 하직할 때에 임금이 이르기를, “전임자 중에 민성휘는 너무 급하고, 이민구는 너무 느렸으니, 경은 마땅히 중간을 취하라.” 하였다. ○ 감사 민성휘는 관아에 있으면 그 조용하기가 마치 산에 있는 중과 같았다. 《평양속지(平壤續志》 ○ 기묘년에 평안 감사로 있을 때 공이 옛날 창고를 헐고 못을 팠는데, 흰 벽돌 다섯 개가 나왔다. 길이는 4자, 넓이는 2치, 두께는 2푼이었는데, 겉에 ‘간좌곤향(艮坐坤向)’이라고 새겨 있었다. 그곳에 도로 묻었다. 《평양속지》
[김시양(金時讓)]경상 ㆍ 평안 감사 ㆍ 병조 판서 ㆍ 도원수 ㆍ 4도 체찰사(四道體察使) 김시양은 처음 이름은 시언(時言)이며, 자는 자중(子中)이고, 호는 하담(荷潭)이다. 을사년 정시(庭試)에 뽑히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 어릴 때에 남보다 뛰어났고 기상이 비범하였으며, 책을 많이 보고 잘 기억하였다. 오리(梧里)ㆍ백사(白沙) 두 분이 한 번 보고 국기(國器)라고 인증하였다. ○ 경술년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문견록(聞見錄)을 올려서 논하기를, “오랑캐의 기세가 점점 뻗치는 것 같은데, 우리 나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자면 요동(遼東) 길은 믿을 수 없으니 바닷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공이 10년 전에 미리 안 것이었다.
○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향시를 주관하였는데, 여러 소인들이 시험 문제에 임금을 비방하고 풍자하였다고 적발하여 체포당하였다. 정 판서(鄭判書)세규(世規)가 광릉(廣陵) 길에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법정에 들어오자 의금부에서 극형에 처하기를 아뢰었는데, 광해주(光海主)가 그것을 3일 동안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옥에서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니, 윤효(尹孝先)이 시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함께 잡혀 있었는데, 공을 차서 일으키며, “지금이 어떤 때인데 평안히 잘 수 있소.”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요.” 하였다. 백사 정승 이항복(李恒福) 이 구원하여 사형에서 감형되어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공이 가던 길에서 시를 지었는데, 마음과 행동이 본래 백일을 속이지 않았으니 / 心跡本非欺白日 길흉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물을 것이 아니다 / 吉凶元不問蒼天 하였다.
○ 광해 때, 호조에서 토목 공사에 비용이 군색하여 죄인들에게 돈을 받고 속(贖)하라는 명이 내렸다. 귀양간 여러 사람들이 그 명령대로 돈을 바치기를 서로 다투었다. 공과 무숙(茂叔) 임숙영은 구차하게 죄를 면하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속죄하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 이괄의 난에 임금의 행차가 공주(公州)로 파천하였다.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이 먼저 안현(鞍峴)을 점령하여 적병을 격파할 계책을 내니, 모든 장수가 그 계책이 어떨까 의심하였으나 공은 힘써 그 계책을 찬성하여 다행히 큰 공을 세웠다.
○ 공이 두 번째 병조 판서가 되니, 무인으로서 재주는 있어도 세력 없는 자들이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공정한 도(道)가 다시 시행되겠구나.” 하였다.
○ 서쪽 오랑캐 침략의 일이 급해져서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근심하였는데, 홀로 조정에 있는 이들만은 취(醉)하여 깨지 못하였다. 공이 당시의 재상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금년 겨울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오랑캐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을 것이나, 군사란 것은 먼저 준비가 없으면 창졸간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여러 분의 계책이 여기에 미치지 못합니까.” 하였더니,그 해 겨울에 과연 공의 말과 같이 되었다.
○ 임경업이 오랑캐에게 잡혀 갈 때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경업의 사람됨을 아는데, 죽을 줄을 알고도 피하지 않을 사람은 아니니, 반드시 도망할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공의 말과 같이 하였다.
○ 기사년에 금 나라 사람들이 인삼 수천 근을 보내어 푸른 베와 바꾸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쌀과 베를 사고 팔고 하여 응하였다. 5년 만에 금나라 사람이 또 그 수효대로 되지 못한 것을 책하였다. 안팎에 있는 일 맡은 신하들은 눈이 어둡고 마음이 막혔는지 아득하게 기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물으니, 공이 각 고을에서 나눠 받은 것의 많고 적은 것과, 각 도 감사와 비변사의 아뢴날짜까지를 입으로 외우고 글로 썼다. 뒤에 그 장부를 얻어 맞추어 보니,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었는데, 임금이 곧 탄복하여 이르기를, “세상에 드문 총명이다.” 하였다.
○ 어린아이 때 우연히 어떤 집에 전답의 결수를 기록한 것을 보았는데, 잠깐 눈을 거쳤지마는 또한 일생 잊지 않았으니, 기억하는 재주가 천성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상은 모두 용주(龍洲)가 지은 신도비다
(22) ▣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 ▣
○ 우신(☞ 남병사서우신(徐祐申))이 전쟁을 그치고 본도에 돌아가는데, 몽고의 대병(大兵)이 영서(嶺西)로부터 곧장 북도로 향해 가면서 노략질하는 것이 침입해 들어올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때 우신이 철령(鐵嶺) 위에서 몽고의 대병을 만나 쳐죽인 수가 대단히 많았다. 몽고병이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 먼저 안변(安邊)을 점거하고 시내와 골짜기 사이에 군사를 감춰놓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남도의 장수들은 조금 이긴 기세를 타 자못 교만하고 게으른 마음이 있어 활과 화살을 늦추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진하다가 몽고병의 습격을 받아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였다. 덕원 부사(德源府使)배명순(裵命純), 남우후(南虞候)한진영(韓震英), 홍원 현감(洪源縣監)송심(宋沈)이 모두 주(죽)었다. 이에 김시양(金時讓)이 상소하여 우신의 목을 베어서 안변에서 패하여 죽은 군사들의 목숨을 보상해 주기를 청하였다. 우신을 다시 잡아와서 장차 군율을 시행하려 하는데, 원수와 서로 다툰 문서 보고에 힘입어 남한에 귀양갔다.
(23) ▣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난리 뒤에 생긴 일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첨부하였다. ▣
○ 전 판서김시양(金時讓)이 올린 차자의 대략에, “군사에 패하여 군율을 어긴 자는 즉시 군중에서 목을 베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법인데, 장신과 김경징 등은 잡아다 국문할 만한 어떤 사정이 있습니까. 이숙번(李叔蕃)은 정사원훈(定社元勳)이었으나, 태종께서 교만하고 방자하다 하여 그 훈적(勳績)을 깎았는데, 장신이 종묘 사직을 함락되게 한 죄가 숙번의 교만 방자한 것과 어떤 것이 큽니까.전하께서는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지 아니하시고 자진하게 하였으니, 어찌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장신이 자진할 때에 그 집으로 곧장 들어가 죽었다 하니, 국법에 저자에서 사람을 처형해 그 시체를 버려두어 뭇 사람이 보도록 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의금부 도사가 직책을 잃은 죄는 용서해서는 안 되는데, 대간이 아직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큰 난리를 겪은 뒤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마땅히 사사로운 생각을 씻어버리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힘을 바쳐야 거의 천의(天意)를 돌리고 국세(國勢)를 만회할 수 있을 터인데, 이제 온 나라의 공정한 시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으니 끝내 국가를 어느 곳에 두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 경징은 대간이 처음에 법대로 처단하자고 논계하여 강계(江界)에 귀양보냈다가, 전 판서 김시양과 참판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로 인하여 사헌부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서 잡아다 사사하고, 민구는 영변(寧邊)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였다. 《병자록》
(24) ▣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계해정사(癸亥靖社) ▣
○ 병진년 사이에 김시양(金時讓)이 북쪽 변방에 귀양가 있었는데 이때는 광해의 어지러운 정사가 날로 더 심하여지던 때였다. 시양이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이 반정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이상하게 여겨 일기에 쓰기를, “옥부(玉孚)가 불을 들었으니 범해[虎年]의 일이다].玉孚擧火虎年事]”고 하였는데 이는 원종의 휘(諱)가 옥(玉)과 부(孚)를 합한 부(琈)이고 중종(中宗)이 병인년에 반정(反正)을하였으므로 이런 은어를 쓴 것이다. 무오년에 영해(寧海)로 귀양지가 옮겨졌는데, 유인(有人) 유인은 허의보(許毅甫)의 이름이다. 이 찾아와서 광해의 어지러운 정치를 언급하며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쌓은 덕이 반드시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왕자 정원군(定遠君)은 기량이 있고, 재상(宰相)윤방(尹昉)은 또한 비범한 사람이다.”고 말하였다. 시양이 꿈이 헛되지 않다고 생각하였더니 2년 후에 원종이 세상을 떠나고 계해년에 임금 (인조)이 원종의 맏아들로 반정하였다. 《하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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