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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선조 청백리 34인 책자에서 (2004. 6. 23. 상석(제) 제공) 출전 : <조선조 대표 청백리 34인> (<조선의 청백리>. 이영춘 外 지음. 가람기획) 공동저서인 이 책에서 정신문화연구원 문학박사인 신명호(申明鎬)는 "마음과 행동이 하늘의 해를 속이지 않았네"라는 소제목으로 충익공(휘 時讓)을 소개 하고 있다.
* 이항복이 한눈에 동량지재감으로 점찍다. 인조 때 청나라에서 인삼 수천 근을 보내 푸른 베와 바꾸려고 하였다.조선은 이에 응했는데, 5년이 지난 후 청에서 수량이 부족하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신하들은 5년 전의 일이라 까마득히 잊고 수량을 기억하지 못하였다.그러나 김시양은 각 고을에서 나눠 받은 것의 많고 적음과 각 도의 감사와 비변사에서 결과를 보고한 날짜까지 모두 입으로 외우고 글로 섰다. 후에 장부를 확인하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12~14세 때 외란 중에 연달아 부모를 여의고 그 험한 슬픔 속에서 어른처럼 상사를 처리하여 주위에서 놀랐다. 그 후 정시(선조38년:1605)에서 합격하여 당시 정승이던 이원익과 이항복이 한 번 보고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로 인정하였다.
* 인조반정 후에야 복권 인조는 반정 직후에 함경도에서의 오랜시간의 귀양과, 문신으로 군사에 조예가 깊다하여 의주부윤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김시양은 압록강의 의주 보다는 청천강에 위치한 안주의 제2방어선에서 적을 대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건의를 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훗날 정묘,병자호란 시 여진족이 의주를 쉽게 통과함으로써 김시양의 의견이 선견지명이었음이 드러났다.
* 화친론을 주장하다 또 귀양 가다.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공정한 인사를 시행하였다. 정묘호란의 결과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휴전으로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후금의 재공격을 우려하여 김시양을 평안도 도원수로 삼아 방비를 하도록 하였다. 이 때 후금에서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자,조정은 화친을 끊고 전쟁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시양은 입장을 달리 하였다.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후금과 섣부른 전쟁을 벌이면 안된다는 의견이었다. 김시양은 뛰어난 무장이던 정충신,이 서등과 反戰의 상소문을 올렸다.이 일로 인해 다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후일 병자호란의 참극이 일어나자 김시양이 주장했던 화친론이 전쟁을 예방하고자함이었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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