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시양(金時讓)1581(선조14)∼1643(인조21)--(제)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충익공소개 및 연보

2. 각종 사진

3. 친필 서찰 소개

4. 각종 도서관소장 목록

5. 신도비

6. 묘비문

7. 주요자료 - 1) 하담김시양문집

2) 유배지 영해탐방기

3) 묘비 건립 고유제

4) 신도비 문화재지정

5) 신도비 탁본과 탐방기

8. 각종 문헌 기록 종합 - 1) 조선왕조실록

2) 성소부부고

 3) 한국문헌설화

 4) 기문총화

 5) 연려실기술

 6) 대동기문

 7) 해사록에서

 8) 조선조 청백리

 9) 국가종합서비스

10) 계곡선생집

11) 지봉선생집

12) 택당집

13) 약봉유고

14) 만운집

15) 다시 쓰는 택리지

16) 고산유고에서

17) 성옹유고에서

18) 충익공행장

 

본문

p11.png 7. 주요자료

2) 유배지 경북 영해 탐방기 (2005. 1. 30. 항용(제) 제공)

   1) 일시 : 2005. 1. 28.

   2) 장소 : 경북 영덕군 영해면 일대

   3) 탐방자 : 김항용 (하담공 14대손)

   4) 내용  : 겨울 자체 연수를 겸한 하담 김시양 선조님 유배지 탐방

   5) 주요 활동 :

      가. 영덕 문화원 방문, 자료 수집

      나. 영해 유배지 거주지 찾기

      다. 관련 유적지 권경 종택 방문

 

<전략>

2년전 제2회 안사연 여름캠프 코스였던 월포해수욕장, 보경사, 수안김씨 집성촌 앞을 지난다. 얼마 전의 생각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모두 그립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이요 보람찬 행사였다. 길가에는 온통 영덕대게 판매점들이 호객하느라 난리다. 요즘이 대게의 계절이란다. 그런데 원조는 영덕이 아니라 강구란다. 일행은 강구포구의 한 음식점을 찾았다. 그런데 엄청 비싸다. 먹을 만한 크기가 1마리당 5-8만원이다. 입이 벌어진다. 모두들 눈을 질끈 감고 공동으로 5만원짜리를 주문했다. 그런데 알찬 게살맛과 별스런 요리솜씨에 역시 잘했다고 감탄들을 한다. 그리고 2년 전 안사연이 잠시 들렀던 삼사공원내의 한 숙소로 옮겨 잠을 잔다. 내일은 기다리고 고대하던 하담 김시양 선조님께서 2차 유배지로 계셨던 영해를 찾아가는 날이다.

 

우선 영덕 문화원 사무국장이신 이완섭 선생님께 내일 문화원에 방문할 것과 실제 유배지 확인을 위한 관련 자료를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이미 2년 전 <하담문집> 발간 당시 전화로 서로 인사한 바 있기에 님께서는 쾌히 응낙해 주셨다. 일행들에게는 나와 동행키로 하신 한 분과 내일 오전, 잠시 열외할 것을 주문해 놓았다. 내일을 고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3일째, 마지막 날이요 기대가 가득한 날(2005. 1. 28)이다. 7시 5분전, 일행 중 제일 먼저 일어나 커텐을 여니 해가 막 뜨려는지 바닷물 한 줄기가 붉은 빛으로 길게 드리워져 내쪽으로 뻗어 있다. 출렁이는 바닷물 위로는 한 층의 구름이 수평선위에 덮여 있고 그 위로 화로 속의 불씨 같은 빨간 불이 아주 작은 혀처럼 낼름 내민다. 순간순간마다 커져가는 불씨는 주위를 더욱 환하게 하면서 바닷물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불과 5분 사이에 해는 구름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장관이다. 의유당 연안김씨의 <동명일기>를 떠올리며 눈앞의 장관과 글 속의 표현을 상기해 본다. 잊지 못할 큰 충격이요 감동이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9시 출근시간에 맞추어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영덕문화원을 찾았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영덕의 역사>란 책자를 발간하기 위한 원고가 수북이 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이완섭 국장은 금새 나를 짐작으로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는 <영덕문화 제10집>(영덕문화원 간. 1999.)란 책 속의 <영덕과 유배 온 인물>(동 책 161P-167P)란을 펴시며 광해군 시절에 유배오신 하담 선조님의 이름을 보여 주신다. 왜 이렇게 반가운지. 마치 잃어버렸던 선조님을 막 찾는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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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문화 제 10집과 영해 유배자 명단. 우측면 상단에 김시양이 보인다>

 

또한 편집중인 <영덕의 역사>란 원고를 보여 주시며 <영덕의 인물>에 대한 글에서 ‘이곳에 유배 온 인사들에 의해 영덕의 많은 인사들이 학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김시양은 이곳의 권경(權璟)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기도 한 대표적 인물이다’라는 구절을 찾으니 눈이 번쩍 뜨인다. 이어 영덕과 관련한 역사 자료들을 총 정리한 <영덕 역사 자료 총람> 속에서 권경에 대한 부분을 복사해 받았다. 그리고 이국장으로부터 옛날에 영해는 도호부란 큰 지역이었고 이곳 영덕은 현에 불과했었다 한다. 그런데 최근엔 오히려 영해가 영덕군의 면으로 속해졌다고 한다.

 

이어 이국장님으로부터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하담선조님이 유배 오셨다는 구체적인 지명을 고증 받고 이어 그 동네의 향토사학자요 원로이신 두 분을 소개 받았다. 남정휴 (72세. 원구1리 232. 054-732-1045. 011-509-8045)선생님과 같은 동네의 백순호님이다. 큰 수확이었다. 선조님께서 유배중 기거하셨던 집터를 곧 찾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급했다. 곧 원구 1리로 갔다. 동네에 입구에 들어서니 여기 저기 문화재로 지정될만한 고가들이 즐비하다. 범상한 마을이 아니었다. 먼저 남정휴님의 댁을 찾았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님은 마을 노인들과 같이 백암으로 단체 목욕하러 가셨다고 한다. 낭패였다. 휴대폰 전화를 알려 주신다. 전화로라도 여쭐 양으로 통화를 하니 지금 마을회관에서 출발 대기중이란다. 빨리 오란다. 무언가 일이 되려나 보다. 신이 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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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리 고가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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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내에 있는 경수당>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로 가는 길은 이러했다.

 

영덕에서 울진방향(7번 도로)으로 약 10분가량 가면 사거리--창수(좌측)방면(918번 도로)--5분 거리 후 도로 좌측으로 원구1리.

마을 중앙에 있는 회관에 도착하니 두 분(南應時-83세, 南正烋-72세) 어른께서 나오신다. 곧 내게로 오셔서 수인사를 나눈다. 방문 목적을 말하자 두 분은 백암 온천으로 출발하려던 마을 행사 출발시간을 늦추시고 우리 차에 타시며 말씀을 잇는다. 하담 김시양님께서 이곳에 왔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유배가옥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관련한 전언 등은 없다고 한다. 다만 광해군때 서성(주1)이 유배왔던 곳이 있는데 일명 서재골(서성 즉 ‘徐씨 宰相이 살던 곳’이란 뜻)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곳에 얼마 전 서성의 후손들이 답사와서 확인하기도 했다 한다. 아마도 이곳에 서성이 먼저 유배왔다가(당시 개성유수. 1614--1616년경으로 추정. 59세) 후에 원주로 이배되었고, 그 다음에 김시양이 그 집으로 유배 왔을 것(1616년. 36세)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배지(서재골)는 마을에서 창수방향으로 약 1Km를 가니 우측으로 낮은 구릉같은 것이 벋어 나오며 곧 좌측으로 북향을 하고 있는 널찍한 터가 나온다. 지금은 모두 논과 밭으로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산 밑으로 작은 마을이 있었고 그 앞으로 낮은 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평지작업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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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리의 서재골. 하담 선조님 유배집터 추정지. 산 아래가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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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골 앞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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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골 입구의 언덕>

 

이곳을 유배왔던 인사는 조선조에 약 49명이 있는데 광해군때 이명준, 진선, 서성, 김시양 등이 다녀갔다고 한다(영덕문화 제10집. 1999년 영덕문화원 간).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두 분 어른을 기다리고 있는 전세버스로 모셔 드렸다. 너무도 기뻤다. 잃어버렸던 선조님의 묘소라도 찾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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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해 주신 분들. 좌로부터-남정휴님, 필자, 남응시님>

 

이어 하담 선조께서 제자로 삼으시고 학문을 가르쳤다고 하는 대은 권경(權璟. 1604-1666)의 종가댁(권 박씨 거주)을 찾아 괴시 2리, 일명 관어대로 향했다. 원구리에서 대진 해수욕장을 향해 불과 5분 여를 가니 고색이 짙은 기와집으로만 된 큰 동네가 나온다. 괴시1리이다. 큰 해설판도 있다. 모든 가옥이 민속자료,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 가정(稼亭) 이곡(穀) 생과 목은(牧隱) 이색(穡)선생이 출생하셨다고 한다. 함창이씨, 수안김씨, 영해신씨, 영양남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는데 지금은 영양남씨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길옆에 <가정목은 양선생 휴허비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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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시1리 영양남씨 와가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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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이곡선생과 목은 이색선생 유허비각>

 

이곳에서 불과 1Km를 가니 괴시2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을 했다.  (계속)

 

주 : 서성(徐?)  (디지털 한국학 자료)

1558(명종 1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으로, 해(?)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지평·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하였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겨울 연수와 하담 김시양선조님 영해 유배지 탐방>(끝)-관어대와 선조님들의 역사 자취

하담공의 제자였다는 권경(權璟)종택을 찾아 가기 위해 괴시1리의 도로 옆에서 길을 물으니 “아하  관어대요” 하면서 친절히 길을 안내한다. 이 <관어대>는 <하담문집> 속에 여러 수의 시 제목으로 등장했던 지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유배지인 원구리의 서재골에서 불과 2-30리밖에 되지 않는 이곳으로 하담공께서 자주 왔단 말인가! 그리고 제자인 권경이 있는 이곳 괴시2리에 왔다가 관어대(觀漁臺)에서 자주 시를 지으신 것일까? 관어대란 아마도 높고 바다가 보이는 경치 좋은 곳인 것 같은데 길 안내자는 동네 이름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의문과 호기심을 가득 안고 괴시2리로 들어가 동네 어른에게 권경(대은공) 종택과 권박씨의 집을 물었다. 어른은 산 아래 대나무숲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저기인데 쥔은 포항에 갔는데---, 대신 저기 저 집에 가서 물어보소”한다. 동네 사람들의 움직임을 서로가 다 알고 있다.

 

가리키는 곳을 찾으니 權壽雲이란 문패가 걸려 있는 현대식 단층기와로 잘 지어진 집이다. 마당엔 잔디가 깔리고 한쪽 담을 연하여 현대식 정자가 지어져 있고 그 옆엔 온실을 붙여 만들어 몇몇 꽃나무들이 겨울을 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5평 넓이의 아담하고 예쁜 연못이 있다. 연못 속엔 잉어 10여 마리가 유유히 유영하고 있다. 부러움을 뒤로 하고 안채 문을 두드리니 70여 세의 사모님이 나오신다. 권선생님은 강구에 나가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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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운님 댁 내의 아름다운 모습>

 

찾은 목적을 간단히 말하니 태도가 바뀌며 예를 다하신다. 권경 종택을 물으니 금새 밖으로 나와 안내해 주신다. 종택에는 나이 80도 넘은 듯한 여인들만 계신다. 그런데 방문 목적을 대충 설명하자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며 예를 차리시느라 어쩔 줄을 모른다. 당호는 현판에 <醉翁世廬>(취옹세려-술취한 늙은이가 사는 초가집)라고 적혀있다. 몇 장의 사진만을 찍고 나오며 종택 앞의 별당으로 가니 현판에는 <晩松堂>이라 적혀 있다. 사모님께 관어대를 물으니 이 만송당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이곳은 아닌 듯싶다. 종택 뒤의 산(상대산0183.3m) 위에 무언가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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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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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 해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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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 종택과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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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 종택 앞의 만송당. 정자처럼 지어졌다>

 

다시 권수운선생님 댁으로 돌아와 이 정도에서 포기하고 돌아갈 양으로 인사하고 떠나려하니 권선생님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 준다. 몇 가지만 여쭤볼 생각으로 전화를 거니 반갑게 맞으며 집에 다 왔다고 잠깐만 기다리란다. 좀 있으려니 좋은 승용차 한 대가 마을로 들어온다. 선생님을 따라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공손히 절하며 통성명한다.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하니 그렇게 반가워하실 수가 없다. 먼저 자신을 소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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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운 선생님> (77세)

 

권선생은 안동권씨 이곳 영덕종친회장이시며 울산에서 상선회사를 운영하시고 계셨는데 이곳은 고향이며 이 집은 별장처럼 쓰고 있단다. 그리고는 나에게 몇 권의 유인물을 주신다. 1995년 이곳 안동권씨 문중회(상대회)에서 주관한 <청소년 수련회 자료>였다. 문중회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문중역사 교육활동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부러웠고 동시에 부끄러운 우리 자신을 생각했다. 그나마 우리 안사연의 여름캠프를 생각하고 다소 위안을 했다. 이 소책자에는 이곳 역사가 잘 설명돼 있었다. 이곳은 조선 초 1460년 이후 안동권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안동권씨 副正公 權通義의 8세손인 五峯 權策이 처음 입향했다고 한다. 공은 단종복위에 참여했던 從父 金自愼 등으로 인해 온 종족이 극형을 당할 때 단종의 외족 근친으로서는 유일하게 생존한 자로서 13세의 나이에 이곳 영해로 유배왔다가 단양신씨의 보호로 살아남아 신씨의 사위가 된 이후 대대로 그 후손이 살아오며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중 臺隱 權璟(1604-1666)은 이 지역 성리학을 일으킨 대표자로 고장의 명성과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친 은둔처사형의 유학자라 한다. 그의 행장을 보면, 유년시절 재주와 성품이 뛰어나 하담 김시양이 제자를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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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회에서 실시한 청소년 교육자료와 하담선조 관련내용 >

 

그런데 나는 다음 내용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 <공(권경)의 학문과 덕행이 나날이 발전하자 스승 하담이 극찬하며 『이 사람은 재상의 재목이라 사위를 삼을 만하다』며 그의 질녀와 혼인을 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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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선조의 질녀라면 나의 13대조이신 감사공(휘 素)의 누이가 아니신가!

 

아니! 바로 이곳에 나의 선조님이 계셨단 말인가? 그럼 아까 보았던 그 권경의 집이 나의 13대조 왕고모님께서 멀리 충청도 괴산에서 이곳으로 시집와서 사셨던 곳이란 말인가! 놀랍고 또 놀라웠으며 큰 충격이었다. 권선생님은 또 한 권의 책을 내놓는다. 권경의 문집인 <臺隱先祖文集> 복사본이다. 얼른 공의 행장을 폈다.

 

거기엔 이렇게 또렷이 적혀 있었다. <妻以 贈兵曹參判 行陽德縣監時說之女 卽荷潭公之兄子也>(처는 증 병조참판이며 행 양덕현감인 시열의 따님이신데 즉 하담공 형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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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문집>(복사본)

 

陽德公(휘 時說)은 나의 14대조가 아니시던가. 보고 또 보았다. 이곳에 온 것은 나의 자력으로 왔다기 보다는 아마도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끌어온 것 같았다. 갑자기 무서워지기조차 하다. 원구리에서부터 아무런 소득 없이 허탕 칠 것만 같던 일들이 곧 순순히 풀어지며 나에게 더 큰 감동을 주게 한다. 나에게 벌어진 오늘의 이 일들은 과연 누구의 命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신화 같은 우연의 연속이요 괴이한 현실의 사건이란 말인가. 소름이 끼쳤다.

문집을 좀 더 살피니 8수의 시와 2개의 書가 발견된다.

 

 1. <金方伯臺下設宴韻. --方伯名徽 荷潭先生子 時按本道> : 김방백과 대(관어대) 아래에서 잔치를 벌이고 쓴 시운--방백의 이름은 휘(호 사휴제, 하담공의 차자. 1665년(현종6)에 경상도 관찰사 역임. 이조판서역임)요 하담 선생의 자이다. 이 때(1665년) 본도(경상도) 관찰사이다.

 2. <送方伯向內延> : 방백은 사휴제공 휘로 추정

 3. <臨瀛館贈知府金知白素> : 임영관에서 부사 김지백 소(감사공 휘 素. 자는 知白)에게 주는 시. 감사공은 권경의 처남이 된다. 감사공은 강릉, 영흥, 종 성, 장단부사를 지낸 바 있음

 4. <次知白韻> : 지백의 시를 차운하여. 지백은 감사공 素

 5. <贈知白> : 지백(휘 素)에게 주는 시

 6. <醉贈知白> : 취한 지백(휘 素)에게 주는 시

 7. <別知白> : 지백(휘 素)을 송별하며

 8. <謝知白中路送酒> : 지백에게 사례하여 도로에서 술을 보내며

 9. 書 <上荷潭金先生--時讓> : 하담김선생에게 올리는 글

10. 書 <答荷潭先生> : 하담선생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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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문집 내부 목차-선조님관련 자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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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보. 시열-소-구만 의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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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보. 시열의 3자 영 다음에 첫사위로 권경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하담공께서 이곳에서 쓰신 <관어대>관련 시를 생각해 본다.

관어대(觀魚臺)를 찾았다가 겸하여 권사현(權士賢)을 방문한 운에 따라 (訪觀魚臺兼訪權士賢次韻)

 

경치를 보았더니 땅이라고는 없어                       勝境臨無地

높은 대(臺)는 모두 태고적 공허                         高臺切太虛

내 몸은 마치 그물 안에 있는 듯                          此身猶在網

물가에 가니 헤엄치는 물고기가 부러워…             臨水愧游魚

  주: 관어대(觀魚臺)…경북 영덕에 있던 누각(?)

       권사현(權士賢)...권경의 부친인 醉翁 권의협(權宜협)을 말하는 듯(?)

 

관어대(觀魚臺)

 

일본의 서쪽 자해(紫海) 동쪽                                日本之西紫海東

높은 다락 아득한 허공에 기대어                          高臺??倚虛空

인어가 사는 신기루 삼천계(三千界)를 널리 삼키고  平呑鮫蜃三千界

멀리 큰 새가 구만리를 날아가는 바람을 받네         遙納鯤鵬九萬風

무성한 풀은 푸르게 이어져 넓은 들판에 잠기고      芳草綠連平野沒

석양의 붉은 빛 드리운 안개와 이어져                   夕陽紅接落霞通

뱃머리에서 교룡(蛟龍)의 피리소리 어떻게 들을 수 있다면 船頭那得蛟龍笛

부는 소리 풍이(馮夷)가 있는 땅 밑의 궁전과 통하련만. 吹徹馮夷地底宮

  ?주 : 자해(紫海)…경상북도 영해의 옛 이름.

        풍이(馮夷)…물의 신(神) 음양을 관장하는 신

 

권선생님은 이 <대은문집>은 현재 국사편찬위원을 지낸 영해에 사는 문중인인 권호기란 분이 국역 발간 준비중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에게 <하담문집> 송부를 부탁한다. 곧 우송하겠음을 약속드렸다. 갑자기 아주 가까운 지친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관어대에 대해 물으니 이곳의 관어대는 어떤 누각 이름이 아니고 마을 지명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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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선생님 댁 입구, 멀리 권경종택, 뒷산이 상대산. 이 산 뒤가 바로 대진 해수욕장. 이 산 때문에 이곳을 관어대라 부르게 되었다 함>

권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 다시 해변을 따라 북으로 가다가 대진 해수욕장에서 잠시 멈춰 서서 멀리 관어대 뒷산인 상대산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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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해수욕장에서 관광지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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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해수욕장에서 바라 본 관어대 뒤의 상대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저곳을 오고 갔던 400년 전의 선조님들과 오늘의 나를 교차시켜 생각해본다. 그리고 우리 인간 삶에서 역사란 무슨 의미를 지니며, 또 과거와 현재는 무엇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그리고 오늘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도 ----  (끝)

 

 19. 하담 김시양 선조님의 조카 사위인 권경의 <대은문집> 경매 낙찰물 소개 (2005. 1. 16. 항용(제) 소개)

   1) 경매일시 : 2005. 3. 16. 오후 9시 15분

   2) 경매처 : 코베이

   3) 경매자 : 김항용

   4) 경매물 : 원본

   5) 권경 : 하담 김시양의 형님인 양덕공(휘 時說)의 사위임

   6) 사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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