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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약봉유고((藥峯遺稿-서성 저) 속의 하담공 만사와 제문 (2005. 5. 23. 항용(제) 제공) 출전 : 藥峯遺稿卷四 附錄 附錄 가) 挽詞[判書金時讓]063_216c 壽過稀年四。官尊政宰三。人間全五福。垂後享多男。海上曾同病。閒中幾劇談。平生知己淚。拭盡我何堪
나) 祭文[兵曹判書金時讓]063_205d
嗚呼痛哉。休休有容之量。斷斷無他之忠。長身山立之姿。激懦敦薄之風。已矣吾不得以復見之矣。憂國而傷時。後私而先公。拔刃則目牛無全。遇事則觸處皆通。官崇兩府。卑以自牧。政成六路。不以爲功。此皆今世之所未聞。當求之於古人中也。年高而精力不衰。裕垂而蘭桂成叢。每勞汾陽之頷。愈鞠潞公之躬。洪範九五。擧集一身。享其榮名。七十餘歲。一時無妄之禍。不過爲浮雲之點空。此乃古來之所罕有。而吾所獨見於公者也。嗚呼痛哉。時讓幸同逐於長卿。晩托知於了翁。不以後生藐之。許以氣味相同。吹噓奘進。間我儱侗。驥尾靑雲。皆公之賜。一酌淸醴。安能瀉我之長恫。嗚呼痛哉。
*서성(徐성)
1558(명종 1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으로, 해(嶰)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지평·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하였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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