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학공파(익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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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p02.png 15) 김인갑(金仁甲)

              1534년(중종29). 2. 17--1594년(선조27). 5. 9.

 

자는 선초(善初). 충북 괴산읍 전법리 출생. 어려서 부친(領相公 諱 錫)의 작고로 나이 19세에 비로소 학문 시작. 1568(선조1. 35세)에 증광 진사(進士-제2등 제5인) 급제. 1578(선조11)년에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從六品), 제용감 직장(濟用監 直長)을 거쳐 1586년(선조19)에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영산현감(永山縣監)이 되었고, 1590년(선조23. 57세)에 비안현감(比安縣監)이 되었다.

1592년(선조25.59세) 임진왜란 발발 후 괴산 향가(鄕家)로 돌아와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발병하여 壽 61세로 몰(歿)하였다.

 

후에 자(子) 시양(時讓:忠翼公. 호-荷潭)의 귀(貴)로 이조판서 지의금부사(吏曹判書 知義禁府事)에 추증(公 歿後 33년뒤인 1627년) 되었으며, 9년 뒤(1636년. 인조 14)에 子 시양(時讓)이 청백리에 녹선되자 다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從一品)으로추증되었다.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자좌 선영하에 있다.

 

<2005. 4. 24. 신 묘비 및 석물 건립 소개> (2005. 5. 1.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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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전경-묘역 좌측에 신묘비, 앞에 양마석과 장명등이 새로 건립되었다>

 

<묘역 석물 내용 제원>

번호

종류

수량

가로×세로×높이 cm

비고

1

묘비(구)

1

52×15×150

둥근 민머리. 민좌대

1627년(金時讓 撰, 건립)

2

묘비(신)

1

대자

2005. 4. 24 신설

3

상석

2

153×25

 1627년 건립

4

동자석

2

90

 1627년 건립

5

문관석

2

160

 1627년 건립

6

양마석(신)

2

 

 2005. 4. 24. 신설

7

망주석

2

153

 1627년 건립

8

장명등(신)

1

 

 2005. 4. 24. 신설

9

 

 

 

 

 

 <묘비문 소개>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仁甲이고 字는 善初이시다. 安東金은 우리나라에서 이름 난 姓氏이다. 中始祖는 上洛郡開國公이신 諡號 忠烈 諱 方慶이신데 實은 新羅 敬順王의 後孫이시다. 忠烈公은 高麗朝에 큰 功勳이 있어 安東을 食邑으로 받으셨으며 子孫들은 이로 인하여 貫鄕을 삼게 되었는데 公은 忠烈公의 十一代孫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 諱 縝, 寶文閣直提學 諱 益達, 左司諫 諱 顧, 司憲府監察 諱 孟廉을 지나 典農寺主簿 諱 哲鈞은 讓寧大君의 사위로 公의 高祖시고, 贈左承旨이신 諱 壽亨은 公의 曾祖이시다. 祖 諱 彦默은 贈吏曹參判이시고, 父 諱 錫은 成均進士로서 학문 기개와 절개를 崇尙하여 장래가 촉망됐으나 己卯士禍(一五一九年.中宗一四)로 槐山에 은둔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는데 子 悌甲의 推恩으로 議政府領議政에 追贈되셨으며, 母 贈貞敬夫人 幸州奇氏는 持平 贈 都承旨 逈의 따님으로 큰 婦德을 갖추셨다.

 

公은 一五三四年(中宗二九) 二月 十七日 忠北 槐山郡 文光面 田法里에서 領相公의 五子 중 季子로 出生하셨다. 生後 두 달 만에 父親喪을 당하여 어려서는 배울 시기를 놓치고 사냥만 즐기다가 18세에 비로소 독서의 중요성을 스스로 뼈저리게 깨우치고 修學에 힘쓴 지 얼마 안 되어 곧 學問이 크게 진보하니 주위 벗들로부터 크게 追崇받게 되셨다.

 

三十五歲(一五六八.宣祖一)에 進士에 오르니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나셨으며, 四十五歲(一五七八.宣祖十一)에는 吏曹判書 李後白의 추천으로 長水道 察訪에 제수되셨다가 濟用監 直長에 오르셨고, 五十三歲(一五八六.宣祖一九)에 軍資監 主簿로 선발되셨다가 永山縣監이 되셨다. 永山은 빈약하고 피폐한 고을이었는데 公은 모든 일들을 무마하고 모름지기 마땅한 道理로써 다스리니 吏屬들은 삼가고 百姓들은 公을 사모하게 되었다.

 

三年만인 五十五歲(一五八八.宣祖二一)에 職이 바뀌어 돌아오셨다가 五十七歲(一五九0.宣祖二三)에는 比安縣監에 기용되어 나가셨는데 三年만인 五十九歲(一五九二.宣祖二五)에 壬辰年 十二月에 倭亂을 만나 사건에 휘말리어 사직한 후 白衣從軍하셨으며 槐山 先塋 아래로 돌아왔다가 病으로 一五九四年(宣祖二七) 五月 九日에 六十一歲로 別世하셨다.

 

贈貞敬夫人 南陽洪氏는 一五四一年(中宗三六) 一月 十八日에 出生하셨는데 漢城 庶尹 贈左承旨 以坤의 따님으로 兵曹判書 吉旼의 七代孫이시다. 治家함에 있어 婦道를 갖추고 극진히 하셨다. 壬辰亂을 만나자 木川으로 피난 가 계셨는데, 서울에 있는 자녀들은 각각 짐승처럼 흩어져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고, 公 또한 멀리 嶺南에 가 계셨기 때문에 夫人은 근심과 걱정으로 病을 얻으셨으며, 그 해 十二月 十四日 五十二歲로 別世하셨다. 子 時說 等이 奉喪하여 와서 槐山 西쪽에 임시 매장하였다가 一五九五年(宣祖二八) 겨울에 槐山 동쪽 開香山에 公과 함께 合葬하니 領相公의 묘소 아래이다. 公께서는 돌아가신 지 三十三年 後에 子 時讓의 推恩으로 吏曹判書知義禁府事에 追贈되셨다.

 

子로는 六男 三女를 두셨는데 一男 時認은 일찍 卒하였으며 進士 李彦의 女에게 장가들어 一女를 낳아 安脩에게 보냈고, 二男 時警은 일찍 卒했으며, 三男 佐郞 時訓은 府使 閔韺의 女에게 장가들어 一男 一女를 낳으니 子인 綉는 일찍 卒하고 女는 進士 朴漢英에게 보냈다. 四女는 縣監 趙應純에게 보냈고, 五男 時說은 武科하여 監正인 孫祿慶의 女에게 장가들어 三男 三女를 낳으니 子는 素와 繁이며 權璟 尹廷敏 安弘宇는 사위이고 縈은 어리다. 六女는 武科하여 郡守인 李守宗에게 보냈고, 七男 時詗은 宗室 完成君 秀英의 女에게 장가들어 一男을 낳으니 索各이다. 八女는 叅奉 金重祉에게 가서 一男 三女를 낳았다.

九男 時讓은 文科하여 지금 慶尙道 觀察使인데 郡守 李大遂의 女에게 장가들어 二男 三女를 낳으니, 자는 縠과 徽이며 女는 李道長에게 보냈고 그 나머지는 아직 行禮하지 못했다.  綉의 子 萬宗이 奉祀孫이다

嗚呼라 至極한 情은 가득하지만 文才가 없기로 다만 世系와 子孫만을 적고 文辭는 비우도다.

 

   檀紀 三九六0年(一六二七.仁祖五). 九月    

 

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時讓 謹撰

 

 後記

 

 아아! 贊成公의 墓碑를 세운지 三百七十八年이 지난 오늘에 이르니 風雨雪霜으로 인해 碑文은 심히 마멸되었도다. 또한 公께서 吏曹判書에 追贈된 後 九年만에 子이신 忠翼公 諱 時讓께서 淸白吏에 錄選됨에 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에 再追贈된 官職名도 바르게 새기지 못하고 十餘代를 개탄으로만 지내왔도다. 그런데 다행히 지난 一九九二年 比安公門中會가 구성되어 본격적인 爲先事業을 전개하기 시작한 以後 이제야 후손들의 微力을 모아 숙원사업인 贊成公의 墓碑와 石物을 다시 세우게 되었도다. 新 墓碑에는 忠翼公께서 撰하셨던 墓碑原文을 國譯하여 새겼고, 누락됐던 公의 追贈職과 그 외 여러 考證된 史實들을 添記하였다. 이로써 晩時之歎이나 後孫으로서 不孝의 痛恨을 덜게 됐음에 感泣할 따름이며, 벅찬 감격을 누르고 그 전말을 기록하여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들이 永久히 傳授되고 本 墓域이 子孫萬代 保存되며, 後孫들은 크게 繁盛함과 동시에 뚜렷한 民族精神과 崇祖睦族意識을 갖추고  民族의 棟樑으로 長成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八年(二00五年).  四月. 二十四日.  

 

    贊成公 十四代孫 泰燮 後記      謹記  

    贊成公 十五代孫 恒鏞 墓碑原文  謹譯

    贊成公 十四代傍孫 泰國          謹書   

    安東金氏 提學公派 比安公 門中會 會長 贊成公 十三代孫 斗應, 宗孫 容達 外 後孫 一同 謹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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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 행사후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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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남지와 그 내부에 실린 비안현 역대 현감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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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지(1987. 10. 의성군 간)와 내부의 비안공 기록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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